螢石
Fluorite
올해로 스물 둘이 되는 그 아이는 몸 이곳저곳에 잔상처가 많았다. 근육이 붙다 만 몸을 겨우 가리듯 걸친 옷은 적당히 추레했는데, 오래 다듬지 않은 듯 보이는 코트의 주머니에서 위험한 물건이 나오기 부지기수였다.
하루는 넓직한 주머니 안에서 폴딩 나이프가 튀어나왔다. 그 아이-이제부터 A군이라고 하자-가 무심한 얼굴로 날을 끄집어내자 잘 벼려진 칼날이 조명을 받아 번쩍 빛났다. 허름한 코트와는 대조되는 모양새였다.
"A, 이거 날이 좀 길지 않아?"
폴딩 나이프는 칼날이 6cm가 넘으면 국가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물론, 내가 알기로 이 주변에 그런 허울 뿐인 규칙을 지키는 녀석은 없었다.
A군은 쭉 찢어진 눈을 내 쪽으로 향하며 웃었다.
"이 정도는 그냥 맥가이버칼이죠."
주머니칼은 허가서를 받지 않아도 된다. 주머니칼이란 보통 칼의 손잡이에 여러 도구를 수납한 물건을 말한다. 눈앞의 나이프에는 도구랄 것이 칼날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주머니에 들어가는 칼이긴 하다. 그렇다면 우리 식으로는 주머니칼이 맞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추고 빙긋이 웃어주었다. A군은 청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에 서 있는 얼굴로 길다란 칼날을 접어넣었다.
그런 녀석들이 있다. 한창 머리가 클 시기에 하라는 공부는 않고 선배들을 따라 탈선해 유흥과 자극을 찾아 떠나는 녀석들. 우연히 발견한 오락에 빠져 그 너머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는 녀석들. 어찌 되었든 돈이 필요해 불법적인 일에 발을 담그고 마는 녀석들.
각각의 계기는 다르지만, 각각의 행위들로 하여금 추잡한 어른들의 비참한 단편을 엿보고 만다는 결과는 같다. 남은 것은 녀석들의 선택 뿐. 뒷골목의 참상을 눈에 담고 겁을 집어먹어서 도망치느냐. 아니면 외려 흥미를 얻어 깊게 탐구하느냐. 내가 보기에 그래도 썩 괜찮은 도덕심을 갖고 있는 보편적인 8할의 아이들은 전자를 택했다. 나머지 2할은, 윤리라고는 교과서 표지에서나 보았던 보편적이지 않은 녀석들은, 기꺼이 후자를 택해 진창으로 걸어들어왔다.
A군은 후자에 속했다. 그리고 세 번째 케이스였다. 생계가 걸린만큼 간절함이 있다. 지속력과 충성심이 있다는 소리다. 어쩌면 실날 같은 윤리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생계라는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윤리가.
"인재야."
틈만 나면 전국을 돌아다니던 보스가 말했다.
"어차피 이런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다른 깨끗한 일을 하자니 기반이 없지. 기반이 없으면 손에 잡히는 건 푼돈밖에 없어. 더러운 돈을 잔뜩 손에 담아본 녀석이, 껌값따위에 성이 차겠어?"
하지만 능력이 출중하다. 어떤 능력이? 더러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그런 인재가 시정잡배들한테 낚여서 허송세월하는 것보단 우리 밑에서 구르는 게 낫지."
그래서 나는 A군과 컨택했다.
기실 먼저 접촉한 건 보스였다. 젊었을 때부터 방랑 생활을 했던 보스는 발이 넓었고, 이 세계에 뛰어든 이후로는 인재 창출이며 지점의 확보를 위해 더더욱 바삐 돌아다녔다.
A군은 그가 찾은 인재 중 한 명이었다. 보스는 더벅머리에 안경을 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A군에게 손을 내민 모양이었다. A군의 정보를, 거처를, 약점을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다.
"동네 밥집에서 밥 좀 먹다 보면 전부 알게 되어 있어."
이런 대답을 진담으로 믿기엔 정보값이 좀 빈약하지 않은가.
"얘는 머리입니까, 몸입니까?"
"몸이야."
A군에게는 허드렛일 내지 싸움을 시키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비즈니스 성격이 강해졌다고 해도, 가끔은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있잖아. 싸움이라곤 하지만 꼭 격투로만 한정되는 건 아니지. 미행도, 도주도, 어쩌면 고문도, 또 어쩌면 시신 처리도...... 우리의 업계에선 필요해."
내가 보내준 돈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찾아온 A군은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바다 씨가 나한테 연락하라고 했지?"
온갖 곳에 얼굴이 팔린 보스의 가명이다. A군은 그의 이름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까딱였다.
"어쩌다가 만났어? 바다 씨랑은."
"약을 사고 싶다고 해서. 아저씨한테 약 타서 약속 장소로 갔더니, 그 아저씨가 나왔어요. 이거 내가 사 줄 테니까 밥이나 한 끼 먹자고."
아저씨라 함은 물품 조달책을 말하는 것이리라. A군은 조달까지는 능력이 되지 않았고, 단순 전달책으로 근근이 용돈벌이를 하는 듯했다.
"그랬더니. 너, 돈 필요하지 않냐고......"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봤어?"
"골목에서 패싸움하는 걸 봤대요."
"패싸움?"
"별 상대도 안 되는 새끼들이, 자꾸 시비를 거니까. 빡쳐서 밟아줬는데. 그걸 보고 있었대요."
새끼들이라고 하는 걸 보니 일 대 다 상황이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애다 싶어서 좀 쫓아다녀서. 내가 배달부인 것도 알아내서. 일부러 약을, 주문한 거라고."
보스의 행적은 하여간 종잡을 수가 없다.
A군은 싸움을 제법 했다. 길거리 난투로 다져진 맨손 격투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상대에 비해 우위를 점하지만, 불리한 상황이 되면 고민하지 않고 품에서 흉기를 꺼내들곤 했다.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걸 아는 녀석이다.
"칼 잡는 건 누구한테 배웠어?"
"유튜브요."
요즘 아이들다운 대답이었다.
조직을 운영하다 보면 이런저런 시기가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신체, 감성, 지성 팩터로 이루어진 바이오리듬이 최고조에 달할 때처럼.
A군의 가정사, 나의 일정, 그리고 보스의 명령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맞아떨어졌다.
호재인 일이었다.
보스의 명령은 조직에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어 보였다. 그에 비해 리스크는 다소 높은 감이 있었다. 나다니기 좋아하는 보스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자주 내리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쪽을 선호한다. 이전 동두천에서 있었던 카지노 사건. 그것도, 따지자면 리스크가 결코 낮지 않았다. 중요도는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건은 달랐다. 리스크도 높고, 중요도도 떨어진다. 그러니 부하에게 명령할 수밖에 없다.
"반지 같은 게 왜 필요하세요?"
전파 너머의 보스는 평소와 같은 느긋한 말씨로 대답했다.
"사교활동에 조금 필요하달까......"
"그런 거라면, 직접 구매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턱 낼 수 있는 여유자금이 몇 천씩이나 있진 않거든."
나는 여전히 보스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말을 않고 있으니 보스가 말을 이었다.
"입수하는 과정에 의미가 있어."
"입수요?"
"정우, 네 손가락에 한 번은 들어갈 거 아니야?"
"시착하는 척을 한다면, 분명 그렇겠죠."
"그런 거야."
보스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고, 그 뒤로 명령의 설명을 조금 덧붙이다가, A군의 동생이 입원한 병원에는 일찍이 이야기를 해 놓았다는 말을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네가 시간이 나서 다행이다."
라며, 전화를 끊기 직전 나를 향한 감사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보스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A군과 함께 일산으로 향했다. 평일 낮의 고속도로는 통행량이 많지 않다. 붉은 글씨로 지체를 알리는 전광판을 흘긴다. 단숨에 머리 위로 지나가는 거대한 LED.
"점심으로 뭐 먹을까?"
옆 자리의 A군은 턱을 괸 채 하염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이다. 출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입을 열지 않고 있다. 내 질문을 듣고 나서야 괴었던 팔을 풀고 정자세로 앉는다.
"아무 거나 괜찮아요."
"그래? 그럼 짜장면이나 먹을까."
"전 볶음밥이요."
일산 IC를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선다. 이제 차만 막히지 않으면 15분 안으로 도착할 수 있다. 교통 상황을 보아하니 막히는 길목은 없는 듯했다.
"순대국 먹고 싶어요."
국밥집의 간판이 오른쪽 시야에 스쳐 지나간다.
허기를 간단히 채우기로 했다. 평일 오후인데도 식당에는 의외로 사람이 제법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손님 중에선 우리가 가장 젊어보이긴 했지만. 모든 테이블에서 초록빛 술병이 번쩍였다. 다들 낮술을 거하게도 마시고 있었다. 어쩌면 이 가게의 주된 타겟은 그쪽일는지도 모르겠다.
"술 먹을래?"
"네."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잔은 하나면 충분했다. 앞으로의 전개가 어찌 되든 나는 운전을 해야 하니까.
A군은 말간 빛깔의 순대국을 잘도 퍼먹었다. 내가 채워준 술잔을 금세 비우고 자작을 하려 들기에 손을 들어 만류했다. 소주 한 병은 일곱 잔 반. A군이 마신 건 대략 다섯 잔.
"심신미약이네."
볼에 잘 익은 내장 조각을 욱여넣던 A군은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전시장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정직하게 주차장 게이트를 통과해 들어왔다. 순순히 차단기를 올리던 기계 녀석은 분명 차 번호를 인식했을 테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다. 내 명의의 차도 아니고, 쉽사리 추격당할 처지도 아니니까.
해가 슬슬 떨어지고 있다.
겨울의 해란 일찍도 지는구나.
A군과 함께 전시장 입구로 향했다. 행사 관람객들이 드문드문 로비에 서 있다. 이미 피크 타임은 지난 거다.
"사람이 없네요."
작은 숄더백을 맨 A군이 속삭였다.
"2층으로 올라가서 한 번 살펴보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향한다. 천장까지 뻥 뚫린 형태의 건물이다. 2층의 난간에 기대어 1층의 상황을 살필 수 있다는 소리다.
비수기라 그런지 2층에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영 없다. A군과 나는 근처 난간으로 향해 1층의 로비를 내려다보았다. 전시홀의 출입구가 보인다. 1홀에서 한국천문학회 학술대회. 2홀에서 일산 주얼리 페어. 3홀에서 한국 낚시박람회. 나머지 홀은 공란.
"좀 일찍 올 걸 그랬나. 사람이 이렇게 없을 줄이야."
"아무나 골라서 찌르면 되죠?"
"적당히 튼튼해 보이는 사람 골라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A군은 힘의 강약조절에 그리 능하지는 못하다. 어쩌면 오늘, 이곳에서,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다.
1층을 다시 한 번 훑어본다. 각 행사의 관람객들이 홀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한다. 분위기만 보자면 파장에 가깝다. 통유리 벽 너머로 내리쬐는 노을빛이 그런 분위기를 한 층 더한다.
"다른 칼 가져왔지?"
"네."
"왜, 잘 쓰던 폴딩 나이프 두고."
"그건 사람 찌르는 맛은 별로 없어요. 날이 얇아서."
개미처럼 움직이는 인간들.
"걱정하지 말고 찔러. 너도 금방 꺼내줄 거고. 네 동생도 빨리 수술 받을 수 있게 할 테니까."
"알고 있어요."
소득 없이 하행 에스컬레이터로 향한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손에 든 팜플렛과 기념품에 온 정신이 팔려서,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 멀끔한 청년의 숄더백에 식칼이 들어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당신네들은 일상을 영위하고 있으니까.
일반인들 누구나, 자신의 일상에 비일상이 끼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에는 일상이 이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그곳에 비일상이 끼어들 여지는 없으니까.
그런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는 건 어째서일까?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는 당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런 근거 없는 당위를 갖고 있기에 일반인인 것일까?
1층 로비에 발을 딛는다.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홀의 출입구를 오가는 관람객들.
1홀의 출구에 시선이 간 건 단순한 우연이었다.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다.
중년 남자 두 명.
한 사람은 길게 늘어뜨린 장발. 다른 한 사람은 목을 덮는 단발.
중년의 남자들이 저런 헤어스타일을 하면, 당연히 눈에 띄게 된다.
잠깐의 관찰.
떠오르는 이름.
멈춰서는 두 사람.
대화를 하고 있다.
"우와, 양희태랑 신성일이네......"
무심코 흘러나온 목소리는, 분명 나의 것.
바로 옆의 A군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눈빛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답해 줄 수 밖에 없지.
"너는 어려서 모르려나? 예전에, 유명했던 천재들이야."
"천재?"
1홀에서 열린 행사의 이름을 생각해낸다. 대한천문학회 학술대회. 두 사람의 전공을 기억해낸다. 천문학.
"CERN에 한국인 최초로 근무하게 되어서 유명세를 떨쳤던......"
"세른? 그게 뭔데요?"
A군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사람들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아, 하긴 시기 상...... 벌써 쉰인가? 그렇게 되나......"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을 인지한다.
천재는 싫다.
모든 걸 안다는 듯이 내려다 보는 그 태도가 싫어서 견딜 수가 없다.
실제로 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모든 것을 파악해서 시뮬레이션으로 구현했다고 하더라도.
설령 그것이 그의 뇌 안에서만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나의 분신이 남의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쌉싸름한 공기.
콧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산소는 알싸한 맛.
"저 사람을 찔러."
"네?"
A군의 당황한 목소리.
"저기, 단발 남자...... 머리 긴 남자 옆에 있는 사람."
"아, 저 사람이요."
빠르게 침착해진다. A군의 많은 장점 중 하나다.
"머리 긴 남자는 너무 홀쭉하지? 잘못 찌르면 정말 죽게 생겼어."
"그렇네요."
"그러니까...... 옆의 남자를 찔러."
"알겠어요."
A군은 잠시 말이 없다가, 나를 향해 물었다.
"죽이고 싶으세요?"
그런 건 아니다.
천재라고 전부 죽이고 싶은 건 아니다.
내가 혐오하는 상대는 정해져 있으니까.
"아니. 나는 그냥......"
이어질 말을 일순 고민한다.
"천재들이 싫어."
좀 뻐기는 것 같잖아. 그런 얼빠진 말을 덧붙이다가, 나는 주얼리 페어의 간판이 번쩍이는 2홀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A군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사전 입장권을 구매한 덕분에 쉽게 입장할 수 있었다. 가짜 이름과 가짜 번호가 뒤섞인 신상 명세다. 나는 이 나라에서 이미 죽은 사람 취급이니 가짜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복역할 때에도 가짜 이름을 썼다. 진짜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수많은 귀금속 부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목표하는 부스는 하나뿐이다. 다른 악세서리들을 구경하는 척하며 터벅터벅 걷는다. 관람객은 많지 않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니까, 열의를 가지고 방문한 관람객들은 이미 퇴장했으리라.
목적지가 보였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의 앞으로 향한다.
귀금속 상인은 나를 보고 둘러보고 가세요, 하며 웃었다.
부스에 늘어선 반지를 훑는다. 보스가 가져오라고 지시한 반지는 보이지 않는다. 부스 안에 놓인 거대한 박스에 숨겨둔 게 아닐까.
"회장님 지시로 왔습니다."
상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 반지, 어디에 있습니까?"
"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회장님이 당신에게 맡긴 사파이어 반지. 이런 곳에 계속 두면 위험하다고 하십니다. 제게 넘기십시오."
보스에게 들은 정보를 적당히 가공해 입 밖으로 내뱉는다. 뻔뻔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배짱 장사란 얼굴 근육의 미세한 컨트롤이 생명인 법이다.
상인은 새파란 얼굴로 허둥지둥 박스 안을 뒤지기 시작한다. 이내 작은 박스를 꺼내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조그마한 반지 케이스를 내놓았다. 나는 말없이 짙푸른 케이스를 받아든다.
"이게 확실합니까?"
상인은 말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스를 연다.
순간 눈이 부셨다.
쨍한 빛을 반사하는 보석.
서늘한 광택의 여덟 갈래 무늬가 새겨진.
진청색의 사파이어.
그것을 가늘게 두른 백금색의 장식.
사파이어를 버겁게 이고 있는 고리.
이거구나.
보스가 찾고 있는 보석이라는 게.
찬란하다.
아름답다.
무심코 꺼내들고야 만다.
제 손가락에 끼운다.
상인의 목소리.
근처 관람객들의 목소리.
음량이 좀 크다.
시끄럽게 재잘거리긴......
"확인했습니다. 수거하겠습니다."
출구 쪽을 흘긴다.
여러 사람이 출구로 달려나가고 있다.
그 근처에 서 있는 남자.
호흡을 멈춘다.
아아......
그 멍청한 탐정이 이곳에도 있나.
시선은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출구로 향한다.
겉옷 주머니에 반지 케이스를 넣고.
사람들의 비명이 어렴풋하게 들리는 와중에.
A군이 할 일을 잘 했군, 하고 생각하던 와중에.
출구를 넘으니 쓰러진 단발의 남자와, 그 위에 올라탄 A군과, 그 옆에 망연히 서 있는 장발의 남자와.
또 다른 남자가 순식간에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나를 인지하지 못했다.
김민석?
잠시 걸음을 멈춰 얼굴을 확인한다.
옆 얼굴뿐이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다.
김민석이, 이곳에 있다.
걸음을 재촉한다.
조금 외진 출구로 나선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경비원 역시 보이지 않는다.
외투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보스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연결음. 일정한 간격의, 익숙한, 전자음.
"여보세요."
"김민석이 있습니다."
"응?"
"보스가 찾던, 그 사람이."
"백도화 씨가 있어?"
"오동현도 있습니다. 지시를 받고, 주얼리 페어 측에 잠입한 것 같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아직은 거리가 좀 있다. 코너를 돌아 더욱 외진 곳으로 유인한다.
"반지가 그쪽에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았나 보네."
"예."
"반지를 찾고 싶어서 잠입한 거겠지?"
"그 외에는 의도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두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발걸음. 이건, 김민석이 아니다. 우둔한 녀석 쪽이다.
"그럼 돌려 줘."
"네?"
"백도화 씨한테 반지를 건네. 직접 건네든, 간접적으로 건네든."
"하, 하지만, 반지를 가져오라고 한 건 보스......"
"거기에 정말로 있다는 걸 안 이상 상관 없어."
"A군은 이미 사람을 찔렀습니다."
"응, 그것도 상관 없어."
등 뒤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잠시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 신속하게 뒤를 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도 않고 빈 손으로 잽을 날렸다.
우둔한 탐정이 아스팔트 위로 넘어졌다.
"백도화 씨한테 줘."
"보스,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인재야."
"네?"
"인재니까, 이 정도 빚은 지우는 편이 좋아."
"보스의 계획을...... 박살내면서까지요?"
"박살이라니. 아니야. 조금 더 돌아갈 뿐이야."
우둔한 탐정을 세 번 정도 밟아주니 반항이 끊겼다.
"......알겠습니다."
"응, 고마워."
통신이 끝났다.
방금 돈 코너 쪽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손가락에서 광채를 여실히 빛내던 사파이어를 빼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나의 물음에 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새파랗게 번쩍이는 사파이어가 망연한 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부드러운 벨벳 천 안으로 그 모습을 감추기나 했다.
나는 의식을 잃은 탐정 옆에 반지 케이스를 놓아두고 주차장으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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