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 main

電氣石

Rubellite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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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트 된 사진 속에서 새파란 보석이 농염하게도 빛을 뿜어내고 있다.

잘 세공된 진청색 사파이어. 날카로운 커팅의 결을 따라 둘러진 백금색의 장식. 보석을 머리에 짊어진 고리는 그 무게가 조금 버거워 보인다. 이런 반지를 손가락에 매달고 다니는 인간은 대체 어느 정도의 부를 쌓았다는 말이냐. 남몰래 불손한 생각을 하며, 김민석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 오늘의 의뢰인을 기다렸다.

그나저나 참 푹신한 소파다.

현상심부름센타에 놓여있는, 구색 맞추기용 소파와는 차원이 다른 안락함이다.

한낱 흥신소와는 차원이 다른 수입을 벌어들일 테니 당연한 결과이긴 한가.

"형, 깔창 신었어요?"

바로 옆 자리에 느긋하게 앉아있던 오동현이 묻는다. 조사원으로서의 능력은 바닥이지만,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빠른 면이 있다.

"왜?"

"아니, 원래 안 신지 않나 싶어서."

"사람 만나잖아."

"에이, 내가 형이 사람 앞에서 깔창 신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난 동종업계 사람은 사람으로 안 친다."

동현은 몇 번을 킥킥 웃다가, 문 밖에서 나는 구둣발 소리에 곧장 입을 다물었다.

선릉 뒷골목에서 한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중견 기업의 임원으로, 시신 발견 전 날 밤 근처의 식당에서 타 임원들과 회식을 가진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와 자리를 함께 했던 이들은 그가 가게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그룹에 속해있었다고 증언했다.

그와 같이 가게를 나선 두 사람은 그가 주차장으로 향하는 걸 보고 헤어졌다고 진술했다. 대리 기사의 연락을 받고 향한 것 같았다고 했다. 주차장은 시신 발견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리 기사는 한참을 기다려도 손님이 오지 않아 귀가하였다고 한다.

시신은 하늘을 보고 누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신 발견 당시 기록적인 한파가 있었기에 경찰은 사인을 저체온증으로 추정하였으나, 후두부에서 외상이 발견되어 정식 검시 절차를 밟았다. 최종 사인은 두부 손상으로 발표되었다.

남자가 죽기 전 취해있었다는 점. 그리고 후두부의 상처에서 근처 외벽의 콘크리트 가루가 검출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단순한 음주 중 실족사로 처리되려던 참에, 수사대원들은 뜻밖의 증거를 발견해냈다.

발견 현장에서 불과 5m 떨어진 곳에 보석의 파편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이, 이 반지의 보석과 유사한 사파이어였습니다."

여자는 프린트 된 사진을 민석의 쪽으로 밀어낸다. 민석은 사진을 보는 둥 마는 둥 흘끔였다. 조사원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는 한쪽 눈썹을 쓱 올리며 말을 잇는다.

"죽은 남성과 함께 가게를 나선 사람은 둘. 회장과 그의 비서. 그 중 회장이 이 반지를 즐겨 꼈다고 합니다."

"그러면. 죽은 남자가 쓰러졌을 때, 그 회장이라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얘기?"

그녀는 불손한 말투의 조사원을 대놓고 노려보기 시작한다. 민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맞받는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건 옆 자리의 동현 뿐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럼 우리가 할 일이 없잖아요. 회장 반지 압수해서, 보석 조각이랑 성분 비교해 보면 될 거 아냐."

"그게 불가하니까, 당신을 고용하기로 한 겁니다."

진유선은 발음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치켜 뜬 눈썹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기가 매우 불편한 모양이라고, 동현은 조심스레 생각한다. 물론 그녀는 항상 기분이 좋지 않다. 적어도 동현의 앞에서는 그러하다.

구태여 조사원을 써야만 하는 사건이란, 으레 뒷맛이 좋지 않기 마련이니까.

동현은 이번 사건의 개요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유선의 직속 조사원이다. 정식적인 고용 절차는 밟지 않았지만, 대강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변호에 필요한 자료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러모은다. 몸이 위험할 때도 있고, 정신이 피로할 때도 있다. 그러니까, 제이 로펌의 대표 변호사인 유선의 그늘 아래서 남몰래 손을 더럽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번 사건은 뜻하지 않게 진흙탕 싸움이 되어가고 있다.

의문의 죽음을 맞은 중견 기업의 임원. 정황으로 보아 범인은 해당 기업의 회장. 경찰은 당연하게도 보석 파편과의 대조를 위해 반지의 제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회장은 제출에 응하지 않았다. 얼마 전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이유를 댄 것이다. 경찰 내부에서는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압수수색을 하느니 마느니 편을 갈라 아웅다웅하다가, 결국 영장을 들고 그의 자택에까지 발을 들였다.

문제는, 정말로 없었다는 것이다. 반지가.

반지야 크기가 작으니 어디에든 숨길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사파이어 반지는 주문 제작 물품으로, 중앙에 박혀있는 보석만 해도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백금으로 만들어진 고리 부분 역시 가치가 상당하기는 매한가지지만.

아무리 흠집이 났다 하더라도 사파이어는 사파이어. 게다가 주문 제작 물품. 그런 소중한 물건을 아무 곳에나 대충 던져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적어도, 반지함 정도의 사이즈는 점유해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을 것인데. 형사들의 매서운 수색에도 불구하고 반지는 커녕 반지함 하나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이 로펌은 임원 측의 법률 자문을 맡게 된다.

회장이 임원을 죽였다. 이것만으로도 큰 파장이 일 게 뻔한데,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까지 이른 속사정까지 퍼진다면 기업의 이미지에는 타격을 넘어 재기불능의 데미지가 가해지리라.

경쟁 기업들도 이러한 전개를 모를 리가 없었다. 어제오늘 고매한 인간들의 압박어린 연락이 왔다. 가뜩이나 좋지 않던 유선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동현은 바로 옆에서 보고야 말았다.

"집에 없다면 다른 사람한테 맡긴 거겠지. 어쩌면 보관함이라든가, 개인 창고. 뭐...... 그쪽은 도난 위험이 있어서 배제했을 가능성도 있군."

유선의 설명을 가만히 듣던 민석이 입을 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 의뢰의 내용을 짐작한 것 같다. 유선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앞의 상대를 한 번 더 흘긴다.

"경찰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건 이후 회장의 동선을, 접촉한 인물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다더군요."

"그럼 경찰한테 맡기면 되지 않나? 의외로 우수해요. 우리나라 짭새들."

비속어에 유선의 미간이 한 층 더 찌푸려진다. 동현은 한 층 더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까,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느니 마느니 하면서 파벌이 나누어졌다고 했지 않습니까?"

"아, 권력으로 매수된 경찰들이 많다 이거구만."

형사들의 노력으로 반지를 찾아냈다고 해도, 경찰 선에서 증거의 인멸이 일어날 수 있다. 피해자 측의 법률 자문인인 유선은 그 점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다리를 꼬고 있던 그녀는 이제 두 팔까지 얽고야 만다. 꼰 다리에 팔짱. 전형적이고 고압적인 제스처. 민석은 가늘게 뜬 눈을 풀지 않는다.

"이번 건은 예상 외로 꽤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집단의 이해관계입니다만. 어쨌거나 그 복잡한 파이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자문인으로 선택된 게 저라면, 저는 의뢰인의 이익을 최선으로 쫓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어렵게 하네. 결국 패소했을 때의 리스크가 크다는 거 아니야."

유선은 당장이라도 서류 뭉치를 눈앞의 오만방자한 남자에게 던지고 싶어하는 얼굴이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연신 눈동자를 굴리던 동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진정시킨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결국 피고인을 몰아붙이는 건 검사가 하는 일 아닌가. 패소한다고 해도 고작 자문인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저희 로펌의 부가세 순위를 알고 계십니까?"

"제이 로펌이면, 열 손가락 안에는 들죠? 압니다. 그 정도는."

"그런 로펌의 대표 변호사를 자문단으로 꾸린다는 건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지고 싶지 않다는 거겠죠. 하지만 그건 피고인 측도 비슷하지 않나? 임원 나부랭이도 아니고 회장씩이나 되면 말이야. 열 손가락이 아니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변호인을 고용했겠지."

"오동현."

"어헉, 응?"

동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이거, 진짜 베테랑 맞아?"

"어, 어어?"

"하여간, 뭘 시키면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

험담을 면전에서 듣고도 이유 모를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있는 민석이 입을 연다.

"어쩌다 이런 못미더운 놈을 비서로 삼고 계세요? 변호사님은."

당연하게도 유선은 살기 어린 시선을 그에게로 돌리기나 하다가. 작은 한숨.

"이런 놈을 믿고 선금을 준 내가 멍청했지......"

"선금만 주셨습니까? 여태껏 사건의 개요도 얘기해주셨죠."

"당신, 조사원으로 얼마나 일했죠?"

"마흔이니까, 이십 년 좀 더 했겠네."

"변장이라든가, 잠입, 몸싸움 등등에 자신 있습니까?"

"지금 이 얼굴도 변장이야."

유선은 잠시간 민석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하도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다녀서. 맨얼굴로 다니면 덤프트럭이 달려들걸."

이건 제법 허풍 섞인 말이다. 민석은 아무렇지 않게 너스레를 떤다. 이런 류의 허세에 그는 상당히 익숙했다.

변호사는 신경질적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어 액운이라도 달라붙었다는 듯이.

"이건 아직 극비입니다만. 사건 이후 회장이 종로의 보석상을 만났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옷깃의 변호사 배지가 노랗게 번쩍인다. 천칭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 있지 않다.

"평소 교류가 있던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에게 잠시 반지를 맡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문제는 그가 당장 내일부터 개최되는 주얼리 페어에 참가한다는 겁니다."

"주얼리 페어?"

"세계 각국의 액세서리 브랜드들이 모여 출품작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행사입니다. 국내에서 열리니 국내 브랜드의 출품도 많은 편이고요."

민석은 무심코 쇼윈도 안에서 번쩍이는 악세서리들을 떠올린다. 그는 그런 종류의 치장에는 흥미가 없다. 예산이 그만큼 충분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나무는 숲에 숨긴다, 인가?"

"회장이 그를 만났다는 사실은 분명 근시일 내에 경찰이 파악할 겁니다. 빠르면 하루, 길어도 삼 일은 넘기지 않겠죠. 압수 영장은 용의자인 회장에게까지 내려진 상태니, 관련자인 보석상에게 내려지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반지를 집에 놔두는 건 압수수색의 위험이 있어서 곤란하다. 결국 주얼리 페어에 가져가서. 전시품들 사이에 몰래 끼워두든가 하겠네요."

"아니요. 아예 판매품으로 빼 놓을 수도 있습니다. 판매품이라면 쇼윈도가 아니라 골판지 상자에 넣어두어도 되니까요."

잠깐의 침묵. 반지의 수색 방법을 고심하는 조사원과, 기분이 아직도 좋지 않아 보이는 변호사와, 눈치를 보다 못해 안색이 파랗게 물든 또다른 조사원.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민석이었다.

"그 페어라는 거, 어디서 열리지?"

유선은 못마땅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산입니다."

"사파이어인가......"

민석이 새하얀 와이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중얼댔다. 새카만 정장 바지는 활동에 불편만 줄 것 같다. 재킷까지 걸치고 나니 거동의 제약감이 상당하다. 가슴께에 스태프라고 쓰인 명찰이 달려있다. 이마 뒤로 싹 밀어넘긴 머리칼은 하나로 묶어두었다. 이 정도면 무난하게 깔끔한 모습이다.

"사파이어가 왜요?"

와이셔츠에 팔을 찔러넣던 반라의 동현이 반응했다. 

스태프실에는 아무도 없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수한 경호요원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지만, 일부러 늑장을 부린 덕에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남게 되었다.

"아니...... 그거, 어디서 본 거 같아서."

"사파이어를요? 형이?"

"색이 엄청 진하고, 팔각형이고."

"그런 사파이어가 한두개예요?"

"아냐. 어딘가 눈에 익어. 이래 보여도 기억력 하나는 좋거든, 내가."

"형이 보석 볼 일이 얼마나 있다고. 잘 생각해 봐요~"

어째 빈정이 상하지만 일단은 맞는 말이라 민석은 고개를 갸웃대기나 했다.

주얼리 페어는 일산의 종합 전시장에서 개최되었다. 거대한 제1전시장의 중앙 홀을 점유한다. 근처의 홀에서는 각기 다른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민석은 학술대회라는 단어에서 쓸만한 정보값을 얻어내지 못했다. 비리비리하고 새하얀 학자들의 대회겠거니 하며 막연히 생각했다.

하여간 상당한 규모의 행사다. 150개사에서 400부스를 낸다고 하니, 각 부스에서 액세사리를 다섯 종류만 판매한다고 해도 총 2천 종이다. 수천 종의 값비싼 물품들이 한곳에 모이는 행사이니만큼 그 등록 절차도 제법 까다롭다.

판매하고 전시할 제품의 안내 서류를 사전에 행사 본부에 부친다. 외관이 무엇보다 중요한 액세서리이니, 사진을 필수로 첨부해야 한다. 행사 당일, 참여자들이 부스에서 디스플레이를 마치면 이후 검수 단계가 기다리고 있다. 사전에 발송된 안내 서류에 기재된 물품들이 맞는지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다. 스태프들이 사진과 실물을 육안으로 대조한다. 몇백 부스의 물품 몇천 종을 검수해야 하니, 구역을 나누어 한다 해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스태프들 사이에, 조사원 두 사람은 끼어들었다. 멋대로 잠입한 것이 아니다. 정직하게 경호 아르바이트 공고에 지원한 청년들에게 돈을 쥐여주고 그 자리를 뺏었을 뿐이다.

경호라고는 하지만 장내를 돌아다니며 수상한 인간이 없는지 정찰하는 게 전부다. 이런 일이라면 일찍이 도가 튼 두 사람이다.

"야, 이거 버튼 누르면 우리 말소리 다 들린다. 조심해라."

귓바퀴에 매달린 인이어를 가리킨다.

"아, 그 정도는 알아요."

"넌 그냥 될 수 있으면 버튼에 손을 올리지 마라."

"에이~"

동현은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웅성대는 장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행사 시작 전 디스플레이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한가득하다. 솔직히 몇백 부스니 몇천 종이니 하는 설명만 들었을 땐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현장을 직접 마주하니 정말이지 끔찍하게 넓다. 최적의 동선이랄 게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민석은 그런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야 만다.

"변호사가 너 혼자 보내지 않은 이유가 있었네."

"진짜요. 여길 저 혼자 어떻게 돌아요."

"그래서, 그 여자가 너더러 믿음직한 조사원 하나 없냐고 물어보디?"

"음. 대충 비슷한 말을 했죠."

"믿음직하지 못한 놈한테 믿음직한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다니. 그 사람도 참 감이 없다."

인이어에서 안내 음성이 흘러나온다. 십여 분 후 검수 시작이라는 목소리. 컨트롤 타워는 과연 어디에 있을지 생각해 본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세미나 스테이지 뒤편이다.

"그래도 형은 믿음직하잖아요~"

맹추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하기에 민석은 코웃음이나 터뜨려주었다.

회장과 접촉했다는 보석상의 부스는 전시장 구석에 있었다. 그가 본부로 부친 서류에는 사파이어 반지가 기재되어 있었지만, 조사원들이 노리는 고가의 사파이어 반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얇은 서류철을 들고 부스 앞에 섰다. 테이블 위에 늘어선 액세서리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눈이 조금 부실 정도다. 아무래도 목걸이와 반지를 주력으로 판매하는 듯하다. 민석은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며 검수하는 체를 하다가, 돌연 물었다.

"부스 안쪽의 박스는 판매분인가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골판지 박스가 입을 헤 벌리고 있다. 더 작은 골판지 박스들이 빼곡하게 들어있는 모습을 확인한다.

"아, 네. 판매분도 보여드려야 하나요?"

"한 종류 당 판매분이......"

"세 개 씩 있습니다."

판매분까지 확인하라는 지시는 안타깝게도 없었으므로, 민석은 일단 물러났다. 아직까지 디스플레이에 문제의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박스 안에 짱박아두었던가 할 테다.

이대로 반지를 꺼내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미리 두 번째 작전을 준비해뒀으니까.

민석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음 부스의 검수를 시작했다. 젠틀한 광채가 도는 손목시계를 보고, 이건 반지나 목걸이보다는 인생에 훨씬 유용하겠다는 감상을 가졌다.

"......생각났다."

"뭐가요?"

"사파이어."

"사파이어?"

재킷 안주머니에서 두 번 접힌 사진을 꺼내든다. 바로 어제 유선이 내밀었던 반지의 사진이다. 민석은 슬쩍 주위를 살핀다. 부스 운영자뿐만 아니라, 관람객들까지 입장해 이젠 인산인해다. 벽가에 붙은 정장 차림의 스태프들에게 시선을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거, 장물이야."

동현은 대답이 없다.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눈으로 베테랑을 빤히 바라본다. 신장 차이가 어림잡아 반 뼘은 나는 둘이지만, 오늘은 민석이 깔창을 신은 덕에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 기억하고 있어. 내가 보석에는 완전히 까막눈이긴 한데, 이건 처음 보자마자 진짜 예쁘다 싶었거든."

"아니, 착각한 거 아니에요? 이런 사파이어는 세상에 수천 개도 있겠다."

"나 기억력 좋다니까?"

"형이 기억하는 사파이어랑 어디가 닮았는데요?"

"중앙의 이 여덟 갈래 무늬."

팔각형으로 커팅된 진청색 사파이어. 각각의 변을 향해 꼬리를 뻗은 희뿌연 별 모양의 무늬. 언뜻 보면 보석에 금이 간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명확하게도 방사형의 광채다.

"이런 무늬가 있는 사파이어는 흔치 않다고 들었다. 무늬가 있다고 한들, 꼬리 여섯 개짜리가 원래 디폴트란 말이야. 그런데 여덟 갈래는 정말 희귀하다고."

동현은 또다시 대답이 없다. 설마 이렇게까지 상세한 대답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군중. 스태프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군중. 그야말로 얼굴 없는 사람.

민석은 사진을 도로 접어 안주머니에 쑤셔넣는다.

"이거 말이지...... 예전에, 한 대부호가 갖고 있던 보석이야."

조금 구겨진 재킷의 매무새를 다듬는다. 비뚤어진 스태프 명찰의 각도를 조정한다.

"그 사람이 죽으면서 재산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는데, 그 와중에 보석 여러 개를 도난당했다는 소문을 들었지. 그런데 설마 그걸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형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민석은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린다. 이걸 털어놓아도 괜찮을지 고민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부스 하나를 돌아보는데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꺼낸 말이라는 게.

"내가 이 일을 좀 오래 했어야 말이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오후 네 시를 훌쩍 넘었다.

오늘의 행사 진행 시간은 오후 여섯 시까지. 일단은 그렇게 정해져 있지만, 손님이 많지 않은 부스는 벌써부터 테이블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얼리 페어는 3일 간 열리니 물건을 판매할 수 있는 시간은 이틀이나 남았다.

보석상은 끝끝내 반지를 꺼내지 않았다. 그의 부스에 방문객이 많지 않던 탓도 없잖아 있다. 손님이 많지 않다는 건 물건이 많이 팔리지 않는다는 의미고, 물건이 많이 팔리지 않는다는 건 재고를 순환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곤란하네요. 이러다 행사 끝날 때까지 수확이 없는 거 아닌가 몰라."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짓누르는 오동현. 둥그런 뿔테 안경이 손에 밀려 이마까지 밀려올라갔다.

"결판은 내일 본다."

"내일?"

"내일 오후까지 별 움직임이 없으면 두 번째 작전으로 넘어가자고."

"행사 마지막 날은 내일 모레인데?"

"그 때까지 경찰이 모르고 있을 리 없어."

솔직히, 경찰이 아느냐 모르느냐는 민석에게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다만 그의 클라이언트가 발빠른 조사를 원했으므로, 베테랑 조사원은 그 명령에 충실히 따를 뿐이다.

아침부터 줄창 전시장 안에 서 있었다. 점심도 건물 내의 편의점에서 공수한 삼각김밥으로 대충 때웠다. 몇 시간 동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보니 피로한 건 사실이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온다. 물건 내놓는 거 없나 잘 보고 있어."

동현이 못미더운 얼굴로 끄덕이는 걸 보고 민석은 장내를 나섰다. 출구를 지키고 서 있던 안전요원이 스태프 명찰을 보고 가볍게 목례한다. 민석은 화장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최소한의 반응을 해 두었다.

소변기 앞에 두 사람이 서 있다. 자연스럽게 청소도구 칸을 연다. 빽빽한 대걸레의 행렬 안에 멀쩡히 놓여있는 스포츠백을 확인한다. 좌변기 칸으로 헷갈린 척하며 발을 옮긴다. 문을 닫는다. 바지도 벗지 않고 변기에 걸터앉는다. 휴대전화를 확인. 별다른 연락은 없다. 업무 중인 김민석에게도, 휴방 중인 백도화에게도.

문 너머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 일 분 정도 눈을 감고 휴식. 과거의 일을 회상. 앞으로의 계획을 검토. 소변기 앞의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민석은 문의 걸쇠를 풀었다. 큰일을 마치고 나온 듯이 손을 씻으며 화장실을 뒤로 했다.

주얼리 페어가 열리고 있는 홀과 남자 화장실은 걸어서 삼십 초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전시장의 투명한 외벽으로 어슴푸레한 주황빛 노을이 비쳐들고 있다.

확실히, 네 시가 넘으니 관람객의 수가 줄어든 게 보인다.

행사에 대한 기대가 흘러넘쳐 왁자지껄했던 로비는 어디로 가고, 피로에 찌들어 흐느적대는 스태프들과 군데군데의 기둥에 기대어 감상을 나누는 이들 뿐이 보이지 않는다.

옆 홀의 학과대회니 뭐니 하는 건 끝났을까.

마음만 먹으면 시선을 돌릴 수야 있지만, 그 정도의 관심은 가지고 있지 않다.

다소 큰 데시벨의 발소리.

누군가 달려온다.

무심코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고 만다.

본능적인 반응.

시야에 들어오는 건, 길쭉한 실루엣의 장발 남성, 그보다 조그만 실루엣의 단발 남성, 같이 걷던 두 사람의 앞을 막아 선, 흥분한 기색의 젊은 애.

머리를 저렇게까지 기르려면 대체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하는 거지?

순수한 감탄.

무언가 번쩍였다.

노을을 반사한다.

단발 남자의 몸이 기울어진다.

엉덩방아를 찧는다.

마주 보고 있던 청년이 그 위에 올라탄다.

기이함을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인다.

흩날리는 혈액.

손끝을 움찔거리는 남자.

뽑아든 칼날을 다시금 남자에게 향하는 어린애.

눈이 마주쳤다.

침착한 기색.

손에 든 것은, 아마도 식칼.

회칼만치 길다랗지 않다.

다행이다. 찔린다면 차라리 식칼이 낫다.

컨트롤 타워에 전달해야 하는 사항인가?

홀 안도 아니고 로비에서 일어난 소란인데. 어떡하는 게 좋을까.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다리를 휘둘렀다.

발등에 녀석의 콧날이 닿는다.

볼링공을 차는 듯한 느낌.

제대로 들어갔다.

구경꾼들의 비명.

균형을 잃고 뒤로 나자빠지는 녀석.

끝까지 칼을 놓지 않는다.

집념?

원한범죄라도 되나?

두 발이 대리석 바닥에 닿는다.

근처를 맴돌던 직원들이 이쪽으로 달려온다.

느려, 느려......

쓰러진 남자를 흘긴다.

옆구리를 찔렸다.

비틀대며 상체를 세우던 녀석의 가슴께를 걷어찬다.

칼을 쥔 손목을 짓밟는다.

새빨갛게 물든 길이를 어림한다.

대략 7cm?

미친 새끼. 정말 죽일 생각으로 찔렀네.

벌러덩 넘어진 녀석에게 직원 셋이 달라붙는 걸 확인한다.

쓰러진 남자는 벌써부터 안색이 좋지 않다.

같이 있던 키 큰 남자가 멍하니 서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지혈을 대신한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바로 옆에서 사람이 찔렸는데. 답답해서, 진짜.

상처 부위로 느껴지는 심장 고동.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선혈.

영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미친 새끼. 야무지게도 찔렀네.

괜찮으세요?

대답은 없다.

새파란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다.

오십 정도 먹었을까.

그렇다면, 이 정도 상처는 더더욱 치명상이다.

구급차!

불렀다는 대답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바로 옆의 남자는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다.

답답해서, 울컥 짜증이 나서, 한 마디 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F-4 구역 도난 발생했습니다."

"......제품을 보던 남자가 시착 후 그대로 홀을 나갔다고 합니다."

"......반지입니다."

"......아니요, 어디로 나갔는지 보지 못했다고."

"......로비에서 일어난 소동에 다들 소란스러워져서."

"......판매분과 대조하겠습니다."

"......예, 이 반지의 판매분은 세 개라고 적혀있는데. 예, 예. 여기 세 개 다 있는데요?"

"......다른 물품을 도난?"

"......그러니까, 선생님의 물건을 도난당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까는 사파이어 반지를 도난당했다고."

"......예, 예."

"......예? 사전에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물품이요?"

"......그것은 저희 측에서 어떻게 대응할 수가."

"......개인 물품의 도난이라면 그쪽의 매뉴얼로 대응하겠습니다."

어느 순간 남자의 복부에서 손을 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간, 직원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손목을 잡아 끌어 지혈을 대신 부탁한 건 확실했다.

급하게 홀로 돌아왔다.

동현은 자리에 없었다.

진동하는 휴대전화.

오동현에게서의 전화.

수신 아이콘을 슬라이드.

액정에 길게 남는 혈흔.

"형! 그, 그 반지, 반지!"

귀 안 먹었어. 작게 말해.

"어, 어떤 남자가, 반지 고르더니, 그대로 홀을 떠서."

너 어딘데?

"여기, 그, 전시장 뒤편 주차장."

전화기가 아스팔트에 부닥치는 소리.

통화 종료.

웅성인다.

주변 인간들이.

두 손이 피투성이니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유유자적한 표정을 지으며, 민석은 휴대전화를 뒷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손바닥에 잔뜩 말라붙은 남의 혈액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구둣발의 민석은 홀을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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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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