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레이/백업

[DX3 Replay] Gypsophila’s Garden

230401 팬 시나리오 Gypsophila’s Garden 리플레이 소설

▶ 본 포스트는 DX3 팬 시나리오 'Gypsophila’s Garden'의 플레이 로그를 소설화 한 것입니다.

- 시나리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재 관련 주의사항은 [시나리오 배포 포스팅 링크] 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 시나리오를 개변해 플레이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원활한 장면 전환 및 서술을 위해 플레이 로그에 없는 내용을 일부 추가했습니다. (PC2의 백스토리 위주 서술 등)

- 본 포스트의 작성자(PC2)는 이 시나리오를 통해 갓 입문한 입문자입니다.

시나리오 NPC, 룰 NPC나 작내 기관 등의 묘사가 실제 설정과 다소 다른 등 기타 창작적인 허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핑발 여친을 중심으로 한 삼각 백합 먹으려고 만들었는데요... 진짠데요...

왜 쭈뼛쭈뼛 이런 얘기 하는지는 읽다 보면 앎 제가 서술로 커버해볼게

PC1 시치카 오하라 | PC2 시라비 요아케 [PC2 프로필]

GM 린뮤


하얀 안개꽃이 인사한다.

붉은 안개꽃이 거절한다.

푸른 안개꽃이 포옹한다.

하얀 안개꽃이 인사한다.

스며들어오는 자욱한 꽃향기가 일상의 종언을 고한다.

더블크로스 3rd Edition

『Gypsophila’s Garden』

Replay Novel


방과 후의 하교길, 시라비 요아케는 오늘의 일과와 관계 없이 다소 지쳐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수학여행」이라는 일반 사회의 문화였다.

UGN─유니버셜 가디언즈 네트워크의 칠드런으로서, 요아케는 임무 외의 일로는 기관의 바깥을 접한 적이 없었다. 학문이라고는 내부에서 이수한 것이 전부고, 심지어는 다른 칠드런이나 에이전트들과도 데면데면하다. 그럼에도 제 발로 둥지 밖에 나와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건 오로지 지부장인 키리타니 유우고의 제안 탓이었다. 때로는 임무 외의 일상을 꾸려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말이, 가슴속을 파도처럼 묘한 템포로 뒤흔들었던 날이 아직도 기억 난다. 정 마음에 안 들었다면, 거절을 했더라도 강요할 사람은 아니었건만. 그러나, 자신은 원래부터 도무지 그 사람을 이길 수가 없어서….

그가 원하는게, 단지 「이런」 자신이라도 일상을 영유하는 것이라면. 철저하게 우등생이 되어보임으로써 그 마음에 보답할 의지가 있었다. 실제로 1학년 재학 중 요아케의 성적이나 활동은 지나치리만치 남달랐다. 알고 보니 학업의 성과란 기관에서의 임무 수행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친구라는 관계가 생기는건 이 계획에서 완전히 논외의 일이었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요아케에게는 단짝친구, 라는 존재가 둘 생겼다. 클래스메이트인 나츠나기 마나와 시치카 오하라 두 사람이었다. 물론 이 일방적인 외부 관계를 그 단어로 규정한 것은 요아케가 아니라 키리타니다. 어느날 문득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달라기에, 임무 보고를 하듯 두 사람의 이야기를 했더니. 드디어 『NOVA』에게도 친구가 생긴 것 같다면서 제 일처럼 기뻐하던 것이었다. 물론 요아케는 친구라는 표현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두 사람의 접근을 허용한건 단지 호기심이었다.

학교를 계속 다니는게 맞나? 라는 생각이 부풀다가 수틀리는 날, 요아케는 종종 수업에 빠지곤 했다. 어딘가 교실이 보일 법한 곳에 틀어앉아 자기 자리에 환영을 투사해놓고,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무심하게 구경하며 제법 당당히 땡땡이를 친다. 점심 시간 역시 거의 마찬가지. UGN 내부에서조차 말 섞는 사람이 얼마 없으니, 누군가와 얼굴을 맞대고 재잘재잘 떠들어가며 식사하는 행위를 즐길 리 없었다. 그래서 조금 호기심이 들었을 뿐이다. 점심시간 내내 엎드려 자도록 투사해둔 환영에다 대고, 점심 같이 먹지 않겠냐며 매일같이 물어보러 오는 여자애들의 기묘한 끈기에. 그러니까, 시작은 단지 그뿐이었는데….

나츠나기 마나는 양 옆으로 오하라와 요아케의 팔짱을 낀 채 퍽 들떠 있었다.

"있지, 있지~ 수학여행 엄~청 기대된다!"

"응! 이렇게 셋이 가는 건 처음이니까!"

2학년이 되어 반이 갈라지고 나면, 이 집요한 친목 도모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그녀들은 쉬는 시간이고 점심 시간이고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거기에 대꾸하지 않으면 반 아이들의 이목이 더 집중되기에, 부르러 오는 족족 빛과 같은 속도로 뛰쳐나갔더니만. 그 시점부터 마나와 오하라는 이 고고한 외톨이 학우와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반도 다른데 수학여행에서까지 내내 같이 다닐 필요는 없지 않아? 아니, 애초에 학문을 이수하는 기관에서 이런 성적과 관계 없는 번거로운 여행은 왜 가는 건데? 안 그래도 이 비효율적인 문화에 내심 불만이 많았던 요아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속내가 튀어나왔다.

"수학여행 같은 거…"

"그치만 재미있을 거라구?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맞아, 맞아!" 오하라의 맛있는 것 발언에 문득 생각이 났는지, 마나가 문득 작은 탄성을 냈다. “하라쨩, 아케쨩! 간식 뭐 가져갈 거야?”

"으음… 고민이네…. 아무래도 잘 망가지지 않는 걸로 골라야 할텐데."

"간식은 불필요한 열량이야."

요아케의 말에 마나는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이라도 들은 얼굴로 희한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시치카 오하라는 이런 사회성 없는 대답에 쉽게 굴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앗쨩, 녹차 쿠키 같은 건 좋아해? 먹어 봤어?"

"녹차를 왜 쿠키로 먹지?"

"안 되겠네! 쿠키를 잔뜩 가져가야겠는걸!"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마나가 비장하게 말했지만, 요아케는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썹만 들어올렸다. 녹차는 마시는거 아닌가? 왜 굳이 쿠키로 만들어 먹는 거지? 그새 그 표정을 읽었는지, 오하라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리스트까지 읊기 시작했다.

"좋아! 그러면 녹차 쿠키와, 녹차 초코칩 쿠키와, 녹차 마카다미아 쿠키를 가져가자! 분명 하나쯤은 앗쨩이 반응하겠지!"

"찬성!"

마나가 신나하며 한쪽 팔을 번쩍 든 바람에, 그쪽 팔에 붙들려있던 요아케의 몸이 맥없이 한차례 기우뚱거렸다. 이쯤해서 이들의 폭주를 말려주지 않으면,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본답시고 베이커리 하나를 통째로 털어오게 되는게 일반적인 결말 패턴이다. 이제서야 남의 의중을 조금이나마 내다볼 줄 알게된 요아케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고집을 조금 접어주기로 했다.

"그건 너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데…. 녹차 초코칩 마카다미아 쿠키로 정리하면 어때."

"안 돼, 안 돼. 하나씩 먹여봐야 한다구."

"맞아. 아케쨩은 맨날 비효율이래!"

UGN의 구내 식당은 매일 균형잡힌 식단을 제공한다. 요아케는 하루 세 끼 식사 외에 단 한번도 군것질이란걸 해본 일이 없었다. 디저트가 들어가는 D 드라이브가 따로 있는 이 여고생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키리타니 유우고가 출장을 다녀온다해서 자질구레한 선물 같은걸 손에 들고 오는 성미도 아니고. 그래서 요아케 본인은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생소한 디저트가 입에 들어갈 때마다 저도 모르게 격렬한 반응이 나오곤 했다. 친구들이 그녀에게 이것저것 먹여보는걸 즐기는 이유였다.

"옷도 사지 않을래? 원피스 입고 싶어!”

"와, 셋이서 맞춰 입으면 완전 귀엽겠다!" 마나의 갑작스런 제안에 오하라가 눈을 반짝거리며 답했다.

"그치, 그치~!"

그럴 듯한 이름의 단체인 것치고, UGN에는 별도의 제복이 없었다. 「레니게이드」와 관련된 모든 사항은 일반인들에게는 비밀. 자고로 일상의 수호자들이란 일상에 자연스럽게 겹쳐져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복장에는 별다른 규칙이나 제한이 없었는데도, 요아케는 항상 제복이나 정장처럼 생긴 옷 외엔 걸쳐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키리타니 유우고의 영향이었다. 알을 깨고 나온 생물이 처음으로 본 상대만을 따르듯이, 그에게 구조되었을 때부터 소녀의 좁은 세계에는 오직 UGN과 그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솜털도 빠지지 않았던 시기의 어린 칠드런은 생각했다. 각인 대상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과 유사한 형태의 의복만이 제게 오롯이 어울리는 깃털이라고. 벌써 2학년이 되었음에도 학교 생활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정해진 교복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제법 안심이 되는 일이다. 다들 똑같이 생긴 옷을 입으면 도드라지게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새삼 이제 와서 흥미 본위의 옷, 그것도 원피스라는걸 사자니….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는 거지? 교복을 입어도 셋이 똑같잖아. 요아케가 또 사회성 없는 질문을 던지자 마나와 오하라가 앞다투어 반박했다.

"그거랑은 다르다구, 그거랑은!"

"맞아, 맞아! 앗쨩도 뭔가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그런 승부용으로 필요한 거지! 귀여운 원피스는!"

"…승부?"

"맞아! 아케쨩이 원피스 입으면 완~전 귀여울 거라구~!"

"응, 응! 같이 사진 찍어서 자랑하자!"

"좋아!"

"별로 귀엽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승부라니, 그런건 싸워서 가르면 되지 않나? 하지만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냐는 말을 듣고 나니, 요아케의 가슴 깊은 곳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의욕이 동했다. 평소라면 당연히 지부장을 떠올렸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단단한 고리처럼 걸려있는 팔짱의, 섬유 몇 겹을 두고 마나와 맞닿아있는 몸에서 묘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으으~ 아케쨩이 다른 반인 게 너무 아쉽다. 버스 같이 못 타잖아! 과자 들고 만나러 가자. 어때, 하라쨩?"

"당연하지! 앗쨩, 우리 없다고 울지 말고 잘 기다려야 해?"

"나는 아기가 아니야." 요아케가 오하라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응, 응, 아기는 아니지."

"그치~ 하지만 귀엽다구~"

"맞아~ 귀엽다구~"

동갑내기 친구를 한없이 아기 취급하던 여고생들은, 급기야 벅차오름을 주체 못 하고 요아케를 한번씩 와락 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요아케의 귓바퀴가 눈동자만큼 붉어졌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마나와 오하라는 마냥 그녀를 귀여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케쨩~~~ 역시 귀여워! 우리 오늘은 쇼핑 센터 다 둘러보고 가는 거야, 알겠지!"

"…어쩔 수 없지."

"와~ 앗쨩의 허락도 받았겠다, 쇼핑하고 디저트도 먹고 가자!"

"최고, 최고~!"

또다시 줄지어 읊어지는 과자들의 목록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 벌써 배가 불렀다. 삶에 뒤늦게 찾아온 이 「일상」이 버거울 때마다, 요아케는 그때 지부장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던 자신이 무언가에 단단히 홀렸던건 아닌지 돌이켜보곤 했다. 하지만 행복에 가득 차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오늘이라면 조금쯤은 이 재난을 즐겨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쇼핑 센터에서의 전투는 좀처럼 순탄치 않았다.

전투라고 표현하는게 옳을 법한 동선이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상점에는 모조리 다 들어가본 것 같은데, 군데마다 골라다주는 옷을 몇 벌이고 입었다 벗었다 하기를 반복했으니까. 완전히 지쳐버린 나머지, 요아케는 이만 이걸로 사겠다며 아무거나 한 벌을 잡았다. 그런데 원피스를 처음 입어보는 거면 그에 어울리는 신발과 액세서리도 필요하지 않느냐면서, 이미 몇 번은 지나온 상점들 사이로 또다시 끌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차라리 FH 녀석들 예닐곱 쯤을 혼자서 상대하는게 훨씬 낫겠어. 요아케의 매 날숨이 작은 한숨이 되어갈 무렵에서야, 원피스(및 기타 제반 소품)를 사냥하는 전우들은 잠시의 휴식을 가졌다. 커다란 건물을 전장처럼 몇 바퀴 주회한 열량을 초과치의 디저트로 듬뿍 보충당한 후, 요아케는 양손 가득한 쇼핑백과 함께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칠드런 기숙사에 돌아오기까지의 일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가지, 오늘 귀가한 자신의 꼴이 지부 창설 이래 초유의 구경거리가 되었을 거란 사실에만큼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크기도 색깔도 각기 다른 쇼핑백들 한아름을 제 방에 대강 던져놓은 뒤, 요아케는 곧장 지부장실로 향했다. 저번부터 진행하던 임무가 완료되었으니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보고를 마칠 참이었다. 느즈막한 시간이니 오가는 사람이 적을 거라 생각했는데, 꺾어지는 계단참에서 갑작스레 한 에이전트와 마주쳤다.

"어라, 요아케! 어서 와. 이번 임무도 잘 끝냈나 보네."

누구였더라? 대뜸 이름부터 부르는 사람. 오가는 길에 종종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별달리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자신이 알아야 하는 사람은 보통 세 부류다. 첫째로는 지부장, 둘째로는 부지부장, 셋째로는 그 외. 당연하게도 이 사람은 그 세 번째에 해당하고. 왜 불필요한 관심을 갖지…. 내가 임무를 어떻게 하든 본인과 상관이 있나? 떨떠름하게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한 후 눈을 들고 나니, 그래도 아무런 대꾸도 안 하기는 뭐해서 내놓았다는 말이 달랑,

"네."

"그래,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기껏 말을 걸어주었더니만, 시큰둥하게 돌아오면 기분이 좀 상할 만도 한데. 그럼에도 잊지 않고 격려를 건네는 것이다. 자신의 이런 냉랭한 태도에도 계속 웃으며 말을 붙여주는 사람은 지부 내에 그닥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적은 수 중 몇을 추려낼 수도 없으리만치, 요아케는 타인에게 좀처럼 흥미를 갖지 않는 성미였다.

"아. 그러고 보니, 『리바이어선』이 너를 찾던데?"

"…."

들숨이 탄성처럼 짧게 끊어졌으나, 요아케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저를 찾는다뇨? 지부장님이요? 무슨 일로 말입니까? 곧 보고하러 들를 거라는건 잘 알고 계실 텐데, 어쩌면 그분이 제게 임무 외의 다른 용무라도? 뭐 따로 들으신 얘기는 없나요? 표정이 안 좋아보이진 않으셨죠? 혹시 지부장실에 부지부장이 있지는 않았나요? 그 여자, 또 그분의 일에 사사건건 시비라도 걸고 있는건…. 일순간 머릿속에 몰아치는 십여 개의 질문을 간신히 꾹 눌러 삼켜야 했다. 스스로가 일으킨 전화戰火에 휩쓸린 나머지 오랫동안 말을 않는 요아케를, 에이전트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이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한참 뒤에서야 겨우 보통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전달 감사합니다."

"응. 다음에 또 봐."

에이전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고 떠났다.

다음에 또 보자니, 대체 무슨 일로?

칠드런 중 바깥과 관계를 맺지 않는 이의 인간 관계란 지부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전부다. 그 좁은 세계 안에서도 요아케는 꽤나 낯을 가렸다. 평소에 일상적으로 말을 섞는 사람은 지도교관이나 의료반의 사람들 정도가 전부. 의료반과는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긴 대화도 하지만, 그 외의 다른 칠드런이나 에이전트와는 같은 임무를 맡지 않는 한은 한 달에 한두번도 볼 일이 없다. 특히나 요아케는 단독 행동을 선호하다보니 더욱 그랬다. 지부의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비협조적인 아웃사이더라 여기지만, 지부장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번번이 '『NOVA』는 씩씩하고 독립적이며 맡은 임무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을 고쳐주곤 했다. 정말이지, 그런 소리를 눈도 깜짝 않고 해버리면 듣는 사람이…!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그 문장은 한 글자도 본질과 들어맞지 않았다. 자신이 단독 행동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지….

지부장실의 문 앞에서 노크하기 전, 요아케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었다. 마치 망망대해로 뛰어들기 직전의 사람처럼.

"들어오세요."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속으로 셋을 세고 발을 들였지만. 서류를 보고 있던 지부장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성들인 작업은 모조리 허사가 되었다. 요아케는 저도 모르게 저벅저벅 잰걸음을 놀려 그의 앞에 우뚝 섰다.

"어서 오세요, 『NOVA』.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임무에서 막 복귀한 참에 죄송하지만, 급하게 맡아주셨으면 하는 새로운 임무가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맡겨주세요."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에겐 결코 보여주지 않는 웃음을 한껏 입가에 걸면서도, 요아케는 언제나처럼 의문을 가졌다. 임무를 수락할 때마다, 이 사람은 번번이 무척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째서일까? 난 당신이 부탁하는 일을 단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는데.

지난번 완료한 임무에 대한 보고를 먼저 마치자, 키리타니는 방금까지 보고 있던 서류와 자료들을 추려 요아케에게 건네주었다. 종이 파일의 앞쪽, 클립으로 끼워진 사진 두어 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천지가 꽃으로 뒤덮인 산이었다.

"「안개꽃의 정원」이라 불리는 산이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봄이면 안개꽃이 만개하여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 주변에서는 예전부터 유난히 실종과 조난 사고가 적다고 합니다. 통계적으로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최근 이 근방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종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습니다."

파일에는 다른 산악 지역과의 사고 빈도 차이를 비교한 통계 자료도 첨부되어 있었다. 들쭉날쭉한 수치를 읽는 요아케의 눈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단순히 평소보다 늘어난게 아니라, 「평소에는 이상하리만치 적었는데 최근엔 오히려 과도하게 늘어났다」는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이 레니게이드에 의한 사고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마침 당신이 다니는 고교에서 이번 수학여행 장소로 이 산 근처를 택했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수학여행 완전 갈 생각이었어요."

"…그렇습니까?" 또래에게 물든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이는 틴에이지 어휘에 키리타니의 눈이 조금 둥글어졌다. "즐거운 수학여행에 임무를 맡기게 되어 미안하군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당신이 학생들을 보호하며 「안개꽃의 정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조사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고맙습니다, 『NOVA』.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키리타니는 말을 맺으며 엷게 미소지었다. 요아케는 그가 제게 임무를 일임할 때 이 말을 덧붙이는 순간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단독 행동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이런 칭찬을 오롯이 혼자 차지하고 싶어서일 뿐이다.

"그럼, 이만 가봐도 괜찮습니다. 수학여행 준비를 하려면 바쁠 테니까요."

"저어, 혹시…"

"…음?"

"…원피스라는걸 입으면, 강해질 수 있나요?"

양부모 없이 UGN 사람들의 손에 길러진 거나 다름없는 요아케는 어린 시절부터 간혹 기상천외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나 키리타니가 방금 들은 말은 그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엉뚱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허투루 대답을 주는 법이 없는 그는 고심 끝에 답을 건넸다.

"잘 모르겠지만… 수학여행에 입고 싶은 거라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좋은 조언… 인가? 키리타니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웃음을 보였다.

"예. 임무 잘 부탁드립니다, 『NOVA』."

지부장실의 문을 닫고 뒤돌아 나오며 요아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승부에서 이길 수 있는 옷이라면 분명 임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엄청 완전 잘해내야지. 하지만, 수학여행에 임무가 생겨버리다니…. 레니게이드가 연관된 사건이라면 언제라도 기본적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으나. 여고생의 머릿속에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다른 걱정들─이를테면, 그 아이들이 사건에 휘말리지는 않을까, 라는 불안한 염려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쇼핑으로 인한 피로감에 금방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정이 지나도록, 요아케의 눈은 감기긴커녕 더욱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다.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무의식적으로 발해진 희미한 빛들이 점점이 일어 반딧불처럼 주변을 밝혔다. 그 빛에 의지해 방을 가로질러 걸어가선, 문가에 다 챙겨둔 수학여행 짐을 굳이 뒤적여 옷을 한 벌 꺼냈다. 오늘 산 원피스였다. 팔다리뿐 아니라 어깨와 등까지 조금 드러나는 디자인. 움직이면 바스락 소리를 내며 풍성하게 빙글 돌아가는 끝자락. 태어나 단 한번도 입어보지 않았던 종류의 의복. 이 옷을 탈의실에서 갈아입어 볼 때, 요아케는 처음으로 걱정을 했다. 임무로 입은 부상의 흔적들을 행여나 그 아이들에게 보이게 될까봐.

자아를 인지할 만한 나이가 되기도 전에, 요아케는 어떤 사고에 휘말려 오버드로 발현했다. 엔젤헤일로와 샐러맨더의 신드롬은 사망 당시의 환경─몸을 에이는 화염과 눈을 태우는 빛에 영향을 받았으나, 스스로는 기억하지 못 했다. 그 사고로 본인을 포함한 일가족이 모두 사망했고, 각성으로 다시 살아난 요아케만 당시 에이전트였던 키리타니 유우고에게 구조되었다. 비극적인 사건과는 달리, 요아케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 별달리 흥미가 없었다. 키리타니는 마음의 준비가 되면 언제든지 이야기 해주겠노라고 종종 말하지만, 화제가 나올라치면 족족 거절하고 있었다. 이미 불타 사라진 과거는 현재의 임무 수행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으므로.

가족을 쉽게 기억의 뒷편에 묻어버린 것처럼, 어린아이를 한번 죽게 만들 정도로 가혹했던 사고의 흔적들 역시 각성으로 인해 완전히 치유되었다. 그러나 임무로 인해 새롭게 입게 되는 부상은 달랐다. 물론 그것 역시 최근까지는 거의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탈의실의 거울을 통해 몇 번이고 거듭 확인했음에도, 요아케는 다시 한번 옷을 걸쳐보았다. 괜한 우려가 무색하리만치, 드러나는 부분은 모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깨끗하기만 했다. UGN 의료반의 출중한 실력엔 일말의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몸을 아끼지 않고 험악하게 싸우다보니, 그들에게는 언제나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비단 의료반이 아니라 해도. 요아케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일이 없는 초신성처럼 임무에 몸을 불사르는 그녀의 무모함을 우려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자해적 행동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을 구제한 존재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도리가 아닌가?

옷을 정리해넣고 침대에 다시 누웠지만, 잠은 여전히 잘 오지 않았다. 이게 놀러가기 전날의 어린아이다운 기대감인지, 단독 임무 전야의 미미한 긴장감인지 좀처럼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번 역시 언제나처럼 임무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늘 자신을 지켜봐주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위해. 그러나, 정말로 단지 그것뿐인가? 며칠 전부터 마음 속에서 기묘하게 일렁이고 있는 이 알 수 없는 감각은….

요아케는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소중한 것을 쥐는 양 두 손을 가만히 모았다. 곧 손 안에 빛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형체가 천천히 맺혔다.

"…."

미처 제어하지 못한 날숨이 파르르 뱉어졌다. 조그만 인형처럼 줄여진 키리타니 유우고의 환영은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그러나 요아케는 그의 얼굴만큼은 항상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했다. 그가 제게 웃어줄 때마다 눈이 아려서, 좀처럼 똑바로 바라본 적이 없었기에. 은은하게 열기가 어리기 시작하는 손을 가만히 쥐었다가 다시 펴니, 희미하게 이지러지던 형상은 서서히 나츠나기 마나로 바뀌었다. 여학생을 모사하는 빛 역시 얼굴 부분이 명확치 않았다. 요아케는 그 형상을 한 시간, 두 시간이고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짙은 밤하늘의 끄트머리가 희붐해질 즈음에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수학여행지로 향하는 버스 안은 저마다의 즐거운 재잘거림으로 가득했다. 오하라와 마나 역시 그 평범한 풍경의 일부였다.

여행이 예고된 지난 달부터 시치카 오하라는 제법 들떠있었다. 단짝친구들과의 첫 여행이자, 오빠 아즈키가 없는 타지에서의 달콤한 일정. 여고생에게 남자 형제란 으레 그렇듯 사사건건 짜증을 유발하는 존재이다. 부모님이 자신보다 오빠를 더 좋아하는 것쯤이야 익히 알고는 있었다. 어디 유별나게 못난 구석이라도 있으면 맘 놓고 미워할 수나 있으련만, 자신보다 공부도 잘 하는데 싹싹하기까지 하니 어디다 항의할 데도 없는 것이었다. 속으로 재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그저 그뿐. 어쨌든 하늘이 내려준 이 절호의 기회를 허투루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오하라는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첫째로는 친구들과 맞춰입을 원피스를 샀으며, 둘째로는 가장 좋아하는 「롯코 스위츠」의 과자를 잔뜩 챙겨왔다. 세 사람의 여행 일정을 단단히 커버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것은 딱히 「준비」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제 교복을 세탁하면서 실수로 섬유유연제를 평소보다 많이 넣었다. 너무 과하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어 틈틈이 몰래 소매를 코 앞에 가져가봤지만, 이미 지속적인 노출로 후각이 마비되었는지 더 이상은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나는 오하라의 옆에 앉아 과자를 까먹으며 마냥 신이 나있었다. 둘이 붙어앉아 있으니 어쩐지 요아케의 이야기를 계속 하게 됐다.

"아~ 아케쨩, 우리 없다고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빨리 녹차 쿠키 줘야 하는데!"

"그러게! 종류별로 하나씩 먹여보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앗쨩은!"

"그치, 그치~ 표정은 그래 보여도, 엄청 좋아하고 있는 거 티난다구~"

"맞아, 맞아. 맨날 비효율이라고 하면서도 좋아하는 건 확 티가 난다니까? 귀여워~"

"얼른 원피스 입고 싶다. 다같이 사진 엄청 많이 찍는 거야! 분명 아케쨩도, 하라쨩도 엄~청 귀여울 거라구."

"응! 난 또 앗쨩이 안 입어줄까봐 걱정했는데, 웬일로 적극적이어서 다행이었어!"

오하라는 다시금 떠올렸다. 쇼핑 센터에서 확신어린 손길로 한 벌의 원피스를 집어들던 요아케의 유난히 비장했던 얼굴을. 역시 승부와 관련된 이야기가 자극이 되었던 걸까? 그러나 그 짐작은 다른 의미로 반만 들어맞았다.

"사실 아케쨩도 입어보고 싶었던 거 아닐까? 사복으로 원피스 입은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역시 그렇지? 다음에는 다른 옷도 맞춰 입고, 꽃구경이나 수족관도 가자! 여름에 바다 놀러가도 좋고!"

"완전완전 최고!"

말만 들어도 마음이 넘실거리는 즐거운 계획들. 학창시절은 아직 길고, 친구들과 함께 보낼 소중한 시간들은 더더욱 많을 것이다. 오늘 역시 그러한 날들 중 하나였다. 구불거리는 길을 오르는 버스의 엔진 소리마저도 고양이의 기분 좋은 울음처럼 느껴진다. 마나는 신나하며 오하라의 어깨에 머리를 폭 기댔다.

"히히…. 나 조금 졸린데, 기대도 돼?"

"응, 당연하지!"

오하라는 살짝 몸을 돌려서 마나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안심한 듯이 더욱 달라붙어오는 부드러운 온기를 느끼고 있으려니, 이윽고 코 끝에 생경한 향기가 풍겨왔다. 「안개꽃의 정원」이 내뿜는 꽃 향기는 아니었다.

"마나쨩, 좋은 냄새 난다."

"…헤헤, 그런가. 하라쨩도 좋은 향기 나."

"그런가? 섬유유연제 냄새인가…." 오하라는 다시 제 소매의 냄새를 킁킁 맡아봤지만, 확실히 후각이 마비된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마나쨩이 더 좋은데?"

헤실헤실 웃음 짓던 오하라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오르내렸다. 이런 상황에 긴장감도 없는지, 기어이 옅은 졸음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츠나기 마나는 그 모습을 곁눈질 했다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들리지 않을 소리로 작게 씹어삼켰다.

"…바보."

이쯤 달렸으면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을 텐데. 차창 밖으로는 보이느니 안개꽃 뿐인지라 어디쯤 왔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오하라에게 기대느라 비스듬히 기울어진 마나의 시야에, 문득 선생님과 운전수가 무언가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어쩐지 심상치 않아진 분위기에 정신을 다잡은 오하라도 일단 창 밖부터 바라보았다. 곧장 아름다운 안개꽃이 만개한 풍경이 보인다. …어라, 방금 전에도 본 풍경 아닌가?

"얘들아!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올테니, 너희들은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된다."

결국 버스가 서서히 멈추었다. 선생님은 모두에게 얌전히 있을 것을 당부하며 나갔다. 차 안은 여전히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했지만,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달리 불안한 술렁임이 한 겹 덧입혀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경계하는 토끼처럼 눈이 둥글어진 마나와 달리, 오하라는 별 긴장감 없이 마나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놀고 있었다. 어쩐지 묘하게 이는 감각에 귓바퀴가 붉어진 마나가 간지럽다고 칭얼거렸지만 왠지 들은 체 만 체였다.

 

"길을 잃은 걸까?"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장이 선생님을 찾아오겠다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러나 반장 역시 곧바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사방이 낮은 꽃뿐인 벌판에서 어딘가로 걸어나갔다면 멀찍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사람을 눈으로 좇기도 전에 금세 아무데도 보이지 않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갑작스런 상황에 주의가 흐트러진 탓이라 여겼지만…. 잘은 몰라도,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감각만큼은 동물적으로 다가온다. 오하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정말 무슨 일이지…?"

"이렇게 오래 안 돌아오실 리가 없는데…."

"앗쨩네는 도착했나 물어볼까?"

"앗, 그거 좋겠다."

마나의 찬성에 오하라가 핸드폰을 꺼내 요아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너머로는 신호음만이 단조로이 이어질 뿐,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았다.

"어라… 이상하네. 전화도 안 돼."

아무래도 산 속이다보니 통화권역을 벗어난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반장마저 자리를 비운 버스 안은 금방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했다. 화장실이 급하다는 아이, 마냥 바깥의 꽃을 꺾고 싶어하는 아이. 그렇게 선생님의 신신당부를 잊은 채 하나 둘씩 밖으로 나가버리고 나니… 어느덧 버스에 남은 것은 두 사람 뿐이었다. 사태를 깨달은 마나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드리워졌다.

"어, 어쩌지…."

"…그러게. 둘만 남았네…."

“나가봐야 할까?”

그 와중에도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 오하라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대로 기다려봤자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불쑥 들었다.

"으음, 아무래도 내려서 둘러보기는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응. 가보자."

오하라는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서둘렀다. 어쨌든 내리자는 말을 먼저 했으니, 이 제안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는 자신이 끝까지 책임을 져야만 한다. 혹시라도 나중에 선생님이 잘못을 꾸짖는다면, 자기가 무작정 내리자고 한 거고 마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우겨보기부터 할 심산이었다. 그렇게 버스에서 먼저 후다닥 내린 오하라가 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안 잃어버리게 손 잡고 가자!"

"…으응. 고마워."

마나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고, 에스코트를 받듯이 오하라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온 세상에 둘만 남아버린 듯한 고요 속에, 서로의 손을 굳게 마주잡고 버스로부터 고작 몇 발짝을 내디딘 그 순간. 먼저 비명을 내지른 것은 마나였다.

"꺄악!"

"아, 으아아? 꺄아아악!"

방금까지도 제대로 딛고 서있던 지면이, 별안간 허공으로 변하며 발부터 쑥 빠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인지하기도 전에, 쿠웅! 시커멓게 입을 벌린 구멍으로 추락한 두 사람은 안개꽃이 무성한 꽃밭에 떨어졌다.

비명조차 질러지지 않는 과격한 통증이 오하라의 온몸을 이지러뜨렸다. 손가락 하나조차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짧은 들숨에도 뼈마디가 바스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 이대로, 죽는 건가?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마나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들려온다.

"읏, 다리가… 하라쨩! 하라쨩! 정신 차려!"

"으… 마나쨩, 괜찮아…?"

오하라는 일어나려고 애써봤지만, 좀처럼 제어되지 않는 몸은 그대로 땅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시야가 자꾸만 흐릿하게 멀어진다. 어디 한 군데 제대로, 아니, 온 몸이 심각하게 다친 것 같았다. 웅웅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지도 못하고 버르적대고 있으려니,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 밖으로 수상한 형체들이 움직이는게 보였다. 갑자기 웬 괴한들이 나타나선 나츠나기 마나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누, 누구야! 이거 놔요! 꺄아악!!"

"아, 안 돼…."

그들을 막고 싶어도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더욱 흐려지는 오하라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흐드러진 꽃들 사이에서 마나가 속절없이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오하라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커다란 손에 틀어막혔다.

"마나를… 놔 줘…!"

사지를 찌르는 고통을 견디며 간신히 쥐어짜내 외쳤지만, 목소리는 힘없이 흩어질 뿐이다. 

언젠가 분명, 이렇게 목숨이 위험할 뻔한 적이 또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 그때의 기억이나 더듬고 있다니, 어쩌면 이게 바로 주마등이라는 걸까? 사지에 내몰린 인간이 지금까지 지나온 삶 속에서 위기의 돌파구를 찾고자 인생의 발자취를 초인적인 속도로 복기하는 행위.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이 제게도 벌어지는가 싶어서 헛웃음이 새어났다. 하지만 그때를 기억해내려 애쓸 때마다 떠오르는건 언제나, 제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의 얼굴뿐이다. 의식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저를 가벼이 흔들어보던, 앳된 외모의 외국인 여자아이. 그 어깨 위에 올라앉아 있는건… 올빼미? 그 외의 기억은 언제나, 심지어 지금처럼 다 죽어가는 중에도 제대로 떠올려 낼 수가 없다. 마치 누군가가 날카로운 메스로 절제해낸 것처럼. 나는, 아… 어쩌면, 역시, 오빠 말대로 정말 바보인가봐. 이렇게 중요할 때, 친구를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떠올려낼 수가 없다니….

몸을 우악스럽게 짓누르던 통증이 어느덧 미미해졌다.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기보다, 그 감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신경마저 마침내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게 된 것 같았다. 가느다란 실처럼 겨우 유지하고 있던 정신이, 서서히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단지 잡생각에 잠을 설친 거라 생각했지만, 요아케는 사실 누구보다 이 수학여행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행사에서 올릴 수 있는 「성과」라고 해봐야 고작 장기자랑 1등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지부장이 직접 맡긴 임무를 겸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안개꽃의 무질서한 도열만이 하염없이 이어지는 바깥. 차창 너머에 건성으로 시선을 둔 채 요아케는 생각했다. 임무도 완수하고, 장기자랑에서도 1등해서 칭찬을 두 배로 받아야지. 그래도 가는 동안 짝이 되었답시고, 옆에 앉은 아이가 성의껏 몇 마디 말을 붙여왔다. 그러나 머릿속에 딴 생각만 가득한 요아케는 간간이 단답으로밖에 호응하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마저 잃은 동급생이 잔뜩 메인 볼로 비스듬히 틀어앉았을 때. 속력을 서서히 줄이기 시작하던 버스가 멈추어섰다. 선생은 잠시 안개꽃을 구경시켜주고 싶어서, 라고 했지만. 요아케만큼은 그것이 단순히 둘러대는 소리에 불과함을 눈치채고 있었다.

꽃구경이라는 말에 한껏 들뜬 아이들이 우르르 내렸다. 요아케도 자연스럽게 휩쓸리듯 버스 밖으로 나왔다. 잠깐 주변을 거니는 척하다 곧장 방향을 바꾸어 반대쪽으로 향했다. 형형색색의 안개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산. 무언가 찾아보려고 걸어나가봤지만, 계속해서 같은 풍경이 반복될 뿐이었다. 의문의 실종 사건이 발생하는건 역시 레니게이드 때문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요아케는 오버드의 기척을 느꼈다. 흠칫 돌아본 방향에는 예상대로 인영이 몇 있었다. 괴한 두 명이 여학생 하나를 짐짝처럼 든 채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저 머리칼은…

"나츠나기…!"

요아케는 이를 까득 물었다. 무심코 몸부터 튀어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견뎌야 했다. 불명확한 적의 전력에, 일반인이 피랍된 상태. 섣불리 교전을 벌이는건 위험하다. 상황부터 파악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미행했지만, 얼마 따라가지 못해 그들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추격 대상을 놓쳤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도중에 감쪽같이 사라진 것 같았다. 마치 「일부러 길을 잃게」 하려는 것처럼.

"이런, 어디로 가버린 거지…."

그 순간,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앞의 꽃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사라락, 일제히 눕는 꽃들은 꼭 가야 할 길을 인도하는 표지의 일종처럼 보였다. 아까 사라진 자들의 목소리가 꽃들 사이로 이리저리 퍼지듯이 들려오고 있었다. 공간이 왜곡되어 있는 걸까? 

"우리 중에 한 명이 희생될 뻔했는데, 잘됐지 뭐야."

"어서 그랜드 마스터 님에게 데려가자고."

꽃들이 아무 의미 없이 스스로 기울어진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무언가 공간과 시야를 교란하는 원인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지금까지처럼 시각에만 의존해서는 결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별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었기에, 요아케는 꽃이 기울어지는 방향을 향해 계속 나아가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한참을 꽃이 만들어준 길로 나아가고 있으려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 누군가가 쓰러져있는 것이 보였다. 꽃들 사이에 널브러져있는 사람은 시치카 오하라였다.

"이봐, 괜찮아?"

요아케는 황급히 다가가 오하라의 상태를 살폈다. 일단은 외상도, 체온의 급격한 변화도 없어보였다.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자 오하라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으으으…."

정신이 들자마자, 오하라는 태어나 단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마치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갑자기 몸 안에 불쑥 생겨난 것만 같았다.

"이게…. 으… 이게 뭐야…?"

오하라는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쥐며 낑낑거렸다. 머릿속으로 어떤 정보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뭐지? 레니게이드…? 오버드…? 조각조각 부서져있는 생소한 말들은 귀가 아닌 머리에 들려오는 목소리 같기도, 또는 시험 기간에 어거지로 외워서 밀어넣는 내용 같기도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오하라의 얼굴과 갑작스럽게 달라진 그녀의 낌새에, 요아케는 문득 깨달았다. 아무래도, 시치카 오하라는 방금 「각성」한 것 같았다.

머릿속의 일렁임이 차츰 가라앉고 나서야 오하라는 겨우 고개를 들어볼 수 있었다. 그 탓에 요아케가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어? 앗쨩은 어떻게 여기에…?"

"정신이 들어? 처음에는 좀 버거울 거야." 물론 너무 오래 전이었기에, 난 생각나지 않지만. 요아케는 굳이 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응? 으응? 나, 뭔가 이상해…. 머리를 다쳤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겨우 기억을 더듬어나가던 오하라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마나! 이상한 사람들이 마나쨩을 데려갔어! 잠깐, 어라, 나 일어설 수 있어? 왜?"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으로 다쳤었던 거야?"

요아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내가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혹시 누군가가 각성에 영향을 끼쳤을까?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신과 그 괴한들 외 다른 오버드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치카 오하라는 한번 「죽어서」 각성한 것이 분명한데. 하지만 아는 사람이 수학여행 중 갑자기 각성하는 경우에 대한 대처법은 매뉴얼에도 없었다. 요아케는 일단 모든 설명을 다음 기회로 미루려고 마음먹었다.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고…. 일단은 나츠나기를 찾으러 가자."

"응? 으응. 응? 앗쨩은 뭔가 알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시치카 오하라로서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알에서 방금 깨어난 것마냥 모든 것을 낯설어하는 친구를 돌아보며. UGN의 칠드런은 지금 건넬 수 있는 조언 중 가장 유의미한 말을 했다.

"앞으로는 말이야. 지금까지와는 좀 다를 거야. 「돌아갈」 수는 없으니, 단념하도록 해."

"잘 모르겠어…. 이, 일단 마나쨩을 찾으러 가는거지? 나도 도와줄 수 있는 거야?"

요아케는 머리를 굴렸다. 방금 각성한 오버드를 실전에 투입… 아니, 그 수준 이전에. 실전 경험이 전무한 오버드와 함께 즉흥적으로 병행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안 된다고 한들, 오하라는 어떻게든 따라나설게 분명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나츠나기 마나」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까.

"…응. 큰 도움이 될 거야."

"다행이다…."

역시, 앗쨩은 나쁜 아이는 아닌가봐…. 아직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오하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어쨌든 「우리」는 「오버드」라는 거지? 이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느껴왔던 미묘한 비현실감, 남들에 비해 꽤 어긋나있는 상식 수준 같은 것들도 이제야 대강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달라고 했었지."

오하라는 일단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요아케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통째로 길을 잃은 버스, 밖으로 나갔다가 사라진 선생님과 반장, 갑자기 바닥이 꺼지며 이상한 곳으로 떨어진 것, 마나의 납치 등등. 임무 현장에서의 새로운 돌발 정보를 빠르게 받아들이며, 요아케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했다. 어제까지 괜한 염려라 치부했던 일들이, 갑작스레 불쑥 현실로 다가오고 말았다. 이 애들이 「임무」에 이런 식으로 얽히게 되다니…. 하지만, 마냥 걱정만 드는건 또 아니었다. 지금의 요아케에게는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무근거에 비논리적인 안심 또한 혼재하고 있었다. 어쩐지, 시치카 오하라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도 같다는.

그 때,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꽃잎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팔랑거리는 안개꽃잎들 속에서 별안간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는 것은, 정상에 있다.』 

함정인가? 요아케는 즉각 주변을 경계했지만, 역시나 별다른 낌새는 없었다. 오하라만 약간 울상이 되어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앗쨩…. 나 뭔가 환청이 들리는데, 역시 머리를 다친 걸까?"

"나도 들었으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으응…. 그 한심해하는 얼굴을 보니 어쩐지 안심이 되네."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인 와중에도, 친구의 지극히 익숙한 표정만큼은 오하라에게 안정을 주었다. 요아케가 생각하기에, 「찾는 것」이란 역시 나츠나기 마나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역시 누군가가 우리를 돕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기껏 납치해놓고 어디로 데려갔는지 순순히 말해주는 범인은 없겠지. 속는 셈 치고 따라가보기로 할까?"

"응, 딱히 다른 갈 곳도 없어 보여."

결정을 내리자마자 두 사람은 비탈길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나에 대한 걱정과 요아케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오하라를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열성적으로 주변을 살펴보던 눈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풀숲 부근에 몸싸움을 벌인 흔적이나, 누군가가 꽤 오랜 기간 동안 거주한 자취가 있었다.

"앗쨩, 이거 봐."

오하라는 발견한 것을 요아케에게 보여주었다. 어쨌든 방금 오버드라는게 된 자신보다는 숙련자가 더 많은걸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여기서 사는 걸까…? TV에 나오던 자연인 그런 건가…."

"흐음…. 최근 이 근처에서 실종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고 했어. 범인들은 이 근처에 계속 머무르며 일을 저지른게 분명해."

"오오…!"

앗쨩, 멋있어! 오하라는 경탄하는 시선으로 요아케를 바라보았지만, 요아케는 다른 생각에 주의가 흐트러져 눈치채지 못했다. 나츠나기…. 계속 저항했던 걸까. 보통 사람, 그것도 여고생이 건장한 성인 남성 오버드들을 대상으로 뭘 해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풀숲에 남아있는 격한 흔적들은, 그럼에도 있는 힘껏 버텨낸 그 아이의 몸부림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강한 워딩이 느껴지는데… 혹시 너도 뭔가 느낄 수 있어? 이 감각…."

"으음…. 뭔지 모르겠지만, 느껴지긴 해. 이걸 워딩이라고 하는구나…."

요아케가 오하라에게 설명하기를 어려워하는건 단지 지금까지 이런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억이란게 있기도 전부터, 「레니게이드」로 인한 이 비일상적인 감각은 자신에겐 지극히 당연스런 일상과도 같았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었던」, 방금 각성한 오버드에게 갑자기 덮쳐오는 생경한 감각은 어떠할지…. 요아케로서는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산 곳곳에 남아있는 미묘한 감각이 오하라에게 어떻게 느껴지고 있을지만큼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사람이 아니라 장소 자체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까? 요아케는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원하는 곳으로 가기는커녕 시야 내의 장소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의, 미묘하게 어긋나있는 공간. 이런 이펙트를 사용할 수 있는건….

"이곳의 공간은 누군가의 능력으로 인해 왜곡되어 있어. 길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있었군…."

"으음… 엄청 판타지 같은 얘기네…."

오하라는 수용 능력의 한계치를 진작에 초과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기다 대고 발로르가 어쨌다느니 오르쿠스가 뭐라느니 하는 얘기를 시작해봤자 당장은 이해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요아케는 아까의 수상한 인물들이 「그랜드 마스터」에 대해 언급한걸 떠올렸다. 그가 이 일의 주동자일까? 그런 자의식 엄청나보이고 촌스러운 이름을 쓰는 사람이라면 어딘가에 자료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통신이 잘 되지 않지만, 이전에 UGN 정보망에 접속했을 때 저장되었을 로컬 데이터의 검색만이라면…. 그러나 열어본 데이터에는 단편적인 정보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딱 한번만, 한번만 다시 다운로드 받으면 될 것 같은데…. 요아케는 핸드폰을 든 손을 불쑥 치켜들며 주변을 맴돌았다. 우연찮게 어느 위치에서 잠깐 통신이 터지며 나머지 정보가 수신되었다. 파일들은 용량이 꽤 커보였지만, 지금은 불합리한 청소년 요금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랜드 마스터라는 인물의 본명은 「카스가 카나타」였다. FH의 명문 카스가 가家의 일원으로, 발로르・오르쿠스의 신드롬을 가진 오버드이자, 발로르와 오르쿠스만으로 이루어진 셀의 리더인 듯 했다. 저런 오버드 수족들을 부리고 있다면, 현재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것 역시 그일 것이 분명했다.

"이 녀석, 엄청나게 꿍꿍이 있어보이는데…."

요아케는 그랜드 마스터에 관한 정보를 오하라에게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역시나 신드롬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시켜주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들은 것을 가만히 곱씹고 있던 오하라는 문득 작은 탄성을 내며 요아케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앗쨩! 있잖아, 이 산 자체가 오버드인 것 같아!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긴 한데… 너랑 나 같은 느낌이 느껴진다고 할까?"

오하라의 말에 의하면 이 산─안개꽃의 정원은 거대한 「레니게이드 비잉」 그 자체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발로르와 오르쿠스의 신드롬을 가진. 하지만 요아케의 감으로는, 현재 이곳의 공간을 왜곡한건 이 산이 아닌 것 같았다. 아마 그랜드인지 뭔지 하는 그 녀석일 터였다.

"그것들은 오버드는 아니야. 레니게이드의 영향은 받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산 자체가 「레니게이드 비잉」이라니… 엄청난 힘인걸."

"으응? 응… 어렵네…. 아무튼, 아까 마나쨩이 있는 곳을 알려준 것도 이 산인 걸까? 의외로 친절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게 현재로써는 합리적이겠지만…." 산이 친절하다니? 생전 처음 듣는 비논리적인 표현에 요아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동화에서 나오는 거 보면 '감히 이 산에 발을 들이다니! 썩 나가거라!' 할 것 같은데 말야."

"그럼 그런 산은 불친절한 산인가?"

"불친절… 무서운 산신령님이겠지? 그런 경우엔?"

"산신령이라…. 어쨌든, 산 정상에 가면 나츠나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네."

"응, 빨리 가서 구해줘야겠다!"

「만날 수 있을 것 같네」라니.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불확실한 말까지 할 수 있게 된건지, 요아케는 스스로를 납득할 수 없었다. FH가 벌이는 음모에 휘말리는 일반인들은 최악의 경우 쉬이 죽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을 설명하겠답시고 이 애에게 냅다 그런 소리부터 할 수는 없으니…. 두리뭉실한 희망을 주는 가정형으로 설명한게 찝찝해져버린 나머지, 요아케는 긴 날숨을 소리나지 않게 파르르 흘렸다.

아무튼, 지금은 친절한 산신령인지 뭔지를 믿어봐야 하는 걸까?


공간이 온통 꼬여있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착실하게 정답을 찾아내며 산을 올랐다. 방금까지 그저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오하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한번 죽었다 깨어나자마자 이런 강행군이라니. 그러나, 위험에 처해있을 친구를 생각하면 없던 기력도 저절로 솟아났다. 무슨 일이 벌어진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으나, 제 속에서 갓 깨어난 듯 요동치고 있는 이 힘은 분명 마나를 구하라고 주어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반면 요아케의 경우는 반반이었다. UGN의 임무 수행에 불평은 원천적으로 불필요하다. 그러나, 누군가─여전히 친구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사람이 휘말려있는 임무는 지금까지 전혀 겪어본 적 없던 종류의 부담이었다. 각자의 이유로 복잡한 머리와 달리, 부지런히 이어나간 걸음 끝에 두 오버드는 마나를 납치한 자들과 다시 맞닥뜨릴 수 있었다. 처음에 눈 앞에서 사라져 놓쳤을 때처럼, 갑작스레 또 공간 사이에서 불쑥 나타난 것이었다.

"에잇! 이곳까지 올라오다니, 웬 놈들이냐!"

그랜드 마스터에게 부려지는 이들이라면, 이들은 FH의 에이전트일 터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처음 봤던 에이전트 둘뿐, 마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너무 늦어버린 걸까? 요아케가 흔들리는 눈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오하라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저희로 말할 것 같으면! 길 잃은 여고생인데요."

"하?" 상황을 잠시 잊을 정도로 황당한 발언에, 요아케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딴 말에 속을 것 같아!? 평범한 인간이 워딩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진짠데…."

엄연히 말하자면, 왜곡된 공간 탓에 헤멨으니 길을 잃은 것은 맞았다. 어정쩡하게 서서 풀죽은 얼굴을 하고 있는 오하라와 달리, 서서히 몸을 낮추며 전투 태세에 돌입하는 요아케를 본 다른 에이전트는 단번에 그녀의 정체를 간파했다.

"UGN의 개들! 그랜드 마스터 님의 실험을 방해하게 둘 수는 없다!"

"그래, 개한테 한번 물려볼 테야? 나는 개 중에 가장 사나운 개지."

"UGN 따위에게 질 것 같으냐?! 그분의 일을 방해하게 두지 않겠다!"

앗쨩, 개과였구나. 좀처럼 어울려주지 않길래 분명 고양이과라고 생각했는데! 여지껏 본 적 없는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는 요아케를 보며, 오하라는 그런 생각을 하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상대들은 원하는 바를 위해 범죄를 일삼는 것도 개의치 않는 자들이다. 그러나 자신은 방금 막 걸음마 같은 것을 시작한 오버드. 요아케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 때문에 이쪽이 불리할건 자명하다. 그렇다면 블러핑이라도 확실히 해야만 했다.

"UGN은 모르겠고, 화난 JK의 매운맛을 보시죠!"

"어린애들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두 FH 에이전트가 달려들려 하기도 전에, 요아케가 날쌔게 움직였다. 개라느니 하는 말을 입에 담은 에이전트 쪽으로 검지가 곧게 뻗어진다. 공격적으로 상대를 지목한 손가락은 마치 경고하는 총신처럼 보였다.

"네 말대로 나는 「그분」의 충견이라, 이 목줄 아래에서 비로소 강해져. 그럼 너는 어떻지? 네가 FH의 개인지, 자유의지를 가진 짐승인지 나에게 보여봐. …그 전에 죽겠지만 말이야." 

"꼬맹이 놈이 입만 살았군!" 

에이전트가 달려들려 하는 순간, 오하라는 요아케의 곧게 뻗은 손가락 끝에 밝고 뜨거운 빛이 둥글게 맺혀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분명 거기까지는 제대로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젠장! 이 꼬맹이가!"

소름끼치도록 높은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빛줄기가 뻗어나갔다. 남자는 욕을 내뱉으며 피하려 들었지만 손을 쓸 새도 없이 몸을 꿰뚫렸다. 기세등등하던 동료가 정제되지 않은 괴성을 내지르며 나동그라지는걸 본 다른 에이전트는, 급히 상대적으로 어리버리 해보이는 여고생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가 바닥을 짚자마자 오하라는 발치에서 기묘한 움직임을 느꼈다.

"네놈들은… 그분한테 가지 못한다!"

"꺄아악! 너무해!" 바닥에서 흙의 창이 불쑥 솟아올랐지만, 민첩하게 움직인 오하라를 아슬아슬하게 스쳐만 갔다.

"…꼬맹이 녀석이 요리조리…!!"

방금 그걸 어떻게 피했는지 누구에게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전혀 말해주지 못할 것 같았다. 평소의 피지컬이라면 이런건 결코 해낼 수 없었을 텐데…. 갑작스레 움직이느라 균형을 잃은 오하라는 몇 발짝 비척거리다 의식적으로 똑바르게 섰다. 저들은 자신을 요아케와 같은 UGN의 어쩌고로 여기고 있다. 전력을 모르는 이들에게 얕보여선 안 됐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은 「실전」.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오하라는 곁눈으로 요아케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어디 보자…. 아까 이런 느낌으로… 했었나?"

위험에 처한 마나를 생각하며 산을 오르는 긴 시간 동안, 오하라는 제 안에 있는 힘이 어떤 종류인지 감지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요아케가 다루는게 빛과 불이라면, 자신의 안에서 바작바작 요동치는 힘은 「전류」인 것 같았다. 요아케가 한 것처럼, 이걸 쏘아내거나 터뜨릴 수 있을까? 오하라는 태어나서 보았던 전류 중에 가장 파괴력 있던 것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변덕스런 초여름, 창밖이 밤처럼 새카매지도록 폭우가 줄기차게 퍼붓던 날. 내리치며 온 사방을 찢던 고압의 번개, 야수의 울부짖음처럼 사정없이 귓가를 울리는 포악한 천둥…!

상상이 현실로 옮겨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콰앙! 오하라가 힘껏 두 손을 치켜들자 내려치자 번개가 적들의 머리 위에 빗줄기처럼 퍼부어졌다. 

"크아악!" 

내리꽂힌 지면으로부터 동심원처럼 퍼져나간 파동이 주변을 진탕으로 만들어 놓았다. 요아케에게 공격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에이전트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를 내지르더니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고압의 전류에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남아있는 에이전트마저도 천둥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졌는지 고개를 연신 흔들었다.

"무, 무슨 꼬맹이들이 이렇게…!"

"앗쨩, 나 지금 뭐 한거야?!" 오하라는 여전히 손을 치켜든 채로 눈을 휘둥그레 뜨며 요아케에게 돌아섰다. 해놓고도 자기가 더 놀란 것 같았다.

"굉장한데…."

요아케는 무심코 입을 조금 벌린 채 중얼거렸다. 처음이라 잘 제어되지 않는게 오히려 좋은 쪽으로 작용해, 블랙독과 하누만의 능력이 어우러져 파괴력이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길게 감탄할 여유는 없었다. 요아케는 권총 두 자루를 쓰는 것처럼, 아까의 반대쪽 손가락으로 남은 에이전트를 가리켰다.

"너는 도망칠 거야? 아마 소용 없겠지만."

"도… 도망칠까보냐!"

손가락 끝에 맺히기 시작하는 빛줄기는 처음보다 더욱 뜨거워져 있었다. 찬란히 타오르는 빛은 곧 불이며, 격렬히 빛나는 화염은 곧 빛이다. 샐러맨더의 열 에너지를 기조로 하는 엔젤헤일로의 광선 공격은, 침식이 깊어질수록 오버드의 몸을 노심처럼 과열시켜 점차 강력해진다. 물론 이러한 순간마다 가슴속에 가득 차오르는 희열만큼은 못하겠지만.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열기가 일으키는 공기의 흐름이 요아케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어놓았다. 거꾸로 일렁이듯 솟구치는 새하얀 머리카락은 천사 같기도, 귀신 같기도 했다.

 "꼬, 꼬맹이들 따위가 어떻게 이런 힘을…!! 크아아악!" 

격렬한 열기를 머금은 빛이 곧게 쏘아지며 남은 적을 꿰뚫었다.

공격의 적중을 확인한 뒤, 총구를 불듯 손가락 끝을 입으로 가져가는 요아케를 보며 오하라는 순수하게 경탄했다. 매사에 심드렁하고 무심하기만 하던 친구가 이 순간, 평소보다 좀 더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안 돼…. 그랜드 마스터 님에게 벌을 받고 말 거야…."

"촌스러운 이름…." 듣다 못한 요아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완전히 정신을 잃은 적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으아아, 무서웠다…."

"서둘러야 해. 그 녀석들, 실험인지 뭔지 하는 얘길 했어."

"응, 마나를 찾으러 가자!"

두 사람은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서둘러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에 다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장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요아케의 눈이 커졌다.

"이게 대체…."

안개꽃의 산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기계 장치들과, 그 안에 의식을 잃고 잠들어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앞에서 마나를 붙들고 서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카스가 카나타, 「그랜드 마스터」였다.

"마나쨩!!"

오하라가 크게 소리쳐 불렀지만, 마나는 축 처져선 괴로운 신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너희는 뭐지? 그 녀석들, 애송이들이 이 곳까지 올라오게 뒀다니 실망스럽군. 여긴 너희들이 발을 디뎌도 되는 영역이 아니다."

"너… 너무 전형적인 악역 아지트에 악역같은 대사…." 작위적인 행태에 오하라가 기막혀하고 있을 때, 요아케가 오하라의 앞을 막아서듯 한 발짝 나가며 비꼬았다.

"그래? 그런거 치곤 오는 길이 엄청나게 허술하게 돼있던데."

"흥, 쓸모없는 것들….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랜드 마스터는 동요 없는 얼굴로 손을 한번 까딱거렸다. 그러자 오하라와 요아케가 딛고 서있는 발 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거! 바닥으로 쑥 꺼지는 이 기분 나쁜 감각, 벌써 두 번째야! 혼란을 겪는 전정기관 탓에 어지러움을 느낀 오하라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아아, 이게 내 마지막 힘이구나….』

텅 비어버렸던 발 밑에, 별안간 다시 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목도하듯. 바닥에서 흙부터 다시 생겨나더니, 그 위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안개꽃이 뒤덮었다. 이윽고 전에 들었던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여, 자네를 비일상의 세계로 초대해버려서 미안하다.』

"네? 네, 네? 아, 산신령님!"

『부디… 나를 도와주게.』 

"도와주신 은혜, 갚아야죠! 말씀만 하시면 제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어요!"

오하라가 결연하게 답했고, 두 사람은 무사히 안개꽃이 핀 땅 위로 안착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랜드 마스터는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어째서 내 능력이…. 「안개꽃의 정원」, 네 놈인가? 그렇게 제어를 받고도 아직도 말을 듣지 않는다니, 역시 살아있는 매개체가 더 필요한가보군.” 그가 거칠게 마나의 팔을 놓자, 마나는 힘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됐군. 네놈들까지 산 제물로 써주지."

『부디…. 저 자를 막아다오….』

"말 안 해도 할 거니까 말이지."

요아케가 다시 몸을 낮추며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조그만 여자아이에게서 발해지는 폭발적인 레니게이드의 힘과 망설임이 없는 얼굴. 그리고 훈련으로 다듬어진 자세를 보자, 마스터는 그녀가 UGN 칠드런임을 직감했다.

"흥,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들이. 얌전히 제물이 되어라!"

"늙어서 좋으시겠어요!"

"너무 사실을 말하지 마." 직설적인 말이 상대를 과도하게 자극하게 될까봐 옆 사람을 말려보는건 요아케로서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재수 없게 생겼잖아."

대뜸 돌아온 맹랑한 대답에 요아케는 혀를 내둘렀다. 착하고 얌전한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나? 오하라는 그랜드 마스터의 머리에 빨리 꿀밤이라도 한 대 먹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어쩐지 오빠를 떠올리게 하는 재수없음에 필요 이상으로 더 약이 올라있다는걸 요아케는 모르고 있었다.

"입은 잘 놀리는구나. 어디 보실까. 얼마나 대단한 꼬맹이들인지!"

그랜드 마스터가 아까처럼 다시 손가락을 까딱했다. 무언가 또 주변을 조작할 셈인가 싶어 경계했지만, 곧 등장한건 그의 부하들 몇이었다. 바닥에 힘없이 내팽개쳐져있는 마나를 보자 오하라와 요아케의 머릿속에서 충동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오하라는 방금 손에 쥔 힘으로 무엇이든 박살내버릴 의지가 있었다. 반면 요아케의 경우 그보다 좀 더 원초적인 욕망이었다. 자신을 구제한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고, 모두를 외면하던 자신에게 언제나 스스럼 없이 다가와준 아이. 이런 일로 그녀를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면, 다시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게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충동. 텅 빈 것 같은 공허감. 머릿속을 내달리는 충동에도, 두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적에게 맞섰다.

"네놈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걸 보여주지."

그랜드 마스터의 발 끝이 땅에서 떨어지더니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두 사람이 무언가 대처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머리 위의 하늘에 거대한 영역이 펼쳐졌다. 무거운 중력을 업은 날카로운 칼날들이 미처 피하지 못한 두 사람에게로 내리꽂혔다.

"크하하하! 이걸로 끝이다!” 

요아케는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다물었지만, 압도적인 고통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오하라는 일단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았지만, 살면서 처음 겪는 어마어마한 출혈의 경험에 몸을 떨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보통 사람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완전히 침묵했으리라 여긴 어린애들이 비척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키자, 마스터가 코웃음을 쳤다.

"하, 일어나는 거냐? 꼬맹이 놈들이 근성은 있군."

"큭…. 시시한 이름을 하고 있어서 시시할 줄 알았는데…. 제법이잖아. 강할수록 좋아…. 더 큰 칭찬을 받거든."

적의 압도적인 강함에 오히려 호기심이 동한다고 하면 거짓말처럼 들릴까? 그러나 지금까지의 요아케에게는 임무의 성과를 이루고 지부장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만이 일생의 전부나 다름 없는 즐거움이었다. 지금 눈 앞에서 겁을 주고 있는 강력한 적조차, 그저 딛고 올라설 수 있는 발판으로만 보이는 것이었다. 요아케는 총을 쏘듯이 그를 검지로 가리켰다. 과열된 손가락 끝에 아까보다 더 뜨거운 빛이 울렁이듯 맺히기 시작했다.

"잔챙이들은 관심 없어!"

"맹랑한 놈이군. 쓸모없는 기물은 존재하지 않지. 내 몸을 지켜라."

"예!" 에이전트 하나가 곧장 그랜드 마스터의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서 발로르의 중력 결계가 뻗어져나왔다. "그랜드 마스터 님은 내가 지킨다!"

"끼어들지 마!"

요아케가 소리를 내지르자, 광선은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쏘아져나갔다. 그러나 단단한 결계를 투과하며 힘이 한 소끔 약해진 빛줄기는 에이전트에게 약간의 상처밖에 입힐 수 없었다.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은 그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피해보아라!"

빗방울들이 화살처럼 응결하기 시작했지만, 민첩하게 움직인 오하라와 요아케를 맞추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이제 반사적인 동작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오하라가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피했… 다!"

"젠장, 날랜 놈들!"

"그런 걸로는 어림도 없어." 난 힘들었는데…! 저보다 훨씬 더 가뿐하게 피한 듯한 요아케의 말에 오하라는 속으로 외쳤다.

"자만하지 마라, 꼬맹이들아!"

"그쪽이야말로, 피해보시지!"

오하라가 처음보다 능숙하게 팔을 치켜들었다. 순식간에 요동치기 시작하는 사방의 기압에, 이번엔 그랜드 마스터로서도 뭔가 험악한게 덤빌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끈질기군! 나를 보호해라!"

발로르 신드롬의 에이전트가 다시 한번 그랜드 마스터의 앞을 막아섰다. 다른 에이전트는 어쩐지 저 혼자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림도 없지! 오하라는 온 힘을 다해, 아까의 기억을 살려 다시 한번 번개의 비를 내렸다. 강력한 전류가 모든 에이전트들에게 내리꽂히자 오하라의 얼굴에 자신만만함이 드리워졌다.

"못 피했네?"

"크아악!"

"으윽… 그랜드 마스터 님…."

단번에 쓰러지고 만 에이전트들을 내려다보며, 그랜드 마스터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꼬맹이들이 제법이군. 허나 겨우 이걸로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놈들이 내 계획을 망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보이지 않는 영역이 오하라와 요아케를 옭아매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 머리 위로 칼날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두 사람은 그 칼에 다시 한번 몸을 난도질 당했다. 이번에도 비명 한번 나오질 않았다. 간신히 또 정신을 차린 오하라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으으… 오늘 한 세 번은 죽고 다시 살아난 기분이야…."

"크하하!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이곳은 내 영역이다!"

"험악하네…."

요아케가 입 안으로 짓씹듯이 뇌까렸다. 서늘한 칼날은 몸에 넘치던 열기마저도 끊어놓는 것 같았다. 이런 무지막지한 녀석으로부터 지켜달라고 하다니, 요구가 좀 과한 거 아냐? 하지만 「안개꽃의 정원」은 그 말에 별다른 대답을 않았다. 어쩌면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일 것도 같았다.

"뭐, 비싼 보답은 이미 받은 듯 하니 됐어."

요아케는 제 곁의, 각성으로 인해 살아났을 오하라를 보며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덧붙였다. 요아케마저도 끈질기게 다시 일어나자 그랜드 마스터가 혀를 찼다.

"근성은 있군.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더 끌어다 쓸 잔챙이들은 없는 거지? 이제야 시계가 선명해지겠네. 기가 막힌 아픔을 준 데에 대한 보답으로 알려줄게. 내가 왜 『NOVA』라고 불리는지."

앞으로 나선 요아케가 손가락 대신 두 팔을 크게 앞으로 뻗었다. 목표물을 향해 곧고 넓게 뻗어진 팔은 이제 총이 아닌 일종의 포신처럼 보였다. 곧 그녀의 손 끝이 아닌 가슴 앞에, 녹아내릴 듯한 열기가 어린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침식으로 인해 초신성처럼 과열된 몸에서 터져나는 에너지. 깊은 밤마저도 여명으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빛의 덩어리를 보며, 오하라는 그것이 아주 눈부시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흥! 꼬맹이들이 날뛰어 봤자지!"

"간다아아아앗!!!"

빛의 규격을 정하듯, 요아케가 내뻗은 두 팔의 각도가 둔각으로 쩍 벌어졌다. 곧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거대한 빛줄기가 뻗어나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강렬한 광선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깨물었다.

"젠장! 어떻게 꼬맹이에게 이딴 힘이…!"

어깨가 꿰뚫리고 다리가 꺾였다. 그랜드 마스터는 반사적으로 피를 토해내며 이를 갈았다.

"이대로… 가만히 맞아줄 것 같으냐? 내 계획을… 망치도록 두지 않는다! 네 공격에 스스로 당해보아라!"

독기어린 일갈과 동시에, 별안간 그랜드 마스터 주변의 영역이 과격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요아케가 쏘아냈던 광선이 그대로 마스터를 통과하더니, 정반대로 방향을 틀어 요아케에게로 다시 되쏘아졌다. 피부를 찢는 통증에 요아케가 거친 날숨을 토했다.

"크으윽…!"

"아, 안 돼!" 

빛줄기에 휩싸이는 요아케를 본 오하라가 비명을 질렀지만, 요아케에게는 까무룩 넘어가는 의식의 저편에서 흐릿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뜨거운 빛에 휘말린 몸이 버적버적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전원이라도 꺼지듯, 요아케의 모든 감각이 차단되었다.


광염이 주는 고통은 기억도 나지 않을만치 아득하게 먼 기억들을 헤집었다. 아아…. 「이번」엔 정말 죽는걸까?

이를테면 시라비 요아케는 한번 죽었던 별이다. 조각나 산산이 흩어진 자신을 다시 태아별로 뭉쳐놓은건 UGN이라는 세계가 내재한 중력이었다. 정확히는 키리타니 유우고에 의한. 요아케는 자신이 각성한 계기도 거의 기억하지 못 했다. 지금 제 안에 일렁이며 저를 살아 숨쉬게 하는 바로 그 불과 빛에 숯덩이가 되어 타죽었었다는 사실조차, 우물 안 개구리의 오만함과 무모함만큼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자그마한 세계와 그 근간을 지탱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지금까지는 설령 임무를 수행하다 초신성처럼 불타 사라진다 해도 전혀 상관치 않고 살았다. 그러나, 지금.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태어나 처음으로, 요아케는 죽음이라는 관념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내가 이대로 죽어서, 나츠나기와 시치카를 구해주지 못하게 된다면…. 되받아쳐진 공격과 몸 안에서 몰아치는 침식의 과열이 영혼마저도 모조리 녹아내리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꺼져가는 불씨처럼 간신히 버티고 있던 요아케는, 결국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크하하하! 자기 공격에 자기가 당하는 기분은 어떠냐? 꼴 좋다! 네놈도 이 녀석과 함께 내 기계의 제물로 삼아주마!"

픽 쓰러지고 만 요아케를 비웃는 그랜드 마스터의 손이 마나를 가리켰다. 오하라는 요아케를 끊임없이 불렀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친구는 그대로였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있는 마나와 요아케를 번갈아 보던 오하라의 눈이 분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은 건 네놈 뿐이다! 내 계획을 막지 못할 거다!" 마나를 가리켰던 마스터의 손이 이번에는 오하라에게로 향했다. 

"너…. 그깟 계획이 뭐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너 같은 애송이는 막지 못한다!! 절대!!"

"천만에! 어떻게 해서든, 내 목숨을 다해서라도 그 계획이란 걸 막아줄게. 마지막 힘까지 짜내서라도, 기계 따위 망가트려 주겠어. 어쩌면 그걸 위해서… 나에게 번개 같은 힘이 깃든 게 아닐까?"

"각성한 지 얼마 안 됐나보군? 이깟 애송이가 나를 막겠다고?"

"자꾸 꼬맹이니 애송이니 하는데, 막아보고 그런 얘길 하던가!"

"내가 못 막을 것 같나?!"

오하라가 다시 두 손을 치켜들었을 때, 주변의 공간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려던 번개들의 일부가 잠시 흐트러졌지만, 그 뿐이었다. 침식의 영향으로 더욱 강해진 기압은, 작은 모략 따위엔 아랑곳 없이 더욱 기세 좋게 천지를 뒤흔들었다. 지상에 발 붙인 존재라면 누구라도 위압에 벌벌 떨게 만들 강하고 순수한 힘이 한계를 모르고 펼쳐지고 있었다.

"겨우 그걸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당신은 나를 막을 수 없고, 나는 당신을 막을 거야."

시커먼 먹구름 위로, 천둥이 큰 짐승의 숨소리처럼 점차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랜드 마스터에게는, 분에 차서 낮게 읊조리는 오하라의 목소리가 그것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전부 망쳐 줄게."

콰쾅!

적 주변의 공간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예로부터 인간들은 천둥과 번개를 절대자의 진노라 여겼다. 하늘에서 사정 봐주지 않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포악한 번개의 비는, 오하라의 격렬한 분노를 대변하듯 그에게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큭…! 젠장… ! 내가, 이런 애송이들에게… 내, 내 계획이…!"

기어코 버티려는 듯 하던 그랜드 마스터의 몸뚱아리는, 마지막으로 내리꽂히는 번개에 그대로 관통당하고 말았다. 곧 천천히, 그의 몸이 쓰러졌다.

적의 완전한 침묵을 확인한 오하라는 곧장 요아케에게 달려갔다.

"앗쨩! 죽으면 안 돼! 시…심폐소생술? 심폐소생술인가? 인공 호흡! 을 해야 하나?"

급기야 '번개의 힘을 잘 조절하면 AED처럼 쓸 수도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오하라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요아케는 눈도 뜨지 못한 채로 힘겹게 말부터 걸었다.

"…안 죽었어."

"괜찮아?! 정신이 든 거야? 일어날 수 있어? 죽는 줄 알았잖아아~!"

오하라는 이제 거의 울려 하고 있었지만, 요아케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전신에 힘은 하나도 없는데, 기분만큼은 묘하게 개운하다. 강렬한 빛에 오히려 소독되어버린 것처럼…. 오하라의 도움을 받아 몸을 추스리며 천천히 일어나 앉자, 그제서야 바닥에 흉하게 널브러진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고압 감전의 충격으로 사지를 뻗은 채 엎어져있는 그랜드 뭐시기였다.

"시치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앗쨩이 그 빔으로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놔서, 번개 몇 번 맞으니까 바로 저렇게 됐어! 다행이다, 무사해서…."

"그런 엄청난 일을 교내 고양이 목격담처럼 말하지 말아줄래…."

"그치만, 앗쨩의 「진심 빔」 덕분이었다구." 오하라는 요아케의 볼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일단 보이는 곳에 큰 부상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안심이 됐다.

"진심 빔이라니…."

"그… 그래서 앗쨩,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돼?"

일단 악역 같은 사람은 냅다 쓰러트렸는데, 이제 어쩌지? 오하라의 말에 요아케가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아까 버려두고 온 FH의 녀석들이나 여기 있는 녀석들은 차치하고, 학교의 교사나 학생들을 포함해 잡혀있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이 인원은 우리 둘이 어떻게 안 될 것 같은데, 지부에 연락을 해야겠네. 난 부수는건 해도, 옮기고 수습하고 이런건 못해."

"으응… 그래 보이긴 해…."

"…그래보여?"

나중에 그분한테도 그래보이는지 물어봐야지…. 요아케는 한숨을 푸우 내쉬고는, 핸드폰을 톡톡 두드려 구조 요청을 보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 시치카. 그…"

"응?"

"그… 음…."

요아케는 한참이나 입 안으로 말을 골랐다. 아마 예의상 하는 소리 빼고,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해보는게 퍽 낯설기 때문일 터였다.

"…고마워. 나 혼자였다면 이렇게 해내진 못했을 거야."

"…어? 어어?"

한참 뒤에야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 오하라의 눈이 어느 때보다도 둥글어졌다. 오하라는 요아케에게 달려들다시피 와락 껴안았다. 

"세상에, 앗쨩! 앗쨩이 나한테 고맙다고 했어! 고맙다고 말하는 얼굴, 완전 귀엽잖아!"

"새, 새삼스럽게…."

"응, 응! 나도 고마워!"

적의 공격보다도 격렬한 포옹을 당하느라, 요아케가 어찌저찌 적고 있던 구조 요청 메시지는 이렇게 발신되었다.

[ NOVA, 안개꽃의 정원, 사상이 우려되는 일반인이 다수라 지원이 필요ㅇㄴㄻㅅㄷㅈ!#$5 ]

그러나 메시지 위에는 여전히 발신 중이라는 표시만이 맴을 돌았다. 그러고 있을 무렵, 계속 들리던 기계 움직이는 소리가 서서히 멎었다. 모두 쓰러트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번개의 영향을 받아서? 그와 동시에 다시 「안개꽃의 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네.』

"아, 산신령님!"

오하라가 활짝 웃는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제 그 호칭에 대해 지적할 의지가 사라진 요아케는 조금 불만스런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만 있었다.

『특히 짧은 머리의 소녀여…. 자네를 살리기 위함이었다고 하나, 자네를 각성하게 만든 것은 가슴 깊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네. 미안하군.』

"각성… 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저를 살려주시지 않았다면 친구들을 구할 수도 없이 그대로 죽었을테니,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걸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군.』

레니게이드 비잉이 호흡을 할 리는 없었겠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인간이 깊은 숨을 들이는 만큼의 시간차가 있었다.

『어쩌면 알고 있겠지만, 나는 자네들이 「레니게이드 비잉」이라고 부르는 존재. 자력으로 예전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기는 힘들겠지. 지금까지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을 계속 헤매게 할거야. UGN… 이라고 하였던가. 자네들이 나를 정화시켜주었으면 하네.』

"그 부분은 걱정 마."

『…고맙군. 그럼… 잘 부탁하겠네.』

"그런데… 그래서 그 UGN이 뭐야 대체?"

"…얘기가 좀 길어지는데. 일단은 우리, 지금 수학여행 중이잖아. 여행이 끝나고 얘기해줄게."

"아, 응! 그렇네, 수학여행 중이었지. 앗쨩이랑 마나쨩이랑 원피스 입고… 마나쨩?! 마나쨩은 괜찮은 거야?!"

마나는 아까와 다름없이 기계 장치 근처에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달려가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워보았다. 마나의 안색은 아직 창백했지만, 요아케가 눈으로 열기를 감지해보니 상태가 나쁘지는 않아보였다. 요아케의 얼굴에 희미하게 안도하는 표정이 드리워졌다.

"마나쨩, 마나쨩, 일어나!"

"윽…. 하라쨩?! 아케쨩도?! 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냐면…" 이걸 어떻게 설명한담? 결국 둘러댈 말을 정리하지 못한 오하라가 좀 도와달라는 듯 요아케에게 눈짓했다.

"좀 사고가 있었지."

"응? 응, 응. 사고가 있었지."

"두 사람이… 구하러 와 준 거야?"

"응, 앗쨩이 엄청나게 도와줬어!"

선생들과 학생들을 포함해, 이번 사건에 대한 마나의 기억은 아마 어느 정도는 「처리반」에서 조작하거나 삭제할 것이다. 그러니 뭐, 지금 정도는 괜찮은가? 모처럼 변덕이 든 요아케는 나름 생색을 내보기로 했다.

"시시한 아저씨들이었거든."

"앗쨩이 엄청나게 마나쨩을 걱정했다구?"

"아, 안 그랬는데??"

"저, 정말…? 둘 다 고마워! 엄청, 엄청 좋아해!"

마나가 두 사람을 와락 껴안자, 오하라도 탄성을 지르며 마나와 요아케를 꼬옥 껴안았다. 아직 만신창이 상태에서 회복이 덜 된 요아케는 앓는 소리를 냈다. 어른들 말로 하면 삭신이 쑤셨다.

"무서웠는데… 두 사람이 와 줘서, 진짜진짜 다행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졸리지…."

긴장이 풀려서일까? 힘없이 웅얼거리던 마나의 고개가 스르르, 두 사람에게 기대어졌다. 가벼이 잠에 든 건지, 색색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요아케의 핸드폰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전화가 오고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통신이 정상화된 모양이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조 요청도 정상 발신되었을 듯 했다. UGN의 처리반이려나? 무심코 감흥 없이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요아케가 우뚝 경직되었다.

123abc오십음순으로 정렬이 되는 전화번호부에서, 항상 가장 위로 올라와있도록 일부러 저장한 이름. 「1」이라고만 쓰여진 발신자의 이름을 보자마자, 요아케는 부산스럽게 흙 끄는 소리를 내더니 맨바닥에 정좌했다. 급기야 목소리까지 큼큼 가다듬은 뒤에야 겨우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NOVA』 입니다."

"『NOVA』! 간신히 연락이 닿았군요. 한동안 일대에 모든 연락망이 파괴된 것처럼 통신이 불가했습니다. 당신이 보낸 연락 덕분에, 처리반이 이동 중입니다."

"토, 통신 불가 상태였는데, 방금 보내졌나보네요."

"예, 임무를 무사히 해결한 모양이군요. 수고했습니다."

전화 너머로 키리타니 유우고의 엷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귓바퀴가 화끈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서, 요아케는 갑자기 얼굴에서 전화를 확 뗐다가 아주 천천히 다시 가져왔다. 저런 반응은 과자를 먹였을 때나 전투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생소한 광경이었기에, 오하라는 흥미롭게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임무의 완수 말입니다만. 현장에서 발생한 특이사항으로 보고드릴 건이 있습니다."

"특이사항이라면? 급한 일입니까?"

키리타니의 물음에 요아케는 눈만 돌려 오하라를 슬쩍 보았다가, 눈이 마주치기 전에 급하게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렸다.

"급하다면, 급할지도요…."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보고는 추후 하셔도 됩니다. …고생하셨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NOVA.』"

통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단지 형식적인 확인차 해온 전화란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요아케는 호흡을 한참이나 가라앉힌 뒤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곧 UGN의 처리반이 도착할 테고, 상황도 다 정리될 것이다. 각자 한숨을 돌린 오하라와 요아케는 잠시 시선을 교환하며 웃었다. 갑작스레 이런저런 사건들이 있었지만, 아직 두 사람에게는 해야 하는 일이 더 남아있었다. 어쨌든, 이 여행은 특별한「수학여행」이니까.


그 사건으로부터 일주일. 오하라와 요아케는 키리타니 유우고의 부름을 받아 지부장실에 방문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당일의 오하라는 어쩐지 누구보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오셨군요, 두 분."

"네, 네에, 안녕하세요…."

"우선 앉으시죠. 오늘 두 분을 부른 건,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입니다."

익숙한 일인 듯, 요아케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와선 키리타니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하라는 요아케의 뒤로 쭈삣쭈삣 따라가선 그 옆에 앉았다.

"시치카 오하라 씨…. 당신은 「안개꽃의 정원」의 능력으로 인해 오버드로 각성했다고 들었습니다. 오버드의 삶을 시작하게 되면, 당신이 맞닥뜨렸던 FH라는 조직을 포함해 여러가지 위험이 닥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UGN에서 보호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리바이어선』 키리타니 유우고. UGN─ 즉, 유니버셜 가디언즈 네트워크의 일본 지부장입니다."

키리타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요아케에게는 『리바이어선』이 코드네임을 말할 때마다 잠시 눈을 내리감는 버릇이 있었다. 그 이름이 가져다주는 울림은 언제나 깊은 파도처럼 느껴졌다. 오하라는 무언가 감상에 빠진 듯 보이는 요아케를 슬쩍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앗쨩… 아니, 요아케, 아니, 『NOVA』에게 많이 들었어요."

"하하, 전처럼 부르셔도 됩니다. 두 분이 친하신 것 같아서 보기 좋군요."

"어…."

「친하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짚어야 할지, 「보기 좋다」는 이야기를 짚어야 할지 고민하던 요아케는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수학여행 내내, 그 통화한 사람은 누구냐며 끈질기게 물어오는 오하라에게 마지못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다 듣더니 무언가 커다란 오해를 하려 드는걸 정정해주는 데에 체력을 쓴 것만으로도 이미 진이 꽤나 빠져있었다.

"저에 대해 들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 쪽의 칠드런이 되어주시겠다고 하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응, 응. 앗쨩이랑 친하지, 보기도 좋지. 이 지부장이라는 사람은 과연 듣던대로 통찰력이 좋은 분 같았다. 그러나 그 제안을 바로 덥석 받아들이기엔, 오하라에게는 걱정이 되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그래서 지난 며칠 동안 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했던 이야기들을 슬쩍 꺼내놓았다.

"그… 칠드런이 되면, 지금의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거나, 가족과 만날 수 없다거나, 그런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치카 씨에게도 일상이 있을 테니까요. 그저 UGN 소속이 되어 보호를 받고, 레니게이드를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앗쨩이랑 같이 일하게 되는 건가요?"

"원하신다면요. 같은 학교에 다니시니, 같은 구역 소속이 되겠군요."

"네, 그러면 좋아요!"

거의 시간차도 없이 덥석 수락을 하는 오하라의 대답을 듣자마자, 요아케가 키리타니의 앞인 것도 잊고 당황한 손발짓을 하며 물었다.

"그, 그렇게 단번에 결정하는 거야?"

"앗쨩이 있는 데가 나쁠 리가 없잖아~!"

"물론, 나는 환경에 불만 없지만…." 요아케는 의식적으로 어색하게, 키리타니가 있는 정면이 아닌 쪽에다 시선을 놓았다.

"그것이 당신의 선택이군요. 감사합니다, 시치카 씨." 엷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키리타니가 문득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나츠나기 마나 씨는 여러분의 친구였죠."

"마나쨩은 괜찮나요?!"

"네. 괜찮으시다면 한번 병문안을 가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시치카 오하라 씨."

"네, 잘 부탁드립니다! 앗쨩도 잘 부탁해."

오하라가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가만히 맞잡으며, 요아케는 일전의 「고맙다」는 말 이후로 한번도 하지 않았던 다른 말을 다시 한번 입에 담았다. 여지껏 남에게 진심으로 건네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잘 부탁해."

시치카 오하라는, 그렇게 UGN에 소속되기로 결정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친구라고만 생각했던 아이는, 어느덧 순식간에 「동류」로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요아케와 함께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때처럼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믿음이 있었다. 이는 지금껏 줄곧 홀로 싸우기만을 고집해온 요아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바깥의 희미한 원경에 불과하던 이가, 어느새 등을 맞댈 수 있는 동료가 되다니. 비일상의 세계에 발을 들인 뒤의 나날들은 순탄치만은 않겠지만, 곁을 지켜줄 친구가 있다면 마냥 외롭지만은 않은 길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나가 퇴원하는 날이 되었다. 오하라와 요아케는 매일같이 마나에게 병문안을 갔었다. 그럼에도 오늘 만나는 그녀는 어제보다 더욱 건강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언제 그런 일을 겪은 적 있었냐는 듯이 힘차게 달려온 마나는,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어 팔짱을 꼈다.

"기다렸지, 둘 다! 나 이제 건강해. 퇴원날에도 와 줘서 고마워!”

"응! 마나쨩, 건강해 보여서 좋네!"

"건강해 보이네…." 무력이 담긴 돌진 같은 과격한 팔짱에 요아케의 몸이 한차례 힘없이 휘청거렸다.

"완전 튼튼! 완전 회복!"

"드디어 마나쨩이 돌아왔다!"

오하라와 함께 발을 구르며 마냥 까르륵 웃던 마나는, 미완의 수학여행이 남긴 아쉬움에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수학여행 완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그… 런 일이 다 있었지. 뭐, 뭐였을까?"

이제 막 UGN의 칠드런이 된 오하라로서는, 마나의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조작되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다시 한번 요아케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길을 보냈다. 요아케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귀를 좀 더 기울이면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려올 것만 같았다.

"그… 런 일이 있었지. 꽃 구경을 한다고 차에서 내렸다가 발을 헛디뎌서 엄청 길지만 별로 치명상의 위험은 없는 언덕길을 열다섯 번 구른 뒤 정신을 잃을 줄이야…."

"그, 그러게…." 허무맹랑하지만 어떻게든 둘러대진 내용에, 오하라가 들리지 않게 파르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거기는 진짜 안전했으니까. 안개꽃이 엄청… 많았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말이 돼? 그치만… 두 사람이 구하러 와 줘서, …그러니까, 다행이었어."

기억의 일부가 걷어내진 일반인이 그 상황에 대해 떠올리려고 들 때, 한동안은 머릿속의 빈 칸 탓에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런 이상행동을 보는게 익숙한 일이라는 듯, 요아케는 다시 반대쪽으로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대신 오하라가 표정이 어두워진 마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앗쨩이랑 마나쨩 일이라면, 언제라도, 무슨 일이라도 달려갈테니까!"

"역시 너희밖에 없다니까~~~!"

다른 의미로 지극히 진심이 담긴 오하라의 말에, 한껏 풀이 죽어있던 마나는 감동한 듯 눈을 깜박였다. 역시 슬퍼하는 얼굴보다는 밝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오하라는 기다렸다는 듯 마나가 기뻐할 말을 이었다.

"헷헤에~ 그런 김에, 오늘은 마나쨩 퇴원 기념 카페 투어라도 가 볼까!"

"엇, 그거 내 대사였는데!"

"「투어」라니, 몇 군데를 가는 거지?"

"일단, 가볍게 세 군데로 시작?"

"완전 좋아!"

"세 군데는 가볍지 않아."

"에에~! 오늘은 내 퇴원날인데?!"

"그래, 그럼 무겁게 다섯 군데~!"

"무거워!"

요아케는 여태까지 중에 가장 단호한 얼굴로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오하라와 마나는 좀처럼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라쨩, 최고!"

"가자, 가자~!"

"응, 응! 출발~!"

요아케의 발버둥에도 아랑곳 없이, 세 사람은 들뜬 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환하고 눈부신 햇살이 모두의 머리 위로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밝게 웃음짓고 있는 마나의 얼굴을 보며, 오하라와 요아케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아, 이것이 우리가 지켜낸 일상이구나.

조금은 특별한 삶의 경계에서, 두 사람은 오늘도 일상을 지켜내고 있다.


그전부터 (심지어는 CoC 입문탁에서부터) 어떤 탁이나 어떤 룰이든 플레이 로그를 글로 써보겠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시날 하나 갔다오면 아 재밌었지! 하고 드러누워버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가... 덥크는 아무래도 이런 형태로 기록을 남기는게 좋겠단 생각이 들어서 덥석? 써버렸네요

근데 하 현생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2주), 입문용 시나리오에 긴 플탐이 아니었는데 이유없이 글이 엄청 길어져서... 질소포장이 약간 된 백합맛 입문탁 리플레이 드셔보실? 물론 약간의 허위 소스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하고 같장르는 안 해도 같룰은 해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스니다 ㄳ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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