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연자
백도화는 목적 없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그에게 서울이란 온갖 협잡과 음모가 가득한 도시였다. 인간들의 더럽고 추잡한 욕망을 1열에서 관찰하는 인생을 살다보면 저절로 이런 편견을 갖고야 만다. 물론 그런 협잡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돕는 부류가 바로 조사원이지만서도.
하지만 오늘은 딱히 손에 들어온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인터넷 방송은 밤 열 시에나 시작을 한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가벼운 운동을 하고 밥을 챙겨먹고 몸단장까지 했는데도 시각은 정오를 넘기질 않았다. 도화는 몸과 마음에 사무치는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결국 차를 끌고 뛰쳐나왔다.
고속도로를 타고 행정구역을 넘어 처음으로 들른 곳은 동료의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작달막하지만 일단은 사무실이라고 부르고 있는 듯했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문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도화는 주머니에서 락픽을 꺼내 열쇠구멍을 세심하게 쑤셨다. 범법적인 행동이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문은 삼십 초도 버티지 못하고 그를 안으로 들였다.
동료는 부재중이었다. 텅 빈 사무실에 이젠 으스스하니 한기가 돈다. 완연한 가을이다.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게 여름이었던 것도 같다.
도화는 푹신하지 않은 사무실 소파에 누워 대충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이러고 있다가 동료가 돌아오기라도 하면, 그렇다면, 뭐라도 일감을 가로챌 수 있지 않을까. 일전 천안 사건 때처럼. 은근한 기대를 품으며 팔걸이에 뒷통수를 내려둔다.
백도화 명의의 휴대전화를 꺼내 알림을 확인했다.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방송 플랫폼의 구독자 현황을 확인하고, 최근 업로드한 영상의 반응을 훑어보고, 마음에 드는 댓글을 몇 개 골라 하트를 남긴다. 일상적인 루틴이다. 이번 영상에는 편집자인 성훈이 찌질한 댓글을 남겼기에 댓글창 상단에 고정도 해 주었다. 운동회에 쓰이는 박마냥 실컷 관심어린 댓글을 얻어맞으리라.
코웃음을 치며 휴대전화를 교환했다. 김민석 명의의 휴대전화다. 실은 슬슬 휴대전화를 두 개 씩 들고 다니기 귀찮아 차선책을 모색하는 중이다.
특별한 연락이 있었다. 의외의 사람에게서 온 것이었다.
청계천 부근에서 전파상을 하고 있는 이 씨의 연락이었다. 전파상이라곤 하지만 일반적인 고객은 거의 없고 (그의 가게에 잘못 발을 들인 극소수의 일반인을 제한다면 말이지만) 거진 뒤가 구린 인간들만이 그를 찾는다. 도화 역시 뒤가 구린 인간이고, 그와 제법 친하다면 친하다고 할 수 있다.
메시지는 간결한 한 줄의 문장 뿐.
[ 할 말이 있으니까 와라 ] 15분 전
할 말이 있다면 전화나 메시지로 해도 될 텐데, 구태여 대면을 요구하는 이유는 분명 따로 있을 것이다. 도화는 순식간에 세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기록으로는 남길 수 없는 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도화는 김민석 명의의 휴대전화에 자동 통화 녹음 서비스를 설치해 두었다. 이런 류의 사업에 종사하다 보면 클라이언트들이 계약을 불이행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전화나 메시지를 길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어쩌면 납치라도 당해 자신에게 SOS 시그널을 보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문장 구조도 띄어쓰기도 아주 멀쩡하다. 애초에 SOS라면 좀 더 직설적인 메시지를 보냈겠지.
내 얼굴이 보고 싶어서. 대낮부터 술 상대를 구할 사람은 아닌데......
메신저 창을 내리며 다른 연락은 없는지 확인했다. 동시에 이 씨가 할 말이 무엇일지 가늠하여 본다. 손님인 도화가 가게 사장인 그에게 연락을 하는 일은 있어도 그 반대의 일은 전무했다. 이 씨는 신제품을 개발해도 홍보 문자 같은 걸 돌리진 않으니까. 그를 찾는 범법적인 손님들이 이미 한 트럭이니 문자 값을 써서 광고해봤자 여기저기에 기록이 남아 신변이 위험해지기나 할 뿐이다.
그 외의 연락은 없었다.
도화는 딱 좋은 각도로 누인 몸을 일으키기 아깝다는 생각을 한다.
멍하니 십 초 정도를 갈등하다가, 결국 이 씨에게 이십 분 안으로 가겠다는 답장을 남겼다.
"방송하더니 연예인 병이 생겼나?"
두꺼운 안경알로 얼굴을 가린 전파상은 도화의 면상을 보자마자 불퉁한 어조로 물었다.
도화는 별 수 없이 시커먼 마스크를 내려 얼굴을 보였다.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려곤 했지만 상대의 심기불편한 표정을 보아하니 실패한 모양이다. 김민석의 차림이 되면 늘 이렇다. 웃는 게 어려워진다.
"아니, 나이 먹으니 기관지가 안 좋아져서. 목이 칼칼하더라고요. 가을이라 더 그런가?"
"이 근처에서 얼굴 팔리면 안 될 이유라도?"
블러핑을 깔끔하게 무시하는 이 씨다. 블러프가 먹힐 거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도화는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내가 서울에 아는 사람이 좀 많나."
"그런데도 얼굴 까고 노는 건 대단한 깡이셔."
"이게 진짜 얼굴 같아요?"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쓴 것 같진 않네."
이 씨는 진지하게 대화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책상 서랍을 뒤진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이동식 의자와 철제 테이블. 온갖 전자기기로 뒤덮인 좁다란 가게 안에서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가구다.
"그래서, 나랑 무슨 비밀 얘기를 하고 싶어서 부르셨을까. 오래 걸리나?"
"모모의 대답 여하에 따라."
도화는 결국 대외용 미소를 찌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는 도화의 이중생활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물론 도화는 극소수의 인물을 제한 누구에게도 자신의 스트리머 생활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이를 이 씨가 알게 된 건 도화에게 있어 계산 밖의 사고였다.
이 씨의 가게에는 몇 년 동안 팔리지 않던 고양이 귀 헤드셋이 있었다. 별별 물건을 다 다루는 전파상이니 이런 이상한 물건이 있어도 이상치는 않지만, 아무래도 그의 손님들은 그런 물건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도화는 가게에 들를 때마다 보이는 헤드셋에 이상하게 마음이 갔고, 그 즈음하여 심심풀이로 켜는 인터넷 방송이 상승세였고, 본격적으로 BJ로 데뷔하려면 저 정도의 아이캐칭 아이템은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런저런 요소가 겹치고 겹쳐 도화는 이 씨에게 저 헤드셋을 싼 값에 내놓지 않겠느냐 물었다.
그러자 이 씨는 묘한 얼굴로 도화를 응시했다. 그 얼굴을 보고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도화가 다른 변명을 꺼내기도 전에, 이 씨는 도화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너 혹시 게임 방송 하냐? 라는 질문이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분.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씨는 도화의 방송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다지 열성 팬은 아니지만 심심하면 보는 정도라던가. 몇 년 전에는 전체적인 방송 세팅을 도와준 적도 있다.
"백도화라는 이상한 이름이니 이런 별명은 감수해야지."
"전 일본어로 인사도 할 줄 몰라요."
"그건 됐고. 보여줄 게 있어."
이 씨는 서랍에서 작은 지퍼백을 꺼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백이다. 투명한 폴리에틸렌이 엄지손가락만한 내용물을 감싸고 있다.
작은 이어폰처럼 보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즘 나오는 무선 이어폰처럼 생겼다. 케이스도 없이, 한 짝만이 지퍼백에 담겨 있다.
이 씨는 도화의 눈앞에 지퍼백을 들이민다.
"이게 뭔지 알겠어?"
두꺼운 안경알이 어두침침한 조명빛을 받아 반짝였다. 눈을 가늘게 뜨며 정체불명의 기계를 살폈지만, 도화로서는 이게 이어폰 외에 무슨 기능을 가지고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는 터라.
"뭐예요, 이게. 이어폰인가?"
"기억 안 나?"
"기억이요?"
돌연 두개골 안쪽에서 반짝이는 심상을 낚아채기도 전에 이 씨가 뒷말을 이었다.
"도청 도청기잖아. 네가 가져갔던."
"도청...... 어, 엥?"
"이제 기억이 나냐."
도화는 부서진 도청 도청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얼어붙었다.
올 봄의 일이다. 도화는 새로 생긴 도박장에서 조폭과 시 의원의 회담을 도청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들의 유착 현장을 엿들어 그곳에서 오고 간 정보를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류의 의뢰가 또 드문 건 아니었으므로, 도화는 흔쾌히 의뢰를 수락했다.
도박장으로 향하기 전 도화는 상관의 권유에 따라 이 씨를 찾았다. 신제품이 있으면 넘겨달라고 했다. 이 씨는 그 당시 제작하고 있었던 아이템의 시제품을 도화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이 도청 도청기. 외견은 평범한 무선 이어폰처럼 보이지만, 간단한 조작을 통해 주변의 통신을 엿들을 수 있는 신기한 기구다.
도화는 도청 도청기를 이용해 회담을 도청하던 누군가의 전파를 엿들었다. 그 누군가가 회담에서 벌어질 돌발상황을 우려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조일지, 아니면 도화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회담을 도청하는 다른 조직일지, 판단하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도청은 성공적으로 완수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도화는 뒤이어 상상도 못한 대화를 엿들었다.
의원은 조폭에게 넘어갔어야 할 이권을 다른 조직에 넘겼다. 산백파라는, 요즘 어마무시하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조직에게 말이다. 오늘의 회담은 그에 대한 조폭 측의 일방적인 항의에 가까웠다. 회담 도중, 조폭은 그 보복으로 폭탄 테러를 예고했다. 도박장을 날려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도화는 도청 중이던 도박장에서 테러에 휘말렸다. 포악한 폭발과 화마에서 몸을 간수하던 와중 장착하고 있던 도청 도청기를 어딘가에 흘려버렸고, 그대로 분실했다.
그래, 분명 도박장에서 잃어버렸을 터인 도청 도청기가, 왜 여기에 있을까.
거기에 있던 누군가가 바닥에 뒹굴던 도청 도청기를 입수했다?
그게 이 씨에게 흘러들어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 때, 그 장소에, 나 말고 다른 조사원이 있었나?
아니, 비단 조사원이 아니어도 된다. 이 씨와 거래하는 인간들은 그 부류가 다양하다. 죄다 뒤가 구린 사업에 종사한다는 건 같지만서도.
대체 어떤 루트로 여기까지 굴러온거지......?
"눈동자 굴리는 폼 보니 어디서 찌른 건지 짐작도 안 되는 모양이군."
이 씨는 작게 코웃음을 치곤 지퍼백을 도화의 앞에서 물린다. 철제 테이블에 나동그라진 지퍼백이 작고 먹먹한 충돌음을 냈다.
주머니에 넣은 한 손을 있는 힘껏 쥐고 나서야, 도화는 애써 대외용 미소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건 확실히 전화로는 못 하는 얘기네."
"문 옆에 있는 의자 가져다 앉아라. 모모니까 이런 얘기도 해 주는 거다."
더위가 가실랑 말랑 하는 초가을에, 오동현은 이 씨를 찾아왔다.
동현은 민석과 같은 상관을 두었었다. 둘은 현상심부름센타의 소장인 백현상에게 조사원 교육을 받았는데, 어느 날 동현은 자신의 탐정 사무소를 차리겠다며 현상의 품에서 뛰쳐나갔다. 정작 동현보다 한참 베테랑인 민석은 자신이 보스가 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어 여전히 현상에게서 의뢰를 수주받고 있다.
현상심부름센타 시절의 인연으로 동현은 이 씨를 알고 있었다. 요즘도 조사 도구를 얻으러 청계천에 얼굴을 디밀곤 한다. 그런 동현이 정체불명의 기기를 감식해달라며 이 씨를 찾은 건 어쩌면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씨는 동현이 내민 기기를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이건, 자신이 민석에게 건넨 도청 도청기의 시제품이었으니까. 솔직히 많이 놀랐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뒷세계에서 날뛰는 인간들과 거래하다 보면 포커페이스 정도는 기본 소양으로 갖추게 되는 법이다.
"이어폰 아냐? 이건 또 어디서 주워왔어?"
이 씨는 입 밖으로 내뱉기 전 단어를 하나하나 선별하는 자신을 자각했다. 동현은 늘상 짓는 멍청한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대답했다.
"제가 주운 거 아니에요. 의뢰인 분이 어쩌다 입수하셨는데,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좀 조사해달라고 하셔서."
"그 사람은 나 같은 인간들이랑은 친분이 없는가 보지."
"아가씨 같은 분이셔서요."
슬쩍 의뢰인의 신분을 떠 볼 목적으로 흘린 질문이었건만 탐정은 잘만 넘어갔다. 이래서야 탐정이라고 부를 수가 있나, 직업 윤리에 반하지 않나? 이 씨는 남몰래 입을 비죽대며 생각했다.
"원래 고급진 인간들이 더 하는 법인데."
"에이, 되게 좋은 분이세요."
탐정에게 의뢰를 맡긴 시점에서 이미 좋은 사람이라고 하긴 애매한 거 같은데?
하여간 탐정의 의뢰인은 정말로 아가씨인 모양이었다. 외견만 청초한 미녀가 아니라, 진짜배기 고소득 가문의 여성. 그 정도의 의미겠지.
"요즘 일이 좀 밀려서. 한 달 안에 뜯어보도록 하지."
"헤헤, 그래주시면 감사하고요. 비용은 그 때 가서?"
"어."
동현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가게 문을 밀고 나갔다.
"그러니까, 어떤 여자가 이걸 주워서 오동현한테 조사해달라고 넘겼다, 이거죠?"
"그 여자가 처음으로 주운 건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
도화는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을 맞잡았다. 허벅지 위에서 꿈틀대는 얽힌 손은 주인의 정서불안을 선연히도 나타내고 있다.
"그건 또 그렇네. 그 여자가 누군가한테 받은 걸 수도 있고."
"일단은 오동현을 털어봐. 여자부터 잡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
"그래야죠."
대답을 짤막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방금 떠오른 또 다른 가능성을 셈하느라 아무래도 연산회로가 부족했다.
폭탄 테러 이후, 테러를 강행한 폭력단의 조무래기 두 명이 도박장 근처에서 빈사 상태로 발견되었다. 누군가에게 고문을 당한 흔적이 남아있다고 했던가. 도화의 상관 현상은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테러를 벌인 녀석들이 반대 세력을 고문할 일은 있어도, 그 역은 웬만해선 벌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테러를 벌인 녀석들이 고문당했을까. 반대 세력이 그 녀석들을 고문해서 얻어낼 수 있는 유용한 정보는 뭐가 있을까?
그래, 폭탄을 설치한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폭탄을 설치한 장소를 알아내야만 했을까?
그래, 폭탄을 설치한 장소를 알 수 있다면 보다 편리하게 안전한 장소를 골라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폭탄 테러에서 안전한 장소를 골라내야만 했을까?
그래, 도박장 안에 중요한 사람이 있었던 거지.
이를 테면, 반대 세력, 곧 의원에게서 이권을 받아낸 산백파의 보스라던가......
"안색이 안 좋은데. 뭐 짚이는 거 있나?"
이 씨가 도화를 한참 바라보다 물었다.
그가 제 얼굴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생각에 방해가 되어 부러 반응하지 않았다.
멀티태스킹도 블러핑도 안 될 정도로 극한 상황인 건가......
"이거, 조만간 인천 앞바다에 떠오르겠는데."
"농담할 정신이 있는 거 보니 별 일 아니군."
"별 일이 아니진 않아요. 뭐, 애초에 수임한 놈이 오동현이라는 점에서 아주 위험한 건은 아닐 것 같지만요."
"그렇겠지. 진심으로 소유자를 찾고 싶었으면 좀 더 잘하는 놈한테 맡기지 않았겠어."
도화는 턱에 걸쳤던 새카만 마스크를 의식적으로 끌어올렸다.
동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만 부재중 전화에 대한 답신으로 메시지가 하나 왔다. 지금 잠복 중이니 연락할 수 없다는 요지의 메시지였다. 마침 잘 되었다.
도화는 오동현 탐정사무소로 향하며 머릿속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써 내렸다.
테러로 도박장에 갇혀 있던 보스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도청 도청기를 주웠다. 어떠한 이유로 이것이 단순한 무선 이어폰이 아님을 알아챘다. 이런 걸 쓰는 인간은 한정되어 있다. 도박장 안에 귀여운 쥐새끼가 꼬였다는 걸 눈치챈 보스는 무사탈출 후 도박장의 출입 명단을 확인했다.
그리고, 김민석이라는 신원불명자가 그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도화가 몇십 년 째 사용하고 있는 김민석이라는 신분은 한참 전에 죽은 폭력배의 신분으로, 출신 학교 등을 뒤져 파고든다면 현재의 김민석과 과거의 김민석 사이에 무언가 괴리가 있음을 의외로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보스는 현재의 김민석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조사한다. 조사원이라는 신분이 빠르게 밝혀진다. 일단은 같은 뒷세계에서 일하고 있으니 생각보다 이르게 커리어가 까일 것이다. 민석이 현상심부름센타에서 일을 했던 사실까지 알아내고, 그의 유일한 동기이자 후배인 동현을 찾아 도청 도청기의 조사를 의뢰한다.
우회적으로 나에게 엄포를 놨다?
여기까지 알고 있으니 조용히, 몸 사리고 있으라고?
하지만 조직의 보스까지 되는 인간이 한낱 흥신소 직원을 그렇게까지 압박하려고 할까.
아니...... 사실 가장 걱정되는 건 제 목숨이 아니다.
도화는 도박장에 동행을 데리고 갔었다. 도박장에서 도박도 하지 않고 혼자 주위를 어슬렁대고 있으면 수상한 사람으로 찍히기 딱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행인에게 도박을 하도록 시켰고, 그의 게임을 구경하는 척 하며 도청에 귀기울였다.
지금은 동행의 신상이 염려되어 미칠 것 같았다.
도청하러 숨어들어온 쥐새끼의 동행인을 순수한 손님으로 여길 리가 있겠는가.
그 때는, 단순 도청 의뢰인 줄만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데려갔던 건데.
"아, 씨......"
동행인은 김기철이라는 남자다. 도화보다 두 살이 많다. 기철은 가짜 신분 같은 건 사용하지 않는다. 전직 고등학교 교사이기까지 하다. 확실하다 못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선명한 신분이다.
하지만 그 역시 과거 흥신소에서 일한 전적이 있다. 도화는 그와 같은 흥신소에서 일하며 친분 이상의 친분을 쌓았었다.
그러니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제 조사 일에서 손을 완전히 떼었는데......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릴없는 고민에 빠져있던 도화는 탐정사무소의 문을 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도진은 서점 밖으로 빠져나왔다.
서점 사장과 절친한 도진은 그제부터 서점 꾸미기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이젠 호박이라면 보기만 해도 지겹다. 램프를 어디에 놓고 가랜드를 어디에 걸고. 배치해 보니 분위기가 안 산다. 램프랑 가랜드의 자리를 바꾸자. 유령 스티커는 왼쪽 서가에만 붙일까. 그럼 사탕은 오른쪽 서가에 둬야겠다. 뭔가 밸런스가 안 맞는데? 작가님은 괜찮은 의견 있으세요?
물론 두 사람의 피나는 노력 끝에 서점은 나름 괜찮은 할로윈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얼마 없는 주변 주민들이 잘 꾸며진 익스테리어를 보고 구경을 오는가 하면, 홍보용 SNS의 피드를 보고 서점을 찾은 손님들이 일시적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정작 매일 같이 서점을 찾는 도진에게는 악재였는데, 손님이 많아져 그가 앉아있을 곳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앉을 자리야 있지만 주변 환경이 좋지 못했다. 도진은 사람이 많고 어수선한 곳을 최대한 피하는 편이다. 그리고 오늘의 서점은 사람이 많고 어수선했다.
카운터를 보고 있는 현에게 서점에서 나가겠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니 싸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콧잔등을 스쳤다. 완전한 가을 날씨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나. 도진은 새삼스럽게 놀란다.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는데도 폭포수보다 빠른 세월의 흐름에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적응을 겨우 하고 나면 죽을 날이 코앞에 와 있겠지. 인생이란 왜 이렇게까지 부조리의 집합체인 걸까.
저 멀리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태양이 눈부신 노을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해가 짧아졌다. 추위를 피해 도망가는 태양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도진은 귀갓길에 올랐다.
서점에서 아파트까지 난 직선 도로는 놀라울 정도로 사용량이 저조하다. 도진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는 이 길의 말단에 서 있고, 서점과 아파트의 사이에 상점이랄 것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파트의 주민들만이 통행을 위해 이 도로를 사용하는데, 그 주민들의 수가 상당히 적어 이렇게 애매한 오후 시간대에는 마주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도진은 한동안 붙잡고 있던 장편의 구상을 머릿속으로 다듬으며 도로를 걸어나갔다. 아파트의 정문이 보일 때까지 사람은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아파트 오른쪽 화단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다.
백도화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이미 사람의 움직임을 포착하였는지, 고개를 도진 쪽으로 돌려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 도진은 발을 멈출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는 수 없이 전진을 계속했다. 도화는 슬금슬금 도진의 경로로 다가온다. 평소와 같은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다.
"오늘은 일찍 귀가하시네."
네모난 뿔테안경 뒤의 눈은 빙글빙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서점이, 소란스러워서요."
"소란?"
두 사람은 아파트 현관 계단 앞에서 멈춰섰다.
"할로윈 컨셉으로 꾸민다고...... 그래서, 꾸몄더니, 손님이 평소의 배는 와서."
"아, 슬슬 할로윈인가?"
"내일모레가 할로윈이래요."
"작가님 말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네...... 맞겠죠. 걔가 말한 거니까."
"걔?"
"현...... 서점 사장이요."
"이름이 외자예요?"
"음, 네."
"심플하고 좋네."
"좋죠......"
침묵이 삼 초 가량 이어졌다. 도화는 입술에 매달려 있던 담배를 근처 재떨이에 눌러 끈다. 이 재떨이는 원래 화단 앞 석조 조형물에 있던 것인데, 누군가 쓰고 제자리에 가져다 두지 않은 건지 현관 계단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아우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새 담배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도진은 무심코 던힐이라는 브랜드 명을 망막에 새겨본다.
"아, 나는 좀 더 피우고 들어가려고. 작가님도 피울래요?"
"아뇨......"
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고민 있으세요?"
도화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 어느새 바닥에 꽂힌 시선이 움직이질 않는다.
"담배를, 많이 피우신 거 같아서."
"재떨이에 던힐이 많지?"
"아, 네......"
장초에 붙은 불이 일순 그 빛을 번쩍였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길게 내뱉은 담배 연기만이 주위를 잠시 부유하다가 모습을 감췄다.
"연락도 안 되고 의뢰 보고서도 안 쓰는 등신 같은 동료가 걱정이 돼서......"
그 말을 끝으로 도화는 입을 다물었다.
도화는 아무도 없는 오동현 탐정사무소에서 그 무엇도 얻어낼 수 없었다.
조사원이라면 으레 작성하는 의뢰 보고서는 문서철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 도청 도청기와 관련된 정보는 전무했다.
도화는 문서철을 선반에 돌려놓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이전 동현이 컴퓨터를 구동할 때 옆에서 엿본 패스워드를 쳐 넣었다. 이런저런 잡다한 사건 파일이 하나의 폴더에 정렬되어 있었으나 역시 도청 도청기와 관련된 파일은 없었다.
이건 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
베테랑 조사원은 순식간에 두 개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오동현은 도청 도청기 분석 의뢰가 위험한 건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자신이 이 의뢰를 수임한 사실을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오동현은 도청 도청기 분석 의뢰를 진지한 '의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순히 도청 도청기를 전파상 이 씨에게 맡겨 분석 결과를 의뢰인에게 넘겨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의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2-1. 하지만 이상하다. 그 놈은 탐정 놀이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남이 자신에게 부탁한 모든 일'을 의뢰로 남길 법도 한데. '의뢰'와 '의뢰가 아닌 일'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짬이 찬 조사원이 아니란 말이다.
2-2. 그런 오동현이 '의뢰'를 '의뢰가 아닌 일'로 받아들인 이유는 뭐가 있을까?
도화는 기계적으로 사건 폴더의 파일을 하나하나 열었다. 파일들은 죄다 A씨 뒷조사, B씨 미행, C씨 생존확인 등의 모호한 이름이었다. 어차피 자기 혼자 쓰는 컴퓨터라면 가명 대신 실명을 써도 좋을 텐데.
모니터 안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던 커서는 어느 파일의 이름을 보고 멈춰버렸다.
[ 아가씨 결혼 상대 조사 ]
고민하지 않고 파일을 두 번 클릭했다. 마우스에서 나는 스프링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이리라.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은 한글 파일이 모니터를 꽉 채웠다.
도화는 한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침착하게 식혔다.
혹시 숨겨진 글자가 있지 않을까 싶어 몇 번 드래그를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커서는 파일의 맨 윗줄에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 놈, 설마 아직 안 끝난 건이라 보고서를 안 쓴 건가?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컴퓨터를 껐다. 바로 동현에게 연락을 해 보려다가, 잠복 중이라는 메시지가 떠올라 작게 한숨만 쉬어버린다. 괜히 메시지를 보냈다가 남의 일을 망칠 수는 없지. 그 놈이라면 분명 휴대전화도 무음모드가 아닐 테니......
도화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동현 탐정사무소를 나섰다.
탐정사무소에서 자가용으로 향하는 짧은 길목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담배 한 대로 나아질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걸 인지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담배 두 대로도 고뇌는 사라지질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경감 효과는 있어서, 설마 정말로 최악의 경우가 자신에게 닥친 건 아닐 거라는 희망찬 전망을 생각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집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김민석의 허물을 벗고 백도화의 인격을 입었다. 습관적으로 김민석과 백도화에게 온 연락을 확인했다.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했는지 관자놀이가 지끈지끈했다. 몇 시간 후면 인터넷 방송을 해야 한다. 알콜로 소독할까 니코틴으로 지질까 고민하다가 소파 앞 테이블에 던져둔 담뱃갑을 집어들고 1층 현관으로 향했다.
세 번째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아파트 정문에서 도진이 비틀비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몸에 잔뜩 흡수된 니코틴이 그에게 말을 걸라고 명령했다. 도화는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툰 그에게 억지로 말을 걸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내일모레가 할로윈이란다. 올해는 쇼핑몰에서 뱀파이어 망토라도 사서 걸쳐볼까 생각하던 중에.
"고민 있으세요?"
도화는 여전히 자신의 멘탈이 극한에 내몰려 있음을 자각했다.
남에게 억지로 말을 건 것도, 할로윈에 뭘 할까 생각한 것도, 죄다 의식 저 안쪽의 중대한 고민을 잠시라도 잊기 위한 자기방어일 뿐이다.
그의 일부는 끊임없이 고민의 타개책을 모색하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이른 바 정신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도피 행위.
도화는 적당한 문장을 짜맞춰 목구멍 밖으로 밀어냈다.
그것이 이웃사촌인 작가님에게 어디까지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달하고 싶었던 건가?
아니, 내뱉지 않으면 정신의 천칭이 균형을 잃고 무너질 것 같았다.
단지 그뿐이다.
그뿐이다......
도화는 담배 연기를 끊임없이 배 안으로 밀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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