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일상

프리마베라 : 더 비기닝 / 다이앤-보르도 (결혼au+토감) / 2020.03.27 업로드

"엄마, 엄마."

간만에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아이는 제 엄마의 어깨를 조그마한 손으로 꾹꾹 눌러대고, 부엌에서는 수저 소리가 쉴 새 없이 달그락대는 아주 평범하고 화목한 휴일의 아침.

"베르디, 엄마 깨우지 마..."

"아빠가 깨우래."

"..."

뭉그적거리며 일어난 붉은 머리의 여자가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 그 옆에서 여자의 팔을 제 두 팔로 끌어안고 힘껏 당기는 어린아이는, 그냥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와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이앤, 일어났어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늘어진 엄마를 투닥투닥 때리며 '또 자지 말고 일어나-' 재촉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아침부터 카랑카랑했다. 누구를 닮았는지.

"오늘 밥 좀 이르네?"

"네, 어쩌다 보니요. 피곤해요?"

여자는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일어나 앉고, 아이는 대단한 미션이라도 해결한 것마냥 제 아빠에게 달려가 칭찬 스티커를 받아내었다. 벽에 정갈히 붙어있는 판에 반짝이는 스물 다섯 개째의 스티커가 붙었다. 그 사이 여자는 앞치마를 대충 두른 남편이 소파로 걸어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고, 이어 능숙하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귀에 꽂아주는 손길은 더없이 익숙한 것이었다.

"엄청. 나 좀 더 자면 안 돼?"

"안 돼요-. 거의 다 됐어요."

단호해라. 여자는 제 남편이 이럴 때마다 조금 얄미웠다. 분명 장점이 맞고, 그 점이 마음에 들어 마음을 주었던 것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좀.

"근데 넌 나 없을 때 애한테 스티커를 몇 개나 준 거야. 일주일 만에 스무 개가 넘는 게 말이 돼."

"왜요, 다이앤도 도장 받느라 열심이었잖아요."

"난 그래도 하루에 하나씩이었어."

"하루에 한 개 제한이었으니까 그렇죠."

맞는 말이었다. 가끔 보면 자신의 딸은, 분명 유전자에 저장되어있을 리가 없는 정보까지 제게서 샅샅이 캐내 간 것 같았다. 여자는 불퉁한 표정으로 괜히 남자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앞치마가 이게 뭐냐. 맬 거면 제대로 매든가."

"다이앤이 매줄래요?"

그러면 남자는 능숙하게 그것을 받아치는 것이다. 이 부부의 일상은 대부분 이러했다. 어디로 튀어 나가든 서로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내는 관계.

여자는 종종 자신이 이런 가정에 속해있는 것이 꿈 같기도 했다. 어린 시절이 꽤 행복한 편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의 시선은 남자를 향했다. 언젠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현실이 언제든 깨져 버릴 수 있는 연약한 꿈 같아서 무섭다는, 그 말을. 나와, 나를 닮은 아이와 셋이 함께 있는 순간들마저 가끔은 그렇게 부서져 버릴 것 같을지.

"뒤돌아봐."

잠이 조금은 깬 얼굴로 끈을 쥐어 매듭을 매는 손길이 느렸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매일 아침 일부러 앞치마를 엉성하게 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늘 그랬다. 네가 내게 무엇을 하면, 나는 그 안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 준다. 예전에는 이게 단순히 나이 차이 탓인 줄로만 알았다. 어느 정도는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 외에도 네가 날것의 마음을 내게 숨길 생각이 없는 탓이었고, 또한 내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탓이었다.

"다 됐어."

오늘따라 네 허리에 걸린 리본의 모양이 만족스럽다. 네 허리를 습관처럼 몇 번 두드리고, 아직도 도장판 앞에 서 있는 아이에게로 걸어간다.

"베르디, 뭐해?"

"아, 안 돼..."

"뭐가 안 돼?"

"엄마가 말 걸어서 숫자 어디까지 셌는지 까먹었어."

스티커의 개수를 세고 있었나 보다. 여자는 웃음을 터뜨리고 무릎을 꿇은 채 아이를 감싸 안았다. 둥근 어깨, 포근한 옷감, 아직 어른보다는 훨씬 작은 손발까지, 여자는 요새 자신과 남편을 반반씩 닮은 이 조그마한 꼬마 인간이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가 매일 쓸어주곤 하는 여자의 머리카락에, 여자가 그렇게나 온 신경을 쏟던 남자의 눈이라니. 이렇게 잘 골라오는 게 어디 있는지.

"같이 셀까?"

"응. 하나, 둘..."

여자가 아이를 안고 스티커를 하나씩 짚어가며 숫자를 읊는 사이, 남자는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스프와 야채 샐러드 등을 식탁에 내려두었다. 접시가 식탁과 부딪히며 내는 작은 소리가 빗소리와 어우러져 음악처럼 퍼졌다.

"아, 엄마. 나 아빠 도와줄래. 엄마가 마저 세고 몇 갠지 꼭 알려줘!"

그래. 여자의 짧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이는 품에서 쏙 빠져나가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 조그마한 게 제 아빠를 닮았는지, 있다 없으면 그 온기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여자는 가볍게 웃으며 비어버린 팔을 쓸어내리고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맞아. 보르도, 나 어제 창문 안 닫고 잤는데 비 안 들이쳤더라. 네가 닫았어?"

"네, 다음부터 잘 닫고 자요. 감기 들라."

"다음에도 네가 닫으면 되지."

"음, 그럴까요?"

아이가 빈 밥그릇을 식탁 위에 놓고, 냉큼 자리에 앉아 닿지 않는 다리를 휘적댔다. 어른이 먼저 드시기 전에는 자기 것도 들지 않는 거라고 배운 터라,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나 눈은 맛있는 반찬에 고정되어있는 것이 꽤 강아지 같았다. 여자는 그 표정이 자신을 쳐다보던 어느 날의 남자 같다고 생각했다.

"아빠, 나 이것도 칭찬 스티커 줘?"

아이가 제 아빠를 향해 눈을 빛내며 묻는다.

"...으음, 엄마한테 물어볼까?"

"보르도."

남자가 아내를 향해 눈을 접으며 애교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꼭 이럴 때만 떠넘기지, 여자는 속으로 투덜대며 적당한 핑계를 생각해본다. 뭐가 있을까. 그런 건 너무 작아서 칭찬하기엔 모자란 사항이다? 아이는 작은 것 하나도 칭찬받아야 마땅한데. 저번에 이걸로 받았으니 또는 안 된다? 한 번 더 한다고 그게 선행이 아닌 건 아니므로 이것도 기각이다. 또 뭐가 있더라...

"엄마, 안 돼?"

그러나, 고민이 무색하게도 아이의 눈은 남편을 쏙 빼닮은 것이었다. 까만 암흑 속에 소용돌이치는 빛들이 보이는, 내가 너에게 사랑에 빠지게 한 그 눈.

"...그러면, 그릇도 정리했으니까- 오늘 반찬 투정 안 하고 다 먹으면 그거까지 합해서 하나 줄게."

"음... 좋아!"

여자는 그제야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남자는 소리 없이 웃으며 아내의 접시에 이것저것 반찬을 덜어주고, 여자는 다시 그중의 일부를 아이에게 덜어주었다. 그러다가 결국, '너 먹어.' 눈짓으로 남편에게 핀잔을 주고 만다. 이러니까 매일 아내랑 딸이 그릇을 비울 때까지 반밖에 못 먹지.

"다이앤, 안 자요?"

"일이 좀 많아서 몇 개만 가져왔어. 한 시간이면 돼. 먼저 자."

남자는 여자가 종종 하던 것처럼 눈을 데구륵 굴리다가,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는 턱을 괸 채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처음에는 이게 적응이 안 돼서 왜 그러냐고 열 번은 넘게 물어봤던 것 같다. 하지 말래도 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자신이 의식을 덜 하는 쪽으로 적응했지만.

"말 안 들을 줄 알았어."

"다이앤이랑 같이 잘래요."

"그래, 기다려."

"그래도 얼른 끝내야 해요?"

강아지 같아. 여자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서, 종이를 살피고 펜을 움직이고 장을 넘기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러고 있으면 중간중간 졸 만도 한데, 정말 피곤했던 몇몇 날을 제외하고 남자는 여자를 관찰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오늘은 양손 다 바쁘네요."

"한 손만 바쁘면 다른 손 가져가서 만지작대려고?"

"네."

여자는 이런 무조건적인 직진에 익숙해졌고, 때로는 받아칠 수도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게 되었다. 무얼 하든 늘 따라붙는 시선은 책 위로 내려앉는 햇볕처럼 따스했고, 제 손 안에 들어오는 부드러운 볼은 사랑을 가득 담은 주머니라도 된 것처럼 폭신했다. 가만히 안겨있기라도 할 때는 그 품이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포근한 침낭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내일 할래. 오늘은 그냥 너랑 놀고."

결국 쉬고 싶은 욕심에 지고 만다.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휴가다. 나는 그걸 앞에 두고 일을 할 만큼 의지력이 강한 사람은 아마 아닌가 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내 습관 중 하나가 일을 할 때 게으름 피우는 시간까지 합쳐서 일정을 잡는다는 것이겠지.

"정말요? 황자님한테 안 혼나요?"

"혼나지. 출근 일찍 해서 하면 돼."

게으른 베짱이는 일하는 곤충들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들의 의욕이 올라간 것은 어쩌면 베짱이의 덕일 수도 있지 않을까. 너와 함께 있는 것이 게으름이라면 나는 개미가 아니라 베짱이가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싫어?"

"아니요, 좋아요."

너는 내가 받아 마땅할 행운이다. 나 역시 네게 마찬가지고. 우리가 돌보는 사랑은 절대 한순간 불타 재가 되는 애정이 아님을 너도 나도 알고 있다. 배우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너를 아끼고 사랑하며, 그것은 물론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우리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하지 않을 거란 것도 확신한다.

이 길의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했던가. 하지만 우리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네게는 내가 남을 거란 걸.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너는 내게 끝내 봄을 선물했다. 너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봄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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