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sse
모종의 사유로 인해 밖으로 이어진 길이 막혀 건물 안에 있던 방문객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사람이 고립되는 가장 흔한 자연재해인 태풍을 예로 들어볼까. 기상청의 데이터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 태풍은 근 십 년 간 한 해에 평균적으로 네 개 정도 발생했다. 태풍이 내륙을 직접적으로 강타하는 일은 명확하게도 피해가 상당하며, 그것이 끌고 오는 온갖 저기압과 비바람에 의한 침수와 홍수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방금은 내륙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태풍이 해안가에 직격한다면 어떻게 될까? 해안가에는 당연하지만 넓게 펼쳐진 바다가 있다. 바다는 바람을 받으면 파도를 만들어낸다. 태풍은 보통 강풍이 아니다. 그러니, 파도라고 부르기에는 덩치가 너무나 큰 너울, 때로는 해일에 가까운 어마무시한 물보라를 태풍의 지시에 따라 육지에 퍼붓고는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멀쩡히 해안가를 거닐 수 있을 리 없다. 사람은 너울이 자신의 무릎까지만 와도 보행은 고사하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니까. 그렇다면 해안가가 아닌 해안가 위편의 육지는 어떨까? 예를 들어, 바다 경관을 위해 파도로 깎이고 또 깎인 절벽 위에 세워진 갤러리 근처에서라면 어떨까.
"우와악!"
우산 째로 날아갈 뻔한 오동현은 두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기 직전 우산을 놓았다. 거센 바람을 타고 한순간 상승한 검은색 장우산은 팽이마냥 몇 바퀴를 빠르게 돌다가 절벽을 부서뜨릴 기세로 몰아치는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조심해, 오 탐정!"
그와 통창을 사이에 둔 진유신이 외쳤다. 날이 맑아 아무런 소음 요소가 없었다면 분명 목소리가 그에게 닿았겠지만, 아쉽게도 통창을 때려대는 두터운 빗줄기와 휘몰아치는 강풍과 쉼없이 철썩이는 파도의 앙상블이 그녀의 목소리를 가로막았다.
"꼭 나가 봐야 날씨를 알겠냐고."
그녀의 바로 옆 자리에 앉은 진유선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불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통창 너머의 동현은 이제 다소 불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우산을 하나 날려먹었으니 불호령이 떨어질 게 당연하지 않은가. 유선은 딱 한 번 혀를 차고는 동현을 턱짓으로 귀환시킨다.
"날이 너무 안 좋네."
맞은 편에 앉은 소나무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딱히 누구 하나를 특정해서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태풍이 몰고 온 습기로 헤어 세팅이 조금 어그러진 유신이 그의 말에 반응하려고 했을 때, 갤러리의 문이 열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의 동현이 안경을 고쳐 쓰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온다.
통창에서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도슨트와 그 동료는 별 말 없이 창 너머의 폭풍을 관망하기나 한다. 우산을 제물로 바치고 귀환한 동현에게는 시선을 한 번 주었으나, 그 외의 반응은 없었다. 아니, 도슨트가 동료를 슬쩍 쳐다보긴 했다. 그에게 수건이라도 가져다주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미를 담은 시선이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스태프 룸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가, 금세 깨끗한 수건을 하나 꺼내 동현에게 건넸다.
갤러리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녀를 둘러싼 예술가들 역시 갤러리 일 층에는 없는 것 같았다. 이곳에 남은 갤러리 관계자는 도슨트와 그 동료 뿐이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터는 동현의 모습을 구경하던 유신이 별안간 도슨트를 향해 물었다.
"은수 씨, 일일 도슨트라고 하지 않았어요? 일이 이렇게 되어서 어떡해."
"아뇨, 어차피 밤늦게까지 정리를 도와드릴 계획이었습니다. 하루를 묵고 갈 예정이었습니다."
"어머, 정말요? 안채에서요?"
"그렇습니다."
"그럼 서진 씨는요?"
"저, 저도...... 같습니다......"
고개를 30도 정도 아래로 기울인 서진이 대답했다. 작고 어물대는 특유의 말투는 이전과 같았다.
"역시 오픈 직전이라 그런가 할 일이 많으신가보다. 정리라고 하면 막, 작품 재배치하고 그러는 건가?"
"으음, 예...... 보존 상태를, 점검하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작품의 재배열도......"
느릿느릿한 어조였다.
태풍이라는 녀석은 대개 변덕이 심하다. 별 거 아닌 우연으로 모두가 부산의 한 갤러리에 모여버린 이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영토의 오른쪽 위, 강릉 내지 동해 부근에 상륙해 문경에 대전까지 지나 군산을 끝으로 국토대장정을 마칠 예정이었던 이번 태풍은, 태백산맥이 부담이라도 되었던지 울릉도 부근에서 갑작스레 경로를 틀어 쭉 남하했다. 결국,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이동하던 태풍의 최종 목적지는 부산임이 태풍 상륙 당일에 뒤늦게 알려지고야 말았다.
"아침에 내려올 때만 해도 맑았는데 말이야~"
기차를 타고 내려온 유신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고속도로도 물기 하나 없이 깨끗했는데 말이죠!"
유선의 차를 운전해서 내려온 동현이 한숨을 쉬었다.
나무와 유선은 대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각자의 스케줄과 갑자기 등장한 태풍이라는 변수를 저울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녀도 평균적인 다른 사람들보다는 들고 있는 일감이 많다. 제법 바쁜 인종인 것이다.
변덕스러운 태풍에 맞추어 기상 예보는 시시각각 변화했다. 시간에 따라 디테일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된 의견은 하나였다. 아무리 늦어도 오늘 밤 내지 내일 새벽까지는 태풍이 남해안 상으로 사라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이 다행스러운 소식은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일찍이 갤러리에서 나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안 절벽에 세워진 갤러리로 통하는 외길. 언덕인지 산인지 모를 둔덕을 양쪽에 두고 그 사이에 나 있던 외길은, 어느 순간 강풍으로 인한 산사태의 토사물로 막혀버리고 만다. 갤러리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닫힌 공간을 무대로 하는 추리소설이 난립한 한 세기 전과는 다르게 현대는 무선 통신이 월등하게 발달한 고로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정도의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로 산사태가 밤에 가까운 저녁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한국의 119 대원들은 물론 유능하고 열정적이지만 태풍이 부는 밤에 아무렇지 않게 토사물을 치울 정도의 초인들은 아니다. 그들은 갤러리에 갇힌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태풍이 멎은 내일 이른 아침부터 토사물 제거 작업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둘째로 갤러리 안에 갇힌 사람이 좀 많았다는 점이다. 갤러리 오픈 기념 리셉션에 초대받은 이들은 어림잡아 스무 명. 거기에 직원들이 대강 일고여덟 명 정도. 그 중 절반은 태풍이 더 거세지기 전에 일찍이 자리를 떴지만, 갤러리의 주인과 관계가 깊은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애당초 태풍이 부산 쪽으로 온다는 예보는 리셉션 당일에 전달된 것이다. 갤러리에서 시간을 조금 더 보낸다고 이곳에 발이 묶일 거라는 예상 자체를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로,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지점인데.
이후 갤러리 안에서 사람이 한 명 죽었다.
사람이 한 명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이것은 살인이라고 확신했다.
그야 스스로의 힘으로 머리를 잘라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하지만 사건은 어떤 형태로든 언젠가는 반드시 결착을 맺는다.
모든 사건에는 결착을 맺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으니 당연한 이치다.
그것이 범인의 의지이든, 피해자의 의지이든, 유족의 의지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태풍이 남해안 저 너머로 모습을 감춘 새파란 봄의 하늘 아래에서 유신은 문득 이렇게 물었다.
"그거 말이야, 송 군. 정말로 죽어 있었던 거지?"
소나무는 웬일로 바보 같은 질문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리고 소나무는 웬일로 바보 같은 대답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등장인물
소나무 일러스트레이터
진유신 모델러
진유선 변호사
오동현 비서 겸 사립탐정
한선혜 예술가
이아영 예술가
오지민 예술가
안승현 예술가
조영우 평론가
최은수 도슨트
박서진 도슨트
Collage (1) https://pnxl.me/kkzp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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