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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ge (1)

화면에 인쇄물, 천, 쇠붙이, 나무조각, 모래, 나뭇잎 등 여러 가지를 붙여서 구성하는 회화 기법, 또는 그러한 기법에 의해 제작되는 회화를 가리킨다.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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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잘도 선로를 나아간다. 

불규칙한 떨림이 기차의 바퀴를, 차체를, 좌석을 타고 몸으로 전달된다. 진유신은 이런 교통수단 특유의 떨림을 좋아했다. 기차도 좋고, 지하철도 좋고 하다못해 비행기도 좋다. 거대한 고철덩어리가 사람들을 옮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이라 귀엽다.

창가 자리에 앉은 유신의 바로 옆 자리에서는 소나무가 오늘의 작업을 하고 있다. 간이 테이블에 아슬아슬하게 크기가 맞는 태블릿을 펼쳐두곤 펜을 놀리는 모습이 실로 곡예가 아닐 수 없다.

"아직 안 끝났어?"

"응."

그는 기본적으로 일을 미루지 않는다. 특히나 다음 날 장거리 외출이 잡혀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전날에 일을 마치는 성격이다. 그런 그가 어째서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일러스트 채색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 사람 화풍이 나랑 비슷해서 다행이네."

데드라인이 오늘 낮까지인 웹소설 표지 일러스트 의뢰가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 A씨에게 의뢰된 건이었는데, 문제는 A씨가 어젯밤 불의의 사고를 당해 그림을 완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건을 손이 빠르기로 소문난 일러스트레이터 소나무가 오늘 아침 넘겨받았다. 러프조차 완성되지 않았다면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밑채색까지는 완료되어 있었다. 세부 묘사와 보정만을 가하면 되었기에 이 정도면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고 나무는 집을 나오면서 이야기했다.

유신은 몸을 조금 기울여 태블릿 화면을 훔쳐본다. 마법사 지팡이를 든 소녀가 이쪽으로 맹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판타지 계열의 모델이긴 하지만, 데포르메가 덜 들어간 극화체 스타일의 일러스트다. 칠해진 색도 채도가 높다고 보긴 어렵다.

"이게 비슷한 거야? 송 군, 원체 다양하게 그려서 잘 모르겠는데~"

"데포르메가 많이 없잖아."

"원래는 이런 스타일인가? 교과서 삽화 스타일?"

아무리 그래도 교과서 삽화보다는 장식이 많이 되어있긴 하지만.

"따지자면......"

등 뒤에서 객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승무원 복장의 남자가 통로를 따라 앞 객차로 걸어간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천장에 매달린 전광판이 다음 행선지를 알리고 있다. 이제야 겨우 동대구역이다. 목적지인 부산역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이 좀 덜 남았다.

"기차 안에서 완성할 수 있겠어?"

"아마도......"

평소보다 말이 짧아졌다.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쪽이 그의 진짜 화풍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지만, 유신은 더 이상 그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를 괴롭히기보단 차라리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오늘의 일정을 정리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꽃샘추위도 한결 가신 가정의 달 오 월의 초입. 프리랜서인 나무와 유신에게는 큰 의미가 없지만, 어린이날 덕에 만들어진 짧은 연휴가 있는 달이기도 하다. 연휴를 맞아 창출된 관광객들을 위해 많은 행사가 열리는 이 연휴에 나무와 유신은 각자의 지인에게서 상당히 의외의 연락을 받았다.

유신의 경우,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때는 대형 로펌을 이끌었던 카리스마 있는 변호사였지만 지금은 차녀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 유유자적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는 자산가다. 틈만 나면 지인들과 사교 활동을 하러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니시는데, 가끔은 딸들의 인맥을 넓혀주기 위해 모종의 자리를 알선하고는 한다. 오늘의 연락도 비슷한 권유였다.

아버지에게는 전부터 알음알음 알고 지내던 화가가 한 명 있다. 그녀는 한참 전부터 독특한 화풍으로 호사가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십 몇 년 전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판정을 받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상반신과 첨단 기술을 이용해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비극을 겪었음에도 예술을 그만두지 않는 그녀의 열정이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나이를 먹은 지금은 장애인 예술가의 대표로 이름을 날리며 재단을 설립해 후대를 양성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재단에서 이번에는 부산 어드매에 갤러리를 하나 세웠다. 장애인 예술가 내지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취지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국제적인 교류도 있을 예정이며 갤러리 상층에 입주한 레스토랑의 수익은 재단에서 기부금으로 활용될 것이고 바로 옆 부지에 세워진 작은 숙박시설과 연계하여 다양한 예술 행사가 진행될 계획이라 하지만 영 관심이 없는 유신의 귀에는 일련의 정보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거기 오픈 리셉션에 초대를 받았어. 그런데 나는 일정이 꼬여서 못 갈 것 같구나. 대신 가지 않을래?"

"뭐, 대신? 아빠, 부산은 너무 먼데."

"유선이는 간다 하던데. 기차 타도 오래 걸리겠니?"

"유선이도? 그 바쁜 애가 웬일이래?"

"글쎄다. 나도 놀랐다. 기분전환이라도 하고 싶었나."

그보다 말이다, 하고 아버지는 주제를 바꿨다.

"아영 씨 기억하니?"

이아영을 얘기하시는 건가. 이 대화의 흐름에서 나올만한 '아영'은 그녀 한 사람 뿐이다.

"기억하지. 그 화가 분 수제자 아니야?"

사실, 이전에도 그녀의 예술 활동에 초대받은 적은 있었다. 그 때는 아버지와 동행을 했었던가. 그녀의 수제자이자 설치 미술가인 아영과는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고, 대화를 나눠보니 좀 특이한 사람 같아 흥미가 돌았다. 연락처도 교환하고 실제로 연락도 몇 번 했지만 어른의 사교가 으레 그렇듯 교류가 오래 가지는 못했다.

"아영 씨가 갤러리의 첫 번째 전시를 할 거라고 하네. 리셉션 자리에서 선행 공개를 한다고도 하고. 유신이 너 이런 쪽에 관심 있지 않았나?"

"어머, 진짜? 언젠데?"

연휴가 한창인 5월 6일 토요일이었다. 아버지의 연락을 받은 지금은 5월 1일 근로자의 날이다.

"5월 6일? 우와, 기차표 없을 텐데!"

그걸 예상하고 아버지가 왕복 기차표를 이미 끊어두셨단다.

그런 고로 유신은 단신으로 부산 여행을 즐기려고 했다. 동거인 나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5월 6일 부산행 기차표는 이미 매진이었으니까. 그에게 혼자 차를 끌고 5시간을 운전해 부산까지 내려오라고 할 정도의 사악함은 없는 유신이다.

그날 밤, 저녁식사 자리에서 유신은 갑작스럽게 잡힌 여행 계획을 나무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젓가락으로 무말랭이를 집어든 채 삼 초 가량 행동을 정지했다. 유신에게는 의외이다 못해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왜 그래? 그 날 나랑 뭐 하려고 했어?"

"음, 아니."

좋게 말하자면 담백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배려가 없는 답변이다.

"근데 왜?"

"나도 가거든, 거기."

이번에는 유신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무를 쳐다본다.

"아는 분한테 초대를 받았어. 부산이 멀긴 한데, 거절하기도 뭐한 분이라."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깜빡했어."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런 거짓말을 해서 그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없어 보였으므로 유신은 부러 캐묻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가 누구에게 초대를 받았는지는 궁금했다. 미대를 나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갤러리에서 전시할 법한 순수 미술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나무다. 캐릭터를 그리거나, 게임의 배경을 그리거나, 때로는 책의 삽화를 그리거나. 그의 손에서 태어나는 작품은 거진 대중 미술에 가깝지 않나.

그런 물음을 입에 담으니 나무는,

"기차 안에서 이야기해 줄게."

하며 웬일로 일을 미루는 것이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그에게 일감을 미루어 그에 대한 답을 지금도 듣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만.

옆 자리의 일러스트레이터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그는 시선을 한 번 이쪽으로 주었다.

"화장실 가고 싶어?"

"아니."

그는 얄쌍한 시선을 태블릿으로 되돌렸다.

동대구를 지나고 나서야 나무는 태블릿을 닫았다. 좌석에 등을 기대고 턱을 조금 당겨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사각 테 안경의 다리를 잡아 고쳐쓰고 나서, 그는 대뜸 물었다.

"얼마나 남았지?"

"삼십 분 정도?"

"한참 남았네."

"물 같은 거 사다 줄까?"

"아니, 괜찮아."

"그래도 기차 안에서 완성해서 다행이네."

"음."

태블릿을 주섬주섬 가방 안에 넣는다. 뒤로 매는 배낭인데,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 좌석 밑에 두었다. 어차피 이틀만 있을 거니까 옷도 많이 필요 없잖아, 라는 나무의 의견에 유신은 다소 동의하기 어려웠다. 속이 가득 찬 유신의 캐리는 객차 밖 물품보관함에 넣어두었다.

"한 선생님한테 초대받았어."

맥락없이 뛰어든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의 타임 랙이 필요했다. 며칠 전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서론 정도는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 갤러리 주인 분?"

"주인이라고 할까. 재단 대표님이시지."

거기서 나무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기숙사제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미술에 흥미가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바둑 전문고등학교에 진학했기에 미술의 미 자도 찾아볼 수 없는 커리큘럼 속에서 생활했지만, 그래도 소정의 자유 시간은 있었다. 나무는 그 시간을 십분 활용해 그림을 그리곤 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기숙사 안에서 디지털 그림을 그리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이젤을 들일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건 화장실에서 물을 길어와 책상보다 작은 도화지에 물감을 칠하거나, 아예 4B연필과 지우개만을 이용해 책을 보고 데생을 하는 것뿐.

사감에게 걸린다면 하라는 바둑 연구는 않고 딴짓이나 하고 있다며 한소리 들을 법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나무는 그림을 계속 그렸다. 시간이 흘러 학년이 오르고 바둑으로는 그에게 당해낼 사람이 없어졌을 즈음엔, 방의 침대를 밀어놓고 이젤을 두어도 아무도 터치하지 않았다.

완성한 그림은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보관할 장소가 여의치 않아 인터넷에라도 남겨두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남에게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은 적었기에 개인 블로그를 개설해 하나하나 저장했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건지 신원 미상의 네티즌이 그의 그림을 멋대로 퍼가 다른 웹사이트 게시판에 업로드해버렸다. 그 뒤 블로그의 트래픽이 늘어났다. 칭찬의 댓글과 비난의 댓글이 일정한 비율로 달렸다. 인터넷이란 정말이지 제멋대로에 성급하고 시끄럽기까지 한 곳이군, 하고 열 여덟 살의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트래픽의 홍수에서 나무는 한 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몰랐는데. 퍼간 글이 사이트 메인에 걸렸었대. 거기서 본 내 그림이 마음에 드셨는지 블로그에 걸어둔 메일로 연락을 하셔서."

괜찮다면 어느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냐고 했다. 딱히 거리낄 것도 없어서 바둑 전문고등학교에 다닌다고 답장했다. 그러자 혹시 미대로 진학할 의향이 있냐고 물었다. 의향은 있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해서 곤란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안타깝네요. 혹여 나중에라도 미술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꼭 연락주세요.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미대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 송 군, 미대 나오지 않았어?"

"나왔지. 그러니까 지금 갤러리에 가고 있고."

"집안 반대가 심했다며?"

"설득했어."

"설득당해주셨어?"

"응."

나무는 유신이 보내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은근슬쩍 피한다.

"한 선생님, 졸업 전시 때도 보러 와주셨고. 지금도 가끔 연락 드리지."

"흐음. 미대에도 과가 있지? 무슨 과였는데?"

"회화과."

"우와, 디자인 쪽이 아니었구나. 순수 미술이잖아. 아,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아까 같은 그림이 송 군 화풍이라고 한 거구나!"

"아, 뭐...... 그렇지."

데포르메가 적고 채도가 낮은 극화체의 그림. 나무야 여러 그림체로 다양한 분야의 그림을 그리기는 하지만, 평소 그가 sns에 업로드하는 그림의 대다수는 채도는 가변적일 언정 애니메이션을 닮은 데포르메를 갖는다. 그의 주 수요층이 그쪽인 탓도 있을 거다.

"졸업 전시 때는 뭘 그렸어? 궁금하다~"

"뭘 그렸더라......"

그가 의도적으로 어물대는 사이 안내 방송이 울렸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마지막 역인 부산역에 도착합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빠르고 편안한 우리 열차를 이용해주신 고객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오동현이 한선혜라는 이름의 미술가에 대해 알고 있던 정보는 다음의 두 가지였다.

- 한때 비극적인 사고를 겪어 뉴스에 나왔던 사람. 동현은 한선혜라는 미술가의 존재를 그때 처음 알았다.

- 설치 미술에 조예가 깊다. 이것 역시 뉴스를 보고 안 사실이다.

뉴스에 나왔다고는 하지만, 이건 사실 동현이 대학에 입학해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던 십 몇 년 전의 이야기다. 기억의 저편에 잊혀지다시피 방치되었던 것을 유선의 언질로 겨우 되살리긴 했지만 이게 정말 옳은 사실인지도 의문스럽다.

"한선혜? 이름이라면 알고 있는데......"

그러자 유선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곤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왜 알고 있지?"

"한참 전에 뉴스에 나왔던 사람이잖아? 유명한 화가였는데 사고를 당해서 전신마비가 됐다고."

그 뒤의 근황이라면 물론 알지 못하는 동현이다. 유선이 그녀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걸 보니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상식은 부족하지만 온갖 가십은 죄다 기억하는 경향이 있어, 너."

"칭찬이지?"

"칭찬 같냐?"

그녀 식의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분이 부산에 갤러리를 하나 세우셨는데, 오픈 기념 리셉션 자리에 초대받았어."

"와, 부산?"

"연휴에 일 없지?"

봄이 절정에 이른 지금, 연휴라고 한다면 당연히 5월 초의 어린이날 연휴를 이야기하는 걸 테다. 평소에도 일거리가 많지 않은 비인기 탐정 동현은 물론 한가했다. 애인이라도 있었다면 좀 달랐겠지만, 안타깝게도 여태까지의 그의 인생에 있어 애인이라는 객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산에 일이 있다고 이야기한 지금의 맥락에서 연휴의 일정을 묻는다는 건......

"어, 음."

쉽사리 말을 못하고 있으니 유선은 싸늘한 눈으로 뒷말을 보챘다.

"있어?"

"아뇨."

"그럼 운전 좀 하자."

"음, 서울에서 부산까지?"

"응."

"기차 타는 게 빠르지 않아?"

"역에서 갤러리까지 딱히 교통편이 없다. 접근성이 안 좋은 편이라."

택시보다는 내 차가 편할 것 같아서, 라고 제멋대로인 대표는 뒤이어 말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가용을 끌고 내려가면 평균적으로 5시간 반이 소요된다. 그렇다면 왕복으로는 11시간. 이래서야 자고 일어나서 운전만 하는 수준의 스케줄이 아닌가. 게다가 연휴라면 온갖 도시에서 밀려나온 차들 탓에 정체도 상당할 텐데.

염려의 말을 은근슬쩍 입에 담으니, 유선은 눈동자만 위로 굴려 동현을 올려다 본다. 쏘아보는 건지 쳐다보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눈이다.

"뭔 소리야? 하루 자고 올 거야. 차로 부산 왕복을 하루만에 어떻게 하냐?"

"자, 자고?"

"기름값도 밥값도 숙박비도 내가 낼 거니까 네가 거리낄 건 없겠지."

실로 거리낄 일 없는 제안이었다.

그런 고로 동현은 이틀 간 J로펌 대표 변호사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게 된다.

일단은 공적인 자리에 가까우니 툭하면 입고 다니는 그 헐렁한 옷가지를 갈아 치우지 않으면 차에도 타지 못하게 하겠다는 엄포를 들었다. 제 패션 센스가 나름 포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동현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과 같았다.

"그럼 뭘 입어?! 셔츠?"

멍청한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는 신조가 있는 유선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작은 옷장을 최대한으로 뒤져 찾아낸 하얀 셔츠와 고동색 슬랙스를 걸치고 아침 일찍 약속 장소로 나가니 평소와 비슷한 차림의 유선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합격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 봐줄 수준의 차림은 아니다, 라는 듯한 반응이다.

함께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차에 올라탔다. 유선의 은색 아우디의 핸들은 꽤나 자주 잡아보았다. 익숙하긴 하지만, 비싼 차라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힘이 저절로 실린다. 유선은 당연하게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잘 테니까 배고프면 알아서 세워."

"안녕히 주무십쇼."

오늘의 주행을 위해 어젯밤 일찍 잠에 든 덕인지 전혀 졸리지 않다. 쌩쌩하다 못해 상쾌한 정신으로 부드럽게 달리는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으니 텐션도 살짝 오른다. 백미러로 뒷좌석의 상태를 슬쩍 살피면, 그곳에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동갑내기 대표 변호사가 있다.

그것이 동현에게는 좀 많이 기뻤다.

유선과의 교류도 어느덧 십 년이 훌쩍 넘었다. 대학 시절 별것도 아닌 사건으로 처음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동현의 피나는 노력으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대체 무엇을 위해 그가 그녀에게 이렇게 헌신하고 있는가 하면, 뻔하지만 사랑 때문이다.

널 보면 사랑이라는 건 정말이지 저주라는 게 체감이 된다.

둘도 없는 친구는 동현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대학 시절의 동현은 근처 대학에 다니던 유선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에 와서는 솔직히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하여간 무리 안에 있어도 빛이 났다. 어쩌다가 이쪽과 눈이 마주치면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동현은 정말로 그녀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녀가 대형 로펌의 변호사고 그가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탐정이었던 건 하나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재판에 필요한 재료라면 위법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작이 필요하면 손을 쓰기도 했다. 유선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해내야만 했다.

그녀도 동현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을 거다. 오래도록 붙어서 자의적으로 온갖 일을 하고 있으니 최소한 자신에게 무언가의 호감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비서 이상의 관계로는 진전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동현의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송금 이력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동현이 현재의 관계에 불만이 있는가 하면, 전혀 없는 게 사실이다. 매일매일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생계가 위협받지 않을 정도의 정기적인 수익까지 얻는다. 법이라고는 경범죄 조항만 달달 외운 자신이 로펌 변호사의 곁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이 세상에 감사하고 싶어진다.

그녀와 특별한 관계가 되지 않아도 좋다. 이대로 평생 그녀를 보좌하며 산다면 행복할 것 같다.

동현은 어느 순간 그런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갤러리 헴은 3층 규모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같은 모양의 한 층 한 층은 긴 타원을 정확히 사등분하여 떼어낸 듯한, 유선형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게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형태를 띤다. 타원의 긴 모서리 오른편에 위치한 1층의 정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게 프론트, 그 뒤로 작게 꾸려진 것이 스태프룸. 시선을 조금 돌려 왼편을 바라보면 크게 펼쳐진 전시 공간과 수평선이 빤히 보이는 해안절벽 쪽으로 난 통창이 잠시 관람객을 압도한다.

하지만 곧장 통창의 차양인가, 싶은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통창 앞에 놓인 테이블과 소파 세트에 묘한 각도로 그림자를 드리운 그것은 물론 차양이 아니다. 창의 왼쪽 아래편에서 시작된 경사로다. 완만하게 휘어진 창을 따라 난 길고 긴 경사로는 갤러리의 1층과 2층을 잇는 유일한 통로다.

2층 역시 전시 공간이다. 1층보다는 창의 비율이 현저히 적다. 햇빛에 노출되면 곤란한 작품들이 주로 전시된다. 하지만 가장 큰 특이점은 역시 전시장 왼편에 자리잡은 '작가의 방'일 것이다. 갤러리 헴에서 전시회를 여는 작가의 임시 작업실로 활용되는 장소로, 전시물에 더불어 작가가 작업하는 모습 내지 현장을 가감없이 공개하겠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실험적인 공간이다.

지금은 양개형 폴딩 도어로 닫혀 있어 안이 보이지 않는다. 전시 기간에도 작가의 방이 공개되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작가는 보통 폴딩 도어 옆에 난 작은 관계자용 문으로 드나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관계자용 문이 안에서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건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인 이아영이다. 반팔 티셔츠 위에 토시와 미술용 앞치마를 입은, 편한 것도 같고 편치 않은 것도 같은 차림새. 차분한 긴 생머리는 작업에 방해가 되는지 위로 올려 묶었다.

어딘가 나른한 인상을 주는 길고 얇은 눈이 방문자 두 사람을 보고 조금 크게 뜨였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리셉션 도슨트를 맡게 된 최은수입니다."

턱 밑에서 깔끔하게 잘린 단발. 사각 프레임의 반무테 안경과 하얀 와이셔츠. 단어 하나하나에 힘이 실린 말투는 언뜻 고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무표정한 얼굴 탓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바로 옆에 서 있던 곱슬머리의 남자가 미덥지 못한 말씨로 뒤를 이었다.

"보, 보조 도슨트 박서진입니다."

이쪽도 같은 복장에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 둥근 금테 안경이다. 딱히 억울할 일도 없는데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 인상적인 남자다. 울적한 입술 왼편 아래에 점이 하나 있다.

나란히 서 있으니 신장이 얼추 비슷하다. 서진이 등을 약간 굽히고 있어 감가상각을 적용해야 할 것도 같긴 하지만, 대체로 은수가 여성치고 장신에 서진이 남성치고 단신인 것이리라.

"아,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 안에서 작업 중이신가요?"

은수가 물었다. 살짝 열린 관계자용 문 너머의 모습을 살피는 시선을, 아영은 가만히 바라본다.

"네...... 정식 오픈 전까지는 완성될 것 같아요."

그렇다는 건 작품 선행 공개가 예정된 리셉션까지는 완성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었다. 도슨트로서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다. 전시 설명의 일관성이 약간 해쳐지긴 하겠으나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다. 그녀의 선생이자 갤러리의 주인인 한선혜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뒤에 뵙겠습니다, 라는 말을 끝으로 작가와의 짧은 대면은 끝이 났다.

관계자용 문이 닫히는 걸 보고 있으니 은수의 옆에서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서진이 조금 놀란 얼굴로 어깨 뒤를 쳐다보고 있다. 천에 덮힌 조형물에 등을 부딪힌 모양이다.

"뭐하는 거야? 칠칠치 못하게."

"깜짝 놀랐네......"

작가의 방 앞에 설치된 이것이 바로 이번 전시회의 대표작이다. 옷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네킹을 어떻게 잘 자르고 이어붙이고 조립해서 작가 특유의 감성을 지닌 설치 미술 작품으로 만들었다, 고 하지만, 실은 아직 미완성이다. 작품에 필요한 마네킹 몇 체가 완성되지 않아 작가는 지금도 작가의 방 안에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뒤에서 누가 찌르는 줄 알았어."

서진이 눈썹을 팔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말이 좀 짧네?"

서진은 입술까지 팔자 모양이 된다.

"......뒤에서 누가 찌른 줄 알았습니다."

"마네킹의 손 부분이겠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은수는 딱 한 번 피식 웃었다.

작가의 방 오른편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지나 계단으로 향한다. 1층과 2층은 경사로로 이어져 있지만, 2층과 3층은 엘리베이터와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레스토랑으로 꾸며진 3층의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 3층을 1층과 같이 경사로로 연결했다간 음식을 조리하는 소음과 냄새가 2층의 전시 공간에 흘러나오게 될 테니 어쩔 수 없는 조치다.

계단을 오르면 또다시 탁 트인 전망이 두 사람을 반긴다. 넓은 창 너머로 보이는 오늘의 날씨는, 묘하게 흐린 하늘. 강원도 쪽으로 태풍이 직격한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게 설마 부산에까지 영향을 끼친 걸까. 은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레스토랑 안으로 시선을 옮긴다.

갤러리의 주인은 주방 쪽에서 셰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표정이 썩 좋지는 않다. 계단을 오르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은발의 거장은 이쪽으로 몸을 돌린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은수 씨. 태풍이 말이죠, 낌새가 이상하다고 하네."

"태풍이요?"

눈동자가 무심코 창으로 향했다. 두꺼운 구름은 방금 전과 같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경로가 갑자기 바뀌었다나 봐요. 동해 해안선을 따라서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거 같아."

곤란한 상황이다, 라고 은수는 생각했다. 태풍 예보야 며칠 전부터 있었지만, 동해안 해역 내지 강원도 동쪽에만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기에 리셉션은 강행되었다.

앞으로 두 시간 후면 리셉션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초대객이 이미 부산으로 향하고 있지 않을까. 안 그래도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 1층의 직원들을 도와 초대객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곤란하군요. 어쩌면 종료 시간을 조금 앞당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역시 그렇죠? 날씨를 계속 보고 있어야겠네."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한선혜는 일일 도슨트에게 웃어보이곤 한 손으로 전동 휠체어를 조작해 레스토랑 안쪽으로 셰프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레스토랑에서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가면 그대로 옥상이 나온다. 엘리베이터 홀과 계단실을 빼면 있는 거라곤 환풍구와 난간이 다인 황량한 공간이다. 갤러리의 주인께선 옥상까지 꾸밀 생각은 없으셨던 모양이다.

여태 쥐죽은 듯이 조용히 있던 서진은 계단실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우물대며 입을 열었다.

"태풍이 오면......"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수준의 음량이다.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은수는 두 손으로 난간을 잡고 칙칙한 하늘을 올려다 본다.

"산사태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아...... 서요."

"갤러리로 들어오는 그 길 말이지?"

절벽 위에 세워진 이 갤러리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두 언덕의 사잇길을 지나야 한다. 같은 차로 온 은수와 서진 역시 그 길을 지났다. 위태위태하게 심긴 나무들이 퍽 인상적이었던 길이었다.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면 다들 뿌리 째 뽑힐 것 같긴 했지만.

문제는 갤러리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오로지 그곳뿐이라는 점이다.

"진입로가 하나밖에 없는 건물이라는 거, 역시 황당하군.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갤러리를 만든 건지."

"바다가 잘 보이잖아...... 요. 음, 게다가 부산이면, 웬만한 곳엔 전부 건물이 있고."

"절벽으로 뛰어내릴 수 있어?"

"예? 갑자기 무슨."

"절벽으로 뛰어내려서, 암석에 매달려서, 여기서 나갈 수 있냐고 묻는 거야."

"아, 아니요?"

"뭐야, 좀 기대했는데."

"못 해, 그런 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새카만 먹구름이 점차 제 몸을 불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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