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I want for Christmas is ...

Twas the Night Before Christmas

AIWFC is offstage

AIWFC by AIW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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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하게 울리는 종소리와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캐럴 소리가 뉴욕의 거리를 맴돈다. 얼굴에 행복이 가득한 미소를 채워넣은 사람들이 길을 한가득 메워버린 덕인지, 싸늘하게 얼어붙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밤공기가 유난히 따스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오늘 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 하루 전날의 밤. 온 세상 모든 땅 위로 따스한 축복이 흰 눈처럼 켜켜이 쌓이는, 고요하고 거룩한 밤.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 몸 누일 자리 없는 이와 마음 둘 곳 없는 이에게도 하룻밤 견뎌낼 따스한 축복과 웃음 한 조각이 주어지는 날. 무섭게 날아오는 총탄도 거세게 박혀드는 날선 비난도 잠시 사그라드는, 축복 가득한⋯.

“아—그래. 네가 그걸 입을 줄 알았지.” 오마리의 초록빛 스웨터를 슬쩍 흘겨본 피츠로이가 ‘파티셰리 쉐호’ 라고 적힌 빵 봉투와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부엌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던 오마리는 피츠로이의 말을 듣곤 거실로 뛰쳐나와 소파에 올려둔 종이 꾸러미를 풀어 붉은색의 스웨터를 꺼냈다. 하얀 눈송이 문양이 찍힌 스웨터를 본 피츠로이는 진심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크리스마스잖냐. 네 몫의 스웨터도 물론 준비했지. 내가 녹색을 입을 거라 네 걸 붉은색으로 골랐는데⋯.”

“그래, 네가 내년에 입으면 되겠네.” 손을 씻은 뒤 겉옷을 정리한 피츠로이가 신이 났는지 주절주절 이어지는 오마리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버리곤 들고 온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한창 만들던 카르파쵸를 얼추 마무리한 오마리가 어깨를 으쓱인다.

“초록색이 입고 싶으면 바꿔 입어도 돼. 쩨쩨하게 굴지 않을게.”

“교회에도 그거 입고 갈 거냐?” 오마리의 말을 또다시 가볍게 무시한 그가 오프너를 찾아 와 코르크에 끼워넣기 시작했다.

“목사님도 입으실 걸.” 완성된 카르파쵸를 들고 온 오마리가 식탁 위를 잠시 둘러보더니, 피츠로이의 어깨를 짓누르곤 그의 머리 위로 접시를 들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봐, 꼭 여기로 지나가야겠어?

“짜잔. 어때. 내가 힘 좀 써 봤는데.” 피츠로이의 핀잔을 슬쩍 무시한 오마리가 식탁을 향해 손을 펼쳐보이며 활짝 웃었다.

“구색은 다 갖췄네.” 피식 웃어보인 피츠로이는 코르크 마개를 천천히 뽑아올렸다. 병 입구를 막고 있던 코르크가 빠져나오자 여러 과일의 화려한 향이 솟아오른다. 다양하게 차려진 음식에서 나는 먹음직스러운 향을 누르고 달콤한 향기가 서서히 퍼졌다.

“와. 그 술 뭐야? 향이 무지하게 좋은데!”

“샤또 디켐. 이 정도 술은 들어봤지? 유명한 귀부 와인이야.”

“비싸기로?”

“그래, 네 생각보다 훨씬 비쌀걸. 상당히 좋은 와인이니까.”

“어, 근데⋯. 이거 1921년 빈티지다.”

“뭐?” 두 개의 잔에 이켐을 적당히 따르던 피츠로이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순식간에 번진다. 하필 사 와도 그 해의 것을⋯.

“역사가 우리만큼 깊네.”

“어이가 없어서⋯. 아무튼, 메리 크리스마스. 오마리.”

“메리 크리스마스, 일라이자.”

두 개의 크리스탈 글래스가 가볍게 부딪히자 유리가 울리는 맑은 소리가 났다. 바로 이켐을 한 모금 입에 머금자 다양한 열대과일의 향이 입 안과 코 안으로 퍼지며 강렬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이 미뢰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우와, 달콤해! 진짜 포도주 맞아? 포도에서 이런 맛이 난다고!”

“식전주로 마시기엔 너무 달지만 말이야. 뭐, 원래 디저트 와인이니까 음식 다 먹고 마저 먹으면 딱 좋겠지. 마침 엘더플라워 마멀레이드를 사 왔어, 스콘도. 이켐하고 먹으면 꽤 잘 어울리겠지. ⋯⋯케이크도 있고.”

“안 그래도 이거 무슨 잼인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파티세리 쉐호에서 케이크 사면서 같이 샀어. 케이크 찾으러 갔는데 갑자기 눈에 띄더라고. 예전에 스콘에 발라서 먹었던 게 생각났어. 그⋯.”

“탤우드 부부 댁에서 먹었던 거 말이지! 아— 지금도 기억나는 것 같아!”

“오늘의 마멀레이드와 스콘은 훨씬 맛있을 거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까 꽤 기대되는데.”

두 사람이 눈을 감고 손을 모으며 기도할 준비를 한다. 소란했던 대화소리가 멎어들자 온기가 감도는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고요해진 공간에 오마리가 읊는 기도 소리가 나지막히 울린다.

“하느님 아버지. 자애로운 주님의 풍성함으로 가득 찬 식탁 앞에 앉아 축복어린 양식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음식에 담긴 따스함과 배려를 이 순간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시고, 그들에게 평등하게 쉼과 기쁨을 허락하소서.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가장 큰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복하는 이 순간을 매년 소중히 간직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아멘.”

식전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뜬 오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묵한 접시에 스튜를 떠 담았다. 주황색이 살짝 감도는 연갈색의 걸죽한 스튜 안에는 썬 바나나와 쇠고기 덩어리가 가득 들었다. 마늘과 생강으로 향을 내고 양파와 토마토로 맛을 낸 뒤 코코넛 밀크를 부어 녹색 바나나와 어울리게끔 끓여낸 스튜는 동아프리카풍으로 만든 것이었다. 저 먼 땅에서는 이와 비슷한 음식을 은디지 냐마(Ndizi Nyama)라고 부른다 들었다.

조지프 오마리는 수십 년간 많은 이민자들을 만났다. 인도에서, 케냐에서, 우간다에서, 그리고 잔지바르와 탕가니카 땅에서 영국으로 또 미국으로 쓸려온 사람들은 늘 고향의 식사를 그리워했다. 그들은 새 땅에서 고향 땅의 음식과 가장 비슷한 맛이 나는 재료들을 찾았다. 고향 땅에서만 나는 향신료를 흉내내어 만들거나 웃돈을 얹어서라도 사들였다. 탕가니카 땅에서 영국 땅으로 쓸려온 조지프 오마리에게도 그리운 식사가 있다. 그러나 그 식탁에 앉았던 기억은 너무나 까마득한 어릴적이라 조지프 오마리는 그때의 음식들 중 무엇 하나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수십 년도 전에 먹었던 음식의 맛과 향을 구체적으로 불러오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다만 조지프 오마리의 곁에는 비슷한 땅을 밟았던 사람들이 있다. ‘손님이 오는 날이면 꼭 먹었던 쌀 요리’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이야기하자 이민자 교회 사람들은 필라우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큰 솥에 모두 함께 만들어서 먹었던 포리지 느낌의 무언가’를 어렴풋이 떠올리자 사람들은 우갈리(Ugali)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누어준 향신료와 레시피를 등에 업고 그리운 식사를 똑같이 만들어내고자 끙끙대던 날들이 있었다. 코코넛과 바나나 향은 늘 가슴 한 구석을 쿡쿡 찔러댔지만 어떤 레시피로도 ‘찾았다’는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리운 식사를 찾을 수 없었다. 영원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조리법이나 향신료, 음식의 재료가 나고 자란 땅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기적이 일어나 기억 속 식사와 온전하게 똑같은 것이 제 앞에 놓여진다 할지언정, 그 음식에서도 ‘찾았다’는 기분은 영영 느끼지 못할 것이다.

조지프 오마리가 여즉 그리워해온 것은 그때의 식사가 아니라 그때의 식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헤매어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던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조지프 오마리는 그리운 식사를 찾아내는 일 대신 새로운 식탁에 올릴 식사를 만들어내는 일에 몰두했다. 이미 영국식으로 바뀌어버린 조지프 오마리의 입맛과 날 때부터 까다로운 일라이자 피츠로이의 입맛에 맞추어 새로운 레시피를 시도하고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크리스마스 식탁 한 자리를 당당히 꿰찬 커리와 필라우는 피츠로이에게도 이젠 익숙한 음식이다. 두 사람이 같은 식탁에 앉아온 것이 벌써 육 년. 그동안 수십 가지 형태의 시도가 수십 번도 넘게 둘의 식탁에 올랐으니까.

오마리가 은디지 냐마 풍의 스튜를 퍼 담는 사이, 피츠로이는 나이프를 들고 큼지막한 칠면조 구이를 썰었다. 가슴살과 같은 하얀 부분의 고기와 허벅지살 같은 검은 부분의 고기를 적당히 썰어낸 뒤 각자의 접시에 반씩 담았다.

“이거 속은 뭘로 채웠어? 스터핑을 한 것 같긴 한데.”

“필라우 만들고 남은 쌀 조금, 스튜 만들고 남은 소고기랑 바나나.”

“⋯⋯.”

“미세스 라자가 스터핑에는 말린 크랜베리랑 소시지를 많이 쓴다면서 넣어보라고 나눠주신 것도 있어서 그것도 넣고, 코코넛도 조금 넣었던가? 곁들여서 구우려고 사 둔 감자도 옆에 다 안 들어가길래 잘게 잘라서 같이 넣었어. 파슬리랑 생강도 남아서 썰어넣었고. 오븐에 마늘 구워서 넣으면 맛있다길래 그것도 넣었지. 들어간 재료가 몇 개인 줄 알아? 손이 얼마나 많이 갔는데!”

“코코넛이랑 바나나가 들어간 스터핑은 들어본 적 없는데⋯.”

“뭐 어때. 집마다 다 다르게 이것저것 넣어먹는다더라. 미리 한 번 싹 익힌 다음에 채워넣으라고 하셔서 익힌 걸 조금 먹어봤는데 꽤 맛있었어. 걱정하지 마.”

‘넌 돌도 맛있게 씹어먹을 자식이잖아⋯⋯.’ 즈음의 소리를 삼킨 피츠로이는 레몬과 감자 따위의 가니쉬와 칠면조 속을 채운 스터핑까지 꺼내어 그릇에 나눠 담았다. 속에서 꺼내어진 스터핑의 향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아 다행이었다.

“먹어 봐, 어서.” 그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기대감으로 잔뜩 반짝거리는 그의 눈빛을 이기지 못한 피츠로이가 주저하던 표정을 감추고 포크와 나이프를 제대로 들었다.

“그래, 잘 먹겠습니다.”

칠면조는 보통 가정집에서 그럭저럭인 솜씨로 만들어 먹으면 그리 맛이 좋은 고기가 아니다. 크기가 크고 두꺼운 탓에 잘 익지 않아 오랜 시간 익혀야 해 흰 부분의 살은 쉽게 퍽퍽해지고, 검은 부분의 살은 비린 맛이 강해 요리하기 쉽지 않다. 실력 좋은 요리사가 잘 요리해야 맛이 있는 고기라는 걸, 상당히 까다로운 입맛과 식견을 지닌 일라이자 피츠로이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고기를 입에 넣기 전에 조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오마리가 요리를 못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뛰어나게 잘 하는 건 아니니까⋯.

“⋯⋯맛있네.” 피츠로이의 눈이 깜짝 놀란 것처럼 크게 뜨였다.

“당연히 맛 없을 줄 알았다는 그 표정 뭐야?”

“아니, 칠면조 요리는 솔직히 레스토랑 아니면 맛있는 요리가 아니니까⋯. 이거 진짜 네가 한 거 맞아? 꽤 맛있는데?”

“사실 미세스 라자가 칠면조 밑준비를 한다고 하시기에, 숟가락을 조금 얹었지. 그래도 우리 건 내가 직접 만들었어! 레시피만 알려주신 거야.”

기대보다 훨씬 맛이 괜찮은 칠면조 구이는 하얀 살코기도 퍽퍽함 없이 부드럽고 촉촉하게 잘 익었다. 버터와 그레이비를 굽는 동안 아주 여러 번 발라 구운 덕에 안까지 기름기와 육즙이 잘 스며들어 있었다. 속재료로 파슬리와 생강, 구운 마늘을 넣은 덕에 비린내가 잘 잡혀 거부감도 없었다. 소금과 후추, 올리브오일을 가볍게 뿌린 샐러드와 먹으니 그리 느끼하지도 않았다.

“카르파쵸도 먹어 봐. 너 연어 좋아하잖아. 오늘 새벽에 잡은 신선한 녀석이랬어. ”

“⋯⋯고마워, 오마리.”

피츠로이는 접시에 올려진 칠면조 구이가 바닥을 보이자 카르파쵸를 듬뿍 덜어왔다. 한 입에 가득 차는 크기로 썰린 선홍빛의 연어 위로 올리브 오일과 다진 마늘, 레몬주스와 화이트 와인 비네거를 섞은 상큼한 드레싱과 후추를 뿌리고 얇게 썬 채소를 얹은 카르파쵸는 입을 개운하게 만들어 주는 매력이 있었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피츠로이를 위해 설탕과 꿀 등을 뺀 덕에 더욱 상큼한 맛이 돋보였다.

“나 요리 많이 늘었지 않냐?”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예전보다는 훨씬. 아직 깊고 섬세한 맛은 없지만.”

“네, 네. 앞으로 더 정진할게요, 평론가님.” 그의 화법을 가볍게 비꼰 오마리가 호밀빵 한 조각을 들어 은디지 냐마 풍 스튜에 찍어 먹었다. 텁텁하고 거친 식감을 가진 빵에 꽤 걸쭉한 스튜 국물이 닿자 단단했던 조직감이 먹기 좋을 정도로 부드럽게 풀어지며 딱 먹기 좋은 식감으로 변했다. 시큼하고 구수한 향과 단조롭지만 안정적인 맛이 나는 호밀빵이 고소한 코코넛 밀크, 토마토, 그리고 각종 향신료에 쇠고기가 어우러져 매콤하고 자극적인 스튜의 맛을 단단히 받쳐주어 상당히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피츠로이의 입에도 스튜의 맛이 꽤 나쁘지 않았는지, 그는 오마리처럼 호밀빵을 곁들어 한 접시를 거의 다 비워 낸 뒤 연어 커리와 난도 조금 덜어 먹었다. 맨해튼 이민자 교회의 미세스 파텔이 나누어 준 것을 오마리가 오븐에 살짝 데워 다시 따뜻하게 만든 난은 보들보들한 촉감에 쫀득하게 찢어지는 것이 참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커리에도 연어를 넣었어. 너 연어 좋아하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좀 새로운 레시피를 시도해 봤는데⋯. 일단 먹어 봐.”

어디 한 번 보자는 듯 고개를 끄덕인 피츠로이는 스푼을 들어 커리를 한 번 휘저어 보았다. 새로운 레시피라고 했지만, 겉보기에는 오마리가 가끔 식탁에 올렸던 생선 커리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큼지막한 연어 조각을 반으로 잘라 적당한 크기로 찢은 난 위에 얹어 한 입에 넣었다. 가람 마살라를 넣은 덕에 나는 살짝 매콤한 맛이 입맛을 돋구고, 그리고 이어지는 꽤나 시큼한 맛이⋯.

“⋯⋯좀 시큼한데. 원래 이래?”

“많이 셔?”

“약간.”

“최근에 타마린드 페이스트를 구해서 한번 넣어 봤거든. 아마 그거 때문일 걸. 나름 반절 적게 넣은 건데⋯⋯. 많이 이상해?”

“처음엔 좀 놀랐는데 먹다 보니 그럭저럭 괜찮아.”

“그렇지? 필라우도 했어! 같이 먹어 봐.”

“아주 축제군. “ 피츠로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메리 크리스마스.”

피츠로이는 조금 들떠보이는 오마리의 낯을 보며 제 접시 위에 남은 음식을 깔끔하게 먹어 없앴다. 오늘의 식사와 비슷한 음식들이 지난 육 년간 둘의 식탁에 수도 없이 올랐다. 하지만 타마린드에서 나는 시큼한 맛과 가람 마살라의 매콤하고 알싸한 향 아래로 깔린 코코넛 밀크의 부드러운 향미와 같은 것들은 영국인 일라이자 피츠로이에게는 여전히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낯선 요소였다.

“이런 건 너에게는 낯선 맛은 아니겠지? 오히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맛에 가까울테고 말이야. 고향 음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낯설지는 않아. 그렇다고 아예 친숙한 음식이라고 하기도 어렵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거나, 고향 음식같다거나⋯⋯. 그렇진 않거든. 사실 기억도 잘 안 나니까.”

“흠, 좋아. 그럼 이것도 먹어 봐.” 버터를 가득 넣어 황금빛이 아름답게 감도는 삼각형의 스콘 위로 오렌지 필이 듬뿍 들어간 엘더플라워 마멀레이드와 연노란 빛깔의 클로티드 크림이 차례차례 얹어졌다.

“하하, 코니시 식으로 먹는 건 여전하네.”

“당연하지. 데번 식은 절대 용납 못 해. 그건 이단이야.”

“어련하시겠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오마리가 스콘을 건네받아 한 입 깨물어 먹었다. 질 좋은 버터를 아낌없이 사용해 고소한 맛이 일품인 스콘 위로 향긋한 엘더플라워 향과 오렌지의 상큼함, 그리고 풍부한 우유 향이 가득한 클로티드 크림이 층층이 쌓이는 맛이 환상적이었다.

“네 말대로네. 진짜 맛있다. 그 때 탤우드 부부 댁에서 먹었던 것보다 맛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슬리거나 낯선 맛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거지?”

“당연하지. 한두 해 먹은 음식도 아니고.”

“다행이야. 그건 확실한 네 장점인 것 같네. 어떤 식재료든 낯설어하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거 말이야. 덜 익은 민물 생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먹은 거 보면 그냥 아무거나 잘 먹는 것 같긴 한데.”

“이거 칭찬이지? 비꼬는 거 아니고?” 오마리의 고개가 조금씩 옆으로 기울어졌다. 앞부분은 칭찬 같았는데 뒷부분은, 영⋯.

“아니, 칭찬 맞아. 영미식 음식이나 유럽 음식만 익숙한 나한테는 이런 식재료가 여러 번 먹어도 이국적이라는 생각이 사라지진 않거든. 평소에 먹던 음식이어도 이런 조합으로 먹으니 낯설기도 하고⋯. 반면 오마리 넌 여러 가지 식재료를 익숙하게 즐길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문화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고, 몸에 익은 것이 많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잖아. 몸과 마음을 온전히 내려둘 수 있는 땅을 찾기 어려울 만큼 말이야. 단점에 매몰되지 말고 뭐든 장점을 찾아 좋게 생각하는 건 네 특기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

그 무덤덤한 어조의 말 몇 마디에 오마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인도인이 먹는 납작하고 질깃한 빵을 열심히 먹으며 인도인이 되고 싶어하던 날이 있었다. 독일인들이 나누어주던 바싹 말라 단단하고 시큼한 맛이 나는 검은 빵을 타액으로 녹여 먹으며 독일인이 되고 싶어하던 날도 있었다. 영국인들이 즐겨먹는 대로 미묘한 향이 나는 붉은 물에 우유를 붓고 퍽퍽한 밀가루 덩어리에 잼과 크림을 발라 입에 넣으며 영국인이 되고 싶어하던 날도 있었다. 모든 순간에 열성적이었던 조지프 오마리는 그 음식 하나하나에 제 입을 어떻게든 길들여 나가며 모든 음식들을 무리 없이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어느 땅의 음식이든 익숙하게 입에 넣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에는, 다른 땅의 사람이 되고싶어하느라 관심을 주지 않았던 고향 땅의 음식이 그리워졌다.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식탁을 되찾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발 디딜 땅 없다는 허전함과 함께 할 이 없다는 외로움은 살아가며 조금이나마 옅어졌지만, 찾을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은 여전히 가끔 조지프 오마리를 기묘한 감정에 빠트렸다. 아마도 기민하고 날카로운 눈썰미를 가진 일라이자 피츠로이는 오마리의 밝은 어조와 표정에서 엷게 비쳐나오는 그 찰나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무덤덤한 어조 아래에 따스한 온기를 담은 진심을 건네주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그 사실이 오마리에게 더없이 따듯한 감동이 되어 전해졌다.

“그래, 그러네. 네 말대로일지도.”

잠시간 미묘한 낯으로 말을 잇지 못하던 오마리가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따금 찾아드는 방향 잃은 그리움은 차마 어찌할 수 없지만 조지프 오마리는 새로운 식탁을 찾았다. 글래스고의 교회에서 주일마다 음식을 나누던 저녁,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보던 런던 타운하우스의 식탁과 맨해튼 공원에서 평일 오전 느즈막히 먹는 샌드위치와 커피. 그것들이 이제 조지프 오마리의 새로운 바라자다.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좋아. 기쁜 날인데 그냥 그렇게 웃어라. 그리고 내일 모레부터는 조금 더 차분한 인간이 되도록 해. 케이크도 좀 먹고.”

“답지 않게 달달한 걸 사 왔네.”

“크리스마스잖아. 기분 내려고.”

“참, 이웃집에서 크라나칸을 나누어 주시길래 받았어.”

“산딸기 설탕절임이 꽤 상큼했으면 좋겠군.”

“케이크, 너도 먹을 거지? 한 조각은 먹어. 크리스마스잖아.”

“딱 한 조각 정도만. 이켐에 곁들여서 먹을 정도면 돼.”

고개를 끄덕인 오마리가 새 나이프를 들고 와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잘랐다. 붉은색과 녹색의 크리스마스 꽃 장식이 아기자기하게 올라간 하얀색 크림 케이크는 마치 동화책의 삽화나 영화에 나오는 그것처럼 예쁜 모양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두께로 한 조각을 잘라 피츠로이에게 건네고, 제 몫으로는 얼추 4분의 1은 넘어보이는 많은 양을 잘라 덜었다. 잘린 케이크 단면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탐스러운 모양새였다. 새하얀 이탈리안 머랭 버터크림 옷 아래로 건과일이 빼곡히 박힌 빵이 꽉 들어차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였다.

“역시 달아. 어쩐지 미스터 쉐호가 건과일을 아끼지 않고 듬뿍 넣었다면서 실컷 자랑을 하더라.”

“딱 좋은데? 케이크는 이 정도 달아야 케이크지. 이켐하고도 잘 어울리고. 과일 맛이 나서 그런가?”

“아냐. 이켐은 남겨뒀다가 좀 더 어울리는 음식을 찾아서 마셔야겠어.”

“뭐, 그건 알아서 하시고. 그보다 말이지. 다음 크리스마스엔 다시 진저브레드를 만들어 볼까? 진저—오마리—맨 말이야.”

“굳이⋯, 그래야겠냐? 꼭 진저브레드가 아니어도⋯.”

문제의 그것을 떠올린 피츠로이의 낯이 조금 일그러졌다. 옅은 색과 진한 색의 반죽이 이리저리 뒤섞인 반죽을 넓게 펴 틀로 찍어낸 뒤 구워 내 탄생한 진저—오마리—맨은 장식용으로 쓰기 위한 레시피로 만들어 도저히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지 않는 맛이었다. 장식으로 쓸 때 부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단단하게 만든 탓에 입에 넣어도 바스라지기는 커녕 쉽게 씹히지도 않았고, 생강 맛도 과해 입 안에 머금고 있기도 힘들었다. 장식용으로만 몇 개 만들고 만 것이 아니라 식용으로 상당히 많은 양을 만들어버린 탓에 피츠로이는 어쩔 수 없이 그 끔찍한 맛의 진저브레드를 두어 개 정도 맛봐야만 했다. 진저—오마리—맨에 대해 생각할수록 기묘한 맛과 식감이 입에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에 피츠로이는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그게 그렇게까지 끔찍했냐? 됐어, 다른 거 만들어 줄 테니까⋯. 아!”

갑작스럽게 탄성을 지른 오마리가 거실 창가 쪽으로 달려갔다. 다급한 손길로 반쯤 쳐져있던 커튼을 걷자 밤의 장막이 내린 검은빛 세상 위로 하얀 싸락눈이 설탕 가루를 뿌리는 것처럼 아름답게 내리는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보이는 풍경이었다.

“이거 봐!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피츠로이!”

“오늘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이브⋯, 아니다. 별 상관 없겠지. 그러게,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두 개의 잔에 다시 이켐을 채워 오마리 곁으로 다가온 피츠로이가 창틀에 기대어 선 뒤 바람에 날리는 눈을 감상했다. 슈가파우더처럼 고운 싸락눈인 탓에 바닥에 쌓일 새도 없이 녹아버리는 눈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리는 눈은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올만큼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길이 잔뜩 얼어붙어 있겠는데. 교회 갈 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오마리.”

“차라리 꽝꽝 얼어붙으면 좋겠는데. 스케이트 타고 가면 재밌을 것 같지 않냐? 마침 근처에 광장도 있고.”

“됐거든. 위험한 짓 하다가 다치면 어떡하려고.” 농담을 농담으로 듣지 못하고 핀잔 한 마디를 던진 피츠로이가 오마리 몫의 잔을 건네어 준 뒤 제 잔을 들어올렸다.

“다시 한 번 메리 크리스마스, 오마리.”

“피츠로이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도 내일도, 일 년 내내 축복 가득한 날이 이어지길.”

온 세상에 하얀 눈이 날린다. 작게만 느껴지던 싸락눈이 조금씩 검은 하늘을 뒤덮는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 아기 예수의 성스러운 탄생을 기념하는 축복 가득한 날. 캐럴과 종소리가 희미하게 울려퍼지고, 평소보다 더 다정한 마음을 담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도란도란 이어지는 이 밤. 따스한 온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사랑과 축복이 모든 곳에 내려앉는 이 밤. 당신을 괴롭히던 절벽 아래의 파도도, 절벽 위에 나부끼는 칼바람도, 그 속을 떠돌던 유령도, 밤잠을 설치게 하던 괴담도 하얀 눈 속에 덮여 고요히 잠드는 이 밤.

이 밤을 견디는 당신이 어디에 서 있든, 어떤 일을 겪든, 어떤 존재로 살아가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모든 순간을 항상 행복하게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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