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紋石
Serpentine
소나무는 평소와 같은 하루를 영위하고 있었다.
남과 공유하는 침대 위에서 눈을 뜬다. 옆 자리의 동거인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오늘의 경우, 있었다. 푹신한 이불 밑에서 곤히 잠든 얼굴만을 밖으로 내밀고 있다. 그는 잠시 그 얼굴을 내려다 본다. 언제나의 맨 얼굴이 편안한 모양새로 수면을 유지하는 모습.
아직 자고 있다. 무슨 꿈을 꾸고 있을지 짐작해 본다. 솔직히 감도 잡히지 않는다. 어쨌거나 태평한 꿈 속 세계일 것이다.
침대에서 내려온다. 바로 옆에 온갖 잡화로 가득한 테이블이 하나 있다. 본래 나무가 작업용 책상으로 쓰던 것을 지금은 선반 대용으로 사용 중이다. 내용물을 전부 파먹힌 과자 봉투가 굴러다니기에, 집어든 채 방 밖으로 나섰다.
거실 소파 위에서 밤을 보낸 스마트폰은 충전이 끝나있었다. 길게 이어진 충전 선을 뽑아내고, 밤 사이 무슨 연락이 왔나 훑어본다. 어제 업로드한 그림에 대한 팔로워들의 반응 외에는 신경 쓸 만한 게 없었다.
부엌으로 이동한다. 유리문을 하나 넘어 베란다로 이동해서. 분리수거함에 과자 봉투를 던져넣는다. 2월의 한기로 싸늘하게 식은 바닥에 맨발이 닿는다. 가벼운 오한을 느끼며 부엌으로 복귀.
어제 먹다 남은 찌개가 인덕션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밥통에는 적은 양의 밥이 구석에 뭉쳐 있다. 냉장고에는 먹을만한 반찬들이 애매한 분량으로 군데군데 남아 있다. 전부 오늘 안에 먹어치우는 편이 좋다.
상을 차리고 있으니 유신이 복잡한 헤어스타일을 뽐내며 침실에서 걸어나왔다. 부엌에서 나는 인기척을 듣고 깬 걸까.
"뭐 해?"
늘어지게 하품한다. 대단하게 꼬인 긴 머리를 양 손으로 풀어헤치려 든다.
"밥 데우기."
"식빵 먹으면 안 돼?"
"어제 다 먹었잖아, 식빵."
"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그래."
"이따 마트 갈까?"
"안 그래도 장은 봐야 돼."
"집에 뭐 있어?"
"거의 없어."
조리대의 모서리에 달걀을 부딪힌다. 가늘게 금이 간다. 흰자가 새어나오기 전에 프라이팬 위로 올린다. 점성을 갖고 주욱 흘러내리는 세포. 생명이 되지 못한 무정란. 열을 받아 익어간다.
유신은 식탁 앞에 앉아 반찬통의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잡담.
요즘 확실히 버추얼이 인기긴 인기구나. 몇 년 전에 비해 들어오는 의뢰 수가 엄청 늘었어. 나야 좋긴 하지만. 내가 리깅한 아바타가 방송에 나오는 걸 보고 있으면 말이지, 꼭 내 애를 보는 거 같다니까. 리깅하랴 모션 고치랴 하루종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정이 안 생길 리 없잖아. 그래서 다들 아바타 제작자들에게 엄마니 아빠니 하는 거구나 싶어.
그럼 결혼도 안 했는데 애가 수십 명이나 있는 거네.
베이컨을 굽는 소리.
아니지, 캐릭터가 있어야 모델링을 할 수 있는걸.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그리는 건 일러스트레이터의 몫. 그러니까, 따지자면 나는 수많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랑 결혼해서 애를 만든 셈이지.
접시에 세팅.
만족스러워? 지금 하는 일이.
응, 좋아. 의외로 사람들이랑 대화도 많이 할 수 있고. 내가 만든 모델이 요긴하게 쓰이는 걸 보면 보람차.
그럼 나랑도 결혼한 게 되나?
송 군이랑은 게임도 같이 만들었잖아? 그 게임, 몬스터도, npc도 엄청 많았지. 대가족을 일궜던 거야, 우리.
본격적으로 식기가 부딪힌다.
최근에는 너랑 버추얼도 만들었지.
백도화 씨 캐릭터 말이지? 나, 백도화라는 이름만 보고 막연히 여자라고 생각했거든. 검색해서 얼굴을 봤을 땐 정말이지 깜짝 놀랐어.
나도.
후루룩.
근데, 비싼 돈 주고 만들어 놓고 잘 안 쓰시더라? 저번에 하스스톤 방송 하길래 잠깐 봤는데, 글쎄, 담배 피우느라 버추얼을 켰다고 하는 거야. 뭐랄까...... 내 애가 제대로 탈선한 걸 보는 기분. 복잡미묘했어.
금발의 고양이 소년이 걸걸한 목소리로 담배를 피우는 건, 의외로 팔리는 요소일지도 몰라.
송 군, 진심이야?
마니아들은 생각도 못한 지점에서 열광하더라고.
간단한 아침을 마치고 식탁을 치웠다. 그릇을 세척했다. 그 사이 유신은 집의 온갖 창문을 열어제꼈다. 머지 않아 청소기가 굉음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녀의 루틴 중 하나다. 밥을 먹고 앉아만 있으면 속이 부대낀다며, 뭐라도 하며 몸을 움직이려 든다. 청소기를 돌리든,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 개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든.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택에서 근무한다. 나무의 경우 유신의 집에 얹혀살고 있으니 자택이라는 단어는 애매하지만. 둘 다 주거지에서 컴퓨터 한 대로 모든 업무를 소화하는 편이다. 타블렛을 연결하느냐 않느냐 정도의 미세한 차이는 있다.
나무도, 유신도 각자의 업계에서는 인지도가 나름 있어 일감이 끊기지는 않는다. 손이 빠르고 그림체가 다양한 나무는 때때로 펑크를 낸 일러스트레이터의 대타를 뛰기도 하고. 3D 모델링을 전문으로 하다가 최근 스켈레톤 애니메이션에 발을 들인 유신은 외려 그쪽의 의뢰가 더 잘 들어오기도 하고.
잠시 각자의 할 일을 하다가, 해가 지기 전에 마트에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유신의 제안이었다. 그녀는 마감 세일따위에 연연하는 여자가 아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왔다. 자동차로 칠 분 정도 되는 거리에 대형마트가 있다. 장을 볼 때면 애용하는 곳이다. 운전은 언제나 나무의 몫이다.
오늘 가지고 나온 차는 유신의 샛노란 페라리.
"항상 생각하는데. 너무 눈에 띄지 않아?"
운전대를 잡은 나무가 물었다.
"눈에 띄어서 좋은 거야."
"남한테 보여지는 게 즐거운가?"
"어머, 송 군도 운전할 때 편하지 않아?"
"그건 그렇지. 다른 차들이 겁을 먹고 피해가니까."
아무도 페라리 앞에 끼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 도로 상황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노란색은 좋은 거 같아."
유신이 콧노래치듯 중얼거린다.
"어디에 있든 눈에 잘 띄잖아."
나무는 썩 동의할 수 없었지만, 조수석의 그녀가 즐겁다는 얼굴을 하고 있기에 고개나 대강 끄덕여주었다.
평일 오후의 마트는 제법 한산했다. 손님을 태우지 않은 무빙워크가 조용히 레일 위를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무는 쇼핑카트의 손잡이를 손에 쥐었다. 이곳에서도 운전은 그의 몫이다.
"뭐뭐 사야 돼?"
"대파랑, 오이, 양배추, 양파, 마요네즈, 굴소스, 그 외에 이것저것."
냉장고 사정에 더 빠삭한 사람 역시 나무다.
"나, 딸기 먹고 싶은데."
"사."
전체적인 경제권은 그에게 있지 않으므로 유신의 바람을 억제할 이유는 없다. 유신은 곧 새하얀 스티로폼에 가지런히 담긴 딸기를 카트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전진. 좌회전. 또 다시 전진.
"송 군은 먹고 싶은 거 없어?"
없다는 대답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기 전에, 재빨리 근처의 매대를 훑어본다. 냉동식품 수백 봉지를 품은 냉동고가 제 옆에 서 있다.
"오랜만에 피자나 먹을까."
자신보다 키가 훌쩍 큰 냉동고를 열자 인공적인 한기가 피부를 덮쳤다. 냉동피자의 얄쌍한 박스를 집어든다. 아무거나 집어들었지만, 아무래도 시카고 피자는 아닌 것 같다.
"은근히 레토르트 좋아한단 말이야, 송."
"전자렌지만 있으면 뭐든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지."
"우리 집엔 전자렌지만 있는 게 아냐."
"에어 프라이어에 돌리면 더 맛있겠지?"
유신은 눈웃음을 지으며 피자 박스에서 시선을 물렸다. 나무는 그제야 박스의 겉면을 확인한다. 치즈 피자가 쫀득하게 늘어지는 치즈를 자랑하고 있다. 평소라면 무난하게 입맛이 돋을 법한 사진이다.
나무는 자신이 미세하게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신은 이쪽에 등을 보인 채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풍성한 갈색의 머리칼이 느긋하게 흔들린다. 나무는 그녀가 주기적으로 염색을, 펌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수리 부근의 새 머리카락은 새카맣다.
슬슬 염색을 해야 할 때가 온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외부에 눈을 돌린다.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을 나무는 깨닫는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정신의 굴곡을 평탄화할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
상관 없는 일이다.
"아, 유선이가 저 와인 좋아하는데."
뭐라 읽는지도 알 수 없는 라벨이 붙은 와인을 가리키는 유신.
"동생 분이?"
"응. 와인은 이상하게 쓴 걸 좋아해, 그 애."
"다른 건 달달하게 드시나?"
"카페모카도 좋아하고, 아인슈페너도 좋아해."
"아인슈페너는 그렇게 달지 않은데."
"크림이 조금 달지 않아?"
"음...... 하긴 크림이 조금 그렇지."
"저거, 사서 보내주면 마시려나?"
"변호사는 바쁘지 않아?"
"우리처럼 낮에 장 볼 시간은 없겠지."
결국 뜬금없는 선물용 와인은 사지 않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한 번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울린다. 진동에 간극이 없다. 연속된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라는 뜻이다. 트렁크에 짐을 옮기던 손을 멈춘다. 스마트폰의 액정을 확인한다. 정우에게서의 전화다.
유신은 쇼핑카트를 반납하러 간 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리라.
"여보세요."
느긋한 어조를 꾸며낸다.
"김민석이 있습니다."
단숨에 느긋할 수 없게 되었다.
머리에 조금 열이 오른다.
"응?"
"보스가 찾던, 그 사람이."
"백도화 씨가 있어?"
"오동현도 있습니다. 지시를 받고, 주얼리 페어 측에 잠입한 것 같습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흘긴다. 줄줄이 늘어선 카트의 행렬. 유신은 그 꼬리 부근에 방금 전까지 사용하던 카트를 밀어넣고 있다. 무언가에 걸려 잘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낑낑거리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반지가 그쪽에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았나 보네."
"예."
"반지를 찾고 싶어서 잠입한 거겠지?"
"그 외에는 의도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눈꺼풀을 닫았다. 외부의 자극을 잠시 차단한다. 당면한 상황을 파악한다. 뜬금없는 난입자들의 목적을 고려해 본다. 그들의 행동이 미칠 영향을 계산한다. 각계각층의 조력자들을 늘어세운다. 복잡하게 연결된 사회망. 인간관계. 이해득실.
세계란 어차피, 반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럼 돌려 줘."
눈을 떴다. 유신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표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다. 남은 시간, 길어봤자 삼십 초.
"네?"
"백도화 씨한테 반지를 건네. 직접 건네든, 간접적으로 건네든."
"하, 하지만, 반지를 가져오라고 한 건 보스......"
"거기에 정말로 있다는 걸 안 이상 상관 없어."
"A군은 이미 사람을 찔렀습니다."
"응, 그것도 상관 없어."
전화기 너머에서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타격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백도화 씨한테 줘."
"보스,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인재야."
유신과 눈이 마주쳤다. 애매하게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본다. 그녀는 세 손가락을 접어 수화기를 표현하더니, 귓가에서 몇 번을 까딱인다.
"네?"
조수석에 올라타는 유신. 나무는 자연스럽게 열려있던 트렁크를 닫는다. 말소리가 흘러들어갈 염려는 없다.
"인재니까, 이 정도 빚은 지우는 편이 좋아."
차에서 조금 떨어진다.
"보스의 계획을...... 박살내면서까지요?"
"박살이라니. 아니야. 조금 더 돌아갈 뿐이야."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본다.
"......알겠습니다."
"응, 고마워."
전화를 끊었다.
노랗게 빛나는 페라리는 숨을 죽이고 서 있다.
운전석의 문을 여니 휴대전화를 보던 유신이 이쪽을 쳐다본다.
"클라이언트가 쪼기라도 했어?"
"시안을 또 고치라네."
안전벨트를 끌어당긴다. 가슴을 가로질러서, 몸을 고정할 수 있도록 한다. 유신은 뭐가 웃긴지 피식피식 웃었다.
"가서 딸기 먹자."
"응."
분명 딸기를 씻는 것도 자신의 몫이리라.
나무는 그렇게 생각하고 조금 웃었다.
그 남자와 연락이 닿은 건 사건 종결 후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본래의 계획보다는 며칠이 느린 결과였다. 예상도 못한 변수들의 개입으로 겨우 이 정도만의 타임 랙이 발생한 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나무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지는 무사히 재판의 증거품으로 제출되었다. 재판 이후 구속된 주인을 잃고 잠깐 떠돌던 차에, 이번에야말로 절도를 성공시켰다. 그러니까, 물품을 손에 넣는데 걸린 시간이 이틀. 밀항 브로커를 섭외하는 데에 하루. 물건을 국외로 몰래 빼돌리는 데에 사흘. 일본 땅에서 배송되는 데에 하루. 다 해서, 딱 떨어지는 일주일.
나무는 반지의 실물을 결국 보지 못했다. 정우가 보내준 사진만을 봤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까, 꽤 거물을 찔렀더라."
"그 편이, 이목이 더 쏠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글쎄. 요즘 사람들은 한 세대 전의 천재는 모를걸."
"그런가요......"
양희태 씨가 소동에 휘말렸다는 걸 안 직후에는, 솔직히, 상당히 동요했다.
내가 상황을 살피러 일산에 갔었다면, 분명히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겠구나.
자신의 존재가 남에게 인식되는 건 딱히 좋은 일이 아니다.
특히나, 그 같은 천재에게는 더욱이......
나무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자신을 인식했다.
그 남자는 제법 빠르게 연락을 취해왔다. 일본 내 배송이 이렇게 빨랐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브로커 측에서 무언가 손을 써 둔 게 아닐까. 중요한 물건이니, 빠르고 정확하게 배달할 수 있는 뒷골목 퀵서비스에 부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스턴트 메신저의 통화 수신 버튼을 누르니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뭐지?"
낮게 깔린 음색이 귀를 간질인다. 촉각이 곤두서는 느낌. 오랜만에 들어도 변하지 않은, 저주파를 꼭 닮은 목소리.
"잘 받으셨나 보네요."
"뭐냐고 물었다."
"그야, 사파이어죠."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호랑이가 있는 힘껏 그르렁거리는 소리.
쉰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는군...
순수하게 감탄한다.
"아버님의 유품이지 않습니까? 반지에 박힌 그 보석."
"그래."
"우연찮게도, 십몇 년만에 손가락 밖으로 나왔기에. 회수해왔습니다."
"회수? 웃기는 소리를....... 내가 언제 그딴 요구를 했지?"
"물론, 제 독단으로 내린 명령입니다만."
남자는 입을 열지 않는다. 이런 일을 꾸민 너의 목적을 소상히 설명하라는 듯하다. 침묵 너머로 그런 압박이 느껴진다.
나무는 일순 고민하다가, 입 밖으로 낼 단어를 선별하다가, 천천히 혀뿌리를 움직였다.
"당신의 조직은 아직 건재하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자리를 건네받던 날의 기억을 되살린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봤자 사람 묻어본 적도 없는 백면서생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나야 이제 손을 뗄 생각이지만, 조직은 이제 나와 아무 관계도 없게 될 테지만, 너 같은 초짜가 이 자리에 앉아서 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세상은 어차피 반상과 다르지 않다, 라고.
"이제 당신의 시대와는 달라서, 대놓고 총칼로 싸움질하는 일은 많이 없습니다. 무력보다 중요한 건 자금력과 장악력...... 말하자면 하나의 기업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죠."
그러니 반상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단지, 반상에 늘어놓을 돌을 어떻게 끌어모으냐가 문제일 뿐이지.
그래서 나무는 생활이 안정된 후에도 방랑을 멈추지 않았다. 전국 각지의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돌에 적합한 인재들을 찾아 헤맸다. 방랑벽이야 젊었을 때부터 있었으니. 적극적으로 발을 넓히는 생활이 오히려 즐겁다면 즐거웠다. 적성에 맞았다고도 할 수 있다.
전파 너머에서 혀를 차는 소리.
"그딴 건 통장에 찍히는 돈만 봐도 안다. 이딴 푼돈, 보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가."
"저도 돈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엔 아깝고. 투자로 돌리자니 금액이 애매해서. 노후자금이라도 하세요."
"죽고 싶은 거냐?"
"아직은요."
대면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이런 자리에 올라있다지만, 수십 년 간 진창을 구른 포식자의 눈을 피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그는 몇 번을 으르렁대다가 이내 말을 잇는다.
"돈에 관심이 없다. 싸움으로 땅따먹기를 즐기는 것도 아니다. 남들의 위에 군림해서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보며 명예를 얻고 싶은 것도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당신이 다시 보스 자리에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요."
나무가 조직의 실질적인 운영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으로서는 백정우 뿐이다.
그에게는 그만큼의 신뢰를 걸어도 좋다. 나무는 일찍이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다른 조직원들에게 있어 저는 단순한 연락책...... 그런 인식일 겁니다."
"너는, 결국 나의 조직으로 뭘 이루고 싶은 거지?"
"글쎄요."
나무는 비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반지는 마음에 드십니까?"
"도로 가져가라."
"그러실 거 같았습니다."
이른 시일 내에 장물아비를 통해 경매에 부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살 사람은 정해져 있다. 구매자는 또 다시 다른 경매를 열어 반지를 출품할 것이다. 그런 절차가 몇 번이고 반복된다. 그 사이 장물이라는 정체성은 희미해진다. 장물아비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세탁된 반지는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의지일 테니까.
지금의 보스는 그도, 그의 아버지도 아닌, 자신이기에.
자신에게 전해지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아버지의 유품을 시야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것이든가.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그렇다면 과정을 굳이 명확하게 할 필요는 없다.
전화를 먼저 끊은 쪽은 권진백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행이네. 최근에는 백도화 씨를 거의 미행하지 못했잖아. 그 쪽의 소득이 없었던 것 같은데."
"예. 요즘 들어 이상하게 미행에 민감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 전에는 덜 민감했다는 뜻이야?"
"이전보다 미행을 눈치채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붙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인데요."
"그래? 꼬리 밟힐 만한 일을 했나, 우리?"
"아니요, 그게."
"응?"
"저 외의 다른 사람이 그를 미행하는 걸 몇 번 목격했습니다."
"어?"
"뭐라고 할까요. 사실 그보단 그와 같이 다니는 사람을 미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같이 다니는 사람?"
"키가 훤칠하게 큰 청년입니다. 기껏해야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데. 백도화 씨가 그 청년과 함께 할 때, 미행이 붙곤 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아니라 그쪽을 경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알아볼까요?"
"어쩔까......"
"시간이 되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응, 일단은 그 정도로."
"보스는 경계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일전에, 카지노에서 봤던 남자도 그다지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거든."
"학원 이사장의 아들 말씀이시군요."
"그 사람처럼 단순한 친구일지도 몰라. 뭐, 그렇다기엔 나이 차이가 좀 나네. 이십 대면."
"......예."
"적당히만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고마워."
"네."
"끊을게."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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