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태섭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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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대운 태섭대만 쁘띠존 신간입니다.

  • 태섭대만이 사귀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 열린 결말처럼

영원할 순 없나 봐

어디서부터 어긋나 버린 걸까

난 여기 있는데

너와 나의 사랑

그 뒷이야기를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_LUCY,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형, 나 소원 하나만 들어줘요.”

녀석의 전화를 받고 내가 당황한 까닭은 첫째로 졸업한 선배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는 녀석의 기억력이었고 둘째는 처연하게 떨리는 목소리였으며, 세 번째는 그 내용이었다. 세상에 두려울 거 하나 없는 것처럼 잘 포장하는 녀석이 웬일로, 그것도 근 1년 간 연락이 전무했던 졸업생에게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서는 소원 하나만 들어달라고 하다니. 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일이 있겠거니 싶어 그 흔한 안부인사나 걱정도 생략하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소원인데? 한편으로는 내가 1년 전에 쟤한테 무슨 내기를 했던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나도 저 녀석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서로 잘 지내고 있는지 묻는 것도 새까맣게 잊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별말없이 소원을 들어주겠다 나선 것일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으나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반가워지는 사람이었기에.

“나 눈 보고 싶어요.”

한참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녀석이 한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눈, 하면 역시 삿포로지만. 애석하게도 겨울인 지금 삿포로를 비롯한 훗카이도 전역은 최대 성수기였다. 한마디로 비행기표는 물론이고, 숙소조차 만석이었다. 애초에 걔한테 여권이 있을지도 모르겠고―내 개인적인 추측이었는데, 후일 어떤 경로를 통해 여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삿포로는 갈 수 없지만, 강원도는 갈 수 있다. 나는 바로 인천에서 강릉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끊었다. 렌트카 대여 예약도 잊지 않았다. 표 사진을 첨부해 메시지로 보냈다. 잠시 후 태섭은 알았다며, 그 날 만나자고 답장을 보냈다. 읽은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수학여행이야 많이 가봤지만, 누군가와 단둘이 여행을 떠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상대는 전날 심하게 부딪치고 깨져보기도 했던 한 살 아래 후배. 대체 왜 하필 나한테 눈을 보러 가자고 했을까 싶으면서도,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나를 찾았다는 사실에 묘하게 불쾌한 뿌듯함도 밀려왔다.

그런데 정말, 왜 하필 나였을까. 운동을 마치고 나서도, 씻고 누운 뒤에도 의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렇게 뒤늦게 신경 쓰일 줄 알았으면 진작 전화를 받았을 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라도 할걸. 그러나 태섭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체 그런 성격으로 타고난 녀석이었다. 폭발 직전까지 제가 쌓아둔 것을 보여주지 않는 놈, 터트릴 때에도 대체 무엇 때문에 터진 건지 아무도 알 수 없게 감추는 놈. 좀 은근슬쩍 드러내면 어디 덧나나. 영 못 미더운 선배인 건 맞지만 위로 정도는 나도 해줄 수 있는데. 괜히 서운해져서 그날은 일찍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만 또렷해질 뿐이었다.

가끔은 세상이 농구 코트로 되어 있고, 농구 규칙만 적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저 얄미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갈피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눈빛만 봐도 저녀석이 어떻게 패스할 것인지 알아챌 수 있는 그 농구코트처럼, 평소에도 그 작은 머리로 굴리는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일주일 뒤 녀석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인천역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각에 도착한 나는 숏패딩에 앵클 부츠에, 아주 꼼꼼하게 챙겨입은 녀석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많이 기다렸느냐고 물으니 3분 전에 왔단다. 10분 5분도 아니고 3분이라니. 세상을 삐딱하게 대하는 녀석답게 어딘가 반항기가 보이는 시간이었다. 다행히 강릉은 어제 눈이 한가득 와 온세상이 하얗게 보일 지경이라고 한다. 혹시라도 날이 따뜻해 공치면 어쩌나 싶었는데, 덕분에 눈은 원없이 보여줄 수 있을 듯해 마음이 가벼웠다.

플랫폼으로 들어가자마자 안내방송이 울렸다. 잠시 후 강릉행 열차가 들어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선…. 뒤에선 안내요원이 노란선 안으로 들어가라며 사납게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기 직전, 나는 태섭을 쳐다보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또 눈이야?”

기차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태섭은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먼저 올라가고, 태섭의 캐리어를 받았다. 태섭이 마지막으로 기차에 오르면서 대꾸했다.

“보고 싶으니까 보러 가자고 했죠.”

답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 앉은 태섭은 외투를 선반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고향이 남쪽이라서, 눈 구경을 잘 못했거든요. 나는 순간적으로 태섭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태섭의 고향이 남쪽이긴 하지만, 부산이나 대구가 아닌 제주도인 건 알고 있었다. 겨울 합숙훈련 때였나, 심심해서 틀어놓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사투리 알아맞히기 문제가 나왔는데 제주도 사투리가 나왔다. 모두가 헤매는데 별 관심 없다는 듯 누워 있던 태섭이 정답을 맞췄다. 송꼬마, 어케 안 거야?! 백호가 묻자 그 껄렁해 보이는 얼굴만큼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 거기 살았거든요.

제주도가 눈이 얼마나 많이 오는데. 태섭은 아무래도 제가 그때 일을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정작 나 역시 태섭의 거짓말을 정정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 자식아, 너 저번에는 제주도에서 살았다며, 라고 장난처럼 면박을 줄 수도 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난 태섭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나 보다. 태섭은 그런 사람이었다. 피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둘러대기보다는 침묵함으로써 단단한 벽을 쌓고, 까마득히 높은 구멍 밖으로 고개만 내민 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저 복잡한 녀석이 저지른 변덕에 적당히 맞장구 쳐주기로 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본 태섭의 눈밑이 거뭇했다. 여행 때문에 제대로 못 잔 걸까. 아니면 최근 윈터컵 때문에 편히 자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오래만에 태섭에게 그럴듯한 형 노릇을 할까 싶어 손을 드는데, 놈이 먼저 몸을 빼버렸다. 이게, 줄 때 감사히 받아야지. 짧게 혀를 찬 뒤 억지로 어깨에 기대게 했다. 태섭의 온몸이 잔뜩 굳는 게 느껴졌다. 아니, 이게 그렇게 싫을 일이냐. 조금 억울한 마음을 담아 머리를 토닥이면서 말했다.

“좀 자 둬라. 한두 시간 정도 시간 있으니까.”

그제야 태섭은 몸에서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고른 숨소리가 지척에서 들렸으나 깊게 잠들진 못했는지 태섭은 몇 번이나 뒤척이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애써 무시하며 나도 따라 눈을 붙였다. 그러나 한 시간 반은 충분한 수면을 취하기엔 조금 부족한 시간이었다.

도착했을 땐 하얗게 변한 강릉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이런 살인적인 폭설에 차를 몰고 안전하게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나가는 가게마다 <금일 휴업>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그래도 이왕 강릉에 온 거, 경포대나 정동진이라도 구경하고 가야지 싶었는데, 그쪽으로 가는 버스도 죄다 연착이었다. 눈이 많이 오는 게 그닥 좋은 게 아니구나.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우리는 눈만 멀뚱히 끔뻑댔다. 내가 먼저 물었다.

“그냥 숙소 갈까?”

“그래야겠는데요.”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택시를 겨우 잡아 민박집으로 들어갔다. 주인 아주머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고생했다며 불을 뜨끈하게 넣은 방으로 우리를 밀어넣었다. 잠시 후 따뜻한 식혜가 방으로 들어왔다. 계피를 넣어 쌉싸름한 맛이 났다. 문 맞은편 벽, 꽤 큰 창문으로 눈이 펄펄 내리는 강릉의 풍경이 보였다. 그래도 민박집이 바다 근처라 다행이었다. 눈 내리는 한겨울 바다는 아름다웠다.

“눈은 원없이 보고 가겠네.”

아이스 브레이킹이라도 할 요령으로 입을 열었으나 바깥보다 더 냉랭한 분위기는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태섭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눈 내리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해둔 채였다. 머쓱함에 식혜만 홀짝였다. 뭐 좀 더, 할 만한 이야기 없나. 그렇다고 윈터컵 이야기를 꺼내면 좀 화낼 거 같은데.

북산은 올해 윈터컵에서 4강에 그쳤다. 8강 경기에서 손목 부상을 입은 태섭이 결장해버린 탓이었다. 그리고 북산은 예나 지금이나, 태섭만 한 포인트가드가 없었다. 결국 북사는 68 대 93이라는 점수 차로 물러나고 말았다.

설마 이 녀석, 자기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슬그머니 태섭을 보았다. 이대로 영영 눈에 묻혀 죽으려는 셈은 아니겠지? 마음이 불안하니 오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생각을 그대로 묻어두는 편이 아니었기에, 소리 내 말하고 말았다.

“윈터컵은…, 좀 아까웠다.”

태섭이 옅게 웃었다. 올해 북산은 8강에서 탈락했다. 딱 짚어 무언가 하나가 문제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8강에서 백호의 컨디션이 최상이 아니었고, 상대가 수비를 잘 해 태섭이 패스를 굴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산의 플레이가 안 좋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녀석들은 그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실제로 점수도 70점 이상 냈다. 상대가 더 잘했다고 봐야겠다.

태섭이 뜨뜻한 식혜를 마셨다.

“네에,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내가 먼저 물꼬를 터줘서 마음이 편해졌는지 다리를 쭉 폈다. 태섭은 입으로 직접 말하는 일이 없었다. 대신 이렇게 무의식적인 몸짓으로 보여줄 때가 많았다. 긴장될 때는 볼을 크게 부풀려 심호흡을 하고, 집중해야 할 때는 손바닥을 본다. 무서울 때는 주먹을 주머니 안에 넣고, 마음이 편할 때는 지금처럼, 다리를 쭉 펴고 벽에 기대 눕듯이 앉는다. 이런 시그널을 발견할 때마다 남몰래 뿌듯해하곤 했다.

윈터컵 이야기를 하고 나니 대화거리가 뚝 떨어졌다. 대학 이야기라도 해야 할까 싶었는데 태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눈 보고 싶다는 말은 사실이었어요.”

그럴 줄 알았다. 너는 거짓말을 하기보단 입을 다물고 피해버리는 쪽이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피하기 위한 침묵이 아니었다. 태섭이 파르르 떨리는 숨을 뱉었다. 뒤이은 말은 조금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마, 한동안 못 볼 수도 있어서.”

한동안 못 본다니? 부산이나 대구 쪽 대학에 붙었나? 이런 상상을 하면서 슬며시 떠보았다.

“뭐, 어디 남쪽 나라라도 가냐?”

“음, 그보다는 사막이려나.”

“사막?”

나는 천장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나라 사막은 없을 텐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태섭이 옅게 웃더니 나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저, 미국 갈지도 몰라요. 거긴 사막 지역이라 눈이 안 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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