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각
FAITH : 안식의 레퀴엠 / 지수-성령 (로그) / 2020.03.24 업로드
당신의 머리카락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시골의 밤하늘보다 까만, 커튼처럼 일자로 쭉 길게 뻗은 머리카락에 나는 종종 감탄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머리카락이 내 목을 조를 것만 같다. 당신처럼 새까만 비단에 칭칭 감겨 저 바다 깊숙이 빠져버릴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당신의 어둠을 어떻게 몰아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몰아낼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가 않아서 나는 당신의 눈에서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의 눈에는 지금 무엇이 들어있을까. 나? 그 말 같지도 않은 신? 아니면 곧 당신이 죽일 사람들?
당신의 표정이 내 접근을 튕겨내는 것 같아서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 심연으로 들어가는 걸 허락해주질 않는다. 그림자 정도에서 멈추도록, 더 다가갈 수 없게끔 당신은 내 걸음을 막아놓았다. 당신의 신보다 내가 우선이 되는 것까지는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시간을 허락해주었을 때, 오랜 설득이 동반되어야 가능할까 말까 한 일이었으니까.
내가 그림자 한가운데에서 본 풍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높은 철창 위로 시커먼 구름이 갈기갈기 찢어져 흐르고, 불길한 색의 하늘은 땅에 빛 하나 비추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은 그 철창 너머에 홀로 뒤돌아 서 있다. 상복 같은 옷을 입고, 마치 자신의 자아에 완전한 이별을 고하듯. 오로지 그분만을 위해 살겠다며 자신의 영혼까지도 토해내는 모습이었다. 기괴하다는 말 외에 어떤 표현이 적당하겠는가.
당신은 이 상황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어디로 몸을 내던지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떻게 되며 끝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죽어갈지를 말이다. 눈에 천을 싸맨 당신이야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조금 보이는 것 같다. 조금은.
당신의 오만함이 궤변이 되어 추락할 때, 당신은 자신이 옳지 못했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것을 부끄러워하든, 괴로워하든, 아니면 이제야 진실을 찾았다고 기뻐하든, 그 옆에 나는 없을 테고 당신은 혼자일 것이다. 당신은 그때 필요한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며 또한 손잡아줄 이조차 없을 것이다.
당신은 오늘의 거절을 후회할 것이다. 나를 붙들고 진즉 밝은 길로 나오지 못한 자신을 한탄할 것이며, 그때는 이미 당신을 옭아맨 덩굴들이 자를 수도 없이 뻗어있을 것이다. 이날의 내가 당신을 뼈저리게 위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흐느낌 속에 파멸해갈 것이다.
당신은 죽어서야 당신이 믿던 천국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닿지 않을 이승에 손을 뻗을 것이고, 당신의 신은 그런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버려질 것이며 당신을 감싸 안을 사람은 결국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아버린 죄로 죽음 이상의 죽음을 바라게 될 것이다.
당신을 이 생이 다하기 전에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는다. 나는 그냥 당신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 것뿐인데, 늪 속에 빠져들며 도움의 손길도 거부하면 어쩌자는 건지. 내가 못 미더워서? 내가 같이 빠져들까 봐? 아니, 당신이 허상을 진실로 믿기 때문이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환각을 불러일으키고 당신의 머릿속에 괴소문들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 괴소문의 세상에서, 그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곳이 낙원이라 믿고 사는 것이다.
이게 정인지, 연민인지, 아니면 오만과 오기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옳은 건 나야. 당신이 아니라. 내가 맞고 당신이 틀려. 아마 당신의 남은 삶은 그걸 깨닫는 과정일 것이다. 천천히, 한 걸음씩.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당신은 지금 당장 한 번에 그 과정을 모두 치워버릴 수도 있다. 원한다면. 나와 함께.
그러니까, 나를 좀 봐. 내가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문을 열어주겠다잖아. 내가 끌어당겨 주기까지 하겠다는데, 당신은 그냥 잡기만 하면 된다는데. 당신 눈앞에 있는 사람이 겨우 이런 일로 삶을, 당신을 놓칠 만큼 무르게 보이느냔 말이야.
"성령 씨,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딱 한 마디만 하자. 지금 무슨 생각해?
물론, 당신이 무슨 생각이든 똑바로 하고 있을 리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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