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10주년 기념

미완성, 일부

뜰팁_전용 by 자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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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삶이라고 부르는 게 다 그렇다.

혀를 댄 최초에는 느껴본 적 없는 자극으로 찌릿거렸으면서 시간이 지나면 물처럼 밍숭맹숭. 시야보다 선명했다가 점점 색이 바래고 헤진 사진 같은 것. 위아래와 양옆, 거기서 탄생한 비스듬한 대각선만 존재하는 2차원의 세계처럼 모든 게 광활한 곳에서 나 자신이 무난하게 뻗은 듯 보이지만, 막상 다른 시점으로 들여다보면 ‘고작 이게 다인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시한 것. 하지만 그렇기에 어떻게 볼지 정하는 순간 앞으로 펼쳐질 장르가 달라지는 것.

누구나 꿈을 좇지만, 결승선처럼 보이는 출발선까지 아등바등 다가가서 뒤를 돌아본 순간 이미 바람에 날아가고 없는 쇳가루처럼 처음에는 무수하던 인파가 점점으로 남는 건 그래서이리라. 고작 일초 단위로 끊임없이 바뀌는 생명은 일초 전의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힘이 드는 비효율적인 존재라 대부분 정체되어 가장 힘을 들이지 않는 따분한 틈새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자력을 잃은, 꿈이라는 자석과 끌어당기는 힘없이 허공으로 부유할 수 없는 쇳가루 같은 인간. 개중 독특한 존재는 다양한 형태와 어떠한 우연으로 자석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고자 치열하게 움직이고, 에너지가 얽혀 정전기를 일으키고 비산하는 쇳가루의 순간은 대체로 누군가의 청춘이 된다. 빅뱅으로 흩뿌려진 힘의 잔재가 어떤 덩어리의 서까래가 되어 애매하던 존재를 행성으로 변모시키듯.

그래서 평균보다 조용하지만 궁리는 많던, 여전히 꿈을 쫓는 박슬기가 둘 중 어느 쪽이냐 하면 그는 어느 쪽도 아니고, 단지 기꺼이 파란을 껴안겠다 결심하며 이상을 꿈꾼 철없는 꾸러기에 가까웠다. 점차 번성하는 도심 변두리에 있어 미루고 미뤄진 재개발로 곳곳에 자연이 남은 동네. 그 속에 고만고만한 인원이 다니는 학교와 동네 사람을 끌어모아 뭘 하는지 알려진 것 하나 없는 비공식 동아리를 박슬기가 만든 건 그런 이유다. ‘전진 동아리’. 모 가수의 활동명부터 전진후진 같은 농담을 쉴 새 없이 들어야 했지만, 전진이란 이름과 사전적 의미까지 더해 모든 게 필요해서 모인 모임이라 그럴까. 다들 먼저 동아리 이름을 가지고 놀릴지언정 바꾸자는 익명 건의는 한 번도 없더라.

꾸물거리느라 여직 한반도 끄트머리에 다리 걸친 동장군의 반투명한 허연 천 조각이 세상을 덮어서 해가 덜 뜬 아침이면 옷감 같은 입김이 날숨에 날아가는 봄날. 조례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부터 종례 안내까지, 빠르나 빠르지 않은 시간을 타고 노래가 나오면 우르르 달리는 인파 가운데 색색의 무지개 열쇠고리를 달랑거리던 다섯이 옆으로 빠져나간다. 공식으로 신청서를 내고 만든 게 아니라 알음알음 입소문이나 특정 누군가를 찾아가 포섭해 만든 전진 동아리에는 학생이 아닌 어른도 있기에, 여섯 명은 늘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 만나서 저녁놀이 져 땅거미가 짙어질 때 헤어졌다. 함께 하는 시간이 짧은 대신에 개인 사유가 없다면 주에 다섯 번은 꼭 만나는 게 입부 맹세일 정도로 모임에 진심인 이 동아리의 목표는 딱 하나.

마을의 평화에서, 된다면 더 나아가 세계의 안녕까지 지키는 것이다. 틈틈이 모은 용돈으로 ‘우리 힘으로 해내자.’라고 적은 조그마한 현수막까지 뽑아 동아리방에 칭칭 감았을 정도로 진심이지만, 늘 그렇듯 한두 명은 불만을 가지더라. 저거 바꾸자니까? 백번 생각해도 구려. 옳소 옳소!

“샤랍. 누가 형준이랑 오빠한테 조용히 하라고 전해줘라.”

오늘로 벌써 쉰하고도 세 번째인 정형준과 김일영의 진심 20% 함유된 불만을 날벌레인 양 손을 휘휘 저으면서 넘긴 박슬기는 나무 그늘에 가부좌로 앉아 가만히 명상하던 황수현 옆에 서서 가만히 기다리다 한참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열릴 때야 이제껏 낀 팔짱을 풀었다. 그때만큼은 어떤지 물어보는 진중한 목소리만큼 주변 모두가 아닌 척 신경을 곤두세우고 두 사람을 힐끔댄다. 오늘은 학교 뒷산에 두 개. 늘 전진할 대상을 찾아서 알려주는 게 그이기에.

“들었지? 뒷산이란다. 전진 동아리 출동!”

“어우, 박슬기 진짜 작명 센스 촌시러워.”

“한솔아~ 누나가 형준이 끌고 먼저 가래.”

“오케이. 이리 와라, 형준아.”

그들이 사는 마을에는 일반 사람이 보지 못하는 일렁임이라는 게 있다.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 발생 원인은 뭐고, 하다못해 이게 정말 이 마을 안에만 있는지 아니면 마을 바깥인 도심과 다른 지역에도 있어 세상을 조금씩 좀먹는지 따위는 첫 발견자이자 진정시키는 법을 알아낸 박슬기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버려두면 안 되는 정체불명의 이상 현상이라는 것과 해결할 수 있는 건 동아리 부원뿐이라는 건 모두가 알았다.

도시에서 하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와 영어가 빼곡한 화면을 쓰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갓 성인 김일영과 꿈이 있는 도심으로 가길 모두 입 모아 추천하지만 고민에 빠진 고등학생 박슬기, 동아리를 계기로 친해진 평범한 듯 독특하면서 어딘가 이상한 서한솔, 정형준, 황수현에 가장 어린 중학생 박영환까지, 단 여섯 명만이 할 수 있는 일. 모 박사님이 등장해 지정해 주지 않은 그들의 할 일은 히어로 영화처럼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초능력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문제는 그게 무슨 경로로 생긴 건지 알 수 없어서 남에게 떠넘기지 못한다는 정도일까. 가장 머리 좋은 박슬기와 김일영이 서로 무어라 떠들다 내놓은 공통점이라고는 일렁임에 얽혔다가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지나가던 박슬기가 구해준 다음 날부터 생겼다는 건데, 그렇다고 생면부지 타인을 위험에 내몰아 같은 처지로 만들어 떠넘기거나 아주 모른 척하기에는 매정하지 못한 데다 다른 이유도 있는 까닭에, 그들은 소 잃기 전에 미리 외양간 지키자는 동아리장을 따라서 비공식 순찰을 하고 마는 거다. 비록 몇몇을 뺀 동네 사람은 그 때문에 산책 동아리라고 와전된 이야기를 철썩같이 믿는 모양이지만.



근처까지 다가가야 세상에 유리된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챈 다섯은 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부터 뒤로 빠진 황수현의 앞을 막고 죽은 고목의 꼭대기 가지와 흙 위로 툭 튀어나온 뿌리를 멀거니 본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둘둘 감긴 일렁임 두 개. 저 위는 어쩌냐. 어쩌긴 하던 대로 해야지 뭐.

유일하게 공기를 밟고 올라갈 수 있는 박슬기가 무던한 어투로 하던 말이 끝나자마자 기합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느릿느릿 풍선 그 자체가 된 양 느리게 위로 떠오르는 듯 보이는 몸, 그걸 지켜보던 서한솔은 도착했다는 눈짓을 보자 일교차 때문에 감기에 걸려 코훌쩍이는 막내의 손을 잡고 위와 공명하는 밑동 일렁임 앞까지 다가간다. 나중에 시킬 테니 어떻게 하는지 잘 보고 있으라는 덤덤한 말과 함께 곧은 시선만이 고목 몸통을 오르고, 바지 허리춤에 올린 손을 쥐락펴락 움직이던 박슬기가 딱 옥수수 한 알 차이로 닿지 않은 자리에 제 손바닥을 올리고서야 올곧게 바라보는 눈과 눈을 맞추고 끄덕였다. 하나, 둘. 셋에 비슷하게 들어가 팔뚝만 남기고 들어가서 휘적휘적 움직이는 손. 다인원 싱크로나이즈에서 여러 개의 다리가 동시에 움직일 때처럼 똑같은 박자는 아니어도 비슷한 순간에 움직이도록 여우 창문 사이로 고목을 바라보며 무어라 말하는 김일영과 옆에 서서 연신 뻐끔거리는 황수현,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설렁설렁 돌아다니다 어딘가를 바라보면 문득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는 정형준까지.

부품이 이어진 인쇄회로기판 혹은 뉴턴의 진자가 움직이는 순간까지 유기적으로 이어진 어떠한 개념처럼, 한참 서로를 위해 움직이던 다섯과 일렁임을 바라보며 다각도로 이해하기 위해 애쓰던 하나는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진동이 멎음과 동시에 엉긴 것이 스르르 풀려 사라지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자마자 길고 얕은 숨을 바람처럼 내쉬며 서로에게 기댔다. 긴장으로 힘이 들어가 바짝 올라간 어깨가 내려가면서 휘도는 공기처럼 가늘게 앓는 소리가 퍼지고, 달달 떨리는 손가락이나 힘이 풀린 다리로 바닥에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리면서 연신 들리는 되다는 중얼거림을 뒤로 한 채 위로 길게 팔 뻗은 박영환은 제 손끝에 닿은 타인의 희미한 온도를 붙잡는다. 가지에 걸려 두어 번 감겼으면서도 금방 날아갈 듯 위태롭게 펄럭이는 천 조각 잡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다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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