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생명은 영원함을 모른다. (上)
영원을 살아가는 이와 영원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
‘너를 많이도 닮은 꽃이구나.’
정갈하게 놓여 있는 꽃 한 송이와 카드를 혜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얀 백합 한송이. 그다지 피부가 하얗지도 않은 제 어디를 닮았다고 하는 것인지, 꽃을 어루만지며 혜미는 한참을 생각했다. 민지는 한순간도 말을 허투루 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말에 숨은 의미를 찾으려는 혜미였다. 서재에 꽃과 관련된 책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도 그런 책은 나오지 않았다. 음악과 관련된 서적이면 모를까, 꽃의 의미를 알려주는 백과사전과 같은 딱딱하고도 두꺼운 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서재의 주인인 민지의 취향이기도, 또 두꺼운 책엔 손을 뻗지 않으려 하는 혜미의 습관이기도 했다.
그래도 날 생각해서 가지고 온 거니까.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에 지친 건지, 혜미는 단순히 꽃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로 했다. 원래도 다정한 민지지만, 최근 들어 자신에게 얼굴을 자주 보여주지 않아 혜미는 그 점을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민지에게서 받은 자신을 생각한 선물이 이 꽃이라고 생각하니, 그 서운함이 한 번에 가시는 기분이었다. 혜미는 꽃송이를 살짝 집어 올렸다. 그리고 코로 가져가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했다. 무리에서 떨어져 있어도 백합 한송이는 여전히 제 존재를 과시하는 듯 향긋한 여름의 햇살을 뿜어냈다. 백합이 자아내는 따스한 햇살에 취한 혜미를 깨운 것은 제 어깨를 두드리는 차가운 손길이었다.
“여기에 있었구나.”
“깜짝이야…! 언제 돌아오셨나요, 민지 씨?”
너를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많이 놀랐니? 멋쩍게 웃음을 짓는 민지에 혜미가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그럼 다행이다. 뭐가 저리도 좋은 것인지, 밝게 웃는 민지를 보며 혜미는 생각했다. 차갑게 생긴 겉모습과는 다르게 민지는 처음부터 제게 다정했었다. 숲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저에게도, 갈 곳이 없어 방황하던 저에게도, 아끼는 접시를 깨버린 저에게도, 늘 민지는 특유의 그 깊고 따듯한 웃음을 보여줬다. 왜 저에게 그러는 것인지, 안면도 그 어떤 연관도 없는 저에게 그러는 것인지 혜미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민지의 특성이겠거니 하면서 넘어가곤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혜미는 그런 민지의 웃음을 꽤나, 많이 좋아했다.
“아, 이 꽃 감사해요. 향기가 정말 좋더라고요.”
“여행을 떠난 곳에 화원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유독 널 닮았더라고. 그래서 주인께 양해를 구하고 한송이만 가져왔어. 네게 주고 싶었거든.”
“…이 꽃의 어떤 부분이 절 닮았다고 생각하세요?”
그, 제 말은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저는 잘 모르겠거든요, 저는 민지 씨나 이 꽃만큼 하얗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고… 혜미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민지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혜미의 손을 잡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나를 봐. 혜미의 눈에 비친 민지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단언컨대, 이 꽃보다 네가 더 아름다워."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은 눈빛과 자신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강한 말투에 혜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 말이라고 해도 도저히 빈 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민지의 태도에 혜미는 왠지 모를 따스함을 느꼈다. 언제나처럼 눈을 반쯤 접고 웃는 것도, 깊은 보조개를 보이며 웃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민지는 따듯했다. 제 손을 꽉 잡은 그 차가운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래, 언제나 민지가 제게 주던 그 온기가.
손을 타고, 팔을 지나 가슴으로 도착해 온몸을 돌며 자신을 꽉 채우는 그 온기의 이름이 혜미는 궁금해졌다. 언젠가부터 자신을 채우는 민지의 온기가 무엇인지, 뭐라 불러야 하는지, 그게 궁금해졌다. 제 손을 꽉 잡은 민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고 민지의 두 눈을 바라봤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저 검붉은 눈에도 온기는 존재하는 것 같았다.
“… 고마워요, 아름답다고 해줘서.”
그렇지만 아직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혜미는 당분간은 이 궁금함을 자신의 안에서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아직 민지 씨에겐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혜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방금까지 제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온기가 너무 뜨거워져, 심장을 녹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따듯한 그 온기를 가지고 싶었다. 이름도, 정체도 모를 온기가. 민지가 주는 그 온기가.
혜미는 가지고 싶었다.
‘언니가 아니었다면, 난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또 그 꿈이다. 새하얀 배경 속에 네가 멀뚱히 서 있는 꿈. 오랜만에 보는 네가 반가워 달려가는 나를 투명한 벽이 막아서는 꿈. 투명한 벽 너머 네가 무너져 내리는 꿈. 그러면 나는 보이지도 않는 벽을 몇 번이고 두드리면서 네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기억 속에서도 흐려져가는 네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른다. 사라지지 말라고 몇 번이고 외치는데, 네게는 그 외침이 닿질 않는다. 그리고 나를 저주하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 안돼, 이렇게 널 다시 보낼 수는 없는데. 널 보내는 것은 한 번만으로 족하잖아, 그 한 번으로 많이 아팠잖아, 나. 그런데 왜 몇 번이고 사라지는 거니. 왜 몇 번이고 날 괴롭히는 거니.
“… 씨, … 지 씨! 괜찮으세요?”
이건 네 목소리일까. 아니면 너를 닮은 그 아이의 목소리일까. 몽롱해져 제대로 분간이 가질 않는다. 흐릿한 시선 너머로 보이는 저 인영은 너일까, 너를 닮은 그 아이일까. 잘 모르겠지만 그냥 끌어안았다. 지금은 누구라도 날 안아줬으면 좋겠어. 그냥 그 온기를 나눠줬으면 좋겠어.
“민… 지 씨?”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네가 아닌 그 아이임을 알아챈다. 그럼에도 더 세게 끌어안는다. 네가 아닌 그 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온기가 따듯해서, 네가 아닌 다른 이의 온기가 따듯해서. 네가 줬던 온기와는 다른, 이름 모를 그 온기가 너무 따듯해서.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알 수 없는 그 온기가 따듯하니까 더 느끼고 싶어 진다.
“우, 우세요…?”
당황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흘려들은 채 계속해서 끌어안는다. 아이야, 아이야. 부디 이대로 있어주렴. 지금은 네가 나눠주는 온기가 필요해. 다른 사람도 아닌 아이, 네 온기가 말이야.
“세상에, 땀 좀 봐… 수건을 가지고 와서 참 다행이에요.”
이 저택은 엄청 크니까, 수건 하나 가지고 오는 것도 힘들단 말이에요. 작은 볼멘소리로 투덜대는 혜미의 손은 수건을 쥔 채로 조심스럽게 민지의 땀을 닦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이 혜미가 가져온 수건에 의해 하나씩, 또 하나씩 사라져 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불규칙하게 내뱉던 거친 민지의 숨도 어느덧 안정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마에서 뺨으로, 뺨에서 목덜미로, 목덜미에서 팔로 이어지는 혜미의 손길을 민지는 가만히 누워서 받아들였다. 시선은 여전히 혜미에게 고정한 상태였다. 민지의 시선을 느낀 건지, 묵묵히 민지의 팔을 바라보며 땀을 닦던 혜미가 고개를 돌려 민지의 검붉은 눈을 바라봤다.
“그래도 좋아지셔서 다행이에요. 아깐 정말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눈이 빨개지고, 땀에 흠뻑 젖으시고….”
“미안해, 갑자기 껴안고…”
아니에요, 아, 그 껴안은 게 싫다는 게 아니라, 아니 이게 아니라…, 아으…, 그…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다는 말이었어요…! 수건을 한 손에 꼭 쥔 채로 고개까지 돌려가며 손사래를 치는 혜미에 민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혜미도 긴장이 풀렸는지 작게 미소 지었다. 이내 불편하지 않은 짧은 침묵이 이어졌는데, 그 침묵을 깬 것은 혜미의 질문이었다.
“저번에도 한 번 이러셨던 적이 있으셨죠…? 그때도 궁금했는데, 악몽이라도 꾼 건가요?”
“악몽… 일려나.”
사랑했던 이를 떠나보내는 꿈이 악몽이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하나 민지는 입 밖으로 그 사실을 꺼내지 않았다. 혜미에겐 굳이 사랑했던 이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모순이었다. 일부러 닮은 그 아이를, 모든 시간이 멈췄던 그때 이후로 그 어떤 존재도 들여보내지 않았던 제 저택으로 데려와 지금까지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저였는데. 잊고 싶은 것인지, 잊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민지였다.
“… 다음 여행에선 잠이 잘 오는 차라도 사 오시는 게 어떠세요? 캐모마일이나, 마음을 진정시킨다고 들었어요.”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혜미의 눈엔 온기가 깃들여 있었다. 민지를 향한 걱정 이외에도 무엇인가가 더 담긴 그런 따듯한 온기. 아까 민지가 그렇게 끌어안고 싶었던 온기가 혜미의 밝은 갈색 눈에 깃들여 있었다. 이 또한 모순일까. 너를 닮은 아이에게 이 따스한 감정을 품는 것은 너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새로운 이를 품게 된 것일까. 확실한 것은 네가 품고 있던 온기와는 다르다는 것.
그렇다면 이 감정은 또 다른 감정일까. 속으로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진 민지가 웃으면서 혜미의 뺨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길에 깜짝 놀란 혜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민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볼에서도 느껴지는 혜미의 온기가 제 차가운 손을 따듯하게 데워주는 것만 같았다. 계속되는 쓰다듬에 혜미도 익숙해졌는지 제 볼에 다가온 민지의 손을 감쌌다. 차가울 터이지만 어째선지 따듯한 민지의 손을 쓰다듬으며 혜미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정체를 모를 이 온기. 지금은 이렇게라도 만지고 싶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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