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와 보디가드

태섭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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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합작

“야, 정대만. 의뢰 들어왔다.”

용이 대만의 허름한 8평짜리 월셋방 문을 거칠게 열면서 들어왔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대만은 불청객에 얼굴에 덮어놓고 있던 잡지를 치우며 오만 성질을 부렸다.

“야 개새끼야, 문 따고 들어오지 말랬지. 이 새끼는 노크하는 법을 몰라.”

“아니 뭐 말만 들으면 니가 제때제때 문 열어준 줄 알겠네. 됐고, 일 들어왔다고. 밥값 해야지.”

용이 손을 까딱이며 대만을 재촉했다. 대만은 수척해진 얼굴로 용을 한 번 째려고보는, ‘10분 만 기다려라’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참 난리를 피우는가 싶더니 화장실 문이 열리자 멀끔한 미남이 등장했다. 방금 전 드문드문 난 수염 때문에 더 초췌해 보이던 인상은 어디로 가고, 방금 막 깐 계란처럼 깔끔하고 남자다운 얼굴이 작은 방을 훤히 비추었다. 못 볼 꼴 봤네, 용은 고개를 휙 돌렸다.

대만은 오른쪽 옷장을 열었다. 색 바래고 먼지가 쌓인 정장 두세 벌이 걸려 있었다. 대만은 고민하다가 맨 끄트머리에 있는 짙은 녹색 정장을 꺼냈다. 미리 다리지 않아 조금 꾸깃꾸깃한 와이셔츠를 걸치고(와중에 셔츠가터는 또 깔끔하게 채운다. 용은 또 못 볼 꼴을 봤다며 고개를 돌렸다) 차례로 양말과 바지, 재킷을 걸친다. 보통 사람이라면 으레 멜 넥타이는 가볍게 건너뛴다.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대만이 시큰둥한 얼굴로 용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장소는?”

“여기에서 멀지 않아. 내 차 타고 갈 거야.”

“니 차 똥냄새 나서 싫은데.”

“그럼 니 혼자 걸어가든가. 대신 어딘지 안 가르쳐줄 거다.”

“매정한 새끼.”

홀스터와 권총을 챙긴 대만은 신발장에서 마찬가지로 먼지 쌓인 구두를 꺼냈다.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고, 뒷축을 구기지 않도록 주의하며 발을 밀어넣었다. 씁, 그세 발이 커졌나? 대만의 말도 안 되는 중얼거림을 뒤로 하고 용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서 있기에는 좁은 현관 탓이었다.

“아 새꺄 니가 문 다 따고 들어와서 도둑 들면 어쩔 건데.”

“뭐 어쩌라고. 그러게 평소에 노크하면 따박따박 열어주지 그랬냐.”

“넌 의뢰 끝나면 내 손에 뒤졌다 새끼야.”

“해보시든가요 왕년 S 클래스 보디가드 님.”

용이 대만의 역린을 긁자 그의 이마 위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용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끝도 없이 이어진 녹슨 철제 계단을 내려갔다. 대만은 사이가 떨어져 있어 아래가 훤히 보이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면서 뭐라고 투덜댔으나 용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의 각지고 허름한 그랜저를 타고(대만은 분명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골동품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들은 슬럼가와 대로를 빠져나와 외곽으로 한참 들어갔다. 멀지 않다더니 졸라 돌아가네. 뒷좌석에 앉아 조수석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대만을 중얼거렸다. 그렇다는 건 이번 고객이 대중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VIP라는 거지. 대만은 냉철하게 생각하고는 권총을 확인했다.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자 용이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끔대면서 경고했다.

“여기에서 시험한답시고 총 쏘지 마라 미친 놈아.”

“내가 언제 그랬다고.”

“씨바 삼 개월 전에 그랬다 왜!”

“아 맞다, 탄피가 낀 거 같다고 니 운전석 쪽 좌석에 대고 쐈지.”

“그리고 교체비도 안 내고. 개새끼가.”

“아 이번에 크게 한탕하면 갚을게. 됐냐? 쪼잔한 새끼.”

복수라도 하려는 듯이 용이 급정거를 했다. 안전벨트를 메지 않고 있던 대만은 그대로 조수석에 머리를 박았다. 운전 똑바로 안 하냐고 윽박지르려던 대만은 곧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접선 장소는 녹이 슬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된 거대한 컨테이너 창고였다. 몇 십 년 전 창고 대여 서비스를 하던 지역이었는데, 대부분의 주민이 이사를 가면서 그대로 방치되었다. 이만큼 이 지역에 무언가를 숨기기 딱 좋은 곳이 있을까.

대만은 천천히 차에서 내려 용을 따라갔다. 컨테이너를 볼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베테랑 보디가드인 만큼 대만은 직감이나 육감도 좋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의뢰는 순탄하게 흘러갈 것 같지 않다. 아무리 VIP라도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진 셀레브리티라면 그의 회사나 좀 더 제대로 된 숙소에서 미팅을 갖지, 버려진 외곽지에서 접선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험한 인물, 이것밖에는 없다.

그들은 ‘17-14 ㅌ’이라는 팻말이 걸린 컨테이너로 다가갔다. 용이 두 번 빠르게 노크를 했다가, 세 번 끊어서 노크를 하더니, 그 다음에는 느리게 두 번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 있던 사람이 신호를 확인하고는 문을 열었다. 용의 눈을 확인한 사람은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만 문을 더 열었다. 용이 먼저 들어가고, 그 다음으로 대만이 입장했다. 입구에 서 있던 사람이 활짝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잘 지냈냐? 대만아.”

“오, 영걸이다. 이제야 편하게 대화가 가능하겠네.”

영걸은 대만이 마이너 등급으로 떨어진 후부터 7년 간 곁에서 보좌해준 에이전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대만을 퇴물이라고 할 때도 변함없이 신뢰를 보여준 사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장 편한 건 대만이 친 사고를 군말없이 수습해준다는 점이다. 저 불평불만만 많은 김용과 다르게.

“그래서, 이번에 보호할 사람은 누구야?”

“저기, 놀라지 말고 들어줘. 이번에 네가 보디가드해야 하는 사람은 말야….”

“어, 오랜만입니다. 정대만 보디가드님.”

아, 씨발. 딱 네 마디 듣자마자 대만의 머리로 열이 몰렸다. 대만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안쪽을 보았다. 노란 백열전구 하나 달랑 켜져 있는 칸테이너 안. 그 불빛에 비친 모습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면상이었다.

“씨발, 이영걸 너 미쳤냐?”

대만은 바로 영걸의 멱살을 잡고 따졌다. 영걸은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미안해, 네가 송태섭에게 무슨 감정 갖고 있는지 알아.”

“아주 개 같은 감정을 갖고 있겠죠.”

“씨발, 대가리에 바람구멍 나고 싶냐?”

“안 돼, 쟤가 네가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그게 뭔 정신나간 개소리야?”

“개소리가 아니라 진짭니다. 아쉽게 됐네요.”

미친 개마냥 왁왁대는 대만과 달리 태섭은 차분하게 말을 하며 대만에게 다가왔다. 대만은 핏대가 선 눈으로 태섭을 똑바로 노려봤다. 송태섭, 7년 전 임무 완수 직전에 대만의 의뢰인을 저격해 그를 마이너 등급으로 떨어트린 장본인. 불과 열네 살부터 킬러 일을 하며 이 바닥에서 온갖 악명을 쌓아올린 미친 개. 보디가드 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다들 송태섭 석 자 듣고 치를 떨겠지만, 대만은 그 수준이 다르다. 그 추락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 녀석을 호위해야 한다고? 내가 저놈의 어디가 예쁘다고? 차라리 차 끌고 그랜드캐니언에서 뛰어내려 화끈하게 죽을련다. 대만은 카악, 하고 목 긁는 소리를 내며 걸쭉하게 가래를 뱉었다. 지저분하게 바닥에 달라붙어 먼지와 뒹구는 꼴이 꼭 저와 같았다.

대만이 저를 보고 눈이 뒤집혀져 지랄을 하고 칼춤을 추든 말든 태섭은 덤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그는 특유의 짝짝이 갈매기 눈썹을 들어올리더니 아까와는 다르게 싸늘하게 말을 뱉었다.

“저라고 당신에게 보호받고 싶겠습니까?”

“말 다했냐 개새끼야?”

대만이 바로 눈을 희번덕 뜨며 욕설을 뱉었다. 태섭은 족히 한 시간 이상 매만진 듯한 머리를 거칠게 헤집더니 영걸에게 애먼 화풀이를 시작했다.

“아니, 왜 하필 정대만인데! 이거 나 욕 처먹으라고 이러나? 나도 댁 면상 맞대고 하하호호 하고 싶지 않거든?”

“야 이영걸 빨리 차 가져와라 나 쟤랑 같이 절벽에서 맨몸 번지점프 하고 오게.”

“그, 그러면 안 돼 대만아! 송태섭은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증인으로 출석해야 한다고!”

영걸이 기겁하면서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험악한 인상치곤 주먹질을 못 하는 이영걸이지만 황소만 한 덩치는 송태섭도, 정대만도 막기 벅차다. 얼굴 마주치자마자 으르렁거리기 바빴던 그들은 영걸을 가운데 두고 겨우 휴전에 들어갔다. 대만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영걸을 노려보면서 물었다.

“전범재판소 증인? 자수했대?”

“저 말고요 등신아. 로바니 전 육군참모총장이라고 아시나?”

로바니 전 육군참모총장. 구유고슬로비아의 장군 중 하나로, 대만의 기억이 맞다면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을 겪었던 사람이다. 1991년부터 시작되어 2001년까지, 장장 10년 동안 이어졌던 유고슬라이바 전쟁은 먼 한국에 사는 정대만도 기억할 만큼 강렬하고 잔인했다. 대만은 짝다리를 짚은 채 태섭을 노려봤다.

“그 양반이 왜?”

“크로아티아 내전 당시 민간에 숨은 독립군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민간인 약 100여 명을 저격하고, 그 중 20명은 생포해서 고문해 죽였다는 혐의로 제소되었어. 그걸 고발하고 증인으로 출석하겠다 자처한 사람이 송태섭이고.”

“엉? 말도 안 되는데. 내가 22살일 때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현장에 쟤가 있었다고?”

대만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태섭을 가리켰다. 태섭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저 당신이랑 고작 한 살 차이거든요. 아, 경력으로 따지면 내가 당신보다 선배겠네.”

“그래 선배면서 존댓말은 그렇게 코딱지로 배웠냐.”

두 사람은 사정을 설명하는 도중에도 계속 말싸움을 했다. 영걸은 한숨을 쉬고는 혼자 꿋꿋하게 설명했다.

“아무튼, 그때 송태섭을 비롯한 일부 킬러는 로바니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고용되어 민간인과 독립군의 참모를 살해했다고 증언했어. 유엔이 설득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영걸의 말은 조금 흥미 있었다. 지 혼자 잘 살 거 같은 녀석이, 아니 그 전에 인생 좆박은 누구랑 다르게 킬러로 잘만 나가고 있는 녀석이 뭐가 아쉬워서 전 의뢰인을 고발해? 대만의 의문스러운 눈빛을 받은 태섭은 갑자기 얼궁를 확 일그러뜨리더니, 제가 앉아 있던 의자를 걷어찼다. 돌발행동에 대만이 적절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녀석은 혼자 씩씩대면서 뭐라고 뱉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씨발 그 자식이 먼저 통수를 쳤다고!”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대만은 물론 영걸과 시큰둥하게 쳐다보고 있던 용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태섭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쓰러진 의자를 몇 번 발로 콱콱 차더니 매섭게 대만을 휙 돌아봤다. 이마에 돋은 핏줄을 보았을 때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태섭은 누구에게 지르는지 모를 고함을 때렸다.

“난 불 생각도 없었는데 그 개자식이 내 동생을 인질로 잡아서 수용소에 박아버렸잖아!”

“오, 그건 개새끼가 맞다.”

기껏 편을 들어줬더니 닥치라는 매정한 말만 돌아왔다. 대만은 풀이 죽으면서도, ‘아니 왜 나한테 화를 내는데?’ 하면서 열이 받았다. 태섭은 깊이 숨을 내쉬고 진정한 듯 평소의 삐딱한 표정으로 대만 일행을 쳐다봤다.

“아무튼, 그래서 증언을 결정한 겁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대신 임무에 하나 더 추가하도록 하죠.”

“또 뭘 추가해?”

대만은 귀찮다는 얼굴로 태섭을 보며 팔짱을 꼈다. 설마 수용소에 갖힌 동생을 탈출시켜 달라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건 내 전문 아닌데. 떨떠름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태섭은 대만이 예상한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했다.

“여동생의 안전을 먼저 확인하고 재판소로 향하겠습니다. 이거 지키지 않으면 나도 바로 이 자리에서 계약 끊어버리고요.”

“돌았냐? 내가 왜 네 여동생까지 챙겨야 해.”

바로 영걸과 용이 대만의 입을 막기 위해 출동했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와중에 대만은 제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했냐며 그들의 손바닥 살을 깨물어댔다. 태섭은 세 사람이 그러든가 말든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웬 영상 하나를 눈앞에 틀어주었다. 영상 안에는 수감자 옷을 입은 작은 여자가 서 있었는데, 그는 움츠러든 기색도 없이 정면을 향해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가 켜진 것을 알아채자 바로 욕을 쏟아부었다.

―작은오빠 새끼야, 너만 잘 살면 그만이야? 난 니 때문에 여기 처박혀서 빌어먹을 미싱질이나 하고 있다 새끼야. 니가 진짜 내 오빠면 알래스카에 있든 중동에 있든 바로 비행기표 끊고 나 찾으러 와야 하는 거 아냐? 킬러라더니 동생도 수용소에서 삐쩍 말려 죽이네. 넌 나 만나면 뒤졌다. 옷 싹 다 벗겨놓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서 대패로 싹싹 밀어다가 백 일 동안 그걸로 밥 먹을 거니까 각오해라

영상은 불과 10초밖에 되지 않지만 욕으로 후두려 맞은 것처럼 온 뺨과 몸이 얼얼했다. 대만은 영상이 끝난 뒤에도 바보가 된 것마냥 멀뚱히 눈만 끔뻑거렸다. 영상을 닫은 태섭은 도로 주머니에 넣고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쟤가 이런 애에요.”

“…꼭 가봐야겠네.”

대만은 정신을 차리고 침을 삼켰다. 이제 할 마음이 생겼다고 판단했는지 영걸이 다시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이번에 의뢰한 사람이 유엔 쪽이라 의뢰비가 두둑해. 이거 잘 하면 우리 다 날개 핀다. 혹시 몰라? 이번에 임무 훌륭하게 해냈다면서 네 등급을 S로 복귀시켜줄지?”

S급 보디가드 복귀. 그건 대만이 지난 7년 동안 꿈에 그렸으나 실현될 가망이 없어 포기하고 있던 소망이었다. 대만도 그제야 태도를 바꾸고 흠흠, 하며 자세를 바로했다.

“그래서, 네 여동생이 지금 납치되어 있는 수용소가 어딘데? 거길 먼저 가야 한다며.”

“잘 물어봤네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상트로페체 수용소요.”

“미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헤이그까지 가라고? 무리무리, 나 안 갈래.”

“그래도 대만아.”

“나 러시아에서 완전히 찍힌 거 기억 안 나냐? 아직 입국정지 풀리려면 6개월 남았다고!”

그걸 기억한다는 게 신기하네. 태섭은 중얼거리면서 9년 6개월 전 탑클래스 보디가드인 정대민에게 일어난 일을 회상했다. 그 일은 킬러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당시 S급이라고 평가받던 러시아 킬러 뫼소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뫼소는 러시아 정부의 청소부였고, 러시아는 대만을 제소하려 했으나 각하되자 그에게 10년 간 입국금지 명령을 내렸다.

금지조치를 받은 것이 8월이었으니, 그의 말대로 아직 6개월이 남아 있다. 그러나 태섭에게는 다 방법이 있었다. 송태섭은 인터폴에서 예의주시하는 사내이고, 그를 잡기 위해 전 세계 국제 공항과 항만에 비밀경찰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그가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태섭은 무기 가방을 닫고 새로운 캐리어를 꺼냈다.

“여기 에이전시랑 보디가드는 뇌가 다 굳었나 보네. 이게 있는데 뭔 걱정이야.”

캐리어 뚜껑이 열리자, 대만과 영걸은 탄성을 뱉었다. 수십 개의 마스크가 그들을 반겼다. 심지어 그 중에는 체형을 바꾸는 부착 풍선 같은 것도 있었다. 대만은 그것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찌르고 만지작거리기 바빴다. 태섭은 그를 일곱 살짜리 애처럼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초보처럼 굴지 말고요.”

“아니, 나 이런 거 처음 봐서 그래.”

“진심으로 하는 소리에요?”

“보디가드가 이런 거 하고 다닐 일이 어디 있겠냐? 너처럼 숨어서 음습한 짓 하는 애들이나 이런 게 필요한 거지.”

대만은 푸근한 할아버지처럼 생긴 마스크를 들고 탁탁 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이 킬러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태섭이 다시 짝짝이 눈썹을 만들었다. 대만은 그 기세에 조금 움찔했으나 ‘아니 내가 왜?’라는 생각으로 다시 어깨를 폈다.

“암튼, 지금 출발하면 되지? 재판은 몇 시에 열리지?”

“일주일 뒤 그리니치 천문대 기준 오후 여섯 시. 적어도 그리니치 천문대 기준 오후 네 시에는 재판소에 도착해야 해. 보디가드 임무는 재판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알았지?”

“거 되게 빡시네. 하지만 이런 것도 해내는 게 바로 정대만이라고.”

“허세는.”

“아 암튼 지금 출발하면 되지? 상트페테르부르크편이랑 헤이그 편 표는 현장에서 구해야 하나?”

“그것도 유엔에서 마련해줬는데요. 자요.”

태섭은 안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내 대만에게 한 장을 건넸다. 티켓의 정보를 살피던 대만이 비명을 내질렀다.

“미친 새끼야! 50분 뒤 출발이잖아!”

“당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계속 하니까 시간 낭비가 된 거 아냐! 이제 알았으면 닥치고 출발하든가.”

“넌 재판 끝나자마자 내가 죽인다. 김용 니 차 타고 간다!”

“내 차를 왜 타고 가는데 미친 놈아!”

김용이 빽 소리를 질렀으나 누구 하나 막는 이 없었다. 태섭도 당연하다는 태도로 당당하게 컨테이너 밖으로 나갔다. 대만이 문을 열기 전 영걸이 급하게 주의사항을 읊었다.

“지금부터 임무 시작이니까! 항상 조심…!”

조심성 없는 대만은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틈이 벌어지기도 전에, 빗발같은 총성이 울렸다. 오우, 대만은 욕을 삼키며 몸을 틀었다. 총성은 멎었지만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으 모두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대화를 했다. 밖에서는 계속 총성이 들렸다. 대만이 오만상을 쓰면서 중얼거렸다.

“씨발, 돈 벌기 존나 힘드네.”

“그럼 뭐 세상에 쉬운 일이 있을 줄 알았어요?”

“넌 제발 그 주둥아리 좀 닥쳐라. 아무튼 개자식들이 벌써 우리 위치를 알아낸 듯한데.”

대만은 그세 김용의 외투 주머니에서 그의 자동차 열쇠를 꺼내 손가락으로 돌리면서 고민에 잠겼다. 영걸도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며, 대포폰으로 제 부하를 갈구고 있었다. 대만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아래에 있는 누군가가 분 게 아니다. 총성이 들리긴 하지만 다른 컨테이너에 쏘고 있다. 즉 어느 컨테이너에 송태섭이 숨어 있는지까진 파악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대만은 영걸과 용에게 눈신호를 주었다. 그 즉시 세 사람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영걸과 용이 뒷문으로 이동하고, 대만은 벽에 바짝 붙었다. 눈치로 알아챘는지 아니면 그래야 하니까 그런 건지, 태섭은 대만 옆에 바짝 붙었다. 용과 영걸이 아무 생각 없이 이 컨테이너를 선택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리고 그 이유가 지금 밝혀지는 순간이다.

오른쪽 손으로 벽을 더듬자 홈이 느껴졌다. 홈에 손가락을 걸고 왼쪽으로 밀자 새로운 컨테이너가 나타났다. 이 컨테이너를 중심으로 상하좌우에 있는 컨테이너는 모두 한 사람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때문에 이동의 편리를 위해 이런 장치를 설치했다고 한다.

대만과 태섭은 각자의 짐을 들고 옆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이쪽엔 킬러가 보이지 않았다. 대만은 제가 먼저 앞장서고 태섭을 등 뒤에 밀착시켰다. 짐이 많아 불편해 보였는데 의외로 태섭은 날렵하게 대만을 따라왔다. 소총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는 건 앙심 때문일 것이다.

대만은 자신들의 위치와 차의 위치를 계속 확인하며 빙 돌아갔다. 현재 오른쪽으로 세 칸, 아래쪽으로 한 칸 움직였으니 왼쪽으로 세 칸을 돌아가면 차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다. 원위치에 가까워질수록 총성을 잦아들었다. 아마 킬러들이 물러갔거나, 위치를 정확히 알아채고 저격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대만은 브렌 A1을 들고 사각지대를 노리며 컨테이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총탄이 날아들었다. 대만은 급히 머리를 안으로 넣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 사이 같은 저격용 소총으로 바꾼 태섭이 컨테이너 창문을 통해 저격수를 쏘아버린 것이다. 그는 침착하게 탄창을 정리하고 총을 분리해 도로 가방 안에 넣었다. M24 SWS를 분해해 넣는 데까지 불과 2초도 걸리지 않았다. 십 년 동안 저격과 살인을 반복하면서 숙련된 스킬이다. 태섭은 대만을 보고 턱짓을 했다.

“이동 안 합니까?”

“어, 할 거다.”

태섭은 다시 짐가방을 어깨에 메면서 말했다.

“다른 저격수는 없을 겁니다. 후퇴하면서 비상대비로 세워놓았을 가능성이 높아요.”

“나도 방금 그 생각했다.”

“구라 같은데.”

“니가 내 머릿속을 아냐?”

둘은 끝까지 티격태격대면서 컨테이너 문을 열었다. 반신반의했지만 태섭의 말대로 다른 킬러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태섭은 아무 생각없이 용의 차문을 열었다. 그 사이 차로 돌아왔는지 열쇠가 꽂혀 있었다. 대만은 차에 타자마자 시동을 걸고 공항으로 좌표를 찍었다. 남은 시간은 49분 13초. 시간이 촉박하다. 대만은 과속 딱지를 백 장 정도 붙일 각오로 엑셀을 밟았다.

시공을 걸고 시내로 나오자마자 시선이 느껴졌다. 대만은 더욱 속도를 높이면서 3차선에서 따라오고 있는 검은 밴을 백미러로 쳐아봤다. 태섭은 조수석에서 다시 돌격소총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MK. 47를 조립하는 데 1초 72 정도 걸렸다. 운전을 하고 있는 대만은 권총을 꺼내는 게 전부였다. 태섭이 장전한 소총을 읊었다.

“검은색 밴, 6인이 탄 것으로 추정. 기관총을 탑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속도 늦추지 말고.”

안정적인 팀 구성인데. 역시 최강의 킬러를 잡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이건가. 대만은 노란 신호등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중간에 빨간 신호등으로 바뀌었다. 신호위반 딱지 또 하나 추가되겠네. 그러나 대만은 두렵지 않았다. 이 차는 정대만의 차가 아니니까.

“뭐, 어차피 내가 아니라 김용에게 날아가는 거니까. 걔가 알아서 하겠지.”

“인간 말종 밑에서 구르는 당신 에이전시가 불쌍한데.”

“말 똑바로 해라. 걔네도 전 S급 보디가드라면서 나 굴리니까.”

대만은 커브를 돌면서 말했다.

“6초 뒤 사거리에서 멈춘다. 속도 더 올려도 못 지나가. 그 전에 가장 귀찮은 놈들 제거해야 해.”

“6초는 너무 빠듯한데.”

“그러면 더 천천히 달리랴? 이제 42분 27초 남았는데?”

새끼, 안 그래도 정신 없는데 계속 토를 달고 지랄이야. 속으로 욕을 하는데 태섭이 또 말을 걸었다.

“공항까지 남은 거리는?”

“18 킬로미터.”

“충분히 갈 수 있겠네. 이제 5초 23 남았나? 두 명 제거하고 가지.”

그러더니 창문을 내리고 대뜸 몸을 내밀었다. 거의 상체가 다 빠져나왔다. 대만이 미친 놈아 바람구멍 나고 싶어서 돌았냐고 욕을 하려는 찰나 태섭이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동시에 검은 밴이 날뛰면서 인도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기겁을 하면서 물러났다. 다행히 밴은 가로수에 들이박고 멈추었다. 사냥에 성공해 뿌듯한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비죽 들어올리며 차 안으로 돌아왔다.

“멍청이들. 앞유리에만 방탄을 안 해놨네.”

저새끼 운전수를 쐈네. 대만은 일이 한 번에 끝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뒷목이 서늘해졌다. 민간인이야 어찌 되든 상관 없다는 저 반인륜적인 태도. 역시 제가 옆자리에 태우고 있는 사람은 천성 킬러가 맞았다. 대만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방금 전에 그 차가 가로수가 아니라 가게에 돌진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그러자 태섭은 별 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만을 보면서 말했다.

“지금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남의 목숨까지 챙길 여유가 있나? 역시 도련님 집안에서 나고 자란 초특급 보디가드다운 발언인데. 악!”

참다 못한 대만이 태섭의 머리끄댕이를 잡아 당겼다. 하다하다 이 멋부린 투블럭 파마머리도 마음에 안 들 줄이야. 태섭이 놓으라며 열심히 팔을 할퀴었지만 긴소매를 입어서 따끔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이륙하기 20분 전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티켓을 보여주자 직원이 그들을 어딘가로 안내했다. 역시 VVIP를 모시고 가야 하는 만큼 전용기를 준비한 모양이다. 덕분에 짐을 부치고 수속을 밟는 복잡한 절차는 생략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들은 비행기 화장실에서 재빨리 태섭이 챙겨준 마스크를 썼다. 태섭은 퉁명스럽게 대만에게 마스크를 던지듯이 건넸다.

“이거 쓰든가요.”

“조올라 고맙다.”

아무 생각 없이 낚아챈 대만은 잠시 마스크의 모양새를 보다가 도로 태섭에게 집어 던졌다. 아 또 뭐가 문젠데! 드디어 울화통이 제대로 터진 태섭이 따라 성질을 냈다.

“야 미쳤냐? 어디 보는 눈깔이 없어서 이런 걸 나한테 줘?”

“아니 턱수염 난 마스크가 어때서!”

“야 얼굴 보고도 모르겠냐? 난 턱수염이 안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아 어차피 마스크는 얼굴 가리니까 상관 없잖아!”

“야 너 이리 와라 지금 끝장을 보자.”

“어 그래 그 잘난 면상 화장실 거울이랑 같이 깨주마.”

한참 옥신각신하는데 문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에이, 이미지만 망치고 이게 무슨 소용이야. 대만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마스크를 뒤집어 썼다. 이리저리 매만지며 얼굴에 맞게 밀착시키는데 벌써 마스크 착용을 마친 태섭이 대만을 보면서 비웃듯이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닥쳐라.”

“무슨 칭찬을 해줘도 지랄이야.”

“니 의견따위 필요없다.”

그들이 앉자마자 비행기가 이륙했다. 그리운(아니 사실 그립진 않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날아갈 시간이다.


 

대만의 새 신분은 예프넨 칸딘스키다. 러시아계 프랑스인으로 스무 살까지 파리에서 거주하다가 독일에서 엔지니어로 살다가 오랜만에 부친을 만나러 러시아로 귀국한 청년이다. 옆에서 태섭이 안대를 쓰고 퍼질러 자는 동안 대만은 동선과 계획, 그리고 새 신분을 달달 외우고 복기하는 데 절반을 쓰고, 나머지 시간 동안 같이 퍼질러 잤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대만은 한결 말끔해진 정신으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들은 일반 승객 사이에 섞여 공한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들이 매의 눈으로 여권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제는 퍽 익숙해진 마스크를 한 번 손으로 쓸고, 대만은 여권과 멘트를 준비했다. 태섭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당당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태섭의 차례가 먼저 왔다. 태섭이 잘 보고 배우라는 듯 대만을 슬쩍 쳐다보고 여권을 내밀었다. 그는 유창한 러시아어로 직원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한국어와 영어를 제외한 다섯 개 국어를 한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거의 유엔 공용어를 다 현지인 수준으로 외는 것 같은데. 그러나 대만도 그에 지지 않는 외국어 능력을 갖고 있다. 비록 러시아어는 안 쓴지 오래됐지만 실력이 녹슬진 않았으리라.

태섭은 빠르게 통과했다. 이번에는 대만의 차례다. 대만은 여권을 반듯하게 펴서 직원에게 주며 먼저 인사를 걸었다.

“스트라스트부이제(안녕하세요).”

“스트라스트부이제. 성함이 어떻게 되죠?”

“예프넨 칸딘스키입니다.”

“네, 칸딘스키 씨. 무슨 일로 오셨죠?”

다행히 의심을 사지 않았다. 마스크와 여권 사진이 그만큼 똑같다는 이야기다. 대만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다음 대사를 뱉었다.

“아버지를 뵈러 왔습니다. 최근에 건강이 안 좋아져서요.”

다행히 그의 러시아어도 아직은 쓸만하다. 또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니 직원이 마지막 질문을 했다.

“얼마나 머물고 가실 건가요?”

“사흘 정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머물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좋은 여행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직원이 돌려준 여권을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으며 대만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가장 큰 관문을 건넜다.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숨어 있다는 수용소를 찾아가면 되는데, 갑자기 시큐리티가 직원 옆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젠장, 설마 들켰나? 대만은 당황하지 않은 척을 하며 차분히 귓속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눈으로 태섭을 찾았다. 다행히 태섭은 바로 뒤에서 똑같이 심각한 표정으로 직원과 시큐리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만이 복화술로 은밀하게 말을 걸었다.

“짐 센터까지 몇 미터지?”

“30미터.”

태섭 역시 복화술로 대꾸했다. 역시 복화술은 킬러와 보디가드의 기본 소양인가. 대만은 계속 물었다.

“너 25미터 달리기 몇 초에 뛰냐.”

“10초도 안 걸리죠.”

“됐어. 내가 신호 주면 옆에 바짝 붙어서 뛴다. 오케이?”

“그냥 지금 튀면 안 되나?”

“그럼 우리 둘 다 잡힌다.”

“총으로 쏴버리면 되잖아.”

“미친 놈아 다 가방 안에 들어 있는데 쏘긴 뭘….”

대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섭이 움직였다. 대체 언제 빼돌렸는지 그는 허리춤에서 장전된 리볼버를 꺼내더니 시큐리티와 직원 사이 바닥을 향해 쏘았다. 총성에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시큐리티는 자기 발치에 박힌 총알을 보고 당황해 잠시 몸이 굳었다. 태섭이 대만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외쳤다.

“뛰어!”

“이 미친 놈아!”

대만은 그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속도를 맞추며 뛰었다. 20미터를 10초 안으로 뛴다더니, 태섭은 그야말로 괴물 같은 속도를 발했다. 보통사람이라면 열 걸음을 떼기도 전에 넘어져서 태섭도 같이 바닥을 뒹굴었을 것이다. 대만은 남은 체력을 힘겹게 쥐어 짜내 간신히 뒤따라갔다. 태섭이 갑갑하다는 얼굴로 돌아보며 욕을 했다.

“아 이 인간 더럽게 느리네!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 뭔 짓이야!”

“니가 뭐 같이 빠른 거거든!”

“빠르면 좋은 거지!”

“너처럼 뛰는 인간은 S급 보디가드들 중에도 없단 말이다!”

그래도 태섭의 빠른 발과 대만의 아직 죽지 않은 단거리 달리기 실력 덕분에 그들은 시큐리티에게 잡하지 않고 무사히 짐을 찾을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때마침 그들의 것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가방을 어깨에 들쳐메고 출구를 향해 다시 질주했다. 그 정신 없는 틈바구니에서 언제 가방을 열었는지 태섭은 이미 제 몫의 소총을 들고선 권총을 대만에게 건넸다.

“이거 써요.”

“땡큐다.”

“아무래도 그 양반이 러시아 쪽과 내통한 모양이에요. 전용기로 왔는데도 그들이 제 도착 소식을 알고 있었어요.”

이건 또 뭔 소리야. 나 때문이 아니었다는 말이야? 대만은 재빨리 확인했다.

“러시아 정부 밑에서 일한 적 있어?”

“아주 잠깐. 러시아가 폴란드 대통령 암살 작전을 세웠는데, 그때 저도 있었거든요.”

“대체 그런 일을 왜 하는 거냐.”

“아 그럼 뭘 해요 먹고 살기 바쁜데!”

“야 아무리 그래도 너처럼 죽이는 업을 삼는 사람은 없어!”

그 말이 상처가 되었는지 태섭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 킬러가 그런 말 듣고 억울해하면 어떡해. 만약 이 상황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태섭이 구질구질했던 과거 이야기를 늘여놓을 타이밍이지만, 여기는 현실이었고 태섭은 그렇게 구질구질한 인간이 아니었다.

“네, 선택할 거 많은 유복한 집 외동아들이라 행복했겠네요.”

대신 이런 말로 대만의 가슴을 후벼파는 짓을 했다. 이 또라이가. 누가 선택할 거 많은 사람이었다고? 오히려 선택지가 없는 쪽은 정대만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잘 나가는 보디가드, 2대가 올해의 엘리트 보디가드 상을 놓쳐본 적이 없는 초일류. 말하자면 대만은 부모와 같은 종목을 선택한 프로 스포츠선수 2세 같은 것이었다. 아주 잘하지 않으면 ‘쟤네 아버지는’이라는 말을 쉽사리 듣고, 뛰어나게 잘해도 ‘누구 아들인데 저 정도는 해야지’라는 말을 듣는, 본전이라곤 어디에서도 뽑아볼 수 없는 신세.

그래서 정대만이 제 집안 사정을 불행하게 생각하느냐, 그건 절대 아니다. 대만은 오히려 제 집안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일류 보디가드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보디가드였으니까.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역시 정씨 집안’이라고 칭찬을 했다. 7년 전 태섭 때문에 VVIP 고객 한 분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말싸움은 그만하고, 이제는 전력으로 뛸 차례다. 방금 전부터 자신들을 따라오는 시큐리티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이미 지원을 부른 모양이지만, 그보다 두 사람이 더 빨랐다. 그들은 내려오는 방화벽을 여유롭게 아래로 미끄러져 피한 다음 택시승강장으로 향했다. 플랫폼에서 모두가 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쁜 현대 사회란 이런 점이 좋았다. 추격당하는 사람처럼 질주해도 다들 ‘버스를 놓쳤나 보다, 불쌍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해주니까.

그들을 발견한 택시 한 대가 정류장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택시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다시피 들어갔다. 태섭을 따라 뒷자리에 앉은 대만은 재킷 안쪽에 차둔 권총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도착한 택시라면 둘 중 하나다. 유엔 측이 마련해준 아군 혹은 러시아에서 안배해둔 적. 만약 적이라면 언제든 쏠 수 있도록 대만은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얹어둔 채 행선지를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으로 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택시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핸들을 돌렸다. 코앞까지 쫓아온 시큐리티는 범죄자들을 태우고 유유히 공항을 떠나는 택시를 바라보다가 무전을 했다. 아마 러시아 경찰 측에 택시 정보를 보내는 것이리라. 그래도 안심할 수 없다. 짜고 치는 연극일 수 있지만.

시내로 나오자 택시기사가 그들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대만과 태섭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하면 역시 겨울 궁전이죠.”

“네?”

대만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으나 바로 정신을 다잡았다. 말려들지 말자, 방심시켜서 처리하려는 생각일지도 몰라. 아니면 유엔 측의 암호거나. 대만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대답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관광객처럼.

“네, 안 그래도 그곳을 구경하려고요.”

“그래야죠. 다들 상트페테르부르크 운하나, 마린스키 극장만 가서 참 속상했다고요. 아, 제가 특별히 겨울 궁전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예전에 제가 거기에서 아내에게 청혼을 했거든요. 그 옥색 건물 뒤로 해가 지는 것을 같이 바라보면서 제가 넌지시 말했죠. ‘사랑해, 나와 결혼해줘’. 그러자 노을과 건물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풍경에 홀랑 빠진 아내는 얼떨결게 고개를 끄덕였죠. ‘좋아요, 요제프’. 그렇게 우리는 부부가 되었죠. 아내는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며 이를 갈지만, 그래도 30년 째 저와 같이 살고 있답니다. 참 한결같은 사람이에요, 정작 그렇게 고백한 저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아니, 겨울 궁전은 유명한 곳 아니야? 그나저나 이 택시기사 왜 이렇게 말이 많지? 아, 나까지 정신이 혼미해지려고 한다. 제대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거 맞겠지. 그러면 거기에서 수용소까지는…. 잠깐, 이 녀석이 제대로 된 주소를 알려줬던가? 대만은 흠칫하며 태섭을 쳐다봤다. 대체 그 눈짓을 어떤 의미로 해석한 건지, 태섭은 갑자기 운전석을 발로 차면서 협박했다.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빨리 가지.”

“네, 네!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제 이야기만 한 것 같네요. 아, 혹시 러시아에 길게 머무를 예정이면 모스크바도 꼭 추천합니다. 역시 한 나라의 수도는 구경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모스크바 하면 볼쇼이 극장이나 붉은 광장을 먼저 이야기하지만, 전 참새 언덕이야말로 진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택시기사는 속도를 내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저 사람은 분명 쉴새 없이 이야기하는 데에 모든 칼로리를 소비할 것이다. 무슨 이야기에 한이 맺힌 사람인가, 정신이 나자빠지려 할 때 조수석 백미러에 흥미로운 것이 잡혔다. 러시아 첩보국의 차였다. 러시아에 출입금지 당한 지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항상 최신 정보를 찾아보고 있던 대만이다. 대만은 태섭을 한 번 보고는 조수석 백미러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바로 태섭의 눈빛이 가라앉으면서 손이 짐가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좌석 아래로 총을 교환했다. 그가 이번에 대만에게 건네준 것은 저격소총이었다. 힘 빼지 말고 타이어를 노리라 이 말이군. 대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뒷차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창문을 내렸다.

“거기는 최근에 케이블카도 설치되어서 쉽게 오를 수 있다는데, 솔직히 전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는 방법을 추천합니다. 좀 고생을 해야 참새 언덕 정상에 올라갔을 때, 그때 보이는 모스크바의 풍경을 완벽하게 감상할 수 있거든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택시기사는 참새 언덕의 묘미를 늘여놓고 있었다. 네네, 그렇군요. 태섭은 기사가 눈치채지 못하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자세히 보니 이 녀석, 성격과 안 어울리게 접대도 꽤 할 줄 안다. 대만은 총구가 뒤쪽으로 향하도록 각도를 조정했다. 러시아 첩보국이 총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먼저 앞유리를 향해 격발해 혼란을 준다. 시야로 공격이 날아오면 고도로 훈련된 요원도 동작을 정지할 수밖에 없다. 역시나 운전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하고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마찰하는 소리가 이쪽까지 생생하게 들린다. 대만은 신속하게 탄피를 빼내고 두 번쨰, 세 번째 총알을 쏘았다. 정확하게 앞바퀴가 터져 나갔다. 두 번이나 총에 맞은 오른쪽 앞바뀌가 피시식 소리를 내면서 기울어졌다. 운전수는 침착하려고 애를 쓰며 차를 가드레일 쪽으로 몰았다. 통제불능에 빠진 차를 가드레일에 충돌시켜 인명피해를 방지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단은. 따돌리는 게 목적이지 아예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대만은 창문을 내리고 몸을 내밀어 차를 확인했다. 몇 명이 내리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총을 싸봤자 사정거리 밖이다. 어차피 녀석들도 그냥 보고하고 끝나겠지. 안심하려던 차에 앞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씨발, 미사일이다! 직감하고 고함을 지르기 전에 택시 기사가 3차선으로 급하게 꺾어 들어갔다. 클락션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고막이 먹먹해질 정도로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사일이 터지기 전 간신히 몸을 차안으로 집어 넣고 창문을 가방으로 틀어막은 덕에 대만의 상반신은 무사했다. 대만이 가방을 내려놓고 황급히 창을 올리며 투덜댔다.

“와 씨발 미친 놈들 아냐? 대로에서 미사일을 막 쏘네?”

“그게 누구 때문인데요.”

태섭이 원망하는 얼굴로 쏘아보길래 대만이 볼을 검지로 꾹 누르면서 타박했다.

“누구 때문이냐 너 때문이지.”

“요즘 시위가 격하다더니 진압도 격하게 하는 모양이네요. 그런데 오는 길에 시위대 보셨나요? 제 눈엔 안 보였는데. 흠, 어쩌면 테러 진압을 하는 걸 수도 있겠네요.”

테러범은 아니지만 전직 킬러와 전직 러시아 입국 금지당한 보디가드가 당신 차에 타고 있는데요. 두 사람은 속으로 딴지를 걸었다. 역시 세상은 꽃밭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이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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