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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ㄷ님 커미션
오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다. 일어나자마자 걷어낸 빨래에서 햇살 향이 날 정도였다. S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한 아침은 참 간만이었다. 며칠째 눈 대신 내린 비가 몰고 온 먹구름이 한국 전역을 메운 참이었으니. 하지만 오늘의 하늘은 그야말로 청명하기 그지없다. 덕분에 TV를 켜고 채널을 돌리는 동안에도 기분이 좋았다. 한 모금 홀짝인 커피가 오늘따라 맛이 깊었다. 어제와 똑같은 믹스일 텐데도.
돌리던 채널이 멈춘다. 반짝이는 무대 아래 마이크를 잡은 가수들이 있다. 어느새 S는 TV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고개를 쭈욱 뺀 채다. 아이돌. 일종의 우상. 수백, 수천 명이 그들의 손짓 하나에 집중하고 말마디 하나에 웃으며 날뛴다. 그간 S는 팬이라는 개념을 낯설게 느꼈다. S에게 ‘팬’이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제 손에는 잡히지 않는 단어였다. 화면 속 살랑거리는 미소에 책상을 부술 듯이 두드려가며 열광하던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비싼 돈을 주고도 쉽게 갈 수 없다는 콘서트나 사인회를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갈망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하지만 S가 사는 삶이란 일반 대중의 기준조차 간신히 충족하는 형태였다. 거리의 카페에서,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된 짧은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이름도 모른 채 흥얼거리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향유의 전부였으므로.
잘생겼네, P. 중얼거린 말의 끄트머리에 웃음이 걸린다. 그래, 그런 정도를 삶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갈 수도 있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S는 남은 커피를 모두 삼켰다. 달콤하지만 어딘지 한 구석은 조금 쌉싸름한 맛. P는 꼭 그런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저 우연히 보게 된 영상이었다. 히트 치는 프로그램, ■■■… 랬던가, 거기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더라. 그 정도 정보는 들은 바 있었지만 영상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손잡이를 고쳐 쥐다 S는 문득 앞을 쳐다보았다. 검은 터널 안으로 진입하는 열차의 창 안으로 비친 제 모습이 P의 표정과 얼추 비슷하게 보였다. 아침 수업에 늦을까 싶어 머리도 감지 못하고 다급하게 눌러 쓰고 온 모자가 삐딱하게 돌아가 있었다. 유리창 안의 눈이 깜박였다. 그때, 화면 속 P와 지하철 안의 S도 함께 눈을 감았다. 그것은 S에게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다. ‘팬’들이 흔히 하는 말이자, ‘사랑’을 말하는 이들의 주된 대사이기도 했다.
왜 벌써 일어났어. 오늘 주말이야.
내가 주말에도 스케줄 있는 사람한테 이런 말을 다 듣네.
P는 모로 누워 자느라 살짝 눌린 머리를 정리하며 침실에서 발을 뗀다. 시계의 긴 바늘은 7을 가리키고 있다. 누구한테 예뻐 보이려고 그러고 있어. 글쎄, 누구에게든? 농담과 우스갯소리가 오간다. 켜진 TV 화면을 본 P가 한마디를 더 얹는다. 뭐야. 실물이 여기 있는데 화면 같은 걸 보고 좋아하면 어떡해. 아, 자다 깬 난 아이돌 P랑 별개인가.
S는 대답 대신 P를 보며 웃음 지었다. 오늘 날씨 좋지? 질문은 덤이었다. 눈을 살짝 문지른 P가 창밖을 힐끔 쳐다보고는 S의 곁에 와 앉았다. 그러네. 호들갑 없는 답이 돌아왔다. 동시에 S의 고개가 P 쪽으로 기울었다. 어깨에 안착한 머리는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P는 별말 없이 TV를 쳐다보았다.
반짝이는 무대 위 자신을 좋아하던 사람이다. 처음엔 무대 밑의 자신까지 사랑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아이돌이고 연예인인 P는 일종의 환상성 있는 우상이다. 자기 투영부터 신격화까지, 사람들은 원하는 모습을 화면 속 사랑스러운 모습에 다양히도 끼워 맞춘다. P는 멋쩍은 웃음으로 엉거주춤 손을 내밀던 S과의 만남들을 기억한다. 과거 온갖 연예인 사진들을 찍으러 다니며 익힌 팬 문화에 통달한 자신과 달리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좋아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낯선 문을 두드린 사람. 그런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나라는 사실이 조금은 신기했던 것도 같다. 신기할 일도 많지, 생각해 보면 흔한 일인데. 어찌 됐든 P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사랑은 부유하는 사랑이다. 사람 대 사람의 진정성 따위를 운운하기엔 종류가 다르다.
뭐, 그때는 그랬다. P는 턱을 매만진다. S는 ■■■의 신곡을 흥얼거리고 있다. 턱을 만지던 손이 S의 머리 위로 향한다. 어느새 S도 P의 남은 손을 잡으려 손을 뻗어온다.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짙다.
오늘 P는 스케줄 언제쯤 끝나? 오래 걸리려나.
당신은 P를 좋아하는가? ■■■, 특히 P라는 사람의 팬이라 스스로 이름 붙인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아주 당연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네. 그럼요. 좋아만 하나요? 사랑하죠.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P와의 현실적인 연애를 좋아한 기간보다 오래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책임, 위험, 고통을 각오해야 하는 현실 속의 사랑보다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형태의 우러름, 갈망만이 답인 때가 있다. 멀리 있던 것이 기어코 손에 닿고야 말았을 때 오히려 갖게 되는 실망과 뜨뜻미지근한 감정. P는 그것을 우려했었다.
S는 그 사이를 뚫고 들어와 교차점을 만들었다. 미소짓는 얼굴은 P가 가진 어떤 ‘나’에게도 유효했다. 남들보다 조금 복잡하고 남다른 사정으로 시작한 아이돌, 또 ‘P’로서의 생활에 찾아든 애매한 혼선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결국 동료였고, 팬이었으며, S였다.
P는 S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건 나는 잘 모르겠고. 아이돌 P 씨는 오늘 많이 바쁘시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농담했다. 잡은 손에 장난스럽게 힘을 주며 S도 P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신경 쓰는 거야? 원래 팬이라는 건 내 아이돌의 눌린 머리까지 다 사랑스러워하는 부류인 거 너도 알면서, 뭘 그래. 그나저나 늦겠다. 나갈 준비 해야지.
이제는 팬으로서 하는 말에도 ‘나’를 좋아하는 걸까,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이 이따금 P는 신기했다. 가끔은 확실한 증거가 있는 사랑조차 헛갈리는 법이다. 하지만 구태여 의문 가질 필요 없는 느껴짐이라는 것도 세상에는 있었다. P는 S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가볍게 말했다.
일찍 올게. 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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