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유리] 크리스마스

2005년 겨울의 성탄절은 일요일이었다. 쉬는 날이 아님에도 주말이었던 덕에 만지로는 겨울잠이라도 자듯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질릴만큼 늦잠을 즐길 수 있었···을 터였으나, 달콤한 아침잠의 커튼을 찢은 것은 앙칼진 에마의 목소리였다.

"마이키, 좀 일어나! 손님 왔으니까! 지금 안 일어나면 분명히 후회한다?"

후회할 만한 일이 뭔데… 꿍얼거리며 언제나의 담요자락을 붙들고 꾸물대던 만지로는 오 분 정도가 더 지나서야 몸을 비척대며 일으켰다. 잠버릇으로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식탁 쪽으로 나와 보니, 평소와 달리 여자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하나는 늘 보던 에마고, 귀엽게 꾸민 저 나머지 하나는…

"에. 산타?"

"그럴 리가 없잖아?! 유리나 쨩이야, 크리스마스라서 마이키를 보러 온다고 아침부터 예쁘게 꾸미고 왔는데 늦잠이 웬말이람?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머리도 빗고!"

"어, 응…"

하여간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유리나 쨩은 대체 어쩌다 마이키한테 빠진 거야? 유리나에게 잔뜩 불평하는 에마를 뒤로한 채 만지로는 머리를 묶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한 차례 돌아갔다.

"아, 유리나 쨩! 그냥 앉아있어도 돼. 마이키를 위해 고생한 손님이잖아?"

"으응, 아냐. 얼마 고생 안 했어! 에마 쨩이야말로 매일 고생일테니까, 도울게."

"그래도…"

"고생 안 했다잖아?"

유리나의 허리와 어깨 위에 익숙한 온기와 무게가 느껴졌다. 어리광부리듯이 뒤에서 유리나를 끌어안아 머리를 기댄 만지로는 제 여동생을 약올리듯 베-하며 혀를 내밀고 있었다. 유리나는 고개를 돌려 만지로를 보곤 난처한 듯 하하 웃었다.

"음, 그닥 고생이라 안 느낀 건 맞지만, 사노 군 입으로 들으니까 좀 묘하네. 생각해보니까 고생 좀 한 것 같기도 하고?"

단번에 바뀐 유리나의 의견에 만지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갑자기 에마 편을 들어?라는 듯한 눈빛이 입 밖으로까지 표현되기 전에 유리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만지로의 양 뺨을 붙잡아 막곤 그를 의자에 끌어 앉혔다. 여전히 입을 삐죽대며 노려보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유리나는 능수능란하게 만지로를 달래듯 응, 예쁘다. 같이 아침 먹고 나가자? 하며 다독이더니 다시 에마 옆으로 향했다.

만지로는 의자에 앉아 에마 옆에서 요리를 돕는 유리나의 앞치마 끈을 뒤에서 손가락에 감고 만지작대며 찬찬히 그녀를 뜯어보았다. 평소보다 더 하얀 피부에 붉고 윤기나는 입술, 바짝 올라간 속눈썹과 묶지 않고 늘어뜨린 채 돌돌 말린 긴 곱슬머리까지. 평소엔 나름 단아한 모범생에 더 가까웠다면, 오늘은 조금 더 화려한 소녀의 느낌이었다. 이걸 이른 아침부터 했다고? 평소에도 그냥 예쁜데 왜? 싶으면서도 반짝반짝한 새로운 느낌 역시 제법 마음에 들긴 했다.

"그래서 다 먹으면 어디로 가는데?"

완성된 아침을 입에 밀어넣던 만지로는 우물거리다 말고 문득 물었다. 미리 에마가 크리스마스에 일정을 비워두란 말을 해두었기에 할 일은 없었지만, 유리나가 집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유리나는 고민하듯 눈동자를 데록 굴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비밀, 가보면 알아!"

그 말을 증명하듯 유리나는 식사의 뒷정리가 끝나자마자 만지로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바깥으로 발을 옮겼다. 익숙한 길을 보아하니 만지로도 대강 예측할 수 있었다. 원래 그렇게 자주 가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근래에서야 즐겨 찾기 시작한 장소, 학교였다.

"…학교? 뭐 놓고 온 거 있어? 아니면 학교 탐험?"

"음, 탐험 비슷한 거긴 하지? 가자!"

"학교는 너 보러 오는 곳이지 다른 이유로 오는 곳은 아닌데…"

아니, 학교는 원래 공부하러 성실하게 다녀야 하는 거야… 유리나는 난처하게 말을 덧붙이며 교문 너머로 만지로를 밀어넣었다. 넓은 신발바닥이 바닥에 부딪혀 탁, 탁 대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저항 없이 유리나가 떠미는대로 발걸음을 재촉하다 교실 문 하나를 열자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만지로는 의문스러운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 이쪽 우리 교실 아닌데?"

"'지금' 우리 교실은 아니지, 그치만 뭔가 익숙할걸?"

몰라, 기억 없어- 라고 말하려는 순간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이 교실, 작년에 썼던 교실이다.

"…작년?"

"아, 사노 군 눈치 빠르네? 그럼 여기서부터는… 사노 군 혼자서! 우리 추억을 찾아봐!"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에 유리나가 냉큼 교실 문을 닫아버린 탓에 교실 안에는 만지로 혼자만이 애처롭게 남고 말았다. 올해 쓰는 교실도 아니고 작년 쓰던 교실에서 다짜고짜 추억을 찾으라고 해도, 그 시절의 흔적이 얼마 남아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무언가 계획을 꾸며둔 것 같은 제 짝사랑 상대는 복도에서 창문 너머로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의 외로운 싸움을 여유로이 관전하고 있는데. 만지로는 입을 한 번 삐죽이곤 칠판, 분필용 서랍, 교탁을 눈으로 훑었지만 역시나 다른 학생들이 관리하는 탓인지 학급 비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말끔했다.

찾으라는 거면 물건일텐데... 중얼대던 만지로의 눈길이 곧 교실 뒤 사물함에 닿았다. 그러나 눈길의 끝을 향해 성큼성큼 움직이던 발걸음은 복도의 소음에 막혀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채 왜? 입모양으로 뻐끔대는 만지로의 반응에 유리나는 사물함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휘저으며 팔로 엑스자를 지었다. 아, 사물함은 아니라고. 그럼 대체 어딘데? 싶어 불만스럽게 근처 책상에 걸터앉은 순간, 책상 위에 남은 검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지우개로 나름 열심히 지우려고 했던 것 같지만 채 깔끔하게는 지우지 못한 글씨. 형체가 남은 글자를 봐도 삐뚤빼뚤한 것이 제 글씨체와도 비슷한 것 같았다. …생이, 지루ㅎ…ㅕ석, 놀…. 어딘가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집중해서 글씨를 읽던 만지로는 이내 깨달았다는 듯 아!! 하는 탄성을 외쳤고, 동시에 유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범생이, 지루한 녀석, 놀자. 각각 만지로 자신이 유리나와 짝이었던 시절 수업시간에 멋대로 적어둔 글씨들이었다. 그보다, 이걸 다 기억하고 있어? 의문스러운 낯으로 고개를 들어 유리나를 응시하자 유리나는 제 입모양을 강조했다. '책상, 안쪽.'

과연 책상 서랍은 짧은 방학을 맞은 덕분인지 거의 비어 있었다. 작은 종이 쪽지 하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만지로가 쪽지를 펼치자 그제서야 유리나는 다시 교실 문을 열고 총총 제 옆에 걸어와서 함께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사노 군이랑 처음 만났던 교실. 학교에서 생긴 내 첫 친구. 사노 군과 만나서 내 삶이 바뀌기 시작했을지도 몰라. 늘 고맙게 생각하는 중!」

「이번 힌트는 '수제', 다음 장소는 사노 군이 날 처음으로 도만에 데려간 곳!」

"…어때? 알 것 같아?"

잠깐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유리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유리나를 처음으로 집회에 데려갔던 기념비적인 날의 기억은 또렷했기에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만지로는 자신있다는 듯 시원하게 웃으며 발돋움했다.

"당연하지, 당장 가자!"

유리나가 자신의 손가락 끝을 잡는 것을 느끼며, 만지로는 집에 들러 바브를 타고 다음 장소인 무사시 신사로 향했다. 아직 어둠에 먹히지 않고 살결에 온기를 더해주는 햇빛이 따뜻했고,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했던 교실과 달리 넓게 트인 신사는 여전히 무척 밝았다. 대부분 밤에 모였던 집회 때와 달리 훤한 대낮에 오려니 어딘가 어색한 기분도 들었다. 신사는 범위가 넓었기에 많이 움직여야겠다는 각오로 몸을 풀던 만지로였지만, 의외로 이번 쪽지는 발견이 빨랐다. 집회 때마다 자신이 앉아 있던 계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예상했다는 듯이 만지로가 쪽지를 찾기를 멀리서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온 유리나였다. 만지로는 유리나의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쪽지를 주워 펼쳤다.

「사노 군의 '실체'를 알아버린 날이었달까… 물론 친구들을 만나봐서 대강 알긴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규모가 큰데 바로 옆에 앉혀놓고 있으니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알아? 그래도 신선한 충격이긴 했어. 사노 군의 '마이키'로서의 무게감을 알게 된 날!」

「이번 힌트는 '따뜻함', 다음 장소는 사노 군이 내 앞에서 처음 울었던 곳.」

만지로가 쪽지를 읽는 사이 유리나가 슬슬 손을 감아올려 만지로의 손을 꾹 감싸잡는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햇빛의 옅은 온기를 대신하는 따스함이었다. 단단히 잡은 의지되는 손이 쪽지에 쓰인 장소를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다. 만지로의 입에서 픽 웃음이 나왔다.

"유리, 너무 쉬운 문제만 내는 거 아니야?"

"호옥시라도 사노 군이 문제를 못 풀까봐. 그럼 내년엔 더 어렵게 낼까?"

"아? 됐거든, 또 이런 이벤트를 혼자 준비하게 둘까보냐."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이동하면, 곧 여러번 신세를 졌던 그 병원이 보였다. 저녁 시간을 맞이해 대부분 문을 닫고 유일히 불이 켜져 있는 곳은 응급실 뿐이었다. 만지로는 83항쟁이 끝난 후 유리나의 의사 가운을 덮고 펑펑 울었던 응급실 근처 구석 언저리로 당당히 발을 옮겼다. 그러나 자신있던 추측과는 달리 쪽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굽혀보고, 위를 쳐다보고, 근처 땅바닥을 발로 가볍게 파내 봐도 아무것도 없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만지로는 옅은 싫증이라도 느낀 듯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 그냥 줘, 쪽지."

"이렇게 억지로?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응. 그게 정답이니까."

유리나는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만지로에게 건넸다. 뭐야, 진짜 유리가 갖고 있는 거였냐고~. 하며 불평하던 만지로는 쪽지를 펼치다 말곤 약간의 의심이 담긴 눈길로 유리나를 응시했다. 다음 것도 네가 갖고 있는 거 아니지? 라는 듯한 시선이었다. 유리나가 고개를 내젓고 나서야 만지로는 눈길을 다시 쪽지로 돌렸다.

「진짜 긴박한 날이었지, 내가 주변에서 중상자를 발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날이고… 그래도 사노 군, 편하게 울어도 된다고 했을 때 정말로 왕창 울어 줘서 약간은 기뻤어. 그만큼 마음을 열어준 것 같아서.」

「거의 다 왔네! 마지막 힌트는 '사노 군과 닮은 색'. 마지막 장소는 새해!」

유리나와의 추억이 있는 새해라 함은, 아직까지 한 번밖에 없었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힌트들은 당최 무엇인지, 만지로로서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수제에, 따뜻하고, 나랑 닮은 색. 나랑 닮은 색이 뭔데?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포기한 만지로는 우선 끝을 향해 가보기로 결정했다. 다만 해가 진 후에 가는 겨울바다인데다 바람이 강해서 유리나에겐 추울 것이 뻔했다. 만지로는 제 뒤에 탄 유리나의 손을 망설임 없이 끌어당겨 제 겉옷 주머니에 넣어주곤 마지막 목적지로 출발했다.

"우와아, 다시 와도 진짜 춥다…!"

"여기에 오게 한 건 유리인데?"

"그야 추워도 절대 뺄 수 없는 장소였는걸."

한참 달려오는 동안 코 끝도, 양 뺨도 빨개진 채 손에 입김을 호호 불고 있는 유리나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워낙 여기저기서 바람을 맞고 다닌 탓에 아침에 봤던 그 깔끔한 웨이브머리도 잔뜩 풀려 부스스해져있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자연스러워서였을까,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사르르 웃음짓는 유리나를 본 만지로의 몸이 심장의 박동과 함께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만지로는 비교적 바람이 덜한 곳을 찾아 함께 앉곤 온기를 찾은 손으로 유리나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한층 붉어진 유리나의 귀 끝이 추위 때문이었는지, 달아오른 열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힌트들 그거, 정답은 뭔데?"

"아, 그거… 사노 군, 잠깐 눈 감고 손 내밀어 볼래?"

"역시 선물?"

얌전히 눈을 감은 채 내민 손에 부스럭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부피가 있는 물건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눈 떠도 돼, 수줍은 유리나의 말에 눈을 뜨면 손 위에 있는 것은 마지막 쪽지와 비닐로 포장된 빨간 목도리였다. 푸핫, 하며 작은 기쁨의 웃음을 터뜨린 만지로는 마지막 쪽지를 펼쳐 읽었다.

「사노 군과 함께한 내 첫 번째 일탈. 내 삶에서 가장 추웠는데 또 가장 따뜻한 날이었어. 사노 군이 덮어줬던 특공복, 그냥 커서 따뜻한 것도 있었지만 사노 군의 온기가 남아있어서 더 따뜻하고 좋더라. 그래서 이번에는 내 걸로 따뜻하게 해주려고.」

「벌써 그 날도 1년이 다 되어가네, 이번에도 쭉 곁에 있어줄거지? 사… 사… 좋아해!」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듯 내내 웃으며 쪽지를 읽던 만지로는 마침내 포장된 목도리를 뜯어 제 목에 감는 듯싶더니, 옆에 앉은 유리나와의 거리를 한층 좁혀 두 목에 함께 칭칭 감았다. 닿을듯 말듯한 거리의 두 붉은 뺨이 서로에게 온기를 발해 한층 더 따뜻한 것도 같았다.

"나, 크리스마스 선물 중에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 유리가 '수제'로 만든 '따뜻한', '유리 체향이 나는' 목도리."

"다행이야, 사노 군이 나한테까지 감아버릴지는 몰랐지만."

"나만 따뜻한것보다 같이 따뜻한 게 훨씬 낫잖아?"

"…응, 그러네. 사노 군은 다정해."

"아, 근데 나랑 닮은 색은 왜 빨간색이야?"

유리나는 음, 하고 뜸을 들이며 웃다가 만지로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답했다.

늘 가족과 친구를 먼저 생각해주는, 내가 좋아하는 사노 군의 뜨거운 우정과 사랑의 색. 그게 빨간색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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