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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자

ㅇㅇ님 커미션

SAMPLE by 공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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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나오는 노래는 분명 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전 한 시의 라디오. 잠이 오지 않아 머리맡에 지나가도록 두었던 지직대는 말소리 사이에 네가 불쑥 끼어들었다. 익숙한 이름을 아주 오랜만에 낯선 사람의 입으로 듣는다. 나는 일부러 궁금해한 적은 없는 너의 근황을 공교롭게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알게 된다. 이어 들어본 적 있는 몇 밴드의 이름과 네가 속한 밴드의 짧은 소개가 지나간다. 곁눈질한 밤하늘은 별 없이 컴컴했고 내리는 빗방울은 굵었다. 습기를 머금은 방 안이 끈적거렸다. 눕혀둔 몸을 일으킨다. 디제이의 시답잖은 농담을 턱을 괸 채 듣는다. 실없이 우스운 사연들과 쓸모없는 사족들을 흘려보낸다. 여름, 여름이네요. 정말 덥죠. 비도 벌써 며칠째고. 지금도 온몸이 끈적댄다니까요, 정말. 천장의 백열등을 켠다. 탁. 스위치 켜지는 소리가 울린다. 자기는 글렀다.

여름처럼 곤란한 계절도 없죠. 빨래도 안 마르고, 덥고, 찝찝하고.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한 병을 꺼낸다. 디제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맞장구 치는 게스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수병을 절반 가량 비운다. 오늘도 긴 장마 사이에 턱을 괴고 앉은 도시의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 미니멀리즘 트렌드 시대에 짐 하나 는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성가신 일인지. 그런 우리에게 장마라는 것이 주는 피해가 얼마인지. 우산, 갈아입을 옷, 젖어버린 머리카락, 그것을 닦아낼 수 개의 수건. 나는 그런 것들을 무심코 생각하다 이유 없는 반발심을 가진다. 빗방울이 창을 두드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물 고인 길바닥과 우산 끝에 매달린 물방울을 번갈아 생각하다 눈을 감았다. 라디오에서는 다시 노래가 흐른다. 불규칙한 드럼 소리가 들렸다. 록이다.

지금은 너의 생각을 하고 있다. 난 전에 없이 너를 떠올리는 일에 몰두하는 중이다. 공교롭게도 여름인 것이다. 비가 내리는, 해가 긴, 록을 듣기 좋은. 습기를 머금어 축축해져 버린 기억의 책장을 넘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자주 추웠고 오래 건조했다. 그러다 종종 습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있었다. 젖은 뒷목을 매만질 때마다, 셔츠 깃을 들추고 손부채질을 할 때마다, 가을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때마다. 그래. 그게 너였던 것 같다.

널 다시 들을 수 있게 될 줄 몰랐어. 새벽 한 시에 널 곱씹게 될 줄도 몰랐지. 네게 말을 걸 것처럼 중얼거려 본다. 사실은 네가 궁금했어. 목소리를 들으니까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라디오에서 들리는 너의 멜로디는 꼭 수화기 너머의 인사 같다. 한 뼘 건너 카운터를 지극히 당연한 선으로 여기고 건너다보며 대화하던 순간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용무로 너의 번호를 누르고 기억나지 않는 어떤 멜로디의 연결음을 지나 전파음 섞인 목소리로 시마, 하던 부름을 처음 들었던 순간으로 이동한 기분. 입가를 닦고 숨을 내쉰다. 서른이 넘은 지금에도 나를 아직도 스물로 만들어 주는 것 같은 네 목소리. 그것을 떠올린다.

선풍기를 뺨 옆에 두어도 더운 밤. 여름은 늘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순간 나는 사흘째 쏟아지는 장대비처럼 와락 깨닫는다. 전화기를 손안에 가득 들어차도록 쥔다. 전원이 켜진다. 바뀌지 않았길 바라는 번호를 하나하나 누르며 생각한다. 너에게 할 말을. 어떤 축축한 애정을. 그다지 열광하지는 않지만 결코 싫어할 수 없을 록을. 네 음악과 너를.

그러고 보니 돌려주어야 할 노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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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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