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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눈

1차 / 6천 자

아직 땅이 마르지 않았다. 오래된 어항의 그것처럼 비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방이 음습한 물기로 가득해 황망한 걸음은 자꾸만 미끄러진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철퍽대는 소리가 났다. 저녁 내내 퍼붓던 비가 겨우 그친 참이었다. 제롬은 머리를 숨길 우산조차 없이 폭우를 뚫고 걸어 여기까지 왔다. 지금이 한밤중인 줄도 모르고 달려왔다. 간신히 사울의 거처 앞에 다다르면, 마음을 어지럽히던 조급함은 배가 된다. 피부를 적신 차가운 빗물이 점점 농밀하게 들러붙어 숨통을 틀어막았다. 제롬은 희게 질린 손으로 허공을 더듬어 제 목을 감싸쥔다. 잠시간 느껴졌던 피부의 열기는 아직 떠나지 않은 폭풍의 온도 아래에서 힘없이 스러진다. 아무렇게나 잡아뜯어 다 해어진 손톱 끄트머리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따위 연약한 고통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한다. 간신히 숨을 고른 제롬이 현관에 달린 노커를 낚아챘다. 야릇한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스민다. 쿵, 쿵, 문을 두드릴 때마다 제롬의 몸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채 젖지 않았던 처마 밑이 얼룩진다.

“제롬?”

사울이 나타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일말의 의혹 어린 발걸음이 문앞에 멈춰 서고 나면. 외시경을 확인하며 잠시 숨을 들이키는 호흡의 리듬까지도 제롬은 느낄 수 있었다. 아, 제발 서둘러 줬으면.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가 필요했다. 문은 제때에 열린다. 놀람으로 환해지는 사울의 낯빛에서 제롬은 저를 향한 반가움을 찾아 읽어낸다. 그러나 몸은 함부로 안쪽을 향해 기울어지지 않는다.

“사울.”

날세, 제롬. 끊어질 듯 위태로운, 그러나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어 결코 무너지지는 않는 질긴 음성이 제롬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저번에는 미안했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들여보내주지 않겠나. 고민이 무색하게도 사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물기로 축축한 제롬의 팔을 붙잡아 안으로 이끈다. 복도를 건너 응접실로 흘러드는 발걸음, 그것을 제롬이 거부한다. 거실이면 괜찮네. 그래도……. 정말 괜찮다니까. 완강하고 단호한 거절 앞에서 사울은 말을 삼킨다. 자네가 그렇다면야. 사울이 제롬을 불가에 앉힌다. 벽난로를 향하도록 놓인 일인용 소파는 제법 아늑하다. 제롬은 거기 앉아 몸을 웅크린다. 데운 우유라도 가져오겠네. 사울의 제안에 제롬이 퍼뜩 고개를 치켜든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부디 곁에 있어 주겠나. 목소리가 마구 요동친다. 사울은 가만히 미소지으며 그를 응시한다. 그래. 여기 있을 테니까, 좀 진정하게. 괜찮아. 연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다가도, 무릎 사이에 황급히 고개를 파묻는 제롬은 보통 겁에 질린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의 창백한 손이 허공에 잔상을 남기며 이동한다. 아무것도 보거나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머리를 숙이고 감싸안는다. 숨어야만 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뒤늦게 몰려드는 추위에 제롬의 이가 저들끼리 큰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제롬의 잇새로 찢어지는 듯한 신음성이 샌다. 제롬의 몸이, 제롬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울은 선반에서 두터운 담요를 꺼내와 그를 감싼다. 부드러운 직물이 피부에 스치는 감촉이 소름 끼쳐서, 제롬이 순간 몸을 뒤틀었으나 사울의 위로하는 소리에 금세 침착을 되찾았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것처럼 낯선 온기가 어깨로부터 내려앉았다. 제롬은 사울의 손에서 담요를 빼앗다시피 가져와 손 안에 말아쥔다. 사울은 몇 걸음 멀어져 제롬을 지켜보았다. 장작불 타들어가는 소리가 불규칙한 노이즈로 울렸다. 무언가 힘없이 부러지는 소리처럼 불길한 배음이었다.

“그날은, 내가 너무 실례를 했지. 미안하네.”

“괜찮대도. 나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

사울의 동공이 넓어진다. 그 이야긴 그만두기로 한 게 아니었나? 급히 되물으면, 제롬이 다시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아니야. 지난번 이야기를 마저 하세나. 제롬을 둘러싸고 있던 담요가 흘러내린다. 여전히 추웠고, 몸이 떨렸지만. 제롬은 그것을 도로 주워 두르지 않았다. 짓눌리는 듯한 감각을 견딜 수 없었다. 그대신 목을 꽉 조이던 타이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다. 단추가 잘 풀어지지 않아 차라리 잡아뜯으려는 것을 사울이 제지했다. 따뜻한 손이 제롬을 대신해 두 개의 단추를 끌러낸다. 어떤 효용이 있는지 대번에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조금쯤 괜찮아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거칠게 차오르기만 하던 숨이 어렴풋하게나마 안정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듯 웅크려 있던 제롬이 문득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자세를 바로했다. 밤호수에 물안개가 자욱하듯 흐리기만 하던 눈동자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제롬은 혀를 내어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신다. 그리고 힘겹게 내뱉는다. 이제 들을 준비가 됐네. 그것을 일종의 신호처럼 받은 사울이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도 비가 몹시 내렸네. 미친 듯 천둥이 치고 번개가 떨어졌어. 폭풍이 그토록 몰아쳤다면 창문쯤은 손쉽게 부술 수도 있었겠지. 안에서만 열리는 튼튼한 창문이, 완전히 반대로 개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냥 그런 셈 치자고. 하지만 방 안의 모든 기물이 푹 젖어 있었네. 그냥 비바람을 맞은 정도가 아니라 양동이를 가져다 일일이 물을 퍼부은 것처럼. 급하게 휘갈긴 편지가 책상에 고인 물웅덩이에서 번지며 녹아가고 있었지. 그분은, 아, 그분은 겁에 질려 계셨어. 천장 구석을 바라보고 계셨다고. 거기엔 무언가 기어간 듯한 자국이 있었네. 달팽이의 점액질처럼, 혹은 문어의 빨판처럼. 짓눌린 흔적이……. 연거푸 말을 쏟아내는 사울의 얼굴은 혼란과 의심으로 어지럽다. 그러나 두려움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알고자 하는 의지만이 분명했다. 제롬은 그의 얼굴을 멀거니 응시한다. 감히 입술을 움직여도 될지, 소리내어 발화해도 될는지 알 수 없었다. 건조한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이다가 다시 닫히기를 몇 번. 제롬은 사울의 눈 안에 가득한 간절함을 읽는다. 제롬이 숨을 들이켰다. 마침내 침묵이 끝나고 그의 입술이 열리려는 순간.

큰 소리가 났다. 멀리에서. 아니, 지척에서? 커다란 것이 높이에서 추락해 사정없이 박살나는 파열음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몸을 숙인 사울이 제롬을 감싸안고 바닥으로 엎드렸다. 감은 눈으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기다렸으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벽난로는 여전한 모습으로 고요히 타들어가고, 소파도 책장도 모두 제자리에 그대로다. 한껏 움츠러든 제롬만이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그의 머리칼에서 사울은 물의 비린내를 느낀다. 축축한 우기의 냄새. 무겁고 습한, 무엇보다 차가운. 그 냄새 너머로. 사울은 바다만이 갖는 특유의 소금기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어째서?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보다야 겁에 질린 친구를 가엾어하는 일이 우선이었으므로. 사울은 제롬을 겨우 일으켜 세운다. 바닥에 떨어졌던 담요를 다시 둘러 준다. 사울, 당장. 당장 여길 떠나야 하네. 지금 당장……. 아니, 제롬. 괜찮아. 뭐가 깨졌는지 확인해야겠어. 사울! 내가 미친 사람 같겠지. 나도 알아, 하지만. 제발. 나를 믿어야 해. 제롬? 괜찮다니까. 나는 가겠네. 분명 동편에서 소리가 난 것 같아. 제롬을 지탱하던 사울의 손이 떨어져나온다. 램프를 집어든 사울은 거실 바깥으로 홀린 듯 걸음을 옮긴다. 안절부절못하던 제롬이 결국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둘은 함께 걷는다. 사울이 앞서고, 제롬이 뒤따른다. 제롬의 젖은 신발이 복도를 뒤덮은 카페트에 검은 자취를 남겼다. 둘은 계단을 올라 계속 걷는다. 그리고 붉은 문 앞에서 멈췄다. 여긴 돌아가신 어머니의 방인데. 사울이 중얼거리며 문고리를 돌린다. 문은 어떤 저항도 없이 매끄럽게 열리며 내부를 드러낸다. 확장되는 공간 틈으로 일순 큰 바람이 불었다. 그들의 숨이 잠시 멎었다.

장식장이 쓰러져 있었다. 장식장은 그대로 기울어져 투신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안에 든 내용물을 모조리 하나씩 끄집어내어 사방에 내던진 것처럼, 온 방 안이 어지러웠다. 오래된 티세트며 크리스털 조각상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져 나뒹굴었다. 이곳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사울뿐이다. 누구도 함부로 이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 보란 듯 열어젖뜨린 창문은, 이미 비는 그쳤는데도 푹 젖어 있는 바닥과 천장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제롬은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진다. 모두 내가 불러온 거야. 모두, 내가……. 연신 중얼거리는 제롬의 옆에서, 사울은 천장에 남은 잔흔을 본다. 달팽이의 점액처럼, 문어의 빨판처럼. 짓눌린 자국. 그런데 왜 두렵지 않지. 솜털이 곤두서고 전율이 일어야 마땅할 텐데, 약간의 의문만을 제하고는 사울은 더없이 평온했다. 그것에 오히려 위화감이 들었다. 제롬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발치에 원래 무엇이었을는지 모를 파편들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제야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울은 제롬을 일으켜 세운다. 힘없는 그의 몸이 자꾸만 허물어졌으나 사울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울은 가쁜 숨을 내쉬는 제롬을 단단히 붙잡아 안는다. 품에 가득찬 냉기가 시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롬에게서 옮아오는 물기 탓에 나이트가운이 젖어들었다. 그것이 조금쯤 기껍기도 했다. 둘은 복도와 계단을 다시 지나 돌아간다. 제롬은 유령처럼 비틀대며 걷는다. 걱정스레 내려다본 그의 얼굴이 언뜻 발긋하다. 이런, 자네 열이 있어. 제롬의 이마를 짚어본 사울이 뒤늦게 놀란다. 사울은 그를 손님방으로 이끈다. 언제, 어느 때나 찾아와도 쉴 수 있도록 마련된 그 방에는 안락한 침대와 폭신한 이불이 있다. 자, 제롬…… 걱정 말게. 이 방은 튼튼하고 안전해. 이 저택의 모든 개인 방이 견고하듯이. 무엇도 여길 부수고 들어올 수는 없을 거야. 사울은 제롬을 말끔한 침대에 눕힌다. 두터운 이불을 턱아래까지 끌어당겨 덮으면, 여태 잘게 떨리던 제롬의 몸이 차츰 안정을 찾는다. 혼곤한 정신이 멀어지는 가운데 사울의 굳건한 미소가 시야에 잔여한다. 그때에 제롬을 에워싸던 모든 의심과 불안은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진다. 묵직한 안도감이 빈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사울을 의지하던 손은 그가 비로소 잠으로 도피하고 나서야 떨어져나갔다. 사울은 그것을 얼마간 더 붙잡고 있었다.

편안히 잠든 제롬을 지켜보던 사울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금방 제롬의 곁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해열제와 물수건, 그리고 여벌의 가운이 들려 있었다. 갈라지고 타들어간 제롬의 입술이 하얀 알약을 얌전히 받아 삼킨다. 턱 아래로 흐르는 물을 훔쳐낸 사울은 그의 몸에 허물처럼 들러붙은 양복을 걷어낸다. 피부 곳곳에 흥건하게 맺힌 식은땀을 정성껏 닦아내는 동안에도 제롬은 앓는소리 한 번을 내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두렵게 만들었을까. 사울은 알고 싶었다. 걱정과 애정 어린 눈빛이 제롬에게 향한다. 그에게 다시 가운을 입히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면서도. 애틋함과 안타까움은 사울을 떠나지 않았다. 사울은 침대맡 협탁에 올려두었던 램프를 아쉽게 집어든다. 아침이 되면 제롬을 다시 확인하러 와야지. 부디 그가 도중에 깨지 않고, 어떤 꿈에도 방해받지 않고 잠잘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사울은 자신의 침실로 돌아간다. 반쯤 열린 커튼 너머로 비치는 창밖은 여전히 깊이를 모르도록 어둡다. 내렸던 비가 새기고 간 흔적들이 아직 유리에 총총히 매달려 있었다. 바깥은 고요하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엎질러진 어둠 위에 반사되는 스스로의 얼굴을 응시하던 사울은 커튼을 잡아당겨 닫아버린다. 누구도 안을 엿보거나, 반대로 바깥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침대는 언제나처럼 포근하고 따뜻하다. 이불을 잘 정돈해 덮고, 사울은 머리맡에 내려둔 램프의 뚜껑을 조심히 열었다. 긴 촛불이 살금살금 일렁이고 있었다. 그 아득히 푸른 심지를 바라보다가, 입김을 분다. 불꽃이 이지러지며 곧 완전히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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