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

구라쟁이 by 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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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전쟁의 문턱에서 AU

  • 신의 축복을 받는 조지 6세 폐하의 정보부는 그 자체로 교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일요일 꼭두새벽부터 본부 건물에 불려 나와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나는 그다지 독실하지 않은 성공회 신자로서 다른 직원에 비해서는 이 호출을 달갑게 여기는 편이었지만, 10월 2일의 <예배>만은 예외였다.

  • 체임벌린이 뮌헨에서 들고 돌아온 평화에 영국 전역이 기뻐한 반면 SIS 5국 독일 담당 부서가 위치한 본부 3층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회담을 틈타 기밀문서를 수취하기 위해 육군 소령을 보내는 계획은 군이나 화이트홀과는 무관한 건 물론이고 정보부 안에서도 나를 포함한 몇 명만이 관여된 작전이었지만, 그 소령이 자신과 접촉한 정보원을 영국으로 데려온 이상은 이 작전을 정보부의 비밀만으로 놔둘 수 없었다. 외무부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의 다른 부처들에서도 벌써 몇 번이나 확인 요청이 들어왔는지 밍이즈 대령의 비서는 이미 전화기 앞을 지키고 서서 벨이 울릴 때마다 끊어버리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대령은 짧은 브리핑 내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작전은 성공했고, 소령은 이마가 길게 찢어지긴 했지만 무사 복귀했으며, 외무부는 독일로 비행기를 한 대 더 보내야 했던 것에 불같이 화를 냈을 뿐 아직 작전의 내막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온 이방인을 인도하기 전 며칠간 심문해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을 선심 쓰듯 받아들였다. 「헨더슨 경에게도 전보를 쳐야겠군.」 근엄한 얼굴에 걸맞지 않게 시름에 잠긴 목소리로 말하며 대령이 문 쪽을 턱짓했다. 나는 통신 보조 명목으로 사절단을 따라갔던 체스터 중위와 함께 나란히 대령의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뒤 그는 곧장 위층의 통신실로 향했고, 나는 약 30분 전 본부에 도착한 <망명자>를 만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취조실 안에는 나보다 일찍 도착한 속기사 루이스 양과 함께 낯선 얼굴의 남자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사람이 비밀 조직의 첩보원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는데, 키가 무척 크고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데다가 제법 특징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툭 튀어나온 눈썹뼈와 콧대보다도 핏줄이 비쳐 보일 정도로 핼쑥한 안색이 먼저 눈에 띄었고, 목덜미를 반 정도 덮게 내버려둔 검은 곱슬머리가 이마와 귓가까지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표정에서는 그를 당장이라도 땅 밑으로 끌고 갈 것만 같은 피로 외에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삼십 대 중후반의 남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유령이나 시체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은 묘사일 것처럼 보였다.

내가 자리에 앉자 남자가 눈을 치켜떴다. 「시작할까요?」 나는 대령이 내게 쥐여준 서류철을 펼치며 그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지친 얼굴 위로 무료함이 엷게 떠올랐다. 「이름이?」

「스타니슬라프 빌체크, W-I-L-C-Z-E-K라고 씁니다.」

「네, 제대로 적혀 있네요.」 나는 만년필 뚜껑을 열고 그의 이름 아래 밑줄을 그었다. 「영어로 진행해도 괜찮겠죠? 폴란드어를 할 줄 아는 속기사를 못 구해서요.」

「상관없어요. 폴란드어는 나도 잘 못 하거든요.」

달랑 한 장짜리 서류는 이름을 제외한 모든 서식이 비어 있는 채였다.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빈칸을 채워나갔는데, 모순적이게도 신상 정보를 밝혀낼수록 당사자에 대해서는 점점 모호해지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서른여덟 살이 된 이 피아니스트에게서는 목숨을 걸고 기밀문서를 빼돌릴 이유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도 가톨릭도 아니었다. 전쟁을 냉소하긴 해도 행동으로 옮길 정도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고, 폴란드인이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희미했다. 어쩌면 가족과 무언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철제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을 흘끔거렸다. 깍지 낀 양손에는 낡다 못해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한 손목시계를 제외하고는 아무 장식도 없었다. 부인이나 연인이 아니라면 친구일지도 모르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부추김 때문에 이런 일에 발을 들여놓곤 했다. 물론 그들의 최후는 대개 좋지 않았다.

나는 펜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으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처음부터 말해 주시면 됩니다. 천천히, 하나도 빼놓지 말고요.」

「처음부터라면?」

「당신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남자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낼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피워도 되겠습니까?」 그가 구깃구깃한 남색 정장 재킷 안쪽에서 주홍색 패키지의 렘츠마 담뱃갑을 꺼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에 불이 붙는 동안 나는 루이스와 시선을 교환했다. 루이스는 내게 입 모양으로 왜 이렇게 늦게 도착했냐고 물었고, 나는 눈짓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루이스가 안쓰럽다는 듯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작게 저었다.

불붙은 담배를 끼운 길쭉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느긋하게 두드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스위스의 <라 그랑드> 호텔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린델발트에서도 차로 두 시간쯤 더 걸리는 산골에 있긴 해도 유명한 곳입니다, 한때는 저주받았다는 소문도 돌았었죠. 소문이야 믿거나 말거나지만 실제로 거기서 죽은 유명인도 있었어요. 아니면 거기서 죽어서 유명인이 됐거나.」 낮고 속삭이는 것 같은, 슬라브인 특유의 투박한 발음으로 내뱉는 말을 들으며 몇 년 전쯤 영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올드린 사건>의 죄책감에 자살했다고 알려진 클리프 대령이 사망한 곳이었다. 덕분에 영국인들이 줄지어 그 호텔을 찾았다는 기사도 언젠가 읽은 적 있었다. 어쩐지 떠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고, 그는 조금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그곳에서 일하는 건 피아니스트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일 겁니다. 편안한 직원용 숙소에, 휴식 시간이면 언제든 잘 꾸며진 유리 온실을 구경할 수 있는 데다가 음식은 어떤 걸 골라도 놀랄 정도로 맛있죠. 가 보신 적 있나요?」

나는 그가 늘어놓는 향수 젖은 회상에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저었다. 스위스의 고급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건 정보국에 앉아서 보고서나 분류하는 장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였다. 대령 정도면 몰라도. 태생부터 운이 좋았던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입술을 안으로 말아 다물었으나, 다행히도 금세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끼리는 그를 <박사>라고 불렀어요. 실제로 박사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건 중요하지 않았죠. 스위스의 관광지는 한창 스키를 탈 수 있는 겨울에 붐비고 여름에는 한산하기 때문에 한여름에 호텔을 찾는 투숙객은 직원들의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됩니다. 비록 그가 더위를 잊은 사람처럼 모직 코트를 입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로비를 가로질러 다니며 전화를 사용하긴 했어도, 세 달치 여름휴가를 즐기는 부자 남유럽인들 사이에 새로 등장한 투숙객이 아니었다면 전혀 시선을 끌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어느 저녁에 내 연주가 마음에 든다며 말을 걸어왔습니다. 무슨 곡이었는진 기억이 안 나는데, 호텔에서 연주하다 보면 가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돼요. 대화할 일행도 없고 라운지도 텅 비었을 때 눈에 띄는 아무에게나 견문을 뽐내고 싶어 하는……」 그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짧은 숨을 뱉을 때마다 입술에서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아무튼 그는 내가 독일어를 할 줄 안다는 점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처럼 보였고, 베를린에서 몇 년간 유학한 적 있다는 얘기를 아주 좋아했어요. 애국자인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독일 제국>은 그의 조국이 아니었을 뿐이지.」

나는 <박사>도 대령과 비슷한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더 아는 건 없습니까? 이름이나, 생김새라든지.」

「이름은 모릅니다. 알려줬더라도 가명이었겠죠. 척 보기에는 50대쯤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책상 앞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 특유의 둔해 보이는 체격에다 키는 나보다 한참 작았어요. 모자 챙이 내 턱 근처에 왔으니 170센티미터 정도였을 겁니다. 옷차림은 인파 속에서 이목을 끌지 않을 정도로만 깔끔했고요. 세월의 흔적이 적당히 느껴지는 기성복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죠. 또 뒤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부분적으로 희끗희끗했고 독일인답게 쌍꺼풀이 깊은 눈은 갈색이 섞인 회색이었는데……」 그가 눈썹을 매만지며 말꼬리를 흐렸다. 「확실하진 않아요. 시력이 안 좋은 건지 항상 동그랗고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거든요.」

평범한 중년 신사의 몸통 위에 손가락으로 문지른 듯 흐릿한 인상의 얼굴이 달린 이미지 이상으로는 그려지지 않았다. 조사가 끝나면 몽타주를 만들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리고?」

「빌헬름슈트라세Wilhelmstraße나 군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일찌감치 은퇴한 고위 공직자거나.」 그가 고개를 들어 타자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루이스는 자판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아 적는 중이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성격, 말투, 모든 게 평범했어요. 알렉산더 광장 근처를 10분만 걸어 다녀도 그와 비슷한 남자를 다섯 명은 볼 수 있을 겁니다. 공원을 걷거나 트램에서 신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에 스며들 수 있는 사람이죠. 그를 찾아내긴 어려울 거예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박사>가 정말 관료나 군인이라면 쉽게 거주지를 옮기진 못할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SIS의 감시망에 독일만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지. 나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 같냐고 물었고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야 모르죠. 작전이 실패했으니 벌써 멀리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독일 북부나, 프랑스나 체코슬로바키아 ― 아, 거기도 이제 곧 독일 차지가 되겠군. 아니면 다시 스위스?」

나는 그가 적어도 우리 입장에서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물론 독일의 이름 모를 비밀 조직에게는 그렇지 않겠지. 문서의 행방은 둘째치더라도, 수하에 두고 있었던 공작원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보다 더한 실패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곳이었다면 아마 그 뒤로 몇 년은 웨스트민스터에 얼굴도 못 들이밀었을 것이다. 아니면 구석에 처박혀서 우편 분류나 하게 되거나.

하지만 나는 대령이나 C가 <박사>라는 인물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첫 번째로 한 발 일찍 가로채 온 문서의 진위를 확인하는 게 중요했고 두 번째로 단 사흘간 뮌헨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진술을 듣고 파헤쳐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이 사람을 영국 한복판에 그냥 돌아다니게 풀어놓아도 될 만큼 믿음직스러운지 진단해야 했다. 여기엔 아주 단순한 척도만이 사용된다. 공산주의자나 파시스트인가? 영국을 떠나 적국으로 갈 위험이 있는가? 망명자를 가장한 트로이의 목마인가?

나는 취조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가 우리 편이라는 걸 직감했다. 적처럼 보이진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의 말을 완전히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가 담배를 입술에 문 채 생각에 잠겨 낮은 콧소리를 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처음부터 나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쉽게 배경에 녹아들 수 있는, 신분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도 공식적인 자리에 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이왕이면 영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고 어느 정도 내세울 만한 경력도 있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난 꽤 실력 좋은 피아니스트거든요.」

SS는 반나치 단체에서 모스 부호를 두드리는 통신원을 <피아니스트>라는 암호로 부르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피아니스트>는 아니었다. 그의 손가락은 전신기를 누르는 것보다도 훨씬 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그의 경력에 대해 질문했고 그는 흔쾌히 대답해 주었는데, 바르샤바의 음악 학교와 독일 유학 생활에 있었던 몇 번의 공연에 대해 말하는 모습은 이 남자가 영락없는 예술가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물론 <라 그랑드>에서 근무한 것도 근사한 이력이죠.」 그렇게 말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호텔을 떠나서는 계속 베를린에 머물렀던 것처럼 들리는군요.」

「한 곳에서 오래 지내진 않았어요. 베를린과 뮌헨, 특히 쾨니히스플라츠Königsplatz 근처였죠. 중요한 일은 거의 그곳에서 일어나요. 이번에도 그랬고.」

「다른 얘기를 해 보죠. 그들은 콕 집어서 뒤프리스 소령을 회담 장소에 불러냈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영국인이 필요했거든요. 총리와 대사들을 따라 뮌헨에 올 수 있을 만한 영국인. 대사관 직원, 장관 비서, 아니면 통역사라도.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과의 연결을 찾아내지 못했어요.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그 사람은 한때 독일 북부에 발령받은 적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군인이었는데요.」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영국 군인이죠. 런던에서 근무하니 정부 기관 쪽에도 연이 있을 것 같았고, 남작 집안 아들이라는 보장된 신분에다가 나름대로 주변에 신뢰가 두터운 인물일 테고……. 거기에 <더 가디언>을 읽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덧붙였을 뿐이에요.」

「당신이 아는 사람이었군요.」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아무나 골라서 불러낸 게 아니라는 뜻이군. 「이쪽으로 온 요청은 해외방첩청의 프란츠 대령이 보낸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 신호가 진짜인지 허위인지 판단하는 데 애를 먹었어요. 정말로 방첩청 대령씩이나 되는 사람이 도움을 청한 게 맞는지 파악해야 했죠. 가뜩이나 시간도 촉박한데.」

「그래요, 그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당연하게도 전혀 미안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당신들 쪽에서 거절하기 힘든 제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건 내 생각이었습니다. 당신들의 시간만 촉박한 게 아니었어요. 그 문서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나 다름없었거든요.」

정말로 그랬다. 정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몰라도 그와 접선하는 것만으로도 기대를 걸어 볼 가치가 있었다. 뒤프리스 소령은 십여 년 전 함부르크 근처에서 전후 수습을 하며 보낸 기간 동안 독일인 방첩청 장교와 교류한 기억을 전혀 끄집어낼 수 없었고, 정작 프란츠 대령이라는 사람은 회담장 근처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이 남자가 아무것도 모른 채 전령으로 이용되기만 한 불운한 피아니스트라는 생각 위로 두 줄을 그었다.

「소령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말해 주세요.」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그가 뛰어난 스파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표정을 숨기는 덴 형편없을 정도로 재주가 없었다. 아니면 숨기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고 있었거나.

목구멍 사이로 쥐어짜내는 것 같은 작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1934년 겨울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찡그린 표정을 하고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이 앙상한 남자가 그 자세 그대로 나무껍질처럼 바스러져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해야 했다. 「커피를 한 잔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목이 타는군요. 비행기에 탔을 때부터 비스킷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나는 취조실 문을 열고 바로 보이는 당직 직원에게 커피 세 잔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목덜미 근처를 쳐다보기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와 함께 각설탕 몇 조각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먼저 몽땅해진 담배를 커피 소서에 내려놓은 뒤 천천히 입술을 축였다. 아까 전보다는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으나 표정에 스민 어두운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뒤프리스 대위는 호텔 재개장 기념 연회에 초청된 손님이었어요. 1934년 2월. 평범한 일처럼 보이진 않는다는 걸 알지만 우린 거기서 친구가 됐습니다. 그는 내가 연주하는 음악을 좋아했거든요. 나도 그가 마음에 들었고요. 내게 술을 몇 잔 사준 건 차치하더라도 제법 호감을 사기 쉬운 얼굴과 말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 사람이 예전에 육군 모병 포스터 모델이 된 적 있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랬었나? 나는 며칠 전 소령을 불러냈을 때를 떠올렸다. 훤칠한 체격에 단정한 인상이었고, 자세히 뜯어본 적은 없지만 군인스러운 얼굴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나는 그에게 턱짓해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가 조금 확신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그즈음에 스위스에는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호텔을 일찌감치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꼼짝없이 며칠 동안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난감한 상황이었죠. 그 사람 역시 예정보다 며칠 늦게 호텔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 틈을 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호텔, 1934년, 폭설. 모든 길이 <라 그랑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호텔의 저주를 믿어버리게 될 것만 같았다. 「클리프 대령 사건이 있었던 때가 아닌가요?」

한숨과 함께 그의 입안에 남아 있던 연기가 전부 얼굴 위로 흩어졌다. 「네, 뭐…… 그 사건을 아시는군요.」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영국에서는 제법 크게 알려졌었습니다. 유명인사였으니까요. 저 같은 전쟁 후 세대들은 잘 모르지만.」

「어쩐지. 그 후로 호텔을 찾은 영국인이 얼마나 많았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그다음 해 겨울에 호텔을 찾은 손님들의 반 정도는 영국인이었을 걸요. 그 사람도 언젠가 호텔에 다시 들르겠다고 말했어요. 내기를 하나 했거든요. 난 호텔이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폐업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이 사건이 호텔의 유명세를 되찾아줄 거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는 걸 아시겠죠?」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언뜻 쓴웃음이 비쳤다. 「하지만 내가 호텔 일을 그만두고 독일로 떠난 작년 여름까지 그는 한 번도 호텔을 찾지 않았습니다. 런던에서 근무하는 군인이 긴 휴가를 내서 스위스까지 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번호는 받았지만 왠지 전화기엔 손이 안 가더군요. 누군가 내게 그를 잊어버리라고 속삭이는 기분이었어요.」

나는 그가 나를 설득하려고 할 때마다 말투가 연극적으로 늘어진다는 것을 알아챘다. 「친구 사이였다면 처음부터 당신 이름을 밝혀도 됐을 텐데요.」

「그가 여전히 나를 좋은 추억으로 생각할지 자신이 없었어요. 우린…… 글쎄, 싸우진 않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요. 내가 그를 잊어버린 만큼 그도 나를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나를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최대한 안전한 선택지를 고른 거죠.」

이것도 구차한 변명이군. 나는 펜 뚜껑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럼 그 대령은 그냥 이름만 빌려준 거고요.」

「문서를 직접 빼돌린 게 바로 그 사람이에요. 꽤 오래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잘은 모르지만 그것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갔겠죠.」 그가 자기 관자놀이를 검지로 두드렸다. 「적국의 방첩청 수뇌부에 반란 세력이 있다고 생각해 봐요. 바꿔 말하면 당신 상사가 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영국에는 반역 중죄법이 있다는 건 아십니까? 방금 그 발언은 당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겁니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말을 흐리며 그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눈을 깜빡이기 시작하자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왕과 정보부를 모욕하는 망명자 피아니스트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SIS는 게슈타포와 친밀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면 또 뭐라고 할지 모르겠군. 나는 자조하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는 모든 계획이 준비된 후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 이야기했다. 베를린의 작은 호텔에 머물며 기회를 엿보던 피아니스트는 사절단보다 며칠 앞서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향했다. 독일은 협정의 성사를 축하하며 열리는 연회를 이미 계획에 두고 있었고, 거기에 약간의 음악을 곁들이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비록 연주자가 금발에 파란 눈의 독일인이 아니라고 해도 베토벤이나 바그너를 훌륭하게 연주하기만 한다면 상관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연회의 피아니스트는 배경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으니까.

그때 SIS는 전시나 다름없는 행정 업무에 치이던 뒤프리스 소령을 불러 총리와 동행하며 문서를 수취할 의사를 확인했고, 황급히 독일행 사절단 명단의 맨 마지막에 그의 이름을 추가하는 중이었다. 「접선이 무산되면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면 그 서류는 아마 지금도 내 가방 맨 안쪽에 들어 있었겠죠. 지금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지만.」

「참, 문서의 원본은 안전하게 받았습니다.」 나는 그가 이의를 제기하기 전 빠르게 말을 이었다. 「소령의 방에 남아 있던 건 우리 쪽 사람이 만든 복사본이에요. 혹시 모르니 바꿔 두었다는데, 일이 그렇게 될 줄은 그 친구도 몰랐을 겁니다. 급하게 옮겨 적느라 오타가 꽤 많았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입이 벌어지고 미간이 구겨졌는데, 지금까지 보인 그의 표정 중 유일하게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이 개자식들!>이라거나 <지옥에나 떨어져>라는 욕설을 쏟아낼 것처럼 입술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긴 침묵 끝에 마침내 「세상에.」 라고 짧게 중얼거리곤 또다시 신경질적으로 한숨 쉴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다음 날 오전 10시 정각에 그를 다시 만날 때까지 나는 반쯤 정신을 빼놓은 채로 지내야만 했다. 밍이즈 대령은 하루 종일 사방이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개인 사무실 안에서 나오질 않았고, 체스터 중위는 자리에 코트와 구두를 놓고서는 대체 어딜 간 건지 오후 내내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루 종일 서류 더미와 씨름하느라 집에 들어가는 건 물론이거니와 면도도 하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건 나의 심문 대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구두 뒤축을 바닥에 쾅쾅 찍고 의자를 소리 나게 끌어다 앉으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푹 팬 눈에서는 어제와 같이 피곤이 뚝뚝 떨어지는 채였다. 그가 구치소에 들어간 뒤 어떻게 행동했을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자신을 좁고 추운 방으로 안내한 직원에게 항의했겠지. 결국에는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원을 그리며 걸었을 테고. 조금 익숙해진 뒤에는 줄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나서는 침대에 누워서 남은 시간을 보냈겠지만, 그의 몸은 호텔의 푹신한 매트리스에 익숙해져 있었을 테니 아마 철제 침대에 깐 얇은 담요 위에서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이었다.

나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변명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런 데 가두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 건물 안에서는 그게 최선이라서…….」

「이제 와서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걸 고백해 봤자 무슨 소용이죠?」 그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어요.」

「어째서?」

「당신이 도망칠지도 모르니까요.」

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요? 어디로?」

「저야 모르죠.」 나는 그가 했던 말을 똑같이 받아쳤다. 「영국의 다른 곳이라든가,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아니면 다시 스위스?」

나는 서류 작업과 전화 통화에 시달리는 도중 잠깐이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전날의 기록을 들춰보았다. 타자기에 끼우는 얇은 종이가 너덜너덜해져서 복사본을 한 부 더 요청하기까지 했고, 그렇게 몇 번 정독하고 나자 그가 한 말을 거의 외울 정도가 되었다. 타자기 앞에서 털어놓은 사실을 제외하고 그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건 그가 협조적인 동시에 변덕스러운 인물이라는 것뿐이었다. 첩보 세계에서 변덕이란 금기에 가깝다. 그건 미리 계획되지 않은 일을 저지르게 하는 가장 통제 불가능한 본능이다. 나는 그가 어째서 이 세계에 발을 들이기로 했는지 아직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건 변덕 때문이 아니었기를 바라고 있었다.

「난 도망칠 이유도 없는데.」

「당신은 총기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요.」

「지금은 없죠. 당신들이 빼앗아 갔으니까.」

나는 그와 실랑이를 벌이기를 그만두고 속기사에게 눈짓했다. 「오늘은 여기부터 시작해 봅시다 ― 뒤프리스 소령은 조금 다른 얘기를 했다더군요. 호텔을 고립시킨 폭설이 잦아든 후 소령과 당신이 약 2주간 스위스 여행을 했다고.」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서요?」

「사실이라면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아니잖아요.」

물론 그랬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조금 더 캐물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가를 낸 건가요?」

「휴가를 받았죠. 그 사건 후로 호텔은 사건의 수습과 제설과…… 아무튼 재정비를 위해 몇 주 정도 문을 닫았어요. 누구보다도 호텔 주인이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것도 있었고요.」

명백한 자살에 몇 주씩이나 수습할 것이 어디 있었을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나는 문득 클리프 대령의 시체가 눈이 녹을 며칠 동안 객실 안에서 썩어가는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으나, 금세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시신을 그런 식으로 놔두진 않았겠지. 적어도 밖으로 옮겨서 부패하지 않게 했을 것이었다. <신이 축복한 군인>이 눈밭에 거꾸로 처박혀 천국에도 가지 못하게 되었다니, 누가 그런 최후를 상상이나 했을까?

「여행 중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니까요.」

「무엇이 중요한지는 우리가 정합니다.」 나는 으름장을 놓듯 말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정말 내키지 않는 듯 흐린 청록색 눈동자를 데룩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여행을 제안한 건 그 사람이에요. 원래 호텔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후 남은 휴가는 스위스 근처를 돌아다니는 걸로 때우려고 생각했다더군요. 우린 꽤 죽이 잘 맞았다는 걸 내가 얘기했었나요? 난 그런 여행을 즐길 생각은 없었지만 모든 경비를 부담하겠다는 그의 말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든 말든 어차피 호텔로는 당장 돌아가지 못하니 따로 지낼 곳을 찾아야 하기도 했고. 그래서……. 당신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요. 취리히에 계속 머물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구경했고 그게 답니다. 휴가가 끝날 무렵 그는 비행기로 귀국했고 나는 <라 그랑드>로 돌아갔죠.」

이 이야기의 빈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돌아다니지 않는 시간에 그들이 무엇을 했을지. 나는 어제 저녁 두 사람의 진술을 대조하며 취리히 시내의 작은 호텔에 연락해 보았다. 1934년 2월부터 2주간 뒤프리스 소령의 이름으로 트윈룸이 하나 예약된 기록이 남아 있었다. 소령은 고작 며칠 전 처음 만난 사람과 짧지 않은 여행을 하는 모험을 감수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이 피아니스트도 그런 제안을 쉽게 수락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무엇이 그들을 호텔 로비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가는 인연 이상으로 만들었을까? 이게 그를 둘러싼 수수께끼의 해답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가 침묵을 깨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은 이제 어떻게 되나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소관은 아니지만 손을 아예 안 쓸 수는 없어서…….」 나는 만년필 꼭지로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아마 징계위에 회부되겠지만 결과가 심각하진 않을 거예요. 어느 정도로 나올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대답에 남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어제 저녁에 그 사람의 소식을 들었어요. 내게 케이크를 전해달라 했다더군요. 비록 누가 보는 앞에서 두 조각을 전부 해치워야 하긴 했지만 무척 맛있었어요. 어디서 사 온 건지 궁금해지던데.」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루이스와 시선을 한번 교환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소령과 꽤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숨기지도 않으려 했다. 그 사실만으로는 자신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케이크를 두 조각이나 골라 오는 친절이라니, 그렇게 다정할 데가 다 있나.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서류쳘을 펼쳐 종이 몇 장을 넘기는 동안 그는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제도 그렇게 쉴 새 없이 담배를 태워 댔다면 누군가가 라이터를 빼앗았을 법도 한데, 지난밤 구치소를 지킨 당직들은 자비로운 편이었던 것 같았다.

「회담 날짜는 나흘 전이었죠. 9월 29일. 접선은 계획대로 이루어졌나요?」

그는 기억을 되살려내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회담 장소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주점이었습니다.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으며 대낮에도 사람들로 적당히 차 있어야 했고, 말소리를 숨겨야 했으니 이왕이면 생음악이 있는 곳. 그게 아니었다면 그런 주점은 절대 가지 않았을 거예요. 약속 시간은 회담이 한창 진행되는 중일 오후 4시였고, 나는 한 시간 전부터 근처 공원에서 <푈키셔 베오바흐터Völkischer Beobachter>를 뒤적이는 척하다가 20분 전 주점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서류가 든 봉투는 신문의 마지막 장에 끼워져 있었고요. 내가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면 어쩐 일인지 당복까지 차려입은 청년당원들이 단체로 술집을 메우고 있었다는 거예요. 당황했지만 접선 장소를 바꿀 수도 없으니,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창가 쪽 구석 자리에 앉아서 맥주를 한 잔 주문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맥주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계속해서 손목시계를 쳐다봤죠. 마치 약속에 늦는 일행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건 사실이긴 했으니까요.」

나는 이 약속이 접선 시각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몇 년 동안이나 호텔을 찾지 않은 소령을 원망했겠지. 그러다 결국에는 그를 잊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게 되는 걸 피할 수 없었을 테고.

「소령은 정각 3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영국군 군복이 아닌 평범한 정장과 코트를 입고 있었고, 그건 정말 다행이었어요. 열 몇 명이나 되는 청년당원들의 집중을 한 번에 받는 것보다 끔찍한 일도 없을 테니. 어쨌든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기가 만나야 할 사람을 찾았고……」 나는 그가 헛기침하며 말을 멈추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주점에 새로 들어온 손님을 빤히 바라보는 나와 눈이 마주쳤어요. 그에게 확신을 주거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웃는 얼굴을 하는 편이 좋았겠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의 눈을 피하고 싶었어요. 마치 내가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느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는 내 맞은편 자리에 와서 앉았고, 한참 동안은 입을 멍하게 벌린 채 내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나 또한 그에게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생각해 낼 수 없었고요. 영어로? 독일어로? 친근하게, 아니면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처럼? 그러다가 결국에는 먼저 입을 열었죠. <오랜만이네요.> 그가 똑같이 대답했어요. <오랜만이에요.> 그 얼굴을 오래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일단은 점원을 불러 그의 몫의 맥주를 주문하며 마음을 가라앉혔어요. 그제야 내가 해야 할 일이 다시 떠오르는 기분이더군요. 마치 타자기에 글자가 찍히는 것처럼 차분하고 또렷하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그에게 속삭였어요. <자연스럽게 대화해요. 독일어로. 이왕이면 맥주도 좀 마시면서.> 그러곤 몇 년의 공백을 거쳐 다시 만난 친구들이 할 법한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정말 올 줄은 몰랐다면서, 얼굴이 하나도 안 변했다는 둥, 결혼은 안 했냐는 둥……. 그의 표정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갔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런 말을 쏟아내는 내 입을 틀어막고 싶었어요.

주점을 채운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아무 관심도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댔으니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게 이목을 끌지 않는 데는 도움이 된 것 같더군요.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미혼이었고 나도 그랬어요. 나는 이전에 그와 나눈 농담을 다시 꺼내며 애써 웃었습니다. 군인과 예술가는 절대 좋은 결혼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는데, 당신은 군인은 아니죠? 그들이 당신을 <중위>인가 <대위>라고 부르던데.」

그의 이야기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나는 얼빠진 표정을 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대위예요. 정확히 말하자면 군인은 아닙니다.」

「아, 그건 다행이군요.」

「결혼 상대로 따지자면 군인보다도 나쁠지도 모르죠. 한 달에 사나흘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거든요.」 바로 전날도 그랬으니 농담은 아니었다. 내가 툴툴거리자 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작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네요. 그런 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디까지 말했더라? 애석하게도 제법 나쁘지 않은 맛인 맥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사실 우리 둘 다 그런 이야기가 아닌 다른 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맥주잔이 반 정도 비었을 때 자연스럽게 신문을 그의 쪽으로 밀어 놓았습니다. 읽어줄 만한 칼럼이 실렸다고 중얼거리면서요. 그 뒤로는 할 수 있는 말도 없어서 그냥 술을 조금씩 들이키기만 했던 것 같아요. 파인트 잔이 마치 모래시계처럼 느껴졌어요. 그 안을 채운 액체가 다 떨어지기 전에는 자리를 떠야 하는 신호처럼……. 그는 애꿎은 나무 테이블만 손으로 문지르면서, 혹시 독일에서 나오고 싶다면 자기가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겠어요? 맥주를 다 마시고 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밖에는.」

「또 다른 말은 않던가요?」

그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나를 다시 볼 수 있냐고 물었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고요. 그렇게 답한 게 우습게도, 그날 밤 그를 찾아간 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습니다.」

나는 그게 그가 둘 수 있는 최악의 수였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이유를 묻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가끔 그런 실수를 전해 듣는다. 해외에 보낸 특파원은 일정한 기간마다 본부에 보고를 올리도록 되어 있는데, 그 전보가 아닌 이상 이쪽에서 안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연락이 끊기면 일단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두고 기다려 봐야 하고, 그 후에는 주변에 파견된 요원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기껏해야 기차 예매 내역이나 은행 예금의 흐름을 뒤지는 식이다. 그렇게 추적하다 보면 정말 단순하고 시시한 사실만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첫째로는 떠난 요원은 밧줄이 풀어진 나룻배처럼 붙잡으려고 할수록 더 멀리 도망간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들이 이탈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왕에게 충성을 굳게 맹세했음에도 <무언가>를 국가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 풍경, 기억, 휴식. 그것들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작은 씨앗처럼 보이지만, 생각 속에 한번 자리 잡은 후에는 무서울 정도로 몸집을 불려 나간다.

그의 얼굴은 점차 표정을 잃어갔고, 목소리는 사제 앞에 죄를 고해하는 사람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영국 외교관들이 묵는 호텔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어요. 그의 방 호수를 알아내는 건 문제도 아니었고요. 이런 일은 몇 번 해 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짐을 바꿔 들거나 호텔 직원인 척 소포를 배달하는 것 말이에요.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 레지나 팔라스트에 들어갔어요. 거긴 근처를 지나가면서만 몇 번 본 적 있었는데 제법 널찍하고 호화스러운 호텔이더군요. 엘리베이터를 몇 번이나 옮겨 탄 뒤 계단까지 오르내리고 나서 그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물론 누가 따라오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폈고요. 문을 여는 게 조금 늦어지긴 했어도 그 사람은 다행히 방에 있었어요. 등 뒤로 가느다란 지팡이 같은 걸 숨기고 있었는데, 복도에 서 있는 게 나라는 걸 알아보고는 그걸 바닥에 떨어트리더군요. 자신이 문서를 가지고 있다는 걸 들켰을까 봐 불안했던 것 같아요. 그다음 날에도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요?」 내가 성급하게 물었다.

「일단은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어요. 여기까지 온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그리고…….」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말고 나도 모르게 서류철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마치 소령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며칠 전의 그처럼. 그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지만, 이때 그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서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객실 벽이 소리를 잘 막아주기를 바라면서요.」

진실에 점점 더 근접하고 있었다. 나는 미로 속으로 도망치는 사람을 뒤쫓듯 질문을 던졌다. 「문서에 대해서?」

「영국행에 대해서도.」

「당신을 설득하던가요?」

「차마 거절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어요.」

「그건 어째서죠?」

「그가 내게 말하는 걸 보고 있으면…….」 색이 옅은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누가 그런 얼굴에 대고 싫다고 할 수 있을까요?」

「호텔에서 나왔을 때는 몇 시였습니까?」

나는 미궁의 중심에서 단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가 거짓말을 하리라고 예상했고, 그러길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그는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동이 트기 직전이었습니다.」

 

한 시간 후 그에게 점심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정보부 건물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고작 삶은 콩과 종이 죽처럼 퍽퍽한 매시드 포테이토 그리고 그레이비소스를 끼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뿐이었는데, 나는 잘못 밀치면 뼈가 몇 개는 부러질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그런 음식을 먹일 정도의 냉혈한은 아니었다. 페티 프랑스 거리를 따라 길을 건너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베이커리가 하나 있었고 5국 직원들은 모두 그곳의 단골이었다. 소령이 케이크를 사 온 곳은 거기보다 더 좋은 가게였겠지만.

나는 피아니스트와 그의 행적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나머지 베이커리에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직원의 눈에는 네 종류의 샌드위치 중 어떤 것을 고를지 영원히 결정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런던, 뮌헨, 취리히의 강변, 굵은 눈발이 떨어지는 최고급 호텔의 이미지가 한데 뒤섞여 머릿속을 떠도는 중이었다. 그들이 연인에 버금갈 정도의 사이였다는 건 분명했다. 빠르게 타오른 것도, 더불어 그만큼 빠르게 사그라든 것도 그 전제 아래에서라면 쉽게 납득할 수 있었으나, 뮌헨에서의 짧은 재회가 어떻게 그들이 다시 함께 밤을 보내게 했는지는 여전히 모호했다.

돌아온 취조실 안에는 담배 냄새가 가득했다. 손으로 공기를 휘젓자 희뿌연 연기가 소용돌이치는 게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와 마주보고 앉아 매캐한 담배 맛이 섞인 햄 치즈 샌드위치를 먹으며 가볍게 몇 마디를 나누었다. 이번이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본 경험이라는 고백 이외에도 몇 가지 기억해 둘 만한 것이 있었다. 가령 그에게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폴란드의 가족들이라거나 호텔 피아니스트가 되기 전 거의 10년을 내내 바다 위에서 보냈다는 이야기 그리고 <라 그랑드>의 괴담에 이끌려 크루즈 생활을 끝내고 육지로 돌아왔다는 사실. 「악마가 기거하는 곳이라는 소문이 당신을 매료시킨 거군요?」 내가 묻자 그가 코웃음 쳤다. 악마 같은 존재를 두려워하는 꼬마애 시절은 진작에 지났다며, 자신이 믿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뿐이라는 그의 말은 단순히 어떤 장소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그의 안에 핏줄처럼 뿌리내려 있는 신념과 같이 느껴졌다. 한순간 유령을 닮은 이 남자가 바로 호텔에 불운을 불러들인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루이스가 들어오자 우리는 다시 할 일로 돌아가야 했다. 속기사는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며 지금이 몇 시인지 물었다. 나 대신 그가 대답했다. 「두 시 15분 전이네요.」 길쭉한 종이의 왼쪽 상단에 날짜와 시각이 적혔고, 나는 손아귀 안에서 펜을 굴렸다.

30일 새벽 뮌헨, 몇 시간이 넘는 논의 끝에 마침내 협정이 이루어졌다. 그날 오후 4국의 대표들이 협의문에 서명하는 동안 사절단의 대부분은 계단 아래의 로비에서 기다려야 했다. 외교관이나 통역사는 물론이고 기자마저 출입이 금지되었고, 오직 <히틀러 씨>의 개인 사진사만이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로비 구석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몇 명이나 발견했을까?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어요. 단 한 명도. 전축이 틀어져 있다고 생각했겠죠. 아니, 그 전에 음악이 있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걸.」 그는 이 사실이 뿌듯하기라도 한 것처럼 강조해서 말했다.

「소령이 공격당한 건 그날 저녁이었죠?」

「저녁 식사가 끝난 직후였을 겁니다. 날 눈엣가시처럼 보던 친위대 장교가 하나 있었어요. 아마 내 생김새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겠죠. 내 콧대라든가. 아무튼 그가 내 뒤를 밟았던 것 같아요. 어쩌면 그의 방 근처를 서성거리는 것까지 봤을지도 모르고요. 연주가 끝나자마자 날 불러내서 어젯밤에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더군요. 난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오후에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고 저녁때부터 집에만 있었다고 대충 둘러댔어요. 장교가 뭐라고 더 캐물으려 할 때 그 사람이 갑자기 끼어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와 장교를 번갈아 바라봤죠. 당신은 그가 뭐라고 말을 걸어왔는지 짐작도 못 할 거예요.」 푸른 정맥이 불거진 손이 마찬가지로 창백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연주하는 베토벤이 아주 좋았다고……. 그렇게 말하며 내 이름을 알고 싶다고 하더군요. 장교는 심기가 불편해진 채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얼른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나를 다시 만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서. 내 손을 붙잡고 악수를 하면서는 자기가 떠나기 전에 제발 찾아와 달라고 덧붙이기까지 했죠.」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어도 그를 찾아갔겠군요.」

그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언젠가는 독일을 떠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어요.」

그저 도망칠 틈을 만들기 위한 선택이라기에는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많았다. 굳이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영국으로 오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긴 하지만 스위스나 프랑스 국경은 아직 망명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나는 최초의 질문으로 되돌아갔다. 애초에 왜 스위스 호텔의 피아니스트라는 편안한 직업을 그만두고 독일의 첩보원이 되기를 자청했는지. 그는 상당한 낭만주의자처럼 보였으니, 자기 자신을 건 내기의 반대편에 사랑을 걸어 놓아도 충분히 균형이 맞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몇 번이고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지도.

「영국과 프랑스가 만찬에 불참하기로 결정했으니 나도 그곳에 더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흩어지는 틈에 섞여서 건물을 나와서 내가 머무는 작은 호텔로 돌아갔어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택시를 탔고요. 아까 그 장교가 쫓아올까 봐 내린 결정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건 기우였어요. 아마 친위대 사람들은 전부 만찬 경비에 동원되었을 테니까요.」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은 들지 않았습니까?」

「이미 작전은 내 손을 떠나 있었어요. 다음날 영국행 비행기가 제대로 뜨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죠. 그 비행기에 내가 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안 했지만, 그에게 도움을 청해 두면 조만간 영국으로 갈 수 있으리라는 건 알았습니다. 걱정은 이미 지난 몇 개월간 지겹도록 했어요. 그때마다 각각 다른 사건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죠. 당신 말처럼 난 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잘못되면 바로…….」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쩍쩍 갈라지는 헛웃음이 뒤따랐다.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게 오히려 용기를 줬어요. 고문은 단 1분도 못 버틸 것 같았거든요.」

그는 문서의 행방보다는 자신의 머리가 날아가는 상상에 더 매몰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매일 밤 베개 아래에 한 손을 넣은 채로 청하는 잠과 담뱃갑을 꺼낼 때마다 손끝에 닿았을 묵직한 금속의 감각이 그를 그토록 근시안적이고 무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안겨준 호텔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별종이었다. 마치 그 저주가 자기에게도 내려지길 원하는 것처럼. 체임벌린은 뮌헨으로 떠나기 직전 연설에서 <헨리 4세> 1막을 인용했다. <우리는 위험이라는 쐐기풀에서 안전이라는 꽃을 따낼 겁니다>. 자꾸만 불리한 게임에 자신을 내던지게 되는 것도 본능의 일종인가?

나는 그의 재킷 안에서 찾아낸, 탄환 여섯 개가 전부 들어 있는 조그만 리볼버가 그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지 생각했다. 약실만 봐서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아마 그 총을 한 번도 쏘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쩌면 평생 방아쇠라는 걸 당겨본 적 없었을지도. 총구가 원래 향하게 되어 있는 목적지가 어디인진 몰라도, 적어도 그의 머리통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가 이 사람을 믿은 건 대단한 실수였다.

「그가 내 방에 들이닥친 것도 한밤중이었어요. 사실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조금 겁을 먹었습니다. 품 안의 권총을 만지작거리기도 했고요. 대체 내가 지내는 곳은 어떻게 안 건지, 문을 열자 그 사람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숨을 몰아쉬면서 서 있었어요. 눈에 보이는 상처 말고도 제법 얻어맞았을 텐데도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굴더군요. <문서를 빼앗겼어요.> 그가 내 손목을 세게 붙잡고 끌어당겼습니다. <지금 당장 나와 같이 가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명료했어요. 마치 호텔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결정을 내린 것처럼. 내가 어제 어떤 꼴로 영국에 도착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는 내게 코트를 챙길 시간도 주지 않았어요.」 이건 반쯤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사실이었다. 그는 코트와 모자는 물론이고 짐가방도 하나 들지 않은 채로 등장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였겠죠. 나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어요. 그가 나를 차 안에 밀어 넣지 않았더라면 아마 계속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을 겁니다.」

여기부터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소령은 베를린에 있는 영국 대사관까지 밤새 차를 몰았다. 그가 자신의 직위와 아버지인 남작의 이름을 대며 대사관 문을 열었을 때는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아침 식사를 마친 총리와 사절단은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으며, 또 다른 몇 시간 후 영국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비행장에 착륙했다. 그가 인파에 둘러싸여서 즉흥적으로 내뱉은 짧은 연설은 영국의 모든 라디오 채널에 중계되었지만 나를 비롯한 정보부 직원들은 그 방송을 단 한 단락도 듣지 못했다. 전부 베를린에 비행기를 보낼 구실을 만들기 위해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결국 독일 주재 외교관 중 한 명의 부인의 삼촌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6피트 아래에 묻음으로써 그다음 날 두 사람을 귀국시킬 수 있었다.

소령은 대사관에 무사히 들어가고 나서야 자기 이마에서 턱까지 피가 흘러 벌써 말라붙은 걸 알아챘다고 한다. 안 그래도 키가 큰 두 남자가 꼭두새벽에 정장을 풀어 헤치고, 게다가 한 명의 얼굴은 반쯤 피범벅이 된 채로 나타났으니 대사관에서 놀라 까무러친 건 당연했다. 「내가 아무 자리에나 쓰러지듯 앉아 있는 동안 그 사람은 당직을 서던 직원들에게 정보부와 통화하게 해 달라고 다그쳤죠.」 그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 순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출근해야 했던 입장으로서 인정하긴 싫지만, 소령은 정말로 이런 상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단단히 일러둔 것과는 별개로 이 사건에서는 쉽게 발을 뺄 수 없다는 걸 눈치챘던 거다.

나는 슬쩍 떠보는 척 묻기로 했다. 「만약에 이런 일을 다시 맡게 된다면 참여할 의향이 있습니까?」 물론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그럼 작년엔 그렇지 않았던 거고요?」

그가 푸르스름하게 그늘진 뺨을 만지작거리며 웅얼거렸다. 「아마 그때 난 조금 외로웠던 것 같아요.」

「외로웠다고요?」 나는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되물었다. 그는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무관심해 보이기도 하는 특유의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루이스는 이 대화까지 받아적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 손을 자판 위에 가만히 올려두고 있었고,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 일을 시작한 걸 후회합니까?」

「글쎄요.」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왼쪽 손목을 뒤집어 시계를 확인했다. 남성용치고는 알이 작고 둥근 은 도금 시계에 희끄무레하게 바랜 갈색 가죽 줄이 달려 있었다. 낡은 시계를 내려다보는 눈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짐에 손목시계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걸 챙기지 못한 건 후회되는군요. 아끼는 거거든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미리 차고 있었을 텐데.」

 나는 그가 손목시계를 두 개나 가지고 다녀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된 세 번째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기로 했다. 소령이 스위스에서 연인에게 선물한 시계는 그가 떠난 뮌헨의 어느 호텔에서 친위대 대원들에게 습격당했을 것이다. 실밥 하나, 먼지 한 톨까지 찾아내는 그들의 수색이 반짝이는 시계를 놓칠 리는 없었지만, 그들에게 그건 아무 단서도 주지 못하는 평범한 손목시계에 불과할 것이었다. 운이 좋다면 압수품을 모아 두는 서랍 한 구석에 얌전히 잠들어 있게 될 테고, 그렇지 않으면 이미 누군가의 손목으로 옮겨갔겠지.

사건은 다음과 같이 종결되었다: 피아니스트이자 반나치 조직의 공작원이었던 스타니슬라프 빌체크의 영국 망명은 정상적으로 승인되었다. 제롬 뒤프리스 육군 소령은 징계를 피할 수 없었으나, 아군 측의 정보원이 위험에 빠지도록 놔둘 수 없는 정의로운 인물이었다는 점이 재판 과정에 참작되어 그를 영창 구금으로부터 구해냈다. 물론 여기에는 밍이즈 대령이 직접 불어넣은 입김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망명자는 며칠 후 SIS에서의 모든 절차를 끝내고 외무부에서도 풀려났다. 그가 안 그래도 포화 상태인 런던에서 지낼 곳을 찾을 때까지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겠다는 소령의 말을 단순한 선의 이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었다.

독일로부터 온 기밀문서는 외무부를 통해 다우닝가 10번지로 들어갔다. 총리와 그 아래 몇 명의 손을 거쳐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을 때 그것은 조금 다른 형태가 되어 있었다. 5국에 떨어진 지침은 세 페이지 분량이었지만 결국 단 두 개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었다 ― <전쟁을 준비하라>. 정보부는 1909년 이래로 항상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보낸 것 같았다.

1938년이 마무리될 무렵 C는 일주일의 절반 이상 본부를 비웠고 그때마다 대령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독일 주재 요원들에게서는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나 헨더슨과 대사들은 여전히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심지어는 특파원들을 독일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가 지나가듯 말한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전쟁은 이제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였고, 대영제국은 눈가리개도 없이 단두대 앞에 서서 집행인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학교, 공공기관, 각 가정에 방독면이 배포되었다.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줄지어 시내를 누비는 것은 이제 이상한 광경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한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 모든 것을 무릅쓸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정말 그것뿐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의심한 운명은 그에게 반쪽짜리 승리만을 안겨주었다. 적어도 그의 연인을 품 안에 되돌려 놓긴 했으니. 나는 그 뒤로 몇 차례 안전을 확인하겠다는 명목으로 망명자의 뒤를 쫓았다. 그의 거주지는 여전히 뒤프리스 소령의 명의로 된 런던의 한 주택이었다. 소령은 동이 틀 때쯤 코트를 여미며 집에서 나섰고 피아니스트는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나고 나서 출근길 인파에 섞였다. 두 사람 모두 밤늦게 귀가했다. 자정이 넘어 2층 창문을 밝힌 불이 꺼질 때까지 집 앞으로는 비둘기 몇 마리만이 바닥을 쪼며 지나다닐 뿐이었다. 나는 그 후로도 반 시간 정도 어둠 속에서 대기하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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