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 main

Semi⇔Bluff

K=Potassium by KPota
6
0
0

등장하는 인물

백도화 ...... 스트리머 겸 조사원

김 선생 ...... 백수

백현상 ...... 「현상심부름센타」의 소장

소나무 ...... 일러스트레이터

진유신 ...... 모델러

오동현 ...... 직업 탐정

백정우 ...... 샐러리맨?

등장하지 않는 인물

서도진 ...... 추리소설가

강성훈 ...... 영상편집가

진유선 ...... 변호사

유탐정 ...... 학원 선생

서유용 ...... 전 흥신소 소장


1

백도화는 으슥한 뒷골목의 녹슨 철문을 열어젖혔다.

이곳은 종로 어드매의 후미진 골목. 인구 밀도가 높다 못해 포화 상태인 이 도시에는, 좁고 불결한 골목들이 개미굴처럼 빽빽이 산재해 있다. 그 개미굴 안쪽에 자리 잡은 허름하고 낮은 건물. 가게 하나 들어서지 않은 듯 창틈으로 빛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는 건물에, 도화는 발을 들였다.

쾌쾌한 냄새가 나는 가파른 계단은 기억과 다르지 않다. 인기척은 여전히 한 톨도 없다. 겨울에는 길거리의 방랑객들이 이곳에 잠시 머무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소장이 돈 되지 않는 봉사 따위를 할 리 없으니 아마 위증에 가까우리라. 

삼 층에 다다라서야 그나마 간판다운 간판이 걸려있는 문짝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중후한 나무 문 옆에 달린 작은 간판에는 '현상심부름센타' 라는 글자가 힘 있는 필체로 쓰여 있다.

나무 문을 열었다. 딸랑, 하고 종소리가 났다. 작은 인기척 역시 느껴진다. 아무래도 소장 혼자인 모양이다.

"저 왔어요, 영감님."

묵직한 목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소장이 고개를 든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새하얀 머리칼. 사람 좋은 할아버지 같은 인상. 근처 공원에서 바둑을 두어도 누구 하나 정체를 의심하지 않을 법한 외견.

테이블에 떡 하니 놓인 명패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하얀 글씨로 '소장 백현상'이라 쓰여 있다.

"뭘 그리 바리바리 싸 들고 왔어?"

소장은 도화의 백팩을 보곤 대뜸 물어왔다.

"서울 온 김에 물건을 보충할까 싶어서."

도화는 응접용 소파에 걸터앉는다. 그리 무겁지 않은 백팩을 제 옆에 내려둔다.

"이 씨는 잘 있더냐."

"그럼요. 개량품을 만들었다고 아주 신나 하시던데. 시험 중이라 당장은 못 준대지만."

"자주자주 다녀봐라. 너한테 처음으로 시제품을 줄지 누가 아냐."

"에이, 멀어요~ 영감님. 기름값 줄 거예요?"

"딴따라 하는 돈으로 채워 넣어."

입을 삐쭉이던 도화는 소파에 파묻히듯 기대어 본다. 소장이 차를 내올 생각은 없는 듯하였으므로,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나 잠시간 고민을 하다가, 또 그렇게 목이 타지는 않아서. 그리 푹신하지는 않은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는 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왜 부르셨어요?"

"이유가 달리 있나."

책상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소장은 보안에 아주 철저한 편이다. 이 사무실 안에서, 열쇠나 비밀번호 없이 열 수 있는 서랍장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튼 소장은 부스럭대며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도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맞은편으로 다가선다.

"동두천에 카지노 생긴 거 알지?"

"조폭들이랑 엮였다고 난리도 아니던 그거요? 이러저러 시끄럽던데."

인터넷에서 보았던 뉴스 기사를 떠올린다. 외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도 자유롭게 도박을 즐길 수 있는 카지노 2호점. 설립 목적은 1호점인 강원랜드와 비슷한 지역 발전. 때문에 사기업이 아닌 공기업에 가까우나, 설립 과정에서 지역 폭력단과의 유착 의혹이 불거지고 말았다. 관련인들은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며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뭐야, 잘 아는구만."

"아직은 현역이라서요."

가슴을 쭉 뻗는 제스처를 보였다. 소장은 손자의 재롱을 보는 푸근한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만들다가, 이내 가볍게 지워낸다.

"조폭이랑 엮인 건 맞는데, 그게 또 한 놈이랑만 엮인 게 아니데."

"여럿이랑 엮였다?"

"그래."

소장은 서랍장에서 돋보기안경을 꺼내 들었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안경을 콧잔등에 슬쩍 걸치곤 활자가 수두룩 빽빽한 서류를 뒤적이며,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두천은 주한미군이 들어선 도시로 유명하다. 보통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기지촌'이라는 인식이 팽배할 정도다. 하지만 그 인식이 또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도시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미군 기지. 미군의 니즈에 맞추어 발달한 문화 산업. 이러저러한 정치적 사유로 미군 일부가 빠져나가자 금세 휘청이는 도시 경제. 그러니, 다른 도시와의 차별점으로 내세울 만한 것은 결국 '미군' 하나뿐.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도시의 책임자들은 변화를 꾀했다. 그것이 바로 '강원랜드 2호점'의 설립이었다. 강원랜드의 설립 목적도 지역 발전이었으니 우리라고 못 할 것이 무엇 있겠냐,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이 도시의 쓸만한 가용 부지는 이미 미군 부대의 차지이고, 도시를 떠난 부대의 잉여 부지 반환은 이상하게도 처리가 빠르게 되질 않는다. 하루빨리 공공 카지노를 건설해야만 했던 책임자들은 그 외의 가용 부지로 눈을 돌렸다.

눈에 불을 켜고 지도를 살핀 그들은 최종 후보지로 세 곳을 골라냈다. 여타 행정 업무가 그렇듯이 비효율적인 속도로 처리되던 와중, 최종 후보지의 정보가 어딘가로 새어 나가고 말았다.

새어나간 곳은 조직 폭력단의 손아귀였다. 전국적인 거대 조직이 뒤를 봐주어, 점차 힘을 키워나가던 신생 조직이 유력 후보지의 정보를 손에 넣고 만 것이다. 그들은 발 빠르게 해당 부지를 사들였다. 책임자에게 뒷돈을 꽂아주었다. 그리고, 동두천의 다른 로컬 조폭에게 거짓 정보를 퍼트렸다. 카지노 건으로 뭔가 떡고물을 받아먹기 위해 입맛을 다시던 조직이었다.

본래 동두천 뒷골목을 주름잡던 로컬 조직은 거짓 정보를 덥석 믿곤 다른 부지를 매입했다. 이미 몰락해가던 조직이라 한탕 승부에 가까운 행동이었던 듯했다.

당연스럽게도 카지노는 신생 조직의 부지에 건설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부지에 카지노를 세우게 해 주는 대신 약간의 조건을 요구했고, 이미 로빗돈을 받은 책임자는 흔쾌히 수락했다. 엉뚱한 부지를 매입한 로컬 조직의 몰락에 가속이 붙은 건 당연한 전개였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보스 주변의 인물들이 차례차례 죽어 나갔다고도 하고.

이후 카지노 건물은 무사히 완공되었다. 15층 높이의 호텔로, 지하층과 저층에는 레저 시설이, 중층과 고층에는 객실이, 최상층에는 문제의 카지노와 레스토랑이 입점하였다. 지난 달 오픈하여 초기부터 상당한 매출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요?"

그리 짧은 이야기는 아닐 성싶었다. 도화는 정수기 근처의 탁자에서 커피믹스를 집어 들어선, 두 잔의 믹스 커피를 만들어 낸다. 찻숟가락 같은 고급진 물품은 없다. 자연스럽게 믹스의 포장으로 종이컵의 내용물을 휘휘 젓는다.

소장은 종이컵을 받아 들어 가볍게 한 모금을 머금는다.

"로컬 녀석들의 분노가 어마무시 하지 않겠냐."

"그렇겠죠. 그런데, 조직 윗대가리도 좀 죽어 나간 거 아니에요? 그럼 화나도 별수 없지 않나. 쪽수도 딸리고 세력도 딸릴 테니."

"그래. 그러니 위원들도 신생 조직도 전혀 경계를 안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데?"

소장은 다시금 서류를 뒤적인다. 도화는 우람한 책상에 골반을 기대어 있다. 몇 모금을 맛본 믹스 커피는 신기할 정도로 달달해서. 입맛에 맞다고는 하기 어려웠다.

"카지노 옆 VIP실에서 접견을 하려는 것 같다. 위원이랑 조폭 놈들이."

"조폭? 어느 쪽?"

"부지 경쟁에서 패배한 녀석들."

"인제 와서 대체 뭔 접견을 한대요?"

"난들 아냐. 위원 약점으로 협박이라도 하려나? 그건 모르겠고. 신생 조직도 가만히 있진 않을 모양이데. 옆에서 똑똑히 지켜보고 있을 테니 헛짓거리할 생각 말라고 했단다. 위원한테."

"삼자대면하는 겁니까?"

"아니, VIP실에 도청기라도 심어두고 바로 근처에서 훔쳐 듣겠지. 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개입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은 동시에 커피를 홀짝인다. 아무래도 같은 순간에 잔을 내려놓고 싶지는 않아서, 도화는 부러 마지막 한 방울까지 쭉 들이킨다. 소장은 아직 절반밖에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서 내가 할 일이 뭔데요?"

"정보 수집."

소장은 그제야 서류에서 시선을 떼었다. 살짝 미끄러진 금테 안경의 다리를 밀어 올리더니, 책상에 기댄 도화를 천천히 올려다본다.

"첫째, 로컬 조직의 협박이 무엇인지 알아낼 것. 둘째, VIP실 근처를 어슬렁 댈 신생 조직의 인물이 누구인지 밝혀낼 것. 두 번째가 어렵다면야 첫 번째만 완료해도 좋아."

"누구 의뢰예요?"

"정보상."

"첫 번째는 대충 이해가 되는데, 두 번째의 의도를 영 모르겠어요."

"왜 몰라?"

"도청하는 조직의 정체를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도청하는 놈을 찾아서 그 새끼가 어느 조직 소속인지 찾아내는 거면 몰라도. 이미 신생 조직 소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왜 그런 짓을 해야 돼요?"

소장은 축 처진 눈을 감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그 반응에 도화는 또 약이 올라선 미간에 깊은 골을 새기기도 하고. 뭔데요?! 하며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거대 조직이 뒷배를 봐 주고 있다고 했잖냐. '혹시 모른다'라는 거지."

"거대 조직원이 도청 보초를 설 수도 있다?"

"그래. 겸사겸사 뒷배도 알아내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곤란한 표정을 짓던 도화는 책상에서 몸을 떼어냈다.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넣은 채다. 현상은 두 팔꿈치를 책상에 대어선, 상반신을 조금 앞으로 내밀어 본다.

"그게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라는 거다."

"또 왜?"

"요즘 산백파가 꿈틀거리는 건 알지?"

"......알죠.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모여들고 있잖아요."

"저 신생 조직이 산백파의 점조직일 수 있다고 한다."

"흐음......"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충분하댄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도화 니가 가서 물증을 찍어오라는 거지."

소장의 말만 듣는다면 완전히 정보 수집에 치우친 조사이기는 하다. 도청을 잘 수행하고 사진을 잘 찍어낸다면 무난히 성공 가능한 조사이기도 하다.

카지노인가......

"할 수 있겠지?"

"할 수야 있죠. 내가 누군데?"

"같이 갈 사람을 구하는 게 나을 거다. 시커먼 남자 놈 혼자 싸돌아다니면 눈에 띄지 않겠냐."

"영감님, 공공 카지노 들락대는 인간들은 거진 추레하다고요. 그 사이에 나 하나 섞여봤자 눈길도 하나 안 줄걸."

"흘끗흘끗 둘러댈 거잖냐. 친구 하나 테이블에 앉혀두고 뒤에서 구경하는 척해라."

"으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평일 낮이라 그런지 도로는 전혀 막히지 않는다. 막 봄에 들어선 날씨는 청명 그 자체라서, 그는 어쩐지 나들이라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당장 오늘 밤에 켜야 하는 방송을 떠올리곤 가볍게 마음을 접었다.

한 시간 정도 전의 일이다. 허름한 사무소 건물을 나와 청계천의 공구 상가를 재방문했다. 소장의 말을 잘 따른 결과였다. 도화와 두 번째로 얼굴을 마주한 공구 상점의 주인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허접해 보이는 무선 이어폰 하나를 손에 쥐여주었다.

"이게 뭐예요?"

"도청 도청기."

"예?"

"도청 도청기."

대뜸 귓구멍에 꽂아 보았지만 음악은 들려오지 않는다. 상점의 주인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도화를 올려다 본다.

"전원을 켜야지. 여기선 켜 봤자 별 거 안 들리겠지만."

"도청 도청기가 뭔데요."

도화는 심통난 얼굴로 기계를 귀에서 빼냈다.

"근처 도청기의 주파수를 자동으로 잡아서, 도청을 도청하는 기계야."

"......신기한 걸 만드셨네요."

"시제품이니 아주 깔끔한 음질은 보장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주워들을 정도는 될 거야."

두꺼운 안경알로 눈알을 가린 주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게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도화는 백팩 앞주머니에 도청 도청기를 쑤셔넣곤 집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동행인인가......'

소장의 말은 얼핏 맞는 듯 보였다. 주야장천 슬롯머신 앞에 앉아 주위를 흘끔흘끔 둘러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시야도 상당히 방해되고 관찰 범위도 대단히 한정되니까. 차라리 남이 도박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척하며 감각을 곤두세우는 쪽이 훨씬 경제적이고 안전하다.

도화는 가만히 동행인 후보를 헤아려 본다.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셋 정도가 있다.

첫 번째는 그의 영상 편집자인 강성훈. 당장 제 집 아래층에 살고 있으니 컨택은 누구보다 편리하다. 방송에서 썰 풀 소재가 떨어졌다. 동두천에 새로 생긴 카지노에 놀러 가 보자. 같은 간단한 떡밥만 풀어도 배고픈 강아지 마냥 와락 달려들겠지.

그 녀석은 친구가 없다. 그래서 항상 놀음에 몸이 달아 있다. 도화가 기억하는 한, 어딘가 같이 놀러 나가자고 했을 때 성훈이 거절의 의사를 밝힌 적은 없다.

꽤나 강력한 동행인 후보다. 컨택도 쉽고 포섭도 쉬울 거라는 점이 그렇다. 또한 그가 게임에 손을 대지 않고 주위만 슬슬 둘러보고 있어도, 적당히 썰 풀 거리를 찾고 있는가보다 싶어할 테다. 수상하다는 의심은 거의 하지 않겠지.

그리고 두 번째가, 같은 아파트의 9층에 사는 작가 선생. 실상 그가 먼저 작가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도화는 모종의 사유로 그의 직업을 알아채었다.

도진서와 서도진은 누가 보아도 지나치게 비슷한 이름이지 않은가.

추리소설 애호가인 성훈의 집에 들이닥쳐 도진서의 《보랏빛 심해》를 뒤적이다가, 도화는 책의 정보가 쓰인 페이지에서 또 다른 이웃의 이름을 발견했다.

펴낸이 윤필규.

이런저런 예상을 하다가 이러저러한 결론을 내었다. 제멋대로인 결론이었지만 진상과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도화는 은근슬쩍 그를 작가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움찔대다가 이내 무언가를 포기한 듯 보였으므로.

아무튼 9층의 작가는 추리소설을 쓴다. 추리소설과 도박은 제법 잘 어울리는 테마 아닐까. 소재라도 얻을 겸 같이 가자고 하면, 의외로 따라 나올지도 모른다. 크지도 희박하지도 않은 확률이지만 기대를 걸어보기엔 충분하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미 조사일을 한다고 이야기 해 두지 않았나.

'하여간 술이 방정이야......'

술을 먹고 말실수를 했다. 이쁘장하게 생긴 작가의 외견에 홀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세 번째는......

도화는 무심코 자일리톨을 입 안으로 던져넣었다. 힘을 실어서 으적으적 씹어댄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가장 도움이 될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는 이런저런 흥신소를 전전하며 일을 받았다. 신삥이니 얼굴 도장을 박아두는 게 좋다는 선임들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용병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그 시절, 잠깐이나마 적을 둔 흥신소가 있었는데, 도화는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두꺼운 눈썹과 슬쩍 올라간 눈꼬리. 선이 뚜렷한 미남형의 얼굴. 있는 걸 대충 걸쳐 입은 척하지만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부티. 자신과는 다른 사회에서 자란 태가 만연한, 여유로운 모습. 앞날이 탄탄대로인 교대생.

도화는 우선 주눅이 들었다. 어렸을 땐 숫기가 그리 많지 않았던 그였다. 첫눈에 자신과는 종자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니 다가가기 어려웠다.

흥신소에는 직원이 단 둘밖에 없었다. 연예인처럼 잘생긴 사장님이 부하 고용에 관심이 없으셨던 탓이었다. 일감 없는 사무실에서 쭈뼛대고 있으면. 곧 수업을 마친 다른 직원-잘생기고 돈도 많은 형-이 출근하고. 오후 늦게 들어온 일감을 사장님이 설명해주시고. 위험한 일은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장님을 포함한 흥신소의 평균 나이가 제법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소극적인 도화와는 다르게 형은 자꾸만 관심을 보여왔다.

소파 옆 자리에 앉아 대뜸 손목을 잡아선,

"야, 넌 왜 애가 뼈밖에 없냐."

라며 고깃집에서 밥을 사 주기도 하고.

돌연 사무소에 찾아온 사장님의 여자친구를 보고 아연해 있으니,

"카페 갈래? 나 오늘 커피 안 마셨어~"

하며 당시 인기 있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파르페를 사 주기도 하고.

"너 남자 좋아하냐?"

......남자가 어떻게 남자를 좋아해?

"......한 번 더 하자."

첫 경험은 무서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형은 탤런트 같은 외모의 사장님을 좋아했다. 사장님은 형보다 나를 조금 더 아꼈다. 처지가 비슷해서. 사장님도 밑바닥부터 올라온 사람이라서. 아무래도 있는 집 도련님인 형보다는 나에게 약간이나마 동질감을 느끼셨던 거겠지. 

그래서 형은 나를 조금 미워했다. 사장님과 단둘이서 외근을 나갔다 왔다고 하면 순간 표정이 굳었다. 솔직히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다. 대놓고 입에 올릴 수는 없는 감상이었다.

그런 형이 나에게 손을 댄 이유는───

사장님 대신인 건가, 내가?

어린 도화는 몽롱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관계 후의 각별한 한 대를 태우는 형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형의 자취방 모습은 여즉 잊히지를 않는다.

형이 군대를 가게 되어 두 사람은 헤어졌다. 도화는 탤런트 사장님의 밑에서 홀로 조금 더 일하다가, 입대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그만두었다.

제대 후에 연이어 사건이 터졌다. 덕분에 지인들에게 연락도 돌리지 못했다. 탤런트를 닮은 사장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는지, 형은 교대를 무사히 졸업했을는지, 궁금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노트를 뒤져 연락처를 찾을 짬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멀어졌던 형이 별안간 제네시스를 끌고 도화의 집을 찾아온 것은 꽤나 최근의 일이다.

오랜만에 술방을 했던 날이었다. 채팅창을 안줏거리 삼아 홀짝이다 보니 이상하게도 절제가 안 되어서 결국 과음을 했다. 다행히도 과음했다는 자각은 있었고, 더 마셨다간 말하면 안 될 것까지 나불댈 것만 같아 급하게 방송을 종료했다.

그리고 초인종이 울렸다. 새벽 두 시에. 

인터폰 화면 너머의 남자는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다.

도화는 동료 조사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내일 안에 필요한 자료를 보낼 거라고 했던 것도 같았다. 조사원이라는 녀석들의 주 활동 시간은 본래 동트기 이전이니, 지금 심부름꾼을 보내어도 그렇게 이상할 건 없었다.

얼굴을 가린 뿔테 안경을 벗었다. 방송할 때면 항상 입는 후드티의 모자를 푹 뒤집어 썼다. 현관문을 열었다.

"심부름 시키셨죠?"

"어, 놓고 가......"

편의점 비닐봉지가 가슴께에 닿았다.

수상한 자료를 이런 허접한 봉투로 옮기는 심부름꾼은 없다.

상대는 키가 크다. 그리고 또, 목소리도, 어딘가 익숙해서......

도화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선이 뚜렷한 얼굴과 마주했다.

나이를 한참 먹은 형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백도화는 방송에서 개인정보를 일절 발설하지 않는다.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부업의 정체가 일부의 일부라도 밝혀지는 날에는, 방송인 이미지에 대단한 타격을 받을 것이 틀림 없지 않나.

하지만 형은 조사원 시절의 능력을 열심히 발휘하여 도화의 근거지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싱글싱글 웃는 낯을 보고 있자니 황당함에 말이 나오질 않아서. 아니, 알콜에 절어버린 뇌가 완전 파업을 선언한 탓도 없진 않겠지만. 하여간에 도화는 대놓고 묻고야 만 것이다.

"목적이 뭐야?"

그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지우지도 않고 대답했다.

"널 만나고 싶었어."

랬던가.

그 뒤의 기억은 없다. 알콜과 당혹으로 점철된 뇌가 기어코 기억의 저장을 거부하고야 말았으므로. 눈을 뜨니 소파 위였고, 그 인간은 냉장고를 뒤져 해장용 국을 끓여 놓았고, 아직도 귀가하지 않은 채였고. 당황스러운 상대를 앞에 앉혀두고 밥을 먹으니 국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도화는 기분이 나빴다.

좀 더 괜찮은 경로로 재회했다면 그에 대한 도화의 평가는 상당히 높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게까지 음험하게 찾아오는 건 사람 간의 예의가 아니지 않나. 개인정보 유출에 민감한 직업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도화로서는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가 없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당장 다음 날부터 역공을 했다. 음험하게도 그의 뒷조사를 했다. 지난 20년 간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으며 지금은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있는지에 대한 대강의 개략 정도를 캐내었다. 하루 네 시간 씩 삼 일을 매진했다. 결코 어렵지 않은 조사였다.

그렇게 얻어낸 쓸만한 정보는 다음의 세 가지.

  1. 몇 년 전까지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했다. 지금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 백수. 선생을 그만둔 이유는 불명이나, 그 즈음하여 일어난 모종의 사건에 관련된 탓으로 추정.

  2.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서 동거남과 함께 거주 중. 동거남은 대치동에서 학원 선생을 하고 있음. 몇 년 전 조사 대상자와 같은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함. 그만둔 이유는 역시 조사 대상자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

  3. 본명은 김───

그러므로, 이하 그 인간을 김 선생으로 칭한다.

2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북상하는 길. 시간대는 여전히 평일 낮. 속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주행 중인 제네시스의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도화. 조수석은 당연하게도 제네시스의 소유주인 김 선생의 차지. 오뚝한 콧대의 나이 든 도련님은 창문을 연 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카드는 좀 만질 줄 알아?"

운전대를 잡은 채 도화가 물었다. 확실히 조그마한 모닝보다는 주행감이 좋다.

"카드? 글쎄, 여행 가서 재미 삼아 가 본 게 전분데."

"...가 본 인간이 정장을 차려입어?"

"멋있게 하고 가면 좋잖아."

두 사람은 선생의 집에 모였다가 출발했다. 고급스러운 인터폰을 누르고 현관문을 여니 정장 차림의 선생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기에, 도화는 그를 다시 드레스 룸으로 밀어 넣었다.

'카지노 초행길이라고 아주 광고를 해라......'

그렇게 다시 입고 나온 옷이 지금 걸치고 있는 브이넥과 청바지. 이 정도면 아주 캐주얼하고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이다.

"넌 담배 안 피워?"

"물려주면."

운전대에서 손을 뗄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선생의 제네시스는 도화의 모닝 여덟 대 값을 한다.

"아...... 그거 크루즈 컨트롤 쓰면 알아서 앞 차 따라가."

"......별 기능이 다 있네."

빠르게 기판을 살펴보았지만 뭐가 무슨 버튼인지 알아보기도 버겁다. 전방과 기판을 열심히 번갈아 주시하는 도화. 그 옆의 선생은 간단한 사용법 하나 알려주지 않고. 그저, 제 담뱃갑에서 새 개비를 꺼내어 첫 숨을 길게 빨아들일 뿐. 방금까지 피우던 담배는 재떨이에 걸쳐두었다. 삼 분의 일도 줄어들지 않은 장초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솔솔.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도화는 정말 돈지랄 가지가지 하는군, 하고 생각하다가.

선생이 긴 숨을 뱉었다. 길고 얇은 장초를 입술 사이에서 빼 든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일순 앞 좌석을 채웠다가 사라졌다.

"자."

맥락 없는 단어에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도화의 입술에 담배의 필터가 닿는다. 

아무래도 돈지랄이 아니라 단순히 불을 붙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화는 얌전히 장초를 꼬나물었다. 제 쪽의 창문도 내리곤 천천히 빨아본다.

"아, 뭐 이런 걸 피워. 고삐리도 아니고."

기묘한 맛의 멜론 향이 입안에 고약하게도 남았다. 어쩐지 담뱃갑의 디자인이 화려하니 눈에 띄더라. 설마 그 나이 먹고 달큰한 가향 담배를 피우는 작자가 있을 줄은......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떨이에 걸쳐뒀던 장초를 맛있게도 피우고 있다.

"젊게 살자~"

"양심도 없긴......"

그는 이제 막 마흔 줄에 들어선 도화보다 두세 살이 많다.

상대적으로 젊은 운전사는 코웃음을 치며 짙은 연기를 뱉어냈다.

"카지노 가 본 적 있어?"

"아니? 가 보고는 싶었는데 이상하게 기회가 없었달까. 왜 왜 왜, 동남아 쪽 가면 카지노가 아예 여행 코스로 짜여있기도 하잖아? 그런데 유선이가 자꾸만 '왜 알아서 돈을 상납하려고 하는 거야? 언니 이상해', '돈을 쓰고 싶으면 차라리 야시장에서 간식이나 사 먹어' 이러는 거 있지? 그래서 결국 한~번도 못 가 봤어."

"그래? 아쉬웠겠네."

"걔도 참 고지식해. 그러니까 변호사 같은 걸 하고 있는 거겠지?"

후진하던 차체의 움직임이 멎어 들었다. 소나무는 차의 엔진을 끄곤, 기판에 거치해 두었던 자신의 휴대전화를 회수했다. 적당한 크기의 액정에선 대국의 중계가 한창이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바둑판. 그 옆에서 작게나마 얼굴을 비추고 있는 기사들. 둥근 얼굴의 친구 녀석은 오늘도 장고 중.

왼쪽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는 아나운서들의 담담한 해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슬슬 귀가 아파져서, 조만간 바꿔 껴야겠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나와 호텔의 정문을 향해 걷는다. 나무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셔츠와 슬랙스 차림. 유신은 기다란 적갈색 원피스를 몸에 둘렀다. 레이스 하나 없는 심플한 디자인이다. 봄날에 들어섰다곤 하지만 아직 기온이 높지는 않은 터라, 나무는 동거인의 건강을 염려하여 가디건 하나를 챙겨 들었다.

"카지노 바로 옆에 레스토랑이 있댔지? 좀 놀다가, 거기서 밥 먹고 귀가하자."

"뭐 파는데?"

나무는 기억을 되새겨 본다. 레스토랑치고 특별한 메뉴는 없었다.

"양식?"

"양식~"

정보값 없는 대답에도 유신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런 점이 쿨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로비에 들어섰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제법 있다. 집채만 한 캐리어를 끌고 종횡무진 움직이는 개미 떼 같은 여행객들. 물론 그 정도로 밀집되어 있지는 않지마는. 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선다. 엘리베이터 홀에도 대기 중인 이들이 잔뜩이다.

"숙박권 이벤트에 당첨된 사람들이 많은가 봐."

"숙박권 이벤트?"

"기한이 이번 주 금요일, 그러니까 내일모레까지인 걸 쇼핑몰에서 복불복 프로모션으로 뿌렸대."

"흐음, 전혀 몰랐네."

"나도 오면서 찾아봤거든."

"하루 자고 가고 싶어?"

"어머...... 요새 일거리가 없어?"

"농담이야. 다음에 오자."

최상층으로 향하는 여정은 험난했다. 중층의 객실로 향하는 숙박객들이 많았다. 체크인 시간이라도 되나. 변함없이 바둑 중계가 한창인 휴대전화로 시각을 확인한다. 오후 두 시를 조금 넘겼다. 반상은 삼 분의 일 정도가 채워졌다.

15층의 문이 열렸다. 웅웅대는 인파의 소음이 두 사람을 덮쳐왔다.

"우와아, 사람 엄청 많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오른편이 카지노, 왼편이 레스토랑이라는 간단한 구조다. 그 외의 부대시설은, 적어도 일반 숙박객이 이용할만한 시설은, 기념사진 촬영용 전시물이 전부이리라. 무광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조형물에는 둘 다 흥미가 없다.

간략한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카지노에 입성했다.

나무는 무선 이어폰을 갈아 끼웠다. 계속 이어폰을 꽂고 있었던 왼쪽 귀가 먹먹하니 얼얼하다. 오른쪽 이어폰을 착용하곤, 잠시 중계에 귀 기울이다가, 이 정도면 적당히 집중하지 않고 흘려들어도 되겠군, 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므로.

"음료수 한 잔 마시고 시작할까?"

하고, 꽤나 신나 보이는 동행인에게 물었다.

"적당히 놀아. 난 옆에서 구경하는 척할 테니까."

"그럼, 너는 안 할 거야?"

"돈이 없거든."

선글라스 차림의 도화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늘상 덥수룩하던 머리칼은 깔끔하게 뒤로 넘겨 묶은 채. 그럴싸한 상의에 그럴싸한 가죽점퍼를 걸친 외견은 대강 날라리다워 뵌다.

"돈이라면 좀 빌려줄 수 있는데."

"됐어. 본격적으로 놀기 전에 화장실이나 다녀올게."

인공적인 불빛으로 번쩍이는 인테리어를 둘러보는 선생을 두고, 도화는 남자 화장실로 향했다. 카지노 내부에 설치된 화장실이다. 하기사, 화장실 한번 다녀오기 위해 번거로운 재입장 절차를 거치는 건 운영에 있어 마이너스 요인이겠지. 득 되지 않는 생각을 흘리며 문간을 넘는다.

화장실에는 사용객이 둘 정도 있었다. 도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장 안쪽의 칸막이로 다가선다. 창고라는 표시는 되어있지 않으나 명백하게 창고에 가까운 칸이다. 청소부가 제 도구를 보관해두는 장소이니까.

문을 열자마자 도화를 반긴 것은 직경이 50cm은 될 법한 푸른색의 플라스틱 통이었다. 그 안에 머리를 처박은 대걸레와 행주와 잡다한 청소 도구를 확인하며, 그는 문의 걸쇠를 걸어 잠갔다.

잠시 숨을 멈춘다. 소변기의 물이 내려가는 소리와 작아지는 발소리를 확인한다. 아무래도 그에게 관심을 가진 손님은 없는 모양이었다.

도화는 플라스틱 통 옆에 떨어져 있던 중간 크기의 크로스백을 집어 들었다. 빠르게 지퍼를 잡아내려 내용물을 확인한다. 종업원으로 위장하기 위한 셔츠와 조끼와 정장 바지. 비상시에 사용하게 될 튼튼한 등산용 로프. 마지막으로, 도청 도청기.

돈을 쥐여주고 가방의 밀수를 부탁했던 청소부가 내용물을 빼돌리진 않은 듯했다. '카지노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여자친구에게 고백하려고 한다' 라는 되도 않는 스토리를 철석같이 믿어준 청소부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하여간에 아직 종업원으로 변장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도화는 전원이 켜진 도청 도청기를 오른쪽 귀에 꽂곤 화장실을 나선다. 카지노에 입장하기 직전 VIP실로 이동하는 위원의 얼굴을 보았으므로, 슬슬 도청을 도청하지 않으면 밀회를 놓칠 수 있다.

선생은 어느새 블랙잭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도화는 은근슬쩍 선생의 옆에서 뒷짐을 지고 선다. 인기척을 알아챈 선생은 동행인의 쪽으로 시선을 돌려선 "재밌네, 너도 이따 해 봐?" 하며 친구인 티를 내주기도 하고. 도화는 "난 카드 놀음엔 관심 없어." 라고 맞춰주기도 하고.

'......신이 그랬잖아, 분명 ......부지에 카지노를......'

도청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쪽이 옆 방과 가까운 위치이긴 하다.

게임에 관심이 있는 척 테이블을 한번 쓱 둘러본다. 선생이 돈을 잃고 있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게 자신과 선생의 차이점이 아닌가, 하고 도화는 생각한다.

'그거? 갑자기 시공사가...... 건이 안 된다고...... 하게 됐지만 내 책임은......'

도화는 거짓 하품을 하며 테이블에서 시선을 떼어낸다. 재미없다는 표정을 한껏 만들어선 다시금 주위를 살살 훑는다. 카드 테이블과 슬롯머신 앞에 앉은 도박사들의 귓구멍을 한 번씩 살피고, 음료를 마시며 기기 주변을 방황하는 지각생들의 낯빛을 관찰하고, 테이블에 놓인 일회용 컵을 치우는 직원들의 머릿수를 헤아리고.

'......발! 웃기는 소리...... 라고! 당신 때문에...... ......님이 죽었...... !'

시제품답게 깨끗한 음질은 기대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 싸구려 기계로 들었던 라디오 방송이 떠오르는 음색이다. 그래도 적당히 대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으니 조사 용품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어폰 너머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외투 주머니라도 뒤지고 있나.

'......게 뭔지 ......아?'

순식간에 선생의 품에서 칩 열댓 개가 사라졌다. 게임 한번 더럽게도 못한다.

'......탄 스위치.'

......무슨 스위치?

'출구...... 에 폭탄을...... ......잃을 게 없... 우린!'

폭탄?

'헛소리 마...... ...출입은 엄격하게......'

제 얼굴 근육이 굳어가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돌연 얼어붙은 동행인을 이상하게 여긴 선생이 흘긋 그를 살폈다. 도청에 온 신경을 집중한 도화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헛소린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촉이 좋지가 않다. 몇십 년 간의 데이터로 체득된 위험 감지 능력이 기민하게도 작용한다.

도화는 대뜸 몸을 숙인다. 칩을 거의 다 잃은 선생의 귓가에 손을 대곤 속삭였다.

"......당신, 카드 잡는 폼 보니 어차피 못 딸 것 같은데. 슬슬 나가 있지."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떨렸다. 선생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테이블을 한 바퀴 둘러본다.

"아~ 돈을 너무 잃었는데. ATM에서 더 뽑아오든가 해야지."

선생은 너스레를 떨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딜러를 포함한 모두가 선생보다야 칩이 많은 상태였다. 꼴등의 탈주에 크게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다. 돈을 잔뜩 잃었으니 쫄려서 튈 만도 하지,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도화는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걷는다. 선생은 조금 늦은 걸음으로 그 뒤를 따른다.

"무슨 일이야?"

"빨리 여기서 나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선생에게만 겨우 들리는 음량이다.

선생의 짙은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곧이어, 동행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두 사람의 걸음은 이미 멈추어 있다.

"왜? 테이블에 지갑 두고 왔어?"

신경질적인 도화의 물음.

선생은 대답이 없다.

조명을 받아 그림자가 진, 선이 뚜렷한 얼굴.

"......뭐가 불만이야?"

"......재미있는 건 하나도 안 알려주고. 너도 참 너무하다."

확실히 그러했다. 카지노 손님으로 위장해 조사 일을 한다. 이제껏 도화가 선생에게 이야기한 정보는 겨우 이것뿐이다.

"재미는, 얼어 죽을......"

좋지 않은 표정의 선생은 도화를 지나쳐 출구 게이트로 향한다.

인간이 이상한 거로 삐지려 드네, 라고 생각한다.

돈을 잃어서 삐진 건가?

칩의 개수로 어림잡아 이십은 잃은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제가 대신 내 줄 수 있는 범위다...... 라고 생각하다가.

'......이걸 누르고 나서도...... 수 있는지...... ......이제......'

끝이다?

정말 누르겠다고?

도화는 번쩍 시선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출구 게이트까지는 열 걸음 정도가 남았다.

선생은 도화보다 두 걸음을 앞서고 있다.

도화는 무의식적으로 선생의 팔을 잡아끈다.

카지노 안쪽으로 잡아당긴다.

선생이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언제나 느끼지만 아래 속눈썹이 튀는 얼굴이다.

다리로 무게중심을 옮겨서, 가볍게 턴.

제 등이 출구를 바라볼 수 있도록.

상대가 폭발에 덜 휘말릴 수 있도록.

이래선 꼭 사교댄스를 추는 것 같지 않나......

문득 떠오른 비유에 조소가 비어 나왔다.

폭음과 함께 천지가 흔들렸다.

후방에서 밀려오는 열풍의 파괴력.

도화는 선생을 있는 대로 밀쳐 눕혔다.

3

"......형, 혀엉."

박살 난 기어와 기판을 헤집으며 팔을 뻗어든다. 얼굴을 덮은 에어백 탓에 숨쉬기가 힘들다. 그에 더하여 가슴께에 걸린 저항은, 분명 안전벨트 때문이리라. 아무튼 호흡에 어려움이 있다. 몸에 산소가 부족하다. 인지 능력이 훅 떨어진 뇌는 제 바로 옆의 운전수조차 더듬지 못한다.

"괜찮아요?"

입 안이 미끌미끌했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다른 차와 충돌하면서 혀라도 씹은 모양이다. 조수석의 도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동행인은 대답이 없다.

"......형."

새벽의 어둠이 짙게 깔린 국도. 어슴푸레한 가로등의 빛은 이곳까지 닿지 않는다. 차체의 조명은 당연하게도 나가버렸다.

도화는 있는 힘껏 팔을 뻗어 본다.

물컹이는 무언가를 한 손 가득히 쥐고 만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점도 높은 액체.

구역질이 날 정도로 따뜻한 살덩어리......

이건......

사람의 내장이다......

"......으흑?!"

눈이 뜨였다. 동시에 시선이 마주쳤다. 시야 옆쪽에 매달린 선생의 얼굴이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괜찮아?"

도화는 재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상황을 파악한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약간의 생채기가 난 선생의 얼굴을 제하면)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샹들리에와, 부분부분 그을린 채 바닥을 굴러다니는 슬롯머신의 의자, 폭발의 흔적이 선연한 벽.

겨우 어깨를 움직여 제 귀를 더듬어 본다. 도청 도청기가 만져지지 않는다. 폭발에 휘말렸을 때 어디론가 튕겨 나간 모양이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

끙끙대는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거북했다. 의식적으로 마른세수를 하다가, 아, 선글라스는 아직 콧등에 얹혀 있군, 하고 깨닫는다.

선생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 분 정도."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도화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온 몸의 관절이 비명을 질러댄다. 그래도 아주 못 움직일 고통은 아니라, 미간에 주름을 새기며 꾸역꾸역 앉은 자세로 바꾸어 본다.

"......출입구가 막혔군."

카지노의 현 상황을 둘러보며, 도화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카지노에는 입구와 출구가 하나씩 존재했다. 입장 시에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거치고, 퇴장은 출구로만 가능한 형태다.

허나 지금은 두 개의 출입구가 전부 돌무덤으로 막혀있는 것이다.

출입구 근처의 기둥에 폭탄을 설치해선 그대로 내려앉게 만든 게 아닐까. 도화는 두통이 이는 머리로 생각한다.

로컬 조직은 엇나간 부지 선정에 분개했다. 그래서, 완공된 카지노에서 폭탄 테러를 벌였다. 한 패인 위원과 신생 조직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하여간 멍청하고 단순한 새끼들이 아닐 수 없다......

사람 목숨을 우습게 아는 새끼들.

잠깐동안 보았던 꿈의 내용을 되새긴다.

'형'은 그의 조사일을 돕다가 조폭의 보복으로 죽어버렸다.

그때 죽었어야 하는 건 분명 나였다......

시야가 크게 울렁였다. 도화는 어금니를 악문다. 

"......내가 빨리 나가라고 했잖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자꾸만 의식 위로 부상한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체. 터지고 뭉개진 몸뚱아리. 앞좌석을 메운 시큼하고 지독한 악취. 시끄러운 사이렌. 눈부신 경광등.

더 이상 나 때문에 사람이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왜 그래? 우리 둘 다 무사한데."

도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선생의 얼굴을 바라본다. 뭘 그렇게 염려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마주한다.

여전히 깨끗하니 부티가 나는 얼굴이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도화는 생각한다. 저 깨끗한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들 수야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몇 개가 더 터질지 몰라."

검수를 거치지 않고 흘러나오는 말. 당신을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차라리 소장님을 모셔왔었어야 했는데. 그런 류의 중얼거림을 좀 더 뱉었던 것도 같다. 이상하게 의식이 흐리다. 자각이 옅다. 다만 크로스백 속의 내용물을 되짚는다. 이런 고층 건물에서 일할 때는 늘 비상탈출용 로프를 챙겨 다니니까. 분명 선생 한 명 정도는 남몰래 내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야."

만들어 낸 낮은 톤의 목소리. 도화는 그제야 선생과 시선을 맞추어본다. 어느샌가 쓸려나간 미소.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검고 짙은 눈동자.

당신의 진지한 얼굴은 꽤나 드문데......

"......여기가 깡시골도 아니고. 카지노면 원래도 경찰 요주의 구역이야. 술 먹고 시비 붙는 사람들 때문에 하루에 한 번씩 출동할 텐데."

도청 도청기로 엿들었던 접견의 내용을 되감아 재생한다. 깡패 자식들은 화가 많이도 나 보였다. 고작 카지노에 사람 좀 가둬둔 거로 성이 차진 않겠지. 도화는 느리게 고개를 젓는다.

"......이 카지노, 세우는 과정에서 조폭이랑 마찰이 있었어. 이건 분명 그 보복일 거고......"

그에게는 처음으로 밝히는 전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백스토리를 말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나. 주위가 신경 쓰여 약간 허리를 숙인다. 두 사람의 머리가 조금 가까워지는 효과가 있다.

"그러니까, 그 새끼들 딴엔 인명피해가 크면 클수록 좋겠지. ......몇 개 더 터트리고, 경찰이며 구급차가 못 오게 방해도 하고. .......그럴 거라고."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신경을 쿡쿡 찔러대는 끔찍한 화상의 탓이었다. 생각의 흐름이 뚝뚝 끊겨서, 발화할 문장을 조립하는 데 장애가 된다.

그런데도 선생은 대충 이해했다는 얼굴을 해선.

"흐음... 만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겠네."

번쩍이는 손목시계를 몇 번 내려다 보더니,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어 든다. 액정 위에서 가볍게 움직이는 손가락. 그 움직임에 망설임 하나 없는 걸 보니 뚜렷한 목적이라도 가지고 있는 성싶다.

"......뭐해?"

선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귓가에 휴대전화를 가져다 댈 뿐.

아, 동거인에게 연락을 넣는 건가? 도화는 일순 생각한다.

"어, 탐정아! 난데, 오늘 외박할 거 같아서~"

예측이 잘도 맞아떨어졌다. 하기사 이런 상황에서 대뜸 전화를 걸 상대가 달리 있을까. 도화는 입을 다문 채 상대를 관찰한다. 진지한 얼굴로 애교스러운 말투를 구사하는 꼴이 언밸런스하여 웃긴다는 감상을 갖는다.

웃긴다는 감상을 가졌다. 

그것이 아무래도, 제 정신이 말짱하지는 않다는 방증이지 않나. 그야 지금은 상당한 비상 사태이니까. 목숨이 걸린 상황이니까. 주변을 열심히 살펴선 활로를 찾아야만 할 것인데. 이상하게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근처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당장 시야 중심에 위치한 선생 외의 배경은 죄다 블러 처리가 되어서, 꼭, 꿈 속의 광경 같아서......

"퇴근하고 저녁 맛있는 거 먹어, 이따가 또 전화할게~!"

이따가 또 전화할 수 있을까?

선생의 머리 위로 콘크리트가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한다. 

욕지기가 일어서, 도화는 손으로 입가를 누른다.

통화가 끝났다. 선생은 돌연 도화의 손목을 잡아선 벌떡 일어난다. 별 말도 않곤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무의식적으로 제가 앉아있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청 도청기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현실 감각이 지나치게 옅다. 유리되어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애를 써 본다.

카지노 안의 사람들은 제법 분산되어 있다. 워낙 공간이 넓은 터라 그룹 간의 거리가 좁지는 않다. 남들에게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구석진 곳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선다. 벽 앞에 서 있는 슬롯머신과 빈 테이블이 엄폐물 역할을 하는 위치.

"그래서, 오늘의 방문 목적은 결국 뭐였던 거야?"

도화는 벽에 등을 기댄다. 턱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뒤통수마저 벽에 콩, 하고 부딪혀 본다.

"......VIP와 조폭의 접견 엿듣기."

선생은 그 옆에 수직으로 기대어 선다. 허리를 살짝 숙여선 동행인과 같은 눈높이를 만든다.

"VIP라면, 누구?"

귓가에 소근대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

"카지노 설립과 관련된 위원."

"여기서 어느 아저씨?"

"......이미 한참 전에 접촉해서, 옆의 VIP실로 이동했지."

"흐음... 하긴 VIP가 휘말릴 리 없겠지."

눈동자를 한번 빙글 굴리는가 싶더니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는다. 갑작스런 테러로 웅성이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들은 구석에 숨은 남자 둘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선생을 혼자 탈출시킨 후 취할 행동 역시 고민하여 본다. 도청 중인 조직원은 찾지 못했지만 도청 도청에 성공하긴 하였으니, 절반의 보수는 받을 수 있을까. 맥락 없는 생각이 끼어들었다. 그러나 부러 떨쳐낼 기분은 들지 않아서.

"......야, 나 봐봐."

선생이 속삭였다. 아무래도 그 얼굴을 쉬이 볼 수가 없다.

"왜?"

"이쪽 봐봐."

뻔한 죄책감이 자꾸만 평정을 파먹는다.

어깨를 잡혔다. 그 손에 힘이 실린다. 제 쪽을 향하도록 억지로 잡아끌기에, 도화는 아득바득 고개를 돌려 시선이 맞지 않도록 한다. 어린애 같은 반항이라는 건 자신도 알고 있다. 다만, 지금은 평소처럼 머리가 팽팽 돌아가질 않아서, 행동 패턴이 참으로 납작해져만 가서.

선생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벽에서 몸을 떼어냈다. 긴 다리로 몇 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뎌 도화를 바라보는 위치에 선다.

그리곤 상대를 냉큼 껴안았다.

익숙하지 않은 체향이 순간 진하게 풍겨서, 도화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야?"

이례적일 정도로 빠른 상황 파악.

"여, 여기 사람이 몇인데. ......떨어져!"

얼굴에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간질간질한 도파민의 탓은 아니었다. 이십 년 전에 말라버린 호르몬의 탓일 리 없지 않나. 도화는 그저 당황스러워서, 혀를 깨물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다.

그러나 선생은 도화의 반응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괜찮아? 어지러워?"

라며 다정하게 물어오는 것이다.

......이렇게 나온다면 나로서는 이길 방도가 없다. 도화는 멍한 머리로 생각한다.

사람의 체온은 사람에게 알맞은 정도로 따뜻하다. 콧등에 상대의 어깨가 닿는다. 두 사람은 키 차이가 제법 나는 편이니까. 고개를 들어야만 서로의 얼굴을 살필 수 있다. 그럴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으나.

빠른 리듬의 심장 고동을 자각한다. 색색댈 정도로 거칠어진 호흡을 눈치챈다. 계속 이러고 있어 봐야 좋을 건 없다. 도화는 사고를 지속한다. 이마며 콧잔등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매끈한 원단. 결코 저렴한 옷은 아닐 테지. 당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나가라고 하면, 빨리빨리 나갈 것이지."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투였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문장을 겨우 머릿속으로 끌고 와 곱씹는다. 

"강성훈이었으면 그냥, 등 떠밀어버리면 되는데."

그 애는 내 말을 잘 들으니까...... 성훈의 둥그런 얼굴을 떠올린다. 엉덩이라도 걷어찼음 깜짝 놀라선 게이트 밖으로 도망쳐 나갔겠지. 당장 끌어안고 있는 그처럼 중간에 멈추지도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나가서, 나를 걱정하기만 했을 텐데. 그랬으면 만사 오케이였는데.

등을 가볍게 쓸어내리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선생의 몸 역시 뒤따라 떨어진다. 도화는 다시 벽에 기대어 본다.

"성훈이랑 오려고 했어? 걘 정말 한두 푼으로 안 끝났을걸."

선생은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에겐 그런 표정이 어울린다.

"...100원짜리 슬롯머신 앞에 앉혀두려 했어. 할 줄도 모를 테니까..."

레버를 누르고 결과를 확인한다. 성훈에게는 그 정도의 간단한 조작이 어울린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선생과 시선이 마주치고야 만다. 의식적으로 행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도화는 재빨리 시선을 옆으로 치워버린다.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나 짓고 앉아 있긴......'

......어쨌거나 멀끔한 그의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들 수야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금 복기한다. 슬슬 정신을 차리고, 이 인간만이라도 밖으로 빼내야 한다...

"......이런 데 데려와서 미안하다."

도화가 중얼댔다.

그러니 선생은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나? 내가 따라오겠다고 한 걸 뭐."

천연덕스럽게 무마하고야 만다.

"네가 데려가는 데가 위험하겠거니, 하고 온 건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거 아냐?"

......나도 몰랐지만. 맥없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너도 몰랐는데 네 잘못일 리가."

잠시간의 침묵. 들려오는 건 생판 남들의 웅성이는 소리 뿐.

도화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다가, 폭발에 휘말려 엉망이 된 스타일링을 깨닫는다.

"흐음, 가만히 있는 것도 심심한데 다른 사람한테 말이나 붙여볼까?"

부러 꾸며낸 밝은 목소리가 조용하지 못한 적막을 깨뜨렸다. 

찰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선생의 쪽으로 옮긴다. 여전히, 장난스런 미소가 남아있는 말갛고 잘생긴 얼굴.

"......난 비상구가 있나 찾아보고 올게."

미리 살펴본 도면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도화는 그런 말을 삼켰다.

선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쪽으로 흩어졌다.

4

왜 이렇게 된 거지?

소나무는 통창 너머의 풍경을 내려다 보며 생각했다. 애매한 휘도로 반사된 카지노 안의 모습이 바깥 감상에 약간 방해가 된다.

친구의 경기는 슬슬 종막을 향해 가고 있다. 완벽한 집을 지은 백돌이 조명을 받아 번들번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흐름에서 질 일은 없다. 그렇다면 슬슬 중계를 꺼도 될 텐데, 굳이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으려 드는 건 어째서일까. 당면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그 따위 이유는 아닐 것이었다. 그건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나무는 뒤를 돌아 고립된 카지노의 상황을 살핀다. 출입구는 아직 콘크리트 무더기로 막힌 채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1층의 난잡한 교통 상황을 떠올린다. 사람과 차가 오 대 오로 섞인 도로에는, 확실히 소방차도 구급차도 접근하기 어려우리라.

기포가 올라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당면한 상황을 정리한다.

폭탄이 터졌을 땐 솔직히 놀랐다. 그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대체 누가 휴양지에서 폭탄 테러를 마주할 예상을 하겠는가. 이를 악물어 일차적인 충격을 경감시켰다. 그의 동행인이자 동거인인 유신은 심장이 좋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쇼크를 받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유신을 살필 의무가 있었다.

급하게 고개를 돌려 유신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슴을 부여잡고 웅크려 있기에, 나무는 재빨리 몸을 낮춰 두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 약은, 백에 있어?"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 탓에 표정을 살피기 어렵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가쁜 숨소리만은 명확하게 느껴진다. 나무는 급한 대로 그녀의 핸드백에 손을 댄다. 삼 초도 지나지 않아 플라스틱 재질의 약통을 손에 쥐었다.

뚜껑을 열어 그녀의 손에 니트로 글리세린을 쥐여주려다가, 한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불안해 보여서, 나무는 결국 제 손으로 약을 먹였다. 

습기 있는 입술이 손바닥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상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상태를 관찰한다. 불규칙한 떨림이 이윽고 잦아들었다.

"......괜찮아?"

"아, 으음......"

뒤집힌 목소리로 몇 번 신음하는가 싶더니, 숨을 서너 번 깊게 들이킨다.

"......아아, 죽는 줄 알았네. ......방금 뭐야? 폭발?"

"조명 같은 게 터진 건 아닌 것 같은데..."

"대피해야 되는 거 아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출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콘크리트 파편으로 막혀버린 통로.

유신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갇혔나 봐......"

"응, 그렇게 됐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대."

"폭탄 테러인 것 같은데."

"어? 폭탄?"

"...출입구가 다 막혔잖아. 이건 꽤 의도적이지."

"...폭탄 테러는 보통, 많이 죽이는 게 목적이잖아?"

"응."

"그럼 출입구가 아니라......"

유신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휘황찬란한 디자인의 샹들리에 열 몇 개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매달린 채다. 유리로 세공되어 조명 빛을 아름답게 산란시키고 있다.

"천장에 터뜨렸으면 수십 명은 죽었겠는데. 안 그래?"

"일단 못 나가게 한 다음에 천장을 터뜨릴 생각이라면?"

"어머......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야 되나."

"으음...... 일단 최대한 가장자리에 있자."

그리하여 두 사람은 카지노 벽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통창으로 이루어진 벽이라, 당장의 사고만 아니었다면 나름 괜찮은 무드를 제공했을 법하다. 

근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료 바가 바로 곁에 있다. 썩 나쁘지 않은 위치다.

"맥주라도...... 아, 니트로 먹었지?"

"으응. 그럼 콜라라도 마셔야지, 뭐."

"내가 받아올게."

"난 화장실 좀 다녀올게."

화장실은 출구 근처에 있다. 혹여 콘크리트 파편에 다치지는 않을까. 나무는 약간 염려되었지만, 그렇다고 화장실까지 같이 들어갈 순 없는 일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 바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기가 끝났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바둑판이 페이드 아웃되며 사라진다. 이윽고 클로즈업 된 기사 두 명의 얼굴. 둥그런 볼살의 친구 녀석은 살짝 밝은 표정이다. 이겼으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망했네. 하여간."

오른쪽 귀의 무선 이어폰을 빼며 중얼댔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다시 한번 속으로 읊어봤지만, 뾰족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예상도 못한 일이었으니 해답이 나올 수가 없긴 한데.

"얜 또 왜 안 와."

유신이 화장실에서 돌아오진 않는다. 기껏 가져온 콜라의 김이 다 빠지지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하다가, 차라리 화장실 앞에서 이름을 불러볼까 고민하던 와중,

"뭘 그렇게 재밌게 보세요?"

바로 뒤에서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무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다. 신선한 산소를 뇌에 공급하여, 얼굴 근육을 최대한 컨트롤하는 기작이다.

천천히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역시 처음 보는 남자가 뻔뻔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선이 뚜렷한 미남이다. 나이는 얼추 마흔을 좀 넘을까. 저보다 한두 살은 많아 뵈었다.

"아...... 바둑 경기를 좀."

"이야~ 바둑이 그렇게 재밌다더니 대단하네요. 건물이 무너지게 생겼는데..."

"뭐... 무너지면 죽는 거고. 별 수 있나요?"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본다. 남에게는 거의 자연스러운 미소로 보이리라는 것을, 나무는 알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응원하는 쪽이 이겼나?"

"아, 네. 제 친구 경기라 좀 유심히 봤습니다. 막판에 몇 수로 판세를 바꾸더니, 그대로 역전승하더군요."

거짓말이었다. 친구는 초장부터 승기를 잡았으니까. 

어째서 별 것도 아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걸까.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

"그런 거라면 보기 드물게 재밌었겠는데요. 그런 일이 흔합니까?"

남자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무 옆의 의자를 빼어 앉는다. 슬슬 유신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만다. 이런 류의 즉석 대화 스킬 레벨은 그녀의 쪽이 월등하다. 적어도 나무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바둑은 수 싸움이니까요."

상대의 기보를 탐독하면 그의 전법을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

그러나 동급생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상대의 기보를 읽었다면 응당 놓아야 할 수를 전혀 놓지 않았다. 엉뚱한 곳의 머리를 누르고 집을 짓다가, 결국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패배했다.

나무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의 수를 읽지 못하면 그대로 함정에 빠지는 꼴이니... 생각보다 흔한 편이죠?"

반상 앞에서 자리를 뜬 지 이십 년인 지금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발화와 생각이 분열되는 일은 꽤 흔하다. 나무의 혀는 아무렇지 않게 문장을 조립해 낸다.

"그렇게 중요한 경기가 있었는데, 여기는 어쩌다 오셨습니까?"

"에이, 중계야 어디서든 볼 수 있으니까요."

발화와 생각이 분열되는 일은 꽤 흔하다. 나무의 혀는 아무렇지 않게 문장을 조립해 낸다.

"친한 친구가 카지노에 가 보고 싶다고 해서요. 같이 왔습니다."

고개를 돌려 화장실이 있는 부근을 바라본다. 유신의 모습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안에서 쓰러지기라도 했나. 흐릿한 불안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감각을 인지한다.

"잠깐 둘러보고 온다더니 어딜 갔는지 모르겠네."

어째서 별 것도 아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걸까.

남자는 고개를 한 번 갸웃댔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 검고 검은 눈동자는 큰 편. 수수한 척하지만, 걸친 옷은 누가 보아도 명품. 겉으로 드러나는 직업 표지는 얼마 없음. 기껏해야 중지의 굳은 살 정도. 지금은 거의 아문 상태. 인터넷 문서가 표준 규격이 된 이 시대에 수기로 필기를 많이 하는 직업을 하나 꼽자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교육 기관의 선생.

"같이 찾아볼까요? 폐쇄됐다기엔 넓어서 실감이 안 나네."

남자는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무는 약간의 안도를 느낀다.

"아아, 아뇨. 전파가 끊긴 것도 아니니까요. 전화하면 금방 나타나겠죠? 괜찮습니다."

조금 전까지 잘만 나왔던 바둑 중계를 떠올린다. EMP를 터뜨리지 않은 건 확실했다.

홀을 둘러보았다. 유신의 모습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하하, 그럼 저는 친구를 좀 찾으러 가겠습니다."

남자는 가볍게 목례하며 자리를 떴다. 나무도 따라 고개를 까딱인다. 

그는 무의식 중에 제 눈꼬리가 아래로 향해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설마 폭탄 같은 무식한 카드를 들고 나올 줄은......"

"상황은."

"접견에 나왔던 새끼들은 생포했습니다. 대가리는 없고, 간부만 세 명."

"그래서?"

"중앙 천장에 설치된 폭탄 두 개가 더 터질 거랍니다."

"잡았다며."

"......시한폭탄이라 내부에서 제거하지 않는 이상 멈출 수 없답니다."

"하아......"

"최대한 벽 쪽에 붙어계세요, 보스."

"다른 건?"

"VIP실 밖에서 대기하던 애한테 들었는데, 도청에 혼선이 있었답니다. 저희 무선을 다른 파 따까리들이 훔쳐들은 거 아닌가 싶습니다."

"이상하네."

"이쪽을 견제하는 놈들은 이제 없을 텐데 말이죠."

"정보상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그쪽일 수도 있겠네요."

"응."

"......끊겠습니다. 1층 교통 정리는 어떻게든 해 볼 테니, 몸조심하세요."

"어."

무선이 끊겼다.

유신은 뚜껑 덮은 변기 위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5

도화는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었다. 

흰 와이셔츠에 검붉은 조끼, 넥타이, 검은 정장 바지. 반사율이 심한 무테 안경. 설마 종업원으로 변장까지 할 일은 없을 거라 예상했지만, 인생이 어디 예상대로 흘러가는 법이던가. 혹시 몰라 챙겨온 옷가지를 몸에 쑤셔넣으며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해 말끔하게 묶었다. 자연스럽게 청소도구칸의 문을 열고 나와 화장실 밖으로 향한다.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는 직원들은, 어림잡아 스무 서너 명 정도. 카드 테이블에 딜러가 한 명 씩 있었으니 대강 납득이 되는 숫자다.

도화는 아무렇지 않게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간다. 폭탄 테러라는 초유의 상태를 대처하기 위해 다들 홀로 나간 모양인지, 인기척은 적다.

긴 복도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 벽에 문이 두 개 씩 달려있다. 완전히 닫힌 문은 없다. 모두 조금씩이나마 열려 있다. 빛이 새어 나오는 곳도 있고, 어두컴컴한 곳도 있고. 이전 보았던 도면을 떠올린다. 이 복도는 기역 자 모양이다. 정면 가장 안쪽에서 왼쪽으로 커브를 튼다는 말이다.

우선 복도 제일 안쪽까지 걸음을 옮겨 본다. 본래 비상구란 복도 끝에 있기 마련이니까. 도면에서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도화는 희망을 잃지 않기로 한다.

희망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기역 자 복도의 막다른 벽엔 어두침침한 조명만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건물 구조 상 방 안 쪽에 비상구가 있을 리는 없는데.'

막다른 벽을 마주 보고 선 채 도화는 잠시 머리를 굴려본다. 카지노의 도면을 머릿속에 그린다.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벽이나 바닥을 뚫는 비밀통로가 있지 않는 한 무리다. 그리고 지금 그런 걸 찾을 여유도 없고. 다짜고짜 방을 탐색하는 건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다.

"거기서 뭐 하세요?"

대뜸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화는 평정을 가장하며 고개만을 슬쩍 뒤로 돌려본다. 아담한 키의 직원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 안경알은 빛을 지나치게 반사한다. 그러므로, 이런 각도에서는 제 눈을 노출하지 않을 수 있다.

"아, 인이어를 떨군 거 같은데 어딨는질 모르겠네."

"인이어요? 어, 남는 거 하나 드릴까요?"

"괜찮아요. 홀에서 떨어뜨린 것 같기도 하네... 좀 찾아보고 올게요."

도화는 짐짓 웃으며 몸을 돌린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상대를 지나친다.

직원은 그를 따라오지 않았다.

"스태프 공간에도 비상구는 없었어."

두 사람은 이전의 장소로 복귀했다. 벽 앞에 서 있는 슬롯머신과 빈 테이블이 엄폐물 역할을 하는 위치. 다만 지금의 도화는 홀을 등지고 서 있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점.

"......역시 화장실 창문 타고 나가는 수밖에 없나."

"네 말 대로라면 거긴 또 누가 지키고 있지 않겠어?"

1층의 교통 혼잡은 조폭들이 고의로 일으킨 것이다. 경찰과 119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인명 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초조한 표정의 도화는 고개를 젓는다.

"갈아입으면서 내려다 봤는데, 거긴 아직 아무도 없었어. 애초에 그쪽은 도로가 없어서 차도 못 들어와."

"옷은 또 언제 싸 왔대."

선생은 피식 웃었다.

"로프도 있거든?"

도화도 따라서 피식하고 만다.

"목적이 뭐야. 일단 내가 살고 보는 거?"

"......잘 알고 있네."

"그렇지? 모두가 창문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으니까. 근데, 여기 너무 높지 않아?"

이곳은 15층. 안전 장비 없이 낙하한다면 당연히 죽는다. 하지만 도화의 크로스백에 담긴 로프는 무려 클라이밍용 자일. 더하여 고가의 하네스. 대놓고 죽으려 들지 않는다면야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장비다.

"로프만 잘 고정하면 당신 정도는 죽어도 안 떨어져. 라디에이터에 꽉 묶을 거고, 나도 보조로 잡고 있을 거야."

"......의외로 귀여운 데가 있군..."

대체 어디가 귀엽다는 건지. 진지하게 작전을 읊던 도화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겨 본다.

"너 두곤 안 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화보 같은 미소를 띤 선생의 얼굴을 노려본다.

"......나도 그 뒤에 내려갈 거야. 헛소리 말고 따라와."

도화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화장실 쪽으로 향한다. 선생은 가만히 조끼 차림의 도화를 뜯어보다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근데 말이야, 죽는 게 싫다면 화장실에 숨어 있으면 그럭저럭 괜찮지 않으려나?"

선생이 대뜸 화장실 문간에 서서 중얼댔다. 아무도 없는 타일 투성이의 공간에,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살짝 반사된다.

도화는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 선생을 흘긴다. 분장 테이프로 고정된 두 눈은 평소보다 덜 날카로워 뵌다.

"......무슨 소리야."

"이런 시설은 사람을 최대한 오래 붙잡는 게 목적이니까. 이거 봐, 화장실이 널찍하니 좋네."

태연자약한 얼굴로 고급스런 인테리어의 화장실을 빙 둘러본다. 줄 지어 선 소변기 위에 하나씩 붙어있는 앤티크 스타일의 조명.

"뭐어, 지진 났을 때랑 비슷할 거 같은데."

"......안, 가겠다고?"

청소도구함의 손잡이를 잡던 도화의 움직임이 멈춘다.

크게 뜨인 두 눈의 눈동자만이 정처 없이 흔들린다.

"정장 귀엽네?"

살풋 휘어진 눈가는 여전하게도 아름다운 각을 이뤘다.

그 미소를 보고, 도화는 깨달았다.

선생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다. 인생에 스릴이 없으면 아쉬워하는 종자다.

아, 더 이상 설득할 수 없구나. 이 사람.

순간 시야가 크게 울렁였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를 악물면서 정신을 차렸는데. 누굴 살리려고 애써 몸을 움직였는데...

"......다시..."

"응?"

"......다시 갈아입고 올게."

"그대로 있어도 괜찮지 않아?"

"변장한 게 들키면, 곤란해."

억지로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눈에는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이상한 꼴일지도 모르겠다.

"누구한테?"

선생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도화는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본다.

"뭐... 눈치빠른 다른 직원들한테."

"이 안에서 입는 거야?"

청소도구함의 문을 열었다. 둥그렇고 거대한 플라스틱 통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칸 자체가 넓기에, 성인 두 사람이 들어가도 괜찮은 정도의 공간이긴 하다.

"...갈아입을 테니까 나가 있어."

"화장실에서 둘이 나오면 수상하니까?"

선생이 쿡쿡 웃는다. 도화의 입꼬리는 틀어 올린 채로 굳어버렸다.

"...수상하지 않게 밑밥 까는 방법도 있긴 하지."

"뭔데?"

"스스로 생각해 봐."

도화는 선생을 가볍게 밀쳐내곤 청소도구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안의 걸쇠를 잠그곤 아까의 복장으로 재빨리 갈아입는다. 이상하게도 몸 군데군데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자꾸만 헛손질 헛발질을 해야 했지만.

삼 분도 지나지 않아 가죽재킷 차림이 된 도화였다.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듯한 크로스백을 손에 들었다. 번쩍이는 무테안경 대신 생채기가 난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침통하고 심란한 표정은 선글라스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대로 괜찮겠어? 생각한 건 이게 다야?"

도화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툭 고개를 떨궜다.

가볍지만 밀도가 높은 한숨.

"......당신은 내가 목숨 걸고 지키니까 걱정하지 마."

"......어디 아파? 내가 그렇게 소중한 사람은 아니었,"

대답도 다 듣지 않고 화장실을 나섰다.

선생은 도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괜히 입맛이나 다시고 말았다.

6

"몸이 안 좋아? 화장실에 뭐 그리 오래 있었어."

"으~음. 역시 아까 쇼크를 너무 받았나봐..."

유신은 잔을 기울였다. 김이 살짝 빠진 콜라는 역시 별로 맛이 없다.

"...화장실에서 쓰러졌었던 건 아니지?"

"아하하, 그런 거 아냐. 그냥, 심장이 너무 뛰어서......"

"너무 뛰어서?"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어. ......여긴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잖아."

길고 풍성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콜라를 새로 받아올까. 그런 시시한 생각을 하다가, 마주 앉은 나무와 시선을 맞추어 본다.

"어머, 뭘 그렇게 걱정해."

"걱정 안 해."

"눈은 마음의 창이라잖아."

"흐음, 이젠 독심술도 해?"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나무였다. 멋쩍은 얼굴을 해선, 맥주가 반쯤 남은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간다.

"죽으면 죽는 거지 뭘. 나, 이 나이까지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야~"

"내가 귀찮게 돼."

"같이 살고 있어서?"

"응. 변호사님 얼굴 다시 보기 무서워."

유신의 동생인 유선의 이야기였다. 유선과 나무는 별 거 아닌 우연으로 얼굴을 마주했었다.

집 앞 편의점에서 두 자매가 잠시 만났던 적이 있었다. 편의점 밖 간이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한 캔 씩 마셨던 모양이었다. 언니를 끔찍이도 생각하는 유선은 알딸딸한 유신을 현관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자 나무는 아무 생각 없이 신발장 앞까지 나왔고, 언니를 닮은 듯 닮지 않은 유선과 처음으로 조우했다.

"......언니, 남자랑 동거해?"

라며, 경악하던 얼굴을 나무는 잊을 수가 없댄다. 눈매 하나는 참 붕어빵이라고도 했던가. 그 점은 유신도 동감이었다.

"으음, 그건 맞아. 하물며 내 장례식에서 송 군을 보면......"

"맞아 죽을 것 같아."

"맞아."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기울였다. 짧은 침묵이 이어진다.

"아, 김이 다 빠져버렸네. 맛없어~"

"새로 한 잔 가져다 줘?"

"그런 김에 송 군도 더 마시려 그러지?"

"돌아갈 땐 네가 운전한다면서."

"아하하, 그랬지. 기대되네~ 이게 얼마만의 고속도로야."

유신은 운전을 좋아했다. 내 몸이 120km/h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엄청 신나지 않아? 라는 물음에 나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하여튼 운전대를 잡다가 발작이라도 일어나면 큰일이기에, 유신은 늘 조수석에 누군가를 앉혀두어야만 했다.

나무는 두 손에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 라는 짧은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고.

넓은 4인용 테이블에 홀로 남았다.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천천히 되짚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명확한 것은, 일단 이러고 앉아 있으면 죽지는 않는다는 것.

그래, 죽지만 않으면 된다.

아니, 어쩌면 죽어도.

그건, 또 그것대로 재미있는 일일지도.

죽음으로 하여금 세계의 복잡도를 한 단계 올린다.

절대로 재미없을 수 없는 일이다.

나무는 거품이 적당히 담긴 잔을 들고 돌아왔다.

"와아, 탄산이 톡톡 튀는 게 맛있어 보이네~"

"진작 다시 가져다 달라고 하지 그랬어?"

"아하하, 깜빡했지 뭐야."

"그게 깜빡할 일이야?"

"나이 먹어서 그래."

"흠, 그건 그렇지."

두 사람은 올해로 서른 아홉이다. 객관적인 젊음의 나이대에서는 벗어났다.

기쁜 표정으로 콜라를 꼴깍이고 있으니, 별안간 처음 보는 남자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제법 잘생긴 남자다. 뚜렷한 조형이 언뜻 보면 영화배우처럼 보이기도 하고. 유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를 조목조목 뜯어보기 시작한다.

"아까 말씀하시던 친구 분이?"

나무에게 그리 묻곤 유신을 향해 한번 눈웃음을 지어왔다. 대충 봐도 비싼 옷에, 기품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모습. 치장품이야 돈만 있으면 누구든 살 수 있지만. 몸에 밴 매너와 기품은 쉽사리 흉내 낼 수 없는 법이다. 어머, 이 사람. 꽤 좋은 집안 아들인 모양인데. 유신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아, 맞습니다. 화장실을 갔다 왔다네."

나무도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유신도 우아하게 눈가를 접어 웃어본다.

"음료 바는 멀쩡한 듯하니 선생님도 한 잔 하시죠."

7할 정도가 담긴 맥주 잔을 들며 권했다. 남자는 연한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지 않은 채, 그럴까요, 하며 음료 바로 향한다.

"......아는 사람이야? 우와, 엄청 잘생겼는데."

상반신을 테이블 쪽으로 숙이곤 물었다. 나무는 한 번 픽, 웃더니, 똑같이 상반신을 숙여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아니? 아까 갑자기 다가와선 말 걸던데...... 심심하신가봐."

남자는 잔에 투명한 탄산음료를 담아선 다시 테이블로 다가온다. 두 사람은 급히 평범한 자세로 되돌린다.

잘만 걸어오던 남자가 발을 헛디뎌 휘청인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으앗!"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음료의 삼 분의 이 가량이 상의에 쏟아지고 말았다. 유신은 저도 모르게 앗, 하는 탄식을 뱉고 만다. 저거 분명히 비싼 브이넥일 텐데.

"앗, 이런...... 친구가 갈아입을 옷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잠시만요?"

남자는 거의 비어버린 잔을 테이블에 놓아두곤 급하게 자리를 떠 버렸다.

유신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무를 바라본다.

나무 역시 이상하다는 얼굴로 유신을 바라보고 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무였다.

"......갈아입을 옷 같은 게 왜 있지?"

"그러니까. 갈아입을 옷이 왜 있지?"

나무는 고개를 돌려 눈으로 남자의 자취를 쫓는다. 유신 역시 그 시선을 따라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본다. 

단선으로 전원이 꺼진 슬롯머신 앞으로 다가가는가 싶더니, 슬롯머신 앞 의자에 앉은 남자에게 무어라 말을 건넨다. 방금 언급했던 친구인 모양이다. 등을 보이고 있어 잘은 짐작할 수 없지만 아마 키가 작은 남자 아닐까. 한쪽 어깨에 크로스백을 메고 있다.

"크로스백이네?"

"크레딧을 담아두려고 가져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긴 들었는데."

"어머, 도박을 얼마나 하려고......"

"카지노 죽돌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 친구라는 사람도 죽돌이?"

"아니겠지. 저 안에 옷도 있다는 거 보면."

"으음, 왜 가방에 옷을 담아 다니는 걸까?"

남자와 그의 친구는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자 화장실과는 정반대 편에 있다. 즉, 입구 근처가 된다.

"갈아입으려나 본데."

"훔쳐 봐 볼까?"

"그래 줄 거야?"

"나도 궁금하거든. 대화하는 거라도 들으면 뭐라도 가닥이 잡히겠지."

"역시 행동력 있는 남자가 좋아~"

나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반쯤 남은 맥주가 잔 안에서 가볍게 출렁였다.

7

"......가지가지한다 진짜."

선생의 축축하게 젖은 브이넥을 보고 처음으로 던진 말이었다. 색은 없지만 단내가 풀풀 풍기는 걸 보니, 사이다라도 쏟은 건가.

"아하핫...... 아까 입었던 셔츠 좀 빌려 줘."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선생의 잘난 얼굴을 잠시간 올려다보던 도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곤 비틀비틀 의자에서 일어섰다. 푹신한 의자라 어쩐지 일어나기 아깝다. 두 사람은 터덜터덜 남자 화장실로 향한다.

"그냥 물로 씻지? 내 옷은 맞지도 않을 텐데."

선생과 도화는 어림잡아 머리 하나 정도의 차이가 난다. 팔과 상반신의 길이에는 분명 유의미한 차이가 있으리라.

"그게 나으려나... 셔츠도 안 맞을까?"

화장실에 발을 들였다. 막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남자가 밖으로 나가던 참이었다. 도화는 가장 안쪽 칸의 문을 열어선 선생을 밀어 넣는다.

"일단 입어봐."

크로스백에서 셔츠를 꺼내어 건넨다. 평범한 디자인의 흰 와이셔츠. 선생은 팔자 눈썹을 해선 문을 닫았다. 나름의 미안해하는 표정인 듯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도화는 인상을 찌푸린 채 선생의 몸을 위아래로 훑는다.

"어때?"

누가 봐도 기장이 짧았다. 하지만 몸은 제대로 가리고 있으니 참아줄 만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실로 애매하고 아슬아슬한 감상에 도화는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고야 만다.

"......그냥 벗어."

눈을 가늘게 뜨곤 읊조렸다.

"아, 좀 가까이 와서 봐 줘~"

선생은 좌변기칸의 중간 즈음에 있다. 칸 자체가 널찍해서, 가까이 가려면 적어도 문간까지는 가야 한다.

"아니, 가까이서 보나 멀리서 보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가가게 되는 건 왜일까. 물론, 가까이서 보아도 봐주기 애매한 기장인 것은 명확했다. 문간에 선 도화는 더더욱 인상을 찌푸린다.

"......짧아서 웃기다니깐."

선생의 긴 팔이 그의 뒤쪽을 향한다. 무심코 손목으로 시선이 움직인다. 아, 역시 소매가 좀 짧은데. 입을 거라면 차라리 소매를 걷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나.

문이 닫혔다. 걸쇠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멍하니 소매를 바라보던 도화는 겨우 정신을 차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 애써 사고회로를 발전시켜 본다.

"......뭐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등에 닿는 건, 무겁고 세련된 모양의 칸막이 문. 도화의 체중이 실려 작게 덜컹이는 소리가 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생은 와락 도화를 껴안았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겨서,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반쯤 벗겨졌다. 저항하려 팔꿈치를 들었다. 퍽퍽 내려찍으려 들었다. 어깨가 묶인 초근접 상태이기에 대미지가 거의 들어가질 않았지만.

"이, 이거 안 놔?!"

등이 벽에 닿았다. 싸늘하게 식은 타일의 냉기가 전도되어 온다.

"네가 그랬잖아."

"뭘?!"

"화장실에서, 둘이 나와도 수상하지 않게 보이는 법."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갑작스런 질문에 사고가 멈추어서, 도무지 머릿속 필름이 돌아가질 않는다.

잠시 저항이 멈춘 사이 선생은 도화의 선글라스를 벗겨들었다.

"아, 눈......"

부셔,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입을 틀어막았다. 녹진한 혓바닥이 남의 구강을 침범한다. 손목을 잡히고, 턱을 또 잡혀서, 얌전히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이 가해진다.

느긋하게 입안을 한번 휘젓고 나서야 혓몸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게 정답이지?"

선생은 미세하게 맞닿은 입술로 속삭인다.

푹 익어버린 머리는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한다.

칸막이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맞췄다.

"어때?"

기대로 빛나는 유신의 두 눈을 보고, 나무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싶지 않은 남의 프라이버시를 알아버렸으므로. 별로 되짚고 싶지 않다. 구태여 한 장면 한 장면 복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게이야, 저 사람들."

"응?"

잔을 기울이던 유신의 움직임이 멈췄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둔다.

"양변기 칸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어."

"......어머. 정열적이네... 이런 상황에서."

"옷도, 아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미지를 떠올리고 만다. 나무는 미소하게 얼굴을 찌푸린다.

"흐음, 밖에서 하는 플레이를─"

"거기까지만 하자."

"내외하기는."

"단어의 용법이 조금 잘못된 것 같은데......"

나무는 피식 웃었다. 반 정도 남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킨다. 방금 전까지 보고 들었던 광경을 알콜로 씻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조용히 화장실에 발을 내디뎠을 땐, 두 사람은 이미 좌변기칸으로 들어간 후였다. 오른쪽에 늘어선 칸막이 중 가장 안쪽의 칸막이만이 닫혀있던 것이다. 무언가 대화하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명확히는 들리지 않았다. 

까치발을 하고 조심조심 그 앞으로 다가가니, 별안간 들려오는 소리라는 게.

누가 들어도 혀와 혀를 얶는 비음이었다.

나무는 무심코 칸막이 아래의 틈을 내려다보았다. 한 사람의 것이라기엔 크기가 있는 그림자가 어렴풋한 형체를 가지고 일렁인다.

"......가만히 좀, 있어."

이건, 분명 그 남자의 목소리다. 나무는 어쩐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낀다. 결코 긍정의 감정에서 비롯된 반응은 아닐 것이었다.

"......하, 읍."

다른 사람의 목소리.

"너도 참...... 여전, 하네."

다시 그 남자.

아무래도 더 있어 봤자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급하게 몸을 돌려 남자 화장실을 나서다가, 거울에 비친 제 파리한 얼굴을 목격하고 만 그였다.

"흐음, 그래도 아까 그 남자가 게이라니. 아깝다~"

오른손으로 턱을 괸 유신이 중얼댔다. 어느새 비워버린 콜라 잔은 옆으로 치워둔 채다.

"완벽한 남자는 게이라고들 하잖아."

"어머...... 혹시 송 군도?"

"농담도 참."

"......갔어?"

선생이 물었다.

"......간 거 같아."

도화가 대답했다.

바싹 붙어 열렬한 애정 연기를 하던 두 사람은 몸을 떼어낸다. 축축한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쓱 닦아내는 도화. 선생은 그런 도화를 보고 픽, 웃어버리고 만다.

"왜 웃어?"

"옛날 생각나서~"

도화는 비실비실 웃는 선생을 올려본다. 빼앗겼던 선글라스를 건네받는다. 지금 애인도 있는 인간이 옛날 생각을 해서 뭐해,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아무래도 잘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라.

"음, 그래도 역시 너무 오래 있는 건 곤란한가."

"사람 들어오니까."

선글라스를 콧등에 얹으며 말했다.

"아니, 아까 밖에서 날 쳐다보고 있던 사람이 있어서."

선생은 짧은 감이 없잖아 있는 소매를 걷어 팔뚝으로 붙였다. 운동을 하는 것도 같고 안 하는 것도 같은 모호한 팔 근육이 드러난다.

"......누가 당신을 쳐다 봐?"

"내가 말 붙였던 남자 있어~ 무슨 바둑 중계를 그렇게 보더라고."

"바둑?"

"응. 이런 상황인데, 평범한 신경은 아니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라도 있나...... 너도 소개시켜 줄까?"

도화는 고개를 젓는다. 열정적인 연기 탓에 헝클어진 머리를 슬슬 매만지고 있다.

"됐어. 백청자면 어떡하라고?"

백청자는 그의 방송 시청자의 애칭이다. 실로 단순한 네이밍이지만, 이렇게 직설적이고 간단한 네이밍이 본래 기억하기엔 좋지 않나.

"옆에 와이프 같은 사람도 있던데. 둘 다 천하태평하더라."

"뭐, 원래 끼리끼리 만나는 셈이니까......"

도화는 무의식적으로 선생을 올려다 본다.

그래, 인간이란 원래 끼리끼리 만나는 셈이지.

선생은 반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회복한 거 같네. 아깐 걱정했어? 너무 우울해 보여서."

어린 도화는 이 맵시 있는 웃음을 좋아했다.

"......먼저 나가기나 해. 정리하고 갈 테니까."

지금은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나이 먹은 도화는 생각했다.

8

홀 중앙에서 끔찍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쏟아져 내리는 콘크리트 파편. 그 사이에서도 반짝임을 잃지 않는 유리조각. 분명 샹들리에를 이루고 있었던 부품들이리라. 바닥에 닿아 깨지기도 전에, 이미 폭발의 압력으로 산산조각이 나선 소나기처럼 떨어지고 있다.

나무는 반사적으로 유신의 팔을 잡아 창 쪽으로 잡아 끌었다. 중앙부와는 거리가 좀 있어 큰 걱정은 되지 않지만, 이쪽까지 튄 유리 파편에 베이기라도 하면 곤란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녀의 연약한 심장이 상당히 염려되는 것이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다. 첫 폭발 때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긴 하지만, 떨림은 전보다 약간이나마 나아 보였다.

"괜찮아?"

"......응."

"약 안 먹어도 되겠어?"

"아, 으음, 아마......"

유신은 한 손을 들어 제 귀를 막았다. 홀과 가까운 쪽의 귀다.

하긴, 폭발음이 여간 큰 게 아니었으니......

"귀 아파? 이명? ...좀 막고 있어."

작게 끄덕이는 유신을 확인하고 나서, 나무는 고개를 돌려 홀의 상황을 살피려 들었다. 아직 피어오르는 흙먼지 탓에 시야가 고르지 못하다. 그러나 희뿌연 먼지 구름 사이에서 일렁이는 붉은 불씨만은, 지나치게 시인성이 좋다.

목재 테이블에 붙은 불이었다. 아직 다른 곳에 옮겨 붙진 않았으니, 저 불씨만 잡으면 화재라는 최악의 상황은 예방할 수 있으리라. 검붉은 조끼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꼴이 시야에 들어왔다.

창가로 발을 옮겨 지면을 내려다본다. 전보단 확실히 정리된 교통 상황이 펼쳐져 있다. 긴 크레인이 달린 소방차, 경광등을 반짝이는 경찰차, 사이렌을 울리는 구급차 따위가, 일사불란하게 로비 앞 주차장으로 접근 중이다.

짧은 탐색을 마치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유신은 얼굴을 살짝 들어 홀을 살피고 있었다. 한 쪽 귀는 여전히 가린 채다.

"물 마실래?"

"괜찮아...... 밖은 어때?"

"슬슬 소방차가 크레인을 펴지 않을까 싶어."

"어머...... 이사차처럼?"

"응. 아마 이 통창을 깨고 구조할 것 같은데..."

"놀이공원 온 것 같네."

눈웃음을 짓는 유신을 바라보며, 나무는 도로 그녀의 맞은 편에 앉는다. 두 잔 째의 맥주는 이미 다 마셔버린 지 오래다. 이런 아스트랄한 상황에 처해 있으니 술기운이 들 새도 없고.

"근데 말이야......"

유신이 돌연 목소리를 낮춘다. 나무는 허리를 조금 숙여 비밀 이야기를 할 채비를 한다.

"아까 그 잘생긴 남자랑 같이 온, 친구라는 사람 있잖아."

"친구가 아니라 애인 아니려나..."

"어머, 맞아, 키스하고 있었댔지?"

"그 사람이 왜?"

"자꾸 우리 쪽을 흘끔흘끔 쳐다봐."

"흐음...... 그건 또 이상하네. 어딨어? 그 사람들."

"저기, 슬롯머신 뒤 벽에."

유신은 대략적인 방위를 가리켰다. 시선을 옮겨 유신이 가리킨 쪽을 살피니, 아까의 게이 커플이 벽에 등을 대고 나란히 서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네?"

"수상하지?"

"뭐, 카지노 패션 아이템으로는 그럭저럭..."

"송 군."

"네가 착각한 거 아냐? 선글라스는 시선이 안 보이니까."

"그렇다기엔 고개가 송 군을 따라 움직였는걸."

"으음......"

두 사람의 밀회를 엿본 걸 들키기라도 했나.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열렬한 키스 후 화장실에서 나온 남자는, 유신과 나무의 테이블에 두었던 사이다 잔을 회수하러 들렀었다. 그 때는 확실히 제 얼굴 근육이 굳어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티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엿들은 걸 들켰나 본데."

나무는 멋쩍게 미소 지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니,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선생이 탈출을 거부한 고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전과 같은 위치에서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천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는 꼴을 목격하고, 반사적으로 선생을 감싸는 도화, 뭐 그리 과민반응하냐며 애써 미소를 짓는 선생, 어쨌거나 둘 다 이것이 마지막 폭발이기를 바라고 있었을 테다.

폭발의 잔향이 겨우 가라앉은 후 도화는 카지노 안의 상황을 살폈다. 의식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아마 조사원의 직업병에 가까운 반응이었으리라.

천장 콘크리트가 뜯어지긴 했지만 완전히 금이 가진 않았다. 천장 붕괴라는 끔찍한 상황은 당장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래도 걱정은 되니 중앙으로는 발을 내딛지 말자.

자잘하게 다친 사람은 많다. 하지만 아직 죽은 사람은 없다. 그 점이 약간이나마 안도가 된다. 카지노 규모에 비해 화력이 약한 폭탄을 골랐군. 멍청한 녀석들 답다.

그렇게 홀을 한 바퀴 빙 둘러보다가, 도화는 통창 근처에서 시선을 멈췄다.

통창 너머를 내려다 보고 있는 남자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살핀다.

눈에 익은 얼굴이다.

잠시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나 고민하여 본다.

선글라스를 들어 올려 맨눈으로도 관찰한다.

소나무다. 확실하다.

스트리머 백도화의 섬네일을 그려주는 일러스트레이터.

언젠가의 가을에 부산에서 얼굴을 보았던 그 사람이다.

선글라스를 천천히 콧등에 내려놓는다. 나무는 통창에서 멀어졌다. 바로 근처 테이블의 의자를 빼어 앉는다. 맞은 편에 앉은 여자는 그의 동행인이라도 되는 걸까. 아내인가......

하여간, 어떻게 이런 우연이......

"어디? 누구?"

선생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에, 도화는 턱을 들어 통창을 가리켰다.

"저기, 통창 앞 테이블에."

"통창...... 으응?"

의문을 표하는 뒤집힌 목소리.

"왜?"

"안경 쓴 남자랑, 머리 긴 여자 말하는 거 맞지?"

"어."

"저 사람들이, 내가 얘기했던 천하태평 커플이야."

"어?"

"......날 주시했던 커플이기도 하고."

"그럼, 설마 아까 화장실에 들어온 게."

선생은 허공을 잠시 주시하는가 싶더니 금세 도화를 내려다 본다. 들고 있던 빈 잔은 근처 슬롯머신 위에 대충 올려두었다.

"내가 먼저 화장실에서 나왔잖아? 민석이 너는 오 분 정도 있다가 나왔고."

맞는 말이었다. 끈적해진 선생의 브이넥을 세면대에서 헹구어 크로스백 안에 쑤셔넣는 등의 뒤처리를 했기 때문에, 도화는 선생보다 조금 늦게 화장실을 나섰다. 화장실을 나와 선생을 찾으니 아까와 같은 장소에서 잔을 들고 서 있었으므로, 도화는 별 생각 않고 그의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 사이에 저 사람들 테이블을 좀 들렀었거든. 내 잔을 찾으러."

"잔?"

"옷 갈아입기 전에 말을 좀 붙였어. 아, 가장 처음 말을 걸었던 건 네가 스태프 룸에 있을 때였는데, 그땐 남자 혼자만 있었거든. 근데 이제 보니 옆에 여자도 같이 있길래 누군가 싶어 궁금했지."

"그래서, 세 번이나 말을 걸었어? 내가 스태프 룸에 있을 때, 화장실 가기 전에, 화장실 갔다 와서? 하여간, 부산스럽긴......"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묻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한번 갸웃댄다. 조사 일을 할 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혼자 지내는 게 기본 스탠스가 된 도화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계속해."

"잔 찾는 김에 다시 아는 척을 했지. 셔츠가 좀 작긴 한데 나쁘지 않죠~ 그러면서. 그랬는데."

"그랬는데?"

"그 사람들 표정이 영 안 좋더라고."

"......"

"화장실 가기 전엔 그래도 비즈니스 미소는 지어 줬거든. 둘이 말다툼이라도 했나, 생각해봤는데 그건 또 아냐. 그냥 내가 테이블로 다가와서 불편한 듯한......"

선생의 분위기를 읽는 능력은 무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선생에 대한 평가가 낮아질 만한 사건이 있었다는 해석이 되므로.

"......결국 그때 화장실에 들어온 게 저 남자라는 말이지."

"그렇겠지? 여자가 남자 화장실 안까지 들어오는 건 부자연스러우니까. 남한테 들키면 곤란하기도 하고......"

남한테 들키면 곤란한 행각을 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관자놀이 한쪽이 살짝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 도화를 살피며, 선생은 목소리를 낮춰 물어왔다.

"그래서, 누구야?"

숨겨봤자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건 단순한 우연일 테니......

"내 영상 섬네일 그려주는......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레이터?"

선생은 두꺼운 눈썹을 쓱 들어올린다. 큰 눈동자가 거의 다 보일 정도로 눈을 둥글게 떠선, 신묘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어. 일 년 주기로 계약하고 있어. 꽤 잘 그리시거든."

"흐음... 아까는 바둑 중계를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던데. 의외다."

"취미인가 보지. 교양 있는 취미네..."

도화는 은근슬쩍 시선을 들어 나무의 쪽을 살핀다. 그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도화는 흠칫 놀라고 만다. 이것도 단순한 우연일까.

그에게 다가가 아는 척을 해도 도화에게 돌아올 리스크는 없었다. 방송에서 노가리 깔 소재가 떨어져서 친구를 대동하고 내국인 허용 카지노에 놀러 왔다, 라고 둘러대면 되니까. 선글라스를 포함한 이상한 옷차림은 간단한 분장이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오케이일 거다. 신상 노출을 상당히 꺼리는 컨셉이라 바깥에서의 목격담도 희소한 그다. 눈가에 붙은 분장 테이프 정도만 떼어내면 그리 수상하게 여겨지진 않겠지.

......화장실 안에서 남자와 키스를 한 걸 들키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호모라는 사실은 엄청난 리스크다. 그 정도의 현실 감각은 당연하게도 있다.

도화는 가쁘게 머리를 굴려본다. 저쪽이 이쪽의 관심을 눈치챈 건 자명해 보인다.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서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하고 넉살 좋게 웃어볼까.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척 시치미를 떼면서 벽에 붙어 있을까......

고민은 길었다. 하늘을 향해 높게 뻗은 크레인의 버킷에 올라탄 소방관이 통창을 깨뜨리기 시작한 건 도화가 말을 멈춘 지 삼 분이 경과한 시점의 일이었다.

9

주황빛이 도는 기동복을 차려입은 소방관은 현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동시에 튼튼한 부츠로 깨진 통창의 파편을 밀어내 발 디딜 곳을 마련하기도 했다. 탈출에 크레인을 사용해야 하는 건 명백해 보였다.

안전하고 빠른 대피를 위해서는 출입구를 막은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치우는 게 응당 맞는 대응이나, 폭탄이 앞으로 몇 개나 더 터질지 불분명하기에 쉽사리 폭파 현장에 접근할 수 없다고 한다. 콘크리트 더미를 치우는 도중 그 근처에서 폭파가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더한 인명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니까. 일단은 크레인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결국 카지노 안의 사람들은 통창을 향해 일렬로 서는 모양새가 되었다. 크레인 끝에 매달린 버킷은 그리 큰 사이즈가 아니었다. 한 번 이동에 고작 서너 명을 옮길까 말까 했다. 더뎌지는 구출에 사람들은 조바심을 가졌고, 또 어디에서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는 노파심을 갖기도 했다. 카지노 내부의 불안한 공기를 순환시키기엔 통창의 구멍은 너무나도 작았다.

나무와 유신은 줄의 뒷부분에 서 있었다. 자신들보다 조급해하는 사람들이 한 트럭은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들을 제치고 앞에 설 필요는 없다. 혼란과 불안만 가중될 뿐이니까. 두 명씩 나란히 선 줄은 통창에 뚫린 구멍에서 시작되어 벽을 따라 붙는다. 이전의 폭발이 중앙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무의식적인 암시가 되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중앙에서 멀어지는 편이 좋다고.

뒤에 사람이 얼마나 더 있나 궁금했던 나무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다섯 열 정도가 휴대전화를 들여다 보며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있다. 개중에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이들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아까의 그 남자가 그러했다. 배우처럼 오똑한 콧날을 비스듬히 위로 향한 채 폭발로 그을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나무의 뒷뒷 열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눈동자를 굴려 나무를 쳐다본다. 이내 잘생긴 각도의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기에, 나무는 애써 입가를 끌어올려 화답했다. 그의 옆에 선 친구라는 작자를 좀 더 관찰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 각도에선 잘 보이질 않는다. 나무는 얌전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우리 뒷뒷편에 있네, 아까 그 사람들."

유신은 휴대전화 액정에서 눈을 떼었다. SNS의 흔해빠진 유머글을 보고 있던 참이다.

"게이 커플?"

"응."

"우리 뒤에 사람 별로 없지 않아?"

"응. 거의 마지막에 서 계시네."

"어머...... 배려심이 깊으신 분들이네."

남들의 귀가 신경 쓰였으므로, 두 사람은 최대한 소리를 낮춰 대화했다. 그래봤자 바로 맞닿은 사람들에게는 들릴 수밖에 없는 음량이다.

유신은 흥미가 생겼는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 쪽에선 선글라스를 쓴, 키 작은 남자가 보이리라. 삼십 초도 지나지 않아 도로 고개를 돌렸다.

"선글라스 안쪽이 안 보여."

"그야 선글라스니까."

"잘생긴 남자랑 만나는 남자잖아? 이쪽도 잘생겼을 것 같아서 기대했단 말이야."

"멋대로 그런 기대를 하는 건 실례 아냐?"

네 사람이 탄 버킷이 통창 아래로 사라졌다. 행렬은 아주 조금 앞으로 전진한다. 나무는 남몰래 크레인이 한번 오르내리는 시간을 체크했다. 대략 삼 분 정도가 소요됐다. 그들 앞에 있는 사람은 오십 사 열. 한 번에 네 명 내려간다 치면 이후 스물 여덟 번째 순서에 크레인에 탑승하게 된다. 그러니, 스물 일곱 번의 운행을 기다려야 하니까. 대략, 팔십 일 분 정도를 대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안에 다음 폭탄이 안 터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첫 번째 폭발과 두 번째 폭발의 간격을 떠올려 본다. 한 시간이 채 안 됐었던 것 같은데......

"크레인을 더 세울 순 없나?"

유신이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소방차가 작진 않잖아. 들어오는 데에 애로사항이 있는 건지, 아님 세우는 데에 애로사항이 있는 건지.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만."

"흐음, 애초에 누가 폭탄 테러를 한 걸까?"

"돈을 엄청 잃은 손님의 앙갚음 아니려나."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유신은 파핫, 하며 가벼운 웃음을 터트린다.

"폭탄 살 돈은 있었나 보네."

"뭐... 내일 아침 뉴스라도 보면 알 수 있겠지."

오늘은 일감이 없었지만 내일은 일감이 있다. 꾸준한 계약 관계인 스트리머의 동영상 섬네일을 그려주어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지금 섬네일의 구도를 구상해 볼까.

나무는 휴대전화 단말기를 꺼내어 검색 엔진에 모 게임의 제목을 쳐 넣었다. 물론 스트리머가 플레이한 게임이다. 그에게는 비디오 게임 같은 정신 사나운 취미가 없다. 

평소와 비슷한 사격 게임임을 확인하고 나서, 나무는 머릿속의 그래픽카드를 활성화시켰다.

허공을 보던 선생이 대뜸 눈웃음을 지었다. 누군가에게 인사라도 하는 듯한 몸짓이다. 팔짱을 낀 채 앞으로의 일정을 고민하던 도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선생을 살피기 시작했다.

"뭐 해?"

"인사~"

"누구한테? 아까 그 사람들?"

"응. 네 일러스트레이터. 갑자기 뒤를 돌더라. 자기 뒤에 몇 명이나 있나 궁금한가 봐."

그런 말을 들으니 도화도 제 위치가 궁금해진다. 최대한 뒤로 빠진 건 확실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화장실을 다녀왔다든가, 락커에 넣어둔 소지품을 회수한다든가) 제 뒤에 선 후발주자들이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목을 돌려 뒤를 바라본다. 두 줄로 선 여섯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시간을 죽이고 있다.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도화는 도로 고개를 원위치 시킨다.

이번에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전방을 살피려다가, 그와 비슷한 각도로 상반신을 기울인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두 칸 앞에 서 있는 여자다. 고개만을 돌려 뒤를 바라보고 있다. 도화는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선다.

소나무 씨와 같이 있던 사람이다. 길고 풍성한 검은 머리칼이 몸선을 따라 흐르고 있다. 위로 올라간 눈꼬리가 인상적이라면 인상적. 나이는 도화보다 조금 어릴까.

여자는 눈가를 접어 웃었다. 고개를 살짝 까딱이는 거로 보아 인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화가 반응을 고민하던 사이 그녀는 휙 얼굴을 돌려버렸다.

역시 이쪽을 의식하고 있는 게 맞는가 본데......

제 정체까진 아직 알지 못 하리라. 선글라스를 벗었을 때 소나무 씨와 눈을 마주친 기억은 없고, 설령 그의 동행이 제 얼굴을 보았더라도...... 백도화라는 사람을 알고 있을지도 미지수고, 분장을 꿰뚫어 볼 수 있을지도 미지수 아닌가. 그렇다면 아직 걱정할 건 없다......

도화는 어깨에 매달린 크로스백을 괜히 고쳐맸다.

10

감금되었던 손님의 절반 이상이 지면을 밟았다. 그림의 구상을 마친 나무가 다시 앞 사람의 수를 세어보니, 이젠 열 다섯 열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대강 삼십 분 안팎으로 나갈 수 있지 않으려나. 그 동안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깐, 극히 희망적인 관측이긴 하지만.

"근데 좀 이상하다."

유신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간당간당하여 얼마 전부터는 웹서핑도 하지 않던 그녀다. 백 한구석에서 보조배터리를 꺼냈다가 방전 상태임을 확인하곤 낙담하던 유신의 표정을 목격한 나무였다.

"뭐가?"

"폭탄 말이야......"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고개를 한번 갸웃대는가 싶더니.

"터트릴 거면 빨리 터트리는 게 낫지 않아? 지금처럼 텀이 길어지면 사람들이 구조되잖아."

괜찮은 지적이었다. 확실히, 두 번째 폭발로부터 한 시간은 지난 것 같다. 하지만 첫 번째 폭발과 두 번째 폭발의 간격도 한 시간이 조금 덜 되지 않았던가. 이 즈음하여 터진다면 대강 일정한 간격 같긴 한데......

"그러게, 왜 굳이 이렇게 긴 간격으로 터뜨리는 걸까."

시간을 때우기엔 좋은 수수께끼였다. 테러의 주모자를 앞에 세우지 않는 이상 정답을 알 순 없을 테니 수수께끼라고 하기엔 불충분하지만.

유신은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눈동자를 빙글, 굴린다. 살짝 벌어졌던 입술이 움직인다.

"테러범이 실은 카지노 안에 있어서, 그 자신도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했던 거라면?"

"흐음, 갇힐 걸 알았을 텐데? 왜 안에 있어야 했을까."

"현대에서 갇힌다는 건 구조된다는 거랑 같은 말이잖아."

"그건 그래. 특히나 이런 눈에 띄는 건물이라면야...... 반나절도 안 지나서 구조되겠지. 실제로 그러고 있고."

"구조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멀쩡한 출입구로는 나가지 않아도 돼."

"무슨 소리야?"

"출입구의 경비 시스템을 무시할 수 있다는 거야."

나무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처럼 창문을 뚫고 나가든, 출입구의 돌무더기를 치우고 나가든 출입구의 경비 시스템-보안 검색대를 무시할 수 있는 건 자명하다. 창문에는 검색대 따위 설치되어 있지 않고, 출입구의 검색대는 콘크리트 무덤에 묻혀 멋지게 박살 났을 테니. 부서진 고철이 제 본분을 다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으음...... 그런데, 안에서 뭘 가져나가고 싶었길래 폭탄까지 터트리면서 경비 시스템을 마비시켰을까."

나무의 물음에 유선은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아무래도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우후후, 그건 잘 모르겠네. 송 군이 생각해 볼......"

우레 같은 폭음이 순간 울려 퍼졌다.

이명이 이는 귀를 막았다.

쏟아 내리는 콘크리트 사이에서 무언가 연이어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폭탄의 폭발음이라기엔 너무 작고, 주파수가 높다.

치직치직하며 스파크가 튀는 듯한, 스파클라에 불을 붙인 듯한......

"합선이야!"

누군가가 외쳤다.

이상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발화의 내용을 인식하기도 전에, 천장의 조명에서 불꽃이 튀었다.

탐욕스러운 불길이 조명을 집어삼켰다. 

푹 익은 과일처럼 아래를 향하던 조명은 이내 목제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 뒤를 이어 산발적으로 떨어지는 조명들이, 꼭 유성우와 닮았다고 생각하다가,

나무는 정신을 차려 유선의 허리를 낮췄다.

스콜처럼 쏟아지는 열기의 파편 아래서 서른 명이 좀 덜 되는 잔류자들은 자연스럽게 통창 주위로 몰리게 되었다. 간단한 난간 하나 없이 뻥 뚫려있는 창의 구멍은 범의 아가리 마냥 위협적이다. 아래를 향한 긴 사다리는 설치되어 있지만, 버킷이 없는 상태에서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15층 높이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노릇이 되니까.

소방관들도 그 점을 염려하였는지 어느새 지면에 거대한 공기매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다리 바로 밑에 넓게 펼쳐진 노란색의 매트는, 검은 점처럼 보이는 지면 사람들의 머리와 견주어 보아 상당한 크기임에 틀림없었다. 사람 한둘 정도는 충분히 버텨낼 법하다.

도화는 창에서 고개를 돌려 건물 안쪽을 살핀다. 아직까지 남은 검붉은 조끼의 직원 서넛이 소화기를 들고 불길을 잡으려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두 번째 폭발 때의 화재와는 규모가 아주 달랐기에, 흔해빠진 붉은 디자인의 분말소화기로는 방어선에 한계가 있는 듯 보였다.

연쇄적인 합선으로 내부 조명의 삼 분의 일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개중에는 벽에 가까이 설치된 조명도 있었는데, 그것이 떨어지며 벽에 불씨를 옮기는 바람에 한쪽 벽은 이미 화마에 집어삼켜진 지 오래다. 피난자들의 행렬과 정반대 쪽인 벽이라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소방관이 그렇게 많이 오진 않은 것 같은데───

가죽 점퍼를 벗어 입가에 대곤 생각한다. 버킷을 이동하는 데에 두 명, 밑에서 조종하는 게 한 명, 위에 두 명이 올라와서 진압한다면 서른 명이 대피할 시간은 벌 수 있을까. 한 번에 네 명, 삼십 나누기 사는, 몫이 칠에 나머지가 이.

그렇다면 그 나머지에는 당연히 자신이 들어가야 한다. 소화기를 들고 불길에 맞설 체력은 충분히 있으니까. 있는 힘껏 버티다가, 안 되면......

노란색의 공기매트를 떠올린다. 그곳으로 냅다 뛰어들면 그만이다. 

설마 소방서가 구조 도구 정비도 안 했겠어......

창가에서 레일이 절걱댔다. 곧이어 빈 버킷을 탄 소방관 두 명이 도착했지만 올라오던 도중 폭발이 일어난 터라 호스는 가져오지 못했단다. 지면으로 내려가 소방복으로 환복 후 화재 진압 태세를 갖추겠다고 하는데, 최대한 침착한 척하는 얼굴과 달리 목소리에는 당황이 역력하다.

버킷은 또 다시 네 명 가량을 태우고 떠났다. 도화는 미간에 골을 새긴 채 주위를 살핀다. 서서히 공포로 물들기 시작하는 분위기. 독한 매연을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기침 소리.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알림음과 진동음.

바로 옆의 선생은 정작 태연한 얼굴이다. 오뚝한 콧날을 짧은 소매로 막고 있다. 길게 늘어진 아랫속눈썹은 이따금 파르르 떨리기야 하였으나, 단순히 연기에 눈이 매운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시키자니 건강에 영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해서 도화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비싼 기자재들이 기세 좋게 타 들어가는 소리. 전보단 확산력이 줄어든 소화 분말이 흩뿌려지는 소리. 하강하는 버킷의 레일이 느리게 움직이는 소리. 그 사이에서, 대뜸 들려온 앞 사람들의 대화 소리.

통창 앞으로 대피하는 과정에서 줄이 조금 일그러졌다. 도화와 선생이 소나무 씨 일행 바로 뒤에 웅크려 있는 꼴이 되었지만, 부부인지 친구인지 모를 두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어때?"

여자의 목소리는 제법 들떠있었다. 남자의 한숨이 곧바로 이어진다.

"진심이야?"

"흔치 않은 기회잖아~ 밑에 구급차도 있으니까. 여차하면 끌고 가서 심장 마사지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도화는 의식적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어 본다.

"나, 스카이다이빙은 유격 훈련 이후로 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처음이야."

"첫 경험을 이런 위험한 곳에서 해야겠어?"

"너무 더워서 빨리 나가고 싶은걸~"

"하아......"

잠시 말을 고르는 남자.

"백은 어쩌고? 떨어지다가 놓치면 연결부고 뭐고 다 부서져."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되지 뭐. 어디 보자......"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고개를 돌리는 여자. 뒤를 보자마자 커다란 선글라스가 눈에 들어와 놀랐는지 어깨를 움찔댄다.

"어머, 바로 뒤에 계셨네요?"

소나무 역시 그녀를 따라 몸을 45도 가량 비틀었다. 아주 좋지 않다. 하지만 말을 걸었는데 대답을 안 하는 게 더 수상해 보이지 않나.

"......안녕하세요."

가죽 점퍼로 최대한 입을 막은 채 대답했다. 목소리가 제법 변조되는 효과가 있다. 곁눈질로 계약 관계의 일러스트레이터를 살피다가, 이쪽을 깊게 응시하는 시선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번에는 도화가 몸을 움찔댈 차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핸드백의 가방줄을 정리해 한 손에 쥐어들었다. 대뜸 팔을 뻗어 도화의 품에 안겨주는가 싶더니.

"1층에서 다시 줘야 해요?"

라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 도화는 무심코 선생의 얼굴을 바라본다. 선생도 제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다. 금방 앞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린 선생이 입술을 달싹여 무언가 말하려 들었을 때.

아직 도화 쪽으로 뻗어있던 그녀의 팔이 순식간에 얼굴 근처로 상승했다.

선글라스의 다리를 잡아선 위로 들어올린다.

코받침이 이마에 닿는다. 

왼쪽 눈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동공이 급격하게 작아졌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광량의 증가 때문인지, 당황과 공포가 절묘한 비율로 섞인 감정 반사 때문인지, 도화는 판단할 수 없었다.

"어머, 이 분하고는 또 다른 방향으로 잘생기셨네. 그냥 벗고 다녀요~ 왜 가리고 다녀?"

하얗고 긴 손이 떨어져 나갔다. 콧대를 타고 미끄러지는 선글라스.

시야가 다시 어두워졌다.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을 인지한다. 아주 좋지 않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놀란 눈으로 도화를 빤히 쳐다보다가, 동행인의 손길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킨다.

"......화 씨?"

낮게 중얼대는 말투.

도화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억지로 떠넘겨진 핸드백의 끈을, 관절이 시리도록 꽉 쥘 뿐이었다.

유신은 나무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손목을 잡아 끌면, 그는 거의 저항하지 않는다. 백화점에서 이런저런 브랜드를 돌며 시착을 할 때도, 테마파크에서 비합리적인 동선으로 움직이며 츄러스를 입에 물 때도, 식당가를 세 바퀴 둘러보며 저녁 메뉴를 정할 때도, 그는 불만을 입에 담지 않는다.

원래 인생이 그런 거잖아. 발길 가는 대로 걷고, 마음에 드는 걸 찾아 헤매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는 게, 인생이잖아?

언젠가의 나무의 어록이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십 년 전일 수도 있고, 오 년 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삼 일 전일지도.

그 때부터 나는 그를 곁에 두고 싶었다. 유신은 생각한다. 곁에 두면 죽을 때까지 재미없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 확신에 가까운 추론이 머리를 스쳤다.

"저 사람......"

"백도화 씨지?"

유신은 도화의 버추얼 캐릭터를 리깅한 적이 있다. 나무의 조각난 그림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이어 붙였다. 완성된 건 고양이 귀가 달린 금발 소녀 캐릭터. 평소에 고양이 귀 헤드폰을 착용하고 방송하기 때문에 그런 외형이라고, 나무가 설명해주기도 했다.

이 스트리머, 버추얼 캐릭터랑 묘한 부분에서 닮았네, 라고 생각했다. 남자치고는 속눈썹이 긴, 여성스러운 눈꼬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유신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선글라스 안에서 그 이쁘장한 눈이 튀어나왔을 땐 조금 놀랐지만.

나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어쩐지, 얼굴이 되는데 결혼을 못한 게 이상하긴 했어."

부러 장난스런 말투를 꾸며냈다. 그제야 나무는 작게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연다.

"나도 결혼은 안 했는데?"

"그래, 송 군은 왜 안 하고 있는 거야?"

"처자식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건 민폐잖아."

"민폐라~"

두 사람은 사다리 앞에 섰다.

까마득하게 높다. 저 아래에서 빠르게 환복하고 있는 소방관들의 모습이 보일 듯 말 듯 하다. 통창 구멍 바로 근처에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는지 후퇴하라는 경고가 확성기를 거쳐 들려온다.

"사다리 옆으로 떨어지자."

"손 잡고 떨어질래?"

"그건 표면적이 너무 넓어."

"그럼......"

나무는 유신을 끌어안았다. 말끔하게 다렸던 흰 셔츠가 힘차게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어딘가 야시시한 구석이 있는 마찰음이다.

"떨어지고 후회하면 늦어."

구멍을 등지고 섰다. 흐릿한 역광이 어깨 너머로 비춰온다. 광원은 건물 내부에도 잔뜩 일렁이고 있는데도.

"죽기 직전엔 주마등을 본다고 하잖아. 송 군."

유신은 느리게 전진한다. 나무는 그에 맞춰 후퇴한다. 뒤에 줄지어 앉은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무슨 표정들일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기겁하는 목소리를 듣는 거로 만족해 두도록 하자.

"난 네 주마등이 너무 궁금해."

"왜?"

"재미있는 사람이니까."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

"아니, 그보단......"

나무의 뒤꿈치가 허공에 닿았다.

신체가 극적인 각도로 기울어진다.

"죽기 직전에, 송 군이 과연 뭘 회상할지 궁금해."

대답은 없었다.

철제 사다리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뒤얽힌 채 낙하했다.

11

손이 통창에 닿자마자 팡,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낙하산이 펴지는 듯한 소리다. 무사히 매트 위로 떨어지긴 한 모양이다. 약간의 안도를 품고 아래를 내려다 본다. 노란 매트 위에 두 사람이 누워 있다. 급하게 매트로 다가오는 소방관들과 구급대원들. 잠시 움직임이 없던 그들은 구급대원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킨다. 둘 다 죽진 않은 것 같다.

어이가 없어 멍하니 창 아래를 보고 있다가, 손에 들린 핸드백을 다시금 인식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브랜드다. 그래, 이런 걸 부서뜨리고 싶진 않았겠지......

제 옆에 몰려붙어 웅성대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도화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분출 강도가 약해진 소화기를 들고 고군분투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불길은 전혀 잡히지 않았다. 아까와 비슷한 면적을 야금야금 연소시키고 있다. 하기사 비전문가들이 이 정도까지 화염을 막아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선생에게 핸드백을 가볍게 던졌다. 긴 팔을 쭉 뻗어 간단하게 받아낸다. 연기를 피하느라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렸지만, 소매가 짧은 탓에 둥근 뼈가 도드라지는 손목이 훤히 보인다.

"무사히 떨어졌어."

"재밌어 보이네. 우리도 할래?"

"우린 늙어서 안 돼. 관절 다 나간다."

물론, 일러스트레이터와는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도화였다.

"직원들 좀 도와주러 갈 테니까, 당신은 앉아있어. 짐 지킬 사람은 필요하잖아."

어깨에 메었던 크로스백을 벗어 선생에게 건넨다. 로프며 하네스 같은 잡다한 물품까지 들어있어 결코 무게가 적진 않다. 크로스백을 안아 든 선생의 눈이 일순 동그랗게 뜨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 도화는 등을 돌려 직원들에게로 향했다.

지금 불길을 제압하고 있는 직원은 총 세 명. 나머지 인원들은 일찍이 내빼기라도 한 걸까. 어쨌거나 도화는 가장 힘들어 보이는 직원의 어깨를 잡았다. 조끼가 축축하다. 땀이 와이셔츠를 넘어 조끼까지 적셔버린 모양이다. 아연한 얼굴로 뒤를 돈 직원에게서 소화기를 뺏어 들었다. 좀 있으면 소방관이 올 테니 쉬고 계시라는 말을 하면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고객님한테."

이런 일을 맡길 수는 없다, 라는 뒷말을 생략한 듯 보였다. 도화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고압호스 오면 상황 끝이에요. 바로 밑에서 환복도 하고 있었으니까 금방 오겠죠."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상대가 상당히 지친 상태였으니 더욱 그러하다. 비틀거리며 벽가에 앉는 직원을 보고 나서, 도화는 소화기의 손잡이를 잡았다.

살아있는 게 놀라웠다.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이렇게 된 거 몇 초나 걸리나 세어 볼까 했건만, 안전 장비 없는 낙하라는 극한 상황에서 정신을 다잡기는 어려웠다. 십 몇 년 전의 아스트랄한 대국 때보다 훨씬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는 건 같은데도. 방금이 훨씬 심정적으로 두려웠던 건, 꽤, 이상한 일이다......

등에 푹신한 매트가 닿자마자 의식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제 위에 누운 유신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쿵쿵대는 심박음이 제 것인지 유신의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서, 나무는 결국 급하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동시에 구급대원들이 그의 팔이며 어깨를 잡았다.

"유, ......으윽, 유신."

허리가 욱신거렸다. 유신의 체중을 고스란히 받아낸 탓일지도 모르겠다. 

제 목에 둘러진 유신의 두 팔은 추욱 늘어져선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무는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움켜쥔다. 툭 떨어진 고개를 억지로 들어올린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뒤로 젖혀졌다.

"진유신!"

이완된 두 눈이 나무를 바라본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촉촉하다.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표정이다.

어, 나름 최근에도 봤었던 얼굴 같은데......

"괜찮아."

유신이 속삭였다.

구급대원이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어디 아픈 곳은 없냐 묻기에, 나무는 고개를 저었다. 허리가 욱신대긴 하지만 아주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니까. 곧바로 유신을 쳐다보았다. 조금 멍한 기색이 있는 얼굴이다. 아무래도 멀쩡하진 않은 듯한데......

"괜찮아요. 구조 장비가 좋네요."

그러곤 나무의 손목을 잡아 인파가 덜한 곳으로 이끄는 것이다. 앰뷸런스 뒤쪽으로 돌아 십 오 미터를 더 가서야 유신은 멈췄다. 예쁘게 가꿔진 가로수 행렬의 응달 안이다.

"왜 그래,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가슴은?"

"만져 볼래?"

실실 웃으며 그런 말을 하니 나무는 말문이 막힌다. 괜찮은 대답을 골라보려 했지만 선지조차 떠오르지 않아 빠르게 포기했다.

"네 백 받아야지. 소방차 근처에서 기다리자."

"응, 그럴 건데......"

"왜?"

"허리는 어때?"

"허리? 부러지진 않은 거 같은데."

"아하하, 그래?"

뭐가 그리 재밌는지 유신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리?

온종일 앉아 있으니 허리가 아픈 직업이긴 한데......

"응, 다행이다. 다행이야."

유신은 다시 나무의 손목을 잡아 이끈다. 적과 백이 간결하게 섞인 소방차의 몸체가 시야에 들어온다. 호스를 든 두 소방관이 버킷을 타고 15층을 향해 상승한다. 구경꾼들은 걱정과 흥미가 삼 대 칠로 섞인 얼굴을 하늘에 들이밀고 있다.

목과 턱이 이루는 둔각을 눈에 담던 나무는 문득 익숙한 광경을 떠올렸다.

눈을 천천히 세 번 깜빡였다.

경험과 현상을 연결시켜 본다.

유신은 가늘게 숨을 고르고 있다.

"너......"

입가가 굳은 게 느껴졌다. 실소가 안면에 고정된다.

유신은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본다.

홍조가 사라지지 않은 뺨은 아직 따뜻할 터였다.

"송 군이랑 있으면 정말, 심심할 새가 없다니깐."

유신은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소방관 두 사람의 활약으로 방어선이 전진했다. 이대로라면 남은 사람 모두가 구조되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도화는 그들의 곁에서 잔불을 정리했지만, 소화기의 분말이 바닥나 결국 선생의 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남은 사람은 열 명. 한 번에 네 명씩 버킷을 타고 내려가니 필연적으로 나머지 두 명이 생기게 된다. 도화는 이미 나머지에 들기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선생마저 같은 의견을 내놓은 것에는 좀 놀랐다.

"아니, 왜? 먼저 내려가서 가방이나 전해 주라니깐."

"신체 건강한 사람이 먼저 내려갈 순 없지."

정말 건강한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허약해 보이진 않는 선생이다. 도화로서는 그를 안전한 지면에 옮겨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이미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야 말았으므로. 별 대답 없이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이다.

"이리 붙어. 곧 나가더라도 덜 데는 게 낫잖아."

선생은 어깨동무라도 하듯 도화의 어깨를 둘러 안는다. 사람의 온기는 불길의 열기보다 미적지근하다. 몸을 식히고 있으니 희미하게 남은 향수의 잔향이 코 끝을 스친다. 이십 년 전의 것과는 지향성이 다르다.

느긋한 속도의 버킷이 네 사람을 데리고 지상으로 사라진다. 이제 남은 건 여섯 명.

"그러고 보니까, 네 일은 어떻게 된 거야?"

"내 일?"

"높은 아저씨랑 조폭이 대화하는 걸 엿듣기만 하면 되었던 거야?"

도화는 머리를 굴려 본다. 선생에게는 도청 일만 설명해두었으니 부수적인 일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근처에 대기 중이던 조직원도 찾으려고 했어, 라는 과한 정보를 입에 올려서 좋을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그건 좀 이상한데."

"뭐가?"

"엿듣기만 하는데 왜 나를 데려왔어?"

"혼자 와서 두리번거리면 수상하잖아."

선생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도화를 응시한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 도화는 괜스레 선글라스를 고쳐 써 본다.

"엿듣는데 두리번거릴 이유가 있나?"

"어디서 대화하고 있는지......"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릴 수도 있지, 라고 말하려다가, 도화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잖아. 그 사람들의 접견 장소."

그랬다. 그걸 선생에게 털어놓기까지 했다.

얼굴이 서서히 낭패감에 젖어 드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은 대답이 없는 도화를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카지노 안에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던 거지? 두리번두리번 하면서."

"당신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야."

"왜 상관이 없어? 내가 지금 네 옆에 있는데."

"그건......"

"찾았어?"

"어?"

"찾았냐고, 그 사람."

"......아니."

"흐음, 그럼 결국 일도 못 끝낸 건가."

"그건 어차피 부수적인 일이야. 성공하든 말든 상관 없어...... ......성공했다면 보수가 더 들어왔겠지만."

"너도 참 이상하다."

"뭐가?"

"방송만 해도 혼자 먹고 살 만한 돈은 벌릴 거 아냐."

사다리의 레일이 돌아가는 소리가 일정하게,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두 사람의 목소리는 충분히 작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들릴 법 하진 않았다.

버킷이 어디까지 내려갔을까? 이미 지면에 닿아서 유턴을 준비하고 있을까.

선생의 시선에 실린 감정의 총체. 그것의 일부가 언뜻 엿보였다. 이 사람은 나를 안쓰러워하고 있구나. 도화는 생각한다. 이십 년 전에도 나를 안쓰러워했지,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위치는 달라지지 않는구나.

"이런 일은 관두는 게 낫지 않아?"

도화는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보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러한 의지를 가질만한 장소나 물건은, 이제는 이 카지노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버킷의 정수리가 보였다. 네 사람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곤 앉아 있었다.

12

"갈 땐 네가 운전한다면서. 운전할 수 있겠어?"

"멀쩡하다니까. 오히려 어딘가 아픈 건 송 군이잖아?"

"팔다리는 멀쩡하니까 운전대는 잡을 수 있어."

"술 마셨잖아."

"음, 시동은 걸면 안 되겠지만."

두 사람은 소방차가 만든 그늘에 서 있었다. 이름 모를 네 사람이 버킷에서 내려오는 참이다. 이제 최상층에 남은 사람은, 나무의 셈이 틀리지 않다면 (뜻밖의 변수가 없다면) 아마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먼저 올라간 소방관들과 아까의 게이 커플 뿐이리라.

그래, 그 커플 중 한 사람은 분명, 백도화였다.

어째서 그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상 유출을 꺼리는 컨셉이니, 시청자들의 목격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분장이라도 되는 건가......

나무는 어딘가 찜찜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다. 뇌의 한 부분은 납득했지만 또 다른 부분은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단순히, 남들의 시선을 상당히 의식하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될 일인데......

"뭘 그렇게 생각해?"

유신이 물었다. 튼튼한 물탱크에 기대어 있다. 화재 진압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닌가 싶다.

"신기한 사람이다 싶어서."

"백 씨?"

"응."

"남자 좋아하는 게?"

"아니, 저런 분장을 하고 있는 게."

"흐음, 저런 패션이 취향인가 보지. 좀 날 티 나긴 하는데."

"방송 때랑은 완전 다른 느낌 아냐?"

"송 군도 바둑판 앞에서는 완전 다른 느낌이야."

"그런가......"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위에서 들려온 듯해서, 나무는 턱을 당겨 하늘을 바라본다. 유신 역시 위를 쳐다보고 있다.

사다리를 걸친 통창의 구멍에서 거센 불길이 일렁인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바로 앞에서 들려온 듯해서, 나무는 고개를 내려 사다리 아래의 매트를 바라본다. 유신 역시 앞을 쳐다보고 있다.

두툼한 크로스백과 고급진 핸드백의 줄이 엉킨 채 나뒹군다.

두 사람의 무게를 떠안은 안전 매트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석버석, 하는 불길한 소음이 바로 위에서 들려왔다. 도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혀 천장을 살핀다. 수없이 매달린 조명이 그 원인이었다.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금만 간다면 다행이건만, 내부 회로에서 무언가 이변이 발생하였는지 예사롭지 않은 스파크를 버석버석 내뱉고 있는 것이다.

"예감이 안 좋아."

도화가 중얼댔다. 선생은 도화를 따라 천장을 올려보고 있다.

"설마 저것도 깨지기 시작한 거야?"

선생은 분명 국어 선생이었지. 그렇다면 조명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할 법도 하다.

"어. 저게 깨져서, 떨어져서 불이 붙으면...... 이 앞으로는 못 지나가게 돼."

지면과 카지노를 잇는 사다리는 한 개 뿐이다. 만일 이 유일한 통로가 막히게 된다면, 선생과 도화는 꼼짝없이 추가 구조를 기다려야만 한다. 물론 화재를 진압하고 있는 소방관 두 명도 함께. 그들이야 방호구도 있으니 오래 버틸 수 있겠지만......

버석버석, 버석버석하던 소리는, 어느새 지직지직, 지직지직으로 바뀌기 시작해서.

도화는 통창 아래를 내려다 본다. 아직 네 사람이 지면에 닿지도 못했다.

"이런......"

"떨어지자."

"뭐?"

"떨어지자고. 아까 그 사람들처럼."

선생은 맡겨진 핸드백을 급하게 둘러메었다. 목에 걸어 비스듬히 가슴을 질러내리는 가방끈은, 솔직히 조금 짧아 보인다. 선생의 몸집이 기름한 탓일 것이다.

도화는 가방끈을 잡아 그의 몸에서 백을 벗겨낸다. 그 대신 제가 메었던 크로스백을 건네어 본다. 끈의 길이 조절이 용이한 모델이니까, 적어도 핸드백보단 메기 편하리라.

"그건 내가 멜 테니까, 당신은 내 가방 들어."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꿔 메는 데에는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건만, 정수리 위의 위협적인 스파크는 금세 그 몸집을 키우고 있다.

이래선 비전문가인 선생도 이변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도화는 그의 표정이 굳어있는 걸 확인한다.

"푹신하겠지?"

매트의 성질을 묻는 것이라면 답변은 당연하게도.

"당연하지."

선생은 도화보다 조금 앞에 서 있다. 크로스백을 메고 있으니 꼭 운동이라도 다녀오는 듯한 모양새다. 그런 하잘것없는 감상이 드는 게 약간 의아하다.

어쩌면 같이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셋, 둘, 하나 하면 떨어지자."

선생은 도화를 잡아끌었다. 완전히 껴안아선 표면적을 줄인다. 과학적이고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분명 아까 떨어진 두 사람도 끌어안은 채 추락했지.

"셋."

그나저나 이렇게 떨어지면 내 무게를 선생이 떠안게 되는데......

그렇게 둘 수는 없다.

"둘."

첫 번째 폭발 때처럼, 스텝을 밟아 백 팔십도 턴을 하려고 했다.

"안 돼."

선생은 대뜸 그리 중얼거리더니, 몸을 뒤로 기울였다.

도화의 뒤꿈치가 점점 바닥과 멀어졌다.

이런, 하나까지 세지도 않고......

하여간 장난기만 가득한 인간.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려왔다.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금세 발목이 뜨거워졌다가, 

허공을 가르는 바람이 피부를 식혔다.

제 몸에 달라붙은 선생의 사지에 힘이 실린다.

공중에서 분해되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고 있다.

기압차가 귓가를 때린다.

이래선 대화도 할 수 없겠어.

옛날에는 분명 형이라고 불렀었지......

서 사장님의 흥신소를 다니던 때의 기억이, 머릿속 필름에 새겨져 차례차례 상영된다.

그 때까지의 인생은 그래도 제법 즐거웠던 것 같다.

형의 자취방 창문으로 잘렸던 서울의 밤하늘을 떠올린다.

지금 떠올려도 야시시한 광경이다.

재밌었지, 그래도......

"......형."

부끄러운 울림의 단어를, 펑, 하는 파열음이 덮어주었다.

13

"고생했다."

현상은 의외로 유명한 체인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뚜껑이 열린 종이컵 안을 살피니 메뉴는 아마도 핫 아메리카노. 근처 산책이라도 하고 오신 건가, 아님 업무를 보고 오신 건가. 어쩌면 어느 쪽도 아닐 수도 있고. 도화는 분간하지 못했다.

"결국 얻은 건 없네요."

"카지노 근처에서 행동불능 상태의 로컬 조직원들이 몇 명 발견되었다더라. 이미 경찰이 데려가서 털어먹고 있을 거다."

"행동불능?"

"이런저런 고문."

"예?"

"아마 산백파 산하의 녀석들이 한 게 아닌가 싶은데."

신흥 조직 이야기였다. 카지노 설립에 관여한 국회위원에게 로비를 하여, 자신들 소유의 땅에 카지노를 건설하게 한 그 조직. 정보상은 그들이 산백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라,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카지노에 숨어든 따까리를 찾아내 달라고 의뢰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화는 따까리의 색출에 실패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더 있었다면 찾아내었을지도 모르겠다. 폭탄 테러라는 황당한 사태가 남은 시간 전부를 잡아먹어 버려서, 도화는 임무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근처에 백업 인력이 있기는 했던 거군요."

"그렇지. 접견엔 누구누구 있던 거 같더냐?"

"VIP실로 들어가는 건 봤어요. 그 의원이라는 사람이랑, 한 패로 보이는 남자 두 명. 그러니 접견은 일 대 이였다는 건데......"

"의원이랑 한 패인 산백파는 VIP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거지."

현상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기울인다. 도화의 것은 당연하게도 없다. 하여간 구두쇠 노인네.

"그런데 왜 고문까지 했어야 했던 걸까요?"

"고문을 한다는 건 얻어낼 정보가 있다는 뜻이지."

"얻어낼 정보?"

"그 놈들은 이미 쇠락한 조직이지. 그러니 조직 운영 면에서 딱히 캐물을 건 없어."

"그렇겠죠. 간부도 몇 명 죽었다고 했잖아요."

"궁지에 몰린 그 녀석들이 마지막으로 꺼낸 패가 폭탄 테러 아니냐."

"......그렇죠?"

엿들었던 접견의 내용을 떠올린다. 우린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그런 말을 하고 폭탄의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나.

"폭탄 테러를 한다는 건 곧 폭탄을 설치했다는 이야기고. 폭탄을 설치했다는 건."

"......폭탄이 어디에 있는지도 안다는 소리죠."

"산백파 녀석들이 기를 쓰고 폭탄의 위치를 찾을 이유는."

"......카지노 안에 중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정말로 아무도 못 봤냐? 도화야."

도화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인간은 없었다.

아니, 폭탄이 터진 뒤로는 정신이 없었으니까, 수상한 인간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도청기를 계속 끼고 있었으면 뭐라도 들렸을 법한데."

"그, 폭발에 휘말려서, 튕겨 나갔어요......"

"잃어버렸냐?"

"......예."

"이 씨가 섭섭해하겠군."

현상은 혀를 한 번 차더니 햇빛을 받아 빛나는 금속 테 안경을 고쳐 썼다.

"됐다. 수고했어. 보수는 항상 주던 계좌로 주마."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이 없는 도화를 흘끔인다.

"당분간은 좀 쉬어라. 아니면 오동현이나 도와주던가."

"걔요? 로펌 사무원으로 업종 변경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니더라. 동종업자 도와주는 셈 치고 놀러 가 봐라."

"뭐...... 영감님이 그러신다면야."

조금 밝아진 도화의 얼굴을 보고, 현상은 한쪽 입꼬리만을 끌어올려 웃어주었다.

동현은 지퍼백에 담긴 무선 이어폰 모양의 기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무슨 장친지 알고 싶으시다고요?"

"응. 카지노 안에서 주웠는데, 귀에 끼니까 다른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는 거 있지? 그런데 딱히 음질이 선명하지도 않고...... 뭔가, 무전을 엿듣게 해 주는 장치라도 되나~ 싶어서. 이런 거라면 탐정 씨가 잘 알고 계시지 않을까 했거든."

탐정이라는 말에 동현은 가슴을 편다. 의기양양한 미소가 입가에 번져가고 있다.

"하핫, 그럼요. 아는 전파상 형한테 물어볼게요."

"어머~ 오 탐정이 그런 말을 하니깐 완전 믿음직 해."

유신은 작게 박수를 치다가, 핸드백에서 투명 파일을 하나 꺼내어 본다. 남자의 사진이 몇 장 들어있다.

"나, 사람 조사도 좀 맡겨보고 싶은데."

"이 사람인가요?"

"응. 이름이랑 전화번호랑 주소 같은 것만 있음 되나?"

파일을 뒤집는다. 사진 뒤편에 메모지가 하나 붙어있다. 남자의 인적 사항이 깨끗한 글씨체로 간결하게 적혀있다.

"우와, 이름이 되게 특이하네...... 이 정도면 조사하기 꽤 쉽겠는데요."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이야."

"예?"

"결혼을 할까 하는데, 옛날 얘기를 도통 안 해주는 거 있지~ 남편 될 사람이 과거에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정도는 알고 싶단 말이야."

유신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적당한 변명을 줄줄 늘어놓는다. 사진을 한번 내려다보곤,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만들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겨, 결혼 상대시군요......"

"응, 아직은 예비 상대지만."

우물거리는 동현을 빠르게 훑고는, 상반신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유선이랑은 어떻게, 잘 돼 가?"

"에, 에이이, 저 같은 게 어떻게 변호사님이랑 잘 돼요."

"대학생 때부터 붙어 다녔지? 슬슬 정들지 않았겠어? 유선이 걔도 참, 고집만 세서 그 나이까지 결혼도 안 했잖아. 선 자리도 열심히 거절하구."

"그 정도로 일이 바쁘시다는 거죠. 하지만, 제가 열심히 서포트해드리고 있습니다!"

"아하하하하. 내가 바람도 잘 넣어볼게. 내 말을 은근히 잘 듣는다, 걔? 그러니깐......"

유신은 검지손가락을 세워 제 입술에 가져다 댄다.

"내가 오 탐정 찾아온 건 유선이한테 비밀이다?"

동현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탐정 사무소 밖의 하늘은 아찔할 정도로 새파랬다.

유신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정신 사나운 카지노에서 있었던 일을 반추한다.

첫 번째 폭발 후에, 꼭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았던 소란스러운 폭발 이후에, 유신은 속이 안 좋아져서 화장실로 향했다. 여자 화장실은 출구 근처에 있었다. 현기증이 이는 몸을 이럭저럭 가누어 홀을 가로지르다가, 불현듯 시야에 이상한 물건이 잡혔다.

무선 이어폰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이어폰은 원래 두 쪽이 한 쌍인데, 한 쪽만 떨어져 있는 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이어폰을 주워 들고, 다시 여자 화장실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가장 안쪽 칸막이의 문을 열어 들어갔다. 변기 커버를 내리고 그 위에 앉았다. 귓가를 짓누르는 느낌의, 기이한 이명은 멈추지를 않아서, 유신은 손에 쥐고 있던 무선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아 넣었다. 이명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문제이니 귀를 막아도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귀를 막고만 싶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고막으로 흘러들어왔다.

두 남자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접견이니, 폭탄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음질은 좋지 않았지만, 게다가 한 사람은 아주 짧은 단어로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유신은 알아챘다.

이건, 나무의 목소리다.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듯한 이 목소리는, 나무의 것이 아닐 리 없다.

다른 남자는 나무를 보스라고 부르고 있다.

보스?

어디의?

대화의 맥락에서 짐작건대, 조직폭력단의?

하지만, 같이 살면서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유신은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이명은 어느새 잦아들었다.

그 대신, 심장이 잦게 뛰어서, 유신은 제 입꼬리가 비실비실 위로 올라가는 것을 지각했다.

아아, 재미있어서 죽을 것 같다......

유신은 한동안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그런 추억이, 봄날의 볕 아래서 되살아났다.

바람을 타고 날던 벚꽃잎이 춤을 추듯 거리에 내려앉았다.

유신은 풍성한 머리칼을 귀에 걸곤 환하게 웃었다.

14

소나무는 시장통의 좁은 골목으로 몸을 끼워 넣었다. 잠시 주소를 확인하며 두리번대다가, 목표한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민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천천히 밟아 내려간다. 스물 여섯 단 째에서 지하실의 문이 보였다. 불투명한 창문이 작게 나 있다. 흐릿한 광원이 그 뒤에서 일렁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 뜯겨나간 벽지에 파이프 관이 드러난 천장. 굴러다니는 가구라곤 먼지 앉은 싸구려 소파 세트 세 쌍이 전부. 폐업한 다방을 연상케 하는 인테리어다. 실상 그것이 맞기도 하고. 일 년 전에 망한 다방의 잔재라고 하는데, 위치가 위치인지라 새 점포가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던가.

미팅 상대는 구석에 놓인 소파 세트에 앉아 있었다. 그 바로 위에 매달린 주황빛 전구가, 이곳을 비추는 유일한 광원이다.

"일찍 왔네."

"보스를 기다리게 만들 순 없죠."

백정우는 말끔한 얼굴로 나무를 맞이했다. 소파 앞 테이블에 유명한 체인의 커피가 두 잔 올려져 있다.

"난 요즘 시간이 많아서......"

나무는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는다. 소파고 테이블이고 먼지가 싹 털려있다. 정우가 쓸어놓은 걸까, 아니면 우리 이전에도 손님이 왔었던 걸까......

"아아, 보스를 카지노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설마 그 새끼들, 그렇게까지 멍청한 테러를 벌일 줄은......"

"뭐, 내가 자원한 거잖아. 결과적으로 잘 살아 나왔고."

동두천 쪽에서 무언가 트러블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은 건 폭탄 테러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카지노 땅따먹기에서 진 로컬 폭력단이 의원과 접촉하려 한다. 이미 건물도 세워졌고 개장도 했으니 그 녀석들이 손을 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나. 접견 장소 근처에서 몇 명이 대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카지노 바로 옆 회의실에서 만난다고 하니 안에 도청기를 심어두고 상황을 살피자.

라고, 정우는 나무에게 보고했다. 마침 접견 날에 마감거리가 없던 나무는 대뜸 제가 현장으로 가겠다고 자원했고, 정우는 기겁하는 목소리로 보스를 뜯어말리다가, '안사람이 카지노를 가 보고 싶어했어.'라는 말에 결국 손을 들고야 말았다.

안사람이라는 말은 거짓이었지만, 유신이 카지노에 가고 싶어했던 건 사실이었다. 강원랜드 2호점이니 뭐니 하는 뉴스를 보곤 눈을 반짝이곤 했으니까. 

나무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카지노에 가 보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유신은 미끼를 덥석 물어선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이상한 보람을 느끼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이후 배달원에게 신형 무선 이어폰으로 위장한 도청기를 받았다. 조그마한 박스 포장마저 시판되는 그것과 똑같았다. 언뜻 보면 평범한 무선 이어폰 세트처럼 보이지만, 사실 왼쪽 기기만이 진짜 이어폰이었다. 오른쪽 기기는 이어폰으로 위장한 도청기인 것이다. 무전 기능도 포함되었다곤 하는데, 과연 쓸 일이 있을지.

그래서 나무는 친구의 대국을 봤다. 카지노에 들어가기 전부터 왼쪽 이어폰을 끼곤 열심히 감상했다. 솔직히 초장부터 친구의 승리가 너무 명확하게 보여서, 중반부턴 보기 지루했다. 마침 카지노에 입성해 이어폰을 갈아 끼우게 된 게 천만다행이었다.

신나게 카드를 만지는 유신의 뒤에 서선 대국을 보는 척 했다. 바둑이나 체스는 할 줄 알지만 플레잉 카드는 정말 할 줄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네가 하는 걸 보고 룰을 익힐게, 라는 허울 좋은 변명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접견의 내용이 오른쪽 귀로 흘러들어왔다. 로컬 조직원은 분개하고 있었다. 몸담은 조직이 그만큼 쇠락했으면, 지금이라도 그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게 상책일 텐데. 어째서 마지막까지 최후를 같이 하려고 하는 걸까. 하기사 그 정도 분간도 못 하니 조폭이 된 건가......

고소가 비어 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접견의 분위기가 이상해진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폭탄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허세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말투가 담담해졌다. 그렇다면 이건 블러프 따위가 아니다.

유신이 게임을 마치고 일어났다. 나무는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평온한 얼굴을 가장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대국에 집중하는 척을 하곤, 은근히 벽 가를 향해 걸었다. 폭탄 테러라면 일단 중앙에서 터질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물론, 첫 번째 폭발은 중앙이 아니었다. 입구와 출구 근처였다. 하지만 유신을 보호한다는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약하게 발작한 유신에게 약을 먹이고. 최대한 폭발 현장에서 멀어지고. 심신 안정용 음료수를 받아오고......

유신이 화장실에 간 사이 정우에게서 무전이 왔다. 로컬 녀석들을 어떻게 들볶았는지 폭탄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일단 창가에만 있으면 폭발에 휘말리진 않겠다는 판단이 서서, 나무는 줄곧 통창 근처 테이블에 앉아있기로 했다.

그 뒤로의 사달은, 떠올려서 감상에 젖을만한 추억은 딱히 아니다.

나무는 맞은 편에 앉아있는 정우를 바라본다.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멀끔한 와이셔츠 차림. 길가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샐러리맨 정도로 인식할 테다.

"도청이 도청당했다는 얘기는 드렸었죠?"

"응. 그랬지."

아마 정보상 녀석이 손을 뻗친 게 아닐까. 나무는 그렇게 예측했다. 이제 동두천 쪽의 조직을 견제하는 파는 없는 거로 아니까. 로컬 조직이 이쪽을 견제하긴 했지만, 그나마 남은 녀석들마저 폭탄 테러와 함께 화려하게 산화하고 말았으니.

"저는 VIP실 앞 로비에 있었는데....... 일단 로비에는 수상한 녀석이 없었습니다."

"그럼 카지노 안에 있었던 건가?"

"그런 것 같아서, 그 날 카지노 출입 명단을 뽑아왔어요."

정우는 제 옆에 두었던 서류 가방에서 파일철을 하나 꺼내 든다. 표지를 활짝 펴선 나무에게 건넸다. 카지노 출입은 신분증 대조 등을 통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으니 명단을 빼돌리는 건 쉬운 일이었으리라.

"많이도 왔네."

"예. 테러 이전에 나간 사람이 삼백 명 좀 안 되고. 테러 때문에 갇혀있었던 사람이 대략 백 이십 명."

"접견을 도청했으면, 낌새를 눈치채고 테러 이전에 나갔을 수도 있겠네."

"그래서 테러 전 명단도 전부 뽑아왔죠."

나무는 명단을 슬슬 넘겨 본다. 한 장에 오십 명씩, 총 사백 십 오 명.

"입장 순서구나?"

나무와 유신의 이름 역시 쓰여 있었다. 오후 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입장. 퇴장 시각은 기록되지 않음.

"네. 한 명 한 명 신상을 확인해 보고 있습니다."

"힘들겠네...... 기껏해야 정보상 부하일 텐데, 안 찾아도 되지 않나? 쓸모 있는 정보가 오간 접견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뭐, 할 일 없으면 찾아 봐. 잡아서 털면 뭐라도 재밌는 정보가 나오지 않을까......"

명단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나무가 아는 이름이라곤 유신 뿐이었다.

"......어라?"

내가 아는 이름이, 유신이 밖에 없다고?

이 명단 안에?

나무는 급하게 명단의 첫 페이지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시간을 들여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본다. 정우는 의아한 얼굴로 보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다.

"왜 그러세요?"

나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빽빽한 활자의 나열 안에서, 있어야만 하는 이름을 열심히 찾아보고 있다.

명단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의 이름이 없다.

"......뭐야?"

계약서에도 쓰여 있던 이름이, 금융 거래 때에도 보았던 그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백도화가, 없다.

"......보스?"

나무는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그, 꼭 다른 사람 같았던 분장은......

설마......

"무슨 일이에요?"

"정우야."

"예?"

"카지노 입구 CCTV를 좀 보고 싶어."

선글라스에, 가죽 점퍼. 그리고 크로스백.

대충 그 정도의 복장이었지, 분명.

예상치 못한 축머리를 마주한 기분이다.

이대로, 기세를 이어서, 몰아 넣어서, 전부 잡아버리면......

적어도 팻감 역할은 할 수 있겠지.

소나무는 비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형형한 눈동자가 불그스름한 전구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