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
; 중요한 의미나 가치를 가진 상태에 있다.
- 리이치 입장에서 정리해야할 요소를 적어내리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급발진 죄송합니다.
- 편히 읽고 넘겨주세요. 멘션으로 답해주시거나, 아니면 끊어주셔도 괜찮습니다.
사람의 체온이 이토록 따듯할 줄이야.
⸻ 처음
달빛 아래 빛나는 금발에 새빨간 적안을 가진 소년. 너는 잘 웃었다. 세상 염려할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그저 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는 듯했다. 네 시선은 다정하고 해맑았다. 또렷하고 일률적인 두 동공에 내 기이한 눈동자가 각각 비쳐진 꼴이 유일한 오점이었다. 나는 어쩌면 나와 다른 너를 관망하는 행위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싸늘한 겨울밤의 소년이 보인다. 체온을 나눠주겠다며 뒤에서 장난스레 제 허리에 손을 올리던 동갑내기 동급생. 매번 능숙하게 기대는 솜씨 하며, 말 끝을 늘이는 능청스러움까지. 단순히 천성인줄 알았다. 내가 타고 태어나지 않은 천성. 평생을 살아도 이해하지 못할 천성. 근간이 다른 너와 나. 우리라 칭했지만 무의식 중에는 너와 나를 분리하여 생각했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너는 참 끈질겨서 편한 사람이다. 정확히는 내 방식대로 적절히 이용하기 편한 사람이었다. 가로로 길게 선을 긋고, 그 선에 다가올 때마다 밀어내면 되는 간단한 행위. 네가 다가와주는 덕에 내가 다가가지 않아도 일정한 거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친구가 필요하다면 다른 애도 많을텐데. 왜 굳이.’ 의문은 여전했다. 친구 선정이 바보같은 건 너잖아? 친구가 많아서, 나랑 노는 건 재밌을 뿐 마음을 두고 기댈만한 친구는 따로 있을 것이니, 애인과 애인 사이를 메우는 공백 정도야. 나의 역할을 적당히 축소시켰다.
네가 나를 *친구*로 칭할 때마다 ‘친구’가 뭐냐며 속으로 반문했다. 서로를 대하는 온도는 달랐다. 가까워지는 건 어려웠다. 낯선 도쿄에 적응하는 것조차 힘들었고, 제게 특별한 관계를 요구하는 행위는 더더욱 낯설어 최대한 기피했다. 맹목적인 관심은 부담스러웠다. 내가 살던 곳은 생물학적 부모조차 나에게 특별을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내게 관심이 쏠리거나 내 관심이 한 명에게 쏠리는 행위는 더더욱 익숙치 않았다. 차등이 생길 때마다 속으로 죄책감이 쌓여갔다. 지금도 버리지 못한 천성이자 나쁜 습관이다.
그럼에도 네가 처음으로 내게 거짓말을 하지 말아달라며 약속을 하던 날은 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제 진실이 주목받았던 경험이었다. 속에서는 정의되지 못한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딱 잘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따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습관적 부정을 버리지 못했고, 그럼에도 네 호의를 져버리기는 싫었다. 익숙한 방식으로 유예했다. 마냥 지지부진 미룬 건 아니다. 언젠가는 답해주기 위해, 조금씩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위해. 내게 익숙한 속도로 천천히 변화하고 있었다. 은근슬쩍 너에게 작은 마음을 두고 있었다.
네가 죽고 나서 후회했다. 고집부리지 말고 약속을 지키는 척이라도 해줄걸, 너에게 조금 더 잘해줄걸. 첫 상실이었다.
네가 떠난 이후 죽도록 후회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이 정한 선을 넘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솔직히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도쿄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믿고싶지 않았어. 너는 내 눈 앞에서 죽었잖아. 고의가 아닌 사고로 내 곁을 떠나갔던 거잖아. 혹시 기억나? 네가 나를 바라보며 진실을 말해달라 했던 날, 약속이 깨지는 순간은 ’내게 미련도, 기대도 안 남은 상태‘일 거라고 했던 거.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던 네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어. 분명 좋은 기억인데, 나를 괴롭히는 기억이 되어버린 게 싫었어. 너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더라. 이기적으로 외면하고, 끝없이 도망쳤어. 너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비겁하지. 나는 이기적이고, 찌질하고, 과거에 목매는 멍청이야. 차라리 이 마음조차 완벽히 없는 척 너에게 아무렇지 않게 대했더라면··· 네가 불편해할 일도 없었을텐데.
작정하고 속이려면 속일 수 있는 사람이다. 리이치는 천성이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숨기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고팠던 게 본심이었고, 본심은 어떻게든 세어나온다.
⸻ 하나
야경 아래 검게 물든 흑발에 외로운 적안 하나를 가진 청년. 나를 담던 별 하나가 져버렸다. 네 미소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시원한 체향보다 짙은 담배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미소에는 소년이 보였으나, 미묘한 경박과 경계 탓에 네가 아닌 것 같았다. 이제 너는 나와 같이 서로 다른 두 눈을 가지고야 말았다. 보기 싫게 일그러져버린 흉터가 신경쓰인다. 관망하기에는 네가 너무 위태로워보였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너는 내게 기대도, 미련도 남기지 않았다 생각했다. 그야 약속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너는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다. ‘이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내가 치졸한 거지.’ 거리감을 잡지 못하고 배회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 관계를 다루는 법을 모른다. 아마 평생 정답 근처에 도달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할 것이다. 다시 얻은 관계를 놓고 싶지도 않았다. 선을 넘기에는 조심스러웠다. 끝없이 관계를 원점으로 돌리며 가장 나은 방식을 고민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오랜만에 너를 안았다. 여전히 사람을 안는 행위는 익숙치 않다. 네가 사라진 이후 비슷한 행위조차 안 하고 살았으니, 오히려 퇴화할 수밖에. 어정쩡하게 굳어서 목석처럼 서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있으면 편해진다 하는 말은 다 남 얘기로 들렸다. 그럼에도 네가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다는 지점을 제 위안으로 삼았다. 아직 어려웠다.
마음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감정을 쏟아내는 건 사치임을 잘 알았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웃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제 인생의 철칙이다. 화를 냈다. 제 자신이 같잖아보였다. 가볍게 떨어지는 무릎을 보고 한 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러웠다. 우리가 너와 나로 갈라졌던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가 이리도 망가져버린걸까. 선을 넘고 싶지 않았다. 가볍게 위로하고, 어려운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그냥 웃어 넘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성적인 생각은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되물었다. 알고 싶었다. 너를 조명하고, 더 나아가 너를 외면하기 싫었다. 나까지 너를 고립시키면 너는 평생 홀로 남아있을 것 같아 불안했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의 아픔을 물어보지 않았던 건 제 아픔을 꺼내기 싫기 때문이었다. 서로에게 서로를 내어주면, 내어준 만큼 책임을 져야했다. 인간관계를 계산으로 배운 나는 평생을 그리 살았다. 내 것을 보여주기 너무나도 부끄러워 한껏 숨겼다. 궁금해도 건드리지 않았다. ‘상처를 열어 그 속에 다시 상처를 내버리면 어떡해.‘ 과한 배려와 염려는 오히려 마음의 문을 닫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기어코 저질렀다. 쓸쓸해보이는 네 표정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 우리
우리는 다르고도 같고, 한결같이 외로운 사람이었구나.
열흘 정도 되는 시간동안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나 역시 너를 곡해하는 점이 많았고, 너 역시 나를 오해하는 지점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어리고, 여전히 여리고, 아직 부족한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다. 올곧게 너를 보았을 때는 홀로 남겨진 네가 보였다. 후지와라 료헤이 곁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소박한 걸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던 네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결말이라 생각했다. 믿지도 않았던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그간 지켜왔던 제 모습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한다.
외로움 타는 둘이 모인 모습은 비극이다. 위태롭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언제든지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 무너져 내리는 순간 관계는 재해로 뒤바뀐다. 허나 상관없지 않을까. 너는 내게 재해이다. 그리고 나도 네게 재해가 될테다. 꺼내지 못한 속마음이 많은 건 전적으로 미토 리이치다.
무의식은 자각했다. 나는 너와 나를 묶어 자연스레 우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 뿐만인 우리가 아니라, 진정한 우리. 그리고 자연스레 너를 친구라 칭하고 있었다. ‘너희’와 ‘애들’로 뭉뚱그려 묶어부르던 리이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였다. 홀로 있었던 2년간의 생활이 어지간히 힘들었던 건지,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네가 눈물나게 반가웠던 건지. 찬란했던 추억을 한없이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너에게 한 마디의 말을 전할 때마다,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왔던 기억을 한없이 되풀이했다. 의도치 않은 행위였다.
이번이 몇 번 째더라. 제법 포옹하는 실력이 능숙해졌다. ‘아마 나를 품에 처음 안은 사람도, 내 품에 처음으로 안긴 사람조차 너였을 거야.’ 인간은 변화한다. 고로 인간은 발전한다. 인간은 퇴화한다. 허나 나아간다. 이끌어줄 누군가가 존재하면 나아갈 수 있다. 내가 그간 너희에게 배운 사실이며, 동시에 ‘친구’에게 배운 점이기도 하다.
리이치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변화해야할 시간이다. 10년간 쌓여온 고민은 결코 작지 않았고, 느리게 변화하던 나라는 사람도 한 발 나아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수백, 수천 번 기억을 반복하는 동안 생각도 얼추 정리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쉬운 약속일지 모르는 말을 어렵게 꺼낸다. 너는 내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껏 네 소중한 사람은 다 죽어왔다. 너는 악한 저주에 걸려 한없이 고통받았다.
그리고 나는 죽음을 감내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살고자 했으나, 저들이 죽이고 싶다 하면 죽어주겠다 다짐했다. 아무런 저주도, 미련도, 원망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죽으려 했다.
평생 남을 저주를 하고, 또 다시 바보같은 선택을 한다. 나는 충동적인 사람었고, 미련했고, 감정적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충동적인 사람이고, 미련하고, 감정적이고, 심히 바보같다. 하지만 또 다시 후회를 남길 바에는 커다란 책임을 짊어지는 게 옳은 방향일 거라 믿었다. 너를 끌어안는다. 익숙한 체온을 잃는 건 죽어도 싫었다. 이제서야 자연스러워졌는데, 너를 다시 못 안게 된다면 평생을 두고두고 후회 속에 잠식되어 살 거라 확신했다. 네가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힘껏 끌어안았다. 처음 해보는 말이라,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서. 나 역시 네 어깨에 고개를 묻는다.
후지와라 료헤이는 미토 리이치의 친구이자, 소중한 사람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는 기꺼이 변화할 수 있다.
“약속해. 너에게서 떠나지 않는다고.”
우리를 혼자 두지 말자.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내가 너를 두고 죽는다면 말이야. 너는 나처럼 나 스스로를 탓하지 말고, 너를 두고 죽어버린 나를 원망했으면 해. 먼저 가버린 사람을 두고 나 스스로를 갉아먹는 짓은 할 게 못 되더라. 네가 가장 잘 알겠지만··· 걱정돼. 너만은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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