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 선언

2011년

Aporia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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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약초상 <카멜리아>는 영업을 종료한다. 아킬리즈는 카운터 정리를 마치고 청소를 한 다음 선반 아래에서 큼지막한 보스턴백을 꺼내 열었다. 바로 지난주에 에버펠디에서 마을 한복판을 집어삼킨 징조가 하필 교통사고 현장을 덮쳤던 터라, 그 아수라장을 수습한 가방 속은 거의 비어 있었다. 그래도 몇몇은 구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 서랍을 연 아킬리즈는 남아있는 붕대며 거즈, 소독약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다음으로는 미리 종류별로 정리해둔 약초 다발을 하나씩 종이끈으로 묶어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보존 마법을 걸어뒀으니 당분간은 선도가 떨어질 일이 없을 테고, 필요에 따라 바로 가공해서 쓸 준비는 되어 있었다. 다음으로는 며칠 전부터 공들여 만들어 둔 마법약을 몇 병 넣었다. 진정 물약과 꿈 없이 잠드는 약이다. 필요할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든, 그 자리에 함께할 누군가에게든.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디터니 원액 재고를 긁어다 가방을 채운 다음 닫았다. 가방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은 그는 잠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며칠 전부터 일부러 상품을 보충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반은 많이 비어 있었으나, 오랜 시간동안 배인 각종 풀 향기는 여전히 공기에 감돌고 있었다. 온갖 향이 섞인 탓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캐하고 이따금씩 톡 쏘는 냄새. 그러면서도 상쾌하고 포근하며 추억을 일깨우는 냄새. 앞으로도 ‘집'이라는 단어를 듣는 모든 순간 이 냄새를 떠올릴 것이다. 2층은 오늘 아침 자고 일어나서 깔끔하게 정리를 마쳤으니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겉옷을 챙겨입고 담배 한 갑과 시가렛 홀더, 그리고 자신의 중요한 파트너인 흑단 지팡이를 챙긴 그는 마지막으로 뒷마당에 가서 지금까지 훌륭한 경비 역할을 수행해준 베네무스 텐타큘라의 굵다란 밑둥을 남김없이 잘라냈다. 아까웠지만 주기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면 무슨 사고를 칠 지 모르는 녀석이니 별 수 없다. 죽은 식물에서 흘러나온 산성액이 흙바닥을 적셨다. 후일 이곳에 다른 것을 심으려거든 알맞은 비료를 섞어 신중히 땅을 고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정말 여기서 할 일이 전부 끝났다. 아킬리즈는 돌아가서 가방을 메고 가게를 나와 문을 잠근 다음, 팻말에 걸린 혼동 마법을 해제하고 그것을 진짜 ‘Closed’가 보이도록 뒤집었다. 순간이동을 할 줄 아는 마법사에게 하루 더 자고 아침에 떠나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겠지만 그는 좀 걷고 싶었다.

길을 따라 호그스미드에 도착하면 가게들은 전부 문을 닫았고, 스리 브룸스틱스같은 주점에서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종종 이 시간에 한잔하러 들르곤 했었지만 오늘은 아니다. 아킬리즈는 잠시 한적한 거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흘러도 참 변화가 없는 동네였다. 지금도 잉크와 양말을 사고 버터 맥주를 마시던 날을 잊지 못한 것은 전부 그 탓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텅 빈 호그스미드 역에 도착했다. 내일이면 런던에서 출발한 열차가 학생들을 가득 싣고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세스트랄(당시에는 볼 수 없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마차가 열을 지어 그들을 학교로 나를 테고 사냥터지기는 신입생들을 위해 호숫가를 노 저어 올 것이다. 호수 아래에는 그라인딜로우와 인어가 노닐 것이고 결국 졸업 때까지 존재를 확인하지 못한 대왕 오징어도 어딘가에서 자고 있겠지. 그 아래엔 자신이 십대 시절을 보낸 기숙사가 있을 테다. 휴게실의 벽난로, 두터운 녹색 커튼이 달린 신비로운 창문, 대리석 계단…….

아킬리즈는 그 모든 그리운 감상을 잘 모아서 텅 빈 플랫폼에 내려놓았다. 다시 올 수 있다면 가져가리라. 그러나 그는 샤울라*가 이미 자신의 발뒤꿈치를 찔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참으로 철저하게 짜인 비극이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대결이 실은 아폴론과 아테나의 대결이었던 것처럼 새벽 하늘의 별들도 개막을 기다리며 편을 가르고 있다면 어떨까.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도 아닐 것 같아 아킬리즈는 헛웃음을 짓고 돌아섰다. 우리는 공정하기 위해 애쓰겠지만 전쟁의 성질에는 본디 공정함이라고는 없는 바, 자신은 반드시 슬퍼지겠지. 설령 모든 게 바라는 대로 풀린다 하더라도 그 후의 자신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사를 해 두는 게 좋겠다. 안녕, 사랑하는 기억들아. 안녕, 찬란히 빛났던 시절아.

나는 이제 무대에 오르러 간다.

예정된 운명을 맞이하려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이 비참한 모순 속에 몸을 던지러 간다.

*샤울라: 전갈자리의 람다(λ)성으로 전갈의 꼬리 끝에 있는 독침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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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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