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내림을 받아도 아이돌이 될 수 있나요? - 1화
안녕하세요, 박수 곽람입니다.
그믐달만 간신히 뜬 깊고 어두운 밤, 곽람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눈물을 찔끔 짜냈다. 누가 좀 구해주세요. 제발요. 어디 지나가는 무당 없나요? 여기 귀신이 산 사람을 덮쳐요! 누군가의 손이 희고 말랑한 뺨을 쓰다듬자,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 얘 좀 봐요, 언니. 겁 먹었나봐.”
“그러게. 귀엽기도 하지.”
“얘, 그러지 말고 눈 좀 떠보련?”
긴 머리채를 총총 땋아 내린 홍안의 소녀들이 그를 가운데에 두고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색색의 치마저고리가 봄 들판의 꽃밭처럼 고왔다. 이렇게만 보면 사람인지 귀신인지도 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내려다보는 눈에 흰자위가 하나도 없다는 점만 뺀다면.
람은 그네들의 새까만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생각했다. 잠옷 바지가 홀랑 벗겨지기 전에 누구든 나타나 구해준다면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겠다고. 이거 시간제한 있습니다. 나는 바지 벗겨지기 전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어, 어어, 스톱, 벗기지 마! 옷 들추지 마! 꺄악!
“살려주세요!”
아. 목소리가 트였다. 람은 배에 힘을 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가위에 눌려 움직이지 못하던 몸도 조금 둔하게나마 풀어졌다. 재빠른 동작으로 후다닥 옷자락을 여민 그가 뒷걸음질을 쳐 방의 구석진 모서리로 도망쳤다. 그러나 귀신 처녀들은 겨우 그 정도로 먹잇감을 포기하지 않았다. 독 안에 든 쥐처럼 몰린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가렸다.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높아져갔다. 이젠 꼼짝없이 순결을 빼앗길 거라고 생각한 찰나였다.
“에그머니나, 이게 다 뭐래? 얘, 람아. 너 대체 뭘 달고 온 거니?”
구원자가 나타났다. 람은 말간 얼굴에 서러움을 한가득 담아 그를 불렀다. 청장님! 문틈으로 방 안을 엿보던 남자는 어느새 장지문을 밀어 열고 문지방을 넘었다. 팔짱을 끼고 섰던 그가 손끝으로 부적을 집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래, 그래, 만인의 슈퍼 달링 주술청 청장 구세진, 여기 등장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제 순결을 지켜주세요……!”
반쯤 벗겨진 잠옷을 부여잡고 매끈한 어깨를 무료로 대공개한 람이 간절하게 외쳤다. 세진은 깔깔 웃으며 부적을 태우기 위해 라이터로 불을 지폈다. 여름이었다.
✦✧✦
충청도 어느 동네의 깊은 산에는 ‘처녀 고개’가 있다. 한 서린 처녀들의 원혼이 거친 길바닥 아래에 잠든 곳이다. 열 서너 명쯤 된다던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시신이 조각조각 깨져버린 탓에 정확히 몇인지는 몰랐다. 일제가 아름다운 이 강산을 군홧발로 짓밟던 시절의 비극이었다.
흙 묻은 손목을 붙들어 정신대로 끌고 가려는 순사들에게 ‘죽으면 죽었지, 왜놈들의 노리개가 되긴 싫다’며 도리깨와 낫 따위를 휘둘러 저항하던 처녀들은 정말로 모두 죽었다. 총질을 피해 노루마냥 쫓기며 산속을 달려 도망치다가 총에 맞아 죽고, 두들겨 맞아 죽고, 운 좋게 도망친 애들도 결국 절벽에 몰렸다. 귀밑머리가 아직 연하던 산동네 계집애들은 서로서로 손을 꼭 잡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바람의 서슬에 부푼 치맛자락이 꽃송이처럼 펼쳐지며 애달픈 목숨들이 그렇게 몽땅 져버렸다. 그 해 봄에는 뜯을 사람 없어진 쑥이며 냉이가 들판에 그득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하물며 이미 죽어버린 여자들은 오죽하겠나. 처녀로 죽은 여자들은 무덤조차 변변치 못했다. 길가나 길바닥에 묻어 오가는 사람들의 발로 꾹꾹 밟아주어야 악귀가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열 하고도 서넛 남짓한 시신이 조르륵 길 아래에 묻혔다. 오솔길이 굽이굽이 뻗은 그 언덕은 그 때부터 처녀 고개라 불리기 시작했단다.
젊은 박수 곽람은 쥘부채 끝에 달린 술을 만지작대며 생각에 잠겼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처마처럼 늘어진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찻물은 홀로 차갑게 식어갔다. 그로부터도 한참이 더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위령제를 지내주고 싶으시다고요."
성성한 백발을 쪽 지어 올린 노부인은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순을 넘기고 곧 상수를 바라보는 나이의 노인이 주름진 손으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봉투의 흰 종이 아래로 오만원짜리 지폐 다발의 누런색이 반쯤 비쳐보였다. 돈은 더 들어도 좋으니, 그 고개에 묶여 있는 우리 큰언니를 이제 그만 보내주십시오. 언니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네 살배기 여동생의 부탁이었다. 그 의뢰는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 날을 잡아 연락드리겠습니다. 살펴 가세요, 어르신."
람은 노부인을 부축하여 배웅했다.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멀어지는 굽은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이 썼다. 세상에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지만, 이런 건 조금 더 마음이 아팠다. 흰 무복 자락을 팔락이며 신당으로 되돌아온 그는 제 몸주 되시는 신령님을 향해 두런두런 말을 건넸다. 손으로는 위령제를 치르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챙기면서도 입이 쉬질 않는다.
십이신장 중 여덟째에 해당하는 미신장은 어느 때고 귀염을 떠는 신제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본래 신령이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데, 양의 모습을 두른 미신장은 그 성정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까닭인지 품 안의 아이를 몹시 아꼈다. 람이 신내림을 받기로 결정한 때부터 줄곧 그랬다. 신을 받을 운명을 피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어쨌는지. 제가 무당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던 그는 몸주와 신제자의 관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다들 이런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서야 내림을 거부한 이가 얼마나 가혹하게 시달리는지 직접 보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곽람은 미신장을 모시는 박수가 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이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앳된 얼굴의 열아홉 살 소년은 저를 찾아온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위령청'이란 곳에 이름을 올렸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그를 인솔하던 이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엔터테이먼트 회사 같은 겁니다. 무속인들에게 일종의 소속사 역할을 하는 곳이랄까? 이미 신을 받은 무당들도 있고, 아직 점지만 받은 사람들도 있고 그래요.'
자신도 위령청의 사람이라고 소개한 그는 이동하는 차 안에서 보다 상세한 설명을 더해주었다. 진혼과 위령을 전문으로 하는 '위령청', 퇴마가 주 업무인 '퇴마청', 부적을 관리하고 주술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주술청'.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기관이며, 십이신장 중 어느 신령을 모시느냐에 따라 소속이 정해진다고. 람은 제게 깃든 것이 미신장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위령청의 문턱을 넘었다.
'이제 만나 뵐 분은 위령청의 청장이신 백가야 님이세요. 술신장을 모시는 당진 백씨의 당주이신데, 조오금 유별난 분이시니 너무 놀라지 말라고 미리 말해주는 거예요. 예의만 잘 지키면 괜찮아요. 자, 그럼 들어갈까요?'
문이 열렸다. 그 방 한가운데 앉아있는 위령청의 청장 백가야와 눈이 마주쳤다. 과연 운명이 따로 정해져 있기는 한 것인지, 람은 그 날 그 자리에서 백가야의 신아들이 되었다. 신변을 정리하고, 내림굿을 받고, 그렇게 시작된 박수 생활은 의외로 적성에 잘 맞았다. 올해로 7년차,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제례를 지낼 수도 있게 되었다. 이름이 알려지고 난 뒤로는 오늘처럼 이렇게 신당으로 직접 찾아와 의뢰를 하는 일도 많아졌다.
"에구, 할머님 이거 놓고 가셨네."
달력을 펴고 위령제를 지낼 날짜를 고민하던 그는 의뢰비가 담긴 봉투 옆에 함께 놓여있는 옥가락지 하나를 발견했다. 백옥을 깎아 만든 가락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오래 착용하던 것인 듯 했다. 어쩌면 유품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만나면 드려야지. 람은 가락지를 잘 챙겨 넣었다. 조금 더 고민한 끝에 날짜도 정해졌다. 그 다음부터는 늘 하던 대로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래도 이번 일은 좀 더 신경이 쓰이는 걸."
혼령을 달랠 축문을 쓰기 위해 붓을 든 그가 뒤꽁무니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억울한 혼들 중에서도 한 서린 처녀들을 달래는 일이 가장 까다로웠다. 의뢰인에게 제사를 지낼 날짜에 대해 일러주느라 잠시 집었던 휴대폰의 액정에 제 얼굴을 슥 비춰보았다. 아무래도 많고 많은 베테랑들을 제쳐놓고 자신에게 이 일이 맡겨진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왕 하는 거 샵에 가서 메이크업도 좀 받고 갈까?"
턱을 살짝 들고 제 얼굴이 가장 예쁘게 보이는 각도를 찾아 다시 비춰보았다. 결국 카메라 앱을 켜서 셀카도 몇 장 찍었다. 앨범을 열어보니 지난번에 한풀이 춤을 추던 동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SNS에 올렸다가 조회수가 미친 듯이 올라갔던 그 영상이다. 제가 봐도 그럭저럭 보기 좋았다. 그래, 샵 예약도 하자. 곽람은 단골 샵의 원장님에게 예약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까지가 MZ세대 박수의 위령제 준비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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