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0자
ㅅ님 커미션
더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습한 숨을 내쉬자 일렁이는 공기가 공중에서 느릿한 춤을 췄다. 이서는 눈을 깜박였다. 간간이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속눈썹을 건드렸다. 따가운 눈을 손으로 대강 훑어내자 손가락 끝에 땀방울이 얕게 묻어 나왔다. 선배, 더워요? 한 발짝 떨어져 도로를 건너다보던 영석이 돌아보았다. 영석의 뺨이 약간 달아올라 있다. 그렇게 묻는 자신도 더위에는 별수가 없는 듯했다. 요즘의 8월이란 늘 그런 달이므로.
“괜찮아.”
대답은 길지 않다. 대신 이서는 손끝을 가지런히 모으고 손목을 흔들어 본다. 하지만 손부채질도 쉽지 않다. 한여름의 정류장은 덥다. 영석은 이서가 하는 양을 힐끔 본다. 휴대용 선풍기 정도는 여러 개 챙겼어야 했다. 뒤로 멘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고 지퍼를 연다. 손부채 하나가 교과서와 문제집 사이에 파묻혀 있다. 영석은 플라스틱 부채를 꺼내 펼친다. 다시 가방을 잠그고 뒤로 돌려 멘 영석이 바닥을 신발 앞코로 톡톡 두드리며 말한다.
“버스가 너무 안 오네요.”
이서의 얼굴 가까이 살랑살랑 미지근한 바람이 분다. 영석은 한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다른 손으로 부채질하며 여전히 도로 너머를 기웃댄다. 우리 버스도 오긴 하겠죠? 문 닫기 전에 가야 하는데. 벌써 해도 다 졌잖아요. 지루하지 않은 수다가 이어진다. 이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영석의 옆얼굴에 비친 전광판 불빛이 하얗고 부드럽다.
그때 복잡한 도로를 미끄러져 눈앞에 서는 버스 한 대가 있다. 영석은 부채질을 멈추고 이서를 한 번 본다. 이서는 영석의 멈춘 손을 느낀다. 두 사람은 버스의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를 듣는다. 타이어가 포장도로의 표면에 끌리는 짧은 소음을 지나친다. 열린 문 안에 놓인 두 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선다. 듬성듬성 남아 있는 좌석 중 두 자리가 연이어 빈 곳을 찾아 앉는다.
버스 안은 조용하다. 단어장을 들고 고개를 사선으로 꺾은 채 꾸벅꾸벅 조는 교복, 소리를 꺼둔 채 화면 속 예능 영상을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후드 티, 주식 그래프를 넘겨보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한숨 쉬는 정장. 그 사이에서 이서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불빛들을 감상한다. 남들은 호들갑을 떨며 좋아해도 내 취향은 아닌 영화를 보는 눈. 영석은 바깥보다 이서의 표정을 바라보기 바쁘다. 언제나 멋대로인 주변 사람들 때문에 곤란한 사람. 그러면서도 순해 빠졌고, 자꾸만 아프고, 걱정되게 하는 사람. 숨을 짧게 끊어 내뱉어 본다. 이서를 볼 때마다 심장 뛰는 속도를 조절할 수가 없다. 걱정 때문인지, 사랑 때문인지, 둘 다 문제인 건지 싶다.
사실 멋대로 굴고 있는 건 이서 곁의 다른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쨌든 좋아한다는 것도 상대를 고려하지 않은 마음이며 멋대로 내놓은 감정에 휘말리게 만드는 짓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위한다는 핑계도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어차피 다칠 수밖에 없다면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다가서고 싶다. 마음대로 손을 붙잡고 뛰쳐나오는 건 이미 저질러 버렸으니, 다음에 남은 건 즐거움을 선물하는 것밖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려면 멋대로 굴어야만 한다는 것이 우스운 점이지만.
이서는 시선을 느꼈는지 영석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팔을 안쪽으로 감싼다. 버스 안은 에어컨 때문인지 춥다. 바깥에서 흘린 땀을 단숨에 증발시킬 수 있을 정도다. 창가 자리는 머리 위에서 바로 쏟아지는 바람 때문에 더욱 추워 보인다. 영석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송풍구를 돌린다. 제 쪽으로 흐르는 바람의 흐름을 확인한 후 다시 앉는다.
“근데 지금 가면 얼마나 놀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밤에 놀이공원 가는 건 또 처음이라.”
“문 닫는 시간이 언젠데.”
찾아볼게요. 화면을 몇 번 두드린 영석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한 시간 뒤면 문 닫겠는데요. 큰일났네. 이래서 담오 선배 말 안 들으려고 한 건데. 이서가 묻는다. 나 납치해서 놀이공원 가라고 한 게 담오야? 영석이 뜸을 들이다 웃는다. 음, 놀이공원만요. 납치는 제 의견. 근데, 납치라고 하면 좀 그렇지 않아요? 이건 보호죠. 사랑의 보호, 뭐 그런 거. 두 사람이 가볍게 웃는다. 동시에 졸고 있던 교복이 꾸벅거리다 잠을 깬다.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고 벨을 누른 교복이 길게 하품한다. 곧 버스가 정차한다. 다음 정류장을 알리는 안내 음성과 함께 새 승객이 카드를 찍고 맨 앞자리에 앉는다.
“이제 안 추워요?”
대수롭지 않은 척 건넨 영석의 질문에 이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영석은 이서의 손을 잠시 잡아본다. 조금 찬 것 같기도 하다.
“약간 차요. 어쩔 수 없네, 내가 계속 잡고 있어야겠다.”
이서는 대답하지 않는다. 영석의 시선이 이서의 얼굴에 꽂힌다. 여전히 이서는 별말이 없다. 영석은 결국 모른 척 손을 계속 잡은 채 헛기침 한번 없이 미소 짓는다. 아, 그러면 어디로 가지. 중얼거리는 영석의 말이 조용히 둘의 주위를 맴돈다. 여전히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다.
한적한 곳에서 버스는 정차한다. 도시 외곽의 종점. 종점까지 놓지 않은 손을 끌고 영석은 버스 뒷문 계단을 밟아 내려온다. 훅 끼치는 더운 공기 안으로 발을 들인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본다. 문명의 손길은 여전하지만 도심보다는 훨씬 한적하고 조용한 곳. 정류장에도 반짝이는 LED 대신 벤치 하나와 표지판이 가로등 아래 놓여 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종점은 도심을 살짝 빗겨나간 외곽에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 와 봤어? 이서는 영석을 약하게 끌어당겨 묻는다. 영석은 목 근처를 매만지며 웃는다. 아뇨. 나도 처음인데, 어떻게든 되겠죠. 멋쩍음과 뻔뻔함 섞인 말이 흘러나온다. 당초의 계획이 전부 틀어진 일탈이다. 처음 집에 가는 이서를 쫓아가 붙잡았을 때는 그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다였고, 가버린 이서를 쫓아 집까지 찾아갔을 때는 그저 함께 놀이공원에 가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오래 함께 버스를 탔고, 놀이공원은 가지도 못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지금 옆에 이서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이서의 집 문이 열렸을 때 보인 게 이서의 얼굴이 아닌 이환임을 확인하고, 영석은 약간 식은땀을 흘릴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서를 다른 핑계로 불러내고, 난데없이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유인 작전을 펼친 것은 영석 본인이 생각해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긴 했다. 물론 그것도 나름의 추억인 것은 확실하다. 쓸데없이 낭비한 시간 탓에 놀이공원은 문턱도 밟지 못했지만 다음을 약속하면 될 일이니. 원래 좋아한다는 건 그런 게 아닌가. 조금 유치하고, 그러면서도 사랑스러운. 물론 이서가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봐줄지, ‘사랑스러운 후배’로만 볼지, 아예 사랑과는 멀게 생각할지 그 진심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영석은 이 유치함과 이상한 돌진이 조금은 그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지길 바랐다. 조금 바보같이 구는 것도, 반대로 잘난 척하는 말투도 전부 조금쯤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불빛조차 드문 편인 듯하다. 가장 빛나는 표지판이 주유소였고, 조금 더 가면 아스팔트가 끊기고 비포장도로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저 너머로 보이는 마을은 낮은 상가 건물과 빌라, 주택 몇 채가 보이는 게 다였다.
“별 보인다.”
툭, 튀어나온 이서의 말에 영석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화나 영화는 아니었기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별밤은 아니었지만, 반짝이는 것들이 박힌 하늘이 분명 시야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서가 중얼거렸다. ...아름답네.
영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좋아하는 사람보다 아름다울 순 없다. 도시의 중심에서 벗어나 느끼는 외곽의 조금 신선해진 공기나, 포장되지 않은 거리에 흩뿌려진 별들이 좋다. 하지만 결코 선배만큼은 아니다. 영석은 생각했다. 이서와 같은 장소에서 함께 들이쉬는 공기가 유독 달다. 별들 사이에 박힌 이서의 시선이 예쁘고, 기승을 부리는 더위 속에도 놓지 않은 손이 기쁘다. 습한 바람 사이에 서서 서로를 보기만 해도 기쁘다.
도시의 야경은 늘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안에서 스러져가는 어지러운 것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따금 느껴지는 메스꺼움을 막을 방도는 없다. 그래서 도시는 좋아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따금 영석은 이서를 갑갑한 도시에서 꺼내어 도망치고자 하는 충동에 미약하게나마 시달리곤 했다. 그가 어디에서든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 뜻이었으며, 동시에 그가 어디에서나 행복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오늘의 ‘탈출’은 그런 의미에서 자그마한 성공을 갖는 셈이다. 성공이네요. 그렇게 말을 건네면 이서는 응, 답하면서도 의미를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눈을 돌리면 머리 위 별들이 빛을 내며 몸을 흔든다. 이서는 별자리를 찾으려 애쓰며 손가락을 별 가장자리에 가져다 대는 중이다. 영석은 이서의 손가락 위에 제 손가락을 겹쳤다가 뗀다. 이서의 시선이 영석의 얼굴으로 옮겨온다. 돌아가는 고개를 보다 눈이 마주친다. 살풋 웃는다.
“좀 덥지 않아요?”
“목이 좀 말라.”
“뭐라도 사 올게요.”
안 사도 돼. 이서가 한 발을 옮긴 영석의 팔을 붙잡는다. 열대야의 시간, 닿기만 해도 불쾌해야 할 손이 따스하고 기분 좋게 느껴진다. 맞댄 피부가 배어난 땀에 미끌거린다. 그래도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붙잡힌 쪽으로 영석은 끌리듯 뒷걸음질 친다. 그럼 같이 가요. 이서의 팔을 제 쪽으로 끌어온 영석이 팔짱을 꼈다.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 사이 불빛이 두어 번 깜박인다. 네 개의 눈도 동시에 감겼다가 뜨인다. 갈까요. 응. 주고받은 말 사이에 들뜸이 섞인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작은 슈퍼에서 영석은 두 병의 물과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십오 분을 걸어 도착한 슈퍼에서는 주인 아주머니가 연속극 재방송을 보며 화면 안의 남자 주인공에게 진지한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식으로 굴면 왔던 애인도 다시 도망가지. 저 싸가지 좀 봐라. 남자가 되어서는 배포도 없어? 영석은 오천 원을 주고 천 칠백 원을 거슬러 받으며 이서에게 속삭였다. 저 아주머니한테 결혼 허락받으려면 어렵겠네요. 둘은 조용히 키득거리며 물병을 나눠 가졌다. 이서는 단숨에 페트병 절반을 비웠다. 그러는 동안 영석은 과자 봉지를 뜯었다. 영석이 봉지를 내밀었을 때 이서는 봉지를 받아들고 영석의 남은 손을 힐끔 보았다.
살짝 선선한 느낌의 바람이 일었다. 영석은 이서의 흐트러진 머리를 살짝 정리해 주곤 약속한 듯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가 든 봉지 속에 다른 쪽 손을 넣어 과자를 한 움큼 집어 든 영석이 장난을 쳤다.
“선배. 아- 해봐요.”
“내 손 이러려고 잡았구나.”
“오, 되게 똑똑하네요.”
장난 그만해.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얼굴로 입을 삐죽거린 이서를 보다 영석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거 장난 아닌데요. 선배는 많이 먹고 쑥쑥 커야 할 것 같거든요. 튼튼해져야죠. 이거 말고 시금치도 먹고, 몸에 좋은 거 또 뭐 있더라.
너 진짜. 이서가 손을 빼려 하자 영석이 이서를 끌어당겼다.
조금만 더요. 차 끊기기 전까진 나랑 같이 걸어요.
싱긋 웃곤 손에 쥔 과자를 하나씩 입에 넣는 영석을 잠시 보다 이서는 걸음을 옮겼다. 다시금 조용해진 길 끝에 얕은 물이 흐르는 강과 다리가 보였다. 흐르는 물소리가 사방의 하늘과 공기를 채웠다. 길이 이어질수록 가로등 빛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갔지만 선명해지는 별빛이 있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찰박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이서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옅게 떠올랐다. 바스락대는 과자 봉지를 한쪽 팔에 낀 채, 이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날은 여전히 더웠다. 숨이 섞인 바람은 후덥지근하게 불어와 끝자락만 조금 선선할 듯 말 듯 굴고 있었다. 그래도 어째 손을 놓기는 싫었다. 이 걸음이 흐트러질까 봐. 이 걸음 끝의 박자가 움츠러들까 봐. 이서의 숨이 가슴까지 깊이 차올랐다.
어쩌면 열대야의 시간도 꽤나 사랑스러운 음표를 소유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Epilogue
너무 오래 걸었나 봐. 두어 번 콜록대며 기침한 이서가 부원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담오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얼마나 걸었길래 그래. 괜찮아? 놀이공원도 못 갔다면서. 그럼 혼자 산책이라도 한 거야? 이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둘이서.”
“둘? 혹시 영석이랑?”
대답 전에 이서가 다시 콜록거렸다.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음, 엄청난 데이트를 했던 모양이구나. 효율을 위해서 쉬시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뭘 얼마나 걸었길래. 기침과 동시에 말들이 쏟아졌다. 왁자지껄 쏟아지는 소란 속에서 이서는 또 재채기를 했다. 그러자 더욱 커진 소란 사이에서, 휴대전화에 짧은 진동이 일었다.
[선배 지금 뭐 해요]
[나는 선배 생각 중]
이서는 살풋 웃고는 답장 탭을 눌렀다. 어떤 답장을 해 주는 게 좋으려나. 휴대전화 화면을 손톱으로 톡, 톡 두드리던 이서가 화면의 글자들을 천천히 눌렀다. 어떤 답장이 올는지 기대될 만한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나, 감기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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