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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ge (2)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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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아도 면적이 제법 되는 1층의 전시 공간에는 소장품이 서른 점 정도 있었다. 대부분이 설치형 오브제로, 작품 설명을 듣지 않으면 무엇을 표현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을 것 같다.

소나무가 데스크에서 초대객 등록을 하던 사이 먼저 등록을 마치고 캐리어까지 맡긴 유신은 전시장 내부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조금 이르게 온 터라 전시장은 한산했다. 빠르게 참석객들의 면면을 훑어보았지만, 동생 유선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았어."

등록을 마친 나무가 그녀의 등 뒤에서 다가왔다.

"유선이라면 일찍 오지 않았을까 싶었거든."

나무는 방금 전의 유신과 같이 전시장 내부를 한 번 빙 둘러본다.

"안 계신 것 같네. 아니면 2층에 계시든가."

"뭐어, 2층에 있든 아직 안 왔든 여기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겠지. 그보다 말이야......"

유신의 몸이 맞은편의 통창을 향해 반 바퀴 빙글 돌았다. 절벽을 향해 난 통창 너머로 해안선이 선명하게 보인다. 왼쪽 아래에서 시작되어 오른쪽 위로 향하는 경사로가 조망에 아주 방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으로 상쾌한 전망이다. 언뜻 보면 하나의 거대한 풍경화 같기도 하다.

"전망이 이렇게 예쁜데 날씨가 안 좋아서 아쉽다."

유신의 말대로, 검푸르게 빛나는 바다와 그 포말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문제는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에 있다. 본래 강원도에서 사라져야 했을 태풍이 대뜸 부산을 향해 수직으로 남하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와 유신은 그 소식을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보았고, 딱히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갤러리까지 오긴 했지만.

"태풍이 계속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니까......"

나무가 눈을 가늘게 뜨곤 말했다.

"우리 우산도 안 가져오지 않았어? 어떡하지?"

"여기 왔을 때처럼 택시 불러서 호텔까지 가는 수밖에 없지. 비바람을 뚫고."

부산역에서 내린 두 사람은 곧장 택시를 잡았다. 갤러리 헴이라는 목적지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한 택시 기사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전산 상에 등록되지 않은 건물이라 검색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전 부산에서 얼마간 살았던 경험이 있는 나무가 갤러리의 대강의 위치를 짐작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택시가 오려나 몰라? 그럴 거면 차라리 유선이한테 태워다 달라고 하지."

"그것도 나쁘지는 않고."

그 변호사님의 따가운 눈총을 제외한다면 말이지만, 이라고 나무는 내심 생각했다.

그녀와는 한참 전에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다. 그때도 나무는 잠시 유신의 집에 얹혀살고 있었는데, 얼토당토 않은 우연으로 유신의 집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나무의 모습을 유선이 목격해버리고 만 것이다.

하나 뿐이고 연약한 언니의 집에 웬 거무칙칙한 남자가 들어살고 있으니 기겁할만도 하다. 나무는 심정적으로 납득했다. 하지만 단순히 기겁한 것치고는 얼굴 근육이 너무나 극적으로 당겨진 유선의 낯을 보면서, 나무는 부끄럽지만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렇군. 나는 이 여자의 머리에 너무나 인상적으로 새겨지고 말았군.

그런 감상이 들었던 것도 같다.

대형 로펌의 힘 있는 변호사한테 찍혀서 좋을 일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나무로서는 약간의 실책이라고 할 만했다.

시간은 한 시 반. 리셉션 시작은 두 시. 리셉션에서 하는 건 간소한 갤러리 소개와 재단 주요 인사의 인사와, 이후의 자유 관람 그리고 네트워킹. 설립 축하연이니 대체로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가벼운 인맥을 다지게 될 것이다. 애당초 축하연이란 무거울 수가 없다.

지금 가장 걱정이 되는 건 리셉션이 아닌 태풍이다. 본래는 강원도로 가야했을 것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부산을 향해 남하하고 있다, 라고 기차 안에서 보았던 뉴스의 리포터가 말했다. 태평양을 향해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지만 갈수록 흐려지는 날씨를 보니 그러지는 않을 모양이다.

갤러리로 들어오는 외길에서 보았던 미묘한 기울기의 나무들을 기억한다.

호구의 마지막 수를 떠올리게 했던 나무들을......

밑동을 툭 치면 곧장 외길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던 나무를.

웬일로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있으니 시야에 처음 보는 남자가 들어왔다. 

아이보리색 정장 밑에 새카만 셔츠를 받쳐 입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은 굴곡이 뚜렷한데, 적당히 패인 주름을 보니 나이는 마흔 중반 정도일까. 오른쪽으로 슬쩍 넘긴 댄디컷은 깔끔한 인상을 배로 준다. 남자는 나무를 한 번 힐끗 보았다가, 이내 유신에게로 성큼 다가간다.

"안녕하세요, 유신 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적당히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어딘가의 배우 내지 성우를 연상시켰다. 창 너머의 풍경을 감상하던 유신은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본다.

"어머, 이런 데서 다 뵙네요."

"저야 한 선생님이랑 막역한 사이니까요. 유신 씨도 한 선생님의 초대를?"

"아니요. 초대는 아버지가 받으셨죠. 그런데 급한 일이 생기셨다나."

두 사람은 안면이 있는 사이인 듯했다. 나무는 물론 모르는 사람이다. 그가 유신의 사회적 지위를 알고 있다면 대화에 끼어들기도 뭐해서, 나무는 자리를 뜨기로 한다. 결심이 서면 행동은 빠르다. 살짝 몸을 움직이니 유신의 시선이 곧장 이쪽을 향했다.

"어디 가?"

남자의 시선도 이쪽을 향했다. 나무는 별 수 없이 틀었던 몸을 원위치로 되돌린다.

"선생님한테 인사 드리려고."

"아, 아시는 분이신가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나무를 바라보던 남자가 유신에게 물었다.

"조금 알고 지내는 친군데, 어떻게 여기서 만났네요."

"아아, 네......"

유신과 눈이 마주쳤다. 눈꺼풀을 조금 내려선 가늘게 떴다. 행동 강령은 정해줬으니 알아서 대처하라는 뜻이 내포된 시선이다. 하기사, 결혼도 않은 여자가 남자랑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벌려서 좋을 건 없다. 함부로 털어 놓았다가 구설수에 올라 그녀의 아버지의 귀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상황은 더더욱 나빠지게 될 테다......

남자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창백한 축에 속하는 뺨이 새치 하나 없는 머리칼과는 대조된다.

나무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소나무라고 합니다. 그림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영우입니다."

그는 나무를 따라 고개를 숙인다. 들어본 적 있는 이름 같다. 나무는 고개를 들며 생각했다.

"미술 평론을 합니다."

들어본 적 있을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군, 하고 나무는 재차 생각했다.

"아, 『비상』의 평론을 하셨죠."

"맞습니다. 한 선생님의 역작이죠."

그는 눈을 번쩍 뜨고 갑작스레 평론을 시작했다.

"후천적인 장애로 몸의 움직임에 제한이 있는 작가 분들은 상당수 계십니다만, 한 선생님은 설치 미술가이시란 말입니다. 몸의 장애를 어떻게 극복하여 오브제를 만들 수 있는가. 그 과정에서 발생한 기술과 그에 대한 활용은 또 어떻게 사회적인 효용성을 띠는가. 완성된 작품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입니다만, 작품 안에 담긴 내러티브는 설치 미술이라는 하나의 장을 넘어 메타적인 요소로......"

처진 눈을 반짝 빛낼 때부터 막았어야 했다.

나무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선혜라는 거장의 작품을 비평하는 이들은 지면에 널렸지만, 조영우라는 이 비평가는 상상 이상으로 그녀를 추앙해댔으니 모를 수가 없다. 나무도 물론 그녀의 작품에 남몰래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야 하였으나, 그런 편향적인 평가를 지면에 실어 담론의 장으로 내보내는 것은 어딘가의 일러스트레이터 하나가 고작 sns에 주절거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내러티브라...... 저도 동의합니다."

등의 맞장구를 네 번 정도 친 후에야 영우는 구술 평론을 멈췄다. 중간중간 유신에게도 질문을 몇 번 던졌는데, 그녀는 '그거 참 흥미롭네요' 와 같은 의미의 대답을 두 번 정도 했다. 나무가 정중한 어조로 대답을 할 때면 붉은 립이 발린 유신의 입꼬리가 비실비실 떨렸다.

"나무 씨는 무슨 그림을 그리시는지요?"

피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되도록이면 이 질문이 나오기 전에 이 자리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일러스트입니다."

"일러스트? 아하......"

"젊었을 때는 좀 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살다 보니 이렇게 되는군요."

말을 끝내고 나서, 나무는 불필요한 사족을 붙인 자신에게 새삼스럽게 놀란다. 영우는 아까의 열기는 싹 식어버린 표정으로 옅게 미소를 짓고나 있다.

"이쪽 업계가 그렇게 녹록지는 못하니 말이죠."

그 말을 끝으로 나무는 겨우 두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신이 제쪽으로 주의를 돌려준 덕이다.

평소의 그녀의 화술에 비해서는 다소 매끄럽지 못한 전환이었다. 분명 의도적인 화제전환이리라.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나, 하고 나무는 또다시 놀란다.

아니, 그럴 리 없을 텐데. 단순히 분위기를 보고 눈치챈 건가.

한선혜는 1층의 전시 공간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니 이곳에 있다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다. 나무는 2층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천천히 올랐다. 왼편에 펼쳐진 통창으로 어둑한 먹구름이 올려다보인다. 그 아래에 깔린 파도의 움직임은 다소 격한 기색이 있다.

경사로 난간 아래로 아까 서 있던 곳을 내려다 보자, 유신과 영우가 여전히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나마 사람이 있던 1층에 비해 2층은 눈에 띄게 한산했다. 넓이는 1층과 비슷한 것 같지만, 1층과 다르게 창이 거의 나지 않아 언뜻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 것도 같은 구조다. 전시장 곳곳에 놓인 몇몇 설치물에는 아직 하얀 천이 덮여있다. 선공개 예정이 없는 작품들이리라. 거대한 유령처럼도 보이는 미공개 작품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건 역시, 작가의 방 앞에 설치된 이번 전시회의 주제작이다.

마침 그 옆에 사람이 있군, 이라고 나무가 생각하던 찰나.

"리셉션 초대객이시라면 1층에서 대기해 주시죠."

그의 오른쪽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쌀쌀맞아 보이는 셔츠 차림의 여성이 서 있었다. 도슨트 최은수라는 글씨가 세공된 작은 금속제 명찰이 가슴팍에서 빛난다.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나무는 찰나 유신의 여동생을 떠올린다. 무의식적인 연상이었다. 분위기가 비슷하다, 라는 의식적인 판단을 내렸다.

"한 선생님은 아직 안 오셨을까요?"

"용건이 있으십니까?"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은수는 오른손에 찬 은빛 시계를 흘긋 내려본다. 문자판이 손목 안으로 향해있다.

"삼십 분 후에 하면 늦는 인사입니까?"

손님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다. 나무는 눈앞의 도슨트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예의가 없는 사람인 건지에 대해 고민한다.

"아뇨, 늦지는 않고요. 그저 조금 더 시끄러운 분위기에서 인사를 나누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그 때 하시는 걸로 하시죠."

나무가 한 마디를 더 고민하고 있으니 천으로 덮인 주제작 뒤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미술 앞치마 차림에 머리를 위로 올려 묶은, 전형적인 화가 상의 여성이 한 명.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색이 들어간 셔츠에 통이 큰 바지를 입은 뿔테 안경의 여성이 또 한 명.

작업하는 작가의 모습을 관람객들에게 하나의 가림 없이 보이는 작가의 방은 주제작 뒤편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방금이라도 작업을 하고 나온 듯한 저 화가 차림의 여성이 이번 전시회의 주연인 이아영일 테다. 그녀 옆의 뿔테 안경은 모르는 사람이다.

주제작 뒤에서 빼꼼히 어깨를 드러낸 두 사람은 명백히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2층에서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나무는 납득했다. 그와 별개로 눈앞의 도슨트를 납득시킬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도슨트면 이따 작품 해설도 해 주십니까, 하는 실없는 물음으로 자리를 무마하려 들 결심을 하자마자 저 멀리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작가의 방에 가려져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고, 힘없이 터벅터벅 계단을 밟는 구둣발 소리만이 난다. 2층과 3층은 경사로로 연결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계단이 있다면 분명 그 옆에 엘리베이터도 있겠지. 그렇지 않다면 배리어 프리하지 않으니까.

몇 초도 있지 않아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수와 같은 셔츠를 입은 남성이다. 그는 나무와 은수의 모습을 보더니 이쪽을 향해 헐레벌떡 다가왔다.

"무, 무슨 일, 있......"

은수의 명찰과 동일한 위치에서 도슨트 박서진이라는 글자가 번쩍 빛났다. 숫기가 없어 보이는 남자다. 둥그런 금테 안경이 눈에 띈다. 그 역시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없어."

그녀는 동료로 추정되는 남성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서진은 주춤하며 어깨를 움츠린다. 

남녀가 함께 서 있는 투샷이라기엔 무언가 이질감이 든다. 나무는 단숨에 이질감의 원인을 알아챘다. 두 사람의 키가 얼추 비슷한 것이다. 은수도, 서진도 키가 대략 170은 될까. 여성치고는 장신이군, 하고 나무는 남몰래 생각한다.

은수 뒤의 서진은 안절부절 못하며 나무를 살피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동자는 시선을 잘 맞추지 못한다.

"저, 필요하신 거라도...... 화장실이라면 3층에, 있습니다......"

우물우물대는 작은 목소리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 것 같다. 나무는 잠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천으로 가려진 거대한 주제작을 가리킨다.

"저건 오늘 공개가 안 되나요?"

"저거? 아, 아아......"

주제 작품은 말이죠...... 하며 입을 뻐끔거리는 서진의 말을 은수가 낚아챘다. 미세하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아 작품 전체를 공개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방은 공개될 예정이니 그쪽 관람을 부탁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은수의 또박또박한 설명 뒤로 서진이 있으나마나한 종결어휘를 덧붙였다. 나무는 이 남자가 도슨트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사실 정식 도슨트가 아니라 이 근처에서 데려온 아르바이트생인 게 아닐까. 그쪽의 가능성이 훨 높아보이긴 한다.

어찌 되었든 한선혜를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어른스럽게 1층으로 돌아가 일정을 기다리는 일뿐인가.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본다. 앞으로 이십 분은 있어야 정식 리셉션이 시작된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럼......"

두 도슨트에게서 등을 돌렸다. 1층으로 이어진 경사로로 향하고 있으니 주제작 뒤의 두 여성이 여전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무는 그들에게도 말을 걸어볼까 생각하다가, 등 뒤의 도슨트들이 떠나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므로 관두었다. 여기서 더 눈에 띄는 짓을 해서 좋을 건 없어 뵌다.

경사로로 들어서면 또다시 어두침침한 하늘이 그를 반긴다. 가실 기색이 전혀 없는 먹구름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욱 짙어진 것 같기도 하다.

유신과 영우가 서 있었던 자리를 내려다본다. 유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이보리색 정장의 영우는 사라졌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이 유신의 곁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도 아니다. 두 사람이다.

나무는 묘한 부담감을 느끼며 경사를 따라 내려간다. 이런 감각을 마지막으로 느낀 게 언제였더라, 생각하면서.

진유선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일일 운전수 오동현이 부산으로 내려오는 자동차 안에서 줄곧 라디오를 켜 두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라디오 엠씨의 사연 선정 능력과 선곡 센스가 놀라울 정도로 후졌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뒷좌석에서 비몽사몽하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던 사이 어느새 먹구름이 그들의 뒤를 따랐고, 구린 엠씨의 구린 방송이 끝나고 오늘의 기상 정보를 알리는 아나운서의 입에서 태풍이 남하 중이라는 예보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돌아갈까?"

도착 예정 시간이 십 분 정도 남은 시점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유선이 백미러를 노려보며 말했다. 마침 백미러로 유선과 눈이 마주친 동현은 기겁을 하며 그녀를 말렸다.

"지금? 왜? 태풍 때문에? 날이 많이 흐리긴 하네......"

"그냥 해 본 말이야."

지금 상행 고속도로를 타봤자 한창 부산을 향해 내려오던 태풍과 마주치기나 할 뿐이다. 그건 유선도, 아마 온종일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동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도에 등록되지 않아 수동으로 주소를 입력한 갤러리 헴의 간판은 상당히 뜬금없는 곳에 서 있었다. 산인지 언덕인지 오름인지 모를 둔덕의 시작 지점, 그 앞에 세워진 간판에는 둔덕 안쪽을 향하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산을 타고 오라는 거 아니야?"

유선은 동현의 헛소리를 무시했다. 옆에서는 하나로 보였던 둔덕이지만, 실은 크기가 비슷한 두 둔덕이 나란히 서 있는 모양새였다. 그 사잇길로 진입하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포장을 하면 더 좋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포장을 하기에는 너무나 잘 다져진 흙길을 밟고 달린다. 길을 사이에 두고 위압적으로 쌓인 두 둔덕의 표면에는 어린 나무들이 고슴도치마냥 심겨 있다. 그 심긴 각도가 참 애매해서, 차체가 조금 높았다간 죄다 긁힐 것만 같다.

어느 순간 앞이 확 밝아진다. 둔덕과 나무로 가려졌던 시야가 트인다. 눈앞에 펼쳐지는 건 거칠게 깎인 해안 절벽, 이 아니라, 절벽 바로 앞에 버티고 서 있는 3층 규모의 건물. 갤러리 헴이다. 층수는 그리 높지 않지만 좌우로 길게 펴진 모습에 다소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갤러리 본관 왼쪽에도 시선을 끄는 건물이 하나 있다. 갤러리와 같은 3층 높이의 소규모 숙박 시설이다. 두 건물은 1층의 짧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갤러리 이용자 및 작가를 위한 숙박 시설이라고 하지만, 이후 일반 숙박객도 받을 예정이다, 라는 사전 정보를 동현은 유선에게서 들었다.

"여긴 부산에서도 좀 외진 곳인데 사람이 오려나?"

유선은 오션 뷰의 가치를 모르는 동현의 말을 무시했다.

갤러리 앞쪽에 구성된 주차장은 제법 한산했다. 아직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애당초 사람이 많지 않은 이벤트인 걸까. 주차장으로 진입하니 버서석, 하고 파쇄석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주차장부터 갤러리 주변까지 전부 파쇄석이 깔려 있다.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두 사람은 내렸다. 장시간의 운전으로 지친 동현이 기지개를 켜고 있으니, 뒷자리에서 내린 유선은 그런 그를 쓱 지나쳐 갤러리로 향했다. 동현은 기지개를 켜다 말고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발밑에서 퍼석퍼석 하며 파쇄석이 끊임없이 소리를 냈다.

갤러리로 향하는 짧은 길에 누군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허리가 보이는 크롭티도 시원해 보이지만, 더욱 시원해 보이는 건 헤어스타일이다. 반삭으로 짧게 깎은 머리는 오른편에 심장 박동 모양의 스크래치가 들어가 있다. 동현과 유선이 저벅저벅 걸어와도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건지, 움직이는 건 손가락 뿐이다.

옆을 지나치며 동현은 상대의 얼굴을 힐긋 쳐다봤다. 사나운 모양의 눈과 마주쳤다. 모양만 사나운 게 아니라, 풍기는 기세도 영 쉽지 않다. 동현은 약간 압도당한 기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앞서던 유선과 눈이 맞았다.

"여자야?"

유선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

"응."

유선은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을 해선 거대한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얌전히 뒤를 따른 동현은 그녀의 심정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여자가 왜 저렇게 머리를 깎았냐고.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는 인간을 보았을 때 일차적으로 느껴지는 이질감.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저 특이하네, 하며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그것. 어쩌면 사정이 있나, 정도의 변호를 이차적으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의 크지 않은 이물감. 그러나 유선의 머릿속에서는 그 이차적인 기제가 웬만해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보편성을 벗어나는 존재는 보편성을 벗어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그녀의 곁에 한참을 있었던 동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유선에게는 이러한 법칙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동현이 그녀의 엄중하다 못해 냉랭한 법칙에 동의하는가 하면, 그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탐정을 자처하고 있는 동현 그 자신부터 보편적인 한국인에서 벗어난 탓이다.

머리를 반삭으로 깎은 이름 모를 여성보다는 눈앞의 리셉션이 훨씬 더 마음에 걸렸다. 유선은 이번 리셉션에 정식으로 초대받은 몸이지만, 그녀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는 동현은 정식으로 초대받기는 커녕 동행한다고 전달도 하지 않은 상태다. 물론 사전에 이야기가 없었다고 아주 쫓겨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다소 불편한 감이 없지 않다.

먼저 들어간 유선이 데스크에서 초대객 등록을 했다. 데스크 직원이 동현에게 눈길을 주자, 유선은 자신의 비서라는 짤막한 대답으로 그를 납득시켰다. 따로 신분증을 내거나 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 언니."

데스크 안쪽 전시장으로 천천히 이동하던 유선이 중얼거렸다. 유선의 시선 끝, 전시장의 정가운데에 정말로 그녀가 있었다.

진유신. 유선보다 네 살이 많은 친언니. 컴퓨터 그래픽 아티스트. 동현은 이전 그녀에게 결혼 상대를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던 적이 있다. 유선에게는 비밀로 한 의뢰였는데 그게 어떤 결론이 났는가 하면, 당신이 결혼을 다짐한 그 남자는 좀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라고.

유신의 옆에는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아이보리색 정장을 입은 그는 유신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슬쩍 손을 흔들고는 멀어졌다. 그 틈을 타 유선이 언니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동현은 인삿말을 고민하며 뒤를 따랐다.

"언니."

유신은 화사한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그녀의 뒤에서 역광으로 환하게 내리쬐는 햇빛에는 색깔이 없다. 남하하고 있는 태풍 탓에 먹먹한 구름이 새파란 하늘을 꼼꼼하게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왔어? 오 탐정님도 있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동현이 어딘가 수줍은 태도로 인사했다. 눈치 빠른 사람이 보았다면 둘 사이에 무언가 비밀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만한 태도였지만, 유선은 친언니의 얼굴에 정신이 팔려 동현의 반응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라니. 리셉션 시작하려면 삼십 분은 남은 거 아냐?"

유선이 말했다. 유신은 스마트폰의 액정으로 슬쩍 시간을 확인한다.

"삼십 분이 뭐니. 이십 분 정도 남았어."

"삼십 분이나 이십 분이나......"

유신은 눈웃음을 치면서 동생을 바라본다.

"유선이 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데를 다 왔어?"

"무슨 소리야?"

"아무리 아빠가 시켰어도, 중요한 일 아니면 안 가려 하잖아. 모를 줄 알았니."

유신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주위 사람들을 의식한 처사일 거다. 평소와 같은 정장 차림의 유선은 언니를 향해 얼굴을 홱 내민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위로 솟았다가 날개뼈 위로 풀썩 떨어졌다.

"나도 쉬고 싶을 때가 있어, 언니."

"쉬러 온 거야?"

유신의 치켜올라간 눈이 고용주의 뒤편에 얌전히 서 있던 동현에게로 향했다. 동현은 기겁을 하고 고개를, 양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언니의 시선을 확인한 유선 역시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아연하기 시작했다.

"휴가 삼아 온 거라고! 쟤는...... 비서! 운전 기사야."

유선의 얼굴이 언니의 콧등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슬슬 다른 이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쏠리려 들기에, 유선은 한숨을 푹 쉬며 얼굴을 물렸다.

"아하하, 하하하하."

유신은 방금의 촌극이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고동색으로 빛나는 웨이브진 머리칼을 잘게 흔들면서 웃었다.

새삼스럽지만 하나도 닮지 않은 자매다, 라고 동현은 뺨에 서린 홍조를 가라앉히면서 생각했다. 입는 옷이 정장의 변주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는 무뚝뚝하고 날카로운 성격의 진유선. 그와 반대로 볼 때마다 패션이 달라지는 활기차고 장난스러운 성격의 진유신. 머리카락의 색도, 안경의 착용 여부도, 심지어는 목소리의 톤도 같지 않다. 유일하게 닮은 건 치켜올라간 눈꼬리 정도일까.

동현은 닮지 않은 형제를 조사했던 적이 있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닮은 구석이 없었고, 조사해보니 정말로 친형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른 이복형제였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들의 얼굴이 막연하게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연상이었다. 물론, 눈앞의 자매를 조사할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다.

그런 생각에 빠져 얼굴의 열을 식히고 있으니 유신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눈이 마주쳤다. 동현은 한순간 얼빠진 소리를 낼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낸다. 얼굴 근육도 어떻게 잘 당겨보긴 했지만, 글쎄, 동요가 잘 감춰졌을는지 모르겠다.

검은 머리를 적당히 단정하게 다듬은 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였다. 사각 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우선 동현을 쳐다보았다가, 어떠한 특이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유선에게로 굴러간다. 그는 유선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지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유선은 일단 대답이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그가 입술을 두 번째로 떼고 나서야 유선은 반응을 보였다.

"같이...... 오셨습니까?"

그리 말하던 유선의 시선이 언니에게로 향했다. 유신은 살짝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대답은 없다. 그저 제 옆의 남자에게 흘긋 시선을 주면서, 설명은 네가 하라는 투의, 무언의 시그널을 보내기나 할 뿐이다. 그는 유신의 시선을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작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뇨. 각자 초대를 받아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초대를 받으셨다고요?"

유선의 날카로운 눈이 가늘게 뜨였다. 동현은 그녀가 당장이라도 도의적으로 옳지 않은 말을 뱉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눈앞의 남자, 소나무는 일러스트레이터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어딘가의 미대를 나왔다고도 한다. 그러나, 유신이 탐정 오동현에게 의뢰한 뒷조사에서 밝혀진 그의 뒷면은......

"예. 한선혜 선생님이랑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서요."

나무는 거리낌 하나 없는 시원시원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는지 유선은 나무에게 향했던 시선을 도로 제 언니에게로 향한다. 당연하게도 유신은 슬슬 웃으며 길고 얇은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기나 하는 것이다.

"정말이야, 유선아. 그분이랑 오랜 인연이 있대. 왜, 이 사람도 미대 나왔거든."

이 사람, 이라는 단어에 유선이 움찔 몸을 떨었다. 무어라 반박을 하려고 유선이 다시 입을 뗐을 때, 널찍한 통창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경사로 위쪽에서 두 사람이 터벅터벅 걸어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선을 말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며 서 있던 동현은 1층을 향해 내려오는 그들을 무심코 눈으로 쫓았다. 한 사람은 단발머리 여자에 다른 한 사람은 곱슬머리 남자. 둘 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었다. 직원들일까.

직원들 뒤로 휠체어를 탄 여자가 천천히 경사로를 따라 내려왔다. 2층과 1층을 잇는 경사로는 그 길이가 길어 경사도가 높지 않다. 그러니까, 평범하게 두 다리를 쓸 수 있는 사람도 쓸 수 없는 사람도 큰 무리 없이 오르내릴 수 있다. 그녀는 뒤에서 휠체어를 끄는 도우미 하나 없이 경사로를 내려온다. 바퀴를 손으로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전동 휠체어가 아닐까, 하고 동현은 생각했다.

나무는 어느새 동현의 시선을 따라 뒤편의 경사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자매 역시 실랑이에 가까운 대화를 멈추고 그들을 올려다본다. 구름에 가려 어두컴컴해진 하늘이 세 사람의 등 뒤에 잿빛 날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졌다. 동현은 느낀다. 그리고 놀란다. 유신과 나무의 등장으로 당황해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다소 저하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몇 시지? 한 시 오십 분. 리셉션 시작 십 분 전.

세 사람은 모두의 주목 속에 1층에 도달했다. 인파 앞으로 발을 옮긴 건 여자 직원이었다. 남자 직원은 휠체어에 앉은, 아마도 이 갤러리의 주인일 예술가의 옆에 서서 손님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은발의 예술가는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을 가리지도 않고 정면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리셉션 시작은 두 시입니다. 이후 두 시에 갤러리 헴의 부속 시설, 안채의 사랑에서 뵙겠습니다."

여자 직원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오른팔을 들어 건물 동편을 가리켰다. 타원을 사등분한 모양의 갤러리. 그 짧은 변 의 벽에 통로가 하나 나 있었다. 동현은 갤러리 왼편에 세워져 있던 건물을 떠올린다. 숙박 시설로 사용될 예정이라던 갤러리와 같은 높이의 3층 건물. 필시 그곳으로 이어진 통로일 것이다.

세 사람은 먼저 통로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번에는 전동 휠체어를 유려하게 움직이는 예술가가 선두였다.

"안채?"

여전히 턱을 매만지던 유신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저 건물 이름이야."

나무가 대답했다.

"그럼 여긴 바깥채야?"

"그런 셈이지."

"어라, 사랑방은 원래 바깥채에 있을 텐데?"

"그런가?"

"그럼. 사랑방 손님이 왜 사랑방 손님이겠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얘긴가? 미안, 제목은 아는데 읽어본 적은 없어."

두 사람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듣다 못한 유선이 먼저 자리를 떴다. 동현은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후로도 사랑방에 대해 이야기하던 유신과 나무는 유선과 동현이 통로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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