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의 길
태섭대만
11/26 대만른 온리전에서 판매한 태섭대만 회지 『화살의 길』 웹발행본입니다. 샘플로 공개한 0~2편 이후부터 유료 결제선이 들어갑니다.
중세 중국 AU, 유목민족 족장 송태섭 x 제국 사신 정대만
나이 차 나는 커플, 인종차별, 호모포비아 발언에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화살의 길
나의 신부 될 사람은
태섭은 좌우를 에워싼 사내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흘끔대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부족장이 연달아 죽고 마을이 안정된 지 겨우 3년이 지났는데 혼인을 입에 담는다고? 무슨 꿍꿍인지 들여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빨 빠진 호랑이 같으니. 자신을 이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못하니, 자기 편의 신부를 두어 외척 세력으로서 간섭하려는 속셈이다. 더군다나 태섭은 친외척의 세력이 약하니까. 시커먼 속을 누가 모를 줄 알고. 태섭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저도 나이가 있으니 신부를 들여야지요.”
“맞습니다. 한 부족의 장이 신부도 없이 홀몸으로 다닌다니,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부끄럽긴 개뿔. 속으로 반박했다. 태섭은 혼사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갑자기 비어버린 아버지와 형님의 뒤를 이어 족장이 된 자신을 장로 무리는 아니꼽게 여겼다. 낮에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느라 성격에도 맞지 않는 대장 노릇을 했고 밤에는 숱한 암살 시도와 싸워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하고 짧다는 생각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다 한들, 저 늙은 호랑이들이 이것저것 트딥을 잡아 곁에서 쫓아낼 텐데. 태섭은 저들이 죽기 전까진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을 심산이었다.
자신을 과년한(태섭은 이 표현이 남성에게 적절한 것인지 잠깐 고민했다) 총각인 양 말하는 저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섭은 올해로 열일곱 살이다. 내가 너무 늦는 게 아니라 다들 너무 일찍 혼인하는 거라니까? 산 너머 골짜기에 있는 부족은 열 살이면 다들 짝지가 있다는 말에 태섭은 기겁을 했다. 나랑 아라는 열 살 때 산양 타는 법을 배웠다고! 그런 애들에게 시집을 가라니 장가를 가라니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태섭은 숨을 골랐다. 일단 맞장구를 쳐주니 다들 옳다구나, 한마디씩 얹었다. 부족장이 사냥을 잘하니 살림을 잘하는 색시가 좋겠다니, 시냇물 아래쪽에 자리잡은 부족 중에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비슷한 연배의 소녀가 있다니. 태섭은 그들이 하는 말에 속으로 하나씩 토를 달았다. 살림이 좋은 아내는 자신의 딸을 말하는 것일 테며, 계곡 아래 부족은 저 자의 누이가 시집을 간 곳이니 조카이리라. 역시 너나 할 거 없이 제 수족을 붙이려고 하는군. 태섭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가 신부를 고르는 조건을 단 하나입니다.”
“조건을 붙이겠다고?”
장로의 표정에 먹구름이 낀다. 적당히 맞춰 움직이지 않으니 심통인 난 게다. 태섭은 그들의 딸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 자랑은 아닙니다만 저는 이 일대에서 명궁으로 소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돌아가신 준섭 족장님보다는 못하지만, 부족장님보다 멀리 화살을 쏘는 이는 이 평야에 아무도 없지요.”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와중에 약을 올리듯 형을 언급하는 것이, 제 속을 긁으려 하는 의도가 뻔했다. 그러나 태섭은 분노한 티를 내지 않았다. 사냥감이 덫 속의 미끼를 물었다. 태섭은 무릎에 얹어둔 손을 올려, 맞은편 함에 봉해둔 형의 활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의 색시 될 사람은, 형님의 활로 저보다 멀리 화살을 쏘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무국인
“여기가 맞나? 지도가 대체 왜 이래?”
대만은 아리까리한 표정으로 다시 지도를 펼쳤다. 분명 최근에 만든 지도라 정확하다고 상인이 그랬는데. 대만은 지도를 이리저리 돌리고, 접었다 펴기도 했다. 그런다고 멀쩡한 지도가 달라질까. 대만은 지도를 들고 애꿎은 뒤통수만 벅벅 긁었다. 사기를 당한 게 아니라면 지금쯤 그는 허허벌판이 아니라 낮은 나무로 빼곡한 숲을 지나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숲은커녕 가도 가도 초원만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고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그 흔한 양치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거 환장하겠네. 대만은 말의 목에 상체를 기대며 칭얼댔다.
“영걸아, 우리 이제 어떡하냐. 초원에서 미아 되버렸다.”
그건 주인이 알아서 할 거라고 대꾸하듯 영걸이는 푸르릉 콧김을 뿜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떨어진다고 이놈아! 대만이 기겁하며 고삐를 잡았다. 이놈도 참 보통 성깔이 아니야. 대만은 툴툴대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대만은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근처에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릇 강가에는 사람이 모여 사는 법. 그건 유목 민족도 다르지 않다. 대만은 말을 몰아 강 하류로 향했다.
염소 젖을 짜러 나온 아피르는 말이 우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낯선 사람이 말을 몰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피라를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왔다. 복장도 생김새도 본 적 없는 민족의 것이었다. 아피르는 몸을 떨었다. 아버지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 근방에서 네가 본 적 없는 외양이면 저 아래에 사는 농경민이니 절대 다가가면 안 된다. 아피르는 염소 젖을 담던 통을 내팽개쳤다. 통이 쓰러지면서 젖이 쏟아졌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피르는 곧장 게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피르는 숨을 헐떡이며 검을 만지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상한 사람이 찾아왔어요. 유목민의 얼굴은 아니었어요. 농경민 같아요.”
아버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허리에 차고 위협적인 발걸음으로 걸어가 게르의 입구를 열었다. 광장 쪽에 사람이 모여 있었다. 구경꾼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농경민의 옷을 입은 사내가 손을 들고 전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족장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는 활과 작은 검을 차고 있었다. 나약한 농경민은 무장을 하고 돌아다니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족장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침입자를 노려봤다.
농경민 침입자, 대만도 사내를 훑었다. 그는 솥뚜껑만 한 손을 허리에 찬 검 손잡이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허튼 짓을 하면 휘두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여튼 유목민 성깔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대만은 속으로 혀를 차며 사내의 복장을 살폈다. 비슷한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부족에 따라 어투와 단어 등이 조금씩 다르다. 대만은 45개 부족의 말투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가유목민을 상대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눈앞의 사내는 나칭족이다. 네모꼴로 길게 파인 목덜미에 청색 실로 수놓은 매 자수 복장이 이들의 특징이다. 계급이 높은 자일수록 매 자수의 수가 많다. 사내의 매 자수는 다섯 개였다. 그렇다면 부족장이군. 덕분에 이야기는 빨리 통하겠네. 대만은 족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이 근방을 지나가다 길을 잃었습니다.”
족장은 사내의 입에서 나온 유창한 나칭족 말에 눈썹을 들어올렸다. 무국에는 유목민을 회유하기 위한 외교관이 따로 있다더니 사실인 듯했다.
“무국 사람이 왜 여길 오지.”
부족장답게 사내는 긴장감을 풀지 않고 물었다. 거기에는 아주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줄줄이 읊으면 하룻밤으로 모자랐고, 대만은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할 마음이 없었기에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북산족을 만나려 하는데, 지도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한 번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북산족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군중이 술렁거렸다. 대만은 양손을 내리는 대신 허리를 틀어 지도를 보여주었다. 족장은 양피지로 만든 지도를 빤히 바라보다가 옆에 있던 다른 남자에게 턱짓했다. 그는 대만에게 다가가 지도를 풀어 부족장에게 보여주었다. 대만이 설명했다.
“상인이 말하기를 석 달 전에 만든 지도라 정확하다는데, 가도 가도 숲이 안 나와서 이게 맞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지도를 회수한 사내가 그것을 펼쳐 유심히 확인했다. 몇 시간 전의 대만처럼 뚫어지게 쳐다보던 사내가 부족장에게 다가가 귓속말했다. 부족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대만에게 말했다.
“지도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는군.”
“뭐가 문제입니까?”
“이 지도는 북쪽에서 보고 그린 것인데, 무국은 이곳 기준으로 동쪽에 있지 않나. 그러니 방향이 맞지 않지.”
아…. 대만은 몸에서 힘을 탁 풀었다. 그러니까 지도는 잘못되지 않았는데 잘못되었다는 얘기군. 그러면 어떻게 가야 하나. 난감함에 눈썹 위를 꾹꾹 누르자 부족장이 위쪽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강물을 따라 온 것 같은데, 이 물줄기를 타고 올라가면 두물머리가 나올 거다. 왼쪽 물길을 타고 올라가면 북산족이 사는 숲과 돌산이 나오지. 하지만 그들을 찾는 이유가 뭐든, 지금은 가지 않는 것이 좋겠군.”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근 몇 년 사이 부족장이 연달아 죽었어. 작은아들이 부족장 자리를 이었는데, 제 형님보다 모자란 놈이라 안에서도 밖에서도 들쑤시는 놈들이 좀 많았어야 말이지. 덕분에 우리도 최근엔 그들과 교류를 거의 못했어.”
그래? 대만의 눈이 반짝였다. 부족 내 상황이 불안정하다니, 오히려 대만에겐 기회였다. 그런 상황에선 외세의 힘을 빌리려는 세력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그게 부족장이라면 더 좋은데. 대만의 표정을 읽고 부족장이 혀를 찼다.
“부족장을 구워 삶으려는 생각이라면 포기했다. 생쥐만큼 작은 주제에 독한 놈이라 조금이라도 자신을 위협하려는 녀석은 끝내 찾아내 숙청하니까.”
“살벌하네요. 그렇게 하면 부족 내에서도 미움받을 텐데.”
“그렇지. 그렇게라도 해야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약자의 심정은 이해한다만.”
부족장은 대만에게 곧 해가 질 테니 오늘 밤은 여기에서 묵고 가라며 자신의 게르로 안내했다. 선뜻 내민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대만은 자신의 말을 게르 앞에 묶어두고 부족장을 따라 들어갔다. 마침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대만은 짬파와 뗀뚝을 대접받고 입가심으로 창을 마셨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초원을 오가고 지금도 떠돌고 있지만, 창은 영 입에 맞지 않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아피르가 히, 하고 웃었다.
초원의 밤은 춥다. 지열이 모조리 날아가기 때문이다. 대만은 양가죽으로 만든 이불을 덮고 눈을 붙였다. 내일부터는 강행군에 들어가야 한다. 여기에서 북산족이 사는 고원까지 가려면 하루종일 말을 몰아야 한다. 일찍 일어나 길을 나서기 위해선 잠을 푹 자둬야 한다. 내일은 정말 쉴 틈이 없을 테니.
잠이 안 오는지 아피르가 고개를 내밀더니 꾸물거리며 대만에게 다가왔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무서워서 어른들 사이로 숨었던 주제에 같이 밥을 먹으면서 친근감이라도 생겼는지 안기는 꼴이 귀엽기만 하다. 대만이 이불을 젖히자 아피르가 들어왔다. 나란히 누워서 아피르가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북산족을 만나러 가요?”
내가 이제 아저씨라 불릴 나이가 되었나…. 그럴 만도 하다. 만약 대만의 인생이 평탄했다면 이만한 자식이 있었을 것이다. 유목민보다는 늦다지만 무국인도 스물이 넘으면 주변으로부터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대만에게는 그런 말을 해줄 어른이 없었고, 직업상 하지 않는 것이 미래에 반려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좋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현재 스물 여섯. 그는 여전히 미혼이다.
“왜 북산족을 만나려고 하냐고?”
“네, 듣기로는 북산족은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답게 사납고 성질도 드세다고 들었는데요.”
“무국 사람이 보기엔 북산족이나 너희나 비슷한데…. 살려야 하는 사람이 있거든.”
“살려야 하는 사람이요?”
“응. 그 사람을 살려주는 조건이 북산족 족장을 만나 동맹을 성사시키는 거거든….”
대만은 눈을 감았다. 고향의 풍경, 그곳의 사람들,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얼굴들과 은사님, 그리고 새로운 식구들이 차례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삼정군! 꼭 살아 돌아와야 해! 수많은 고사리손이 쥐어주던 부적과 간식거리. 이 녀석들은 나와 준호가 돌보고 있을 테니 사지 멀쩡히 돌아와라. 엄한 척하면서 제 짐을 풀고 싸기를 반복하던 정 많은 손바닥. 그 아이들만큼은 자신과 같은 꼴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 도 재상이 내민 조건을 받아들인 것도 그 까닭이었다. 삿된 씨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누군지 모르겠어도 그 사람이 아저씨를 죽이고 싶어하는 거 같은데.”
열 살 주제에 판을 읽는 눈이 날카롭다. 대만은 피식 웃었다. 국경 지역의 부족은 같은 말이라도 황제보단 대만의 가족을 더 잘 따랐다. 중앙은 그 점을 늘 불편하게 여겼으리라. 그 일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제 아비처럼 사형대로 끌려갔으리라. 그보다야 망망대해와 같은 초원에서 길을 잃거나 습격을 받고 죽는 게 낫다. 대만은 아피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마야, 이름이 뭐냐?”
“꼬마 아니거든요. 정혼자도 있다고요.”
이 쬐끄만 게 뭘 안다고 벌써 결혼을 시킨대. 무국에서 조혼은 범죄였다. 다들 쉬쉬하면서 약혼이라는 핑계로 조혼을 성사시키지만 표면상으로는 금지되어 있다. 대만의 고향엔 조혼 풍습이 없었다. 그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대만의 반려도 무고한 죽음을 당했을 테니. 나는 평생 혼인은 꿈도 못 꿀 팔자군. 대만은 소탈했다.
“어엉, 그래서 이름이 뭐냐고.”
대만은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아이는 망설이다가 대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피르에요.”
“그래, 아피르. 정혼자에게 잘 해줘야 해.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강한 남자가 되어서 모두를 지킬 거예요.”
“콩알만 한 게 꿈은 커요.”
“놀리지 마요!”
“아피르, 자거라.”
아버지의 부드러운 호령이 떨어졌다. 아피르는 정말 억울하단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다 꾸물대며 어머니 옆으로 돌아갔다. 대만은 쿡 하고 웃은 다음 눈을 붙였다. 장작불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고요했다. 눈꺼풀 안쪽에서 그 빛을 따라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그라졌다. 잃어버린 사람들, 여행길에 만난 사람들, 새로운 인연들. 그들의 해맑은 미소.
내가 꼭 구해줄게. 내가 꼭 너희는 행복하게 해줄게. 대만은 잠결에 모포를 그러쥐었다.
아침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다. 부족장이 눈이 내릴 날씨라며 대만을 걱정했다. 대만은 고민에 빠졌다. 출발 날짜를 미뤄봤자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 지역은 눈이 많이 내리는 편도 아니니 말로 충분히 갈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이 이상 지체하면 재상이 요구한 날짜를 맞추지 못할 수도 있다. 답은 하나였다.
“괜찮겠죠, 뭐. 예정대로 출발할 겁니다.”
아피르가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까치발을 들고 뭐라 속삭였다. 부족장은 웃으면서 허리를 펴더니 깜짝 제안을 했다.
“정 오늘 가야 한다면 마차를 빌려주겠소. 이륜 마차인데 그냥 말로 가는 것보다 빠를 거요.”
“마차요?”
“그래, 큰 시장이 열릴 때 끌고 가는 건데, 아피르가 빌려 주라고 하는군. 당신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오.”
“아하, 예.”
대만도 웃으면서 아피르를 보았다. 아피르가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부모로부터 무국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도 선뜻 다가와주는 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대만은 아피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덕분에 편하게 가겠네, 고마워 아피르.”
“다음에 또 올 거죠?”
아피르가 물었다. 대만은 잠깐 머뭇거렸다. 또 올 거냐고? 아마, 살아 있다면. 내가 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해서 모가지를 보존한다면. 대만은 일부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땐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올게.”
“진짜 진짜죠? 약속한 거예요?”
“응, 진짜 진짜로.”
부족장이 사람을 불러 마차를 꺼내 오라고 명했다. 무국인을 북산족이 사는 데까지 보내는 데 마차까지 동원해야 하나 의문을 표하던 사내들은 방실대는 아피르를 보고 바로 납득했다. 나칭족 사람들은 아피라에게 사족을 못 쓰나 보군. 잠시 후 사람들이 마차를 끌고 왔다. 그들은 주인을 잃은 말과 영걸을 나란히 묶었다. 새 말은 친화력이 좋아 영걸과 대만에게 살갑게 굴었다. 대만은 마차에 올라타 두 말에게 채찍질을 했다. 자, 가자! 채씩 소리와 함께 마차가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족장의 가족이 모두 나와 배웅해 주었다. 대만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점차 멀어졌다.
하늘이 느릿하게 어두워졌다. 대만은 말을 재촉했다. 마차가 심하게 덜컹대 난간을 쥐고 버텼다. 잠깐 쉬어 숨을 고를 시간조차 아까웠다. 몸과 정신을 몰아붙인 덕분에 출발한 지 한나절 만에 숲이 보였다. 이것만 지나가면 만날 수 있다. 부족장이 경고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아니다.
숲 중반을 가로질러 갈 때 즈음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눈송이가 작아 땅에 내려앉기 전에 녹는 게 절반이었다. 이 속도면 해가 지기 전에 바위산 입구에 도착할 것 같다. 오늘 산을 오르기는 불가능할 것 같으니 기슭에 게르를 치고 하룻밤을 지내야겠다. 대만은 말을 모는 속도를 늦추었다. 얼마 안 되는 눈이라지만 방심해서 미끄러지면 큰 부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또 날이 지체되고. 그런 미래는 사양이다.
계산대로 마차는 흐린 하늘 너머로 노을이 질 때 즈음 숲 끝자락에 도착했다. 낮은 나무 너머로 거친 바위산이 보였다. 대만은 마차를 멈추고 천천히 내렸다. 아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험한 산에 자리한 부족,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르고, 동맹을 맺지 않는다. 그들을 가리키는 말은 ‘살아남은 자가 진리다’. 약하더라도 괜찮다, 겁이 많아도 괜찮다. 살아남기만 하면 그 사람이 진리가 된다.
대만은 낡은 게르를 펼쳤다. 말들은 고삐를 풀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을 뜯게 했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른 잔가지를 겨우 모았다. 부싯돌을 힘껏 두드렸지만 궂은 날씨 탓에 잘 붙지 않았다. 씨, 이거 날 완전히 저물기 전에 장작불 피워야 하는데. 대만은 얼굴을 구기며 있는 힘껏 부싯돌을 내리쳤다. 딱 소리와 함께 그토록 바라던 불똥이 튀었다. 대만은 헐레벌떡 숨을 불어 불을 키웠다. 겨우 올라온 불 위에 냄비를 올리고 마을을 떠날 때 가져온 슐을 끓였다. 불이 약해 차가웠지만 먹을 만했다.
완전히 어둠이 내리자 대만은 목에 건 피리를 불어 말을 불렀다. 영걸이가 어슬렁대며 돌아왔다. 다른 말은 보이지 않았다. 왜지, 영걸이가 다른 말을 버리고 올 녀석이 아닌데. 대만은 영걸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영걸아, 너 친구는 어디에 두고 왔어. 오늘 새로 사귄 친구.”
영걸은 콧김만 낼 뿐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다, 대만은 영걸의 목을 긁으며 숲 안쪽을 보았다. 늑대가 많이 사는 바위산 근처지만 그들의 사냥감은 토끼나 양, 염소와 소지 말은 습격하지 않는다. 설마 다른 맹수가 사나? 대만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한참 숲을 노려보던 그는 영걸의 귀에 속삭였다.
“영걸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도망쳐라. 나칭족에게 돌아가. 그러면 그들이 알아채고 올 거야. 알았지?”
대만은 마지막으로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린 후 허리춤에서 활을 뽑았다. 대만은 영걸을 두고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갔다.
적막만이 감도는 숲이었다. 대만은 신중하게 발을 디디며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언제든지 쏠 준비를 마친 그는 좌우를 살피며 깊숙이 들어갔다. 모든 동물이 잠들었는지 쥐가 찍찍대는 소리, 토끼가 움직이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부엉이도 활공하지 않는 밤이다. 거대한 위험이 닥쳤다는 듯이. 혹은 갑자기 내린 눈에 모두 얼어붙어버린 듯이.
무언가가 있다.
대만은 왼쪽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무언가가 소리 없이 땅을 밟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다. 대만은 숨을 참았다. 발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진동으로 보아 크기가 범상치 않다. 여우는 절대 아니고, 늑대보다도 크다. 그러나 발소리가 들리진 않는다.
설마, 말로만 듣던 호랑이인가?
대만이 입술을 깨물었다. 예부터 북산족의 영토에는 호랑이가 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초원에서 호랑이를 본 사람은 손에 꼽았다. 인생의 절반을 이 땅에서 구른 대만도 호랑이의 발자국 하나 본 적이 없다. 그의 할아버지만이 호랑이를 직접 보았다.
아직 청년이던 시절, 할아버지는 설원을 지나고 있었다. 남쪽에서 태어난 할아버지는 그만큼 많은 눈은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무릎까지 오는 눈에 고생하며 겨우 길을 지나가는데 현지 안내인이 기겁하며 그를 막아세웠다. 그러더니 재빨리 부러진 나무 밑으로 일행을 데려가 숨었다. 안내인이 속삭였다.
“호랑이가 오고 있습니다. 틀림없어요.”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호랑이라는 동물이 있는 줄도 몰랐다. 호기심이 동해 할아버지가 물었다.
“그게 그렇게 무서운 짐승이오?”
“당연합니다! 그것은 재앙입니다. 어떤 부족은 그것을 신으로 모시기까지 합니다. 자신들을 해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요.”
숨을 죽이고 있으니 무언가 집채만 한 것이 지나갔다. 그것은 소리도 없이 다가와 할아버지가 숨은 나무 근처를 어슬렁댔다. 낮게 치는 천둥 같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바로 오른쪽에서 거대한 짐승이 나타났다. 눈이 쌓인 주홍 털과 얼룩무늬, 부리부리한 금색 눈, 그게 바로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숨을 못 쉬는 할아버지 일행을 빤히 쳐다본 뒤 어슬렁대며 사라졌다. 호랑이가 멀어지자 안내인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살았네, 살았어! 호랑이를 만나고도 살다니 천운인 게야.”
그 후로 당신은 설산에서 호랑이 만난 일을 틈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찌나 많이 얘기하고 다녔는지 사랑하는 손자에게 ‘할애비가 젊었을 때 말이다, 호랑이를 만났는데’만 나와도 주변 사람들이 저 양반 또 시작이라며 말리곤 했다. 그러나 대만은 매번 듣는 그 이야기가 매번 새로웠다. 호랑이. 재앙이자 신령. 경외스러운 생물체. 용맹하지만 먼저 해하지 않는 지혜로움. 대만은 호랑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아주 가까운 무언가로 여겼다. 나도 호랑이를 만나고 싶다. 어린 시절의 꿈이었고, 지금도 가끔 꺼내보곤 하는 빛 바랜 추억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만남을 바라지는 않았다. 야심한 밤에 내 목숨을 노리고 다가오는 호랑이? 미안하지만 재상이 보낸 살수만큼이나 사양하고 싶다. 대만은 심호흡을 하며 진동이 느껴지는 쪽을 응시했다. 화살은 여전히 시위에 걸린 채였다. 섣불리 쏘면 안 된다. 맹수일수록 겁이 많은지라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 한 건드리지 않는다. 선제공격을 가하거나 등을 보이고 달리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럼에도 활을 놓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암살자. 지금 조정에는 색목인의 아이를 감싼다는 이유로 대만을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출발하기 전부터 독약이나 살수를 보내 그를 죽이려고 안달이 났었다. 초원으로 나오자마자 활을 맞을 뻔했고, 다른 부족이 없는 곳에서 실제로 칼을 맞은 적도 있었다. 더 깊게 박히기 전에 대만이 그자를 때려눕히고 말을 몰아 가장 가까이 있는 부족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 지금껏 목숨이 붙어 있는 거지, 만약에라도 대만보다 무예에 능한 자였다면 그때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멍청한 것들. 걔네를 모으는 게 어디 쉬운 일인 것 같냐. 대만은 기가 찼다. 유목민은 부족 단위로 살아서 웬만하면 모이지 않는다. 대만의 집안이 그들과 무역을 하며 살갑게 지냈다지만 그것도 초원에 퍼져 있는 유목민의 수를 고려하면 극소수였다. 나칭족과 북산족이 훌륭한 예시이다. 애시당초 유목민이 농경민을 위해 움직일 이유가 대체 어디 있겠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식량과 서역에 내다 팔 수 있는 비단뿐인데. 이래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들이랑은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그거고, 대만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싡중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이쪽의 목이 먼저 달아나리라. 대만은 사방에 주의를 기울였다. 초원의 바람은 날카로워 소리를 모두 먹어버린다. 귀가 아니라, 발로. 눈으로. 대만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상기하며 발바닥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질적인 소리 하나가 섞였다. 신중하게 땅을 밟는 소리. 그러나 짐승의 것이 아니다. 무게가 다르다. 사람의 발걸음이다. 염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이래서 인생은 즐거운 법이라니까. 대만은 웃으며 몸을 돌려 소리가 난 방향으로 활을 쏘려고 했다.
“이봐.”
“와악!”
대만이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펄쩍였다. 그 탓에 화살이 애먼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는 허망한 눈으로 피잉, 잘못 날아간 화살을 좇다가 성질을 낼 심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따지는 것보다 멱살이 잡혀 끌려가는 게 더 빨랐다. 대만은 당황해 눈만 연신 깜빡거렸다. 대만이 입을 달싹여 말을 꺼내려 했으나 그가 더 바짝 잡아당겼다. 아슬아슬하게 입술이 맞닿지 않는 거리에서 그가 작게 타박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호랑이 있는 데서 소란을 피우게?”
“어? 아까 그게 역시 호랑이였나?”
“이게 지금 정신 안 차리지.”
사내의 목소리, 그러나 성인은 아니었다. 소년과 청년 그 어드메를 지나는 중인 듯했다. 그런데 키는 유난히 작았다. 유목민이 보통 농경민보다 작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한참 작다. 그 탓에 대만은 꺾인 허리가 슬슬 아파오고 있었다. 대만이 다급히 말했다.
“그래, 그런데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말까지 찾아야 하거든. 이것 좀 놔줄래?”
“어디서 반말이야.”
눈썹을 꿈틀하는 게, 사방이 어두운데도 눈앞에 그려진다. 맞다, 이 나이 즈음이면 대부분의 유목민은 성인이지. 대만은 짧게 반성했으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네, 네. 죄송합니다. 아무튼 갈 길 가시죠? 당신까지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웃기시네. 누가 누굴 걱정…..”
남자의 말이 멈추었다. 그 즈음 대만은 어둠에 눈이 익어 사내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얇은 능선 같은 눈썹에 끝이 동그란 코, 멋을 부린 듯 바짝 올린 머리카락과 나른하지만 바짝 힘이 들어간 눈꼬리.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제야 이곳엔 북산족밖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북산족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남자가 고개를 홱 들면서 대만을 노려봤다.
“왜 무국인이 여기 있지?”
대만의 말투와 옷차림으로 겨우 알아낸 모양이다. 대만은 태평을 가장하고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북산족이지, 맞지?”
이번에는 목이 졸렸다. 멱살을 당길 때부터 알아봤지만 키에 비해 악력이 상당했다. 건장한 편에 속하는 대만도 숨이 막혀 컥, 소리를 냈다. 저절로 이가 갈렸다. 노려보는 눈에 새파란 도깨비불이 켜진 듯했다. 남자는 손에 힘을 주며 경고했다.
“여기에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꺼져. 다신 찾아오지 마. 우린 약아빠진 농경인과 손 잡을 생각 없다.”
“약아 빠졌다니 듣는 농경민 기분 상하게….”
쉬익,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대만과 사내가 동시네 고개를 물렸다. 옆에 선 나무 기둥에 수리검이 박혔다. 사내가 놀란 눈으로 대만을 바라봤다. 대만이 한쪽 눈을 찡긋대며 말했다.
“말했잖습니까.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
“여기에서 제가 죽으면 당신 부족이 곤란해지지 않을까요?”
칫. 남자가 혀를 차더니 멱살을 틀어쥔 손을 놓았다. 대만은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위치를 들킨 건 찝찝하지만 수리검을 날려준 덕분에 이쪽도 살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대만은 신속하게 시위를 걸어 화살을 당겼다. 그러나 사내가 더 빨랬다. 슉 소리가 나더니 수리검이 날아온 방향에서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의 손에 활이 들려 있었다. 대만의 것과 비슷하지만 좀 더 작고, 강직해 보이는 활이었다. 저렇게 억센 활이면 잡아 당기는 데 힘이 엄청 많이 들 텐데. 대만은 침을 꼴깍 삼켰다. 사내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한 후 활을 내렸다. 그가 무심하게 대만을 지나치며 말했다.
“호랑이는 오지 않을 겁니다. 그게 자신을 향한 게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
“어, 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아직 말을 못 찾았거든요?”
사내가 한숨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어둠 속을 향해 퓌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어디에 있었는지 말굽 소리를 내며 말 한 마리가 다가왔다. 몇 시간 전 마차를 끌었던 그 녀석이다. 대만은 배신당한 기분으로 말의 고삐를 잡고 끄는 사내를 보았다. 그가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여튼, 여긴 호랑이가 아니라도 맹수가 많아서 야영하긴 위험한 곳인데. 방금 보니 추격자도 있는 것 같고. 천막으로 돌아가도 괜찮겠어?”
어라. 저쪽이 먼저 동행을 제안할 줄은 몰랐는데? 대만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를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내 방식이잖아. 대만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호의를 움켜잡았다. 여러모로 편의와 은혜를 베푼 저 소년에게는 미안하지만, 대만은 그를 최대한 이용해 먹기로 작정하고 그를 따라갔다.
“아, 잠시만!”
“왜.”
“그럼 나 게르 철수하는 것도 좀 도와줘라.”
“허어?”
“도와주세요.”
대만은 바로 저자세로 나왔다. 이거 골 때리는 인간이네. 그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어디 있는데.”
“아,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온 방향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으래.”
영 미심쩍다는 목소리에 대만도 슬 신경이 거슬렸다. 아니, 그보다 성인이라도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데 왜 자기는 반말하고 나는 존댓말 안 하면 온갖 성질을 팍팍 내는 거야? 이 점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대만은 뒤를 홱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 몇 살입니까?”
“그게 왜 궁금한데.”
“아니, 같은 성인인데 왜 그쪽은 말을 놓는 거죠? 똑같이 경어를 쓰던가, 똑같이 말을 놓던가 합시다.”
사내가 그를 빤히 노려봤다. 아니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대만은 당당했다. 남자는 성의껏 알려준다는 듯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부족장이고,”
그의 눈이 대만을 꿰뚫을 듯했다.
“당신은 그저 황제라는 인간의 졸개니까. 이제 됐나?”
사내는 매정하게 대꾸하곤 앞장섰다. 대만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말 그대로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이다. 처음 만난 사람이 북산족의 부족장이라니.
아니, 저렇게 어린 놈이 그런 공포정치를 해왔다고?
송태섭
북산족은 까마득한 바위산 위 고원에 자리잡은 민족이다. 광활하지만 가파르기 때문에 주로 산양을 타고 다니며, 낮엔 사냥과 목축을 하고, 해가 지면 호랑이와 늑대의 습격을 피해 일사분란하게 마을로 모인다. 드넓은 초원의 구석에 살기에 중앙 지역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거대한 전쟁에 낀 적도 없고, 농경민과의 접촉은 전무한 수준이다. 신비에 쌓인 북산족의 영토에, 대만이 외지인으로선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내려오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자들이 무장한 채 도열해 있었다. 흡사 전쟁을 준비하는 전사 같은 비장함이 돌았다. 그들을 조심스럽게 훑어본 대만은 그 안에서 묘한 긴장감과 불신, 멸시를 잡아 냈다. 부족장 자리가 위태롭다더니, 부족장에게 반항적인 무리가 섞여 있네. 그들은 태섭의 뒤를 따라온 무국인을 보고 자기들끼리 열심히 눈빛을 주고 받았다. 태섭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태섭과 키가 비슷한 소년이(유목민 기준에선 성인이겠지만) 태섭의 앞으로 나왔다. 태섭이 그를 불렀다.
“달재, 이상한 일은 없었고?”
“넵. 말씀하신 대로 무장 상태로 도열 중이었습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살갑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아하니 태섭의 오른팔 내지 간부인 모양이다. 저 어린 게? 대만은 태섭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태섭은 고개를 들고 전사들에게 말했다.
“수상한 불빛이라면 해결하고 왔다.”
“그러면 다행이고요. 역시 부족장님의 활실력이라면 이 초원에서 이길 자가 없으니까요.”
활쏘기에 자신이 있나 보지? 하긴 대만이 활을 들기도 전에 살수를 화살 하나로 해치운 것을 보면 ‘초원에서 최고’라고 뻐길 만한 실력이긴 하다. 달재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그제야 대만을 보고 주춤했다. 말 두 필을 끌고 온, 누가 봐도 초원의 후예는 아닌 듯한 남자. 달재는 무국 사람을 본 적이 없는지 태섭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 뒤에 있는 남자는….”
“무국인이다. 방금 전의 불도 저 남자 때문이었고.”
“무국인이라고요?”
달재가 기겁했다. 도열한 사내 중 일부가 몸에 힘을 주며 대만을 노려봤다. 무국인과 유목민은 경쟁자 혹은 철천지 원수다. 서로를 죽인 지 벌써 수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모든 사건에 한 발 떨어져 있던 북산족이라도, 농경지를 찾아 자신들의 초원을 침입해 오는 무국인을 반가워할 리 없다. 설령 부족장이 직접 데려온 사람이라고 해도.
태섭이 손을 들어 장정들을 진정시켰다. 그들은 무기를 내리면서도 부족장과 대만을 의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태섭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걱정 마라. 어차피 며칠 뒤에 나갈 테니까.”
아, 이건 아닌데. 나 당신네랑 할 일이 참 많은데. 대만은 뒤통수를 긁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달재가 먼저 안절부절하며 말했다.
“하지만 부족장님…. 아무리 그래도 무국인을 들이는 건….”
“위험하다? 그래. 위험하지. 그러니까 내가 감시할 거다.”
“예?”
달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래봤자 실눈이었다). 좌우에서 사내들이 술렁댔다. 대만도 태섭의 결정에 꽤 놀랐다. 자신을 감시한다는 것보다는 앞으로도 계속 북산족 안에 둘 거라고 선언했다는 점에서. 태섭이 대만을 돌아보고는 주변에 물었다.
“왜 그리 놀라나.”
이어서 그는 바위산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너머로 가면 다른 부족도 없어. 우리가 최북단이다. 그런데 무국에서 사람이 왔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노려보는 눈빛이 매섭다. 역시 다른 부족 복장을 입고 잠입해야 했나? 거짓말을 하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태섭의 의사는 단호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물러나기 전까지 내가 감시한다. 무국인, 너는 앞으로 내 허락없이 부족 내에서 움직일 수 없다. 알겠지.”
“이방인이 부족장의 의견에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대신 무국인 말고 수삼정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태섭의 눈썹이 꿈틀댔다. 쟤는 왜 한 쪽 눈썹만 저렇게 움직일까. 대만이 무해하게 웃으며 제 이름을 반복해 불렀다.
“수삼정. 그게 제 이름이라서요.”
“농경 놈들은 이름 한 번 특이하게 짓는군.”
장정 사이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대만이 울컥했다. 특이한 이름이라고? 내 이름이 뭐 어때서? 자기들은 얼마나 대단한 이름이시길래? 그러나 성질을 낼 수 없어 대만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태섭이 장정을 호통쳤다.
“지금, 부족장이 데려온 사람을 고작 이름으로 흉보는 거냐.”
장정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여기도 이름으로 사람 놀리는 게 무례한 행동이구나. 대만은 조심스럽게 태섭의 어깨를 찔렀다. 이 인간은 또 귀찮게. 태섭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대만이 멀뚱히 물었다.
“저, 그럼 전 부족장님을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마음대로 불러.”
아, 함부로 이름을 알려주면 안 되는 문화인가 보지? 대만은 방금 전 제 질문에 안색이 파랗게 질린 달재를 보고 확신했다.
어수선한 첫만남을 가진 후 대만은 태섭의 게르로 들어갔다. 안에는 어머니와 누이로 보이는 자가 있었다. 다른 가솔은 보이지 않았다. 부족장의 게르라면 있을 법한 호위병의 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뒤를 치지. 아니면 사람을 쉽게 못 믿는 편인가. 그러면서 외부인인 자신은 덥석 자기 게르 안으로 들이고? 기준이 좀 특이한가.
대만은 자신을 경계하는 그들에게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북산족은 언어에 대한 정보도 턱없이 부족해, 대만도 완벽하게 소통하기는 어려웠다. 태섭과 매끄럽게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가 무국의 말을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대만은 두꺼운 양가죽 겉옷과 활을 구석에 내려 놓으며 물었다.
“무국 말을 아네?”
“어릴 때 잠시 남경에 간 적이 있거든요.”
남경은 무국의 수도다. 여기에서 꽤 멀 텐데. 대만은 자신이 무국에서 본 북산족 관련 책에 관련 내용이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북산족 부족장 가족이 남경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읽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게 있었으면 준호가 나한테 보여줬겠지. 대만은 지금쯤 초서를 정리하며 자신의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을 친구를 생각했다. 비공식 방문이었다면 기록이 없을 법도 한데. 대만은 턱을 매만졌다.
태섭은 묵묵히 무장을 풀고 옷을 벗었다. 십 년 전, 아버지가 형과 자신을 데리고 남경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식 사절로서 방문한 건 아니었다. 워낙 어렸던데다 그 당시 후계자는 형으로 정해진 상태였기에, 태섭은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비밀리에 아들들을 데리고 남경에 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 속에 남은 남경은 매우 즐거운 곳이었다. 화려하고, 쓸데없이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황량한 땅에서 살아왔던 태섭은 꽃밭 속을 정신 없이 헤맸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그만 길을 잃었는데, 누군가 손을 잡고 아버지께 데려다 주었다. 그 사람의 얼굴이 이제는 빛바랬지만, 그가 손에 쥐여준 꿀 절인 사과 맛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그 후로 남경은 물론 무국의 국경에 가본 적조차 없지만, 태섭은 무국 말을 계속 익혔다. 형이 자리를 물려받고 자유로워지면 무국에 가야지. 그 어린 날 만난 사람을 찾아가야지. 태섭은 다른 문장은 몰라도 이 말은 매끄럽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례합니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남경에 살았던 소년인데, 저와 나이가 비슷할 겁니다. 남들보다 머리 반 통은 더 크고, 눈은 암녹색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이 잇달아 죽고, 모든 짐을 짊어지면서 소원은 아득히 멀어졌다. 형이 살아 있었다면 아무도 태섭이 무국으로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부족장이다. 자신의 호기심보다 부족의 안녕과 평화, 발전을 우선해야 한다. 태섭은 몇 번이고 자신을 벼리고 단단히 했다. 필요 없는 것은 애써 버리려고 했다.
뒤를 돌아보니 대만은 어느 새 안나와 친해져선 떠드는 중이었다. 대만은 간간히 서투르게나마 북산어를 썼고, 그때마다 아라가 웃으며 대만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대만은 머쓱해하며 같은 단어를 몇 번 입속에서 되뇌고, 곧 손짓을 조금씩 섞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이름, 나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대만은 활을 쏘는 시늉을 했다. 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오빠, 활로는 초원 제일이에요. 매도 자기가 맞은 줄 모르고 떨어진다니까요.”
“에이, 거짓말.”
“진짜라니까요! 우리 오빠가 그렇게 잡은 새가 몇 마리인데. 아저씨는 활 잘 쏴요?”
그러고 보니 저 인간, 몇 살이지. 아까 산 밑에서 자기 나이가 어쩌네 했던 걸 보아 성년은 훨씬 넘은 듯한데. 만약 그가 초원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열 살짜리 아이가 있어야 한다. 무국 사람은 혼인이 늦나? 태섭의 짐작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대만도 무국에선 혼기를 놓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가 조정 대신들에게 어떤 말을 듣는지 안다면 태섭은 그들을 향한 비하를 안주 삼아 밤을 샐 수 있을 것이다.
“나도 활 잘 쏴.”
“거짓말.”
“진짜라니까?”
“그런데 저 어른인데 왜 반말해요?”
대만이 기겁하며 아라를 보았다. 아라는 깔깔 웃으며 손가락 열 개를 쫙 펼쳤다가, 다섯 개를 접었다. 대만이 고개를 돌리며 태섭에게 물었다.
“열다섯인데 성인이라고? 야, 너네 성년이 우리네보다 빠르다곤 하지만 어우….”
“보통 열네 살이면 다 짝 찾아서 식 올려요.”
“진짜?”
무국에서 열일곱이 되기 전에 식을 올렸다가 적발당하면 부모가 쌀 스무 가마니를 벌금으로 내거나 태형 40대를 맞아야 한다. 그러나 여러 가정사와 경제적 문제로 조혼은 지금도 도시에서 암암리에 성행했고, 촌에서는 일상다반사로 이루어졌다. 좀체 뿌리 뽑히지 않으니 그냥 성년 나이를 낮추는 게 어떠냐는 상소까지 올라올 지경이다. 그런 무국에서도 남녀가 스물 넘도록 짝이 없으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대만이야 공인된 하자품이니 혼사가 들어올 리 없고.
그러면 태섭도 아라도 혼기를 한참 놓쳤다는 말이 되는데, 대만은 그 이유가 두 사람의 불안정한 입지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예로부터 외척은 유목민 농경민 가리지 않고 적폐로 여겨졌다. 무국 이전에 천하를 호령하던 상국이 갑작스레 무너진 이유도 바로 외척이었다. 지도자가 힘이 약한데 그 아내나 어머니 가문이 힘이 세면 바로 주도권이 역전된다. 태섭은 그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향의 가정도 있다. 만약 태섭이 혼례를 치를 나이가 되기 전에 전 족장이 죽었다면? 그러면 혼례를 올리지 않는 게 당연하다. 배후를 잃은 부족장에게 무슨 힘이 있는가. 기껏 해봐야 아홉 살에서 열두 살. 어린애 따위야 자기네 힘으로 주무를 수 있다고 판단했으리라. 그런데 저 다부진 놈이 뜻대로 휘둘려주지 않았고. 그래서 제거하기로 했더니 악착같이 살아 남았다. 이러면 남매가 혼기를 놓친 이유가 설명이 된다.
대만의 경악스러운 반응에 태섭이 눈썹을 실룩이며 물었다.
“대체 무국 사람은 언제 결혼을 하길래 그런 반응이에요?”
“무국? 보통 열일곱에서 열아홉 사이에 혼사를 올리는데.”
“댁은 몇 살이고?”
“스물여섯.”
“아저씨.”
“야.”
“아라가 무슨 말 했는지 알고 화를 내요.”
“누가 봐도 ‘으휴 저 노총각’하는 얼굴이잖아!”
대만이 손으로 정중하게 아리를 가리키며(그래도 부족장 동생이라고 예우를 대하는 꼴이 왠지 눈에 거슬렸다) 항의했다. 억울해하는 대만을 보고 아라는 킥킥 웃었고, 그의 어머니가 사과했다. 태섭은 살짝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내가 웃다니. 근 7년 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태섭은 대신 눈에 힘을 주어 대만을 째려보았다. 왜, 내가 못 할 말 했냐? 대만은 바로 쭈그러졌다. 태섭이 구석에 쌓인 이불더미를 가리미켜 말했다.
“이부자리는 알아서 펴라. 네놈 덩치에 맞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어, 고맙다.”
대만은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그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진짜 맞을 이불이 없을 거 같은데. 뭘 덮어도 발이 삐죽 나올 것 같은 크기다. 태섭은 이불을 뒤져 그나마 큰 것을 찾아냈다. 막상 펼쳐서 상태를 확인하니 이것을 저 무국인에게 주어도 될까 고민이 들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이불이었다. 형이 쓰던 것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와 형은 북산족 사람 중에서 유난히 키가 컸다. 그들의 가재도구는 남들의 두세 배나 컸다. 이불도, 수저도, 옷이나 신발, 무기도 거대했다. 태섭이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아버지만큼 클 줄 알고 베냇저고리며 꼬까옷도 모두 큼직하게 만들어 입혔다. 결국 6자가 되기 전에 성장이 멈추었지만.
아무튼 이방인에게 전 부족장의 이불을 덮게 할 수는 없다. 그건 그를 부족장의 가족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저 사람을? 태섭은 여전히 아라와 수다를 떨고 있는 대만을 봤다. 푼수처럼 대만은 웃음이 헤펐다. 방금 전에도, 위험하다면서 실실 웃기나 하고. 무국이 어지간히 살 만한가 보지. 나약한 농경민 같으니라고. 초원에 홀몸으로 던져 놓으면 한 달도 안 되어 죽을 족속 주제에.
태섭은 아버지의 이불을 곱게 개어 도로 내려놓았다. 그런데 진짜 이것 말고는 저 몸뚱이에 맞을 모포가 없어 보이는데. 턱을 괴고 고민하는데 대만이 불쑥 어깨 뒤에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그거 맞을 거 같은데, 왜 접어요?”
“죽고 싶어?”
대만은 얌전히 가슴팍에 손을 모으고 물러났다. 아라가 둘을 빤히 쳐다보더니 돌연 성을 냈다.
“오빠! 그래도 손님으로 온 사람에게 말이 그게 뭐야!”
세상에, 송아라.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데 넌 왜 오빠 편을 안 들어주냐. 태섭은 아라에게 한소리 하는 대신 대만을 뚫어쳐라 노려봤다. 대체 무슨 말로 삶아 먹었는지 모르지만 아라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다니. 입담이 보통이 아니다. 태섭은 대충 아무 모포를 주워 대만에게 던졌다. 대만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완벽하게 모포 덩어리를 받았다.
“오늘은 그거 덮고 자. 내일 다른 사람에게 큰 모포가 있는지 물어볼 테니까.”
“어, 넵?”
“오빠, 그런데 둘 다 성인인데 오빠도 대만 아저씨한테 존댓말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왜 무국인한테….”
태섭이 아라의 딴지에 대꾸하다가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만, 방금 뭔가 이상했는데. 태섭은 대만을, 정확히는 대만이 들고 있는 모포를 보았다. 대만은 형태가 잡혀 있지 않은 모포를 정확히 받아냈다. 팔을 더 뻗거나, 몸을 더 내밀거나 하지 않고.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살수를 끌고 왔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태섭은 확신했다. 저 자는 위험하다. 무기를 챙겨온 사람이니 추방된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추방된 게 아니라, 도망쳐 온 것인가? 그 쪽은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무국인이라면 안쪽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것을 택하겠지, 약육강식이 만연한 초원의 삶을 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초원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아니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초원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아무 정보도 없을 북산족을 찾아온 이유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절대 틈을 보이지 말자. 태섭은 다짐했다. 그가 무엇을 노리고 이 오지까지 발을 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살수가 붙은데다가 운동신경이 농경민이라고 하기엔 비상하게 좋은 것을 보아 이쪽을 이간질하러 온 첩자이거나, 이들의 정보를 긁어모아 황제에게 바치려는 자가 틀림없었다. 휘둘리면 안 된다. 허술하고 어리숙하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그러다간 잡아 먹힌다. 아버지도, 형도. 남을 쉽게 믿었다가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마음을 굳힌 태섭이 성큼성큼 대만에게 걸어갔다. 대만이 멀뚱하게 쳐다봤다. 한쪽 볼이 난롯불을 받아 노랗게 익었다. 밝은 데에서 보니 눈동자 색이 신기하다. 초원의 관목보다 짙은 녹빛이라니. 무국인은 모두 까만 눈에 까만 머리카락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도 아주 새까만 빛이 아니라 갈색이 돌았다. 다른 부족 중에서도 이렇게 생긴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 형이 서역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색색깔의 눈과 머리카락을 가졌다고 알려준 것이 떠올랐다. 설마 무국에서 나고 자란 서역인인가.
태섭이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니 대만도 슬슬 눈치가 보였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나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그나저나 내 눈은 왜 자꾸 빤히 보는 거야? 무국에서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는 것은 실례되는 행동이다. 유목민 중엔 이 행위를 축복으로 여기는 부족도 있긴 한데, 북산족에도 이런 풍습이 있나. 대만은 먼저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그, 눈빛이 엄청 열렬합니다?”
태섭의 주먹을 쥐었다. 대만은 다시 입을 꼭 다물었다. 그는 품에 안은 모포를 달랑대며 항의했다.
“알았어, 알았어요. 안 자고 떠들어서 그런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부족장님 여동생 분한테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그냥 빨리 자라.”
“넵.”
“나랑 같이.”
“네?”
대만은 기겁하며 게르 벽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헉, 하고 아라도 숨을 삼켰다. 저 자식 여태 결혼 안 한 게 엄청 복잡한 이유인 줄 알았는데 그냥 쑥맥이거나 개변태여서 그런 거 아냐? 같이 자라니 쟤 저게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알기는 하는 거야? 알기는 하는 건지 아니면 대만과 아라의 반응을 보고 떠올랐는지 태섭의 귀때기가 실시간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대만의 얼굴이 더 붉어진 건 당연지사였다. 먼저 빽 소리를 지른 사람은 태섭이었다.
“미쳤어요? 당신 밤중에 튀나 안 튀나 감시하게 옆에서 자라는 거지 대체 뭔 상상을 한 거예요? 이러니까 그 나이 먹도록 장가를 못 가지!”
“야 니가 말해놓고 왜 나한테 성을 내! 변태는 너겠지 새꺄! 어? 너 그런 말 엄청 자연스럽게 한다 아주? 그러니까 아직까지 혼사 얘기가 안 들어오지!”
“말 다했어요?”
둘 다 흥분한 탓에 존댓말과 반말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한참이나 떽떽댔다. 둘의 말싸움이 멈춘 것은 태섭의 어머니가 조용히 ‘이제 잘까’라고 말한 후였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한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누웠다. 방 안의 전등이 꺼지고 모닥불 타들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래도 게르 안이 추웠다. 사막의 밤, 고지대에서 맏는 심야란 그런 법이다. 대만은 체온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그는 초원에 살기에 적합한 몸이 아니었다. 무국에서도 큰 키로 꼽히는 편인 대만은 몸을 데울 때도 남들보다 많은 열을 필요로 했다. 초원에서 떠돌 때는 제일 두꺼운 모포를 끌어안고 몸을 둥글게 말아야 동사를 면할 수 있다. 대만은 습관대로 모포를 말기 위해 끌어당기다가 볼멘소리를 들었다.
“그만 좀 가져가요. 이러다 맨몸으로 자겠네.”
“아, 미안. 버릇이라서.”
대만은 스르륵 모포를 손에서 놓았다. 뭔가를 끌어안고 자는 버릇이라도 있나. 태섭은 눈을 깜빡이다가 에이씨 하며 일어났다. 역시 따로 자자고 말할 걸 그랬나. 대만은 금방 미안해져서 태섭의 눈치만 보았다. 태섭이 뒤통수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모포가 슬쩍 자기 쪽으로 밀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면서 봤더니 대만이 태섭에게 모포를 몰아주고 있었다. 태섭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뭐 해요.”
“다른 이불 찾아서 덮을게요. 족장님은 그거 덮고 주무세요. 보아하니 화려하고 큰 게 원래 부족장 용인 거 같은데. 제 키 때문에 같이 덮거 자라고 한 거잖아요?”
눈치도 빠르다. 모포 무늬는 언제 확인했는지. 대만은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포가 쌓인 쪽으로 까치발을 한 채 걸어갔다. 미약한 모닥불이 내는 불빛에 의존해 대만은 아라와 어머니를 피해 발을 옮겼다.
좀 더 몸에 맞는 거 없나. 대만은 한참동안 모포를 뒤적였다. 뭐가 제일 큰지 알 수 없었다. 에이, 그냥 그거 덮고 잘 걸. 태섭에게 밀어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후회가 밀려왔다. 대만은 맨 아래에서 그나마 제 몸에 맞아 보이는 것을 꺼냈다. 아래에 고인 것을 빼냈으니 당연히 다른 것들이 휘청댔다. 어, 대만은 황급히 쓰려지려는 모포를 받치고 엉성하게 세웠다. 똑바로 세우려고 낑낑대는데 등 뒤에서 팔이 나타났다. 태섭은 모포를 하나하나 새로 게우고 쌓아 원상복구했다. 그는 다른 것을 쥐고 대만을 쳐다봤다.
“아래에 있는 걸 무식하게 가져가려고 하니까 이렇게 되지. 하튼 손이 많이 가.”
“죄송합니다. 역시 그냥 족장님이랑 한 이불 덮고 자면 안 되겠습니까? 이거 맞는 게 없어 보이는데.”
대만이 눈을 반짝였다. 뭔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고 난리야. 대만의 행동은 어떻게 봐도 애교가 아니었지만 태섭의 머리는 앙탈로 받아들였다. 태섭은 대만이 껴안은 모포를 빼내고 자신이 들고 있던 모포를 쥐여주었다. 대만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자 태섭이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추워서 그런 거지? 덩치는 큰데 근육은 없는 사람들은 추위도 제법 잘 탄다고 하더라고.”
“근육 아주 없는 편은 아닌데…..”
“그게? 힘 조금이라도 주면 팔 부러질 거 같은데.”
대만은 슬쩍 자신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아니 내가 언제 부러뜨린다 협박했냐고. 태섭은 어이가 없었다. 대만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정도면 무국에선 강골이니 장군감이니 하는 말을 듣는데. 이 몸뚱아리로는 초원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부러질 것 같다는 말은 조금 너무하지 않냐. 그런 말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대만은 입술을 비죽였다. 한소리 들을 때마다 저러는 거 같은데, 버릇인가? 덩치는 멀대 같아서 애 같은 구석이 있네. 태섭은 딴 생각을 하며 모포를 가리켰다.
“저거 위에 이거 덮고 자라고. 그러면 덜 춥겠지.”
대만은 모포를 흘긋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 사람 챙기는 걸 좋아하네 이녀석. 만난 지 몇 시진은 되었을까 싶은 상대가 추워하는지도 알아보고, 위에 더 덮을 모포도 선뜻 내여주고. 심지어 처음 준 것도 그나마 큰 것이었던데다, 나중엔 부족장 용 모포도 덮고 잤는데. 그냥 대충 하나 던져주고 알아서 자든 말든 내버려두었으면 되었을 일을 귀찮다고 하면서도 신경 쓰고 있다.
“다정한 녀석이었네.”
“뭐라고요?”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입밖으로 나왔다. 태섭이 별안간 눈썹으로 산을 만들며 따졌다. 아~무것도 아니다. 대만은 시치미를 떼며 제 잠자리로 돌아갔다. 방심할 수 없게 만드네. 태섭은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따라 누웠다.
“또 이불 가져가면 가만 안 둬.”
“누구 씨가 무서워서 그러지도 못하겠네요.”
그리고 새 모포가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대만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잠을 청했다.
초원이 으레 그렇지만 고산지대의 아침은 유독 춥다. 대만은 몸을 부르르 떨며 게르 밖으로 나왔다. 태섭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대접에 받은 찬 물을 바가지로 퍼 얼굴을 닦았다. 눈 사이와 얼굴에 낀 잠결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로 씻어내자 정신이 번쩍 깼다. 대만은 손을 허공에 털며 허리를 세웠다. 태섭이 자기가 쓰던 헝겊을 내밀었다. 아무 데나 털지 말고 이걸로 제대로 말려요. 어젯밤 모포를 두고 티격태격한 후로 태섭은 묘하게 그에게 존댓말을 썼다. 이게 정말 존댓말인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반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장족의 발전이었다. 역시 친해지는 데엔 같이 자고 먹고 노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대만은 헝겊을 가져가며 웃었다.
하나씩 게르 위로 연기가 피어 올라왔다. 동은 트지 않았지만 북산족의 하루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태섭은 게르 뒤쪽에 있는 우리로 향했다. 그는 큰 우리를 지나쳐 한참 더 위에 있는 작은 곳으로 걸어갔다. 북산족은 부족장의 가축을 따로 두는구나.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 가지는 여타 유목민의 관습을 생각하면 특이한 전통이었다. 원래 족장은 특별 취급해야 하는데, 연달아 자리가 바뀌면서 그 권위가 흔들려 반란이 일어나고 있나 보군. 대만은 긴 다리를 휘적이며 태섭을 따라갔다.
북산족이 사는 바위산은 경사가 가파르고 계단처럼 난 틈이 낮아서 다리가 긴 사람은 올라가기 힘든 구조였다. 하지만 대만은 금방 바위산에 적응해 별 힘 들이지 않고 금방금방 올라갔다. 태섭은 자신을 따라오는 대만을 엿보았다. 몸이 얇지만 농경민치곤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어깨가 넓고 각진데다 다리가 단단하다. 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동트기 직전 새벽녘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화살을 잘 쏜다는 건 허영이 아니었을 수도. 태섭은 뒷목을 매만졌다.
북산족은 원래 부족장과 부족을 가리지 않고 가축을 같은 우리에 넣어 키웠다. 그러나 태섭의 염소와 양을 몰래 가져다 쓰는 무리가 적발된 후로는 분리해 사용하고 있다. 공동으로 소유하고 분배한다는 게 남의 양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부족민이 같은 생각인 건 아니었겠지만, 식구도 적은데 갖다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후로 태섭은 자신의 것을 남들에게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내 것은 내가 확실히 지킨다. 타인의 호의를 믿지 말아라. 열 살에 부족장이 된 태섭이 깨달은 진리였다.
양 스무 마리, 염소 열 마리, 소 열 마리가 태섭이 기르는 가축이었다. 뒤에는 매 사육장도 있었다. 매 사냥은 형이 즐겨 쓰는 방식이었다. 형은 초원의 명사수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매 조련사이기도 했다. 실력을 갈고 닦은 끝에 활솜씨는 그럭저럭 형을 따라할 수 있게 되었지만, 태섭은 매를 다루는 데 영 소질이 없었다. 매는 태섭을 볼 때마다 울며 경계하기 바빴다. 부족에게도 얕보이는데 금수한테까지 호통을 듣다니 억울했다.
2년 동안 씨름하다가 길들이기를 포기한 후로, 태섭은 그를 꺼낸 적이 거의 없었다. 아주 가끔 심심해할까 봐 풀어줄 때를 제외하곤. 그대로 멀리 도망가버리면 좋을 텐데 놈은 항상 돌아왔다. 자신의 모든 것은 여기에 있다는 듯이. 그게 더 답답한 줄도 모르고. 다른 이에게 주려고 해도 워낙 형의 손을 많이 탄 녀석이라 형이 아니면 안 된다고 성화였다. 그러니 매 사냥이나 매 길들이기라면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도 두 손 두 발 들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만은 우리 안을 둘러보다가 매를 발견하고 반가워했다.
“너희도 매 사냥을 하는구나.”
“고지대니까요. 농경민은 할 일 없죠?”
“무슨 소리야. 우린 활이나 덫보다 매를 더 많이 쓰는데.”
“그래요?”
대만이 사는 곳은 숲과 벌판,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당연히 농사꾼보다 사냥꾼이 더 많은 곳이었는데, 이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 매사냥이었다. 몰이꾼 발을 굴려 꿩을 몰면, 주인이 ‘매 난다’고 외치며 매를 날린다. 매는 힘차게 날아올라 구석으로 몰린 꿩을 단단한 발톱으로 낚아채 주인에게 가져온다. 대만의 고향과 동네에선 매에게 함부로 사냥감의 고기를 주지 않았다. 그러면 매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따로 챙겨온 생고기를 보상으로 주었다.
“이 매 이름은 뭐야?”
“호박이요.”
눈이 호박색이니까 호박이. 아라가 붙여준 이름이다. 맹금류는 다 눈이 노란데 무슨 소리냐고 태섭이 대꾸하자, 준섭이 웃으면서 ‘호박이’로 짓자고 해서 호박이가 되었다. 호박이는 아라와 형에게는 다정하면서 태섭이 보이면 몸을 부풀렸다. 네가 그 이름으로 딴죽을 걸어서 그런 거야. 호박이는 자기 이름이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다. 준섭이 호박이의 배를 쓰다듬으며 한 말이 생각났다. 대만은 호박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호박아~, 안녕?”
“손 흔들지 마요. 걔 맹수라서 쫀….”
태섭은 양 우리의 문을 열던 중 대만의 행동에 기겁하며 돌아봤다가 멈칫했다. 바로 눈앞에서 뭐가 움직이는데도 호박이는 고개만 갸웃거릴 뿐 반응이 없었다. 누가 다가가 손을 내밀기만 해도 사정없이 부리가 나가던 그 호박이가 아니었다. 호박이는 대만의 손을 쳐다보다가 대만의 얼굴을 살피더니 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호응했다. 대만이가 웃으며 태섭을 돌아봤다.
“야, 얘 내가 마음에 든 거 같은데?”
“네, 착각은 자유니까요.”
“얌마, 진짜라니까? 호박아, 네 주인이 나 질투한다.”
“걔 주인 따로 있어요.”
“진짜? 누군데?”
오래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사람. 태섭은 입을 여는 대신 염소 우리와 소 우리의 문을 열었다. 가축이 쏟아져 나왔다. 태섭이 목동용 지팡이를 흔들며 말했다.
“가요. 도와줄 거면.”
밝아오는 초원에서 가축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완연한 봄을 맞아 낮은 풀이 열심히 올라오고 있었다. 가축들은 풀을 뜯으며 배를 채우고, 성장하고 날이 따뜻해지면 새끼를 밸 것이다. 유목민은 새로운 식구와 자원을 얻는다. 유목 세상은 농경과 다른 방향으로 순환하며 서로 살아간다.
대만은 무국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뒤에서 양떼를 몰았다. 소때를 모는 태섭의 이마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무국은 무슨 저런 낯간지런 노래를 부른다냐.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꾹 참고 풀이 많은 곳으로 소를 몰아갔다. 대만이 옆으로 다가오며 채근했다.
“부족장님도 노래 불러보세요.”
“예? 아니 뭐?”
해가 올라오면서 다른 부족민이 일어나 활동을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걸리는 것이 없는 지평선이라 말이 잘 들리는데다 유목민이라 사람들이 귀가 밝았다. 그들의 눈을 의식했는지 대만이 먼저 존댓말로 말을 걸었다. 태섭도 급히 말투를 고쳤다. 그가 눈을 반짝이면서 재촉했다.
“부족장님은 소몰이 하면서 노래 안 부르는 쪽인가요?”
“부를 필요가 있나요.”
“심심하잖아요. 노래 부르면 더 즐겁기도 하고.”
“쓸데없는 일은 안 한다는 주의라서.”
“그럼 모포 하나 더 꺼내주는 일은 쓸데없는 일이 아닌가요?”
태섭이 눈을 부라렸다. 저걸 확 걷어찰 수도 없고…. 손님을 존중하는 부족 관례상 다른 부족민의 눈이 있는 데에서 대만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어제부터 자꾸 세상이 그를 돕는 느낌에 억울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이렇게 운 좋은 사내가 있을 수 있나. 대만이 들었다면 배를 잡고 웃을 발언이었다. 대만은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약간의 운이 몇 번 따랐지만 대만은 자기 힘으로 삶을 꾸려왔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자부심이 큰 사내였다.
“이거 봐요. 지금도 미운 말 하나도 안 하고. 부족장님 안 그런 척 하면서 사람이 은근 따뜻한 구석이 있네~. 있죠, 무국에서 이런 사람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새침데기~.”
“알고 싶지 않다고 했다.”
태섭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대만의 얼굴을 밀어냈다. 대만이 진저리를 치며 물러났다. 어유, 한참 작으면서 손은 왜 이렇게 딴딴하대. 그 짧은 순간 대만은 태섭의 17년 인생을 그 손바닥을 통해 헤아릴 수 있었다. 너도 참 고생이 많았구나. 그 어린 나이에. 대만은 태섭의 손을 만져보고 싶었으나 태섭이 금방 떨어져 소매 안으로 숨겨버렸다. 아쉬움에 통이 큰 소매만 힐끔댈 뿐이었다. 눈길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태섭이 다시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왜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럼 사람을 왜 그렇게―.”
동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태섭은 씩씩대다가 됐어요, 하며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만은 영문을 모르고 소를 몰아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태섭을 다급히 양떼를 같은 방향으로 몰아갔다. 족장님? 족장님! 같이 갑시다! 대만은 부리나케 따라가며 태섭을 불렀다. 태섭은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목에 힘을 주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동정하는 게 싫었다. 그는 족장이다. 연민은 한 무리의 지도자에게 외려 독이었다. 강자만이 살아남고, 살아남는 자만이 진리인 초원에서 동정의 대상이란 약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약한 사람으로 보는 게 싫었다. 두려워도 있는 힘껏 강한 척한다. 꽃다운 나이에 저문 형이 남긴 유언이자 조언이었다. 태섭은 그것을 단 한 순간도 거스른 적이 없었다. 아무도 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제게 덤비는 것들을 매정하게 잘라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생존이 우선인 이기적인 생물이었기에 몇 년이 지나자 부족 내에서 부는 피비린내에도 익숙해졌다. 피도 눈물도 없는 호랑이 족장. 북산족 내외에서 통하는 태섭의 별명이었다. 다른 부족은 폭군이 나왔다며 교류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족과, 떠돌이 상인의 딸 한나 외에는 누구도 태섭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태섭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손에 피를 묻히기보단 풀피리를 만들어 부는 것을 좋아했다. 장로와 기싸움을 하고 난 뒤 마시는 새벼 꽁기를 좋아했다. 사냥을 좋아하고, 새끼 양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좋았다. 드넓은 벌판을 내달리면 상쾌했다. 그것은 냉정한 부족장에게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대만은 별 노력도 없이 태섭의 본색을 자꾸 끄집어 냈다. 만난 지 만 하루도 안 되었으면서 가깝게 구는 게 못마땅했다. 빨리 볼일이나 보고 무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태섭은 발에 채이는 돌을 걷어찼다. 대만이 성큼 따라와 태섭의 목에 팔을 걸었다.
“거 참, 쬐끄만 주제에 발은 빨, 우와악!”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태섭은 목에 걸린 팔을 붙잡은 뒤 몸을 숙여 대만을 내동댕이쳤다. 이러다간 허리 부러진다! 대만은 그 짧은 순간에 낙법을 취해 충격을 최소화했다. 그대로 아프긴 아팠다. 대만은 땅 위에 누워 허라와 엉덩이를 잡고 끙끙댔다. 당황한 건 태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맹세코 대만을 다치게 하거나 위협을 가할 생각이 없었다. 내동댕이치면서 태섭도 당황했다. 그런데 다시 안기도 전에 대만이 몸을 허공에서 비틀어 착지했다. 이 사람 진짜 무국인 맞아? 색목인이나 유목 쪽 피가 섞인 거 아냐? 태섭은 대만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선천적인 것보다는 살기 위해 배운 기술이었지만 그의 배경을 모르는 태섭의 입장에선 타당한 추측이었다.
그런데 위협적인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행동이 영. 태섭은 나 죽어라 데굴데굴 구르는 대만을 보고 방금 전까지 그를 경계한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엄살인 거 아니까 일어나. 발로 엉덩이를 차자 악 소리를 내며 금방 몸을 일으켰다. 이제 좀 정신 차리고 덜 까불겠지 했는데 웬걸, 바로 고함을 빽 질렀다.
“야!”
“깜짝이야, 귀청 떨어지겠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어떻게 발로 까냐!”
그게 뭐? 궁둥짝 때리는 정도야 어느 민족이나 그런데. 설마 무국은 매질이 없나? 그래서 그 사람이 낯선 유목민 아이에게 상냥했던가. 태섭은 대만 몰래 그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고, 무국은 스물부터 결혼 적령기라고 하니, 이미 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모습일까. 훌륭한 남편이 되었을까?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었을까. 태섭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몰래 상상했다.
“야, 저기 소 한 마리 도망간다.”
“뭐? 야! 돌아와!”
태섭이 지팡이를 흔들다가 대만에게 소떼를 맡기고 얼룩소를 쫓아 달렸다. 안 그래도 툭하면 탈출하려고 눈치를 보던 녀석인데 기어코 사달을 냈다. 놈은 자유를 만끽하며 방향도 확인하지 않고 달렸다. 그쪽으로 가면 숲이라고! 태섭은 부리나케 얼룩소를 따라잡았다. 태섭의 질주를 보던 대만은 작게 감탄을 했다.
“쟨 달리기도 빠르냐…. 산양도 잘 타던데.”
집념만으로 발을 움직인 끝에 태섭이 얼룩소를 앞질렀다. 얼룩소는 앞길을 막아선 태섭을 보고 멈추어 서더니 발을 굴리며 고개를 숙였다. 들이박고서라도 가겠다는 의지다. 태섭은 지팡이를 들고 놈과 대치했다. 저 뿔에 받히면 늑골이 부러진다. 그것만 부서지면 다행이게? 저 덩치에 치이고도 죽지 않으면 그게 다행이다.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까 고민하는 중에 슉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곧 얼룩소가 펄쩍 뛰며 몸을 절뚝였다. 몸을 보니 엉덩이에 화살이 박혔다. 세 개의 깃 중 하나가 초록색이었다. 태섭의 화살도, 다른 부족민의 것도 아니다. 태섭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대만이 시위를 당긴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대만이 미소 지으며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자기가 한 건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좋아하긴, 남의 가축 엉덩이에 구멍을 내놓고 잘 하는 짓이다. 태섭이 눈살을 찌푸렸다.
게르로 돌아가는 내내 대만은 자신이 얼마나 잘했는지, 태섭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태섭은 내내 똥 씹은 표정으로 흘려들었다. 들어온 후에도 대만은 식사를 준비하던 안나에게 붙어 자신의 활약을 떠벌리기 바빴다.
“다~ 제 덕분이라고요, 부족장님. 소가 얼마나 무서운데. 걔한테 한 번 들이받히면 바로 끽! 소리도 못 내고 죽는다고요.”
“남의 가축한테 활 쏜 게 뭐가 자랑이라고 떠드실까.”
“잘못했습니다.”
대만이 넙죽 엎드렸다. 태섭은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채소를 썰어 보글보글 끓는 냄비 안에 집어 넣었다. 옆에서는 아라가 염소 젖을 젓고 있었다. 아라는 대만과 태섭의 눈치를 보다가 대만에게 말했다.
“얼룩이는 이제 가죽 가치가 떨어지니까, 삼정이 사야 해요.”
“내가?”
대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젯밤에 얼마나 떠들었는지 이제는 아라가 길게 말해도 대만은 얼추 알아들었다. 그래도 북산족 말은 서툴러서 태섭의 통역을 빌려야 했다.
“저 돈 없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아라 아가씨.”
태섭은 그 말을 자기 멋대로 꼬아서 통역했다.
“자기 돈 없어서 못 산대.”
아라와 대만이 심통난 얼굴로 태섭을 노려봤다. 쳇, 속이는 데 실패했다. 하여간 눈치는 쓸데없이 빨라가지고. 태섭도 질세라 아라를 노려봤다. 대만이 태섭을 추궁했다.
“부족장님, 아라한테 거짓말했죠.”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맞아요. 오빠 거짓말 했어요.”
“와, 부족장님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실망이에요. 완전 섭섭한데.”
“송아라, 넌 대체 누구 편이냐?”
태섭은 아라의 고자질에 어이가 없었다. 오빠 편을 백 번 들어줘도 모자랄 판에 무국인 편이나 들고. 그렇게 정없는 오빠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태섭은 채소 자르던 칼자루 끝으로 정수리 쪽을 긁적였다. 자식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머니는 카페트를 짜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라는 금방 오빠에게 흥미를 잃고 대만에게 다가갔다.
“활 진짜 잘 쏘나 봐요. 그렇게 먼 거리에서 소를 쏴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오빠들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좀 그렇지. 다른 오빠면 전 부족장님?”
“응. 준섭 오빠가 진짜 귀신 같이 활을 쏴서, 일대에서 신궁이라고 불렸거든요. 오빠, 준섭 오빠 화살 어디 있더라?”
“염소 젖이나 잘 봐라, 송아라.”
“헉! 거품 올라온다!”
아라는 급히 두꺼운 헝겊으로 만든 장갑을 끼고 냄비를 불에서 내려놨다. 대만이 나무 받침대를 찾아 아래에 대주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당장 만두를 곁들여 찍어 먹어 보고 싶은 자태였다. 대만은 침을 삼키며 태섭 쪽 냄비를 보았다. 이쪽도 요리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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