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I want for Christmas is ...

괴인 산타와 노 밸리의 좋은 날

AIWFC is Zac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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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과 포식을 가르는 절대적 위계는 고댓적의 신화가 된 지 오래였다. 크리스마스도 이미 미 대륙에서 그 위상의 대부분을 잃어버렸지만, 달력을 넘기고 날을 셀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이들에게 여전히 연말은 다른 달보다 특별하게 느껴지는 데가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재시작되는 일은 하루하루의 생존이 고된 시절일수록 더 조명받는 법이었다. 그렇게 송년과 영년, 마무리와 새해 맞이를 조금 이르게 준비하는 날로 뭉뚱그려져 살아남은 인류 최대의 명절에도 그러나 과거처럼 칠면조나 거위 통구이를 찾아볼 순 없었다. 그런 걸 바라는 사람은 곧 부리 아래 촘촘하게 난 이빨에 다리를 물어뜯기고 남은 평생을 반불구로 보내게 될 테니까. 눈 벌건 어미 짐승이 자리를 비운 사이 운 좋게 알이나 새끼를 얻어다 기르며 가축화를 꿈꾸던 사람은 늘 있었는데, 그런 얼간이들도 어제는 얌전히 모이를 쪼아 먹던 어린 거위가 솜털이 빠지고 깃이 나기 무섭게 손가락을 물려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내쫓아 버리거나 줄행랑을 쳤다. 물론 그런 동물의 처분 내지 사냥은 성체보다 수월한 편이었다. 한 명의 무책임한 바보가 나오면 그날은 먼저 달려가 모가지를 비트는 데 성공한 사람이 조류 고기로 배를 채웠다. 아무튼, 심지어 화이트헤드가 닦아세운 마을에서도, 육류 공급이란 그 정도가 전부였으니 명절 음식의 명맥은커녕 트리 밑 선물더미를 기대하며 크리스마스 아침 눈을 뜬 어린이들의 영양 상태조차 제대로 수호되질 않았다.

그러나 잭은 그저그런 겁쟁이들과는 달랐다. 원한다면 날뛰는 새 몇 마리 쯤이야 언제든 잡아올 수 있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요리에 쓸 기름과 와인을 구하는 편이―밀린 외상값 탓에―더 어려운 편이었다. 문제는 토머스였다. 이튿날 전에도 어김없이 그는 총알을 찾고 있던 잭을 불필요한 사냥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말렸다. 잭이 불필요한 사냥이란 게 뭐냐고, 내가 먹고 싶은 건 필요가 아니냐고 물어도 완고했다. 구시대에 쓰이던 욕설 중 직관적인 비속어만이 아니라 조금 더 고맥락의 조롱 어휘들까지 널리 구전되어 살아남았다면 토머스는 아예 별명부터가 청교도였을 텐데, 불행히도 잭은 그 단어를 몰라서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게 한숨뿐이었다. 이제는 그도 희미하게 느끼기로 토머스는 잭의 지식이 박약한 덕을 자주 봤다. 이렇게 불만이 종종 소리를 얻지 못하고 묵과되곤 했다. 물론 그것들이 어설프게나마 봉합될 수 있던 데엔 토머스가 대체재를 성실히 찾는 성정임도 기여했다. 동물은 돌아버린 세상이지만 식물은 독액을 뚝뚝 흘리는 식인 식물만 남아버린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말이 추수감사절 기도문의 새 구절이 되었듯, 그들에겐 칠면조 대신 밀과 올리브와 사탕무와 콩이 있었다. 채유크림이 입안에서 아무리 미끌거릴지라도 낙농업이 존재하던 시절을 모른 채 먹기로는 그럭저럭 좋았다. 베이커리는 연말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부쉬 드 노엘, 슈톨렌, 아니면 그냥 케이크라도.

그래, 케이크.

토머스가 사왔고 한때는 식탁에 올랐으며 지금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저것 말이다.

재빨리 신발로 밀어 치운 덕에 그것이 창을 짚고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수상한 사람의 눈에 띄진 않을 성 싶지만, 다 뭉개진 크림이 나뭇바닥 위에서 시시각각 굳어가고도 있다. 한겨울이라 망정이지 날이 조금만 덜 추웠어도 케이크에 꼬인 개미 행렬로 음식의 존재를 들킬 뻔했다. 밖에선 그자가 몰고 온 탈것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손전등처럼 내부를 노려보고 있다. 토머스는 숨 죽이고 앉아 바닥에 길게 뻗은 그림자의 동태를 살피는데, 뾰족한 모자를 쓰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의 실루엣이 꼭 산타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할 즈음 옆에서 딸기가 잭의 송곳니에 으깨지는 소리가 난다. 돌아봐도 그는 태연하게 입안에 남은 빵을 마저 우물거릴 뿐이다.

그건 또 언제 챙기셨어요. 그래도 드시긴 드셔서 다행이랄지.

너 입에 크림 묻었다.

이 말들을 전달하는 건 모든 일이 끝난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괴인 산타와 노 밸리의 좋은 날

Monster Santa and

a Good Day in Noe Valley

 

 

 

 

 

 

[잭, 이거 봐.]

[재키, 마음에 드니?]

아침 나절의 희고 노란 햇빛이 창문을 넘어 바닥에 고인다. 간만인지 벽난로에 장작을 잔뜩 때워 집안엔 훈기가 도는데,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다 가릴 수는 없어 바닥 가까이 쪼그려 앉으면 다리부터 약간 사늘해진다. 덕분에 그를 따라 꼬리처럼 붙어 있던 졸음이 가시고 머릿속이 개인다. 잭은 선물을 마저 푼다. 리본을 끄르고 포장을 뜯는 동안, 옆에서는 엄마 아빠와 남동생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보챈다. 부부의 눈엔 어린 딸이 그들의 선물을 성에 차 할지 걱정하면서도 기대하는 마음이 트리의 알전구 불빛처럼 어룽져 있고, 양뺨이 상기된 동생은 그것보다도 자신이 받은 걸 부러워해 주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앞서는지 자꾸만 그의 시야에 물건을 들이댄다. 잭은 최초부터 딸이었지만 그와 비슷한 기간 동안 누이였고, 날 적부터 주어진 것보다는 새로 얻은 역할에 더 충실했다. 결국 선물에서 잠시 손을 놓고 동생의 걸 본다. 바퀴가 돌아가고 문을 열었다 닫을 수 있는 정교한 마차 모형이다. 잭이 가볍게 감탄하자 신이 난 에릭이 마차를 바닥에 붙이고 과시하듯 힘껏 굴린다. 작은 나뭇조각이 얼마간 가열차게 돌주하다가, 바닥재의 들뜬 틈에 걸려 그대로 튕겨나가듯 고꾸라진다.

[안 돼!] 에릭이 비명지른다.

잭은 그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콱 막히는 듯 기분이 아득해진다. [괜찮아…] 동생을 진정시키기 위해 반사적으로 흘러나온 자신의 목소리가 겹겹의 베일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듯 멀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이상한 직감에 휩싸인다. 그는 종교적인 모든 것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런 사람도 인생에 한 번쯤 현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예견의 목격자가 될 수 있다면 지금이 그런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사소한 날, 사소한 순간을 계기 삼아 무엇이 드리울 수 있단 말인가? [괜찮아. 봐 봐, 멀쩡하잖아.] 예비된 것이 아니라면 단순한 기시감일지도 모른다. 그가 기억하는 무언가. 아니, 그가 기억했어야 했지만 그의 기억이 되지 못한 장면에 대한…

 

[잭, 누나. 나 괜찮아.]

다음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가 다르다. 그가 고개를 들자 에릭은 빠듯하게 자라 있다. 손에 들었던 총은 허술하게 놓쳐 떨어뜨린 채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지만 눈에 띄는 상처는 정말로 없다. 스물 남짓의 그가 머쓱하게 웃는다. [근데 꿩을 놓쳐 버렸네.]

[됐어.] 넘어진 동생의 무릎팍이 멀쩡하단 걸 확인한 잭이 제 총신을 점검한다. 아직 탄약이 몇 발 치 남았고 구멍이 막히지도 않았다. [그런 건 다시 쫓으면 돼. 네가 안 다쳤으면 됐지.]

[아무래도 난 누나만큼 사냥을 잘하진 못하겠어.]에릭이 다리를 털며 일어난다. 붉어진 뺨 앞으로 희게 입김이 진다. 제 코도 비슷한 꼴일 걸 예상한 잭이 살갗 위를 훔친다. 손에 걸리는 흉터는 없다. 피부가 차게 얼어있는 것만이 손끝에 찡하게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손가락 마디도 추위에 약간은 둔히 굳었지만, 그는 아랑곳않고 총을 고쳐쥔다. 사냥은 사격 실력만으로 해낼 순 없다. 잭이 생각하기에, 시퍼런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거나 총에 맞고 눈 앞에서 피를 튀기는 짐승을 보고도 겁먹지 않는 담력이 더 중요하다. 눈 깜짝 않고 침착할 수 있는 건 그가 자랑스러이 여기는 성정이었지만 에릭의 말을 듣고서는 어쩐지 뿌듯함으로 가슴이 부푸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둘 다 사냥을 잘할 필요는 없지.]

[대신 넌 똑똑하잖아. 내가 못하는 몫을 하면 돼.]

그 순간 바로 옆에서 앙상히 말라빠진 참나무 가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타 있던 눈이 후두둑 떨어진다. 햇빛을 가로막고 그림자가 한 차례 장막처럼 드리웠다가 그대로 스쳐지나간다. 묵직하게 물 머금었던 그것이 땅에 충돌하며 퍽 소리가 난다.

 

 

 

[어, 일어나셨네요.]

잠에서 깬 잭이 늘어지게 하품하며 방 문을 열 때, 토머스는 거의 자기 키만한 전나무를 끌어안은 채 현관을 넘고 있었다. [식사는 이것만 옮겨다 놓고 준비할게요.] [그게 뭐야?] [트리요.]

돌아오는 답이 없자, '몰라서 묻는 거겠냐' 싶은 잭의 표정을 곁눈질한 그가 덧붙였다.

[집에 있었다고 하셔서….]

노 밸리, 삼 면이 바다로 된 거대한 곶에 가까워 집세가 싼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나마 내륙인 곳에 정착한 후, 근래는 이런 식이었다. 토머스는 본래도 중대한 몇 가지 방침을 제하곤 사소한 결정―이를테면 다음 행선지, 외관으로 점쳐 고른 묵을 곳, 동참을 요하는 일거리, 하루의 일정까지―대부분을 잭에게 맞춰 타협했으나 이 집에서의 행보는 그것과도 달랐다. 단순히 가구 배치나 진열장에 늘어선 술의 종류를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잭의 기호에 생활 전반을, 그가 물러설 수 있는 부분에서라면 도리어 나서서 맞추고자 했다. 그것을 익숙하고도 편하게 느껴 의식하지 못하던 잭도 지난 가을 술에 취해 난로 안으로 거의 고꾸라질 뻔하자 토머스가 굴뚝 위치를 옮기는 공사까지 생각한 것을 계기로 알아차렸는데, 되짚어 보자니 어떨 땐 거의 아첨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특별한 날을 챙기는 것도 토머스의 습관은 아니었다. 일전의 대화에선 토머스의 어릴 적 집엔 트리도 선물 상자도 때를 맞춰 구비되고 들어가는 일이 더 드물었다고 거론되며 존 자카로의 무심함만 재확인한 참이었다. 그럴 때면 잭은 자신의 비교적 화목한 유년이 입안에 든 모래알처럼 걸렸다. 그러나 불편하니 관두라 말할 정도로 불편한 것은 아니었고, 덕분에 구색만 갖췄던 맨 전나무 트리엔 날마다 착실하게 장식이 추가되어 갔다.

마침내 전야엔 꼭대기까지 빈 브랜디 병으로 채워졌다. 한 팔에 케이크 상자를 끼고 들어오던 토머스도 그걸 보고선 탄식이 튀어나가는 걸 막지 못했다. 잭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열린 문 틈으로 불어닥치는 바람과 같이, 괴상한 트리를 바라보며 듣기엔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운 캐롤이 마을 멀리서부터 메아리치며 들려 왔다. 그러다 문득, 잭 다니엘은, 그날 결국 자신이 받은 선물은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았다.

 

해안은 위험하지만 사람만큼은 아니었다. 재해의 악점과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이라는 이점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토머스는 어렵지 않게 후자를 무겁게나마 얻어 내기로 결론지었다. 그래도 캘리포니아 줄기를 따라 길이 이어진 만큼 시가지로 나가기는 수월해 잭에게도 큰 이견이 없었지만, 토머스가 기이하리만치 사람을 피하고 싶어하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묻혔던 그것이 재조명받는 건 의외의 상황이 닥치고서였다. 그들이 막 늦은 식사를 마치고 케이크를 준비하던 때 느닷없이 문 중앙을 통과한 총알에 맞고 벽시계가 퍽 깨져나갔다. 유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판단보다도 앞서 몸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불을 끄고 인적을 지우자 좀전까지 휴일을 보내던 이들의 집안은 스산한 어둠이 꽉 들어차 주인의 유무를 분간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렇게 지금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이고 이대로 버틸 순 없었다. 일을 저지르기로 마음 먹은 채, 두손에 든 무기에 대한 자신감으로 등을 바짝 편 저런 사내에게라면 침입도 손쉬운 선택지일 것이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의견을 같이 했다. 당하는 쪽보다는 치는 쪽이 낫고, 그러려면 선수를 손에 넣어야 했다.

다 드셨어요? 토머스가 말하지 않고 물었다.

시선만으론 그 함의가 '가죠', '칠까요?', '지금 쏴요' 중 무엇일지 모르는 잭으로서도 개중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입맛을 다시며 크림을 마저 삼킨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총구를 들어올리자 일순간 총신 끄트머리가 불빛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젠장.]

불운을 직감한 잭이 읊조리기 무섭게 창 밖 사내가 몸을 기울이고, 직후 방아쇠가 마저 당겨지며 발포됐다. 창문에 챙 금이 가고, 쏟아지는 파편 탓에 팔을 들어올려 막던 토머스를 사내의 도끼가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가 역으로 자루를 잡아채긴 했지만, 쾌재로 알고 다시 총을 장전하던 잭의 예상과 달리 힘에 부쳐 반쯤 창문 너머로 끌려가다가 결국 놓쳤다. 토머스는 적잖이 충격 받은 얼굴이 됐다. 허나 사내에게 제 괴력은 일상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무기의 한 종이지, 과시하고 심취해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쉴 틈도 없이 도끼날이 거세게 박힌 창문살이 결국 부숴졌다. 총을 겨누기 위해 그들이 창문 뒤로 한두 걸음 재빨리 물러서자 마침내 얼굴이 마주보였다. 본래 푸근한 인상이었을 듯이 눈이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는 그러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흉흉한 분노가 울렁거리는 얼굴로 찢어지게 웃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자카로.]

잭이 토머스를 돌아봤다. 그는 인상을 팍 썼다.

[저는 '그' 자카로가 아닙니다.]

[아니. 네가 맞다. 그 꼬맹이 자카로. 녀석들이 말해주기로 척 보면 알 거라더니 정말이구만!]

[전… 당신을 모르는데요.]

이제 사내는 총구 세 개가 자길 향한다는 사실 따위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한참 동안 끅끅거리고 웃는 그를 잭이 그냥 쏘려 했으나, 토머스가 와중에도 급히 팔을 들어 막았다. '이유를 알아야 다른 습격은 없을지도 알죠.' 잭이 무어라 불만스럽게 소리치기 전에 그가 재빨리 속삭였다. 그러나 잭은 이제 망설임이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란 것쯤 알았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선택의 불길한 후과가 훤히 보였다. 이유를 '알게 되면', 토머스는 외면하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을 것까지를 각오하고 삽을 두 손에 드는 놈이었다. 진실이 묻힌 땅을 파헤쳐 얻는 게 공기중에 번지는 지독한 시취뿐이리란 사실을 매번 고의로 잊어버리는 것처럼. 잭은 목구멍 아래서 울컥 치미는, 그 자신도 정체를 모르는 것들을 한데 삼키고, 토머스 대신 침입자를 노려보기로 했다. 그림자 진 사내의 이목구비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이 번들거리는 것만큼은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유리알처럼. 노기로 충혈된 눈도 저렇게 선득하리만치 빛날 수 있나 의문하던 차 그들은 알아차렸다. 물이…….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고양이발 시씨.]

[네 '데뷔'였다지.]

때마침 괴물의 외눈처럼 그들을 비추던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그게 내 누나였어.]

새카만 어둠 속 그것과 같이 짙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어떤 총구도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 중 하나는 이제 정물처럼, 집안에 놓인 금속 장식물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장애물 하나에 불과하게 전락했다. 모두가 기민하게 그를 감지하자마자 잭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씨발, 그래서 어쩌라고!] 사내에게 전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언가 작열한다.

탄약에 붙는 섬광 같은 불. 뒤늦게 따라붙는 거대한 발포음. 총을 든 건 그자도 마찬가지였다. 사위가 캄캄한 덕에 겨우 오조준된 탄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가자마자 잭은 토머스의 팔을 콱 잡았다. 졸지에 피어싱이 뚫리는 건, 그것도 저런 우락부락한 놈한테는 더욱이 사양이었다. 그는 문을 열어젖히고 달렸다. 총을 막지 못하는 남루한 목질 벽과 함께 벌집이 될 수 없어 무작정 뛰쳐나왔지만 밖은 흰 달빛이 그들을 노리는 광막한 사냥터였다. 침입자의 탈것은 어울리지 않게 차체가 작은 모터사이클이라 엄폐물 삼기에 역부족이었다. 다소 무방비하게 언덕을 향해 내달리면서, 잭은 견제 사격을 비스듬한 뒤편으로 마구 쏴갈겼다. 별 효용은 없었다. 녀석의 총알도 눈치를 봐 가며 끈질기게 날아들었다. 그나마 인적으로 닦였던 길을 벗어나자 금세 흙모래가 발에 패이며 사방으로 튀었다. [다니엘 씨.] 맥없이 따라 달리고만 있던 토머스가 바람 빠지듯한 중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잭은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잭….] 칩칩한 물기나 우울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무슨 생각으로 부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의 앞에서부터 개두마차의 바퀴처럼 돌진하며 굴러 내려오던 회전초가 사내의 탄에 맞아 튀어올랐다. 그 부서지는 파편이 돌풍에 순식간에 휘말려 가는 걸 보며 잭은 직감했다.

그 선물은 인형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는 물론 총 쓰는 법을 아버지에게 배웠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사시에 부부가 맏딸의 취향을 알아차리고 존중해 주었던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으니까.

아니,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다. 지금 손에 쥔 팔이 목각인형이래도 좋을 만큼 순순히 덜렁거려서 그런 생각이 든 거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에릭이 결국에 안심했는지, 그 마차 모형을 언제까지 갖고 놀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더라.

열 일곱에 멈춘 동생의 스무 살 적 목소리를 언제부터 토머스와 비슷하게 상상했더라.

가만히만 두면 이런 식으로 점차 모든 게 덧씌워지는 걸까.

[죄송해요.] 토머스가 말했다. 잭이 그를 돌아보는 것보다 빨리 그가 잭을 잡아끌었다. 언덕을 끼고 드문 민가 하나가 있었다. 모래바람을 틈타 외벽 뒤에 몸을 숨기고, 숨을 다 고르기도 전에 토머스는 고개를 고꾸라뜨렸다.

[제가 시씨를 죽인 바람에.]

[현상범이었잖아.]

[저나 다니엘 씨도 걸린 적은 있잖아요. 화이트 헤드의 판단을 어떻게 믿어요.]

[이런 상황에 '나쁜 사람'이 뭔지 토론이라도 하자고?]

[그런 게 중요하다기보다도…]

멀리 총성이 다시금 길게 울렸다.

[범죄자라서가 아니라 먹고 살겠다고 죽였던 거니까.]

[자카로.]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어요.]

[경력도 짧은 놈이. 몇 놈이나 달았다고 복수 당할 걸 생각하지.]

[한 명만이어도 충분했죠.]

그러나 후회, 과거에서 올라오는 후회라기보단 현재형의 낭패감이 짙게 묻어났다. 그가 자책을 중얼거리면서도 말하지 않는 단 하나를 잭은 알 것 같았다. 토머스는 분명한 명사와 사건을 입에 올리는 것만큼은, 그래서 그들이 더는 모른 체하며 좀슬고 비루먹은 모포로 틈을 덮어두지 못하게 되는 일만큼은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잭이 진정으로 모를 거란 기대나 더께 쌓인 가책을 덜어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충분했잖아요.]

[숨지 말고 나와!!]그때 부쩍 가까워진 사내의 노성이 들렸다. 몸을 숨길 만한 큰 기물은 근방에 두엇 뿐이라 범위가 좁았다. 다행히도 그들의 차폐를 돕는 주택엔 마굿간이 딸렸던 모양으로, 이제는 비어버린 그것이 몇 야드 너머에서 다 멎지 않은 바람에 스윙도어를 펄럭이고 있었다. 다만 시씨의 동생은 말과 달리 그곳이고 집이고 할 것 없이 난사에 가까이 총을 쏴갈기고 있었으므로 상황의 각박함은 여전했다. 작게 개량된 권총이라 사거리가 짧고 총탄이 이리 저리 빗맞히며 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도 토머스는 습관적으로 총알의 값을 머리로 어림했는데, 총기상에서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기로 크기는 작으면서 스피처의 두 배치가 나갔던 대로 계산하니 사내가 지금껏 쓸모 없이 땅과 벽에 꽂아넣은 것만으로 몇 주에서 몇 달치 식량을 벌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얼마치를 내버리고 있는지 판단이 안 서고 있거나, 의외로 부유하거나, 그보다 높은 확률로 내일의 생활이 중요치 않게 된 자였다. 매몰된 사람은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머릿속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행동할 줄 알았다. [그래서…] 잭이 뇌까렸다. [그래서 죽어주기라도 할 거냐?] 숨에 부치게 턱 끝까지 차오른 지긋지긋함을 겨우 참는 표정이었다. 창문으로 침입하려는 산타건 도적떼건 무리로 몰려와도 두렵지 않았지만, 차라리 토머스를 떠밀어 바치고 도망치고도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바닥은 질척이지 않았다. 사막이 대륙을 집어삼킨 후엔 겨울에도 눈이 드물었다. 그러나 언제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생각했던 그 자신의 자유로운 팔다리도 실은 매 순간 보이지 않는 굴레에 매여 있었다는 광포한 직감이 잭의 몸을 짓눌렀다. 입을 꽉 다물었던 토머스가 뒤늦게 고개 저었다. 잭이 먼저 무어라 대꾸하지 않자, 그가 말했다. [제압해야겠죠.]

그러다 반질반질할 정도로 잔금이 숱하게 남고 노쇠한 총을 장전하며 문득 맥빠진 웃음을 지었다.

[칠면조 그냥 잡을 걸 그랬어…….]

 

타협의 자리로 곤두박질침과 동시에 그는 총구를 든다.

잭은 잠시 발을 떼는 토머스를 망연히 봤다가, 시간이 길게 늘어지는 걸 틈타 정신에 불을 킨다. 그리고 벽 밖으로, 법일랑 그들을 돌보지 않는 곳으로, 사람이 사람을 사냥하는 곳으로 나서려던 어깨를 잡아채고 그림자 뒤로 다시 밀어넣는다. 휘청거리는 몸과 어떤 배역에 사로잡힌 몸이 교차한다.

지금도 속이 울렁거리지만. 과분하게 대우해버린 이들이 그의 역사에 너무도 많으며 오염당한 장면과 웃음이 지겹도록 잦지만. 마냥 이런 식으로 마음을 맡길 순 없지만.

이렇게 살고 싶기도, 더는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탕. 애리조나의 삐쩍 메마른 사구아로 선인장 위에 앉아 부리를 덧댈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터키 독수리가 총성에 놀라 날아오른다. 더 빠질 깃털이 없는 앙상한 날개로는 공기를 얇게 저미며 쇄액거리는 소리만이 난다. 튀어올랐던 엘크가 어떻게든 땅을 짚고 서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나마 버티다가 결국에 무거운 몸뚱이를 고꾸라뜨리며 바위사막을 울리는 건 그보다 후다. 탄약 하나를 더 채워넣어야 할지 간을 보고 있던 남자가 그 광경에 가뿐하게 몸을 일으킨다. 혈향이 더 번져 이리떼나 사체 파먹는 독수리가 다시 몰려들기 전, 재빨리 손질해 떠나야 한다.

고양감은 아주 잠깐이다. 존 자카로는 이제 그것을 안다. 손바닥에 저릿하게 퍼지는 즐거움은 그 번뜩임 만큼이나 짧은데 반해 뒤따르는 후처리는 질리게도 길다. 그것만으론 사냥의 동기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겐 더 희미하고 박약하지만 끈질긴, 포연처럼 뿌옇기만 하고 손에 잡히지 않아 언제 흩어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의식하지 않고도 그 자리에 붙어있는 흉터와 같이 오래 따라붙는 기쁨이 있다. 그것을 기쁨이라 칭하는 일은 영원히 어색할 것만 같으나 그래도 기쁨이다. 소매와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피 뿜어내는 엘크를 해체하는 과정은 조금도 흥겹지 않는데, 그런데도 하게 만드는 원인을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존은 모른다. 책무나 후회는 그의 행동을 그렇게 오래 지배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연말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면 어린 아들이 어김없이 빌린 책을 읽거나 종이에 목탄으로 무언가 쓰거나 그도 아니면, 곯아떨어져 있을 것이다. 자라는 어린애의 기호를 맞추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옆 목재상에서 남는다기에 조각이라도 하고 놀으라 쥐여준 나무토막과 그 나름대로 변변한 선물이라 생각했던 수제 태엽 장난감에 보이는 반응이 거의 일치하는 아이라면 더욱이. 그러니 무엇이 잘 키우는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여도, 건강히 키우는 것만큼은 뭇 부모보다 그가 더 잘해낼 수 있다. 존은 훌륭한 사냥꾼이므로. 말구유와 식탁을 든든히 채우는 일, 자라난 톰이 무얼 하게 된다고 해도 뒷받침해줄 다릿심을 키워주는 일만큼은.

그러므로 장총을 벽에 거치해둘 날이 멀었다 해도 그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다. 포 몇 겹으로 엘크고기를 싸매고 말등에 얹은 그는 떠난다. 집으로.

 

 

 

셔츠 아랫단을 뜯어 급히 팔을 동여맨 토머스가 한숨을 퍽 쉰다.

발치엔 사내가 눈을 까뒤집고 쓰러져 있다. 토머스의 팔을 거의 베어낼 뻔했던 도낏날이 바닥에 박힌 채로도 흉흉히 빛난다.

“안 죽였으니까 됐나.” 잭이 말한다. 뒤통수를 얻어맞고 겨우 의식 잃은 거한을, 힘겨워 더 화낼 힘도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가로막혀 무용해졌던 총을 의미 없이 손 안에서 굴리다가 결국 도로 집어넣는다. “네….” 전혀 긍정같지 않지만 이 이상 초를 치기도 난처하단 게 느껴지는 투로 토머스가 답을 흘린다. 돌풍이 거의 멎어 시야를 흐리던 모래 먼지도 태연히 가라앉았다. 사위가 우스우리만치 온순해지자, 저 위, 구름조차 찾기 어려운 황야의 하늘에서 깜빡거리는 별들이 언덕 아래로 뻗은 한적하고 고요한 민가를 비추는 게 보인다. 하나같이 빛나는 동시에 하나같이 흐리다. 새 시대의 예수는 태어나지 않는지, 경외로운 광량을 뿜어내는 베들레헴의 별은 찾아볼 수 없다.

성탄의 밤이 거칠고 서늘하게 그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The End.

 

 

 

 

 

 

“근데 어떻게 끌고 가려고.”

“……아.”

토머스가 망설이다 말한다.

“끌개라도 가져올까요.”

“산타 썰매 끄는 순록 꼴이 되겠는데.”

 

Truly,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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