告別의 직전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전투를 앞두고는 네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내가 생떼를 부리다시피 해서 네게 얻어낸 답들. 유예와 여지.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너는 우리가 서로에서 독립할 준비를 하자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별로냐고 이어 묻는 말엔, 대답도 않고- 문턱에 다 와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때쯤에야… ‘그럴까.’ 라고 조그맣게 답했던 것 같다. 네게는 들렸을 것이다. 그 기민한 감각으로, 창 밖에 서 있어도 방 안의 불평까지 다 듣는 그 능력으로 못 들었을 리가 없지. 그러고 나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가위로 잘라낸 듯 보이지만 실제론 거칠거칠하게 남은 유년기의 단면. 그럼에도 내가 바로 설 수 있었던 건… 학창 시절 내내 한 걸음씩 내가 원래 있던 가지로부터 내 몸을 떼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 직전에 단체로 기억이 지워진 적이 있어, 너와 내가 비슷한 대화를 했다는 것은 기억나지 않아도, 수첩에 대략이나마 쓰여 있었다. 이별을 준비하는 법을 이야기하다-능력을 활용하기 위한 대화를 했으니, 졸업 전후로 조금이나마 노력해 보자고. 그렇게 얻어낸- 바라는 대로 백업에 유리한 능력이었다. 너를 살리거나 말거나 하는 그런 거창한 도움은 못 되어도- 그야, 너는 상당히 튼튼해서.- 여명이라는 이름으로 움직이는 너희들 사이에 가끔 끼거나, 너와 둘이 차출되어 업무를 보거나. 그 정도면 적당했다. 너와 내가 결별할 날은 좀 멀겠구나. 어느 날 갑자기 작별도 못 한 채 이별의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별 일 없는 한엔. 너는 그냥 죽어버릴 사람도 아니라서. 그러니 그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사랑스런 후배의 말을 빌리자면- ‘거의 땅에 박혀 있는‘, 그만 날아가지도 못하고 있었겠지. 그렇기에 너는 마음만 먹으면, 아니- 네 의지가 아니더라도 명만 떨어지면 지옥에서도 기어 나와 설칠 자 같아서 역설적이게도 너와의 이별을 늘 상상했다. 그런 준비를 할 시간이 참 길었다. 그럼에도 그게 결국엔 괜찮지 못해서 속을 다 게워 놓듯이 무너지고 연약한 곳을 내보였다. 그걸로 작별할 시간은 벌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눈물짓기 전에 한 번쯤 널 잡고 안녕이라던가, 이대로 붙잡지 않고 보내 주마- 같은 유치하고 진부한 손 인사나 할 수 있으리라고. 그걸 넌 ’친절‘하고 다정하게 다시 되새겨 주었다. 그럴 순간조차 없을 수 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그런 곳이라고.
그런 말을 지금 네가 나에게 다시 하니 그만 또 서러운 것이다. 거기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남아 있을 텐데도,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방법이 없을 거란 게 여실히 느껴져서. 그 순간엔 너를 아무리 잡아당기고- 해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나는 누구를 지키는 너를 지키지도 못하고 너를 놓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앞날이 선명한 것이, 화가 났다.
어쩌면 관리자와의 대담 끝에 내려진 명을 네게 전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그게 좋은 판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 순간의 망설임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곤 하니, 그게 히어로로 살다 히어로로 죽으라는- 내가 가장 네게 하기 싫은 말일지라도 해야 했다. 이것이 판도라와 우리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할 여지조차 모두 없애버린 죽음의 명령.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관리자는 그 몇 안되는 마디의 문장으로 끝내버렸다. 슬픔은 아주 가속화되었고, 나는 침착해야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내 아주 작은 바람, 손끝으로 겨우 움켜잡은 것이 그 성질대로 빠져나갔다.
언젠가 올 지도 모르는 순간에 너무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게. 그런 이유를 갖다붙인 너.
나는 네게 안겨 있을 때, 마른 눈가로 다 울어서 그땐 슬퍼하지도 못할 거라고 쏘아붙여나 줄걸. 별 걱정을 다 한다, 너는 지금 내게 그런 말이 하고 싶냐. 밉상이 따로 없다! 네가 화내도 좋고 노려보아도 좋댔는데- 그땐 그럴 마음이 영 들지 않아서. 우린 감동적인 포옹을 방금 마쳤고, 나는 그 온기를 오래 간직하고 싶었고, 앞으로 내가 예감한 큰 사건들의 불안을 미리 견뎌내기 바빠서- 그런 변명투성이 말들을 치워놓고 보면 … 네 몸에 흉터가 그렇게 많은데, 네 마음에까지 그렇게 상처 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직전에는 또 짜증을 실컷 내고, 미운 자식이라 욕했으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사건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널 한 번 더 안아주고 갔으면 좋았단 마음은 있어도, 내가 그렇게 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 정도는 알고 갔으면 했다. 이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너와 나는 적어도 최선은 다해봤다고. 아니, 최선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관철했다고.
나는 네가 없어도, 평소처럼 휴게실의 밤을 지낼 수 있을 것이고
잔소리 없이도 아주 취해서 고꾸라질 때까지 술을 마시지는 않을 것이고
옆자리 비어도 그걸 오래 바라볼 시간조차 없이 네 빈자리 만큼 다른 이들이 적응할 때까지 뛰어다녀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바라보지 않는 게 소용이 없겠지. 무엇 하든 네 빈자리를 모두가 느낄 테니. 그건 좀 바보같은 말이었다는 걸, 지금은 내 곁에 없는 네가 인정하기를 바란다. 애초에 이 모든 게 끝나면 쳇바퀴처럼 돌아가기나 할까? 그런 의문도 들었지만 네가 나를 걱정하여 한 말이라는 것도 안다. 네가 없어도, 네가 없이도- 나는…
이미 홀로 와서 홀로 떠날 세상이라는 걸 안다. 네가 들여다보고도 다 알지 못했던 내 고독의 연유를 약간 꺼내볼까.
따지고 보면 너와 내가 하나였던 적은 없다. 아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궤도가 겹치고, 반경이 겹치고,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긴 했으나. 너와 나는 애초에 독립되어 각자의 홀로서기를 해서 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음에.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할까, 그러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고나 할까. 하지만 감히 그걸 말로 할 수는 없어서 행동으로 보였다. 사랑하는 이들을 챙기고, 함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거나- 식사 여부를 묻고, 함께 밥을 먹고 때로 끌어안고 자기도 하고. 너 또한 자연스레 거기 참가했으나 이 일상은 언제든 깨질 수도 있다. 그게 한 번 더 나를 못 견디게 했다. 수면 위는 아주 고요했으나….
걱정 붙들어 매시지. 네 친우는 생각하는 것보다 강인해서가 아니라, 그렇다고 아주 연약해서도 아니라… 우리가 아주 지척에 붙어 있으면서도, 그 연결이 손 한번 놓으면, 안았던 몸을 떼면 언제든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오랫동안 준비해 왔으며- 그 과정 중에 결심하기 위해 네게 마지막 호소를 던져 본 것이라는 걸. 단순히 이 호소가 거절당했거나, 먹히지 않아서가 아니라… 네가 나의 마음을 알고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 있어서라고 생각키로 한 것을.
…이렇게나 잘 정리된 답안을 가지고 어영부영 다시 너를 떠올리는 것은, 답안을 제출하지 못한 채- 속 안에 영원히 간직해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문득 겁이 나서. 이제는 너도 없는데, 또 누군가가 사라질까 봐서. 하지만 그렇게 해서 살아남으면, 계속 살아가야 하는데… 그게 너무나 두려워서. 설원에- 황야. 사막에 바다. 처음 목격할 그 광경들을 목전에 두고서도 갑자기 발을 떼지도 못하게 될까봐. 붙박인 채 돌아보게 될까봐. 너는 이걸 걱정했으리라.
그 밖에 무얼 걱정했다면, 걱정도 팔자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내 동기가 너 하나뿐이고, 동갑내기 친구도 하나였긴 하지만…. 네가 워낙 바빴어야지. 내가 너를 다 알지 못하는 것 만큼 너도 내게 그럴 것이다. 어리광도 시간이 좀 남아나는 사람에게나 부려야지. 의존하기엔 넌 너무 인기가 많은 유명인사라서. 그래도 기댈 수 있을 때 톡톡히 기댔으니 감사인사도 좀 전해놓을까. 푹 쉬라던가, 잘 있으라던가- 하는 인삿말은 속이 뒤집혀서 못 해주지만, 그래, 이게 좋겠다.
나중에 봐, 백야. 조금 더 나중에.
장황하게 괜찮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늘어놓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괜찮지도 않은 것 같아.
축하해, 내가 그렇게 긴 시간 고별을 준비했는데도 원치 않게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나를 흔들어 놓은 것을.
그리고 네 바람이, 내가 바라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에- 내가 그러리라 대답할 수 밖에 없는 것도.
이래서야 대체 누가 져 준 사람이지?
하지만 제대로 이별을 고하는 것은 조금 더 미룰까 해. 전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만 기다려.
네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으며, 그럼에도 내가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로 그 저울 위를 채우고 채워서, 너와 아슬하게 균형을 맞출 때까지 기다려 줘. 아니, 기다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라. 멋대로 떠났다면 그 정도는 책임져야지. 이런, 책임이란 말은 우리 사이에서 네겐 금기인데. 그 책임 다시 수거해 가고, 다른 말로 바꿔줄까. 그 정도는… 웃으면서 즐겨. 울고 싶으면 울던가. 네가 우는 건 상상이 안 되지만, 나는 블링크 같은 능력이 없어서 어찌되거나 모르겠군. 이만 마칠게. 전투가 곧이야. 늘 앞서 나가던 너니, 내 뒤에 서야 할 일이 그다지 없었을 텐데- 남아서 건투를 빌어줘야 해서 애석하겠네. 그래도 행운을 빌어줘.
이만,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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