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묻거든

돌이킬 수 있는 / 여준서리

책갈피 by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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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빛이 촘촘하게 바닥으로 고였을 때 정여준은 웃고 있었다. 윤서리가 모든 것을 말한 이후였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그랬던 적이 있다. 정여준이 왜 나서서 죽음을 자초했을지를 묻는 말에, ‘나를 구하려다 그랬다’는 답을 준 적이 한 번은 있었던 것이다.

바위 조각에서 찢기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공중을 부유하는 돌조각이 심장에 박히는 것도 같았다. 폐부 아래까지 돌덩이에 짓눌리는 감각이라고, 정여준은, 신음을 참으면서 생각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품 안에 윤서리가 있었고 비명을 지르면 그 사람의 귀가 아플 것 같았다.

“왜…….”

버석버석한 목소리가 귓가 옆으로 토해진다. 처음 듣는 것 같은 그 목소리가, 놀라우리만치 익숙하고 그립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여준은 윤서리의 입으로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리다가 결국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윤서리가 반사적으로 정여준을 받쳐 들었다. 어쩌면 반사적이라기보다는 익숙한 손길이었다. 설명을 들었으니 정여준도 알았다. 윤서리는 익숙했을 것이다.

이런 걸 익숙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않았을 텐데.

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머릿속을 맴돌다 사라진다. 정여준은 단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침묵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입가로 맴도는 말들을 고민했다. 그때도 그랬을까. 처음 만났을 때, 그때로 돌아가면 중얼거리고 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서리를 모르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복잡하게 거칠 것 없이 이 기나긴 세월을 끊어내고도 싶은 감정들이 그를 거쳤다가 사라졌다. 시간이 아직 멈추지도 않은 한낱 사람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거대한 감정이었다. 입을 다물고 단지 생각한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보이는 얼굴과, 팔을 붙잡은 당신의 손, 이제는 울 수도 없다는 것처럼 건조하고 끔찍한 상황을 겪은 듯한 낯.

윤서리가 중얼거린다.

“왜, 왜 또.”

차라리 처음에 당신을 죽였다면, 당신이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나를 위해 시간을 돌리는 일 따위 없었을까.

하지만 그 어떤 이유든 중요하지 않다. 이제 정여준은 윤서리가 죽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으므로.

단지 수없이 꺼냈을 것만 같은 그 짧은 문장들을 삼키고, 정여준은 웃었다. 소년처럼 새하얗게, 어찌 보면 찬란히 빛나 보일 만큼 선명한 감정이 담긴 얼굴을 기울이며.

왜겠어요.

왜겠어요, 서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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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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