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엔드 히어로즈

[야고라이] 크림과 피의 맛

그런 맛이 나는 키스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했다)

- 입술이 튼 야고에게 립밤을 발라 주는 라이죠의 이야기(사귀는 사이입니다)


“야고, 이쪽을 봐라.”

“아?”

다짜고짜 들려온 명령조의 발언에, 침대에 누워 있던 야고는 눈만 돌려 라이죠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라이죠가, 야고의 턱을 덥석 잡아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이쪽을 보라고 했을 텐데.”

“봤잖아.”

“제대로 고개를 돌리고 보라는 거다. 제대로.”

“너 말야….”

“흠… 역시나.”

야고가 미간을 구기며 으르렁대는 걸 시원하게 무시하고, 라이죠는 야고의 턱을 잡고 있던 엄지를 살짝 올려 그 입술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조잡한 손길인데, 가끔 이런 식으로 약한 걸 다루듯 건드리는 게 야고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차피 아프지도 않은데 말이다.

“야고, 입술이 텄구나. 갈라진 틈에 피도 배었어.”

“모르겠는데.”

“통증을 모르는 거야 체질이니 그렇다 쳐도, 불편감 정도는 느끼는 게 어떤가 싶은데 말이지. 보는 사람도 신경이 쓰여.”

야고의 무심한 대답에 짧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뗀 라이죠가, 표정을 바꾸고 빙긋이 웃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웃을 때는 변변치 않은 일이 이어지기 마련인 걸 알아, 야고는 이불 안으로 피신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짐작했다는 것처럼, 라이죠의 손이 야고의 어깨를 억세게 잡아 일으켰다.

“그러니 야고, 입술 보습을 하자!!!”

“싫어.”

“하하, 그렇게 대답할 걸 알아서 네 의견은 듣지 않기로 했어.”

“너….”

야고가 아무리 험악한 표정을 지어도 태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 라이죠는, 제 주머니에서 납작한 단지 모양의 작은 통을 꺼냈다. 야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그 단지의 뚜껑을 여는 것을, 야고는 체념하고 바라보았다. 틈을 노려 냉큼 도망가지 않은 건, 그래 봐야 이후 더 귀찮은 일로 발전할 것도 알고 있어서다.

“입술은 다른 피부보다 얇고 예민해서, 관리가 중요해. 특히 이런 날씨에는 건조해지기도 쉽고, 입술이 마른다고 혀로 핥았다가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도 있어. 뭐, 너한테는 그런 습관은 없는 것 같지만.”

야고는 관심도 없는 것을 조잘조잘 떠들며, 라이죠는 단지 안쪽의 연고를 검지로 떠내듯 문질렀다. 흰 크림 같은 게 듬뿍 묻어난 손가락 안쪽이 야고의 입술에 닿더니, 약을 바르듯이 살살 움직이기 시작한다. 엄지로 쓰다듬던 때와는 다른, 뭔가 끈적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영 묘한 기분을 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야고가 가만히 있던 건, 거절해 봐야 귀찮을 뿐인 걸 알고 있어서기도 했지만, 어째 라이죠가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던 게 제일 크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 건지 미소 띤 얼굴로 눈을 빛내고 있어서, 괜히 독기가 빠졌다.

“자, 다 됐다. 야고.”

라이죠의 손끝이 떨어지니, 입술에는 뭔가 들러붙은 듯 묘하게 답답한 감촉만이 남았다. 그게 영 언짢아서 입술을 감쳐물었더니, 약 같은 맛이 입안에 퍼져서 야고는 더 기분이 나빠졌다.

“…끈적끈적해서 기분 나빠.”

“이 정도는 참아라. 어차피 곧 잘 거지?”

야고의 불평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라이죠는 단지의 뚜껑을 닫았다. 크림이 남아 있는 검지는 손수건으로 닦아낸 후, 침대 옆의 협탁에 단지를 내려놓는다.

“이건 너한테 주지. 늘 내가 발라줄 수는 없을 테니까.”

“필요 없어.”

“일부러 널 위해 산 거니까 받도록 해. 입술이 튼 채로 내버려두지 마.”

“내 입술이 트든 말든 너랑 상관없잖아.”

“상관없지 않아. 나는 피투성이 입술과 키스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

얘 방금 뭐라고 했어.

“자주 바를 필요는 없어. 하루 한 번, 밤에 자기 전마다 바르는 거로 충분해. 그 정도면 너도 할 수 있겠지?”

야고가 제 귀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라이죠는 또 조잘조잘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 어렵지 않아. 아까 내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살짝 떠내서, 입술에 바르면 끝이다.”

그리 말하며, 라이죠는 검지로 제 입술을 쓰다듬듯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갈라지고 피도 맺혀 있다는 자신의 입술과는 다른, 깨끗하고 부드러운 옅은 분홍빛 위를 하얀 손끝이 스치듯 지나간다. 아까의 말 때문인지, 그게 왠지 맛있어 보였다.

충동을 거스르지 않고, 야고는 손을 뻗어 라이죠의 뒷덜미를 짚었다. 라이죠가 반응하기 전에 그 몸을 당겨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라이죠가 뒤로 피하려는 것을, 다른 손으로 허리를 붙잡아 막았다. 뒷덜미를 짚은 손을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고, 라이죠가 입을 다물기 전에 그 벌어진 틈으로 침범한다. 이런 식으로 도망갈 곳을 빼앗고 키스하면, 라이죠는 제 품 안에서 흠칫거리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그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야고는 꽤 좋아했다.

입안을 혀로 더듬어가다가, 입술을 꾹 누르며 살짝 비벼 본다. 손 안의 몸이 바르르 떨리고, 라이죠의 손이 밀어내듯 야고의 어깨를 두드렸다. 힘이 들어갔다고 해도 딱히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지만, 야고는 일단 입을 떼었다. 입안에서 영 익숙해지지 않는 크림의 맛에, 잘 아는 비린 맛이 섞여서 났다.

“…맛없어.”

“당연한, 소리, 마!!!”

솔직한 감상을 내뱉으니, 숨을 가다듬지도 못한 라이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가와 뺨을 붉게 물들인 라이죠가 노성을 내뱉는 걸 한 귀로 흘리며, 야고는 제 입술을 날름 핥았다. 라이죠에게 키스했을 때와 같은, 크림과 피의 맛이 혀에 닿았다. 역시 끈끈하고 맛도 없었지만, 아까와 달리 썩 나쁘지는 않았다.

“하아… 나 참, 입술이 더 엉망이 되었잖아. 다시 발라 줄 테니까, 이번에는 가만히 있어라.”

잔소리하는 것도 지친 건지, 길게 한숨을 내쉰 라이죠가 협탁에 놓았던 단지를 다시 집었다. 키스할 때 야고가 바른 크림이 달라붙은 건지, 라이죠의 입술은 아까보다 반들거린다. 그 매끄러운 연분홍 위에, 붉은 얼룩이 살짝 묻어난 게 야고의 눈에 들어왔다.

“…야, 라이죠.”

“……뺨을 맞고 싶은 게 아니라면 또 멋대로 키스할 생각은 마라.”

못마땅한 기색을 전혀 감추지 않는 눈으로 야고를 흘겨보며, 라이죠는 단지를 다시 열었다. 깨끗하게 닦았던 검지가 다시 안의 크림을 살며시 떠내는 걸, 야고는 느긋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방금 간식을 먹어 치우고도, 아직 부족하다는 것처럼 입맛을 다시는 고양이를 닮아 있었다.

“…어라? 야고 씨, 이 시각에 깨어 있다니 드문 일이네요. 물이라도 마시러 왔… 우와!!! 그 뺨 무슨 일이에요?!!”

“히사모리, 시끄러워.”

“예?! 아니, 저한테 화풀이하는 거 그만둬 주시겠어요?!!”

결론만 말하자면, 야고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라이죠는 한다면 하는 녀석이었다.

히사모리가 꺼내 준 냉동고의 얼음 덕분인지 히어로의 회복력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야고의 뺨의 붓기는 아침이 되기 전에 가라앉았다.

여담이지만, 그 입술은 여전히 튼 채였다.


입술이 갈라지면 겨울임을 실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은 겨울은 아니네요(당연함 10월임) 시구레는 입술 보습도 제대로 하겠지…하지만 야고상은 안하겠지…저는 어느쪽이냐면 야고상에 가까웠는데 요즘은 갈라지면 아프고 나이먹으니 회복도 느려져서(…) 말랐다 싶으면 되도록 바르고 자게 되었네요. 그래서 자기전에 립밤 바르던 도중 내려온 신의 계시가 이하생략…다만 이 계시를 완성하기까지는 조금 걸렸습니다 사실 내일이 있다면보다 이걸 먼저 쓰기 시작했음(ㅋㅋㅋㅋㅋ뭔

그리고 쓰면서 깨달았는데 나 키스신 묘사 이번에 처음 해봤어(ㅋㅋㅋ 당연함!!! 사귀는 CP를 안씀!!! 뭐 이딴 CP충이 다 있담?!! 다흐흑ㅠㅠㅠㅠㅠㅠ 로맨틱코미디는 잘 안 쓰지만 꽤 즐거운 장르라고 생각하고 좋아하는데… 제가 잘 안 쓰네요… 앞으로 힘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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