藍寶石
Sapphire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상가의 지하에 그 만화방은 있었다. 영업 중임을 알리는 황색 형광등이 불투명한 유리문 위에서 번쩍였다. 본래 가게의 이름을 나타냈을 법한 스티커의 흔적만이 남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매캐한 연기가 아직은 앳된 티를 내는 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도화는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에 카운터. 앞쪽에는 일 인용 소파와 테이블이 잔뜩. 그 너머에 줄지어 선 만화 책장을 밀고 당기며 어슬렁대는 손님들. 장초를 문 채 만화책 한 무더기를 품에 안은 아저씨. 소파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짜장면을 들이키는 학생. 얼굴에 만화책을 올려두고 수면을 취하고 있는 누군가.
카운터에서 신문을 보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곤 천천히 눈웃음을 짓는다.
"이거, 백도가 왔구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오늘은 누구를 찾아왔느냐?"
"저, 박 씨 아저씨요."
"박 씨. 애기가 왔어."
올해로 열 아홉이 된 도화는 애기라는 말에 입술을 불툭 내밀었다. 누구도 그의 입술을 보지는 않았지만.
"내 짜장면은?"
벽 귀퉁이 너머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대답한다.
"예끼, 염치도 없지. 짜장면이 라면인가? 삼 분만에 오게."
"에이, 알았어."
노인이 뒤를 돌아 도화에게 눈짓한다. 그에게 가 보라는 신호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고, 도화는 귀퉁이를 돌아 박 씨에게 향했다.
가게 안쪽은 입구에서 본 가게의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 인용 테이블과 소파가 책장 사이에 드문드문 놓여있다. 테이블의 사용률은 5할 정도. 그 중 가장 안쪽의, 구석진 자리에 박 씨 아저씨는 앉아있었다.
발치에 놓인 작은 만화책들은 일종의 무덤을 형성하고 있다. 테이블도 사정은 같아서, 다 읽은 건지 아직 읽지 않은 건지 분간도 가지 않는 만화들이 무질서하게 쌓였다. 박 씨 아저씨는 도화를 알아채곤 읽던 만화책을 내려뒀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누워 있던 책 몇 권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안녕, 꼬맹이. 중간고사는 잘 치뤘나?"
"대학도 안 갈 건데 공부는 해서 뭐해요."
"에이, 그래도 인마.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저도 그 만화 봤어요. 재밌던데."
"이거 말이냐? 그럼, 이거 안 보면 간첩이게?"
박 씨 아저씨가 테이블에서 만화책을 주워들었다. 그 탓에 몇 권이 가장자리로 더 밀려난다. 아저씨가 든 만화는, 유명하다 못해 일종의 신드롬을 일으킨 전설의 농구 만화. 도화는 이곳에서 저 만화를 전부 읽었다. 하룻밤만의 일이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있는 대로 엎어져서 자다가 선생에게 머리를 얻어맞았다.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면서요."
아저씨는 만화책을 도로 내려두었다. 방금 전에 밀려난 몇 권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소리를 들은 건지, 귀퉁이 너머에서 카운터의 노인이 얼굴을 빠끔히 내밀었다.
"책 그만 더럽혀, 인석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아저씨와 함께 허리를 굽혀 떨어진 책들을 그러모은다. 테이블에 올려봤자 다시 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발치에 열을 맞춰 쌓아두기로 했다. 주위를 그렇게 정리하고 나서야 이야기가 진전되기 시작했다.
"어려운 거 아니야. 배달을 좀 해 줬으면 하는데."
"배달이요?"
"그래."
"뭘 배달하는데요?"
"어려운 거 아니야."
다 헤진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내려둔다. 몸을 숙인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자는 제스처다. 도화도 아저씨를 따라 몸을 조금 굽힌다. 시야에 들어오는 소파는 누더기나 다름이 없다. 주인 할머니는 아무래도 모든 소파를 교체할 생각은 않으시는 것 같다.
"조그만 보석. 그거 하나 우편함에 넣고 오면 된다."
"보석? 어, 잠깐만요."
"야, 야, 괜찮아. 뭘 또 빼려구 그래. 여기까지 와서."
"보석이면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얼마 안 해."
"저 돈 없어요."
"에이, 넌 무슨 일 하기도 전에 잃어버릴 생각을 하냐."
"싫어요! 애초에, 배달이면, 저 말고도 실력 좋고 빠른 형들이……"
"넌 빽이 있잖냐."
안색이 다소 파랗게 질린 감이 있는 도화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는 그 틈을 파고들어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 사람, 널 꽤 아끼고 있는 것 같던데. 기대에 부응해서 건수 올려야지. 엉?"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짜장면 시키신 분, 하는 목소리. 배달부는 헬멧을 쓴 채 철가방에서 짜장면을 두 그릇 꺼내 주었다.
"하나는 네 거다. 오늘 시험 날이라고 밥도 안 줬지?"
도화는 찜찜한 기분을 해소하지도 못하고 짜장면을 위장 안으로 꾹꾹 집어넣었다.
박 씨 아저씨의 창고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물건을 떼 와 판매하는 만물상인데, 때때로 귀한 물건이 손에 들어오면 경매 일도 겸업하는 모양이었다. 일전에는 무슨 외국의 산삼을 부자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겼다며 껄껄대기도 했다.
도화는 자주 그의 일을 도왔다. 평일에는 단순한 동네 심부름부터, 주말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옆 도시의 공장에서 직접 물건을 떼 오기도 했다. 물론 무급으로 도운 것은 아니었지만, 정식으로 직원을 고용하는 것보단 훨씬 싸게 먹혔기에 아저씨는 도화를 톡톡히 귀여워하고 있었다.
"모레에 물건을 받으러 오라 했다고?"
테이블 너머의 현상이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짓씹듯 내뱉었다.
"그, 네. 창고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라고 하셨어요."
현상은 새하얀 커피잔을 들어 입가로 옮긴다. 음료를 삼키는 입술이 썩 좋지 않은 각도로 비틀렸다.
"모레면 일요일인가…… 그 놈, 너 말고 나한테 시킬 일이 있는 모양이다."
"소장님한테요?"
"네가 분명히 나한테 보석 얘기를 할 거라 생각했겠지. 그럼, 내가 그 비싼 걸 너 혼자 옮기게 두겠니?"
"……아니요."
도화는 괜스레 의기소침해진다. 현상은 말없이 새카만 커피를 몇 모금 마시다가, 잔에서 손을 뗀 도화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뜬다.
"안 마실 거냐?"
"아, 아니요."
"다 식는다."
허둥지둥 잔으로 손을 뻗는다. 아직 온기가 가득하다. 희멀건 우유 거품이 여즉 커피와 섞이지도 않았다. 첫 모금을 마신다. 적당한 온도의 카페 라떼는 깜짝 놀랄 정도로 고소하다.
"맛있냐?"
"네."
"그래……"
현상은 흰머리가 제법 섞인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유리창 너머의 허공을 응시한다.
도화는 얌전히 고소한 카페 라떼를 홀짝이기나 했다.
박 씨 아저씨는 웃는 얼굴로 도화와 현상을 맞았다. 어디에 쓰이는 건지도 모를 물건들이 철제 선반에 켜켜이 쌓인 창고는 언제나 어둑어둑하다. 솔직히, 아저씨와 단둘이 창고를 돌아다니다 보면 무서운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근처의 온갖 심부름을 하고는 있지만, 어쨌거나 도화는 아직 열 아홉인 것이다. 키도 작고 근육량도 많지 않은. 성장이 아직 끝나지를 않은.
하지만 오늘은 현상이 곁에 있다. 그렇다면 무섭지 않다.
"이야, 안녕하세요. 애기 보호자 되십니까?"
싱글싱글 웃는 얼굴에 보기 좋게 주름이 졌다. 현상은 무표정하게 그 낯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연다.
"무슨 용건이지?"
"애기한테 말씀 못 들으셨나?"
현상이 이곳에 모습을 보였다는 건, 명확하게도 의뢰의 내용을 들었다는 의미다. 그걸 뻔히 알면서 왜 모르는 척을 할까. 도화는 괜히 눈에 힘을 주고 아저씨를 바라본다. 정작 그의 시선은 도화를 향하지 않았지만.
현상은 눈을 가늘게 뜬다. 평범하게 다정해 보이는 얼굴에 한순간 날카로운 빛이 서린다.
"당신이 장물상을 하고 있는 건 알고 있어."
어라, 만물상이 아니라?
도화는 순식간에 눈에 들였던 힘을 풀고 만다.
"수상쩍은 경매 기록이 한두 건이 아니더군."
아저씨는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건다. 심심하면 보여주는 야비한 미소다. 도화는 그의 이런 미소를 몇 번이고 봤다.
"아이, 뭘 장물까지 갑니까. 그냥 잠깐 빌려오는 거 뿐이야. 손놀림이 좋은 애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아. 그런 재능을 썩히기엔 아깝잖아. 이런 데라도 써먹어야 걔네들도 먹고 살 거 아냐. 애기, 너도 그렇지?"
야비한 얼굴의 아저씨가 도화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도화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현상의 손이 도화의 눈앞에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뒤로 주춤하고 만다.
"보석을 한 번 보지."
현상이 낮게 읊조렸다.
아저씨는 샐쭉 웃으며 근처의 선반에서 우유갑보다 조금 작은 상자를 꺼냈다.
반지 상자를 두 개 이어 붙인 듯한 모양이다.
현상은 상자를 건네받는다. 망설임 없이 뻑뻑한 뚜껑을 벌컥 열어젖힌다.
"살살 좀 여세요. 그러다가 떨어지면, 어? 손해배상 청구할 거야."
현상은 그의 말을 무시한다.
상자 안의 보석을 응시한다.
시퍼렇게 빛나는 군청색의 사파이어.
심해의 한 조각을 떼어 벼려낸 듯한 색채.
그럼에도, 빛을 가감없이 투과한다.
제 아래에 깔린 비단의 결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무언가 시야에 방해가 된다.
사파이어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커다란 금.
아니, 이것은, 금이라기보단, 무늬다.
여덟 갈래 별 모양의 무늬.
단지, 그 갈래들이 너무나 얇아 금으로 보였을 뿐.
아름답다.
조금만 더 보고 싶다.
라고 생각했을 즈음,
현상이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매몰찬 소리가 났다.
"밀수품이군."
환상을 상냥하게 뜯어부수는 목소리.
"그쪽 데이터베이스를 겨우 흥신소 일에 쓰셔도 됩니까? 검사님."
"아직 제대로 차린 건 아니니까 상관 없어. 겸업조차 아닌 거지. 설령 얼토당토 않은 죄로 기소된다 쳐도, 검사 나부랭이가 아는 애 하나 도와줬다고 유죄를 내릴 인간들은 더더욱 없다."
"자기 식구라고 감싼다 이건가? 좋으시겠습니다."
현상은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이내 보석함을 외투 안주머니에 던져넣는다.
"어차피 조만간 연을 끊을 집안이지만 말이지."
딱딱한 소파 위에 누워서 과거를 회상했다.
선풍기를 꼭 빼닮은 전열기가 발치에서 따끈한 열기를 쏘아보내고 있다.
그 후엔, 분명 영감님 차를 타고 배달 장소까지 향했던가. 우편함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CCTV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 지정된 우편함에 보석함을 던져두고 빠져나왔다. 기름칠이 되지 않은 우편함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끔찍한 금속음을 냈던 걸 기억한다.
이번 건에 휘말린 사파이어, 분명 그때의 사파이어가 맞지.
맞을 거다. 그렇게나 선명한 여덟 갈래 무늬는 흔하지 않다고, 영감님이 말해주었으니까.
아마 이런 형태를 지닌 사파이어는 우리나라에 하나 뿐일 거라고……
이렇게까지 지독한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보석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나쁜 놈들 뿐이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풀이 조금 좁은가.
민석은 그런 하잘것 없는 생각을 하다가, 잠시 눈이라도 붙일까 고민하다가, 몇 십 초의 고뇌 끝에 겨우 눈꺼풀을 닫았다.
소파 뒤편의 출입문에서 덜컹이는 소리가 들린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아, 뭐야. 문 안 잠그고 갔나 했네. 형, 연락 좀 하고 오라니깐요."
사무실의 주인이 아픈 몸을 이끌고 행차하셨다. 목 뒤로 둘러맨 깁스는 왼팔을 꽁꽁 싸매고 있다. 얼마 전의 사건에서 의도치 않은 격투를 벌이다가 결국엔 왼팔에 금이 갔다고 한다.
물론, 격투란 본래 양쪽이 동등한 전투력을 가지고 합을 나누는 행위이니,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동현의 경우에는 단어가 다소 맞지 않는 감이 있다. 민석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일단락 됐지?"
격투 아닌 격투를 벌인 사건 말이다.
"응, 어느 정도."
동현은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책상 앞에 가 앉았다. 애를 쓰며 책상 밑의 컴퓨터 본체를 켠다. 민석은 여전히 소파에 누워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비척비척 자세를 바꾸어 소파에 앉았다. 전열기 가까이에 있던 발바닥이 뜨끈뜨끈하다.
"회장은 반지를 보고 혐의를 인정했으니까. 남은 건 이제 재판 뿐인데, 그건 변호사들이 알아서 잘 해 주겠죠. 애초에 저희 로펌 담당 사건도 아니고……"
"애꿏은 사원은 왜 죽인 거야?"
"그냥 사원이 아니에요. 임원이라니깐."
"그래, 그거."
"아니, 뻔하죠. 횡령 사실을 들켰다나. 말싸움을 하다가 몸싸움으로 번졌대요. 그러다가 임원이 운 나쁘게 머리를 부딪혀서 죽어버린 거지."
"죽은 걸 알았으면 시체를 치워야 할 거 아냐."
"전부 형처럼 생각하는 줄 알아요?"
"나였으면 치웠다."
"어차피 회식 자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게 자기들이었으니까. 우리는 못 봤다. 술에 취해서 실족한 게 아니냐. 하고 뻗대는 게 더 쉽지 않겠어요? 시체에 손 안 대도 되고."
"그래, 그래."
"밀어서, 실수로 죽인 거니까 흔적도 많이 안 남았을 거란 말이죠."
"반지를 어디에 부딪힌 게 최악의 실수였네. 보석 조각만 없었으면 평범한 실족사처럼 보였을 텐데."
"그런 거죠. 싸우다가 벽에라도 부딪혔던 걸까……"
"그런 건 지금 생각해봤자야. 어차피 죄도 인정했다면서?"
"그건 그렇죠."
잠깐의 침묵. 전열기가 작동하는 소리. 그 위로 겹쳐지는 컴퓨터의 부팅음. 동현은 성한 오른손을 움직여 마우스를 이동한다. 무얼 하고 있는지 민석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새카만 모니터의 뒷면만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팔은 좀 괜찮냐?"
동현이 첫 진찰을 받은 지 오늘로 딱 일주일이다. 단순히 금이 갔을 뿐이니 깁스는 오래 하지 않아도 될 거다.
"깁스 때문에 별 느낌도 안 들어요. 다음 주엔 풀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
"너 때린 인간 얼굴은 봤고?"
동현은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아주 잠시,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고민하는 얼굴을 보이다가.
"아뇨. 홀에서 도망가는 걸 보고 뒤쫓아갔는데. 전시장을 나간 뒤에…… 얼굴 볼 틈도 없이 갑자기 얻어맞아서."
"못 봤다고?"
"헤헤, 어디 CCTV에는 찍히지 않았을까요?"
"퍽이나 찍혔겠다."
의미 없는 웃음을 슬슬 흘리는 동현은 정말이지 마음이 편해 보였다.
동현의 무전을 듣고 전시장 밖으로 튀어나간 민석은 예상한 대로의 장면을 마주했다. 인적 없는 전시장 뒤편에 홀로 쓰러져 있는 동현. 신나게 얻어맞았는지 퉁퉁 부어오른 뺨. 테가 조금 구부러진 안경.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깨를 몇 번 두드려 봐도 끙끙대는 신음이나 흘렸다. 아무래도 병원에 데리고 가야겠다는 판단을 내린 후에야, 민석은 동현의 곁에 오도카니 놓여있던 그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찾고 있었던 반지함이, 생뚱맞게도 그곳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민석은 순간 동현의 소지품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보다도 수입이 적은 동현이 반지를 살 일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저건 반지함이 아니라 단순한 보관 상자인가? 저 안에, 내 손바닥보다 작은 저 상자 안에, 대체 무슨 쓸모있는 걸 들고 다닌단 말인가?
민석은 반지함처럼 생긴 상자를 집어들었다. 망설임 없이 뚜껑을 연다.
눈이 부셨다.
무언가가 햇빛을 정면으로 반사하고 있다.
고개의 각도를 다소 조절하고 나서야, 민석은 눈의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여덟 갈래 무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짙푸른 보석이 있는 힘껏 색채를 뿜어내고 있다.
농염한 빛깔.
뚜렷한 대비.
백금을 한낱 장식으로 보이게 하는 박력.
반지함을 든 손이 한순간 무거워진다.
너 따위는 이 보옥을 가질 수 없다.
그릇이 되지 못한다.
그런 전언이 뇌리에 스친다.
민석은 급하게 함을 닫았다.
잠깐의 심호흡.
억지스러운 숨결.
이건, 동현이 쫓던 사람이 놓고 간 거다.
하지만, 왜지?
왜 놓고 가야만 했던 거지?
로비에서 상해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치에 맞다. 상해 사건으로 전시장이 혼잡해진 와중에 빈틈을 파고들어 절도한다. 그런 계획이었을 거다. 실제로 거의 성공하기도 했고.
오동현이 그를 쫓은 게 상정 외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반지를 포기한 건가?
아니, 아니다. 범인에게 그 정도의 각오가 없을 리 없다. 다른 녀석은 사람을 찔렀다고. 전시장에 혼란을 주고 싶었다면, 다른 온건한 방법이 많다. 스프링쿨러나 비상벨만 작동시켜도 사람들은 충분히 동요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사람을 찌를 정도의 각오가 있는데, 겨우 뒤쫓는 사람 하나 붙었다고 절도를 포기해?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아니면, 오동현과 친분이 있는 사람인가?
그것도 이상하다. 이미 절도 행위가 발각된 이상, 동현은 그의 이름을 경찰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그렇다면 범인이 취할 수 있는 액션은 한 가지다. 동현의 입을 막는다. 죽이든, 납치하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절도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동현을 죽이지도 않았다.
멀쩡히 살려두었다.
이상하다......
머리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곳에 서서 생각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흐릿하게 들려오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를 듣고, 민석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 사파이어 얘기하는 거냐?"
현상은 보기 드물게 심부름센타의 창가에 서 있었다. 항상 블라인드가 내려와 있는 창문 밖을 내다보려면, 손가락으로 블라인드의 틈을 벌릴 수밖에 없다. 현상은 블라인드에서 손을 떼고 도화를 바라보았다.
"그거라면, 박 씨 손을 떠나서 다른 장물아비한테 갔었지. 아마 그 이후에도 계속 국내를 돌았을 거다."
"그게 지금은 반지알이 되어 있던데요."
새하얀 백발이 온풍기의 바람을 맞고 흔들린다.
"일산에서 뭘 하고 온 거냐."
"반지 심부름이요."
현상이 자세히 설명해 보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기에, 도화는 달아빠진 믹스 커피를 몇 입 마시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동현을 통해 들어온 의뢰. 성격 나쁜 변호사. 전시장으로의 잠입. 상해 사건. 도난. 기절한 오동현. 회수된 반지. 시계열에 따라 차근차근 설명하니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아, 그 천재가 칼에 찔렸다던 그 사건이구나."
"천재요?"
"모르냐? 한국인이 불세출의 해외 연구 기관에 들어가서 한때 유명했는데."
"으음, 모르겠어요."
"됐다."
현상은 멋스러운 책상 앞으로 되돌아온다. 소장 백현상이라는 명패가 반질반질하게 빛난다.
"하여간 대단한 우연이구나."
"다시 봐도 예쁘긴 예쁘더라고."
"사파이어가?"
"네. 몇 억 씩이나 주고 살 만큼 가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십 년 전의 너라면 갖고 싶다고 생각했을 거다."
도화는 말을 멈춘다. 그가 꺼낸 말의 저의를 생각해 본다. 도화의 고개가 옆으로 슬쩍 기울어지고 나서야, 현상은 풀이를 해 주었다.
"그 때의 넌 사파이어에 매혹당했지."
박 씨에게 보석을 건네받은 두 사람은 현상의 차로 배달 장소까지 향했다.
보안 카메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차를 세웠다. 주정차 금지 표시는 되어 있지 않다. 현상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다. 제 옆의 꼬마에게 한 까치를 디밀어 보았지만, 아직 피우지 않는 모양이었다. 열 아홉 치고는 건전하다.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흔해빠진 서울의 길거리. 새천년이 시작되고 불과 일 년. 작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더라? 검사실의 인간들이 진지한 얼굴로 Y2K를 염려하는 꼴을 보고 탈력감에 빠졌던가. 아니다. 그건 재작년의 일이다. 작년이 새천년이니까.
운좋게도 만난 새천년에 이렇게나 무심할 수 있나.
그래......
제 인생에 있어 시간이란 이다지도 감흥이 없는 것이다.
니코틴을 들이켰다. 폐에 타르를 겹겹이 쌓는다. 유쾌한 아득함이 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퍼진다.
"저기......"
꼬마가 입을 열었다. 현상은 담배를 꼬나문 채 한참 어린 동업자를 내려다 본다.
"그거... 잘 있는지 확인하면 안 돼요?"
"뭐?"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위화감이 느껴진다.
"보석이요..."
입술에서 담배를 빼낸다. 독한 연기를 코로 내뿜었다. 현상은 가만히 꼬마를 바라보다가, 이내 안주머니로 손을 옮긴다. 상자의, 둥근 모서리에 손끝이 닿았다.
"옛다."
꼬마는 마른침을 삼킨다. 상자를 받아든다. 긴장한 손가락이 꼬물대는 모습을 지켜본다.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한다.
끔찍하게 아름다운 사파이어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됐냐?"
꼬마는 대답하지 않는다.
현상은 반도 타들지 않은 담배를 마저 피운다.
이대로 보석을 들고 도망갈 깜냥이 있는 녀석은 아니다.
고작 이 분 정도라면 맡겨도 되겠지.
보석에 대해 생각한다.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의 행방에 대해 생각한다.
꼬마의 처우에 대해 생각한다.
그 무엇에도 제대로 된 해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맛없어진 꽁초를 빈 담뱃갑에 쑤셔넣는다.
"이제 가자."
꼬마는 대답하지 않는다.
여즉 보석을 들여다보고 있다.
현상은 그에게서 상자를 회수했다.
아쉬운 감정이 대놓고 드러나는 얼굴.
"나중에 돈 벌어서 사라."
두 사람은 서울의 길거리에 녹아들었다.
백발의 현상은 서랍에서 안경집을 꺼낸다. 안경은 이미 쓰고 있으니, 아마 안경닦이를 꺼내는 것이리라. 도화는 짤막하게 예상했다.
"그 사파이어는 분명 아름다웠지. 나조차도 순간 눈길을 빼앗겼으니."
실제로 현상은 안경집을 열어 안경닦이를 꺼냈다. 콧잔등에서 안경을 들어내, 가볍게 렌즈를 닦아내기 시작한다.
"어떠한 제한조건 없이도 누구에게나 어필할 수 있는 원초적인 매력. 그것이 바로 미, 아름다움이다."
도화는 입에 일회용 종이컵을 물고 현상을 바라본다. 믹스커피는 이미 다 마셨다.
"사치재는 보통 그러한,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으로 인간들을 유혹하지. 손에 넣지 않으면 견딜 수 없도록 매혹하는 거다. 그 배후에 인간이 있고 없고는 상관이 없어. 가치는 인간이 정의하는 거지만, 미는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한낱 인간이 정의할 수 없는 미가 더욱 공포스러운 거야. 정의할 수 없으면 조절할 수 없으니까. 이게 뭘 의미한다고 생각하느냐?"
종이컵을 뱉어낸다. 둥그런 모서리가 치아의 압력을 받아 우그러졌다.
"아름다움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 뭐 그런 거겠죠."
"지금의 너는 그걸 알고 있지."
그렇다.
그래서, 일주일 전의 일산에서, 자신은 반지를 보고 공포를 느꼈다.
이런 류의 아름다움에 현혹된다면, 나는 결국 인생을 내던지고야 말겠구나.
그런 직감을, 느꼈다.
분명 또 다른 누군가는 이 보석을 손에 넣고 기뻐하겠지.
또 다른 누군가는 이 보석을 손에 넣고도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 그릇이 아닌 것이다.
"어렸던 너는 그걸 알지 못했다. 순수한 정신으로, 미에 이끌려서, 그 보석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어했지 않느냐."
햇빛을 날선 각도로 반사하던 보석의 모습을 떠올린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색채......
사진 따위로는 미처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
다시는 볼 수 없을 광경이라고 생각하니 미세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역시......
그것에 집착할 일은, 이제 없다.
"아, 알았어요. 이젠 알았잖아요. 이십 년 전 일로 설교하시기야?"
딱딱한 감이 있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탁상에 두었던 빈 종이컵을 들어 쓰레기통으로 던져넣는다.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는 건 열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간.
한도 끝도 없이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도화는 문득 허기를 느꼈다.
"점심 드셨어요?"
"아니."
"같이 드실래요?"
"네가 사는 거냐?"
"내가 딴따라 하면서 돈을 엔간히 벌거든요."
"그 웃기지도 않은 헤드폰을 쓰는데도?"
"웃긴데?"
도화는 샐쭉 웃으며 외투에 팔을 밀어넣었다.
현상은 말끔하게 닦인 안경을 도로 콧잔등에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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