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 main

Collage (3)

K=Potassium by KPota
3
0
0

갤러리 헴의 숙박 시설 안채는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었다. 갤러리 본관에서 통로를 따라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건 데스크와 소파 세트가 놓인 1층 로비. 이곳 역시 한쪽 벽이 통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절벽 너머의 바다를 갤러리 본관과는 다른 각도에서 관람할 수 있다. 2층과 3층은 객실 플로어다. 한 층 당 6개의 객실이 준비되어 있다. 즉 객실은 총 열두 개.

지하 1층은 한 층이 전부 하나의 홀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홀로, 오늘의 리셉션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지하에 걸맞지 않는 자연광이 방문객들을 반긴다. 지하인데도 바다를 향해 커다란 창이 나 있는 것이다. 파도에 반사된 윤슬이 반짝반짝하며 홀 안으로 빛을 쬐어주는데, 이 덕에 낮에는 실내 조명을 켜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한다. 절벽을 깎아내어 바다 쪽으로 창을 낸 대공사를 한 보람이 있는 광경이다.

리셉션은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 모여주신 내빈 분들께 우선 인사를 올린 갤러리 헴의 대표 한선혜는 갤러리의 설립 목적과 앞으로의 운영 방향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투자자 분들의 이름과 근시일내에 열릴 전시의 개략과 많은 분들의 관심을 원한다는 당부의 말씀까지.

한선혜의 짤막한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주요 인사의 더욱 짤막한 인사가 있었다. 유신은 전혀 알지 못하는 면면들이다. 모르는 사람들의 재미없는 인사를 듣고 있으니 상당히 지루해져서, 그녀는 원형 테이블의 옆 자리에 앉은 나무를 흘겨보았다. 테이블마다 의자가 네 개 씩. 이런 테이블이 홀 안에는 몇 개나 있었다. 나무 옆에는 동현이, 동현의 옆에는 유선이 있었다. 다시말해 유신은 나무와 유선의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 된다.

연단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무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았다는 사실 자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려 맞은 편의 동현을 쳐다보았다. 그는 의외로 유선과 머리를 붙이고 소곤소곤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귓속말을 하는 도중 옆 테이블의 누군가를 흘끔흘끔 쳐다보기도 한다. 매너가 있는 행동은 아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유신이 동생의 셔츠 소매를 잡고 덩달아 소곤소곤 물었다. 유선은 흠칫 놀라며 언니를 돌아본다. 동현의 시선도 그녀를 향했다.

"옆 테이블 여자."

"응?"

유신이 눈을 껌뻑이며 옆 테이블을 살폈다. 확실히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누군가가 이쪽에 등을 보이고 앉아있었다. 반삭에 크롭티라는 시원한 차림이다.

"저 사람이 왜?"

유신이 다시금 소곤소곤하며 물었다. 테이블 안에서만 느껴지는 작은 소란에 이제는 단상을 쳐다보고 있던 나무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관자놀이 아래에 수술한 흔적이 있다고 하네."

유선이 조용하게 말했다. 동현에게서 전해들었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남의 외견을 화제로 삼는 행위에 유신은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까 생각한다. 그런 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생은 말을 잇는다.

"아까 갤러리로 들어오면서 한번 봤었거든, 저 사람. 스타일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네."

테이블에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무가 입을 열었다. 단상에서 무언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던 인사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던 참이었다.

"인공 와우 수술 같은데요."

유선은 갑자기 대화에 뛰어든 그를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남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가벼운 반항심이 아닌, 순수한 인간 대 인간의 적대감이 느껴지는 시선이다. 나무는 괜스레 제자리에 잘만 있던 안경을 밀어올렸다. 그 반응에서, 유신은 그가 다소 당황했음을 눈치챘다.

"청각장애인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는 수술 말입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유선이 뒤이어 말했다.

"인공 와우의 내부 장치를 귀에 심는 수술이죠. 그런데, 제가 알기로 인공 와우는 귀에 이어폰 비슷한 외부 장치도 착용해야 온전히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던데요."

유신과 나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 테이블의 여성에게로 향했다. 쏟아지는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한 그녀의 귀에는 어떠한 장치도 붙어있지 않았다.

"제가 의문을 가진 지점이 어딘지 아시겠죠?"

유선이 톡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독기 어린 반박을 들은 나무는 시선을 테이블로 떨어뜨렸다가, 은근한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으며 유선을 다시 바라보았다. 당신 말이 뭐든 맞습니다, 하는 제스처였다. 유신은 웃음이 불쑥 튀어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낸다.

맞은편의 동현은 얼떨떨한 얼굴을 해선 앉아있었다. 익숙지 않은 환경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 강아지가 떠오르는 모습이라, 유신은 웃음을 한 번 더 참아내야만 했다.

인사들의 인사가 끝난 후에야 나무는 한선혜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홀 가장자리에 비치된 이동식 테이블에서 샴페인 잔을 하나 골라들고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휠체어 주위에는 익숙한 얼굴이 둘이나 있었다. 갤러리 2층에서 실랑이를 나누었던 도슨트 최은수와,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설치 미술가 이아영이다.

한선혜는 특유의 까다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얼굴 조형이 까다롭게 느껴질 뿐, 성격은 그렇지도 않다는 걸 나무는 잘만 알고 있다. 가장 먼저 나무를 향해 고개를 돌린 건 최은수였다. 사납게 생긴 무표정이 그를 응시했다.

"선생님. 손님 분이."

은수가 은발의 예술가에게 말했다. 그녀는 앉은 채로 시선을 올려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한순간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미소지었다.

"나무야."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혜는 왼손을 들어 악수를 청했다. 나무가 그 손을 잡았지만 선혜의 손이 나무의 손을 잡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왼손은 굽지 않는다. 오른손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왼손은 오른손보다 사정이 나아서, 손목까지는 움직일 수 있었다. 오른손은 팔꿈치부터 굳어있다.

"반갑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니?"

"전에 뵈었을 때랑 똑같죠. 아무래도 전 이 길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래도 꾸준히 개인 작품은 그리고 있지 않아?"

나무는 내심 놀란다. 그녀와 왕래는 길었으나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녀의 관심을 끌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낀 탓이다.

예술가나 자신이나 그림이며 작품을 팔아서 먹고 사는 건 같다. 하지만 목적성은 확연하게 다르다. 클라이언트의 유무가 그것을 가르게 된다. 예술가에게는 의뢰인이 필요하지 않다. 자신의 예술성을 담아 만들어낸 작품으로 남을 매료시켜 팔아먹으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나무 그 자신과 같은 상업적인 그림쟁이에게는, 독창적인 예술성이라는 것이, 일찍이 바래어 없어져서.

"홍보용이죠, 전부."

선혜의 검은 눈동자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나무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하는 무언의 물음을 나무는 읽어낸다. 불편한 시선이었다. 그래서, 맞받지 못하고 돌리고야 만다. 아영의 멍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그가 적당히 살가운 말투로 인사했다. 아영은 그것이 자신에게 향한 인사인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애매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선생님, 혹시 이 분이......"

"아, 맞아. 이아영 작가야. 아영 씨, 이쪽은 일찍이 내 제자였던 소나무 화백."

화백이라는 단어에 어떤 가치판단이 담긴 건지 나무는 쉽사리 가늠하지 못했다. 아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다시금 인사했다.

"이아영입니다...... 저, 설치 미술 작가입니다."

피곤해 보이는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2층에서 보았을 때와 같이 머리를 올려 묶고 있다. 물론 미술용 앞치마는 벗은 상태로,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티셔츠 위에 블레이저를 걸쳤다. 때와 장소에 최대한 맞추기 위한 노력이 엿보였다.

"소나무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 시라면?"

"디지털 그림이라면 종류 가리지 않고 그립니다. 협업할 일이 있으면 좋겠네요."

그리 말하고 나무는 얄팍한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넸다. 아영은 명함을 받아들고 잠시, 또다시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 보다가, 자신은 드릴 명함이 없다며 죄송해했다.

"저...... 갤러리에서 작가의 방이라는 퍼포먼스 전시를 하는데요......"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기사 선천적으로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이 있지. 아까 보았던 남자 도슨트도 그렇고, 하고 생각하면서 나무는 옅은 미소를 입에 걸고 끄덕였다.

"그것도, 오늘부터 선공개가 되어서... 기회가 되신다면 꼭......"

보러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아영은 꾸물거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줄곧 그와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선천적으로 남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있다. 예술가 같은,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여 남과의 교류가 적은 인종들의 경우 이런 버릇을 개선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법이긴 하다.

"네, 안 그래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대답을 듣고 아영은 희미하게 웃는가 싶더니, 전시 준비를 해야한다며 선혜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옆의 계단을 소리없이 걸어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무는 예술가들의 보편적인 성격에 대해 생각했다.

"선생님, 뭣 좀 드시겠습니까?"

휠체어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은수가 대뜸 물었다. 선혜는 그럼 그럴까요, 하고 대답하더니 나무를 향해 말했다.

"나무야, 난 아직 기대하고 있다."

은수의 시선이 나무를 향했다. 이전보다는 무딘 시선이다. 태도에서 비어나오던 경계심이 다소 옅어졌다고 나무는 깨닫는다. 세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그가 정말로 손님임을, 거짓말은 하지 않았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나무는 작은 전동 휠체어를 왼손으로 능숙하게 조작하는 은발의 예술가에게 명확한 대답은 않고 그저 모호하게 웃어보였다.

테이블로 돌아오자 유신은 동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 표정이 심각하다. 두 사람은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든 채 테이블로 다가오는 나무의 모습을 보고 하던 이야기를 멈췄다. 유신은 음료에는 관심이 없는지 웬 로투스 과자를 하나 오물대고 있었다.

"동생 분은?"

나무가 물었다. 붉은 논알콜 샴페인의 첫 모금을 마셨다. 열대과일의 향이 났다. 정확히 무슨 과일인지는 모르겠다.

"영우 씨한테 붙잡혀서 이야기 중이야."

유신은 반만 남은 로투스로 창가를 가리켰다. 아이보리색 정장을 입은 평론가와 무뚝뚝한 얼굴로 대화하는 유선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나무와 일행이 앉은 테이블은 창가의 반대편 벽에 있어, 대화 소리가 들려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변호사랑 평론가가 대화를 나눌 거리가 있나?"

나무가 두 모금 째를 마시며 물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거지."

유신이 남은 로투스를 한입에 털어넣으며 말했다.

"오 탐정도 뭐 좀 먹어~"

"그, 그럴까요? 피곤해서 입맛이 없네요......"

나무는 이 자리에서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았다.

"변호사님 비서분 되십니까?"

나무가 돌연 물었다. 동현은 왜인지 모르게 흠칫 놀라선 나무를 쳐다본다. 나무 역시 그를 찬찬히 살핀다. 억지로 다듬은 것 같은 짧은 앞머리에, 뒷머리가 조금 긴 갈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남자다.

"아, 아, 그렇죠. 비서, 비슷합니다. 운전기사라고 할 수도 있고요......"

"탐정이라는 건?"

나무가 이어서 물었다. 동현이 어버버하며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옆 자리의 유신이 대신 입을 열었다. 눈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걸려있는 게 나무는 어쩐지 신경쓰였다.

"사립탐정이거든, 동현 씨."

"사립탐정?"

그런데 왜 변호사의 비서를.

"응, 서울에 진짜 사무실도 있으시대. 유선이랑은 대학생 때부터 연이 있어서 가끔 일을 도와준다는데~"

나무는 의혹어린 시선을 동현에게 던진다. 사립탐정은 의혹을 받아치지 못하고 눈동자를 꼴사납게 이리저리 굴리기나 한다.

"신기하네요. 동현 씨라고 하셨나요? 탐정이라는 게 정말 있는 직업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 하하하...... 네. 민간조사업이라고 하는데, 허가된 지 얼마 안 된 일이라......"

"변호사님을 도와주신다는 건?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거나, 그러십니까?"

"허, 하핫, 네, 그럴 때도 있고요. 왜, 보험조사원 같은 거 있잖아요? 그 비슷한 일을......"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당황하는 거지?

"에이, 송 군. 이런 세상에서 탐정이 벌면 얼마나 벌겠어. 유선이가 친구 의리로 이것저것 시켜주는 거지."

옆 자리의 사립탐정은 뜨끔한 얼굴을 해선 잠시 행동을 멈췄다. 나무는 그제야 그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탐정이라는 직업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건 어렵긴 하지. 그보다 더 질이 떨어지는 흥신소라는 것도 있고.

흥신소나 탐정이나 다를 건 하나 없긴 하지만.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최근 가장 신경쓰고 있는 인물이다.

고민에 빠지기 전에 나무는 빠르게 사고의 채널을 전환한다. 이곳까지 와서 그를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와는 완전히 관계가 없는, 예술인의 모임에서까지 고뇌에 빠지고 싶지는 않다.

동현의 말상대는 유신에게 맡겨두고 나무는 맞은편 벽에 난 넓은 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앞에서 유선과 영우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새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만나고 이어지는 와중에, 나무는 갤러리 2층에서 보았던 남자 도슨트가 창 앞을 지나가는 걸 보았다.

손에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던 남자 도슨트, 박서진은 휠체어 옆을 지키던 은수의 곁에 가 섰다. 선혜가 웃음으로 그를 맞이한다. 그녀는 두 손을 활용해 머그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소리는 역시나 여기까진 닿지 않았다.

나무는 문득 전시작이 궁금해졌다. 아무도 전시장으로 향하지 않은 지금 몰래 홀을 빠져나가 작가들의 예술품을 탐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니, 동행인만 없었으면 가능했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동거인 진유신도 있고, 그녀의 동생인 진유선도 있고, 유선의 비서이자 사립탐정인 동현도 있다. 딸린 눈이 너무 많다.

잠깐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휠체어 곁에 서 있던 도슨트 두 명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선혜의 곁에는 이젠 다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아이보리색 정장을 입은 영우가 무리 사이에서 특히나 눈에 띄었다.

비슷한 키의 도슨트 둘은 창문과 좀 떨어진 곳에서 여성 두 명과 함께 서 있었다. 아까 테이블 내에서 국지적인 화제가 되었던 반삭의 여성과, 조금 전 갤러리 2층에서 아영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나무는 따지자면 두 여성 모두에게 관심이 있었다. 홀을 몰래 빠져나가 작품을 감상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말을 터 볼 수는 있는 법이다.

나무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유신과 동현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된다. 딸린 눈이 많다는 건 활동에 제약이 걸린다는 의미가 된다.

"어디 가? 송 군."

유신이 물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무를 송 군이라고 부른다. 이름에서 비롯된 단순한 별명이다.

"얘기 좀 나누려고."

"누구랑?"

"저 사람들."

나무는 도슨트 둘과 여성 둘의 무리를 작게 턱짓했다.

"나도 가도 돼?"

"안 될 건 없지."

유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지에 테이블에 혼자 남게 된 동현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연신 풍기며 두리번거리더니, 곧 음료를 고르고 있던 유선의 곁으로 총총히 달려갔다.

나무와 유신의 접근을 먼저 눈치챈 건 이번에도 최은수였다.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눈을 살짝 가늘게 뜨다가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뒤이어 서진도, 그들과 담소를 나누던 뿔테 안경의 여성도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사나운 인상의 반삭 여성만이 무표정하게 고개만을 까딱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나무가 뿔테 안경에게 말했다. 그녀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선 눈을 몇 번이고 껌뻑였다.

"아까 갤러리 2층에서, 아영 씨랑 같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앗, 아아아, 네. 맞아요. 그, 도슨트 님이랑 얘기하고 계셨던 분?"

얘기라기보단 실랑이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나무는 구태여 바로잡지 않기로 했다. 실랑이 상대였던 은수의 뺨 근육이 조금 팽팽해졌다.

"예, 맞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 소나무입니다. 한 선생님과 연이 있어서 초대받았습니다."

"아, 오지민입니다. 아영 작가랑 사이좋게 지내다 보니 어떻게 초대받았어요. 선생님 덕도 좀 봤고요."

지민은 그리 말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볼륨이 들어간 보브컷에 각지지 않은 뿔테안경. 평범하게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이다. 샛노란 셔츠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다. 바닥에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길이다. 오 월의 날씨에는 더울지도 모르겠다.

"오지민 화백님은 정물화를 주로 그리십니다."

은수가 돌연 둘 사이에 끼어들어 소갯말을 덧붙였다.

"독창적인 변주와 배색으로 사물을 재해석하여 팝 아트적인 작품을 제작하시죠."

도슨트의 짤막한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화풍이 대강 짐작되었다. 정물화에는 크게 흥미가 없는 나무지만, 배색이 특이하다니 보는 재미는 있을 것 같았다.

지민의 옆에서 스마트폰 액정을 두드리며 묵묵히 서 있던 반삭의 여자는 은수의 시선을 받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귓바퀴에 새빨간 이어커프가 씌워져 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악세서리다.

"안승현입니다."

억양이 독특하다, 라고 한순간 나무는 느꼈다.

"작품 만듭니다. 그보다."

승현이 고개를 슬쩍 돌려 나무 옆의 유신을 바라보았다. 고개의 각도가 달라진 덕에 이어커프의 모양이 뚜렷하게 보인다. 자연광을 반사하는 검붉은 메탈릭 소재의 이어커프. 이어커프의 중단에서 삐져나온 어울리지 않는 전선은 청진기의 진동판을 닮은 무언가를 매달고 있다.

그리고 그 진동판은, 조금 전 유선과 동현이 화제에 올렸던 수술 자국 아래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무는 한순간 저것이 머리핀인가 생각한다. 그럴 리 없었다. 반삭의 머리는 무척 짧아서 핀 같은 걸 꽂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구나. 저게 바로 인공 와우다......

눈을 둥글게 뜬 유신을 바라보던 승현은 특유의 억양으로 말을 이었다.

"아영이가 그쪽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요."

유신의 눈꺼풀이 한층 더 크게 뜨였다.

"어머, 저요?"

"네. 진유신 씨."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유신이 따지는 듯한 어투로 물으니, 승현의 옆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던 지민이 한 손을 앞으로 내어 끼어들었다. 과장된 몸짓이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승현이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본다.

"처음 보는 분한테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그럼 어떻게?"

"상황 설명을 해 드려야지."

승현은 대답이 없다. 다만 손에 꼭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지민에게 넘겼다. 지민은 액정을 몇 번 위아래로 슬라이드하고 나서 액정을 돌려 유신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영과 승현의 메신저 화면이다. 유신과 아영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업로드되어 있다.

"우리 아영 작가님, 할 일이 많으셔서 허둥지둥 복귀하시는 바람에 인사드리는 걸 까먹었대요."

지민은 승현에게 스마트폰을 건네며 발랄하게 말했다.

"갤러리 2층에 작가의 방이라고 있거든요. 엄청 큰 구역이라 2층에 올라가면 바로 보여요. 거기로 한 번 가 보시겠어요? 안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자유관람 시간이고."

유신은 도슨트 서진의 안내를 받아 갤러리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안채 건물 1층으로 올라가 갤러리로 이어지는 통로를 건넌다. 길지 않은 통로인데도 천장은 통유리에 양쪽으로 커다란 창이 여럿 나 있어서, 주차장의 상황은 물론 절벽 너머의 바다까지 잘만 볼 수 있었다.

"나, 날씨가 점점 더 안 좋아지네요......"

앞서던 서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천장 위로 부슬부슬 떨어지는 빗줄기는 기세를 보아하니 그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비를 흩뿌리고 있는 먹구름들은 또 어떤가. 그나마 연한 회색을 띠었던 전과는 다르게, 이젠 두텁다 못해 태양빛까지 가려버린 먹먹한 자연의 장막이 하늘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시간은 오후 세 시를 향해간다. 리셉션은 아무리 늦어도 다섯 시 전에는 끝날 거라고 나무가 이야기해 주었던 것을 유신은 떠올린다. 두 시간 후에는 날이 좀 개어 있을까, 생각하며 핸드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유튜브에 접속하니 기상 특보를 방송하는 뉴스 채널이 있기에 들어가 보았다. 태풍의 갑작스러운 경로 이탈로 남해안 지역에 태풍 특보가 내려져 있습니다.

"여기, 태풍 특보래요."

유신이 서진의 등을 향해 말했다. 아무도 없는 갤러리 1층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서진은 둥근 안경 뒤의 피곤해보이는 눈을 빠르게 몇 번 껌뻑이며 뒤를 돌았다.

"트, 특보요."

두 손을 모으며 비틀비틀 유신에게로 다가온다. 유신은 그에게 보고 있던 뉴스 채널을 보여주었다. 아나운서가 진지한 얼굴로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장 특파원의 비닐 우비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나뭇잎이 빗물과 함께 착 달라붙어 있다.

"어, 으음......"

서진이 목을 가다듬었다. 느릿한 동작으로 턱을 매만지기도 한다. 입술 왼쪽 아래의 점이 가려졌다가, 보였다가를 반복했다.

"그래도 리셉션 마무리 될 때 쯤에는 좀 개지 않겠어요?"

유신이 서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입술을 만지작대던 그는 고개를 조금 옆으로 갸웃하다가, 2층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향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의 딴에는 안내를 계속하려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그, 그랬으면, 좋겠...... 습니다. 이 갤러리, 들어오실 때도 보셨겠지만...... 출입로가 협소해서......"

선생님에게 혼나는 아이 같은 발성이다. 유신은 문득 떠올린다. 말에 숨이 많이 섞이고, 우물우물하니 발음이 좋지 않고, 전체적인 볼륨도 작고.

사실 출입로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장거리 여행을 했더니 솔직히 피곤해서 두뇌의 이런저런 처리 능력이 떨어진 느낌이 있다.

두 사람은 2층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오른다. 왼쪽으로는 어두운 하늘과 새카만 바다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관객 없는 전시품들이 내려다보인다. 다시 등을 보인 서진은 조용한 발걸음으로 앞서나가고 있다. 그는 간혹 왼쪽 통창으로 시선을 던지기도 하였다. 유신의 시야에서 보인 그의 옆얼굴에는 미묘한 불안이 서려있었다.

작가의 방은 경사로를 다 오르자마자 보였다. 하얀 천으로 덮인 미공개작 뒤로 거대한 규모의 폴딩 도어가 병풍처럼 서 있었다. 그것이, 작가의 방의 한쪽 벽이었다. 전시 시작 후에는 시간을 정해 폴딩 도어를 개방하여 작가의 작업 환경 및 작업 모습을 관람할 수 있게 할 거라고 서진이 말해주었다.

"과, 관계자 용 문은, 이쪽입니다."

서진이 한 손을 들어 폴딩 도어의 왼편을 가리켰다. 손잡이가 달린 개폐식 문이 하나 덩그러니 나 있었다. 폴딩 도어보다는 당연하게도 작지만 이쪽으로도 사람이 동시에 두 명은 드나들 수 있을 법하다. 유신은 커다란 문 앞에 서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서진을 돌아본다.

"서진 씨는, 안 들어가요?"

서진의 가슴팍에 매달린 직원 명찰을 보고 유신이 물었다.

"아, 저는, 예...... 안내해드리는 게, 업무라...... 그럼."

소극적인 도슨트는 웅얼대며 둥근 안경을 밀어올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곤 경사로로 되돌아갔다. 안내 서비스는 편도로만 준비되었던 모양이었다.

유신은 도슨트의 하얀 와이셔츠의 등판을 빤히 바라보다가, 커다란 문을 몇 번 노크했다. 안에서 반응이 들려오는 걸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