걍 적폐
장르덕질
모든 일이 다 끝났다. 이번에도 말이다. 엠케이와 그의 우정을 나눈 친구들은 언제나 세상을 구해냈다. 어떠한 역경이 그들을 방해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엄청난 혼돈과 재난이 끝난 뒤에 찾아온 평화는 그 어떠한 것들보다 달콤했고 정신적으로 지쳐있고 매말라 있었던 그들의 정신력을 다시 채워주었다. 그리고 이들의 휴식에는 아주 의외의 인물도 함께했다. 저번 모험 때에는 옥황상제의 힘을 지키겠다고 묵묵하게 다시 천계로 돌아간 연꽃의 화신이자 이정의 아들이자 태자인 나타가. 어쩌다보니 그의 아버지가 오랜만에 그에게 휴가를 주어서 나타는 오래간만에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다만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결국 엠케이의 권유로 그들의 휴가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손오공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뭐 나타는 그런 그의 태도가 익숙했고 솔직히 조금 짜증은 났지만 손오공에게 화를 내진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그는 손오공에게 빚이 있었으며 그 빚을 진 기분은 매우 찜찜했다.
다들 신나게 바다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엠케이와 메이와 홍해아는 자기들끼리 물총놀이를 하며 꺅꺅 거리며 저들끼리 뛰놀았고 어째서인지 우마왕과 나찰녀까지 영웅들의 축하 파티에 끼어들었다. 그 때문에 나타는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옛 동료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나찰녀는 천계를 침략하려던 손오공과 그의 의형제들의 싸움에 우마왕과 첫눈에 반하여 천계를 배반하고 요괴들 편에 붙은 선녀였다. 뭐 이미 그녀의 잘못을 탓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으므로 나타는 그녀에게 오랜만에 만난 동료 치고는 심심한 인사와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우마왕은 꽤나 요리를 잘 하는 모양이었다. 메이 듣기로는 우마왕과 홍해아가 음식포차를 운영할 정도로 실력이 괜찮다고 들었다. 물론 홍해아는 얼굴이 벌게지며 부정했지만. 확실히 우마왕은 꼬치를 안정적이게 굽고 있었다. 꽤나 경력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픽시 또한 우마왕의 옆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는데 거의 자존심 대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탕만이 이득을 보았는데 픽시가 계속해서 그의 입에 꼬치를 욱여 넣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탕은 엄청나게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나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썬베드에 앉아서 멍하니 그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계속해서 잠을 자지 않고 과로를 했기에 그의 머리는 몽롱했고 지끈거렸으며 그다지 소리를 왁왁 지르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저번에 먹은 픽시의 국수는 맛있었다. 그때는 나타가 컨디션이 괜찮았기에 이야기를 나누고 친분을 올렸으나 이번엔 그다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저번에 얻은 부상이 아직 나아지지 않았기에 그의 몸 상태는 완전 최악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의 부상의 원인은 대부분 저 망할 손오공 때문이었다. 나타의 상처의 원인인 원숭이는 태평하게 하드 아이스크림을 들고는 제 제자와 저들끼리만 아는 대화를 나눴다. 나타는 한 숨을 쉬며 턱을 괴고 멍하니 바다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나타가 과로를 한 이유도 대부분 저 망할 손오공 때문이었다. 손오공이 천계에 처들어 온뒤에 부숴먹은 물건들과 잡다한 것들이 많았고 손오공을 잡느라 처리할 일들이 밀려 결국 나타가 과로를 하게 된 것이었다. 나타는 시큰거리고 간지러운 자신의 눈을 비비고 깜빡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알아서 잘 처리를 하겠다고 하시긴 했지만 나타는 영 못미더웠다. 물론 아버지의 능력은 믿지만 그렇지만 아버지 혼자서 처리하실 수 있는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쉬는 게 쉬는 기분이 아니었다.
피부가 탄다며 선크림을 바르기를 강요한 손오공 탓에 나타는 불쾌한 선크림의 끈적거림을 고스란히 느꼈다. 애초에 그는 선계인이기에 선크림 따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공은 나타에게 장난을 치기 위해 그런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저 바다에 잠수해서 선크림을 씻어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도 했지만 나타는 제 몸 상태를 생각해서 관두었다. 온몸이 병자인 그가 저 바다에 들어간다면 분명히 상처가 덧날 것이었다.
나타는 바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물을 좋아했고 물 위에 둥둥 뜨는 연꽃을 좋아했다. 오죽하면 나타의 집에 연꽃이 가득한 정원과 호수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물을 좋아하는 그가 바다를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다만 몸 상태 때문에 참는 것이었다. 물 안에 있으면 땅위의 온갖 소음에서 해방이 되고 물의 고요함과 가끔씩 들리는 물의 흐름소리 뿐이었다. 세상에 나타만이 남은 기분은 나타를 편안하고 안정되게 해주었다. 가끔은 그런 것이 필요했다. 가끔 세상의 소음과 걱정거리에서 해방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으니까. 물 속에 잠긴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느껴지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물 속은 다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나타만의 은신처와 같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 그는..
나타는 과거의 파편을 떠올리고 그것을 다시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그를 괴롭게하는 기억일 뿐이었다. 더 이상은 떠올리면 안 되었다. 나타는 한 숨을 쉬고 그것을 날려버리려 노력했다. 철 없고 왈가닥이며 난리법석을 피웠던 그의 과거는 나타에게는 검은 역사였다. 더 이상 떠올리면 안 되는. 엠케이가 서유기와 봉신연의에 대한 지식이 희미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아니었다면 지금쯤 무슨 눈초리를 받게 되었을지 생각 만해도 머리가 아파졌다.
“여기서 뭐하시나~ 나타?” 나타가 상념에 빠지는 사이 엠케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끝냈는지 그에게 다가온 손오공이 장난스럽고 가볍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나타에게 말을 걸었다. 손오공은 늘 그랬다. 가볍고 장난스러우며 친해지기 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사실 손오공은 입이 무겁고 친해지려는 사람을 밀어내며 그다지 친해지기 쉬운 자가 아니었다. 과거에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하지만 철이 덜 든 과거나 나름대로 철이 든 현재나 나타를 짜증나게 하는 자는 확실했다. 손오공의 저 생각 없는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계획인데 마치 무슨 큰 그림이라도 있는 냥, 마치 자신이 다 생각했었다는 냥 구는 것은 나타를 열 받게 했다.
나타는 손오공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손오공의 장난과 깐죽거림을 받아줄 만큼의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손오공이 오니 겨우 억눌러 두었던 편두통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했다.
“뭐야, 무시하는 거야? 어? 참나.” 손오공이 어깨를 으쓱하며 나타의 옆에 있던 썬베드에 털썩 하고 누웠다. 털썩 하고 누워서인지 모래가 풀풀 날렸고 파라솔이 끼익 소리를 내며 좌 우로 흔들렸다가 잠잠해졌다.
나타는 풀풀 날리는 먼지를 기침을 하며 손오공을 노려보았다. 왜 이 원숭이는 맨날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고 다니는지. 그 공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나타를 짜증나게 하는 것도.
“뭘 그렇게 꿍해있어? 너희 아버지가 이번엔 완전히 너를 천계에서 내쫓기라도 하시겠데? 오호오 그 인간이면 놀랍지도 않지.” 손오공이 빈정거리며 나타가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오렌지가 꽂힌 탄산음료를 낚아채서 멋대로 마셨다. 물론 나타는 목이마르지 않았고 그걸 마실 계획은 아니었지만 제멋대로 말도하지 않고 남의 음료를 마시는 손오공이 짜증났다. 저놈은 대체 뭐가 문젠지. 삼장법사는 저 원숭이 놈에게 도리를 가르칠게 아니라 먼저 예의를 때려박았어야 했다.
“..아버진, 그럴 분이 아니셔.” 나타가 자신의 아버지를 두둔했다. 아버지는 그저 나타에게 한 달 정도 푹 쉬고 오라고 휴가를 주신 것 뿐이었다. 그리고 요즘 나타의 아버지인 이정은 나타를 대하는 태도가 놀랍게 부드러워졌다. 세상의 기둥이 무너져 한 번 다 같이 죽을 뻔 한 뒤로 아버지는 나타에게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며 더 이상 나타를 보며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나타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솔직히 어색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생각나는 대로 아무런 거름망 없이 휙휙 말을 내뱉었겠지만 이제 나타도 성인이고 해도 되는 말과 안 되는 말을 잘 안다. 물론 나타의 옆에 있는 원숭이에게는 그런 거름망 따위 거르지 않고 그냥 휙휙 던지지만.
“그래 그렇겠지. 그 인간이 그럴 리가.” 손오공이 말을 하지 않았으나 아마 하고 싶었던 말은 쓰기 쉬운 장기말을 바보도 아니고 갔다 버리겠냐는 말일 것이다. 나타는 쓴 웃음을 지었다. 아마 손오공도 아니다 싶었는지 그것을 나타에게 뱉지 않은 것일 것이다. 나타는 그렇게 추측했다. 손오공이 자제를 배우다니 세상이 한 번 더 멸망하려는 것 같았다. 그 손오공이 자제라니. 늘 말로 나타를 화나게 했던 혓바닥만 날카롭던 손오공이 말이다. 하늘이 두쪽나도 안 올 거라 나타는 예상했는데. 아 맞다. 하늘이 두쪽이 났었긴 했지. 잘못해서 세상이 두쪽 날 뻔 한 거지만. 하늘이나 세상이나 거기서 거기니.
“아버진 그냥 나에게 휴식을 주신 것 뿐이셔. 나를 걱정하셔서야.” 솔직히 이 말을 하면서 나타 자신도 자신의 말이 웃겨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이라니. 자신의 아버지가 나타를. 어이가 없는 말임을 말을 내뱉은 나타 본인도 인정했다. 그 말이 입에서 나온 순간부터.
손오공의 반응은 나타의 예상대로였다. 손오공은 나타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뚫어져라 바라봤다. 눈썹을 찌푸리고 입가를 삐죽이며 그는 나타의 말을 곱씹고 있는 거 같았다. 얼굴에는 의구심과 정말로 나타가 제정신인지 의심하는 표정이 고스란이 나타났지만 손오공은 그저 기다렸다.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타가 어떻게 끝맺을지 보겠다는 듯이.
나타는 더 이상 손오공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말인지를 뼈저리게 알았고 그래서 그냥 고개를 돌려 손오공을 외면했다.
“너 진심이냐?”
손오공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손오공도 나타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 말투에서 들렸다. 손오공은 나타가 스스로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나타는 그저 침묵으로 대답을 했고 손오공은 한 숨을 쉬며 눈을 감고 썬베드에 몸을 기댔다. 멀리서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두런거리는 수다소리가 들렸다.
나타는 고개를 돌려 다시 손오공을 바라봤다. 손오공은 하와이안 셔츠 한 장과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누가보면 휴가 나온 줄..아 뭐 손오공은 매일매일이 휴가니까 상관이 없겠구나. 나타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은퇴한 영웅이란건 생각보다 좋은 거 같았기에 나타는 조금 부러워졌다. 손으로 시작하고 공으로 끝나는 어떤 말하는 원숭이 때문에 나타는 매일매일이 야근이라는 지옥에 허우적거리는데 정작 그 사고를 친 장본인은 편안하게 사는 꼴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나타의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전부 그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자유로워 보이는 손오공과 다르게 나타는 꽁꽁 싸맨 채로 야무지게 모자까지 쓰고는 자신을 철저히 노출시키지 않고 있었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손오공과 할 이야기가 지금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옛날 이야기를 꺼내자니 나타가 질 것 같아서 접어두기로 다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검은 역사가 많은 나타가 손오공보다 열세였다. 오공 저놈은 수치라는 게 없는 놈이니. 어떻게 석가모니님의 손바닥에 오줌을 갈기고도 저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태연하단 말인가.
“우브븝!”
그 때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나타의 얼굴에 따갑고 아픈 물줄기가 강타했다. 얼굴에 직격타로 맞았기에 나타는 눈에 물이 들어가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타는 본능적으로 옷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겨우 흐릿하게나마 돌아온 시야에 눈을 뜨고 자신에게 물줄기를 쏜 용감한 전사가 누구인지 찾아보려 했다. 그러다가 손오공이 분신을 사용해서 자신을 놀려 먹으려고 한 건 아닌지 의심이 피어났다. 만약 손오공이 그랬다면 나타는 아무리 몸 상태가 나빠지더라도 반드시 응징할 생각이었다. 아이들에게는 관대할지 몰라도 손오공처럼 성가시고 오래 살아서 더럽게 유쾌한 불사 원숭이에겐 절대 참을 수 없었다. 이 녀석에게는 100배 아니 1000배로 돌려줘야 했다. 대체 어느 틈에 분신을 만든 건지. 손오공의 망할 분신 수법은 늘 나타를 속이곤 했다. 나타가 자신의 신전에 숨겨놓은 삼매진화의 고리를 찾는 지도의 봉인을 풀때도 손오공은 나타를 수많은 분신으로 제압했고 삼매진화의 고리를 빼앗으려 나타가 힘겨운 사투를 벌일 때도 말이다.
흐릿한 시야를 다시 한 번 닦아서 바라본 결과 홍해아가 뻘쭘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며 나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마 범인은 홍해아인 듯 싶었다. 나타는 한 숨을 쉬며 따끔거리는 눈을 소매로 한 번 비비고 “..난 괜찮으니 가서 놀아라. 꼬마야.” 라고 말했다. 나타는 솔직히 전 직장 동료의 아이를 무어라 불러야할지 몰라서 그냥 꼬마야 라고 불렀다. 뭐 나타는 엠케이도 꼬마라고 불렀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줄기가 꽤나 거셌는지 나타의 얼굴과 심지어 모자와 머리가 젖어버렸다. 요즘 인간계의 물총은 강한 것들이 많이 나오는 거 같았다. 분명 얼굴에 맞았는데 머리와 모자까지 젖어버리다니 기가 막히는 성능이었다.
“크하하하하!! 완전 쫄딱 젖었네 아이고 이걸 어쩌나!” 손오공이 나타의 꼴을 보고 고소하다는 듯 실컷 낄낄거리며 배를 감싸고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 꼴을 본 나타가 침음성을 내뱉으며 손오공에게 젖은 모자를 세게 던졌다.
“욱!” 모자를 맞은 손오공이 잠시 동안 입을 닥쳤다. 최대한 아프게 던졌으니 부디 영원히 닥쳐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나타의 바램과는 달리 손오공은 금세 나타의 모자를 꾸깃하게 한 손에 쥐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나타는 그를 무시했다.
물어 젖어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쓸어넘기며 그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느꼈다. 짭짤한 바다 향이 그의 코끝을 스치고 바람이 볼을 부드럽게 스치며 지나갔다. 나타는 잠시 동안 그 시원함을 만끽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익숙한 향기와 평화로운 일상. 오랜만에 나타에게 찾아오는 고요와 여유였다. 이런 자유를 느껴본 적이 대체 몇 백년 만이던지. 나타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가끔씩 스쳐 지나가는 갈매기의 끼룩거리는 울음소리와 파도가 부딪히면서 나는 파찰음. 그 고요함 속에서 나타는 오랜만에 자신의 일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잊을 수 있었다.
손오공은 나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젖어서 질척이는 머리카락이 이마와 목을 따라 내려오며 볼에 딱 달라붙은 모습은 불편해 보였다. 나타의 머리카락이 젖어서 계속 흘러내리자 손오공은 문뜩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머리카락 한 가닥, 그 미세한 움직임이 이상하게도 손을 이끌었다. 그의 손은 나타의 머리카락을 향해 움직였지만 그 순간 나타는 손오공의 기척을 느끼고 눈을 번쩍 떴다. 나타는 손오공의 손을 재빠르며 가볍게 쳐냈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다시 바다를 응시했다. 손오공은 나타에 의해 쳐진 자신의 오른 손을 응시했다.
“까칠하긴.” 손오공이 샐쭉 웃으며 말했다. 나타는 그 말에 손오공을 얼굴을 잔뜩 구기며 노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노려봄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 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그러나 그런 위협은 손오공에게는 고양이의 하악질 보다 더 약한 거의 쥐가 찍찍거리며 울음소리를 내는 정도였다.
손오공은 나타의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은 익숙해서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그러나 오늘의 나타는 평소와 달랐다. 원래라면 따박따박 말대꾸가 오갔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손오공이 나타를 화나게 하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결국 손오공이 유쾌하게 말싸움의 승기를 잡는 것이 둘의 일상이었다. 세월로 따지자면 거의 전통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조용했다. 아무리 손오공이 나타에게 장난을 쳐도 나타는 말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거칠게 응수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돌처럼 가만히 있었다.
또 그의 통제광 아버지와 한바탕을 한 것은 아닌가 의심도 해봤지만 나타는 정말로 아버지와 싸운 것은 아닌 거 같았다. 아마 아버지와 싸웠으면(사실 거의 일방적으로 나타가 아버지에게 털리는 거지만.) 나타는 바다에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에 나와서 바람을 맞으며 평온함을 즐기는 대신, 아마 홀로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제 울분을 삼키고 있을게 분명했다. 자존심은 강한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나타가 손오공을 잘 알 듯 손오공도 나타를 잘 알았다. 그들이 알고 지내온 세월은 거대한 산이 바람에 깎여 나가는 세월보다 더 오래되었고 다섯 왕국이 세워지고 멸망한 세월보다 더 오래되었다.
손오공은 턱을 괴고 나타를 곁눈질로 슬쩍 살폈다. 나타는 원채 제 고민을 털어놓지 않는 놈이었다. 손오공 그도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지만 나타는 그보다 더했다.
나타는 입이 더럽게 무겁고 자신이 태자라는 자리에 걸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그 직책에 눌려 사는 남자였다. 한마디로 더럽게 성가시게 속을 안 털어놓는 놈이다.
‘성가신 놈.’ 손오공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에 다 들어나긴 하지만 표정에 드러나는 정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나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혼자서 고독하게 술을 퍼먹으며 괴로워한 미련한 놈이었다. 평소엔 술을 입에 대지도 조차 않는 놈이. 늘 그랬다. 평소엔 술을 먹지 않고 술을 마시는 오공을 한심하다는 뜻 째려보던 놈이 하지만 막상 제가 감당하기 벅차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하루내내, 심하면 1주일 내내 술을 퍼마시기며 술에 절어 지내기도 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감각과 고통을 술로 마비시켜서 없애버리려는 듯이.
“차라리 어릴 때의 악동 나타가 낫지..” 손오공이 나타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의 나타는 손오공이 살살 꼬시면 쉽게 넘어오는 속이기 쉬운 순수하고 순진한 아이였다. 말썽을 부리긴했지만 그저 다루기 쉬운 꼬마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악동 나타가 아닌 나타 태자였다. 철부지 시절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대신 책임감과 의무에 눌린 채 살아가는 태자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요즘 것들의 속된 언어로 말하자면 노잼 이었다. 천계와 이정이 그를 완전히 배려놨다. 망할 놈들. 손오공은 속으로 천계와 이정을 향한 불평을 삼켰다.
나타는 잠이 부족해 지끈거리고 시큰거리는 눈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마사지 했다. 조금이라도 고통이 줄어들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평소에는 눈까지 아리는 고통을 겪는 일은 없었는데 많은 일이 겹치고 겹쳐서 몸이 많이 약해졌다. 나타는 물론 불사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확하고 낫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보통 인간보다야 회복력이 빨랐지만 계속된 피로와 과중한 업무가 그마저도 지체하게 만들었다.
“뭐야? 피곤하냐?” 왜인지 모르게 조금 안심된다는 눈치의 손오공이 물었다. “잠을 좀 자라고 나타 이 친구야.”
나타는 그런 손오공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말이 감히 나오다니 도저히 자신의 귀를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나타의 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너 때문이잖아 손오공! 네놈이 벌려놓은 수많은 처치곤란의 사고 때문에 쌓인 문서가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해? 지금 내 집무실에 쌓은 두루마리가 천장에 닿는다고!” 펑 하고 나타의 머리가 불타올랐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그는 정말로 속이 곪아 터질 만큼 화가 났다. 특히나 손오공의 태연한 표정을 보니 더더욱. 오공은 쉽사리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손오공은 그런 나타의 반응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느긋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곤 장난기 가득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우 왜 갑자기 무섭게 화를 내고 그래? 진정하라고 친구. 너를 도와줄 다른 천계의 인재가 있잖아.”
“너와 저 꼬마가 하필이면 내 관할에서 수많은 난리를 쳐서 다른 분들에게 손을 못 빌리는 거라고! 왜 굳이 내 관할의 것들만 노려서 부수고 훔쳐간건데!!” 나타의 입김에서 이제 진홍빛 불꽃이 섞여 나왔다. 저건 나타가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손오공은 슬쩍 입을 다물었다가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삼매진화는 꼭 필요한 거였고 네 신전을 부순 건 미안한데 아니 세상을 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세상이 망하는 것보단 그래도 일은 많지만 세상이 존재하는 게 나을 거 아니야?” 손오공은 가볍게 상황을 넘기려고 했다. 나타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최대한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내 표피낭은. 내 건곤권은 그리고 내 금전은? 그것도 필요해서 훔쳤나?”
표피낭: 표범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로 순수하게 운반이나 보관용으로 사용됨.
건곤권: 권이란 둥근 고리모양의 무기로 손에 쥐고 타격하는 무기. 나타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공중을 누빌 수 있다. 매우 강력하다.
금전: 기와, 혹은 벽돌 같은 모양을 한 투척무기로 역시 파괴력이 강한 나타의 주력무기. 금빛이다.
“엄. 그건 내가 훔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내 손에 들어왔달까?” 손오공이 손을 꼼지락 거리며 나타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기가막히고 코가막히는 해명을 했다.
“하아아...” 나타는 분노를 억누르며 참으려는 듯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힘겹게 내뱉었다. “그럼 돌려줄 생각을 해야지..!”
“미안 미안. 아니 내가 그러려던 건 아니고 너도 알잖아? 시간이 없었다니까?”
“쯧. 그 무책임한 태도는 여전하군. 나중에 찾으러 갈테니 도로 돌려주도록. 저 세 개말고도 아주 많이도 훔쳐갔더군.”
“그래그래. 나도 네 법보 따위는 가지고 싶지도 않다.” 손오공이 손을 휘휘 저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타는 한 숨을 쉬며 더 이상 손오공과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고개를 돌리고 땅바닥의 모래를 바라보았다.
나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손오공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손오공의 이마를. 저번에 자신의 아버지가 손오공을 벌하겠다고 다시 손오공의 머리에 금고아를 씌운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타는 아직도 그 일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손오공이 그 금고아를 얼마나 싫어하고 답답해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아버지의 강압적인 태도에 입이 막혀 아무런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한 나타 자신이 한심했다. 하늘의 기둥이 무너진 것은 손오공과 그의 제자 엠케이의 잘못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나타는 아버지의 판결이 아직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고아는 단순히 손오공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손오공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존심을 짓밟는 속박이다. 아버지의 억지 판결에 맞서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다시 떠올라 나타는 씁쓸함과 한심함을 느꼈다.
“뭘 계속 뚫어져라 봐? 뭐 이 몸이 매우 수려한 미모를 가진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너무 대놓고 보는데?” 손오공이 나타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타를 놀렸다. 오공 특유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바람소리에 섞여서 날아갔다. 나타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고 손오공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나타는 손오공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했다. 손오공에게 금고아가 씌워졌던 일은 나타의 책임도 있었으니.
나타는 속으로 여러 번 손오공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정리했다. 손오공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손오공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나타를 바라보았지만 나타의 묵직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서서히 그의 웃음기도 사그라들었다. 나타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꺼낼지 기다리는 듯 보였다.
잠시후 나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명 수많은 말들을 속으로 떠올렸지만 나타의 입 밖에 나온 것은 아주 짧고 서툰 사과의 말이었다.
“..그때 일말이다. 미안했다 손오공. 내가 아버지를 설득했어야 했는데.” 사과는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도 보잘 것 없지도 않았다.
손오공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타를 바라봤다. 나타의 사과를 예상하지 못해 심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마치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아, 그거?”
“그건 뭐...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 난 전혀 신경 안 써. 게다가 너 같은 파파보이가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었겠어? 더럽게 고집만 센 놈인데.” 손오공이 일부러 파파보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손오공은 그저 나타를 놀릴 생각뿐이었다.
“이봐 설마 너 그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그렇게 죽상을 짓고 있었던 거야? 야 나 손오공이야. 고작 하찮은 금관 때문에 너를 원망할 거라 생각해?”
“..조금은 날 원망할거라 생각했다. 난 그때 널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았고 아버지에 눌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나타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고백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오공은 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다시 가볍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거참. 넌 그게 문제야. 늘 생각이 많지. 내가 널 미워할 이유는 솔직히 전혀 없잖아. 내 머리에 금고아를 씌운 게 나타 너 잘못도 아니고.”
손오공은 장난스럽게 말을 끝맺었지만 그의 눈빛은 다소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타는 그런 오공의 눈을 똑바로 응시할 자신이 없었다. 부드러운 햇살을 연상케하는 금빛 눈동자는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손오공이 아까 나타에게서 뺏어간 탄산음료의 차가운 잔을 나타의 뺨에 대었다. 축축한 물기와 차가운 온도가 나타의 볼에 닿자 나타는 저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뭐 하는 거야!” 나타는 눈을 크게 뜨며 손오공을 노려봤다. 차가운 물기가 묻은 볼을 대충 손등으로 슥슥 닦아내며 오공을 노려보았지만 손오공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껄껄 웃으며 잔을 휘휘 나타의 눈 앞에 흔들어보였다. 그의 높게 올라간 입꼬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원숭이 들이란...
“좀 식혀 나타 태자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면 금방 늙어버린다니까?”
나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손오공을 힘없이 바라 볼 뿐이었다. 그게 재밌는지 손오공은 웃으며 여유롭게 잔을 한쪽 손에 잡고선 팔짱을 끼며 나타를 바라봤다.
“얼만 만에 누리는 휴가인데 심각한 생각만을 하며 보내기에는 아깝잖아? 고생 끝에 찾아온 꿀 같은 휴간데 좀 즐기라고. 아니면 이 손오공님이 특별히 너에게 즐기는 방법을 알려줘야하나?”
손오공이 한쪽 눈을 살짝 찡긋하며 윙크를 보냈다. 자연스럽고 당당한 태도에 나타는 입을 더 꾹 잠가버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고생의 대부분이 너 때문이란 건 알고 있지?”
“그게 왜 내 탓이야? 그건 좀 아니지.”
손오공이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난 다음 갑작스럽게 나타의 손목을 쥐고는 나타를 끌어당겨 일어나게 했다.
“손오공! 뭐 하는 거야?” 나타가 소리쳤지만 손오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목을 쥔 채 힘차게 끌어당겼다.
“자 그럼 즐기는 법을 배우러 가보실까? 이 형님이 잘 가르쳐 줄게”
나타는 한 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못해 손오공을 따라 나섰지만 그의 발걸음은 어딘가 가벼워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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