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송태섭이 고백합니다.

Wanderer by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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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대박사건.

송태섭 크리스마스에 고백하려나 봄.

 

정대만은 잘났다.

정대만은 잘났다. 재수 없게 들릴지 몰라도 사실이 그러했다. 남들보다 족히 한 뼘은 더 큰 키, 농구부답게 길쭉한 팔다리와 탄탄한 몸, 그리고 시원시원하게 잘 생긴 얼굴까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하루가 멀다 하고 잡히는 술자리 약속과 쇄도하는 과팅, 소개팅, 미팅 요청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했다.

정대만의 인기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재밌고 성격 좋은 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후배/동기를 싫어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냔 말이다.

하지만 그의 높은 인기만큼 곧 애인이 생길 것이란 주변의 예상과 달리 찬 바람이 불고, 첫눈이 내릴 때까지도 정대만이 누군가와 진득이 엮이는 일은 없었다. 종종 과팅이나 단체 미팅에 얼굴을 비추는 것으로 보아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또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지는 않았다. 그런 정대만에게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 일은 이제 안부인사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12월의 첫째 날, 기말고사가 코 앞이라는 핑계로 만든 약속 자리에 얼굴을 비춘 정대만에게 714번째 같은 질문이 돌아간 것까지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하지만 정대만은 능청스럽게 그 질문을 받아넘기는 대신 누군가 술게임 벌칙에 쓰려 준비해 놓은 맥주잔 가득 채워진 소주를 원 샷 했다.

 

수많은 선배와 동기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신입생 정대만은, 무려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한살 어린 후배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북산 고등학교 농구부 주장 자리를 맡고 있는 송태섭에 대한 최근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처음 주장 자리를 넘겨받았을 때, 어설프게 남을 따라 호랑이 주장 노릇을 하려던 과도기를 거치고 나니 처음 그를 향했던 걱정의 눈길이 무색할 정도로 송태섭은 북산의 문제아들을 잘 통솔했다.

인터하이에서의 활약이 요행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같은 해 열린 윈터컵에서도, 그리고 그다음 인터하이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거둔 북산을 얕잡아보는 팀은 이제 없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송태섭이 있었다.

송태섭의 이러한 변화는 주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매일 왁스로 매만지는 머리와 한쪽만 뚫은 피어싱은 이제 불량스럽기보단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 그가 전처럼 조금의 여지라도 열어두었다면 그의 신발장에 쌓인 러브 레터의 수가 지금의 배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 사람으로 거듭난 송태섭은 농구 밖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울리는 사람들도 대부분 농구부원들이었기에 한동안 오래도록 따라다니던 농구부 매니저와 잘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았지만,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의 또 다른 당사자를 통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겨울이 지나면 곧 다가올 졸업을 생각하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설 사람이 나타날 법도 했지만, 12월 말, 윈터컵을 앞둔 운동부원에게 고백할 마음을 먹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른 새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크리스마스까지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 송태섭은 여전히 솔로였다.

 

어쩌다 한 살 어린 후배 놈한테 코가 꿰였냐고 묻는다면, 정대만은 억울할 뿐이었다.  

 

어쩌다 한 살 어린 후배 놈한테 코가 꿰였냐고 묻는다면, 정대만은 억울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었다. 농구하는 놈한테 냅다 키가 작다고 시비를 털었으니까. 그때는 몰랐지. 그 조그만 녀석의 성질머리가 장난이 아닐 줄은. 험악한 인상에 쫄아 얌전히 눈을 깔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삭발을 운운하며 정대만에게 농구로 한판 붙자고 녀석은 그가 코트를 떠난 후 처음이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무슨 할리킹 로맨스 도입부 같은데, 이후 서로 맞댄 것이 입술이 아니라 주먹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옥상으로 불렀을 때에도 일 대 다수의 상황에도 쫄지 않고 한 놈만 팬 녀석의 주먹에 앞니 두 개가 털린 정대만은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 왜 생겼는지 그때 톡톡히 깨달았다.

물론 정대만의 성질머리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얌전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당시 어울리던 녀석들과 함께 ‘농구부 최후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화자 되는 사건까지 일으켰으니까. 폭력 사건에 휘말리게 해 저와 똑같이 농구를 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못난 마음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 여기까지만 듣는다면 대체 어디서 정대만이 녀석에게 반했는지, 아니, 애초에 녀석이 정대만에게 호감을 갖는 것이 가능하긴 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게 정상일 터였다. 그러나 송태섭과 정대만 사이에는 그 모든 악연을 상쇄할 정도로 강력한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는 아닐지라도 농구 앞에서는 자존심을 굽힐 줄 알았다.

유혈사태까지 번졌던 ‘농구부 최후의 날’은 친구들의 희생으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농구를 좋아한다 절절히 고백한 정대만은 다시 코트 위로 돌아왔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쉽게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정대만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랬기에 팀에 온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했다. 농구를 쉰 기간이 길었던 만큼 경기마다 불거지는 체력 이슈 또한 각오한 바였다.  그러나, 많은 각오와 함께 다시 농구부에 복귀한 정대만이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코트 위에서 저를 향해 날아오는 송태섭의 패스였다.

 아무리 각자의 기량이 뛰어나다 해도 서로 합을 맞추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그 상대가 저를 병원 신세까지 지게 했던 사람이라면 어떻겠는가. 그런데, 그 상대가 나를 온전히 믿지 않고는 보낼 수 없는 패스를 한다면 당연히 신경 쓰이지 않겠냐고.

 그러니까 정대만은 억울했다. 송태섭 그 자식이 나를 농구로 꼬셨다니까?

멀리 돌아왔지만, 같은 코트 위에서, 자신의 패스를 받는 정대만을 사랑하는 일은 당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송태섭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다짜고짜 시비를 걸고, 불량아들의 단골 멘트 ‘옥상으로 따라와’를 시전한 선배를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이상한 취향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기란 쉽지 않을 테다. 만약 체육관 앞에서의 만남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면 아마 끝까지 일정 선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송태섭이 기억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것보다 더 오래전의 일이었다. 막 이사를 와서 모든 것이 낯설었던 자신에게 같이 농구하자고 말해준 사람.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로 깔끔한 3점 슛을 던지는 사람.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 송태섭이 기억하는 정대만은 그런 사람이었다.

물론 상대가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라고 해서 서로에게 주먹질을 했던 일까지 미화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시 코트 위로 돌아온, 기억 속 그때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공을 던지는 정대만을 향해 마음을 여는 일에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한눈에 알아보지 않았는가. 멀리 돌아왔지만, 같은 코트 위에서, 자신의 패스를 받는 정대만을 사랑하는 일은 당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정대만은 송태섭의 그 표정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굳이 따지자면 정대만은 같은 남자들에게 조금 더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런’ 쪽으로도. 물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고백의 빈도는 이성보다 현저히 떨어지기는 했지만, 투박한 글씨체의 러브 레터나 저보다 낮은 목소리로 전하는 고백을 받은 횟수가 두 손으로 다 세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대만이 남자와 연애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거 달린 놈들끼리 좋아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지금껏 고백한 놈 중에 마음이 동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처음 남자에게 고백받았을 때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여자아이들의 고백을 거절할 때처럼 마음을 받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자연스레 뱉는 제 모습에 대만은 자신이 남자도 되지 않는 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던 정체성을 확신하게 된 계기는 송태섭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고부터였다. 처음에는 분명 손에 착 와 감기는 패스 때문에 시선이 갔었는데, 그렇게 지켜보다 보니 자연스레 녀석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많아졌다.

그렇게 송태섭을 지켜보며 절로 알게 된 것 중에는 녀석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있었다.

연습이 끝나고 건네지는 음료는 늘  적당히 시원했고, 날이 궂은 날이면 세심하게 자신의 컨디션을 살피는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정대만에게 확신을 준 것은 슛을 던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송태섭의 표정이었다. 애초에 태어나기를 짝짝이 눈썹을 하고 태어났을 것 같은 녀석의 얼굴이 어린애처럼 밝아지는데, 그 얼굴을 보고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건 눈치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사람이어야 가능할 일이었다.

그리고 정대만은 송태섭의 그 표정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만약을 대비해 늘 더플백 한쪽 구석에 챙겨놓기 시작한 무릎 보호대처럼 송태섭은 제 마음을 그렇게 대했다. 언제나 가까이 두지만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꺼내 보이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송태섭은 굳이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어차피 전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때로 어떤 관계는 그 자체로 너무 소중해 지금과 같은 관계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사람을 착각하게 했다.

깊어지는 마음과 달리 정대만을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수 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연습 후 새 수건을 제일 먼저 건네고, 다 같이 들린 분식집에서 지난번 맛있다고 했던 김말이 튀김을 추가 주문하고. 뭐, 그런 것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기에는 너무나 소소한 행동들.

만약을 대비해 늘 더플백 한쪽 구석에 챙겨놓기 시작한 무릎 보호대처럼 송태섭은 제 마음을 그렇게 대했다. 언제나 가까이 두지만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꺼내 보이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자신이 이런 안일한 태도를 취하게 된 데에는 분명 정대만의 탓도 있다고 송태섭은 생각했다. 농구부에 다시 돌아오고 난 초반에는 눈치를 좀 보는 것 같았는데, 몇 번의 경기를 함께 뛰고 나니 거리감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덥다며 속이 다 보이게 티셔츠를 펄럭이거나, 허벅지가 반 이상이나 드러나게 바지를 걷어 올려도, 죽겠다는 소리를 하며 몸을 기대는 상대가 자신이었기에 방심했다.

 정대만이 대학에 진학해 새로운 팀에 들어가면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막연한 상상이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을 때, 자신이 이 정도로 흔들릴 줄 몰랐던 것이 패착이었다.

방학이나 긴 연휴에는 꼭 부모님 집에 들리는 정대만이었기에 그가 대학에 진학하고 난 후에도 생각보다 얼굴 보기가 힘든 편은 아니었다. 연습을 봐주겠다고 불시에 체육관에 들이닥치는 것은 물론 종종 경기를 보러 오라고 표를 주기도 했으니까. 확실히 대학리그의 수준은 고등학교와는 달랐다. 다른 것이 경기력만이 아닌 것이 문제였지만.

미안. 하지만 널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시즌의 마지막 경기가 끝난 후, 평소처럼 정대만을 찾아 경기장 뒤편 선수 출입구로 향하던 송태섭은 익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정대만이 누군가에게 고백받는 걸 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북산에서는 여학생들을 대신해 그를 불러준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자신을 지나쳐 간 사람은….

“너, 너 언제 왔냐?”

머릿속 생각이 다 정리되기도 전에 코너를 돌아 나온 정대만은 앞서간 이의 뒷모습을 보고 선 송태섭을 발견하고 놀란 듯 말을 더듬었다. 그런 정대만의 모습에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한 송태섭이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 올렸다.

“조금 전에?”

“그… 봤어?”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묻는 모습에 이번에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까딱인 태섭이 물었다.

“거절하는 게 되게 익숙해 보이던데, 처음이 아닌가 봐요? 남자한테 고백받는 거.”

“처음은, 아니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중얼거리듯 답한 대만이 급하게 덧붙였다. “야,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거절했으니까.”

“그건 저도 들어서 알아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 대만의 말을 한 귀로 흘린 태섭이 작게 심호흡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결국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주무르며 슬쩍 시선을 피한 태섭이 정말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괜찮아요? 남자한테 고백받는 거.”

“그게 뭐 어때서.”

이 질문으로 지금껏 감춰온 마음이 들키지는 않을까, 불쾌해하면 어쩌지 하는 갖은 걱정이 무색하게도 답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궁금한 게 그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의 대만이 내놓은 답은 간단명료했다.

“나만 좋으면 상관없어.”

라면이나 먹으러 가자는 말을 하는 것처럼 태연한 대만의 목소리에 태섭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간신히 답할 수 있었다. 아…, 그래요? 그런 태섭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것인지 이번에는 정말로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말과 함께 대만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빤히 바라보며 몇 번 비어있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태섭이 이내 힘주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Ok, 알겠어요.”

 

 자신이 송태섭을 귀여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난 뒤 정대만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녀석의 주변인 공략이었다.

 

자신이 송태섭을 귀여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난 뒤 정대만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녀석의 주변인 공략이었다. 매일 농구부 활동을 하며 얼굴을 본다지만 친구들과 있을 때의 모습이나, 방과 후의 모습은 알지 못했으니까. 옛말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하지만 농구부 활동을 핑계로 쉬는 시간 및 점심시간을 가리지 않고 학교 안에서 녀석을 찾아 헤맬수록 정대만에게 늘어나는 것은 아군이 아니라 근심과 걱정이었다. 이 녀석… 정말 달재 말고는 친한 친구가 없는 건가? 제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태섭 또한 학교 내에서 이미지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한쪽 귀만 뚫은 피어싱이나 짝짝이 눈썹을 하고 노려보는 얼굴이 무섭기는 하지. 게다가 다대 일로 싸우다가 병원 신세까지 지고. …그래도 어떻게 매번 찾아갈 때마다 같이 있는 사람이 이달재 아니면 아무도 없는 거냐고! 반에 있을 때는 그나마 같은 반 친구들과 소소하게 잡담 정도는 하는 것 같았는데, 매점이나 급식실 앞에서 마주칠 때면 높은 확률로 달재, 또는 머리가 하나는 더 큰 농구부 후배들과 함께였다.

… 사실 이게 문제가 아닐까? 녀석이 아무리 개과천선(?)했다고 하지만 주변에 크고 몸 좋은 (운동부) 녀석들이 우글거리고 있으면 아무래도 다가가기 힘들겠지. 거기다 주변을 맴도는 사람 중 하나는 과거가 화려한 3학년이라면 아무래도 더더욱….

“농구부에 가려고 하는데요.”

 그러한 근심과 걱정이 쌓이다 못해 지레 겁먹을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 만난 것이 송아라였다.

“어, 이쪽으로 가면 되긴 하는데…” 진로상담 후 평소보다 조금 늦게 체육관으로 향하던 대만은 근처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당당히 저를 불러세운 여자아이의 질문에 답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너 송태섭 동생 아니냐?”

완전 닮았는데, 이거. 눈썹이 완전 똑같이 생겼다는 뜻으로 주머니에 넣고 있던 한쪽 손을 빼 눈썹을 가리키니 대번에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맞네, 송태섭 동생.”

대답도 듣지 않고 확신하는 목소리에 이번에는 미간에 주름까지 잡고 노려보는 모습까지 백 미터 밖에서 봐도 남매가 분명했다.

“같이 가. 나도 농구부원이거든.” 그 불편한 심기를 아는척했다 괜히 불똥이라도 튈까 재빨리 한 걸음 앞서 걷기 시작한 대만이 물었다. “이름이 뭐야?”

“아라요. 송아라.” 심기가 불편한 건 불편한 거고, 오빠와 같은 부원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어도 눈 밖에 날 생각은 없는지 묻는 말에 얌전히 대답한 아라가 되물었다. “오빠는요?”

“나?” 애초에 체육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주친 것도 아니었기에 금세 목적지에 다다른 대만이 어깨 너머로 아라를 바라보며 답했다. “정대만.”

그때, 제 이름을 들은 송아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지 않았다면 정대만은 송태섭이 집에서 제 얘기를 하지는 않는지 은근슬쩍 떠 볼 생각이었다.

“뭐, 왜, 왜 그래…?”

하지만 잘 따라오던 걸음을 멈추고 턱까지 뚝 떨군 채 “정대만…?” 하고 중얼거리는 아라의 모습에 대만이 덩달아 말을 더듬었다. 부쩍 추워진 날씨 탓에 체육관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저보다 머리 두 개는 족히 작은 여자아이 앞에 엉거주춤 멈춰 서서 말을 더듬는 꼴을 모두에게 생중계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아, 아니. 뭐 별 건 아니긴 한데….” 대만의 혼란스러운 시선에 그제야 정신줄을 잡은 아라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오빠 이름을 들은 적 있거든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하면서도 여전히 눈을 맞추지 못하고 묘하게 비껴간 아라의 시선에 대만은 그제야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딴에는 최대한 수습해 보겠다고 하는 것 같았으나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아, 얘 집에서 내 얘기 엄청 하나보네.

 때로는 말보다 사소한 행동에서 더 많은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법이었다. 덩달아 힘이 풀린 입가가 절로 실룩거리려는 걸 억지로 힘주어 참아낸 대만이 생각했다. 그러니 내 이름을 듣고 저런 반응이지.

“아라야.” 어느새 체육관 문을 등지고 선 대만이 최대한 다정하게 아라의 이름을 불렀다. 조금 전과 확연히 다른 말투와 목소리에 저를 향한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아라에게 씩 미소까지 지어 보인 대만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들어가기 전에 나랑 잠깐만 얘기 좀 하면 안 될까?”

 홀로 깊어진 마음이 부담스럽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가벼워 보이지도 않게 전할 방법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스피드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송태섭이었지만 고백까지 속전속결로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고백할 결심을 했는데, 섣부르게 다가섰다 망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과한 생각은 독이 될 뿐이었고, 충동적인 결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인간은 늘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였다.

 정대만이 남자에게 고백받는 모습을 목격한 그날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정대만이 남자라도 상관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날부터, 송태섭은 몇 날 며칠을 빈 편지지와 눈싸움을 하며 보냈다. 좋아하는 마음에 이름을 붙이기는 쉬운데 진심을 전하는 일은 왜 이리 어려운 건지. 홀로 깊어진 마음이 부담스럽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가벼워 보이지도 않게 전할 방법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올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송태섭의 멘탈이 결정적으로 흔들린 것은 고생하며 겨우 몸에 익힌 점프슛이 실패했을 때였다. 공이 손을 떠날 때부터 알았다. 저건 안 들어가. 마크도 없이 프리로 쏜 슛이 림에 맞고 튕겨 나온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다들 그런 날도 있는 법이라고, 잊으라 말했지만 태섭은 그럴 수 없었다. 날이 추워진 만큼 윈터컵이 코 앞까지 다가왔는데 이렇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는 안 되었다.

태섭은 코트에 떨어지고도 두어 번 더 얕게 튀어 오르는 공을 허리를 굽혀 주워들었다. 그래, 아무리 머리가 터지게 고민한다고 해서 고백의 성공 여부를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손안에 든 익숙한 공의 무게감을 느끼며 태섭이 림을 노려보았다. 들어가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과 쓸데없는 동작은 슛의 성공률을 낮출 뿐이다. 마음을 전하는 데 굳이 거창한 미사여구가 필요할까?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진심을 전하는 편이 답일지도 모른다.

고백을 슛과 비교하는 것부터가 잘못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태섭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왜 지금까지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는지 짧게 반성하는 시간까지 가진 태섭은 마지막 남은 고민까지 털어버리려 한 가지 더 충동적인 결심을 했다. 윈터컵을 치르고 나면 곧 졸업이 다가온다. 그 뒤에는 자신도 다른 지역의 대학에 진학하게 될 것이고. 고백을 미루기 좋은 이유가 차고 넘치다 보니 스스로 결전의 날을 정해두지 않으면 도망치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크리스마스. 다시금 가볍게 공을 드리블하며 태섭은 앞으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날을 떠올렸다. 모두에게 특별하여 모른척하고 넘어가기 어려운 날. 그날이 좋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고백해야겠다.

오빠가 버릇이 하나 있거든요.

부 활동 이렇게 빼먹어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오늘 진로 상담 있어서 조금 늦게 간다고 했어.

그건 아까 끝났고. 지금은 그냥 땡땡이치는 거잖아요.

너 내가 사준 핫초코 마시면서 자꾸 그렇게 딴지 걸래?

겨우 편의점 핫초코 가지고….

야, 먹기 싫으면 내놔. 줘, 내가 마시게.

누가 먹기 싫다고 했어요? 자꾸 그러면 저 그냥 가요?

아, 알았어….

 

“… 그래서, 송태섭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데?”

조금 전까지 컵을 가져갈 것처럼 뻗었던 손을 재빠르게 거둬들인 대만이 불만을 감출 생각도 없는지 불퉁한 목소리로, 그러나 소근 거리듯 물었다. 그 빠른 태세 전환에 거의 다 마신 컵을 손에 쥐고 있던 아라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요?”

“응.”

“오, 즉답.” 아예 제 쪽으로 몸까지 돌려 앉는 대만의 모습에 순수한 감탄을 뱉은 아라가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쭉 들이켜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별 얘기 안 해요.”

“뭐?”

“어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죠.” 기대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말에 와락 구겨지는 대만의 얼굴을 보고서도 아라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우리 오빠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잖아요. 집에서도 마찬가지라고요.”

“그, 건. 그런가…?” 당당한 아라의 태도에 무어라 더 화를 내려던 대만이 눈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코트 위에서가 아니라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오빠가 버릇이 하나 있거든요.” 생각에 잠겨 얌전해진 대만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소리죽여 키득거린 아라가 과장된 동작으로 왼팔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목덜미를 주무른 적 있지 않아요? 그거 부끄러울 때 하는 행동이에요. 오빠에 대해 뭐 많이 얘기한 건 없는데, 그때마다 꼭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정대만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고.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임에도 아라는 금세 이 관계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혈육의 짝사랑을 실수로 들킨 것 같아 마음 졸였지만, 뇌물까지 바쳐가며 이리 캐묻는 것을 보니 걱정해야 하는 건 그쪽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송태섭은 정대만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정대만 또한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대만은 제 속내를 가늠하려는 듯 빤히 시선을 맞춰오는 아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손을 뻗어 비어있는 아라의 손을 꼭 잡았다.

“아라야.”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아라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펄쩍 뛰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대만이 말을 이었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핫초코 사줄게. 그러니까 우리 번호 교환할래?”

 

 버릇처럼 뒷목을 감싸 쥐고 있는 저 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얌전히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저 손이 왜 지금 저기 가 있는지가 중요했다.

 

“무슨 빵을 이렇게 사 왔어?”

“빵이라니. 이게 어디 케이크인 줄 알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식탁에 앉는 태섭에게 눈을 흘긴 아라가 포크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케이크가 다 똑같은 케이크지….”

그 사이 익숙하게 케이크 상자를 열어 먹기 좋게 세팅하려던 태섭은 상자 속 내용물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라가 들고 온 상자 안에는 이런 디저트류에 관심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손바닥만 한 케이크가 두 조각 들어있었다.

“송아라. 이거 얼마짜리야.”

“거봐. 그냥 케이크가 아니라니까? 선물 받았어.”

“선물? 누가 너한테 이런 케이크를 선물로 줘.”

“뭐야, 왜 시비지? 먹기 싫어?”

“그 말이 아니잖아.”

태섭은 맞은편에 앉아 눈썹을 꿈틀거리는 아라의 모습에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이걸 물어도 되는지 고민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남자 친구 생겼어?”

“나?”

태섭의 의심 섞인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포크로 케이크 조각을 크게 잘라 입으로 가져가던 아라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렸다. 그 어이없다는 반응만으로도 답이 되기에 충분했을 텐데도 태섭은 눈썹을 한 번 까딱하며 아라의 대답을 종용했다.

“아니, 오빠.” 그런 태섭의 모습이 도리어 답답하다는 듯 덩달아 포크를 내려놓은 아라가 되물었다. “내가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이걸 오빠랑 먹고 있겠어?”

논리적인 아라의 반박에 태섭이 그 말의 진의를 가늠하려는 듯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런 태섭의 태도에 굴하지 않고 야무지게 케이크를 한 입한 아라가 이제는 제 차례라는 듯 물었다.

“그러는 오빠는 없어? 애인.”

“있으면 지금 너랑 이렇게 케이크나 먹고 있지 않았겠지.” 자연스러운 아라의 행동에 반쯤 의심을 내려놓은 태섭이 아라가 손대지 않은 쪽 케이크를 작게 잘라내며 말했다.

“올해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대로 고등학교 졸업하게?”

“남의 연애사에 신경 꺼라.”

“아, 왜. 그러니까 오히려 수상하다? 뭔데. 잘 돼가는 사람 있어? 졸업 전에 고백할 거야?”

건수를 잡았다는 듯 와르르 질문을 쏟아내는 아라를 익숙하게 무시한 태섭이 묵묵히 포크를 놀렸다. 그에 제 몫을 뺏길까 덩달아 열심히 포크질을 하면서도 아라의 질문 공세는 계속됐다.

“그것도 아니면, 크리스마스? 얼마 안 남았으니까. 좀 뻔하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지.”

응. 나쁘지 않아. 크리스마스에 하는 고백.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지막 남은 크림까지 깔끔히 긁어모으던 아라는 문득 테이블을 향하고 있던 시선 끝에 걸리는 움직임에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 설거지 안 하고 도망갈까 봐? 안 그럴 테니까 마저 먹어.”

그런 아라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먼저 포크를 내려놓고 기다리던 태섭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런 익숙한 혈육의 표정 따위,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버릇처럼 뒷목을 감싸 쥐고 있는 저 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얌전히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저 손이 왜 지금 저기 가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분명 식탁 위에 얌전히 있었단 말이지?

 여전히 시선은 달력에 고정한 채 책상 위를 더듬어 펜을 찾은 대만이 손을 뻗어 25일 위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체육관 앞에서의 우연한 조우 이후 대만과 아라는 종종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대부분 대만이 먼저 연락하면 아라가 답하는 식이었다.

 

아라야, 송태섭 오늘 뭐하냐?

농구부 연습이요. 신입 부원들 포지션 점검할 거라던데.

 

송태섭 오늘 누구 만나냐?

농구부원들이요. 비품 사러 간대요.

 

얘는 왜 문자에 답이 없어.

합숙 갔어요. 인터하이 준비.

 

저를 살아있는 송태섭 스케쥴 알리미쯤으로 여기는 듯한 대만의 연락이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아라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모든 연락에 성실히 답해줬다. 다른 지역에 위치한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대만은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태섭을 보기 위해) 자주 본가에 들리는 편이었고, 그때마다 정보원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아라를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렇게 편의점 핫초코로 시작된 뇌물이 고등학생의 용돈으로는 손 떨리는 가격의 케이크로까지 진화하게 된 것이었다.

1학기 중간고사가 벚꽃과 함께 찾아온다면, 2학기 기말고사는 거리가 연말 분위기로 물들 때쯤이었다. 시간표를 잘 짠 모양인지 대만의 모든 시험은 20일을 전후로 끝날 예정이었으나, 문제는 송태섭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윈터컵까지 뛰기로 결심한 녀석은 얄짤없이 12월의 마지막까지 농구에 매여있을 신세였다.

농구에 미친놈을 꼽으라면 저도 어디 가서 빠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어떻게 크리스마스 날에도 경기를 잡는  극악무도한 짓을 하지? 작년의 자신 또한 똑같은 일정을 소화했다는 사실을 선택적으로 망각한 대만이 입술을 삐죽였다. 윈터컵 준비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주말에 녀석(다른 북산고 후배들과 함께였지만)을 보고 왔고, 시험이 끝나면 윈터컵 경기 또한 보러 갈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둘만 볼 수는 없으려나. 자취방 책상 앞에 앉아서 해야 하는 시험공부는 안 하고 어떻게 하면 12월 중 송태섭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을지 달력과 눈싸움을 하던 대만의 핸드폰이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아무리 대만이 인기가 많고 발이 넓다 해도 늦은 밤 연락할 녀석들은 정해져 있었다. 시험공부는 미뤄두고 치킨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면 못 이기는 척 나가야지, 가볍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열었던 대만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오빠. 대박사건. 송태섭 크리스마스에 고백하려나 봄.

연락을 주고받은 지는 1년이 조금 넘었지만 아라가 먼저 연락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아라가 먼저 보내온 문자는 내용마저 충격적이었다. 송태섭이 고백해? 크리스마스에?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천천히 그 짧은 문자를 세 번이나 읽어보고 난 뒤에야 대만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주말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전혀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는데! … 아냐, 그 녀석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데 선수지. 그럼, 진짜인가…? 당장에라도 더 자세한 얘기가 듣고 싶었으나 이 늦은 시간 무턱대고 전화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망했네. 오늘은 공부는커녕 맘 편히 잠들기도 글렀다.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길게 쓸어내린 대만의 시선 끝에 조금 전까지 노려보고 있던 달력이 걸렸다.

“… 크리스마스란 말이지.” 여전히 시선은 달력에 고정한 채 책상 위를 더듬어 펜을 찾은 대만이 손을 뻗어 25일 위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어릴 적 이후 이렇게 기대되는 크리스마스는 처음이었다.

 때문에 태섭은 이미 벌어진 거리가 더욱 멀어지지 않도록 대만이 조금씩 흘리는 일상의 조각들에 한층 더 귀를 기울였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잠도 다시 잘 자기 시작했고, 점프슛 성공률도 좋아졌다. 윈터컵 전 연습을 봐주겠다고 들린 정대만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 만큼.

주말에 연락도 없이 체육관에 들이닥친 대만은 윈터컵 준비를 도와주겠다는 말이 진심이었던지 연습 시간 내내 1학년들 옆에 붙어 있었다. 얼굴 몇 번 본 적 없으면서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자세를 교정해 주고, 필요하다면 연습게임 상대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어딘가 묘하게 익숙한 그 모습에 이럴 줄 알았으면 점프슛 감각이 조금 더 늦게 돌아와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태웅과 강백호, 두 사람과의 원온원을 마지막으로 연습을 마무리하고 다 같이 분식집까지 털고 난 뒤에야 태섭의 차례가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당연하다는 듯 제 옆에 서는 것이 중간까지 가는 길이 겹쳐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둘만 남은 귀갓길은 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태섭은 주로 듣는 쪽이었다. 대만이 그날 연습에서 개선이 필요한 점이나, 앞으로의 전술에 참고할 만한 점 등을 늘어놓으면 적당히 추임새를 넣는 정도. 고작 몇 시간 보았을 뿐인데도 지난 몇 달간 1학년들이 얼만큼 성장했는지 한 눈에 알아보는 게 괜히 안 선생님께서 북산의 지성이라 하신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 걷는 십여 분 남짓한 짧은 시간, 태섭이 내심 기대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연습만 하면 왜 그렇게 배가 고픈지 몰라. 우리는 학교 앞 제육볶음 집에 가는데, 나는 역시 여기 떡볶이가 더 좋더라.

요즘 다들 시험공부 한다고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아. 나는 너무 써서 못 먹겠던데. 그래도 우유 들어간 건 좀 먹을 만해.

난 시험이 일찍 끝나는 편이라 낫지. 어떤 놈들은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시험이 있어.

 

농구라는 공통된 관심사는 여전했지만,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차이는 막연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컸다. 때문에 태섭은 이미 벌어진 거리가 더욱 멀어지지 않도록 대만이 조금씩 흘리는 일상의 조각들에 한층 더 귀를 기울였다.

“야, 송아라.”

“응?”

케이크를 얻어먹은 대가로 설거지를 하는 동안 어제 대만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보던 태섭이 그새 거실에 배를 깔고 누워 TV를 보고 있는 아라를 불렀다.

“너 친구들이랑 카페 같은 데 많이 가지.”

“그런 편이지?”

“맛있는데 좀 추천해 봐. 우유 들어간 커피가 맛있는 데로.”

“갑자기?” 태섭을 돌아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답하던 아라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오빠 우유 들어간 거 텁텁하다고 안 좋아하잖아.”

“어.”

태섭은 아라의 의문 섞인 목소리에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에 한층 더 깊어진 아라의 의심 섞인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태섭이 무심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냥, 누가 그게 맛있다고 하더라.”

여름쯤이었나, 아라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빠가 먼저 고백할 생각은 없냐고. 송태섭도 오빠를 좋아하는 게 확실하니 성공률 100%인데, 왜 기다리기만 하냐고.

  

결국 시험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한 대만은 아침 7시가 되자마자 아라에게 문자를 보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돌아온 답은 질문만큼이나 간결했다.

 [오빠가 준 케이크 먹으면서 슬쩍 떠봤는데, 크리스마스 얘기 꺼내니까 바로 반응했어요. 제가 말했던 그 버릇이요.]

  

 

그렇게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누구라도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신경이 쓰이는 법일진대, 잘생긴 데다 성격도 좋아 짓궂은 질문도 능청스레 받아넘기고, 술자리 분위기도 잘 띄우는 놈이 약속 시간에 늦은 것도 모자라 오자마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빈속에 소주부터 원샷하면 어떻겠는가. 급하게 들이킨 탓인지 대만의 얼굴은 그 한잔에 벌써 붉은 기가 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습에 꿀잼의 기운을 느낀 동기들이 옆구리를 찌르며 묻는 말들에 고분고분 답해주기엔 운동선수의 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거 분명 무슨 일 있는 건데.” 언제 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냐는 듯 곧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아 잔을 주거니 받거니, 쏟아지는 질문들을 능숙하게 웃어넘기는 대만의 옆에서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동기가 또다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말 안 하는 거 보면 성적 같은 시시한 걱정거리는 아닐 테고. 왜,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 안돼?”

“설마.” 소리 내 답하지 않았다 뿐이지 저에게 던져지는 질문들을 허투루 듣지 않던 대만이 질문을 던진 동기와 시선을 맞추고는 조금은 과장된 톤으로 답했다. “나 정대만인데?”

화룡점정으로 씩 웃어 보이기까지 하자 테이블 이곳저곳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야, 헛소리할 거면 마셔. 그냥 술 마시고 싶었나 보지. 장난기 섞인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내밀어지는 술잔을 못 이기는 척 받아 들고 나자 그제야 대화의 화제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에 적당히 장단을 맞추면서도 슬쩍 한 발 뒤로 빠진 대만이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은 잔을 홀짝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잘 안되냐고? 오히려 그 반대여서 문제인 건데.

여름쯤이었나. 아라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빠가 먼저 고백할 생각은 없냐고. 송태섭도 오빠를 좋아하는 게 확실하니 성공률 100%인데, 왜 기다리기만 하냐고.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음료를 앞에 두고 묻는 아라에 대만은 그때도 씩 웃으며 망설임 없이 답했었다.

 좋아하는데 티 안 내려고 애쓰는 게 귀엽잖아. 그런 놈이 고백할 때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제 오빠가 귀엽다는 말에 아라는 잠시 속이 안 좋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차마 물주의 취향을 비난할 수는 없었는지 빠르게 화제를 돌렸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던 날로부터 반년의 시간이 더 지나 드디어 송태섭이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오늘에서야 대만은 인정할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의 자신은 도망치고 있었다는 것을.

송태섭을 좋아한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은연중 그 관심의 시작은 저를 향한 녀석의 호감 때문이었다고, 그러니 감정의 우위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라의 문자를 받은 뒤, 복잡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더 송태섭을 좋아한다는 것을. 먼저 고백하지 않으려 한 것은, 성공률이 100% 보장되어 있다 해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은 그만큼 큰 용기가 필요하기에.

새로 딴 맥주병을 손에 들고 잔이 빈 사람을 찾아 테이블을 둘러보는 동기와 눈이 마주친 대만이 얼른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잔을 내밀었다. 크리스마스까지 남은 날이 며칠인데, 오늘은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송태섭 생각은 좀 그만하고 자야 할 것 같았다.

 본디 연애는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는 법이다.

 

“너 요즘 일찍 일어난다?” 잠이 덜 깬 얼굴로 비척거리며 식탁 앞에 앉는 아라에게 우유가 가득 담긴 잔을 밀어주며 태섭이 말했다.

“그럴 일이 있어….”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려보고자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대고, 눈에 힘을 줘 부릅뜬 아라가 맞은편에 앉은 태섭을 바라봤다. 어릴 적부터 운동부 활동을 해서인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몸에 밴 태섭은 아라와 달리 멀쩡한 얼굴로 입에 토스트를 밀어 넣고 있었다.

“눈 좀 제대로 떠.” 세 입 만에 토스트 한 조각을 해치운 태섭이 여전히 멍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아라를 지적했다. 하지만 그런 태섭의 말이 오히려 역효과였는지, 아예 식탁에 한쪽 팔을 올리고 턱까지 괸 아라의 시선이 대번에 불순해졌다.

이게 지금 다 누구 탓인데.

송태섭이 크리스마스에 고백할 것이란 (사실에 가까운) 확신을 가지게 된 뒤부터 송아라는 부쩍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였다. 본디 연애는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는 법이다. 더구나 근 1년간 지지부진하던 관계가 급물살을 탈 것 같은 기미가 보이는데, 이건 없는 관심도 생기지 않고는 못 배길 전개였다.

그러나, 답지 않게 라떼를 찾았던 날 이후 송태섭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루하루 크리스마스는 다가오는데, 집에서 하는 얘기라고는 윈터컵과 관련된 것 뿐이었다. 지금까지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따로 마음 먹은 바가 있는지 마지막 윈터컵까지 뛰기로 결심한 이상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아 보일 일은 아니지 않나?

어떻게 봐도 오랜 짝사랑 상대에게 고백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모습에 오히려 애가 타는 건 송아라와 정대만이었다. 한달에 두어번 연락하면 많이 했다 싶었던 두 사람은 요즘 매일 서로에게 송태섭의 동태를 묻느라 바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때 쯤이면 크리스마스에 만나자는 약속이라도 잡아야 할텐데, 지난 밤에도 실컷 농구 얘기나 했다고 우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은 대만의 문자를 상기하자 더욱 심기가 불편해진 아라가 그새 두 번째 토스트까지 해치우고 제 몫의 우유를 마시고 있는 태섭을 노려봤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을 담아 노려본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아예 자신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하려 일어서는 태섭의 모습에 결국 작은 한숨이 쉬어 나왔다. 내일이면 또 윈터컵을 치르러 떠나 가까이서 지켜볼 수도 없을텐데, 대체 저 인간은 무슨 생각일까. … 설마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털어낸 아라가 태섭의 쪽에 놓여있던 리모컨으로 손을 뻗었다.

“채널 돌리지 마. 그냥 놔둬.”

간단히 설거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려는지 방으로 들어가려던 태섭의 목소리에 아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빠 곧 나갈 거 아냐?”

“어,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일기예보만 보자.”

“일기예보?” 절대 돌리면 안 된다고 다시 한번 당부를 하고 방으로 사라진 태섭의 뒤로 한층 커진 아라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일기예보 봐서 뭐 하려고. 봐도 우산도 안 챙겨 다니면서.”

“그래도 놔둬. 오늘은 봐야 하니까." 짜증 섞인 아라의 목소리가 미덥지 않았는지 빠르게 교복을 꿰어 입고 나온 태섭이 아라의 손에서 리모컨을 뺏어 들었다. “이것만 보고 줄게.”

“아니, 오늘 뭐 일기예보에서 특별 발표라도 해?”

급하게 입느라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하고 TV에 시선을 고정한 태섭의 모습에 아라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으나 곧 시작된 일기예보에 답을 듣지는 못했다. 추운 날씨를 직관적으로 알려주려는 듯 두꺼운 패딩을 입고 화면 앞에 선 기상 캐스터가 앞으로 일주일간의 날씨를 차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별할 것 없는 그 모습을 태섭의 옆에서 무심히 지켜보던 아라의 눈에 문득 무언가가 들어왔다. 기상 캐스터의 오른쪽에 띄우는 화면. 앞으로 일주일간의 날씨 중 제일 아래, 빨간색으로 표시된 25라는 숫자.

 [다음 주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죠.]

기대된다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까지.

 

순간 무엇인가를 깨달은 아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아, 이 인간. 설마.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올까요?

 

매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주제가 하나 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올까요?]

“그건 누나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크리스마스까지 D-7. 털장갑에 목도리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에 대만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종강까지 남은 시험은 하나. 곧 자유의 몸이 될 대학생답지 않게 죽상을 하고 아침부터 애꿎은 시리얼만 숟가락으로 뒤적이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제 아침, 꽤 오랫동안 답보 상태였던 송태섭의 동태에 드디어 특이점이 포착되었다. 오빠가 일기예보를 챙겨봐요!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만 도착한 문자에 대만의 고개가 모로 기울기 전에 다행히 다음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부터크리스마스도일기예보에포함됐어요. 마치 엄청난 비밀을 알아냈다는 듯 띄어쓰기도 없이 문자를 보내온 아라와 달리, 처음 그 문자를 받았을 때 정대만의 머릿속에는 물음표만이 가득했다. 다음 주가 크리스마스라 일기예보에 포함됐는데, 그게 뭐…? 농구 센스는 좋지만 이런 쪽에 있어서는 딱 그 나이대 남자들과 비슷한 눈치의 소유자인 정대만은 결국 그런 아라의 문자에 이런 답밖에 돌려줄 수 없었다. 그래서…?

[요즘 길거리에서도 이벤트 엄청 하잖아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경품을 주겠다! 뭐 그런 거.]

그치. 생각해 보면 대만의 학교 앞 가게 중에도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음식을 할인해 주겠다는 전단지를 붙인 곳이 꽤 되었다. 그뿐인가. 백화점이나 기업 차원에서도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이라는 전제를 걸고 행사를 진행하는 곳들이 있었다.

[그래서, 걔도 그럴 거라고? 크리스마스에 눈이 와야 고백하는 거야???]

한 박자 늦게 아라의 말을 이해한 대만이 여전히 반신반의한 상태로 문자를 찍었다. 아니, 무슨 기상 상태에 따라 고백을 하고 말고를 정해? 하면 하는 거지! 생각할수록 왜인지 억울한 기분에 대만이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쥐었다. 하지만 대만의 엄지손가락이 본격적으로 키패드를 두드리기 전, 아라의 다음 문자가 도착했다.

[그럴 작정인 게 아니면 지금까지 만나자는 말도 안 꺼냈을 리가 없어요. 아예 고백하기로 마음먹은 걸 포기한 게 아니라면….]

은연중 자신 또한 생각해 본 적 있는 시나리오를 언급하는 아라에 급격히 전투의지를 상실한 대만의 손가락이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눈이 오지 않아 송태섭이 고백을 하지 않는 것도 싫지만, 아예 고백할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기조차 싫었다. 송태섭은 이와 관련하여 한마디도 한 적이 없건만, 멋대로 기대하기 시작한 마음을 접기엔 이미 너무 커져 있었다.

[그래도 이건 제 추측일 뿐이라, 틀릴 수도 있어요.]

[아냐… 아마 맞을 듯. 너 눈치 좋은 편이니까.]

[아무래도 오빠 때문에 터득한 스킬이다보니…. 혹시라도 뭔가 더 알게 되면 연락할게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아라와의 대화를 마무리 한 대만은 제일 먼저 TV 채널을 공영방송으로 돌렸다. 오늘부터라 매일 일기예보를 챙겨본다고 해서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지는 않겠지만 궁금한 걸 어떻게 하겠는가.

 대만이 시리얼에 괜한 화풀이를 하는 동안 TV 화면 속 기상 캐스터는 계속해서 날씨 예보를 이어갔다. 추위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며칠간 영하권의 날씨가 이어질 예정이라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25일 옆에 떠 있는 먹구름을 확인한 대만이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시리얼을 마저 퍼먹기 시작했다.

가방을 비울 때 함께 굴러 나왔는지 사용한 흔적이 없는 무릎 보호대가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유니폼과 손목 아대, 갈아입을 여분의 옷, 세면도구와 농구화.

 

늘 들고 다니던 더플백의 내용물을 비워내고 윈터컵을 위한 짐을 챙기던 태섭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가방을 비울 때 함께 굴러 나왔는지 사용한 흔적이 없는 무릎 보호대가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작년 인터하이 이후 언젠가 비품을 사기 위해 들렸던 가게에서 홀린 듯 함께 구매했던 무릎 보호대는 그날 이후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대만이 졸업하고 난 뒤에도 태섭은 늘 더플백의 한쪽 구석에 그 무릎 보호대를 챙겨 다녔다.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으나 한 번도 잊은 적 없던 그것을 태섭은 정말 오랜만에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버릇처럼 가방 속 깊숙한 곳에 다시 밀어 넣으려다, 이내 생각을 바꾸었는지 가장 바깥쪽 주머니에 소중히 챙겨 넣었다. 언제든 손을 뻗으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눈이 오지 않으면 정말로 고백도 하지 않을지, 두고 보자.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탓에 마지막 시험을 어떻게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래도 무사히 끝난 게 어딘가. 그렇게 스스로와 타협한 대만은 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저희를 두고 어딜 가냐며 매달리는 동기들을 매정히 뿌리치고 냉큼 본가로 돌아왔다.

물론 본가로 돌아왔다 하여 정대만의 일과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 꼼꼼히 스트레칭을 한 후 집을 나서기 무섭게 얼굴을 때리는 찬 바람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런 날일수록 얼른 몸을 움직여 열을 올려야 한다. 추위에 굴하지 않고 두어 번 가볍게 발을 구른 대만이 이내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발이 이끄는 대로 달리다 보면 하나 둘 눈에 익은 것들이 들어왔다. 모퉁이에 서있는 가로등과 이 길에서 유일하게 포카리가 들어있는 자판기를 지나 쭉 달리다 보면 곧 야외 코트가 하나 나왔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늘 이곳을 지날 때쯤이면 절로 느려지는 발걸음은 오늘도 예외가 없었다.

결국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철문을 열고 들어선 대만이 3점 슛 라인 밖에 섰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 사이로도 녹이 슨 림 만큼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잠시 멀거니 농구대를 바라보던 대만이 그새 주머니 속에 꽁꽁 감춰두었던 손을 꺼내 가볍게 털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땅을 박차 오르는 힘을 이용해 슛.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던 두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대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늘 상태 좋은데? 빈손인 게 아쉬울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아, 이런 날 농구해야 하는데. 하지만 아쉬운 마음에 코트를 둘러보아도 패스를 보내줄 이는 없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게 이런 건가. 몸에 익은 이 루틴을 함께 만든 이는 아마 지금쯤 경기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일 터였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버스 좌석에 불편하게 몸을 구겨 넣고 자고 있을 누군가의 얼굴에까지 이르기 직전, 대만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점점 선명해지려던 머릿속 이미지를 흩어 버렸다. 지난 며칠 생각 좀 했다고 냉큼 떠오르는 얼굴이 얄미웠다. 하루 종일 녀석의 생각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문득 녀석이 생각날 때가 괜히 더 낯간지러웠다.

“훌쩍.”

그리 오래 생각에 잠겨있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새 몸이 식었는지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인 대만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연달아 두어 번 더 코를 훌쩍이고 나니 이제는 몸도 으슬으슬 떨리는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운동선수는 몸이 재산인데, 겨울방학을 시작하자마자 감기에 걸릴 수는 없었다.

급하게 팔이며 다리를 쭉쭉 늘이며 코트를 나서려던 대만은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소리에 다시금 걸음을 늦추었다. 부모님이신가. 주무시는 것 같아 말도 없이 나오긴 했는데. 딴 길로 조금 샜다고는 해도 이제 막 새벽 어스름이 밝아오는 시간, 누가 저에게 연락을 했을지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꺼낸 대만은 곧 액정 위에 떠있는 문자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밖에 추워요.]

[선배 아침 러닝은 빼먹지 않으니까.]

중간에 내용이 좀 빠진 것 같은데. 마음이 급했던 건지, 아니면 대놓고 걱정하기엔 부끄러웠던 건지 연달아 도착한 문자에 미소가 걸린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이래 놓고도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고백하겠다고.

 눈이 안 오면 정말로 고백도 하지 않는지 두고 보자.

 여전히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얄미운데, 또 그만큼 좋았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질 만큼.

 

긴장하는 것도 이쯤이면 습관인 것이 분명했다. 세면대에서 가볍게 입을 헹군 태섭이 대충 입가를 닦아냈다. 이번으로 네 번째 전국대회 출전에, 1회전 상대는 북산보다 전력이 아래로 평가된 학교임에도 이 모양이었다.

후. 양볼에 잔뜩 공기를 집어넣어 심호흡을 한 태섭이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과 별개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얼굴에 그나마 안심이 됐다. 주장이 돼서 팀원들에게 의지는 못 되어줄망정 긴장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

그러나 표정을 가다듬고 화장실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유니폼을 정리하던 태섭은 버릇처럼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유니폼에는 주머니가 없지, 참. 당연한 사실을 망각했단 것에 민망해진 태섭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평소 핸드폰을 그리 자주 들여다보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오늘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답장이 느린 편도 아니면서 오늘만큼은 연락이 없는 정대만 때문에. 고맙다는 낯간지러운 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지만 이렇게 답장조차 없을 줄은 몰랐다. 역시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날이 춥다고 새벽부터 연락한 건 괜한 오지랖이었나.

“태섭아.” 언짢은 마음을 대변하듯 실시간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는 눈썹을 보고 있자니 달재가 그를 찾아 화장실로 들어섰다. “빨리 와. 앞 팀 경기가 끝나서 곧 입장해야 해.”

“어.” 화장실 거울에 빼꼼히 비친 달재의 얼굴에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한 태섭이 답했다. “지금 갈게.”

앞선 세 번의 전국대회 출전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그중 가장 와닿는 변화는 경기장의 분위기였다. 전국대회 첫 출전에, 최강산왕과 맞붙던 날 경기장에 첫발을 들인 순간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커다란 경기장 안을 가득 메운 응원 소리 속에서 북산의 이름은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였었다.

힘내라, 북산!

북산의 붉은 유니폼이 코트 위에 나타나자 터져 나온 응원 소리에 태섭이 등을 돌려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때 산왕을 응원하던 열기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결코 작지 않은 소리에 태섭이 씩 웃어 보였다. 경기에서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기세 싸움이었다. 여유로움으로 무장한 태섭의 미소에 관중석에서 한층 더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고릴!”

경쟁이라도 붙은 듯 북산과 상대 학교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 사이를 뚫고 강백호가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관중석을 쭉 둘러보던 태섭의 시선 또한 그쪽을 향했다.

“주장.”

“강백호는 그렇다 쳐도, 너까지 그렇게 부르면 어떡해.”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다가서니 강백호를 향하고 있던 시선이 대번에 제게 와 꽂혔다. “주장은 너다, 송태섭.”

“명심할게요.”

말과는 달리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에 속으로 웃음을 삼킨 태섭의 시선이 차례로 치수의 옆을 향했다.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준호 선배와 백호군단, 그리고 그 옆에 선 익숙한 얼굴.

“여, 송태섭.”

눈이 마주치자 난간에 걸치고 있던 손을 흔들어 보이는 대만의 모습에 태섭이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문자에 답이 없던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그러나 대만은 그런 태섭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코트에 없다고 해서 긴장한 거 아니지?”

“하?”

아무렇지 않은 척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훅 들어온 공격에 태섭이 대번에 뾰족해진 눈으로 대만을 노려봤다. 오랜만에 보는 불량한 시선이었으나 대만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쫄지마.”

순간, 똑같이 미운 말을 해주리라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입꼬리에 힘이 탁 풀렸다. 그 말을 또 들을 줄은 몰랐는데. 절로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잠시 고개를 숙였던 태섭이 다시 고개를 들어 대만과 시선을 마주했다. 여전히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얄미운데, 또 그만큼 좋았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질 만큼. 결국 표정을 감추기를 포기한 태섭이 큰 소리로 답했다.

“안 쫄아.”

 아까는 녀석의 패스를 받고 싶었는데, 지금은 함께 걷고 싶었다.

 

송태섭은 말 그대로 코트 위를 날아다녔다. 원래도 빠른 스피드에 패스가 특기인 건 알았지만 오랜만에 유니폼을 입고 코트 위에 선 모습을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빠르게 상대팀을 제치고 달려나가는 태섭의 모습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가볍게 수비를 제치고 상대팀의 코트로 진입한 태섭이 신중한 눈으로 코트 위 상황을 살폈다. 상대는 북산의 플레이를 많이 연구한 모양인지 서태웅과 강백호에게는 이미 마크가 따라붙어 있었다. 처음은 기선제압 겸 북산의 명물 콤비 중 하나가 득점했으면 했는데. 뭐, 어차피 똑같은 2점이니까 상관없나.

잠시 상대팀 포인트 가드와 대치를 이어가던 태섭의 발이 순간 멈추었다. 그리고 상대팀의 포인트 가드가 반응하기도 전에 가볍게 점프. 림에 한 번 맞기는 했으나 그물망으로 깔끔히 빨려들어가는 공에 대만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만이 쏟아지는 환호에 목소리를 보태고 있는 사이, 저를 향해 달려든 팀원들과 주먹을 맞댄 송태섭이 뒤를 돌아 관중석 쪽으로 주먹 쥔 팔을 쭉 뻗었다. 거리가 꽤 있음에도 저를 향하는 것이 분명한 시선에 대만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잠시간의 세레머니를 마치고 수비를 위해 백코트를 하는 태섭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대만이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같은 코트 위에서 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북산은 무난하게 2회전에 진출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대학생의 얄팍한 지갑을 털어 밥을 산 대만과 치수, 준호는 내일 경기를 준비해야 하는 후배들을 위해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숙소를 잡기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내일 만날 약속을 마지막으로 버스 정류장에서 치수와 준호와 헤어진 대만이 찬 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최대한 바람과 닿는 면적을 줄이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던 대만은 코너를 돌아 익숙한 골목길에 접어들자 슬쩍 고개를 들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진 탓에 거리의 가로등에는 벌써 불이 들어와 있었다.

“으, 추워.”

잠시 노란색 가로등 불빛으로 물든 텅 빈 골목길을 바라보던 대만이 다시금 어깨를 움츠리고 걷기 시작했다. 오늘 얼굴을 봐서 그런가. 고작 한 번의 겨울 동안 이 길을 같이 걸었던 녀석이 옆에 없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아, 보고 싶네.”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혼잣말로 하얀 입김을 피워올린 대만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는 녀석의 패스를 받고 싶었는데, 지금은 함께 걷고 싶었다. 괜히 코를 한 번 훌쩍인 대만이 걸음을 재촉했다.

산타한테 선물 달라고 빌어본 지 너무 오래됐는데, 올해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눈을 내려 달라고 빌어야 하나.

 그런데, 네가 딱 한 수 더 위야.

 

“내일 만만치 않겠는데.”

“상대도 3회전까지 올라온 팀이니까요.” 올 줄 알았다는 비워둔 옆자리를 탁탁 치는 대만의 모습에 거절하지 않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태섭이 말했다. 3회전에서 맞붙게 될지도 모르는 팀의 경기를 조금이라도 보고 싶어 경기를 마친 후 급하게 씻고 오느라 아직 물기를 머금은 머리가 신경 쓰인 태섭이 괜히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떻게 공략하는 게 좋을까요.”

“윈터컵 준비하면서 분석했을 거 아냐.”

“했죠.”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한 대만의 목소리에도 태섭은 코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도 제3자의 눈으로 본 의견도 듣고 싶어서.”

때마침 파울이 선언되며 경기의 흐름이 끊기자 그제야 태섭이 눈을 굴려 대만을 올려다봤다.

“… 포인트 가드 녀석이, 너랑 비슷해.” 언제부터 경기가 아니라 태섭을 보고 있었는지 바로 마주친 시선에 대만이 움찔했다. 그러나 당황한 것도 잠시, 대만은 이내 저를 올려다보는 태섭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발도 빠르고, 볼 컨트롤도 능숙해.”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대만에 태섭이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3회전 상대가 될지도 모르는 팀의 포인트 가드가 저와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정대만도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고작 그것밖에 해줄 말이 없냐는 듯한 태섭의 눈빛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인 대만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덧붙였다.

“그런데, 네가 딱 한 수 더 위야.”

  

다른 선배들은요?

치수는 소연이도 여기 있는데 자기라도 부모님하고 시간 보내야겠다고 먼저 돌아갔고, 준호도 마찬가지.

오….

너 그 시선 뭐냐? 나도 지금 가잖아. 조금 늦었을 뿐이라고. 너야말로 다른 놈들은 어쩌고 혼자 경기 보러 왔는데.

내일도 경기 뛰어야 하니 얼른 들어가 쉬라고 보냈죠.

너도 마찬가지잖아.

저는 주장이잖아요.

 

“아, 버스 왔다.”

오후 경기가 끝났을 때쯤 하늘은 제법 어둑해져 있었다. 가벼운 실랑이 끝에 대만을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하기로 한 태섭이 먼저 정류장으로 들어서는 버스를 발견했다.

“조심히 가요.”

버스에 올라타는 대만의 뒷모습을 보며 내일 보자는 말을 덧붙일까 고민하던 태섭은 자신도 탈 것인지 가늠하는 듯한 버스 기사의 시선에 결국 조용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닫힌 문 안으로 카드를 찍은 대만이 버스 뒷자리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는지 창 쪽에 자리한 대만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신호를 받은 버스는 곧 대만을 싣고 사라졌다. 그제야 크게 심호흡한 태섭이 천천히 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경기장을 나설 때보다 어두워진 하늘은 맑은지, 흐린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둡기만 했다. 말, 했어야 하나. 내일도 보자고. 북산의 경기가 있으니 당연히 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만에 하나라는 가정을 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소리 나게 혀를 찬 태섭이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식이라도 사서 들어갈까. 주장으로써 내일 경기 상대를 파악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챙겼다는 사실이 조금 양심에 찔린 태섭이 생각했다. 먹성 좋은 녀석들을 먹이려면 웬만한 양으로는 안 될 텐데. 우선 저녁을 먹었는지 물어보는 게 좋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태섭이 핸드폰을 찾기 위해 더플백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경기장에서는 공용 락커를 사용하는 만큼 귀중품의 경우 옷에 달린 주머니보다는 지퍼가 달린 가방에 넣어두는 편이 분실 위험이 적었다.

더플백의 바깥쪽 주머니에는 자주 쓰는 물건들을 넣어두는 만큼 자잘한 물건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집과 체육관 열쇠가 달린 열쇠고리, 손톱깎이, 지갑, 작은 수첩, 볼펜 등을 손끝의 감촉만으로 구분해 내던 태섭의 손에 익숙하고 낯선 것이 닿았다. 까끌하고 보드라운, 사용감이 느껴지지 않는 천의 감촉에 잠시 손끝으로 그것을 더듬던 태섭이 이내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 걸어왔던 길을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것만한 크기의 달력에는 빨간색 동그라미가 딱 하나 그려져 있었다.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대만은 타이밍도 나쁘게 외출하기 위해 집을 나서려던 부모님과 마주치고 말았다. 어머, 오늘 약속 없니?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오늘 저녁 얼굴을 볼 줄 몰랐다는 듯 놀란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대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어머, 어머. 웬일이래. 무언으로 긍정하는 대만의 반응에 한층 더 커진 목소리로 ‘어머’를 연발하는 어머니를 제지한 건 아버지였다. 영화 시간 늦겠어. 지금 영화가 문제냐고, 영화보다 재밌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어머니의 등을 떠밀어 먼저 현관문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야 아버지의 시선이 대만을 향했다. 집에 먹을 거 없으니 뭐라도 시켜 먹거라.

폭풍처럼 휘몰아친 잠시간의 조우 끝에 아버지의 등 뒤로 현관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대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배달이라니. 지금 시키면 크리스마스에 받게 될지도. 혼자 남은 집에 굳이 불을 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대만이 창밖의 불빛에 의지해 거실을 가로질렀다. 방에 들어서서도 간단히 책상 위 스탠드 조명만을 켠 대만은 그대로 몇 걸음 더 옮겨 창가에 다가서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아들과 마주친 어머니의 반응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맘때쯤이면 늘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으니까. 그게 이성이던, 동성이든 간에. 작년에는 고등학교 마지막 윈터컵에 출전하느라 자리를 비웠던 것이지만, 어쨌거나 연말에는 늘 약속이 많아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웠던 아들이 대학교 신입생이 되어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약속이 없다고 집에 들어왔으니 당연히 이유가 궁금할 터였다.

거리를 휘감은 크리스마스 장식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밝은 바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만이 아예 창에 몸을 기대고 섰다. 일기예보에서 뭐라고 했더라. 새벽에 눈이 온다고 했던 것도 같은데 어두운 하늘에는 아직 작은 눈송이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괜히 허공과 불필요한 눈싸움을 하던 대만이 책상 위에 놓인 탁상달력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것만한 크기의 달력에는 빨간색 동그라미가 딱 하나 그려져 있었다. 25일, 크리스마스. D-day. 얼마 전 제 손으로 적어 넣은 저 메모 때문에 올해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음에도 자취방에서 저 달력을 가장 먼저 챙겼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퍽 웃긴 제 행동에 슬며시 웃음을 흘린 대만이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대만 자존심이 있지. 좋아하는 사람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고백하겠다고 해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오분 대기조를 했다는 사실은 죽을 때까지 비밀이었다.

대단한 결심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또 다른 회피였다는 것을.

때로 어떤 진실은 홀로 간직하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선의의 거짓말과는 조금 다른데, 거짓으로 감추려 하는 대신 아예 그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를 말했다. 그리고 이는 송태섭의 특기이기도 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 태섭은 달재에게 연락해 일이 생겨 조금 늦게 숙소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말을 전했다. 지금 자신이 그토록 오래 간직해 온 마음을 전하기 위해 정대만에게 가는 중이라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은 채. 예상치 못한 태섭의 말에 달재는 잠시 침묵하다 되물었다.

 

다쳤어?

아니.

사고나, 싸움에 휘말린 거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내일 경기 전까지 돌아올 수 있어?

그렇게까지 늦지는 않을 거야.

 

그럼 됐어.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답한 태섭에 그제야 달재가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는 나랑 한나가 챙길게. 걱정하지 마.

그럴 리 없을 텐데도 꼭 저를 응원하는 듯한 목소리에 이번에는 태섭이 침묵할 차례였다.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은 태섭이 이내 손에 든 핸드폰을 꽉 쥐며 답했다.

“고마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매일 지나던 익숙한 길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분명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기던 태섭이 흘끔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여전히 작은 눈송이 하나 떨어지고 있지 않았지만, 이제 그런 것쯤은 아무 상관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고백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아무 소용 없는 일은 아니었다. 덕분에 농구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알았다. 대단한 결심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또 다른 회피였다는 것을. 늘 정대만과 헤어지던 갈림길에 다다른 태섭이 주머니 속 무릎 보호대를 꾹 움켜 쥐었다. 아주 오랫동안 더플백 깊숙한 곳에 넣어둔 채 가까이 두었다 착각했던 이것처럼,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고백하겠다는 핑계로 또 한 번 마음을 전할 날을 미뤘을 뿐이었던 것이다.

“하….”

일부러 여유로운 척 느리게 걸음을 옮겼음에도 결국 도착하고 만 대만의 집 앞에서 태섭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쿵쾅거리던 심장이 이제는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헛구역질을 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숙인 채 깊게 심호흡을 하던 태섭은, 문득 제 신발 위에 떨어지는 하얗고 작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이 그토록 기다리던 눈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제 신발과 주변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녹아 없어지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섭의 입가에 이내 미소가 걸렸다. 눈이 오지 않아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이 내리는 것을 보니 응원이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락하기 좋은 핑계이기도 했고.

그러나, 반대편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며 고개를 들던 태섭은 순간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야, 송태섭.”

익숙한 목소리에, 익숙한 얼굴. 조금 전까지 머릿속으로 그리던 사람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쏟아지는 입김에 그렇게 묻는 정대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뒤축을 구겨 신은 운동화와 단추도 잠그지 않은 코트, 그리고 손에 들린 목도리.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찬찬히 그것들을 훑어본 태섭이 그제야 대만과 시선을 맞췄다.

“… 눈이, 와서. ”

조금 전까지 긴장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던 심장은 이제 기분 좋을 정도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저와 마찬가지로 긴장이 엿보이는 얼굴이 제 다음 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와서요."

그래서 형이 보고 싶었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대만은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집을 비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대만은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집을 비웠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와서요.

제 물음에 그렇게 답하는 송태섭의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정대만은 농구 코트가 아닌 곳에서 송태섭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봤다. 늘 삐뚤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던 눈썹이 순하게 아래로 쳐져서, 아이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 저를 위해 헐레벌떡 뛰어나온 것이 분명한 정대만 또한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찬 표정. 대만은 그 모든 감정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은 태섭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괘씸했다.

“내일 경기도 있는 놈이.” 아무리 같은 마음이라고 해도 ‘좋아해’라는 말 한마디 없이 분위기를 타고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건 어디서 배웠담.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투덜거린 대만이 불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눈 와서 미끄러우니까 뛰지는 말고, 빨리 걸어.”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본 대만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어 걸음 만에 저를 지나치려는 그의 모습에 잠시 당황한 듯했던 태섭 또한 이내 그보다 한 발자국 쯤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빨리해 발맞춰 걸으면 제 손목을 낚아챈 손이 제자리로 돌아갈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걸음을 재촉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늦지 않게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혼자 돌려보낼 줄 알았는지 제 뒤를 따라 버스에 오르는 대만에 눈이 동그래진 태섭을 지나친 그가 먼저 2인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번에도 그런 대만의 모습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한 태섭이 얼른 어깨에 메고 있던 더플백을 벗어들며 그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 사이, 벌어진 코트 앞섬을 정리하고, 손에 들고 있던 목도리까지 잘 개어 무릎 위에 올린 대만이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누구한테 연락해요?” 한 손으로 능숙하게 문자를 찍는 대만의 모습에 태섭이 물었다.

“엄마.” 그 질문이 진짜 궁금해서가 아닌 제 관심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만이 태연히 답했다. “오늘 안 들어간다고.”

대만은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서 들려온 급하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에 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하여간, 발랑 까져서는.

“눈이 이렇게 오는데, 오늘은 아마 평소보다 일찍 차가 끊길걸.”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소중한 후배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숨이 넘어가는 불상사에 일조하지 않기 위해 대만이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태섭은 그제야 대만이 저를 놀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다시금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녀석의 눈썹에 이번에는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않은 대만이 모른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그 위로 내리는 눈을 구경하는 척하며 대만은 창에 비친 태섭의 얼굴을 구경했다. 평소 같았으면 놀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벌써 대거리를 했을 텐데, 잔뜩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하고도 가만히 있는 꼴이 퍽 웃겼다. 좋아하면 져주는 타입인가. 평소와 다른 녀석의 반응에 흥미로워하고 있던 대만은 문득 무릎께가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더플백을 끌어안고 있던 녀석의 손 하나가 어느새 제 무릎 위로 넘어와 있었다. 그새 목도리에 얼굴을 푹 파묻은 녀석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부끄러운 듯 했다.

“크흡.”

다시금 장난기가 치밀어 오른 대만이 슬쩍 손을 움직여 태섭의 손을 건드리자 대번에 녀석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그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음을 터뜨릴 뻔한 대만이 급하게 목을 가다듬고는 태섭의 눈치를 살폈다. 이쯤이면 무어라 반응이 있을 법도 한데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린 게 마음에 걸렸다. 사과, 해야 하나.

하지만 대만이 무어라 입을 열기 전, 태섭이 먼저 움직였다. 조금 전의 조심스럽던 움직임과 달리 덥석 제 손을 움켜쥐는 태섭의 손에 대만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까스로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을 피한 대만이 제 손을 움켜쥔 태섭의 손을 내려다봤다. 핏줄이 불거진 손등과 달리 제 손을 감싼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한 것이 녀석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에 덩달아 부끄러워진 대만이 다시금 헛기침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릎 위 손은 여전히 내어준 채로.

 

대만의 예상대로 눈발은 점점 더 굵어져 두 사람이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발이 푹 파묻힐 정도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과 신발 사이로 들어오는 눈이 짜증 날 법한데도, 두 사람은 그저 두 손을 맞잡고 걸었다.

“여기야?” 좋은 데서 묵네. 경기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숙소 앞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춘 태섭에 그제야 대만이 입을 열었다. “들어가. 꼭 따뜻한 물로 씻고 자고.”

“선배는 어떡하게요.”

“근처에 찜질방 있나 찾아보지 뭐.”

“그러지 말고 들어와서 자고 가요. 한 사람쯤은 더 잘 수 있을 거예요.”

“됐다. 너 내일 경기 있잖아.”

맞잡은 손을 부드럽게 흔들어 뺀 대만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말에 태섭은 수긍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으나 대만은 그저 자유로워진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지금도 늦었으니까 푹 자고, 내일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다는 듯 돌아선 대만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의외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없구나. 가만히 태섭이 숙소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지 집중하던 대만이 문득 생각했다. 돌아선 지 꽤 되었음에도 여전히 하얗게 쌓인 눈을 밟는 소리는 제 것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몇 걸음 더 옮기던 대만은, 결국 얼마 더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급할 것 없이 천천히 돌아선 곳에는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서 있는 송태섭이 있었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녀석은 그 순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 굳게 다문 입 사이로 작게 한숨이 흘렀다. 그리고 그 한숨이 다 흩어지기도 전에, 대만은 눈이 와서 미끄러우니 조심하라 했던 말을 잊은 것처럼 뛰듯이 제가 걸어온 거리를 돌아갔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녀석의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이 보였다. 뭐야, 역시 자고 가는 게… 그런 대만의 모습에 태섭이 반색하며 입을 열었으나, 대만은 대답 대신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손을 뻗었다.

찬 기운과 함께 목도리 사이로 파고드는 손에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게 손끝으로 느껴졌다. 그런 태섭을 달래듯 엄지로 볼을 한 번 쓰다듬은 대만이 그대로 목덜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힘에 찬바람에 건조하게 부르튼 입술이 짧게 스쳤다 떨어졌다.

“… 첫 선물은 립밤이 좋겠네.” 할 말을 잃은 듯 저를 올려다보고 선 태섭에 대만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이래서 같이 안 잔다는 거야. 알겠어?”

그러나, 말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시선을 맞추는 것은 부끄러운지 먼 곳을 보고 말을 잇는 대만에 태섭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내일 이겨야 한다. 지면 나 죄책감 들 것 같다.”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고개를 주억거리는 태섭에 대만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거, 지금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구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건 마찬가지면서 또 한 번 태섭이 귀엽다 생각한 대만이 엄지손가락에 닿은 태섭의 피어싱을 한 번 톡 치고는 목덜미를 감쌌던 손을 빼냈다.

“진짜 내일 보자.”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끄덕하는 태섭을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좋아한다는 말도 없이 얼렁뚱땅 넘어간 고백도 받아줬는데, 이 정도 심술은 부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조금 얼이 빠진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정신 차리면 알아서 들어가겠지.

잠시 후, 뒤에서 무언가 곱게 쌓인 눈 위로 털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대만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Epilogue

첫 크리스마스에 대한 두 사람의 기억은 사뭇 달랐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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