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박
크리스마스
시이나 슌이 외박했다.
아무 말 없이 새벽에 기어들어 오는 일이야 하루이틀이 아니다. 알아서 정각에 들어오겠지 싶어 눈을 붙였는데, 들어오긴커녕 아침이 밝도록 메시지 한 줄조차 없었다. 토이치는 제 동거인의 첫 외박에 대해 ‘잠결에 손을 뻗었을 때 침대 한편이 싸늘했던 것도 같다─’는 감상을 남겼다.
외박 2일 차.
토이치는 두 명 분량의 계란 볶음밥을 해치웠다.
3일 차.
…내일은 오겠지.
그리고 4일 차, 오후 10시 23분.
툭, 툭, 툭, 툭, 툭… 일정한 간격으로 원목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맴돈다. 시이나 슌이 외출한 지 정확히 103시간하고도 11분이 지난 시점이다. 토이치는 위화감을 느꼈다. 슌이 이렇게까지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이던가? 아니다. 오히려 연락이 잘 안되는 건 늘 제 쪽이었지. 왜 이제서야 이 가능성을 떠올렸을까. 안일했다. 본부로부터 못해도 300마일은 떨어진 곳까지 왔으니 쉽게 발각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AOC의 경계가 늘어난 낌새도 전혀 없었으니, 밀고 혹은 함정수사다. 대체 누구지? 슌의 지인? 지난번,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던 그 남자? 아, 젠장. 이래서 민간인이랑 쓸데없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경고했던 건데…! …침착하자. 아직 잡히지는 않았을 거다. 슌이 이미 AOC에 잡힌 상태라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어. 이쪽으로 연락을 시도하든, 공개 처형을 진행하든…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보였겠지. 도주 중이거나, 어딘가 몸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둘 중 고르자면… 역시 전자겠지. 가만히 있는 걸 못 견뎌 하는 사람이니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지금 당장—
삑삑삑삑-
—아.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상념을 깨고 도어락 소리가 울린다. 몇 번의 비프음이 끝나자, 코트 차림의 남자가 문을 열며 들어왔다. 다녀왔습니— 슌은 태연하게 인사하다가, 어정쩡하게 굳은 토이치의 모습을 보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에, 토이치 군. 뭐해? 여태까지의 걱정이 무색하게, 멀쩡한 낯으로 돌아온 슌의 모습에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시이나! 지금 대체 몇 시—”
“아아아, 또 잔소리할 거지? 늦어서 미안. 아니, 애초에 이 시간이면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지 않아?”
시침은 조금 더 움직여 어느덧 11을 가리키고 있었다. 확실히, 평소 슌의 귀가 시간에 비하면 그다지 늦은 시각도 아니었다. 읏차, 추워. 녹여줘~ 느적대며 붙어오는 슌을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동안 연락 한 통 없이 어디에서 지냈습니까?”
“연락? 아, 맞다. 실수로 물에 빠트리는 바람에 고장 났어.”
슌은 코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고장 났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원 버튼을 꾹꾹 눌러보았지만, 물먹은 기기는 묵묵부답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라도 빌렸어야죠. 하다못해—”
“알겠어, 알겠어. 미안하다니까. 다음부터 안 그럴게. 됐지? 나 오랜만에 집에 들어왔는데 이렇게 야박하게 굴 거야? 케이크도 사 왔는데.”
슌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달랑이며 들어 보였다. 흰색 상자 위로 금박으로 각인 된 상표명이 반짝였다. 씨근덕대다 말고 얼떨결에 상자를 받아 든 토이치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기울였다. 생일까지는 아직 남았는데.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슌이 옷을 정리하다 말고 입을 열었다.
“크리스마스 기념.”
“크리스마스는 내일이지 않습니까?”
“토이치 군은 낭만이란 게 없네. 원래 이런 건 이브에 만나서 밤새—”
슌은 말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
잠시 시선이 오간 후, 현타를 맞이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치며 토이치를 거실로 내쫓았다. 됐다. 가서 준비나 해 줘. 이번에도 슌의 페이스에 말리는 듯한 기분에 짜증을 느끼면서도, 일단은 시키는 대로 착실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탁 가운데에 케이크를 올리고 양쪽으로 접시와 포크, 머그잔까지 놓아두자 꽤 그럴싸한 모양새였다. …케이크에는 보통 어떤 걸 같이 먹지? 사이다는 아닐 거고. 물…? 디저트 문화에 익숙치 않은 머리를 굴려보는 사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슌이 다가왔다.
“식탁에서 먹겠다고?”
“…? 그럼 어디에서 먹습니까?”
“당연히 영화 보면서 먹어야지. 토이치 군, 센스가 너무 부족한 거 아냐?“
슌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거실에 간이 테이블을 펼쳤다. 식탁 위로 나열해 놓은 식기를 옮기는 모습이 꽤 들뜬 듯했다. 마지막으로 케이크를 내려놓은 토이치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일찍 잤으면 어쩌려고요?”
“깨울 건데?”
“…”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모습에 의지를 상실하곤 시선을 케이크로 돌렸다. 대화를 하느니 케이크를 몇 조각으로 자를지 고민하는 게 낫지. 토이치가 플라스틱 빵칼을 집어 들어 각을 재어보는 동안, 슌은 소파 근처에 놓여있던 리모컨을 집어들어 채널을 골랐다. 보고 싶은 거 있어? 없습니다. 아무거나 괜찮아? 네. 흐음, 그래? 크리쳐 생로병사 다큐세상, 이런 것도 좋은 거지? … 장난이니까 표정 풀어 토이치 군.
결국 한참을 고르고 고르다 나온 것이 유명했다던 고전 로맨스 영화였다. 슌은 크리스마스에는 (다시 말하지만, 그건 내일이다.) 와인을 함께 먹어줘야 한다며 찬장 어딘가에서 와인잔 두 개와 화이트 와인을 꺼내왔다. 꽤 맛있는지, 케이크 한입에 와인을 한 모금씩 마셔대는 슌을 불안한 눈으로 한 번 흘겨보고는 TV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 시작한다.
…이게 2000년대 최고 명작이라고? 토이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 쪽이 이유 없이 범죄자로 몰렸다 풀려났는데, 왜 아무도 사과하지 않지? 굳이 저렇게 숨어서 가야 하는 건가? 중간에 과거 회상은 대체 왜 한 거고? 딱히 문화생활을 즐기지 않던 토이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요소투성이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건 슌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아까부터 오른뺨에 잠깐씩 와닿는 눈길이 따가웠다. 한 두 번이면 모를까, 러닝 타임 내내 힐끔거리는 걸 더 이상 묵인하기 힘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영상 위로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십니까?”
“…알고 있었어?”
“그렇게 쳐다보는데 눈치 못 챌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 세상 사람들 다 알아도 토이치 군은 모를 줄 알았는데…”
괜히 민망해진 슌은 제 뒷목을 매만지며 겸연쩍게 키득댔다. 들킨 김에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건지, 이젠 테이블에 양팔을 괸 채 얼굴을 파묻고 노골적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내가 사라졌는데 연락 한 통 없고, 서운하다 서운해~”
“연락했습니다. 당신이 못 본 거지.”
“에, 언제?”
…이 인간, 취했다. 거의 혼자서 와인 한 병을 다 비우는 모습을 보여 예상하긴 했지만… 하아아. 급격히 피곤해진 토이치가 한숨을 내쉬었다. 취객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토이치 군도 본인이 잘생긴 거 알지?”
“그렇습니까.”
“맨날 예, 네, 아닙니다, 아닙니까… 안드로이드야? 재미없게.”
“사람입니다.”
“츠키하라 안드로이드.”
“다시 말하지만, 사람입니다.”
크리쳐도 술에 취하던가. 토이치의 짜증이 점점 깊어져갈 때쯤 툭, 슌이 어깨 위로 이마를 붙였다.
“내 걱정은 하나도 안 했지?”
토이치는 제 어깨 위로 올라온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했습니다.”
“…걱정했어?”
불쑥, 슌이 고개를 치켜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근접한 거리에서 교차했다. 조금만 가까이했어도 코가 닿을 뻔한 거리에 토이치는 순간 경직되었다가, 얼굴을 뒤로 물리며 답했다.
“…네.”
“왜?”
“그야 당신은…”
속으로 단어를 골랐다. 친구? 는 아닌 것 같고. 동료? 파트너? 도 아니다. 지금은…
“…동거인이니까요. 동거인이 안 들어오면 걱정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깜빡, 깜빡.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뜬 슌이 허, 하며 바람 빠지는 실소를 뱉으며 몸을 떼어냈다.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동거인. 그렇지. 그래도 친구로는 올려주지 그래? 치사하네.”
친구도 못 되나…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저 혼자만 들리도록 웅얼대는 슌의 모습에, 무언가 생각났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에서 패딩을 걸쳐 입고는 현관문 앞에 선 채 슌에게 외쳤다.
“잠깐 편의점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엉, 올 때 맛있는 거 사와...”
당고같은 거… 웅얼대는 소리를 뒤로한 채, 현관을 나섰다.
…예상하긴 했는데.
토이치는 괜히 편두통이 올라오는 기분에 이마를 짚었다. 분명 내일 숙취 때문에 앓아눕겠지 싶어 잠시 편의점에 다녀왔는데, 돌아온 토이치를 반기는 것은 그 짧은 시간 동안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 자세 그대로 잠들어버린 슌이었다. 한숨을 쉬며 식탁 위에 비닐봉지를 올리고는, 거실로 향했다. 검은 비닐 사이로 숙취해소제, 팩 밀크티, 꿀물, 당고 따위가 눈에 띄었다.
먼저 리모컨을 들어 영화를 끄고, 달그락대며 간이 테이블 위의 식기를 정리했다. 시이나, 일어나요. 시이나. 도저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취객을 몇 번 흔들어보다, 포기하고는 몸을 기울여 소파에 기대도록 만들었다. 남은 케이크를 상자에 원 상태로 포장하여 냉장고에 넣고, 테이블은 깔끔하게 닦아 정리했다. 손까지 깨끗하게 씻었으니, 이제는 저 취객을 처리할 차례다.
들쳐메고? 업어서? 아니면 안아 들고? 토이치는 소파에 한 팔을 기대고 있는 슌을 보며 고민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 상황 자체가 우습게 느껴졌다. 그냥 거실에서 재우면 되잖아. 현명한 결론을 내리고 슌을 질질 끌어 거실 한가운데에 눕혔다. 소파 위에 얹혀 있던 고양이 쿠션을 들어 바닥과 머리 사이에 끼워주며, 무릎을 굽혀 잠든 얼굴을 가까이서 관찰했다. 그 모습을 가만 내려다보던 토이치는, 무의식적으로 자신 역시 그 옆에 한 팔을 베고 누웠다.
흐트러진 앞머리, 그 사이로 보이는 이마, 가지런한 눈썹, 푸르스름한 빛을 반사시키는 콧등, 술기운으로 약간 상기된 뺨, 오른쪽 턱의 상흔… 얼굴 위로 희미하게 보조등이 내려앉은 길을 하나하나 따라가 보니 끝내 색색 날숨을 내뱉는 입술에 머물렀다. 술 취한 사람 특유의 달싹이는 입을 한참 응시하다, 손을 뻗는다.
손을 뻗어, 슌의 목을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경동맥 위를 더듬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호흡을 담아낸 흉부는 얕게 부풀었다 꺼짐을 반복한다.
분당 50회 내외, 군인 특유의 느린 심박수.
알코올 때문에 조금 높아진 체온은 37˚C.
50, 37. 고작 이 두 자릿수의 숫자가 나를 안심시킨다.
살아있다.
슌은 살아있다.
시이나 슌은, 나의 파트너는 살아있다.
살아 있다. 살아 있어. 죽지 않아. 죽지 않을 거야. 내 눈앞에서 죽지 않을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당신은, 죽지 않아.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나는 내 자신을 걸어서라도 당신을 살린다. 그러니까…
“사라지지 마…”
이건, 당신을 향한 기원.
당신이 모를 순간에서 바라는, 내 최초이자 최후의 소원.
삑- 삑-
정각을 알리는 비프음이 울린다. 목을 감싸쥐던 손을 풀고, 근처에 떨어져 있는 담요를 들어 덮어 주며 속삭인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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