芽鱗

침범 by 나비(絕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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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거꾸로 되짚어 가는 길이 익숙해서 길을 잃었을 때는, 온 대로 걸음질 하면 도로 방향을 찾곤 했다.

어렴풋이 네가 온 길로 떠나는 게 느껴져서, 발자국이 남는다면 내게 오는 것처럼 뻗어있고 너는 눈 녹은 듯 사라져 없어진 모양새겠구나, 생각한다. 백 초라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겠지.

또 그렇게 생각한다. 1분 30초 가량의 시간 속에, 나머지 십 초를 더하면 꼭 백 초가 된다. 90초 간은 반성을 하자. 싸라기눈처럼 상념이 휘몰아쳐 내린다. 처음은 식은 듯 차가워서 무슨 생각과 반성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미 괜찮다는 네 말에 내가 무어라 답해 보았자, 또 같은 메아리가 될 것 같아서. 누군가 너를 보고 아둔하다 힐난하며, 미련한 놈이라 하고, 집 지키는 개와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댔나. 너는 다 버리고 작별한 것 같으면서도 오로지 하나를 끌어안고 나오지 않는데, 그걸 누가 비난할 수 있단 말이지. 손 뒤집듯 그렇게 쉽게 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하나. 잡지도, 영영 놓치지도 못하는 나는 여기 있었다. 네 옆에 있었다. 서늘하게 식은 손끝이 방금 전의 포옹을 회상한다. 담뱃불에 데인 듯 이는 화끈하다. 너는 나를 놓기 전에 그렇게 이야기했다. 몰라도 괜찮다, 누군가가 웃을 수 있으면 족하다. 내가 모두 너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하자 너는 고개를 저은 것이다. 반성해야 할 점이 많다. 내가 하는 제안들이 너를 몰라 나오는 것이 아니다. 네가 거절하고, 떼 낼 것을 알면서도 버티고 서서 말한다. 그럼에도 차마 낯뜨겁다는 감정은 알아서, 설득은 하나 선택은 네 것이라고 돌리고 돌려 이야기하다- 결국 내 마음대로 할 것이니 너도 어디 해 보라고 윽박지른 것이나 매한가지다. 반성한다. 그러면서도 울음을 다 그치지 못해서 네가 사과를 두 번 하도록 했다. 무어라 말이라도 해 보라고 몰아붙였다. 평상시에도 이런 이야기를 가끔은 했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아서 밤을 낮처럼 살며 깊이 파고들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쉽사리 너를 흔들어서 혹시라도 네가 무너지면 나도 어쩔 줄 모르게 되기 때문에. 방향이야 제시할 수 있겠지만, 너를 짊어지고 밖으로 갈 수는 있지만, 네가 누구냐는 물음에 내가 답해줄 수는 없어서. 네가 나를 달래기 힘든 만큼 나도 그럴 것이다. 날 안아줄 때 무슨 생각을 했어? 묻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추웠고, 너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치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서로 괴어 있는 만큼은 지지할 정도의 강도를 가지는 게 낫겠다. 하지만 그게 늘 잘 되는 것도 아니지.

반성한다. 네가 구태여 잘 하지도 못하는 문장들로 나를 위로하게 한 것을. 네 의사를 좀 더 일찍 묻거나, 아예 묻지 않았어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된 것을.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으면서, 사실 괜찮지 않았다며 토로하고, 네가 오롯이 호프의 방패이자 검인 것을 부정하고 싶어서 그것들을 네 손에서 떼어 내보려고 했다.

반성해야 한다. 나조차 어쩌지 못하는 내 두려움을 네게 전염시켜서. 솔직히 말할까. 네가 망설이다 다치는 것보단, 망설이지 않는 게 낫겠다고도 생각한다. 파헤치면 지금의 일상이 깨질 게 두려워서 옆으로 밀어놓고, 모른 척 해 놓고서 갑작스레 우리가 살얼음 위에서 겨우 서 있단 말을 했다.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으며, 뭣 모르고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이 -그네들이 다 컸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밟혀서 차마 그걸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고 쏟아냈다. 나조차도 제대로 형태를 모르는 괴물이 네 등 뒤에 서있다. 아주 지척에서.

“차라리 산화되었으면 몰라.” 허공에 대고 말 붙여 본다.

나는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너는 알면서도 받아들인 채로- 일상을 돌리고 또 돌리는 것이다. 너는 여전히 자랑스런 우리의 영웅이며,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이나 하얀 쪽배 같은 담요 덮고 네가 어딘가 밝힐 세상 생각하며 쪽잠 잘 수도 있겠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지는 것이다. 소식이 없어 섭섭하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아주 나중에, 아주 나중에야 내가 영영 없어졌음을 알고 바랜 세월 덕에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슬퍼했으면 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는 사람이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사람이며, 나도 사람이고, 우리 뒤를 따라온 이들 전부가 사람인데- 선택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자신이 도구인지도 모른 채, 앞으로도 주르르 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사명감. 허울 좋은 사명감. 진짜일 수는 있어도 모두가 같은 사람은 아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 팽배했고, 생각보다 허술한 점도 많았으며,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답 앞으로 언제 밀어넣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알고 싶지 않았던 답을. 그러면 선택하겠지.

네가 난 이 세계에 자신의 애정과 헌신을 바치는 것처럼, 나는 또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의 불행을 외면했을 때, 그 불행은 불현듯 다른 이의 잠자리에 숨어들어 천천히 말라죽어 가게 하겠지.

너와 내가 싸운다면 그 이유는 사랑이어야 했다. 무엇에 대한 사랑이어야 했다. 세상을 향한 미련, 나로 인해 삶을 얻을 사람들, 함께 일하는 동료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가끔 아프지만- 후배들.

당장의 세계를 지키는 네가 밉지 않다. 이 세계 자체가 너이며, 너의 존재이다. 네가 그렇게 이야기했으니. 너는 당연한 사랑으로 당연하지 않게 살고 있다. 누구보다도 가혹하게, 그 앞에서.

너는 옳았다. 곧았고, 어디에서나 잘 보였다. 너는 대명사로 쓰여도 될 사람이다… 다들 그렇게 너를 생각했다. 그 곧고 옳음에 다정함이 엉겨붙어있어 지금껏 유지되는 것을.

그러나 현재 없이는 미래도 없으리라. 네가 다정으로 지키는 미래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면, 누군가가 선택했을 때, 홀로 아주 힘겹게 싸워나가야 한다면-나는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전부를 구원할 수는 없다. 손에 닿는 만큼 다 챙기는 것이지. 안 그래? 하지만 네가 그 앞에 서서 힘껏 모두를 지지해주고 있으니, 나는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을 챙겨도 되는 거잖아.

어쩌면 너까지도. 그래, 너까지도.

담배를 끊은 지 오래되었는데, 한 번 안기고 나니 온기가 남았다가 스러져서 추운가- 그 담뱃불이라도 깜빡깜빡,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디 동화의 성냥팔이 소녀처럼. 하지만 너를 찾는다면 끌어안아서-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 전까지는 타의로는 놓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습관적으로 지니고 다니는 라이터만 몇번 던졌다 받았다. 태그가 풀린 왼손에는 깃털을 들고서 까딱여도 본다. 자, 어느새 90초가 찰나같이 흘러갔다. 극화된 사고의 상태로는 한 시간쯤 넉넉하게 지난 것 같기도 했고.

마지막은 열을 세고, 눈을 감고 …

가장 높은 곳을 찾기 전에, 아주 낮은 곳부터 너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너는 광장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사람 없는 곳으로 숨었을 수도 있겠다. 어차피 밤이라 보일 사람도 없을 텐데- 너는 낮이나 다름없는 밤이기 때문에 미리 사려했을 수도 있겠다. 내가 지금 지나친 자리에 네가 서 있다 사라졌을 수도 있겠다. 깃털을 날려도 본다. 이 너른 곳에서 너를 어찌 찾나, 막막하다.

그래, 가장 어두운 곳에 가자. 불현듯 너는 희미하게 신호를 보내왔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덫에 걸린 것도 아니다. 구조 신호도 아니고.

다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술래로 있었고, 네가 말한 만큼의 나는 아주 술래잡기에 능할 것이며- 실을 끊고 간 사냥감이 어디로 숨는지도 잘 알았다.

네가 나를 적어도, 그래, 저울에 올릴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에 - 그러니까, 아직 그래보지 않았다면. 혹자는 해 보았어도 나와 같이 이를 외면하고 있었다면-

그 망설임이 나를 이끌 것이다. 네가 지켜야 하는 세상에 아직 내가 존재할 테니까. 내게 도망치라고 이야기한 너를 믿는다. 네가 죽여야 할 지도 모르는 나를.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혹자는 동틀 때가 다 되어서야- 네 앞에 서서, 최후의 문장을 꺼낼 것이다.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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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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