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細道) (23-1-21 수정)

GONE ・ 2024. 1. 17. 2:54

조명 밑 by 타원
4
0
0

떠날 수 없는 계절이 있으리라고 인주는 생각한다.

시간이 겹겹이 쌓여 눌어붙어도 그 가운데 우뚝, 영원히 멈춰버린 한 때가 있다고. 그리고 인주의 떠날 수 없는 계절은 초겨울이리라. 둥글게 몸을 말고 누워 떨어지는 낙엽을 온 몸으로 맞고 있다. 아마도 인주는 영원히 여기 멈추어 있을 것이다.

모로 누워있다보면 곧내 눈물이 흘러 배게를 적신다. 그렇게 흐르는 눈물은 거짓말이다. 이유도 알 수 없는데 제멋대로 흘러나온다. 내버려 두는 수 밖에 없지만 뜨겁고, 축축하고, 찝찝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은 간단하다. 천장을 보고 바로 누우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인주에겐 천장을 바라보는 일이 너무 두렵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가 난다. 바로 눕는 일은 너무나도 버거워서 고개를 돌리고 등허리를 만다.

축축한 눈꺼풀을 감고 인주는 상상에 빠진다. 덮은 이불이 점점 무거워져 인주를 짓누른다. 마침내 수천만년이 지난 먼 미래, 미래인들이 이불로 된 퇴적층을 파낸다. 온갖 퇴적물들 사이로 화석이 된 인주가 보인다. 물기없고 딱딱한 인주의 화석은 분명 생명의 반댓말같다. 미래인들은 인주의 화석에 온갖 화학처리를 하고 <암모나이트>라 적힌 이름스티커를 붙인다. 그리고는 똑같은 방법으로 들어온 수많은 똑같은 화석들이 진열된 장에 전시 되겠지. 만일 청소부가 깜박하고 인주의 화석을 다른 <암모나이트>의 위치에 둔다면, 그들은 그 암모나이트의 이름이 인주인지 개인지 모를 것이다.

이 이야기를 개에게 들려주었을 때, 개는 예의 그 구멍이 숭숭 뚫린 천 같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인주 너 박물관 한 번도 안 가봤구나?"

1

개라고 불리우는 남자가 있다. 개가 날 때부터 개자식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처음부터 개자식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주혈이었다. 잘나가는 기업의 부회장이라는 아버지 옆에 붙어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항상 내 앞자리에 앉는 서주혈. 뒤통수마저 나와 다른 인간 종같은 서주혈. 한 눈에 봐도 고급져보이는, 내가 알 턱이 없는 고급 브랜드의 옷을 빼 입은 채 소년 성가대 중앙에서 당당히 찬양하는 서주혈. 제게 몰려드는 인파를 제치고 금새 고급 차를 타고 떠나버리던 서주혈. 벌써 6년 전이었다. 나의 주일은 주없는 일요일이 되었으니까, 그 후로 서주혈이 교회를 계속 다녔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나는 재개발이니 뭐니 어른들의 온갖 냄새나는 사정에 흔히 말하는 쪽방촌으로 밀리고 밀려 이사 했다. 그것도 얼마 안되어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고 누나는 엄마와 친정으로 떠났다. 그렇게 살기위해 살다보니 술만 퍼마시던 아버지가 죽었다. 교회를 나가지 않은지 5년째였다.

누가 보아도 비행청소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정신 못 차리는 내 앞에 섰다. 담배를 물고, 한 눈에도 오래된 더러운 옷을 입은 채로.

서주혈이 개가 되어 나타난 것은 여섯 달 전이었다.

2

"켁, 컥.. 헉 으헉 콜록,콜록 컥…." "야, 너 많이 컸다? 응? 정말, 내가 말만 걸어도 빨개져서는 후다닥 도망치던게 엊그제 같은데 말야. 응? 정신 차려." 그렇게 말하며 개는 인주의 배를 발등으로 걷어찼다. 타들어가는 목으로 숨이 거세게 터져나왔다. 인주는 간신히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해 서다 만 채로 엎드렸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쇼를 해라 그냥. 야 일어나라니까? 으응?" 개는 목소리를 까뒤집어가며 인주의 꼴을 비웃고는 거칠게 어깨를 잡아 세웠다. 개가 코맡에 물컵을 가져다대자 인주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들이마셨다. "살거같냐 이제? 6년만에 보는 꼬라지가 자살기도 하는 꼬라지라니 보기에 참 좋다, 그지?" 모자란지 생수통 째로 비우고는 쌕쌕대던 인주가 그제야 개를 올려다 보았다. 서주혈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원래의 서주혈을 이루던 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멀끔한 그 얼굴만은 서주혈이었다. 인주는 고개만 치켜들은채로 얼어붙었다. 더 이상 목구멍에서 소리를 꺼내지 못하는 인어공주가 된 것 처럼. 다리를 달고 뭍으로 올라와 왕자를 처음 마주한 인어공주처럼. 둘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감동적인 재회는 오래가지 않았다. 개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에서 재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 이런 씹, 앗 뜨" 개가 경박하게 욕을 뱉으며 제 발등을 쥐어잡았다. 그 바람에 개의 무릎이 인주의 턱을 가격했고, 인주의 필름은 거기서 끊어졌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