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트레이스 유 / 2천 자, 오마카세
“지금까지 클럽 드바이의 보컬, 구본하였습니다.”
조명은 꺼졌고, 공연도 끝났다. 무대에서 내려온 구본하는 등에 기타를 둘러멘다. 물을 충분히 마셨는데도 목이 탔다. 구본하는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한다. 그리고 삐걱대는 클럽 계단을 끝까지 올라간다. 제법 묵직해 보이던 철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바깥은 아직 어스름이 깔린 새벽인데도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들이쉬는 숨이 습기로 한껏 눅눅했다. 잠깐 주춤대던 구본하가 새카만 아스팔트 위로 한 발짝 내딛었다. 기분이 영 어색했다. 구본하는 걸음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제자리를 맴맴 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올린다.
동이 트고 있었다.
구본하는 그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본다. 높게 늘어선 건물 사이를 비집고 천천히 떠오르는 햇빛이 거리를 환하게 적시고, 헤벌어진 입안으로는 여름날의 더운 바람이 파고든다. 낯설기로는 둘 모두가 마찬가지였지만 구본하는 적어도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감각할 수 있었다. 구름이 이렇게 자욱한 날에도 아침은 더없이 밝다는 것이나, 혀에 스미는 흙먼지의 텁텁함 같은 것을. 구본하는 들뜬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한다. 모르는 사이에 걸음이 차츰 빨라진다. 처음에는 머뭇머뭇 몇 발짝 걸어볼 뿐이었던 그가 어느새 한껏 신이 난 얼굴로 골목의 끝에서 끝까지 내달리고 있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점의 알록달록한 간판들, 몇 개의 모퉁이를 돌아 마주친 큰길을 여유롭게 지나가는 다종다양한 차들을 하나씩 구경하다 보면 머리꼭지가 흥분으로 터질 것 같다. 마침내 자유다. 사방이 너무 넓었다. 구본하는 어디로도 갈 수 있었다. 일찍부터 출근하는 몇몇 사람들의 감흥 없는 시선이, 길 한복판에 멈춰 선 구본하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져나간다. 그는 그것을 온전히 느낀다. 그리고 생각한다. 별 거 아니네! 아무도 날 싫어하지 않아. 그러게 내가 뭐랬냐, 나는……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던 구본하가 그대로 멈춘다. 지금 누구한테 말을 걸고 있는 거지? 이쯤에서 시비를 걸어 오는 목소리가 하나 있어야 했는데, 구본하는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아 본다. 여전히 드넓고 생경한 세상 한가운데에 그는 홀로 버티고 서 있다. 주변에는 그를 가로막는 것 하나 없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불안했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클럽에 뭘 놓고 왔나? 기타는 잘 메고 있고, 물병은, 지갑은, 아니.
노래 안 할 거야?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게 대체 누구냐고. 구본하는 아직도 거리에 서 있다. 그의 곁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피곤한 기색으로 느릿느릿 걸어갈 뿐이던 그들은 자꾸 바빠진다. 더러는 커다란 가방으로 구본하를 밀치고 뛰어가기도 한다. 거리의 소음이 커져 가고 있었다. 영원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다. 구본하도 그것을 안다. 더 늦기 전에 어디로든 가야 하는데. 햇볕이 점차 강해진다. 어느덧 높이까지 떠오른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빛에 붉어진 살갗이 따갑고 간지럽다. 구본하는 제자리에서 비틀댄다. 등에 멘 기타, 잠긴 케이스 안에서 잘그락대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하지만 이렇게 붐비는 길바닥에 기타를 내려놓을 수는 없다. 갑작스런 두통과 이명, 구본하는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앉는다. 그러고 보니 두고 온 게 있었다. 좁고 어두운 클럽 안에 버리고 온 게 있었다. 돌아갈까? 구본하는 고민한다. 그러다 결국 기억해낸다. 그러면 구본하는 결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돌아가야겠다고. 그게 맞는 것 같다고. 동시에,
점점 밝아져 세상을 다 녹여버릴 기세로 작열하던 태양.
그 빛이 한순간에 꺼진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