Collage (4)
서진이 유신을 데리고 지하 홀 밖으로 사라지자, 이변을 느낀 그녀의 동생이 즉각 빠른 걸음으로 나무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그림자 같은 탐정 겸 운전기사는 덤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지민과 승현은 갑자기 불어난 사람에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곁에서 가만히 서 있던 도슨트 은수의 시선까지 끌고 말았다. 언제나 무마하는 건 나무의 몫이었다.
"어디 갔어요?"
유선은 주어도 말하지 않고 대뜸 물었다. 생략해도 충분히 의사 전달이 되기는 한다.
"이아영 작가가 불러서. 갤러리로 갔습니다."
"부르다뇨?"
"친한 사이 같던데요. 같이 사진도 찍고."
유선은 잠시 나무를 노려보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선을 물렸다. 실로 미움받고 있는 처지군, 하고 나무는 생각했다.
나무 자신에게도 손윗형제는 있다. 몇 살 차이가 나는 누나다. 그녀는 자신과 다르게 가업을 착실하게 물려받았다. 프로 리그에서 노는 바둑 기사가 된 지 십 년, 아니 이십 년이 다 되어 간다.
가끔은 그녀를 따라 바둑을 계속한 미래를 생각하곤 한다. 잘 차려입고 반상 앞에 앉아 무한대의 수에서 최선을 골라내는 일에 몰두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상상 속의 자신은 좋지 않은 안색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나무는 언제나 의식적으로 상상을 끊어냈다.
그 세계의 누나도 자신과 닮지 않은 딸을 가졌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발상이 특이한 사람이라고."
지민을 따라 손에 붉은 샴페인 잔을 들고 있던 승현이 말했다. 지민에게 한 말인 줄만 알았는데, 그녀의 시선은 명확히도 이쪽을 향하고 있다. 나무는 눈을 두 번 껌뻑이고 나서야 대답을 고를 수 있었다.
"유신 씨가요?"
유신이, 라고 말할 뻔한 것을 겨우 틀어냈다. 바로 옆에서 눈을 치켜뜨고 있는 유선을 고려한 처사다. 승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귓바퀴의 새빨간 인공 와우가 시선을 끌었다.
"최근에는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까, 꼭 만나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몸을 지민의 쪽으로 틀었다. 대화를 더 잇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다. 정작 그녀의 관심을 받은 지민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행동을 다시 무마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아, 아하하, 저도 아영이한테 들어본 적 있어요. 유신 씨라는 분이 계시는데, 가끔 자리가 생기면 얼굴을 뵌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마다 대화를 나누면 재밌다고, 영감이 된다고......"
나무는 그제야 이들의 관계가 이해되는 듯했다. 뿔테안경을 쓴 지민은 이아영과도, 승현과도 막역한 사이일 것이다. 승현 역시 아영과 메시지를 주고 받을 정도의 친밀한 사이일 것이고. 셋으로 이루어진 그룹에서 아영이 어떤 포지션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승현이라는 반삭 예술가의 위험한 사회성을 지민이 기겁을 하며 보완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가요? 그 친구도 어찌 보면 디자인을 하긴 합니다."
유신은 3D 그래픽 디자이너다. 남이 만든 원화를 토대로 3D 그래픽을 만들기도 하고, 자신의 독창성을 십분 발휘한 오리지널 3D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실은, 요즘은 라이브 2D의 리깅을 더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면에서는 디자인보단 단순 노동의 비율이 좀 더 높다.
"아, 그런가요? 어떤 디자인을 하시나요?"
"3D 그래픽이요. 저는 일러스트를 그려서, 게임 프로젝트에서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지민과 나무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승현은 흥미가 없다는 듯이 벽가의 테이블을 향해 발을 돌렸다. 몇 잔 남지 않은 붉은 무알콜 샴페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게임 프로젝트?"
그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유선이 물었다. 동현은 어느새 승현을 따라 테이블 앞에서 음료를 고르고 있었다. 붉은색 음료 두 잔을 들고 돌아오는 모습을 흘기면서, 나무는 대답했다.
"네. 지금은 서비스를 종료한 모바일 게임이요."
"......한참 전부터 만났다는 거네?"
유선이 중얼댔다. 동현에게서 잔을 하나 받기 위해 팔을 쭉 뻗는다. 아니요, 변호사 님의 생각보다 모바일 게임은 수명이 짧아서요, 그렇게까지 오래 전부터 만난 건 아닙니다, 라는 대답을 단숨에 떠올려 입밖으로 내려고 했을 때였다.
"왁!"
동현의 몸이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곧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괴성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친 나무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동현이 손에 들고 있었던 샴페인 잔 두 개가 깔끔하게 박살나 있었다. 유선의 흰 와이셔츠에 음료가 엎어져 붉은 물이 든 건 덤이다.
지민은 앗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승현은 미간을 살짝 좁히곤 참상을 내려다보았다. 당황한 동현이 헉 하고 숨을 삼키며 바닥에서 허둥지둥 일어나려고 하자,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 샴페인 잔 옆에 구비되어 있던 티슈를 가져온 은수가 그를 막아세웠다.
"유리 파편이 있는 바닥을 손으로 짚으면 위험합니다. 제 손 잡고 일어나세요."
음료가 얼굴에 엎어진 것도 아닌데 뺨이 벌개진 동현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은수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셔츠 소맷부리에만 붉은 물이 든 게 용하다.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선 동현은 은수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하다가, 음료를 뒤집어 쓴 자신의 고용주를 보고 이젠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아, 아, 아, 미, 미...... 미안! 이, 이걸 어떻게......"
나무는 그가 뺨이라도 맞는 게 아닌가 싶었다.
발치에서 짤각짤각하며 은수가 깨진 유리조각을 줍는 소리가 났다. 실례지만 왼발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하나를 밟고 계셔서요. 허리를 굽힌 도슨트가 밑에서 그러기에 나무는 순순히 왼발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나무의 예상과 다르게, 유선은 의외로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깻죽지부터 명치까지를 붉게 물들인 채 몇 번 심호흡을 하다가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한 것이다. 고용주의 분노에 압도되어 눈치만 보다가 유리조각도 하나 줍지 못한 동현은 은수를 향해 재차 고개를 숙이다가 유선을 따라 홀을 떠나버렸다.
이로써 홀로 남았군, 하고 나무는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유리조각은 은수가 모두 주워버리고 말았다. 바닥에 흩뿌려진 붉은 샴페인이라도 티슈로 닦을까. 나무가 고민하고 있으니 그마저 은수가 닦아내기 시작하기에 그는 봉사를 단념했다.
"왜 넘어졌지?"
침묵 속에서 승현이 뜬금없이 물었다. 샴페인 잔을 두 손으로 붙잡고만 있던 지민이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바닥, 안 미끄러운데."
승현의 말대로였다. 이곳의 바닥재는 갤러리와 같은 대리석이다. 물기가 있다면야 미끄러울 수 있겠지만, 나무가 보기에 바닥에 대걸레질의 흔적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리셉션을 위해 이곳으로 내려올 때까지 하늘에 구름은 끼었을언정 비는 내리지 않았으니, 신발 밑창에 묻은 빗물이 문제가 되었을 이유도 없다.
"발을 헛디디셨나 보지."
지민이 입을 비죽 내밀면서 상식적인 반론을 했다. 승현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녀가 든 샴페인 잔으로 손을 뻗었다. 동현의 사고 이래 잔에 한 번도 입을 대지 않고 있던 지민은, 더는 음료를 마실 생각이 없는지 친구 예술가에게 잔을 건넸다. 승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붉은 음료를 마신다.
"글쎄."
한 박자도 아닌 세 박자가 늦은 승현의 대답에 지민은 반응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로비 창 밖으로 험악한 수준의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창문을 때려댄다.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웠나 싶을 정도다. 왜 지하에서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지하에 뚫어놓은 창문 위로 툭 튀어나온 절벽 끄트머리가 차양을 대신한 걸까. 그게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유선의 눈치를 보던 동현은 문득 생각했다.
"옷 가져와."
유선이 명령했다. 이쪽을 보는 시선에 노기가 서려있다. 동현은 한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한 오싹함을 느낀다.
"어, 어어, 그래야지. 캐리어에, 있지?"
원래부터 부산에 1박을 묵을 생각으로 온 유선은 작은 캐리어에 옷가지를 몇 벌 챙겨왔다. 차 트렁크에 실려있으니 빗속을 뚫고 휭하니 달려가서 꺼내오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그녀의 화를 풀어주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겠지만... 동현은 제 등허리에 꽂히는 장대 같은 빗줄기의 싸늘함을 버티며 생각했다.
트렁크를 열고 캐리어를 열어 목표한 와이셔츠를 손에 넣었다. 구겨지지 않게, 빗물에 젖지 않게 운반하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구십 퍼센트 정도의 보송함을 유지한 셔츠를 겨우 유선에게 건네자, 로비 창가의 소파에 앉아있던 그녀는 동현을 노려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채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체크인을 위한 데스크에도 직원 한 명 없다.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아무래도 이곳에는 탈의를 위한 공간이 부재한 것 같았다. 이를 테면, 화장실 같은 것이.
두 사람은 별 수 없이 갤러리로 향했다. 아까 건너왔던 연결 통로를 다시 지난다. 통유리로 만들어진 천장을 억수 같은 비가 사정없이 쳐대고 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넓게 뚫린 창 너머로 주차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또 나란히 선 둔덕 두 개가 보인다. 몇 시간 전에 저 둔덕의 사잇길로 들어온 것이다. 저곳 외에는 밖으로 통하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
동현이 말을 건넸다. 앞서던 유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좀 더 둔탁한 구둣발 소리만이 통로 안쪽에 울려퍼졌다.
"와, 저기 나무들 휘어진 것 좀 봐. 부러지는 거 아니야?"
동현이 한 번 더 말을 건넸다. 이번엔 유선이 발을 턱 멈췄다. 고개만을 뒤로 돌려 동현을 노려본다.
"입 다물고 따라와. 너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으니까."
동현은 걸음을 재개한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길지 않은 통로가 끝나자 한순간 빗소리로 먹먹했던 귀가 편안해진다. 안채의 로비와 같이, 아무도 없는 갤러리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통로에서와 다르게 흐릿하게 들려오는 빗소리는 은은한 생활 소음처럼 느껴진다. 1층의 한 벽면이 통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이 정도의 흡음이 가능하다니.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 거야."
창 너머로 폭우 속의 파도가 보이는, 어쩌면 낭만적이게도 느껴지는 공간에서 유선은 가차없는 말을 내뱉었다. 동현이 꼬리를 내리고 그녀와 함께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돌연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1층과 2층을 잇는 경사로 쪽이다.
동현은 고개를 들어 인기척의 원인을 바라본다.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특징적인 도슨트 박서진이 경사로 중간 즈음에 서 있었다. 난간 밖으로 상반신을 쭉 빼선 미아처럼 갤러리를 이리저리 횡단하는 두 사람을 내려다 보고 있다.
"차, 찾는 게, 있으실까요......"
목소리가 작아 한 번 듣는 거로는 문장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다. 어느새 고개를 든 유선이 서진을 향해 소리친다.
"예?"
"차, 찿는......"
여전히 목소리가 작은 서진은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빠른 걸음으로 경사로를 내려왔다. 두 손을 불안하게 얽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한다. 유선의 검붉어진 와이셔츠를 보고 처진 눈을 둥그렇게 뜨기도 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신가요?"
"샴페인을 쏟았어요.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여기 화장실은 대체 어딥니까?"
유선이 군더더기 없는 말투로 물었다. 날카롭고 또렷한, 재판장에서 반론을 할 때나 쓰는 말씨다. 서진은 어쩐지 주눅이 든 모습으로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이 동현에게는 어딘가 익숙하게 비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화, 화장실이라면, 저...... 3층 레스토랑에, 있습니다."
덩달아 그에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던 유선은 그를 따라 몇 발짝 앞으로 다가선다. 서진은 이젠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 되어서, 대놓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포식자를 앞에 둔 시궁쥐 같은 모양새다. 등 뒤로 펼쳐진 어두운 하늘이 그의 불행한 분위기를 더더욱 가중시킨다.
"여기서 뭐 하고 계셨습니까?"
직원이 손님에게 할 법한 질문을 유선은 도슨트 서진에게 던졌다. 불쌍한 표정의 도슨트는, 아, 아아, 하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경사로를 향해 몸을 돌리곤 대답했다.
"유, 유신 님을 작가의 방으로 안내해드리고, 작품 정리를, 좀......"
"작품 정리요?"
"화장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서진이 재빠른 걸음으로 경사로를 올랐다. 3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라야만 하는 경사로를 터벅터벅 걷는다. 경사로 왼편으로 보이는 통창 너머의 하늘이 이제는 흐리다 못해 검어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서진은 두 사람에게서 조금 거리를 벌린 채 앞을 나아가고 있다. 소극적인 성격에 비해 발은 제법 빠르다.
"저 분 수상하지 않아?"
유선의 뒤에 착 붙어 경사로를 오르던 동현이 소곤소곤 물었다. 붉게 물든 셔츠에서 희미하게 망고 향이 났다.
"난 그 작가 생각나서 짜증만 나는데."
"작가?"
동현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유선의 인간관계에 작가라는 인종이 있었던가.
"윤필규랑 같이 사는 인간 있잖아."
동현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인다. 확실히, 억울해 보이는 얼굴도 작은 체격도, 소심한 성격도 전부 그를 닮았다. 방금 전에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완전히 깨닫고야 말았다.
"아, 맞다...... 정말 닮았어. 응, 응."
"형제인가 싶었다니까."
"근데, 저 분은 서 씨가 아니라 박 씨니까....."
"사촌이라든가."
앞서 가던 서진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지 '비가 갈수록 많이 오네요' '다들 잘 돌아가셔야 할 텐데' 등의 의미 없는 말을 중언부언 뱉었다.
2층에 도달하자 흰 천으로 덮인 거대한 조형물이 보였다. 그 뒤에 장막처럼 내려온 폴딩 도어 너머에 있는 것이 작가의 방이라고 서진이 설명했다. 1층에서는 통창이 있던 위치다. 2층은 1층과 다르게 창이랄 것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가 뻥 뚫린 1층보다는 아늑한 감이 있다.
"진유신 씨는 아직도 이 안에 계신 겁니까?"
유선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듯이 물었다. 서진은 흘긋 폴딩 도어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작게 갸웃했다.
"아, 아마 그러실 겁니다...... 전, 그, 유신 님을 안내해드리고 줄곧 2층에서, 작품 정리를 했으니까요......"
밖으로 나오시는 건 못 봤습니다, 하고 서진이 말을 이었다. 폴딩 도어 왼편에 난 출입용 문에는 작게 반투명한 창이 나 있었다. 내부는 당연히 보이지 않지만, 창이 밝은 것을 보아 작가의 방 안쪽의 조명이 켜져있는 것은 확실했다.
2층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3층과 옥상으로 이어진 엘리베이터다. 1층이 없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보고 생경함을 느끼고 있으니 빠르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불이 켜진 레스토랑에서 쉐프들로 추정되는 인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일을 하거나 잠시의 휴식을 즐기거나 하고 있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세 사람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화장실을 쓰러 왔다는 서진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의 업무로 되돌아갔다.
"저, 화장실은 이쪽입니다......"
서진이 엘리베이터 바로 옆을 가리켰다. 남녀로 나뉜 화장실이 있었다. 유선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 여자화장실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홀로 남은 동현은 레스토랑의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릴까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쉐프들의 눈치가 보여 그저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며 서 있기로 했다.
전체적으로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법한 모던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었다.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테이블 사이 간격이 널찍하여 바로 옆 테이블이라도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주방은 오픈 키친으로, 어떤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쉐프가 요리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반대로 말하자면 쉐프는 주방 안에서 모든 테이블을 둘러볼 수 있다는 의미다.
"저......"
레스토랑을 휘적휘적 둘러보고 있으니 서진이 두 손을 꼬았다가 풀었다가 하며 동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 역시 안내역으로서 유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잔을...... 깨뜨리셨습니까?"
"예?"
동현이 무심코 되물었다. 상상도 못한 질문이었다.
"어, 네,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아셨어요?"
"네? 아, 아뇨, 어떻게 안 게, 아니라......"
서진이 뒤로 주춤주춤 몇 걸음을 물러났다. 이제는 꼬았던 손을 풀어 가느다란 금테 안경을 밀어올린다. 시선이 불안하게 떨리는 모습을 동현은 캐치한다.
"그게, 샴페인을, 쏟으셨다고 해서...... 잔을 떨어뜨리거나, 깨뜨리거나, 하셨으면 레스토랑 쪽에 미리 얘기를, 해 드리려고......"
"아아, 네."
뭐야, 그런 거였구나. 사립 탐정이 단숨에 경계심을 풀었다.
"실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깨뜨렸어요."
"두, 두 개요?"
서진이 입가를 미묘하게 비틀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는 기묘한 각도다.
"제가 샴페인 두 잔을 들고 걸어가다가 넘어졌거든요. 아니, 발을 헛디딘 건 진짜 오랜만인데. 하필이면 이런 데서 다 넘어지고......"
"아, 아아...... 놀라셨겠습니다......"
"거기 바닥에 턱이 있었나? 아닌데......"
동현이 입가를 비뚜름하게 하며 고민하던 사이 유선이 빠른 환복을 마치고 화장실에서 걸어나왔다. 붉은 흔적은 커녕 주름 하나 없는 깔끔한 셔츠를 걸친 모습을 보니 혼란했던 동현의 마음도 한층 가라앉는 듯했다.
"가자."
더럽혀진 셔츠를 한 손에 든 유선이 명령했다. 동현은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랐지만, 서진은 잔을 깨뜨린 걸 레스토랑 측에 이야기하고 가겠다며 두 사람을 먼저 떠나보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향했다. 짧은 하강이 끝나고 1층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타기 위해 2층을 횡단하고 있으니 작가의 방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유신이 그곳에서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아영이나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유신에게로 다가갔다. 왜인지 조금 피곤한 기색이던 유신의 얼굴에 놀라움이 퍼져나갔다. 유선의 손에 들린 셔츠를 보고는 더더욱 놀란 표정이 되고야 만다.
"어머, 어머...... 둘이서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데, 언니."
"옷에 음료수를 흘려서 갈아입으러 왔습니다."
"유선이가 음료수도 흘릴 줄 아는 귀여운 애던가?"
"언니!"
"아, 아뇨. 제가 잔을 들고 있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하하하......"
"오 탐정, 일부러 넘어진 거 아니야?"
"아, 아닙니다......"
작가의 방에서 누군가 더 나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함께 경사로를 내려간다. 여전히 우중충한 하늘이 경사로 오른편의 통창을 꽉 메우고 있었다.
"저 작가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어?"
유선이 물었다. 유신은 심각한 창 밖 풍경을 올려다보며 경사로를 걷다가, 고개만을 슬쩍 돌려 동생을 돌아보았다.
"그냥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했지."
"그냥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뭔데?"
"유선이 너도 곧잘 하는 거."
"언니."
유신은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하는 얘기들이 다 똑같지 뭐. 요즘은 뭐 하고 지내냐, 만나는 사람은 없냐. 예술가여도 남한테 궁금한 건 보통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나 봐."
"겨우 그런 얘기 하려고 부른 거라고?"
유선이 불만스러운 어투로 툴툴댔다.
"조금만 있으면 전시가 시작되니까 지하 홀로 돌아갈 여유가 없다 그러더라고."
"언니,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뭘까?"
"오늘 그 사람이랑 같이 왔지?"
갑작스레 오른편의 창이 번쩍 빛났다. 경사로를 내려가는 세 사람의 윤곽이 순간 뚜렷해진다. 짧은 침묵. 아래로 향하는 경사로를 걷는 발소리만이 어렴풋하게 들리다가, 우르릉하며 천둥이 목소리를 냈다. 번개와 천둥 사이의 시간을 재면 번개가 친 장소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동현은 숨막히는 침묵에 압도되어 초를 세기는 커녕 제 발이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 사람?"
유신이 돌렸던 고개를 앞으로 하고 말했다.
"소나무 씨."
"여기 와서 만났다니까 그러네."
"주차장에 언니 차가 없던데? 그 눈에 띄는 샛노란 페라리 말이야."
"유신아, 난 너처럼 비서 분이 없어서 부산까지 차를 끌고 오진 못해."
"그럼 어떻게 여기까지 캐리어를 끌고 왔는데?"
"기차역에서 내려서, 택시 타고 왔지. 그나저나 내 캐리어는 언제 봤어?"
"......언니가 혼자 오면서 그 큰 캐리어를 들고 왔다고?"
"1박 할 짐이거든. 부산까지 내려왔는데 하루는 자고 가야 마음이 편하지~"
"1박?!"
유선의 목소리가 뒤집힘과 동시에 두 번째 번개가 번쩍였다. 유신과 나무의 관계를 겉핥기로나마 알고 있는 동현은 두 사람이 함께 부산으로 내려오는 게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감상을 아무 것도 모르는 유선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유선아, 그럼 너는 오늘 바로 올라가게?"
동생의 비명에도 아랑곳않고 유신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동현과 유선 역시 부산 시내의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었던 것이다. 남녀관계의 의심에 있어서는, 일단은 혼자 왔다고 잡아떼는 유신보다는 둘이 함께 온 게 명확한 유선의 경우가 상황이 더욱 안 좋기는 하다.
"......아니."
"어디 묵는데?"
유선이 시내의 유명 호텔의 이름을 댔다. 동현은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다.
"나랑은 다른 곳이네. 거기 야외 수영장이 정말 유명한데...... 날씨가 이래서 어쩌니."
유신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자신이 묵는 숙소의 이름은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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