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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lucky D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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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추격전 끝에 광장 한복판까지 내몰린 빌런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를 뒤쫓느라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레이가 품속에서 주저 없이 권총을 꺼내들어 위협사격했다. 진작 이랬어야 하는데 쓸데없이 힘을 뺐다는 생각이다. 난데없는 총성에 거리를 오가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른다. 이대로라면 정말 잡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주변을 마구 두리번거리던 빌런이 곁을 스치던 행인 하나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움켜쥔 폴딩나이프가 행인의 목덜미로 향한다. 지척에 멈춰 선 칸이 눈앞의 광경을 의심한다. 별안간 인질극으로 변해 버린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소대로라면 집안에 얌전히 처박혀 있어야 할 레이가 왜 여기에 나와 있는 건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더니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가 보다. 칸의 매끄럽고 단단한 낯 위로 미세한 파문이 인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빌런의 손아귀 아래 창백하게 질린 레이뿐이다. 사정없이 흔들리던 까만 눈동자가 그의 뒤에서 씨근대는 빌런을 지나 비로소 칸에게 닿는다. 그 곧은 시선을 느낀 칸은 아주 짧은 순간 망설였을 뿐이다. 그러나 타이밍은 이미 지나갔다. 시린 칼날이 레이의 턱밑을 천천히 파고든다. 빌런은 그를 똑바로 겨누고 있는 칸의 총구 앞에서도 기세등등한 표정이다. 곧장 머리통을 쏴 버릴 걸 그랬지.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 자제하려 했건만, 이쯤 되면 칸에게도 더 참을 이유가 없어진다. 지금 제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죄 없는 시민을 인질로 붙잡고 있는 빌런이다. 그렇잖아도 살려두지 않으려 했던 판국에 스스로 명분을 제공했으니 차라리 고마운 일이다. 문제는 그가 붙들고 있는 레이의 안전인데……. 칸은 빌런의 칼 끝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가 아무리 노련한 살인마라고 해도 권총에서 발사되는 탄환보다야 빠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인질이 먼저 죽으면 빌런도 죽을 수밖에. 결정은 금방 끝난다. 칸은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시민들을 흘끔, 곁눈질한다. 그들은 저마다 입을 틀어막고 숨죽이거나 혹은 아예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다. 개중에는 칸을 알아보고 그를 응원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코앞에서 무어라 소리쳐 대는 빌런의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칸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저런 종자하고는 말을 섞을 필요도, 그럴 가치도 없었다. 숱한 도발에도 반응이 없자 불안해진 빌런이 순간 폴딩나이프를 레이에게서 거둔다. 피를 묻히고도 은빛으로 칼날이 그의 반응을 즐기는 시민들을 향해 허공을 가른다. 칸은 그 때를 놓치지 않는다. 먼저 한 번의 총성, 쏘아져 나간 탄환이 빌런의 손등을 꿰뚫는다. 나이프가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리고 다시 두 번, 세 번…… 총성이 이어진다. 온몸을 관통당한 채 피 흘리는 빌런에게 칸은 천천히 걸어 다가간다. 그사이 몸을 피한 레이가 곁에 움츠린 채 그를 올려다 보고 있다. 칸은 레이와 눈 맞추며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린다. 빌런의 이마 한가운데에 깨끗한 관통흔이 남는다. 눈을 뜬 채 죽은 그의 시체를 구둣발로 밀어내고, 칸은 제 손에 묻은 빌런의 피를 옷자락에 대충 문질러 닦는다. 그리고 레이에게 손을 내민다. 뭐라고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레이는 그저 조용히 칸의 부축을 받고 일어날 뿐이다. 시민들의 환호가 이어진다. 칸은 그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감사합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으레 하듯 인사치레를 건넨다. 사후 처리는 지원 팀이 알아서 해줄 테니, 그에게 남은 일은 갑작스레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를 안전한 곳까지 인도하는 것뿐이다.

번화가에서 얼마쯤 멀어져 시민들의 눈에도 띄지 않게 될 즈음이면, 내내 굳어 있던 칸의 입가에도 슬금슬금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다. 응급처치로 손수건을 스카프처럼 목에 묶고 걷던 레이가 불안한 기색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시선을 느낀 칸이 걸음을 멈추고 의기양양하게 묻는다. 나 아까 멋있었지? 레이는 심란한 표정으로 다시 눈을 피한다. 기대한 적 없는 반응에 칸이 버럭 소리친다. 뭐야, 빨리 대답 안 해? 하지만 레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혼자서 재촉할 뿐이다. 당분간 외출은 정말 하지 않아야겠다고 거듭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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