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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바라보는 세상

AIWFC is Starry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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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명은 무한하지 않다. 모든 ‘좋지 못한’ 개념은 병마와 병폐의 이름이 그렇듯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므로 죽음과 무한은 분명 다른 궤에 있다. 그해 극성이 낙하한 것은 죽음이 죽어가는 것들을 받아 안기에 지쳐 모든 것을 잊기로 결심할 즈음이었고, 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오직 기억만큼은 쥐고 휘두를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기꺼이 망각을 들이켰다. 오늘도 어김없이, 억눌린 기억은 악몽으로 침묵하며 곁을 지킬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별은 밤으로 향하고 어둠이 오는 만큼 빛이 있었다. 당연한 사실이므로 근거를 부연하지 않았다.

✶✵✶ 

간밤 꿈에는 잊어버린 이의 젖은 낯이 있었다. 손으로 쓸어 본 그 얼굴은 물기가 흥건했고 또 가끔은 핏자국이 형체를 가리도록 진득했다. 푹 패인 안와와 도드라진 광대뼈 사잇길을 따라 습윤한 수분이 질척이며 흐를 때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제 심장 어귀에서도 무엇인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한다. 피하고 싶었던 적 없었음에도 눈은 자연히 감긴다. 그들은 으레 바닷가에 섰고 해풍에 삭은 칼날을 서로 갈아주곤 했으므로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친우의 낯을 적시는 물기가 무람없이 들이닥친 바닷물인지 채 닦아주지 못한 눈물인지 알지 못한다.

라이온 폴라리스와의 관계에서 스카하크는 늘상 그랬다. 갈피를 잡지 못했고 섣불리 단언하거나 정의하기 어려워했다. 기실 그 섣부름이란 무도함이 아닌 과도한 신중에 가까웠음에도 그는 무언가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자꾸만 밀려났고 미끄러졌으며 그토록 바라는 간결한 단어에 닿지 못했다. 이 관계는 처음 균열이 인 날로부터 지금까지도 적극적으로 사람을 배척한다. 시선이 맞닿고 손가락이 얽힐 때 그들은 서로를 보고 있지 않거나 서로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보았으므로 사실 제법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 하는데. 물을 때마다 라이온은 침묵했고 의뭉스레 다정한 웃음으로 일관했다. 이상할 것 있어? 늘 하던 거잖아.

때로 라이온 폴라리스는 이 모든 일에 어떠한 죄책감이나 그것과 유사한 종류의 불편한 감상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지나치게 태연하고 당연했다.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고 싶거나 이미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러니까, 그들이 몇 번이나 눈을 마주쳤고 온당하지 못한 시간을 보냈는지와 관계없이 그의 기준에서 세상은 여전히 무탈했고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은 것 같았다.

너는 가끔 아주 사소한 일로도 세상을 구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지. 내던진 말에 낮은 웃음이 스치듯 귓가에 닿았다. 사소해? 이게? 내던져지는 말은 도통 질문이 아니다. 곧게 뜨인 눈. 무도하게 자란 미개척지의 수풀 같은 녹색 광망이 거기 있다. 짐승처럼 울렁이는 목울대. 공기가 얼어붙는다. 이럴 때마다 나긋한 어조 뒤에 어떤 폭풍이 도사리는지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고 다가올 충격을 기다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기에. 그리고, 가볍게 굴기는….

어쩌면 라이온 폴라리스는 이런 나날이 세상을 무탈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평선을 헹궈내며 빛이 밀려올 때의 폭압처럼, 다소간 무례해도 전부 이해받을 줄 이미 아는 사람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그러므로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자신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죽음이 두려워질 만큼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말한 주제에 채 하루가 지나지 못해 제 방문을 여는 손에 대하여. 단단한 팔이 익숙한 세기로 허리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을 때, 이 모든 것이 지나치게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으리라고.

달리 말해 그 문이 열릴 때마다 숨이 막혔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면 스카하크는 답잖게 몸을 웅크렸고 드러난 목덜미를 사냥감 대하듯 움켜쥐는 손아귀 앞에서 가만히 숨을 죽였다. 다만 기이하게도 끔찍하지 않았고,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단 한 폭의 감정이 사랑과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을 제법 잘 알았다.

하지 마.

기어이 팔뚝 위로 손톱을 세웠던 어느 날 그가 무어라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실상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이 관계에 대한 무엇 하나도 알고 싶지 않을 때가 잦았다. 언제부터 어쩌다가 대체 왜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이유를 재고 따질 때마다 그는 시간의 어느 부분을 도려내고 묶어서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시도하고 싶어지곤 했다. 그날 그때부터. 아니, 사실은 처음 만난 날부터. 어쩌면 내가 태어난 바로 그날부터. 다만 그는 스스로를 바꿀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것은 오만에 가깝다. 너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그 상대를 보고 배워 아주 닮은 오만.

종내 그런 식으로 치밀어오른 기억은 낡은 테이블 구석에 눌어붙어 새집으로 끝내 따라오고야 마는 접착제 자국처럼이나 흐릿하게, 그러나 완고하게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비극이었다.

겨울밤 숲속이 제아무리 추웠단들 해풍이 들여온 한기처럼이나 뼈마디에 서릴 리가 없다. 달리 말해 이곳에는 짓쳐드는 기억을 밀어낼 만한 소재가 부재하다.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그 사실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달리 무슨 일을 더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잊는 것이 불가능할 때 사람은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가?

내가 아직 사람이기는 한가.

의심은 존재를 집어삼키고 제방 하나 없는 숲속에선 침잠을 막아줄 것이 없다.

백사장 위로 비릿하게 스며드는 핏물들. 죽어가는 몸을 끌어안은 손가락에 서린 얼음들. 이런 종류의 망념에 대하여 서술하기란 몹시 어렵고 해낸다 한들 의미가 없다. 다만 그것들이 스카하크 안드라스타의 삶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만이 확실하다. 이를테면 그날 그의 품 안에서 숨 거둔 것이 라이온 폴라리스 하나만이 아닌 줄을 모두가 안다.

몇 단원들은 중얼거리곤 했다. 저건 망령이다. 영혼이란 것이 실로 존재한다면 아마 그날 스카하크 안드라스타의 삶은 째로 망령이 되었으리라고. 비단 용병단 내에서만 도는 말이 아니었다. 라이온 폴라리스는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영웅이었고 떠받들리는 이에 대한 소문은 으레 쉽게 잦아들지를 않아서, 하관할 적 보랏빛으로 얼어붙은 시신의 입술에 입 맞추며 친구라 자칭한 검은 남자에 대한 소문도 함께 세상 속에 분분했다.

그 무렵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라이온 폴라리스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드물게도 화내지 않았고 듣고서도 부정하지 않았다. 잊어버릴 만큼의 무게였다면 나는 분명 내 삶의 수십 년을 들어내었겠지. 떼어낸 기억을 추모할 만큼의 감정은 남겨두었다.

여기 장명종에 대한 흔한 편견이 있다: 수백 년쯤 살면 몇 년은 아무렇지도 않겠어요. 단명종 몇 죽는 것에 놀랄 필요 없어서 좋겠지 뭐예요. 물론 그것은 지나치게 쉬운 소리다. 목숨은 동등하게 하나고 한 해의 무게 또한 다르지 않았으므로, 수백 년의 몇 년은 우습게도 단명종의 그것보다 더한 무게였음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잃은 것을 끌어안고 끔찍하게 먼 시간을 걸어가는 기분에 대해 이해하는 단명종은 거의 없고, 장명종 대다수가 그러한 일에 무심하다는 것은 편견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다만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별종이었고 보기보다 사랑에 갈급한 자였으므로, 그러니까, 덜어낸 만큼 기이하게 홀가분한 이 끔찍한 무게 고스란히 관계의 무게라는 사실 또한 쉽사리 알아챘다.

사랑도 우정도 아니었던 것이 깊게도 파고들었다.

단언할 수 있다. 그을려 지워내어도 떨어지지 않겠다.

숲의 밤은 이르게 온다.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밀려드는 그림자 따라 거리낌이라곤 없이 덮쳐드는 악몽의 한기를 느낀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드물게도 무력했다.

 

* * *

 

죽음처럼 눈 감았다 뜨면 지척이 봄날이었다. 녹음 서리듯 푸릇한 눈이 재빠르게 옆으로 흐른다. 누가 보아도 놀란 모양새로, 깨우기라도 할 것처럼 뺨 근처로 와닿았던 손길은 물러나지도 마저 다가오지도 못한 채 움찔거린다. 남은 손에 움켜쥔 꽃다발은 꽃밭에서 그대로 베어낸 듯 끝단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줄기가 체온에 짓물러 풀 내음이 가득하다. 시선을 위로 들자 역시나 끝단 잔뜩 붉어진 귀가 있다. 생각해 보면 에단 폴라리스는 어느 순간부터 스카하크 안드라스타와 눈을 마주할 때마다 이랬다. 좋아하는 줄 몰랐다는 사실이 어색할 만큼 분명하게.

“늦었네. 여섯 시 전에는 오겠다더니….”

“당신 표정은 왜 그렇게 엉망이야?”

무슨 꿈 꿨는데. 아직 소년티 덜 벗은 청년은 에둘러 보았자 티가 나고, 그만치 에두르는 것조차 제법 머리를 굴려야 가능하다. 그렇기에 에단은 보통 숨기지 않기를 선택했으므로, 스카하크는 그 솔직함을 기만하는 것이 제법 마음에 걸렸다.

“어디 다녀오느라 늦었어?”

“내가 먼저 물었잖아, 브리드.”

에단은 이쯤에서 늘 표정이 나빠진다. 숲을 메운 검은 나무들은 태양 빛 아래에서도 족히 시커멓다. 그 아래로 어스름 깔리면 보이는 것 하나 없는데, 더 에두르고 숨길 것이 어디 있어서 그렇게 말을 돌리는지 영 모를 일이다. 그냥 말을 하라고. 당신 내가 아직도 어린앤 줄 알지. 하나하나 가르치고 챙겨야 하는 줄 알지. 몇 년만 지나면 서른인데, 내가 영원히 아이로만 보이지. 속으로 끝없이 중얼거려 보았자 드러내는 것 하나가 어려워서 내내 숨기고 잰 다음 끄트머리만 겨우 쥐여주는 것이 제 연인의 방식인지라, 에단은 하는 수 없이 우풍에 차가워진 몸을 바투 끌어안는다. 됐어, 뭐든. 다 괜찮아.

그 아무렇지 않은 말 앞에서, 에단 폴라리스의 앞에서 스카하크 안드라스타는 이런 식으로 브리지트가 된다. 언젠가 그가 작고 말랑한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일생의 평안을 빌어 주었던 아이는 이제 아주 자라 한 품에 다 안기지 않고, 끊임없이 인정받으려 들고, 어른스러운 체 목깃을 풀어헤친다. 기대려다가도 문득 놀라 고개를 내젓게 되는 일이 근래 들어 빈번했다. 브리지트는 말할 수 있는 일과 말해서 안 되는 일을 잘 안다.

그래서 정말 무슨 일 있었는지 말 안 해줄 거야? 제법 다정한 질문에도 품 안에서 좌우로 두어 번 흔들리는 머리가 있다. 대답 또한 분명하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에단 폴라리스는 브리지트의 악몽을 어림잡을 줄 안다. 마을의 뭇 어른들이 에단의 필사적인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신혼부부로 착각하는 통에 농담 삼아 던져 본 브리지트 폴라리스는 어때? 한 마디에 그건 싫다며 대뜸 거절이 돌아왔던 사유에는 자신이 철없고 어리고 제멋대로인 데다 세상과 연인 중 세상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답잖은 질투만이 있던 것이 아니라, 그가 폴라리스의 이름 안에 편입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라이온 폴라리스는 스카하크 안드라스타의 악몽이었고 제아무리 빛 아래서 이름을 갈아치운들 그 사실이 변하는 것 아니다. 에단은 망자의 힘을 안다. 그의 모친은 죽어 바다가 되었고 그의 심장에는 영원히 소금 결정이 서렸다. 곧 같은 이치로, 그의 부친은 죽어 별이 되었고 그가 사랑하는 밤의 심장에 빛으로 칼을 박았으리라.

그러니까 일단은 질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늘 그랬다. 연인도 부친도 사랑해 마지않았으므로 에단은 제 할 일이 이 모든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사랑을 속삭이는 것 말고 없음을 안다.

“뭐 좀 주워 오느라 늦었다, 바보야.”

퉁명스레 가슴팍으로 밀려드는 손길은 답잖게 조심스럽다. 이런 순간이 쌓이고 쌓인 까닭에 브리지트는 에단이 제게 유독 어설프게 굴고 있음을 모를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래서 어린애란…. 중얼거리는 소리에 눈치 빠르게도 에단은 어깃장을 놓는다. 아니, 어린애 아니라니까?

달은 차고 기울고 계절 따라 소년은 순조롭게 어른이 되고, 저주처럼 책임에 가까워지고, 받아 안은 책임 따라 이제 소년은 제법 선이 굵어졌다. 최전선에 맞붙어 선 채 모든 죽음을 가장 먼저 받아내던 손은 이제 끄트머리가 죄 닳아 뭉툭하다. 그럼에도 토끼풀로 엮어 온 꽃다발 받아 들 적 손끝이 맞닿으면 어린 사슴처럼 놀라 눈이 커지고, 이내 멋쩍게 바지춤에 손바닥을 문지르곤 한다. 아직 아이라고 구태여 우길 수밖에 없어지는 이유는 그 모습이 도저히 책임의 이름 아래 죽기에는 지나치게 애틋한 까닭이다.

사랑하는 자들은 숭고해진다고, 어느 고서에서 일컬은 적 있었으리라. 일생 손아귀에 밴 핏물이 꽃다발 한 아름으로 지워질 리 없었음에도 브리지트는 에단이 건네 오는 꽃을 손에 쥘 때마다 자신이 전부 무결해지는 기분에 휩싸이곤 했고, 그걸 안다는 듯 에단 폴라리스는 종종 꽃을 가져오곤 했다. 브리지트는 코끝에 닿는 향을 두어 번 들이키다가 그대로 에단을 끌어안았다.

“고마워.”

“뭘…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엔 안 주는 줄 알겠다!”

사실 에단 폴라리스는 브리지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이를테면 좋아한다거나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은 때를 놓치면 영영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 시간이 데려가는 것은 순간의 감정만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라는 것을 에단은 아주 어릴 적 배웠다. 그래서 시끄럽게 울리는 심박 사이로, 끌어안은 힘에 심박도 공명하여 이 모든 말이 묻히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들어 주기를 바라면서 어설프게나마 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 그래, 알겠다고….

마주 안은 체온이 비슷해질 무렵에서야 에단은 브리지트의 어깨를 잡고 느리게 밀어냈다. 밀어내기보다도 낯을 보려고 떼어내는 것에 더욱 가깝다. 그렇게, 마주하면, 지척에 선 금안은 수백 년 암살단 꼭대기에 기거했음을 인지하지 못할 만치 맑고 투명하다. 이상하게 숨이 막힐 것만 같아 에단은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그 통에 말이 한 박자 늦었다.

“…그, 축제 준비를 한다더라, 마을에서. 다들 참여할 거래.”

능청맞아 솔직할 일 없었던 아비와 다르게 그저 수줍어 솔직할 줄 모르는 아이는 늘 부연이 길다. 트리도 꾸미고 광장에 테이블을 두겠다던데. 쓸데없이 시끄럽고 소란스럽기만 하지, 꼰대들은 요즘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도 몰라서 나한테 물어보더라니까. 그러니까, 음, 혹시나, 당신도 관심 있나 해서. 길게 늘어놓아 보았자 결국 본론은 “하고 싶은데, 당신도 할 생각 있어?”라는 사실을 브리지트는 아주 잘 안다.

“가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이 가고 싶으면 같이 가 주겠다는 거지.”

정말? 묻듯이 말간 눈이 깜빡이자 에단은 잠시 말이 없었다. 뻔한 결말이다. 결국 홀린 듯이 답하고야 만다. 응, 아니, 가고 싶지…. 어차피 그 말 외에는 답이 없었다. 새로운 자리에 적응하는 일은 여간 쉽지 않았고, 브리지트는 숲으로 건너온 이래 한동안 이르게 도달하는 밤과 늦게 밀려드는 아침에 몸살을 앓았다. 바깥으로 걸음하는 일 적으니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아직도 그를 외부인으로 알았다. 브리지트는 이 모든 일에 개의치 않았으나 방 안에 머문 만큼 악몽은 빈자리를 헤집고 밀려든 모양이었다. 에단은 그래서 기어이 축제 이야기를 끌고 올 수밖에는 없었다. 사람이 낸 흔적은 사람으로 메워야 하는 법이니까.

“한 번쯤은 즐거울 것 같기는 해서….”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아니, 그건 내 대사라니까. 에단은 퍽 어설픈 동작으로 브리지트를 당겨 끌어안았다. 소파로 쓰러지듯 기대면 가벼운 탄성이 전신을 울린다. 이젠 이런 대담한 짓도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라, 그대로 머리를 푹 기대면 단단한 어깨춤에 뒤통수가 맞닿았고, 허리께를 감싸안은 팔은 완전히 어른의 것이라서. 브리지트는 가볍게 뒤척여 여전히 보드라운 빰에 입을 맞추곤 작게 웃었다.

“치맛자락 잡고 매달리던 어린애가 언제 이렇게 커서는.”

다분히 놀리려는 의도 가득한 말에 에단은 으레 기억 안 나거든, 하고 쏘아붙이며 어린 시절을 애써 부정하곤 하였으나,

“그때도 좋아했으니까… 같이 있는 거.”

어라.

별이 가끔 뱉어내는 진심은 일생 죽음으로 살아왔던 사람에게 너무 뜨거웠고.

그래서 브리지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에단의 입술 위로 가볍게 입술을 겹쳤다. 짧고 가벼웠다. 나도, 그래. 숨 사이로 흐른 언어가 희미하게 맴돌았다.

 

* * *

 

그 거리에서 발에 채는 모든 것이 들떠 있었다. 머리 위에 서리를 쌓은 채 술래잡기하는 아이들과 상점 앞에 오도카니 선 눈사람이 겨울을 알렸다. 머리 위에 늘어진 나뭇가지에는 거미줄 대신 주홍빛 가득한 전구가 자리했고 그 사이로 요정처럼 둥근 장식들이 흔들렸다. 어스름 드리우기 전, 광장을 가득 메운 긴 테이블 위로는 작은 등불이 간격 맞춰 늘어섰고 짐 옮기는 이들 뒤로 한켠에서는 또 다른 한 무리가 리본으로 조화를 만들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본부와 임무지를 오가는 주제에 언제 안면을 튼 건지, 에단은 사람들 사이로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이사 온 지 일 년을 가까스로 넘긴 것은 피차 마찬가지인 주제에 눌러살던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자태였다. 이번엔 부인도 데려왔네, 꼬마 영웅, 따위의 말이 장난처럼 오갔고 에단은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채로 소리쳤다. 아니, 아니라니까! 부인 아니라고! 물론 노련한 어른들은 그런 반응이 부끄러움 많은 예비 신랑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종류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부인이 아니라고. 부인이 아니라니까? 아저씨, 듣고 있어? 수염 안 나면 다 여자인 줄 아는 노친네들아…. 투덜거리는 예비 신랑의 손에 옮겨야 할 기물 한 상자를 건네면서 그들은 무어라 시답잖은 농담을 더 건넸다.

같이 있을 분위기는 아니었으므로, 누가 무어라 말하지 않아도 브리지트는 손이 비는 자리를 쉬이 찾았다. 어두운 곳 중 가장 어두운 곳에 오르기 전까지는 늘 그런 식으로 살아야 했다. 너무 눈에 띄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치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지도 않을 만큼, 위협이 되지도 않고 버리기엔 이유가 없을 정도의 애매한 필요성을 증명하면서. 그는 트리의 빈 곳에 장식 몇 개를 걸고, 양말에서 루돌프 인형이 떨어졌다고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는 어르고 달랬으며, 아이가 제풀에 지쳐 잠들고 난 후에는 탈출을 감행한 루돌프를 다시금 양말 속으로 돌려보냈다. 그 통에 바느질 솜씨를 확인한 양조장집 메건 아주머니는 그에게 리본 몇 개를 떠맡겼다.

여기를 잡고 꽃으로 만들면 돼. 쉽지? 그나저나 몇 살이나 먹은 건지 모르겠네. 엘프들은 얼굴이 다 비슷해서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갓 태어난 놈과 죽기 직전인 노인 빼고는 똑같이 느껴진다고. 그래도 저 애에 비해 당신 나이가 한참 많다는 건 알지. 어린 남편들은 가끔 철이 없이 굴지만―이쯤에서 과수원집 주디스는 메건, 주책이에요, 하고 말했지만 홀몸으로 아이 넷을 키워낸 메건은 조용한 신부를 상대로 충고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내가 뭘? 이런 건 막 사귈 즈음에 알아 둬야 나중에 맘고생을 덜 해. 어쨌든 서로 부부니까 의심하고 다투기보단 대화를 해야 한다고.

“어쩔까, 그러면.”

브리지트는 손가락에 리본을 두어 번 헐겁게 둘러 감았다. 손가락만 빼내어 중간점을 바늘로 짚고 이내 꽂는다. 손가락 두 마디 길이로 남은 리본을 잡아 쥐고 위로 접어 올린다. 꽃잎이 충분히 풍성해지면 녹색 리본으로 주름을 잡아 잎을 단다. 바느질을 보고 있던 메건은 가볍게 충고했다. 무슨 닭 잡는 것 같네. 조금 더 부드럽게 해도 좋잖아.

“어쩌긴 뭘 어째. 속이려는 낌새가 보이면 제대로 말을 해야지.”

우리 남편도 내가 새신부일 시절에 말이야, 고향 소꿉친구랑 바람이 날 뻔했지 뭐야… 메건이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풀 즈음 툭하니 어깨를 치는 손길이 있다. 메건은 그렇게 거칠게 굴어서 어떡하냐며 농담이나 던졌지만, 에단은 잔소리라곤 딱 질색이라는 표정을 한 채 작은 단호박 한 합을 브리지트 앞으로 밀어주었다. 둥글게 파낸 뚜껑 틈새로 하얀 김이 흐르고 있었다. 시선이 호박과 에단에게로 한 번씩 오가고, 브리지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먹어 줘?”

“아니, 먹기 싫어서 주겠냐고!”

안에 약재 넣고 끓였대. 당신은 추위도 잘 타니까…. 귀끝이 빨개져서 중얼거리는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우리 남편도 저랬으면 참 좋았겠다고, 부러움 섞인 지탄을 흘리자 저만치 요리를 하던 누군가가 에헤이, 참,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십 년 차 부부가 다투거나 말거나, 에단은 제 겉옷을 벗어 브리지트의 어깨 위로 걸쳐 주었다.

“감기 걸리지나 마라, 바보야!”

그쯤에서 메건은 배를 감싸 쥐고 웃다가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기 신랑이 속 썩일 일은 없겠다, 속여도 다 보여서!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에게 듣기엔 지나치게 옳은 말이라, 브리지트는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그래, 저 애를 속이는 건 나지.

늘 내가 별의 눈을 감겼지.

하지만 모든 거짓은 그럴 이유가 있어서 숨겨지고 진실은 거짓일 이유가 사라져 드러나는 것들이었으므로 그는 영원히 침묵할 것이다. 추한 자기고백이었다.

갓 다섯 살 난 앨리스는 양손으로 은색 별을 쥐곤 연신 발돋움이다. 제 머리꼭지 높이보다 세 배는 더 큰 나무에 닿을 리가 없어, 에단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제 어깨춤을 툭툭 친다. 언제 그리 친해졌다고, 손짓 한 번에 스스럼없이 등에 업히고 목까지 기어 올라가는 꼴이 퍽 천진했다. 겨우 별을 매달고 나면 어른들이 앨리스의 조그마한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장하네, 벌써 다 컸네, 어르고 달래는 말들 사이로 에단에게 괜히 한 마디씩 건네는 말들이 귓가에 박혔다. 애인도 그렇게 안아준 적 있어? 가서 사랑한다고 한마디 해 봐. 요즘은 애교 많은 애인이 인기 있다니까. 에단은 빨개진 낯으로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아, 뭘 또 하라고! 외치는 소리 뒤로 웃음소리들이 잔뜩 따라붙는다. 브리지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제풀에 놀라 시선을 내렸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평온해서 기이하다. 제 평온하길 바라지 않는 악몽이 다시금 찾아올 것 같아 가만히 어깨를 움츠린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고, 브리지트는, 괜히 소맷자락을 매만지다 그대로 끌어 얼굴을 묻었다. 희고 청량한 소년의 향이 코끝에서부터 폐부를 휩쓴다. 내리 폐포에 매달렸던 서리가 녹아내리는 환각을 본다. 어깨에 내내 감돌던 한기가 못내 물러갔음을 뒤늦게 알았다.

혀끝에 닿은 호박단지가 꿈처럼 달았다.

 

* * *

 

엿새 동안 노고하고 이레에 휴식하니 힘쓴 모든 자는 오늘 즐길 권리가 있다. 성탄을 빌미 삼아 마을 사람들은 한데 모였고 그건 잠시 발 들인 이방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번잡스럽게 준비한 수고가 잊힐 만큼 성탄 전야의 밤은 화려했다. 하늘에는 겨울바람에 떠밀린 구름을 대신해 은하수가 자작하게 깔리고 별처럼 흔들거리는 작은 촛불이 그 아래서 지상을 밝혔다. 땅거미가 완연히 바닥을 기자 아이들은 점등이 아직인 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외쳤다.

“마녀님, 트리에 불!”

브리지트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 아이들은 틈만 나면 마법을 보여 달라 떼를 쓰곤 했다. 내력이 명료하지 않아 혹여 흑마법사일지 모른다 추측하는 자들과 마력이 체력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만큼 일가견 있는 자들은 때마다 어허, 하며 으름장을 놓곤 했지만 브리지트는 아이들에게 과할 만큼 친절했다. 달라면 내어주었고 바란 적 없어도 대뜸 쥐여 주기 일쑤라, 고작 마법 하나쯤 내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내 손끝이 나무를 쓸면 걸어 둔 조명 속으로 대번에 빛이 든다. 에단은 어김없이 볼멘소리다.

“뭐하러 힘을 그렇게까지 써.”

“나쁠 것 없잖아. 너도 좋아하면서.”

빛이야 차치하고서라도 아이들 즐거워하는 모습을 싫어할 리 없었으므로, 그렇지? 묻는 말에 에단은 이번에도 할 말 없어 그저 고개를 끄덕이곤 말았다. 브리지트는 언제나 에단을 잘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짚어내고 보이지 않아도 구태여 들춰내곤 했다. 그런 주제에 말하지 않으면 통 모르는 것도 있어서―이를테면 애정에 대한 표현들이 유독 그랬다―에단은 호기롭게 생각하고야 마는 것이다. 아직 당신에게 알려줘야 할 것이 참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제껏 수없이 깨달았고 앞으로도 수없이 깨달을 그 생각의 또다른 시작점에 이 축제를 두면서, 에단은 말없이 술잔을 건네었다. 막 끓인 뱅쇼가 달큰한 향과 함께 유리잔을 타고 흔들렸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듯 떠돌이 연주자는 내키는 대로 바이올린과 기타를 바꿔 가며 악곡을 연주했다. 취한 청년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발을 구르면서, 테이블과 의자를 두드리면서 광장에는 흥이 올랐다. 어둑한 불빛 아래 취기를 타고 강 건너 과수원집 주디스가 사 년쯤 연애했다던 마틴을 와락 끌어안으며 신년이 오면 결혼하겠다고 대뜸 선포했다. 기실 결혼 준비로 나무 몇 그루는 팔겠다는 이야기가 족히 석 달 전부터 떠돌아 모두가 이미 아는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레 박수와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내친김에 떠돌이 연주자는 결혼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당장 누군가는 결혼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예비 새신랑이 된 마틴은 에단의 등을 툭 쳤다. “그러니까 언제 결혼할 거야, 꼬마 영웅?”

“때 되면 하겠다니까. 오지랖 부리기는!” 당당하게 소리치면서도 에단은 성탄 조명이 대부분 주황빛인 데에 남몰래 감사하곤 했다. 얼굴이 붉어졌다는 사실을 슬슬 감추고 싶을 때였으므로. 비좁은 공동체가 으레 그렇듯 사람들은 정이 많았고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참견이 심했다. 그것이 귀찮을지언정 싫지 않았으므로, 에단은 헛기침이나 몇 번 하고는 브리지트에게 고기 접시를 밀어주었다. 좀더 먹어. 기껏 요리해 놓고 안 먹으면 무슨 소용이야? 요리사가 안 먹는 요리는 수상하다고… 평이한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그는 잠시간 단둘만의 크리스마스도 제법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오지랖들 말마따나 손이라도 한 번 잡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혈기 넘치는 청년들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점잔 빼는 노부부들마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간 후에야 에단은 브리지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머리 위에는 새벽별이 휘황하고 트리의 조명도 서서히 마력을 다해 가는 시간에, 한 해 전 어느 날 너는 죽음이 아니라던 그 밤처럼 환한 낯으로.

“겨우 둘만 남았네. 다들 할 말이 그렇게 없는지 자꾸 나만 괴롭히고….”

“잔뜩 시달린 모양이네. 이리 와, 이든.”

한껏 벌린 팔 사이로 익숙하게 파고들면서 에단은 중얼거렸다. 당신한테 청혼하래. 다시 고백해도 좋고. 이상하지? 이미 사귀고 있는데. 이름 받아가기는 싫댔고, 내 생각엔 너무 이르지 싶어서, 그러니까…. 에단은 취한 사람처럼 흐르는 대로 말을 늘어놓았고, 뱅쇼 두어 잔에 취할 리가 없는데, 분위기를 타고 받아 마신 잔에 술이 있었던지 취기가 도는 것은 매한가지라. 브리지트는 멍하니 에단을 끌어안은 채 품에 고개를 묻었다. 이상하리만치 웃음이 자꾸 새었다.

“뭐 어때? 네가 좋을 때 말해….” 주문 외듯 속삭이자 에단은 한참이고 감싸 안은 등을 쓸어내리다 중얼거렸다. “뭐든?” 어른이란 본디 아이의 기대를 배반하고자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래, 뭐든.”

허락이 떨어지자 에단은 브리지트의 어깨를 쥐고 시선을 마주쳤다. 그날 축제 준비를 한다더라, 말할 때처럼. 어쩌면 그보다 이전에, 당신에게 세계를 주겠다 호승심 어린 소리를 할 때처럼. 그럴 때마다 에단 폴라리스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반짝거렸고, 일생 어둠을 품고 산 사람은 빛에 홀리지 않는 법을 몰라서,

“나랑 춤출래, 브리드?”

“멋이라곤 하나도 없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내밀어진 손을 잡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맞잡은 손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에단은 일생 밤이거나 죽음이라 불렸던 자를 조명 아래로 이끌었다.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작은 전구의 행렬 사이를 비집고 매달린 겨우살이 아래에서,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지금만큼은 아버지 생각 좀 그만 하고.”

의심은 안 하지만. 당신은 가끔 아닌 것 같으면서도 나를 통해서 다른 걸 보더라. 지금도 그래? 어린 별이 찔러 들어온 심중에 브리지트는 대답 대신 입술을 포갰다. 증명은 그것으로 끝이다.

“하나도 안 닮았어.”

“응, 알아.”

잔뜩 억눌려 단서 하나 찾기 어려운 목소리만이 적막을 나직이 가로지른다. 에단은 어떤 극야에 제 부친과 제 연인이 어떤 관계였는지 알 수 없고 그들은 설명하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영원히 그 목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다만 알지 못하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연인의 슬픔을 보아넘기는 연인은 없으므로

과거의 그들은 연인이 될 수 없었고 오늘 이 자리에서 에단 폴라리스는 자신이 브리지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새삼스럽게, 불가항력적으로 깨닫는다. 전부 쏟아져내릴 듯 선명한 이 별밤. 선잠에 들었던 연주자가 얽히는 구둣발 소리에 휘파람을 불곤 느리게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이끄는 손길에 끌려가며 느리게 한 바퀴 돌면 세상이 따라 돌고, 별빛이 궤적처럼 둥글게 남고. 트리의 조명과 테이블 위 등불 아래 섬광 같던 머리카락은 노을처럼 붉게 타오르고, 브리지트는 이 순간 정말, 단 한 번도 춥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말할 수 있다. 사랑했던 나의 악몽, 이제는 안녕.

그리고 안녕, 작은 별.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해.

속삭이는 목소리 몇 가닥이면 충분하다. 에단은 아주 작은 단서 하나만으로도 브리지트가 이 땅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고서도 붙잡으려고 손을 이끌고, 잡아끌고, 허리에 댄 손에 못내 힘이 실려서, 가슴께가 밭게 맞닿는다. 눈 떼면 흑암 사이로 녹아버릴 것 같은 사람. 희고 검고 단 하나 있는 색이라곤 별과 다를 바가 없어서, 어느 순간 녹아버리면 두 번 다시는 쥘 수 없을 것 같아서, 잘 어울린다는 말로 녹색도 붉은색도 죄 걸쳐 두고 사람 꼴로 만들어 보려고 부단히 애썼던 시간들이 전부,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그 시간이 모두. 가장 솔직해질 수밖에 없는 이 밤에 있었다.

“들려?”

브리지트는 괜히 그 가슴에 툭하니 기댄다. 얹히는 무게 따라 심박이 조금은 더 빨라졌을 것이다. 바이올린 소리에 힘입어 에단은 가볍게 중얼거린다. 이게 전부 당신 때문에 뛰는 거잖아. 아니, 그러니까 탓하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알지? 브리지트는 마주 속삭였다. 응, 들려. 그리고 내 심장도 네게 맞춰 뛰겠지. 오래,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들을 구태여 말하지 않으면서. 이 침묵을 존중하면서.

지금 이 순간마저도 어딘가에서는 악몽이 밀려들고 누군가는 슬픔을 토로하겠으나 도처에 널린 빛무리만큼은 자잘하게 허공을 유영한다. 브리지트는 눈을 감고 별이 이끄는 대로 가만히 따라간다. 감은 눈꺼풀 아래에서 폭죽이 터진다. 다시 뜨면 지척이 별빛이다. 사랑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러니까 단언할 수 있다. 지옥에도 화염은 탄다. 죽음이 군림하는 세상에도 가끔은 그런 식으로 빛이 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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