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만 판넬 사건

태섭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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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데 송태섭과 정대만은 연애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비밀로 부쳐봤자 정대만 때문에 언젠가는 탄로날 테고 애초에 비밀을 지키는데 품을 들이는 것도 귀찮으니까 애써 숨기려고 하지 말자. 두 사람이 모두 프로로 데뷔한 날 그들은 채팅으로 약속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공개연애를 하자고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파파라치에게 걸려 귀찮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외부에서의 애정행각(예를 들면 키스)은 자제했으니까. 그렇게 붙어 다니는데도 지금까지 열애 의혹이 하나도 나지 않은 것은 역시 편견 덕분이었다. 늘 손을 잡고 걸어도, 비시즌마다 상대를 만난다고 비싼 비행기표를 끊고, 질리도록 이야기하는데도 사람들은 그들이 '각별한 선후배 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국에 비해 동성애에 열린 사회라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열애설이 날 때마다 태섭이 개같이 날뛰며 고소를 해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송이 이런 쪽으로 결벽증이 있구나'하고 넘기기만 했다. 그렇게 노골적이면서 아무도 알아채주지 않는 연애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연애로 바뀐 계기는 소소하면서도 어이 없었다.

송태섭의 자유투 때 누군가가 꺼낸 정대만 실물 사이즈 판넬이 그 시발점이었다.

어라, X발 저게 왜 저기 있어.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그물을 스치지도 못한 똥볼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코트로 고꾸라졌다. 멤버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송태섭의 자유투 확률이 구리다는 거야 모두가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태섭 팀의 포워드가 익숙하다는 듯 리바운드된 볼을 낚아채 태섭에게 던졌다. 태섭은 포커페이스로 공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대체 저걸 어디서 구했지. 나도 못 구한 걸. 갑자기 심술이 나면서 경기에 탄력이 붙었다. 그날 송태섭은 자유투 1번을 실패한 대신 3점슛을 두 번이나 성공했다. 수훈선수 인터뷰까지 완벽하게 마친 태섭이 상대팀 응원석으로 다가가 기어코 정대만 판넬을 얻는 데 성공했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우습게도, 이런 해프닝까지 벌어졌음에도 아무도 그들이 사귀는 사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KBL 판에서는 정대만이 NBA에 진출했다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인터넷에 짤로 퍼지면서 소소하게 이슈가 되었을 뿐이다. 정대만 역시 다음날 자신의 SNS에 해당 사진과 기사를 올리면서 ‘오올ㅋ 나 언제 저기까지 갔대?’라는 글을 올리기만 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과연 그걸로 끝이었을까? 석 달 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스노우볼이 되어 NBA와 KBL 양쪽에서 최고 규모의 스캔들로 번졌다.

정대만 피켓 사건

“와, 진짜 대박이다. 걔는 어떻게 그걸 얻었대? 그거 나한테도 없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아니, 대체 왜 형 등신대 판넬이 미국에 있냐고요. 대체 언제 미국에 진출했어요.”

“하하학! 그런데 그거 아마 맥주 광고 찍을 때 만든 판넬일 걸. 한인타운에서 가져왔나?”

다시 사진을 보니 맨 밑, 무릎 근처에 맥주 로고가 적혀 있긴 했다. 진짜로 한인타운에 있는 고깃집에서 가져온 등신대인가. 아니 그런데 왜 그걸 NBA 경기에 가져오냐고. 태섭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대만은 혼자 호두턱을 만들며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대뜸 말했다.

“혹시 우리 사귄다고 소문났나?!”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랬으면 진작에 이쪽에서 스캔들 두 바퀴 싹 돌고도 남았지.”

“하긴 그렇곘다. 그런데 너 아직도 스캔들 안 났냐? 의외로 미국에서 안 먹히는 타입인가.”

“나 이번에 게이 사이트에서 2위 찍었는데요.”

“너 지금 내 앞에서 딴 남자들 얘기헀냐?”

헛소리에 헛소리로 응수하니 바로 도발이 걸려 왁 하고 소리를 지른다. 정말이지 다루기 쉬운 사람이다. 이렇게 속이 투명한데 아직까지 다른 사람에게 꼬셔진 적 없다는 게 태섭의 미스테리였다. 그러나 이는 태섭의 착각일 뿐, 남들의 눈에 보이는 정대만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다. 농구 외에는 관심사가 일절 없는, 얼굴은 재미있고 말도 재미있게 하는데 의외로 노잼이어서 진입장벽이 히말라야 산맥 수준인 남자. 그것이 바로 정대만이다. 그리고 그 정대만의 허들을 50cm짜리 뜀틀 수준으로 만드는 게 바로 송태섭이다. 송태섭이라고 다를 거 없다. 남들이 보기엔 혼자 사는 거 같은 고고한 코요테, 코트 위의 아시안 쿨키드, 어쩐지 작은 키임에도 범접할 수 없는 이미지지만, 정대만이 보는 송태섭? 그냥 바보다. 그냥 그 또래처럼 쉽게 성질내고 유난히 꾸미는 데에 진심이고 자신을 보면 좋아하는 티를 못 내서 안달인, 북산고 바보트리오 둘째. 아니 저런 녀석을 왜 어려워하는 거지? 정대만은 그를 경외시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농구 실력이 좀 기가 막히긴 하지만, 사람 자체는 아니지 않나?

바보 같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바보 같이 웃었다. 방음이 잘 되는 고급 주택이 아니었다면 진작 층간 소음으로 신고당했을 만큼. 한참 깔깔대고 꺽꺽대던 둘은 3분 뒤에 겨우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음, 큼, 어우 목 아파. 그래서 너 언제 들어오냐?”

“아, 후우, 후으, 아 자꾸 웃기지 말라고요 형. 저요? 다다음주에 들어갈 거 같은데. 이번엔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이 좀 길어서.”

“올~좋겠다. 아, 비행기 표 예약 안 했으면 그냥 내가 갈까?”

“형은 올스타전 나가잖아요. 그냥 제가 가죠 뭐.”

“올스타 못 나가서 질투하는 거 아니고?”

“아 딱 14점 차이였다니까요 졸라 억울하네?!”

“뭐, 긁혔냐? 그러게 누가 전반부에 꼬라박으라고 했냐.”

“어 한국에서 딱 기다리고 있어라 정대만 나 당신 목 조르러 갈 거니까.”

“우와, 우리 사회면에 나오겠다. NBA 슈퍼스타 송모 선수, 고교 선배인 농구선수 정모 씨 교살.”

달콤하게 사랑을 주고받는가 싶더니 금세 유치한 싸움으로 번진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이들은 계속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연애를 이어나갈 것이다.


송태섭도 정대만도 이 사건에 큰 경각심을 느끼지 못했다. 대외적으로 그들은 친분이 남들과 다른 고교 선후배 관계이고, 송태섭이 자유투에 약하다는 건 농구 좀 깔짝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 정대만 실물 피켓과 송태섭의 자유투 실패를 대중이 연결지어 ‘둘이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 아냐?’ 라고 의심을 품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내 눈앞의 이 정대만들은 뭐냐. 태섭은 자유투를 앞두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하나였던 정대만 판넬이 이번에는 세 개로 늘어났다. 3점슛 세레모니 사진, 침구 사진, 웃통을 까고 물세례를 받는 사진. 온갖 종류의 자극적인 정대만이 태섭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와 저거 보니까 보고 싶어서 진짜 미쳐버릴 거 같네. 어디 보자, 한국이 지금 밤이던가. 태섭은 이 사진이 실시간으로 대한민국 인터넷에 올라가지 않기를 바라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손바닥을 쳐다보아도 그때 뿐, 골대를 보기 위해 시선을 들면 정대만 판넬이 견제 구호에 맞추어 넘실대고 있었다. 아오, 저걸 진짜 눈앞에서 치워버릴 수도 없고. 올라오려는 짜증을 억누르고 영점이 잡히자마자 쏘았다.

“오, 송, 평소보다 빠른 템포로 슛을 쏘는데요 하지만 들어갑니다! 아직 송의 자유투 성공률은 백 퍼센트군요.”

“슛을 일찍 쏜 이유가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피켓 때문이겠죠?”

“뭐 저것이 어떻게든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죠. 농구에서는 흔한 광경입니다.”

해설위원의 말대로 어느 나라 농구를 가든 자유투 방해공작은 흔한 풍경이다. 예전에는 전 부인의 실물 판넬을 들고 나오는 상대 팀 팬들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는 왜 헤어지지도 않은 정대만 때문에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 거냐. 지금 그 인간은 침대에 퍼질러 누워서 자고 있을 텐데. 그리고 저 인간들은 대체 왜 자꾸 내 경기에 정대만을 들고 오는 건데! 넌 얘 못 보지? 하면서 놀리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짜증과 욕구불만이 솟구쳐 태섭은 이를 갈았다. 마우스피스를 물었는데도 섬뜩하게 갈리는 소리가 나자 모두가 긴장했다. 송, 진정해야지…. 빅맨이 어깨를 두드렸으나 태섭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오냐, 내가 오늘 자유투 전부 다 성공시키고 만다. 그의 눈에는 독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뒤로 태섭이 파울을 당하는 일은 없었고, 피켓은 그때 한 번만 등장했다. 그러나 새벽까지 NBA를 시청하던 팬덤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고, 바로 농구 커뮤니티에 실시간으로 정대만 판넬 장면이 올라갔다. 똑같이 뜬눈으로 밤을 새던 커뮤니티 회원들이 열심히 사진을 날랐고, 그것을 SNS에서 활동하는 정대만의 팬이 발견해 다시 업로드했다. 덕분에 대만은 상쾌하게 일어나 핸드폰을 켜자마자 실시간 검색어에 ‘정대만’과 ‘정대만 NBA’, ‘정대만 판넬’이 나란히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씨발 또 송태섭이구나. 대만은 시차 계산하는 것도 까먹고 바로 태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송태섭 이 새끼야!!!!!”

“아 고막 터트릴 일 있어요 새벽부터 뭔 지랄이야!!!”

“야 지랄? 지라아아아알???? 선배한테 지라아아아아아알?”

이럴 때마다 선배라는 지위를 끌고 와서 완장질하는 그가 너무 밉다. 아니 기껏해야 1년 선배에 같이 뛴 것도 고작 1년 밖에 안 되면서 무슨 완장질은 이렇게 하는지. 그러나 1년 차이라도 선배는 선배, 운동계에서 그 상하관계는 절대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다. 설령 후배가 NBA 대 슈퍼스타이자 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송태섭은 이불을 걷어차며 빡침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대만이다. 분명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서 이 새벽부터 지랄쇼를 하는 것이리라. 어라, 설마 그건가. 태섭은 3초 정도 머리를 굴린 다음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씨발 또 그 판넬이구나!

“아아악!!”

“어우 씨 고막 터지겠다 뭔데 넌 또.”

지가 더 신명나게 고함을 질렀으면서 태섭에게만 고막 터진다는 둥 투덜거린다. 원통하다 나도 선배로 태어날 걸. 태섭은 주먹을 꽉 쥐고, 어금니도 꽉 악물고 말했다.

“그놈의 판넬을 그냥….”

“이제야 알았냐. 그래 나 니 덕분에 NBA 진출했다 새끼야. 사생활 관리 안 할래?”

“아니, 저도 어디에서 퍼진 건지 모르겠거든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먼 섬에서 홀로 낚시를 하며 살고 있을 형을 걸고 맹세하건데, 태섭과 대만은 절대 들킬 일이 없는 사이였다. 아시아야 말할 것도 없고, 해외에서도 그들의 기류를 심상치 않게 본 사람이 대만을 가리켜 누구냐고 물어도 학교 선배라고 하면 ‘오케이’하면서 쿨하게 등을 돌렸다. 인스타에 올린 사진도 단둘이 게임하면서 서로를 줘패는 사진이나 북산 회식, 국가대표 단체 사진 정도였다. 그쪽이 아니고서야 알아채기 쉽지 않을 텐데. 대체 뭐지? 어디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거지?

태섭이 오랫동안 답이 없자 대만은 따라 침묵하더니 질문을 던졌다.

“그것들도 다 니 집으로 가져갔냐?”

“아니 그건 왜 궁금한데요?”

“내 판넬이니까 궁금하지! 그래서 가져갔어 안 가져갔어?”

“가져갔어요! 젠장! 내 차에 실어서! 안 부러뜨리고 가져가려고 내가 얼마나 쌩고생을 했는데!”

그들이 악다구니를 벌이는 그 순간에도, 정대만 판넬은 널리널리 퍼져 유럽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급기야 sns에서는 정대만의 계정을 알려주는 대가로 각국의 잘생긴 운동선수 계정을 받아내는 진풍경까지 펼쳐지고 있었지만, 인터넷 세상과 별로 친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먼 세상 이야기이기만 했다. 그래서, 대만은 그날 평소처럼 구단에 출근했다가 ‘코리아 핫 바스켓맨’ 소리를 듣고 머리를 벽에 박아 죽는 게 빠를지 송태섭을 교살하는 게 더 빠를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정대만이 고민해야 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다가오는 농구 올스타전에서 누군가가 이를 패러디하거나 자신에게 패러디를 시키지 않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안일하게 넘긴 결과, 그는 얼마 후 올스타전에서 곤혹을 치렀다.


아 이거 완전 조졌네. 송태섭이 이런 기분이었나?

다가온 올스타전 1부 이벤트 당일. 정대만은 3점슛 컨테스트에 자신만만하게 나와 공을 잡자마자 제 시야를 빼곡하게 채운 송태섭을 보았다. 정확히는 송태섭을 프린트한 각종 판넬이었다. 상대 팀 선수들이 짜기라도 했는지 골대 뒤쪽에서 각자 송태섭 판넬을 하나씩 들고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는 현수막까지 공수해서 흔들어대고 있었다. 대체 인쇄소 사장님들은 왜 저런 바보 같은 의뢰를 받아준 걸까. 이건 송태섭 때보다 더하다. 그때는 한 명이 들고 있었지, 이쪽은 다 들고 나와서 쪽수로 밀어붙이고 있다. 내 편은 하나도 없다더니, 정대만이 속한 팀도 좋아라 웃으면서 송태섭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하여튼 다 웬수야, 웬수.

와중에 카메라는 반대편 관중석에서 조용히 관람하고 있던 송태섭을 잡았다. 아니 마스크에 볼캡까지 쓰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찾은 거야. 송태섭도 전광판에 잡힌 자신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미 관중석은 비명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심지어 후배 선수들도 우레와 같은 함성을 보내주었다. 캐스터는 그들의 속도 모르고 말했다.

“이야, 이거 야구 올스타전이었으면 시구를 맡겼어야 하는데요. 언제부터 저기 계섰던 겁니까?”

“자 송태섭 선수, 본인의 패러디를 직접 본 소감을 묻고 싶어지는데요.”

소감을 묻기는 개뿔, 태섭은 아주 죽고 싶었다. 왜 이 밈이 여기까지 번져 가지고 이러는지. 그 숱한 불행 중 다행을 꼽으라면, 모든 사람들이 이 사태를 하나의 ‘쇼’라고만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모든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애를 알아챈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여차저차 올스타전은 대만의 팀이 우승하면서 끝이 났다. 올스타전 MVP는 만장일치로 대만의 차지가 되었다. 소감을 부탁드린다는 진행자의 말에 대만은 공허한 얼굴로 말했다.

“태섭아, 네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몰라줘서 미안하다. 다음엔 NBA 올스타전 좀 구경시켜줘라.”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대만의 시퍼런 눈동자를 직접 마주한 송태섭은 딱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건 제 탓이 아닌데요. 하지만 이런 말을 했다가는 정말로 사랑하는 선배에게 죽을 것 같았기에 화면에 잡힌 태섭은 씁쓸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래서 특별 MC가 직접 그에게 다가가 답변을 부탁한다며 마이크를 들이밀었을 때, 태섭은 평소의 사나운 별명과 거리가 먼 어벙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 네? 어 잘 부탁드려요?”

당연히 이 장면은 여러 사람에 의해 클립으로 따여 영원히 인터넷을 떠돌아 다니며 ‘송태섭 입덕짤’, ‘송태섭 갭모에 짤’ 등으로 불리는 저주에 걸렸다. 그것을 송태섭의 해외 팬이 주어 OMG를 연발하면서 다시 서구권 인터넷에 널리널리 퍼지는 건 또 먼 훗날의 이야기.

그러나 미래를 모르는 두 사람은 올스타전이 끝나자마자 대만의 자취방으로 들어가 술잔치를 벌였다. 대만이 맥주잔을 탕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야 넌 대답이 뭐 그따구냐? ‘어? 네? 어 잘 부탁드려요?’ 누가 보면 태어나서 처음 인터뷰하는 사람인 줄 알겠다!”

“거기에서 저한테 마이크를 들이밀 거라고 누가 생각을 해요. 하 씨 쪽팔리네.”

“이열, 송태섭. 역사 하나 썼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나 올스타전에 데려가야겠네. 대만이 이를 드러내며 상쾌하게 웃었다. 아오 말하는 건 짜증나 죽겠는데 왜 얼굴은 잘생기고 난리신지…. 인터넷 세상에서 자신들을 두고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도 모르는 채, 태섭은 대만의 양볼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붙잡았다. 야 나 터지겠다 태섭아? 대만이 약간의 위기감을 느끼고 중얼거리는 말을 간단히 무시하며 태섭은 천천히 입을 맞추려다가…, 갑자기 울린 전화에 대만이 황급히 태섭을 밀어냈다. 태섭이 전화를 집어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오 아주 지구 반대편으로 날려버리시겠어요? 어 백호다.”

“야 그럼 그딴 판넬이 나돌아다니는데 좀 조심하면 어디 덧나냐? 어 백호가 웬일로 전화를 한대.”

“뭐 어때요 그냥 피켓인데…, 어 백호야.”

“섭섭이! 대만군이랑 대체 무슨 사이야!”

석 달 만에 연락한 백호가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백호야 목청이 너무 크다. 태섭은 너스레를 떨면서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트리는 시늉을 했다. 여전히 목소리가 우렁찬 덕에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지 않아도 백호가 하는 말이 들렸다. 아니, 그나저나 우리가 무슨 사이냐니. 그걸 네가 말하면 안 되지 않을까? 태섭은 술이 들어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대답했다.

“무슨 사이긴 그냥 선후배지.”

“아니 아니이! 다들 섭섭이랑 대만군이랑 뭐가 있다고 그러는데 나만 모르는 게 말이 되냐고오!”

“우리 사이에 뭐가 있어. 그냥 날아간 앞니랑 흉터 하나 있지.”

대만이 태연하게 대답하면서 새우깡 봉투를 깠다. 그리고 그거 다 송태섭 저 새끼가 일방적으로 나한테 남긴 거고. 술이 들어간 탓인지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 술술 나온다. 태섭은 주먹을 쥐었고, 백호는 ‘그런가'?’라고 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섭섭쓰, 지금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판넬들은 뭐야?”

풉, 태섭은 쭉 들이키던 맥주를 시원하게 뿜었다. 맥주 분수는 그대로 대만의 티셔츠를 적셨다. 야 더럽게 뭐 하는 짓이야! 대만이 펄쩍 뛰었지만 태섭은 다른 게 더 급했다. 어우 술이 확 깨는 기분이라는 게 이거구나. 태섭은 핸드폰을 고쳐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내용으로 나오고 있는데?”

“엉 그냥 왜 송태섭의 경기에 정대만의 판넬이 나오는가, 하면서 막 앵커가 지들끼리 이야기하고 있는데? 와 우리 고등학생 때 사진 나온다. 빨랑 CCN 틀어봐 섭섭쓰.”

“CCN이 아니라 CNN이겠지. 형 여기 CNN 채널 몇 번이에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튼다고 영어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이 나이 될 때까지 영어 공부 안 하고 뭐 하고 있었어요. 애인이 미국에서 뛰는데.”

“그래 너는 미국에서 9년이나 살고 있어서 좋겠다. 그래서 채널 몇 번이냐.”

“잠깐만요 지금 찾아보는 중이니까요.”

쉴 새 없이 투닥거리면서 그들은 겨우 CNN을 틀었다. 그러자 화면 가득 자신들의 모습이 나왔다. 오, 말하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놈의 판넬 사건 영상 이후 대만과 태섭의 SNS 게시물이 빠르게 지나가고, 이후로는 팬들과 누리꾼의 반응 같은 것이 화면에 올라왔다. 대만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태섭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저거…. 내가 지금 상상하는 그거 맞나?”

“그거 졸라 맞는 거 같은데요.”

그들이 예상한 대로 그것은, 대만과 태섭의 러브라인을 찾으려는 온갖 노력들이었다. 그들은 태섭과 대만이 롱디를 하는 사이이며, 시즌 중이라 만나지 못해 판넬에 흔들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증거와 논리가 꽤나 타당해서 당사자들도 할 말을 잃었다. 대만은 마른 세수를 했고, 태섭은 생전 입에도 대본 적 없는 담배의 맛이 궁금해졌다. 다시 대만을 보니 그는 아예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음, 숱이 많은 사람이라 다행이야. 탈모는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이런 헛소리를 상상하지 않으면 이성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궁지에 몰렸다. 10분 뒤 겨우 진정한 대만이 입을 열었다.

“이거 어떻게 수습할 건데.”

다행히 그의 눈빛에 짜증 섞인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태섭은 뚫린 입이라고 자유롭게 중얼거렸다.

“…이참에 그냥 확 밝힐까요.”

“나 KBL에서 잘리면 니가 먹여 살릴 거냐.”

“당근빳다죠. 왜요, 확 결혼까지 해줄까요? 다른 주로 옮기면 그만이지.”

“넌 진심으로 그럴 거 같으니까 농담으로라도 말하지 마라….”

대만이 질겁을 하면서 태섭을 말렸지만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FA 구상을 하고 있었다.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주가 어디더라. 거기는 무조건 피해서 가야지. 그리고 대만 선배도 미국에서 살자고 꼬시자. 아무래도 한국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살기는 힘드니까. 게다가 운동선수는 반 공인이라 더 비난의 화살이 돌아갈 수도 있고. 거기에서 코치 연수 받아서 대학 리그 같은 데 취업시키면 되지 않을까. 태섭이 남은 인생 계획을 차분히 딱딱 정리하는 동안 대만은 공허한 눈으로 생각했다. 송태섭 저 소름끼치는 새끼, 설마 나랑 미국에서 결혼하려고 이 모든 상황을 짠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다행히 어떤 이유에서인지 피켓 빌런은 그 후에 나타나지 않았고, 1년이 지나자 그 사건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완전히 묻혔다. 그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되었고, 그동안 흘린 수많은 떡밥을 놓지 못하는 사람은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을 정도로 완전히 사장되었을 때, 태섭의 SNS에 한 사진이 올라오면서 피켓 사건은 재조명을 받게 된다. 사진 속 송태섭은 어떤 글귀가 적힌 거대한 판넬을 들고 야외 농구 코트에 서 있었다.

정대만! 나랑 결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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