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증명

거하게 포장된 야간 당직 땡땡이

침범 by 나비(絕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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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지 않으려면, 그럴 틈조차 없게 깊게 잠들면 된다.

과로는 오히려 수면 불균형을 초래하지만, 눈 감고서 지속하는 호흡법과 이능력의 부작용에 따른 피로는 꿈을 인지할 새도 없이 깊은 수마로 이 자를 데리고 갔다.

모처럼 휴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후배에게 조언한 게 무색하게 잠자기 바빴다. 아주 드물게 집에 돌아가- 먼지 앉지 않게 천 씌워둔 식탁을 걷어내 정리하고,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엔 자동으로 물을 주도록 되어있는 식물의 화분을 확인한 후에 씻고 대충 옷가지를 걸친 다음에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정복을 옷걸이에 널어 침대 머리맡에 둔다. 세간은 다 갖추어져 있으나, 세탁기도- 가스 버너도 쓰는 일이 적었다. 정기 검침은 셋방 관리인에게 아예 열쇠와 약간의 수고비를 주고 맡겼다. 식물이 여즉 생생하고 매번 영양제가 바뀌어 있는 걸 보면 심심찮게 봐주시는 것 같았다. 세입자가 히어로라는 이유로 아주 편의를 봐주지는 않아도, 약간의 호감과 친절을 베풀어주는 분이었다. 가끔 집에 돌아와 있을 때 마주치면, 침대에 시체처럼 뉘여진 제 몸을 발견하고 ‘에그머니나!’ 하며 놀라기 일쑤였지만. 열쇠로 문을 따는 소리도 듣고,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도 들었지만, 잠에 취한 몸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겨우 눈 뜨고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면, ‘처자! 옷 좀 입고 자!’ 라던가- ‘이번에는 너무 오래 집을 비운 거 아닌가?’ 같은 말을 조잘거리며 이내 검침과 식물의 상태를 본 후에 ‘갈 테니 쉬어요!’ 같은 말을 하고 떠났다. 너무 피곤해서 움직일 수 없었던 날엔,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신발만 겨우 벗은 채 허물처럼 옷을 훌훌 벗고 침대에 엎어져 있었더니- 그걸 죄 정리해서 탁자에 둔 뒤 따듯한 차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두고 가셨던 적도 있었고. 참 고마운 일이긴 했으나 그 이상으로 친해질 것도 없었고, 그럴 계기도 없었다.

호프 소속이구나- 와 친절한 관리인이시네- 정도가 서로의 감상이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제는 서른 살 정도 먹었고, 보고 지낸 지는 꽤 지났는데, 상대의 나이가 꽤 지긋한지라 스무 살 먹든 서른 살 먹든 그냥 나이 찬 가시내 정도로 보고 계시는 듯도 했다.

어느 날 관리인의 자제분께서 -역시 일반인이다.- 범죄 사건에 연루되어 기관으로 인계하게 되었을 때 그는 바로 알아보았다. 무척이나 닮았고, 제가 거의 잠에 취해 있을 때 그 잠깐 사이 집을 둘러보시며 늘어놓는 말 중에는 자식 이야기도 종종 있어서. 그렇게까지 큰 사건은 아니었으나- 밤중이었고,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지 않았다면 더 크게 번질 뻔했던 일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그 집에 적게 들어갈수록 이렇게나마 도움이 되는구나, 하고 우스갯소리처럼 생각했다. 자식 걱정에 한달음에 달려온 관리인분께서 저를 못 알아봤을 때는 재미있는 생각도 들었다. 감사 인사 한 번. 그 때까지 입 열지 않고 가만 있던 자는 상체를 낮추어 “선생님.” 하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 자는 관리인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하곤 했다. 처음에 의아한 눈치였다가 이내 그 낯은 놀람과 반가움으로 바뀐다. ‘처자! 아니, 여기서 일하는 히어로님이셨고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다음 순찰 시간이 다가왔으니- 간단히 안부를 물은 후에, 별 이상 없이 귀가하는 모자의 뒷모습을 보고, 이이 또한 업무에 집중했다. 다음 번에 집에 돌아왔을땐, 약소한 감사 쪽지와 함께- 못 보던 찻잎통이 있었다. 갖출 거 다 있어도 단출한 세간에- 다기가 있는 걸 눈여겨보시고 선물해 주신 모양이다.

찻잎이란 한번 손 대면 그 계절 안으로는 다 소비하는 게 나아서- 근무지에 가져가 한동안 두고 차를 우려마셨다.

그만큼 술을 마시는 일이 좀 적고, 따듯한 차 한잔에 잠들 수 있었다. 마음까지 좀 채워지는 듯해서.

이번 야간 근무를 자발적으로 빠지라는 과제 앞에선 당연하게 그 일상을 먼저 떠올렸다. 누구에게 이 업무를 이양하느냐도 문제였지만, 막상 빠져도 무엇을 할 것은 없었다. 돌아가서- 잔다. 간만에 이불 세탁도 좀 하고, 널어두고 쪽지를 쓰고 나오면 걷어주시겠지. 그런 생각이나 한다. 그러나 인재 측 과업 수행에 휘말려 잠옷이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상대방과 마주앉아 있으니, 어쩌다가 수락했는지 그런 생각도 뒤늦게 든다. 당연하게도 맨 바닥보단 침대가 더 편한지라… 모처럼의 야간 근무를 빠진다면 잠자리는 편할 수록 좋다. 하지만 그 좋은 조건을 다 버리고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된 것에는, 몸이 편한 것보다도 마음 채워지는 것이 급해서. 아, 그래 이실직고하자. 상대도 참 심술쟁이가 되어 와서는- 부러 남 명상하는 데 퍼질러 누워 있으면 저를 베고 누워버리거나, 자지 말라고 종용할 터다. 그러면 못 이기는 척 끌어안아야지. 그러고 나면 다음 날은 좀 더 나아질 것이다. 일주일 간은 그걸로 넉넉히 버티겠지. 끊어진 실이 저절로 다시 붙을 리 없는데도, 다시 매듭지어지는 것 같아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없앴다.

지금은 하나뿐인 동기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네가 팔만 벌리면 와서 끌어안아줄 아이들이 있다고.

내가 무어라 답했더라. 그래, 그 말 틀리지 않다. 그 행위 무용하지 않다. 하지만 한구석이 따듯할 수록 뜯겨나간 곳은 유독 시려져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럼 더욱 많이 받아 메우면 안 되느냐…같은 논의는 일찍이 끝났다.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내 당장의 온기를 던져넣어 메우고 싶진 않다. 지금의 따듯함은 지금의 것이다. 상흔을 메우기 위해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회가 있다면, 내게서 사라진 것을 도로 메꿀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놓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끌어안고서 생각했다. 다음이 있다면, 그 때도 용서하리라. 내게 용서받아야 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친구였었다면 나는 그럴 것이다. 내가 사람 끌어안아 버릇 하게 만든 사람을 도로 끌어안아 연원을 찾자. 그런 마음도 있었고. 그날 밤은 좋았다. 그로 인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정말 좋았다.

이후 나를 해방시켜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에는, 단지 정신뿐만 아니라- 좀 더 존재에 가까운 무언가의 이유도 포함이었다.

나는 이제 그 누구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불가항력의 상황이 오더라도, 어떻게든 발버둥치리라. 쉽게는 내어주지 않겠다.

사소하지만 나를 죄어둔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내 스스로를 내던져 보이겠다.

그 밖에 무엇이 자리하는지는 누구도 모르고, 누군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실이 나를 괴롭히게만 두지는 않을 것이고, 비로소 끝까지 힘껏 닿아본 후에야- 제대로 첫 울음 내보겠다.

그때까지는 미안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 잃는다면 그 하나만큼 괴겠다.

나로써는 한참 부족하더라도, 나의 최선을 다해. 그로 신뢰 증명을 마친다.

우리를 갈라 놓는 것 저편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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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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