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조나의 휴일

태섭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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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섭이를 만나러 처음 애리조나에 온 대만이

  • 매우 슴슴합니다

대만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약 10년 만에 온 미국은 공기마저 낯설었다. 사람들이 광활한 공항 안에서 캐리어를 끌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몇몇 사람은 데리러 온 사람을 만나 진한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다 낯뜨거울 만큼 키스를 하는데, 더 놀라운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만은 귓대기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어릴 때는 비시즌마다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래봤자 부모님 손에 끌려 별 생각업싱 돌아다닌 게 전부지만. 여기저기 유명한 곳은 다 간 거 같은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농구 코트밖에 없었다. 당연 미국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으로 인상적인 곳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밤 아홉 시까지 하늘이 밝아 늦게까지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할 수 있었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 자리에서 간단한 스패니쉬도 몇 개 익혔는데, 당장 떠오르는 건 올라와 아디오스 정도다. 영어는 그보다 더 많이 기억하긴 하는데, 혹시 몰라 석 달 전부터 영어 회화책을 서너 개씩 구해와 달달달 연습했다. 그러나 이미그레이션에 섰을 때 대만은 허탈함을 느꼈다. 주어 서술어 목적어 온갖 시제와 변형을 지키지 않아도 미국인은 대체로 알아들었다.

「What is your purpose of your visit?」

「Um, to meet my friend.」

「Have a nice day.」

「Thank you.」

그냥 이게 전부였다. 와, 나 의외로 미국에서 잘 지낼지도? 대만은 김칫국을 거하게 마시며 손목시계를 흘끔 보았다. 그래서, 이 녀석은 언제 오냐. 핸드폰을 켜 봐도 소식이 없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15시간 전 태섭이 보낸 것이었다.

 

도착 시간에 맞추어서 마중 나갈게요

 

도착 시간은 한 달 전에 알려주었다. 티켓 사진을 찍어 보냈을 때 태섭이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던 것이 생생히 기억난다. 진짜 이번에 와요? 오는 거예요? 얼마나 있다 갈 거예요? 마치 주인에게 치대고 조르는 강아지 같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 웃지만 말고요, 태섭이 발을 구르면서 채근했다.

너만 안달이 난 줄 아냐, 대만은 핸드폰을 닫으며 캐리어 위에 앉았다. 애인을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리는 건 대만도 다를 게 없었다. 무려 7개월 만이다. 태섭이 미국으로 간 뒤 처음 만나는 것이다. 그 전에는 대만이나 태섭이나 서로를 만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대만은 대학 리그 시즌이 끝나고 축제며 전국체전을 준비하느라 시간이 없었고, 태섭은 태섭 나름대로 미국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안 그래도 자리 잡느라 낑낑대는 애한테 언제 볼 수 있냐고 묻는 것도 부담이 될 것 같았다.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작은 강아지가 토도독 하고 걸어오는 것 같은 진동에 대만은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임마, 7분 지각이야. 대만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캐리어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곧 익숙하게, 그러나 조금 벅차게 태섭이 안겼다.

「흐아아…. 미안해요 선배,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서. 많이 기다렸어요?」

「엉. 8분이나 기다렸어. 나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

정확히는 7분 30초지만 알 바인가. 대만의 앙탈에 태섭이 뺨에 뽀뽀하며 말했다.

「큰일났네. 기내식 안 먹었어요?」

「너무 짜서 손이 안 갔어. 나 네가 해준 달걀말이 먹고 싶은데.」

「그래요, 설탕 반 소금 반 맞죠?」

대만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태섭을 따라 공항을 나왔다. 대만은 설탕과 소금이 완벽한 비율을 이루는 달걀말이를 좋아했다. 손이 많이 가는 입맛임에도 태섭은 언제나 군말 없이 대만이 먹고 싶다는 것을 척척 만들어주었다. 하여튼 송태섭 새끼,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대만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느 새 캐리어는 태섭이 밀고 있었다.

태섭이 가져온 차는 중고 티가 물씬 나는 지프였다. 어디서 구했느냐고 묻자 룸메이트에게 빌렸다고 대꾸했다. 그의 기숙사 룸메이트린 루크는 부모님이 캘리포니아에서 오렌지 농장을 한다. 저 지프차도 그의 아버지가 물려준 것이었다. 한국에서 친구가 오는데 잠깐 빌릴 수 있느냐고 묻자, 루크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차키에 제가 아끼는 CD까지 선뜻 빌려주었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태섭이 그 CD를 틀 일은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이다. 대만을 픽업하러 오면서 노래를 들었던 태섭은 얼굴이 섀빨갛게 되어 황급히 운전석 서랍에 CD를 숨겼다.

「안 불편해요?」

「음, 아니? 적당히 좋은데.」

뒷좌석에 캐리어를 던져둔 대만이 조수석에서 다리를 쭉 펴며 대꾸했다. 태섭은 그 말에 대꾸없이 조심스럽게 대만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대만은 피식 웃으며 기꺼이 입을 맞춰주었다. 자식이 말이야, 미국에 와서 일 년 지냈다고 아주 발랑 까졌어. 속으로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치라도 챘는지 태섭의 눈썹이 바로 삐죽 올라갔다. 대만이 그 눈썹을 검지로 쭉쭉 펴면서 치적했다.

「얼씨구 얼씨구? 또 뭘 잘했다고 눈썹 올리시고 이러시나?」

「왜인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이런 말 하면 좀 그런데.」

「어어? 너 지금 반말했냐?」

고작 한 살, 개월로 치면 1년이 조금 안 되는 나이 차면서 대만은 은근히 형 노릇하는 것을 좋아했다. 외동이라 그런 것에 판타지라도 있는 걸까. 그치만 이게 어디서 형한테 반말이야?라면서 씩씩대는 대만은 조금 귀엽긴 하다. 사람이 귀여워 보이면 이제 신선이 와도 못 구한다는데. 3초 정도 생각한 태섭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구해질 마음도 없는데 뭐, 상관있나. 이번에는 태섭이 대만의 코를 꼬집으면서 말했다

「보나마나 키스 하나 해준 것 같지고 미국 와서 발랑 까졌다 그런 생각했겠죠.」

뜨끔, 속이 찔린 대만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태섭이 또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어어, 왜 자꾸 눈을 돌리지?」

그가 같잖은 소리를 하면서 양손으로 얼굴을 딱 잡더니 억지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미국에서 몸싸움에 안 밀리려고 벌크업 좀 한다더니 반 년 사이에 어깨도 벌어지고 힘도 좋아졌다. 분명 나 졸업 전까지만 해도 작고 잽싼 게 다람쥐 같았는데. 소동물은 어디가고 웬 버팔로 같은 게 자기를 보라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아, 이건 아직 애같네. 낯선 모습 속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하고 대만은 또 비실비실 웃었다. 태섭은 또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볼을 부풀리고. 네가 너무하네 아니네 한참 옥신각신 하다가 15분이 지나고서야 겨우 출발했다.

수요일 오후 네 시 애리조나 시내는 한적했다. 태섭은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달리며 대만에게 물었다.

「숙소 주소가 어디라고 했죠?」

「잠시만, 예약 내역 보여줄게.」

태섭은 대만의 말에 갓길에 정차하곤 기다려주었다. 대만은 핸드폰을 켜 예약 내역을 보여주었다. 호텔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역시나 다운타운에서 평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대만은 언뜻 털털하고 덤벙거리고, 가리는 게 없어 보였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따지는 것이 의외로 많았다. 그게 몸에 익어서 스스로도 자신이 깐깐하다고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대만이 손이 많이 가는 편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는 기실 이런 도련님스러운 기질 때문이었다. 가령 한 음식은 1인분 이상 못 먹는다든가. 겨울 이불에 솜이 조금이라도 뭉쳐 있거나 베개가 조금이라도 낮으면 신경 쓰여서 밤잠을 설친다든가, 남의 집에 들어갈 때는 무조건 슬리퍼를 신는 것도. 덕분에 태섭의 집에는 여전히 대만을 위한 슬리퍼 한 쌍이 신발장 안에 들어 있다.

애리조나의 휴일

대만이 보여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느리게 액셀을 밟고 핸들을 움직이는 두툼한 손을 보고 대만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각 삼켰다. 솔직히 수절 7개월은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끝내주는 애인을 이억만 리 타향에 두고 혼자 이래야 하나, 현타가 올 때도 있었다. 작년 9월 멋모르고 덜컥 롱디를 시작했을 때는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크리스마스에 태섭이 잠깐 들어온 게 화근이었다. 그 이후론 여러 의미로 태섭이 그리워서 혼났다.

때문에 대만은 새해가 되자마자 여름방학에 애리조나에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살다간 미쳐버리거나 고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태섭이가 오지 못한다면 내가 간다. 그때부터 미국 여행용 통장을 만들어 달마다 돈을 넣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환율이라는 것도 신경 쓰게 되었다. 100달러가 한화로 약 13만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생각보다 높은 미국의 물가에 태섭을 걱정했다. 개는 집안도 넉넉하지 않아서 돈이 빠듯할 텐데 괜찮으려나. 그러나 괜한 걱정을 하면서 용돈을 주는 것은 오히려 그애의 성질을 건드리는 짓이 될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나 연애 초에는 이런 이유로 자주 싸웠는데, 멀어지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개는 남의 손을 빌리는 것에 서툴러서 그랬던 걸지도, 싶은.

「더 필요한 건 없어요? 호텔 들어가기 전에 뭐 좀 사서 가면 좋잖아요.」

태섭이 호텔 앞에 차를 세우며 물었다. 어느 새 숙소에 도착했다. 태섭이 먼저 차에서 내린 다음 발렛파킹 요원에게 열쇠를 넘겼다. 뒤이어 지라에서 일어난 대만은 뒷자리에서 캐리어를 꺼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딱…. 히 없지 않나?」

「없긴 뭐가 없어요. 형 기내식 제대로 못 먹었다면서요. 이 근처에 아시안 레스토랑은 없는데, 마트에서 간편식이라도 사 가는 건 어때요?」

얼빠진 대답에 태섭이 즉시 말하며 맞은편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을 가리켰다. 대문짝만 하게 쓰여진 간판 아래에 한국어 피켓이 언뜻 보였다. 한국 음식을 파는 곳인 듯했다. 미국에서 한식이 건강식으로 유행한다더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대만은 피켓을 보며 중얼거렸다.

「김밥도 팔려나?」

「김밥이요? 이 근방에 있을 거 같은데. 잠시만요.」

그러면서 태섭은 제 핸드폰을 꺼내 지도 앱을 한참 살폈다. 대만이 태섭을 만류하며 손목을 잡았다.

「야, 뭐가 그렇게 급해. 일단 짐 좀 방에 놓고 오자. 들고 다닐 수는 없잖냐.」

대만은 제 캐리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태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만을 따라 호텔로 들어갔다. 아니, 체크인은 혼자 할 수 있는데. 그러나 대만은 태섭이 가만히 따라오도록 내버려뒀다.

체크인을 마치고 이런저런 복잡한 설명을 들은 다음(하필 직원이 호주식 영어를 쓰는 탓에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매뉴얼을 주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키를 받아 숙소로 올라갔다. 둘만 엘리베이터 안에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외국 영화에서 보면 여기에서 아주 입술 부비고 난리도 아니던데. 대만은 태섭을 흘긋 보았으나 그런 기조가 전혀 보이지 않아 내심 아쉬워했다. 괜히 들떠서 이것저것 챙겨왔나 싶기도 했고.

그러나 막상 호텔 키를 넣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태섭이 캐리어를 뺏듯이 들어 멀리 치워버리곤 성급히 입을 맞추었다. 아래에 닿는 묵직한 것에 대만은 또 웃어버렸다. 아 웃지 마고요, 태섭이 성질을 내면서 다시 깊게 키스했다. 미끈한 혀가 정신 사납게 입안을 헤집고 쓸었다. 하여튼 아닌 척은 잘 해. 그러나 이번엔 자신도 못 알아챘다는 게 화가 나 송곳니로 혀를 깨물었다. 태섭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혀를 물렸다. 히죽 웃자 태섭이 허 웃으면서 턱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아 형, 장난치지 말고.」

「야, 누가 쫓아오냐? 뭐가 이렇게 급해. 너 뭐 좀 먹자는 것도 뻥이지.」

「뻥 아닌데, 한 3분만 하면 안 돼요?」

태섭이 양팔로 대만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색한 애교를 부렸다. 와,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천하의 송태섭이 애교 부리는 걸 보다니. 저절로 마음이 간질거려 대만도 태섭의 등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대신 3분 만이다? 어차피 지쳐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대만은 못 이기겠다며 신신당부했다. 지는 척해주면 태섭이 고개를 냉큼 끄덕이면서 턱에 잘게 입을 맞추어주었다. 대만을 달래려는 태섭의 꼼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대만이 가장 좋아하는 애교였다. 다시 푸슬푸슬 웃음이 터져나왔다. 잘게 입술을 문대며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30분이 지나고서야 대만은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나 이제 진짜 배고파. 벗은 상채를 드러낸 채 침대에 엎어져 헥헥대다가 대만이 일어나며 칭얼댔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를 주워 샤워실로 들어가는 대만을 보면서 태섭이 물었다.

「아래 마트 갔다올게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알아서 사, 알아서.」

「네에.」

대만이 샤워실 문을 닫았다. 태섭은 샤워실 옆에 딸린 세면대에서 빠르게 얼굴과 손을 씻은 다음 옷을 주워입고 밖으로 나갔다. 긴 해후를 푼 덕에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호텔 밖으로 나와 신호를 기다리는 중에 제이크와 휠을 만났다. 둘은 태섭의 팀메이트이자 소울메이트로, 북산의 강백호나 서태웅과 맞먹는 꼴통 바보들이었다. 그들과 다른 점이라면 또 그만큼 입이 가볍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태섭은 다운타운 호텔 앞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한 박자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 쏭!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불러도 안 나오는 자식이.」

제이크가 먼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는 태섭을 <쏭>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일부로 과장되게 발음하는 건가 싶었는데, 감독에게도 우스꽝스런 별명을 붙여주는 것을 보곤 이해했다. 여기에도 강백호 같은 녀석이 있군. 그 후로는 별말 하지 않았다. 물론 제이크가 아닌 다른 놈이 <쏭>이라고 부르면 강냉이를 털 기세로 발음을 정정해주지만.

「산책 겸? 너네도 여기까진 잘 안 나오잖아.」

「오~후. 쏭, 거짓말하려면 좀 성의있게 하든가. 우리는 뭐 오랜만에 문화생활 즐기러?」

「뻥까고 있네. 헌팅하러 나온 거겠지.」

태섭이 여유롭게 받아치고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지나가던 사람이 흘긋 쳐다봤다. 아 쏘리쏘리, 멀리 사라지는 행인에게 사과하며 휠에 태섭의 목에 팔을 걸며 물었다.

「하, 쏭. 이건 헌팅이 아니야. 내 운명의 짝을 찾는 거지.」

「얼씨구, 그래서 넌 3개월마다 차이냐?」

「아니, 이번엔 진짜로 느낌이 좋다니까? 쏭은 그런 적 없어? 막~. 막 이렇게, 어? 이 사람은 나와 천생연분이다! 싶은 적 진짜 없었냐고.」

휠이 태섭의 어깨를 붙들고 정신 사납게 흔들었다. 태섭은 어지럽다고 핀잔을 주며 신호등을 흘긋 보았다. 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태섭은 족제비처럼 날렵하게 휠에게서 벗어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말했다.

「아무튼 나 바빠. 캠퍼스에서 봐.」

「우, 치사하다 쏭!」

「뭔데, 혹시 예쁜이 하나 숨겨두고 있는 거 아냐?」

태섭이 길을 건너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쉼없이 놀렸다. 태섭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마트로 들어갔다. 애매한 시간대라 가게는 한산했다. 캐셔는 지루한 표정으로 천장에 걸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MLB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태섭은 간판에 걸린 품목을 살피다가 <Instant>라고 적힌 진열대로 들어갔다. 4달러짜리 스시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대만은 해산물을 좋아하지만, 바다가 없는 애리조나의 해산물 요리는 믿고 먹을 만한 물건이 아니다.고개를 돌리고 대만의 입에 맞을 만한 것들로 장바구니를 채웠다. 리코타 치즈 샌드위치와 레토르트 야키토리, 고기만두 등이 가득 쌓였다. 먹고 남으면 기숙사로 가져가서 비상식량으로 쓰고. 태섭은 조금 묵직해진 장바구니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캐셔는 여전히 지루하지만 전문가임이 느껴지는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바코드를 찍고 계산을 마쳤다. 총 32달러. 생각보다 많은 지출에 태섭은 카페테리아에서 가장 싼 음식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괜히 샀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먹인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태섭은 묵직한 비닐봉지를 들고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리어가 태섭의 봉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가 봉투 안에서 꺼낸 즉석식품을 보고는 눈을 돌렸다. 아무래도 조리가 금지된 호텔에서 요리를 할 거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나갈 때 팁을 좀 찔러줘야지. 일 년 사이 미국 문화에 적응한 태섭은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태섭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대만은 한결 보송해진 얼굴로 침대에 앉아 텔레비전 채널을 훑어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 예능을 방송해주는 곳을 찾고 있나 싶었는데, 최근 유행한다는 한국 드라마도 건너뛰는 것을 보니 NBA 경기 채널이 목표인 듯했다. 태섭은 간이 테이블에 봉투를 내려놓은 다음 대만의 손에서 부드럽게 리모콘을 가져와 채널을 맞춰주었다. 이내 대만의 얼굴이 밝아졌다.

「왔어? 야, 뭘 이렇게 바리바리 싸왔냐. 나 이거 다 못 먹어.」

「형 먹으라고 산 거 아니라 남으면 내가 가져가려고 산 건데.」

「얌마.」

사귀는 사이지만 아직은 달달하게 분위기를 잡기보단 이렇게 격없이 실없는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발길질과 매운 손을 주고받는 게 더 익숙한 나이다. 하물며 상대가 나이도 비슷한 남자라면. 하지만 태섭은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고 대만은 그 장난 아래에 깔려 있는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대만이 먼저 테이블에 앉았다. 태섭이 봉투에서 전리품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심심치 않은 리액션도 추가해주었다. 그런데 진짜 이거 우리 둘이 다 먹을 수 있냐?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을 보고 한마디 하자 태섭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기해봐요? 그들은 언제나 내기가 익숙했다. 라멘 더 빨리 먹은 쪽한테 아이스크림 사주기, 이거 뽑아주면 한 달 동안 형님이라고 부르기. 그 내기는 대체로 예상하지 못한 우스꽝스러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였다.

내기 이야기를 하니 대만의 눈이 또 반짝인다. 하여튼 재밌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지. 태섭은 대만의 저 도파민중독자 같은 성정은 그의 나이가 50이 될 때까지 고치지 못할 거라는 데에 제가 오늘 타고 온 루크의 지프 차를 걸 수 있었다. 태섭이 산처럼 쌓인 음식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다 먹으면 형이 내 소원 들어주기.」

「소원이 먼지 들어보고.」

「그걸 미리 말하면 재미 없지 않나?」

「판돈이 얼마인지 먼저 확인하고 걸어야지, 새꺄.」

「오케이, 그럼 이거 다 먹으면 하루종일 노팬티로 다니기.」

「헐, 송태섭 완전 변태.」

「아니 형이 더 변태거든요? 아까 전에도 난 더 하면 허리 아플 거라고 했는데 형이,」

「쓰읍, 말 하지 마라.」

「더 하고 싶다고, 더 깊이 넣어달라고,」

「하지 말라고 했다.」

대만이 침대에서 떨어져 굴러다니던 베개를 주워 던졌다. 에임이 아주 형편없었다. 눈 감고 베개를 피한 태섭이 몸을 내밀어 티셔츠 위로 얼핏 보이는 가슴팍을 꼬집었다. 아 씨 아프다고! 대만이 대번에 엄살을 부렸다. 덕분에 또 식사를 건너뛸 뻔했다. 야 해도 먹고 하자고 했다.

쌓아놓았을 땐 산처럼 보였는데, 막상 먹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둘 다 먹성 좋은 운동부 남학생인 탓이었다. 대만은 음식에 쉽게 물리는 편이었지만 이것저것 주워먹는 건 괜찮은 편이었고 태섭은 빅맥 5인분 정도야 거뜬히 먹어치울 수 있는 무던한 식성의 소유자였다. 텅 빈 봉투와 그릇을 허망하게 쳐다보던 중 태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 이제 하루종일 노팬티….」

「한 번만 더 말해라,」

「아 왜요 해준다며!」

「아 내가 언제!」

대만이 울컥하며 몸을 일으켰다. 태섭은 그저 시뻘개진 대만을 보며 웃을 뿐이었다.

 

 


 

저녁 여섯 시가 되어서야 그들은 느지막하게 거리로 나왔다. 한여름의 애리조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불지옥이 된다. 돌아다니기엔 아직 더운 시간대였으나 여덟 시면 다운타운의 가게 8할이 문을 닫는다는 말에 대만이 그럼 지금 산책을 나가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다. 태섭은 대만의 왼쪽에 딱 붙어 걸으며 물었다.

「아라랑 어머니는 요즘 어때요?」

「둘이라면 걱정 마. 잘 지내. 아라는 이번 기말고사에서 전교 10등에 들었다더라.」

「그래요, 아라라도 공부머리가 있어서 다행이네.」

「너네 어머니도 아닌 척하면서 너 미국 간 거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셔. 열심히 하라고.」

「…네.」

태섭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한 번도 어머니가 편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대만은 저보다도 송가네 어머니와 친한 듯이 굴었다. 아주 곧 있으면 송가네 첫쩨 자리까지 아무렇지 않게 가져갈 사내다. 더 희한한 것은 그게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라는 아주 대만 오빠가 우리 오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농구의 고장 아니랄까 세 블록마다 농구 코트가 하나씩 있었다. 더 신기한 건 코트마다 사람이 빼곡했다는 점이다. 대만은 스트릿 농구를 하는 아이나 사람들을 볼 때마다 눈을 반짝였다. 아, 쟤는 슛이 조금 아깝네. 쟤는 덩치가 살벌하네, 무슨 강백호냐. 쟤는 어디에서 농구를 배우고 있나 본데. 아 나도 하고 싶다. 근질거리는 몸을 참지 못하고 계속 코트를 기웃대니 태섭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웃었다.

「한 판 고?」

「어?」

「농구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태섭이 고갯짓으로 코트를 가리켰다. 마침 한쪽이 비어 있었다. 반대쪽에서는 2 대 2 농구가 한창이었다. 태섭이 그 무리를 쳐다보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저기 끼어서 3 대 3 해도 되고. 대신 내기 하나 해요.」

「넌 내기 질리지도 않냐, 뭐 걸건데?」

얼굴을 찡그리면서 내빼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하고 싶었나 보네. 태섭은 익살맞게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대만은 별 의심없이 순하게 고개를 숙였다. 태섭이 귀에 속삭인 것을 듣고는 대만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태섭은 장난이 성공한아이처럼 큭큭 웃다가 등짝을 얻어맞았다. 뭐 별거라고 그렇게 화를 내요, 라고 말했다가 또 맞았다. 이게 미국에 와서 발랑 까졌어. 대만은 씩씩대면서도 코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저게 내기만 이상한 걸로 안 걸었어도 그냥 하는데. 한참 고민하던 대만이 말했다.

「그냥 지는 사람한테 아이스크림 쏘는 건 어떠냐.」

「그럼 저는 포도맛이요.」

마침 2 대 2를 하던 팀이 그들을 발견하고 불렀다. 주근깨가 가득한 애가 hey, 라고 그들을 부르더니 농구공을 몇 번 튕겼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고, 누구보다 농구와 가까이 살아온 두 사람은 그 시그널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태섭이 빨간 곱슬머리 쪽에, 대만은 주근깨 쪽에 붙었다. 같은 팀이었으면 했지만 처음으로 다른 팀이 되니 막상 궁금하기도 했다. 얼마나 성장했을까. 대학에 가서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들은 가볍게 몸을 풀며 상대를 살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무게는 사뭇 달랐다. 대만은 찍어누를 타이밍을 노리는 늑대 같았고, 태섭은 급소를 노리는 날썐 코요테에 가까웠다.

공이 위로 떠올랐다. 대만의 팀이 먼저 공을 가져갔다. 태섭이 자리를 잡으면서 대만을 보며 웃었다. 대만도 지지 않고 승부욕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결과적으로 대만의 팀이 2점 차이로 이겼다. 중학생 때부터 생각했는데, 실내와 재질이 다른 야외 코트에서도 대만의 3점(길거리 농구니까 2점이지만)은 빛을 발했다. 고등학생일 때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생이 되니 더 괴물같아졌다. 무슨 기복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태섭이야 최선을 다해서 아쉽지 않았지만 틴에이저들은 분한지 계속 씩씩댔다. 주장이었던 짬을 십분 발휘해 애들을 진정시킨 태섭은 칭찬을 듣느라 바쁜 대만을 잽싸게 빼냈다. 대만이 티셔츠 자락으로 이마를 닦고는 시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야, 나는 오렌지맛으로.」

「네에, 네에.」

태섭은 네 명에게도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그들은 시우너하게 손을 흔들며 코트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사이 좋게 포도맛과 오렌지맛 하드 바를 물고 애리조나 거리를 산책했다. 아직 밤도 아닌데 희한하리만치 돌아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사람이 너무 없어서 이상한데, 대만이 중얼거리자 태섭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서울은 열한 시에도 사람이 돌아다니잖아요.」

「그러니까. 대체 미국 사람은 밤에 뭐 한 대? 밖에서 놀 게 하나도 없는데. 집에 틀어박혀서 티비 보거나 게임만 하나?」

「뭐 그것도 하고, 가족들이랑 얘기도 하겠죠? 책을 읽는 사람도 있을 거고….」

「오, 난 그래서 얘네가 밤일에 미쳤나 생각했는데.」

「아 돌았어요?!」

태섭이 기겁하며 팔뚝을 쩍 소리나게 때렸다. 야 우리도 방금 그 짓 하다가 나온 거거든, 침대에서는 구렁이마냥 능글맞은 놈이 내려오기만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볼만 붉히며 씩씩대는 게 마냥 귀엽기만 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연하를 만나려고 하는구나. 대만은 태섭에게 연신 맞으면서도 웃기만 했다.

「아, 그런데 태섭아.」

「왜요.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고.」

태섭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아니 내가 항상 이상한 말만 하는 것도 아니고. 대만이 억울해하며 입술을 죽 내밀었다가 말했다.

「나 네 기숙사 방 궁금해졌어.」

태섭이 바로 이마를 감싸쥐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 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태섭이 고개를 들고 노려보자 대만이 억울해하며 선수를 쳤다.

「아니 뭐 궁금할 수도 있지! 몰래 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누가 기숙사 규칙 때문에 그렇대요?」

「아…, 혹시 룸메 눈치 보여서 그러냐?

「걔 어제 여친 만나러 간다고 나갔어요.」

「뭐야 그럼 별로 문제 없는 거 아냐?」

「없긴 왜 없어요! 내가 좀…. 곤란해서 그렇다고요!」

곤란? 곤란할 게 뭐가 있지. 설마 나한테 숨기는 거 있나. 대만이 입을 다물고 머리를 빠르게 굴리는 눈치를 보이자 태섭은 괜히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 형이 또 이상한 상상으로 빠지기 전에 수습을 해야 한다. 태섭이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아니, 다른 게 아니고.」

「너 설마 기숙사 안 치우고 사냐? 나 갔는데 돼지우리고 그런 건 아니지?」

「아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아무래도 정대만이라는 사람은 송태섭을 열받게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임이 분명했다. 대체 어떻게 이리 사람이 화딱지가 날 만한 말만 골라서 하지? 탯버이 씩씩대자 대만이 웃으면서 진정하라며 손을 저었다.

「알았어. 보여주기 그러면 안 보여줘도 되고.」

「그러니까 기숙사는 왜 보고 싶은데요.」

「그냥 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럼 안 되냐?」

어른스럽게 이야기하던 대만은 태섭의 물음에 돌연 성을 냈다. 아오 귀청이야. 태섭이 장난스럽게 받아쳤지만 어쩐지 기분이 뭉실뭉실했다.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정대만. 내가 사는 곳이 궁금한 정대만. 귀때기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걸음이 느려지자 대만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뭐야, 왜 또 말이 없어져…. 잠깐, 안 돼.」

「내가 뭘 할 줄 알고 안 된대.」

「아무튼 안 돼!」

대만이 질겁하면서 100m나 멀어졌다.

 


 

다음날엔 오전부터 수업이 있었다. 태섭은 호텔 방을 나오면서 주의사항을 읋어준 다음(대만이 알았다고 새끼야, 하면서 쿠션을 던질 때까지 약 100가지 정도의 주의사항을 나열했다)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태섭의 기억이 맞다면 다운타운에 사는 팀메이트는 없다. 이대로 들키지 않고 무사히 학교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낙제군단 아니랄까봐 태섭이 까먹은 사실이 있었다.

「송, 너 어제 다운타운에 있었다며?」

망할 제이크. 체육관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주장 사무엘이 뱉은 말에 태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이크랑 휠 그 자식, 찾는대로 멱살이나 잡아버릴까. 태섭이 반응을 보이자 문제아 두 놈이 동시에 고개를 내밀었다.

「헐, 야 내가 뭐랬냐. 진짜 애인 만나러 간 거라니까?」

「야 다운타운에 사는 치어리더 누구 있는지 조사 한 번 돌려라.」

「아니야 어쩌면 우리 학교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다 꺼져라.」

1시간 만에 정대만이 그리워졌다. 이 형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룸서비스 시켜먹고 외출 준비 하려나. 태섭은 대만이 오기 전 잔뜩 써서 보낸 여행 목록과 버킷리스트를 떠올리며 다시 헤벌쭉 웃었다. 휠이 귀신 본 표정으로 태섭을 가리켰다.

「저거 보라니까. 누가 봐도 애인 생긴 사람이잖아.」

「귀신 들린 걸 수도 있지.」

「방금 귀신 들렸다 한 놈 빨리 튀어나와라.」

「잡담 그만하고 연습 준비나 해라.」

결국 사무엘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이럴 때를 보면 사무엘에게서 치수 대장의 느낌이 났다.

오전 연습은 8시에 시작해 10시에 마친다. 그 전에 수업이 있는 학생은 먼저 나간다. 태섭은 연습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샤워를 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라커룸을 나섰다. 하필이면 오늘은 10시에 첫 수업이 있는 날이다. 교수에게 사정을 설명하긴 했지만 10분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얄짤없이 지각 처리당한다. 참고로 지각 3번은 결석 1회이고, 결석 2번은 경고이며, 결석 3번부터는 재단 쪽으로 연락이 간다. 태섭의 출결 현황은 지각 2회, 어떻게든 제 시간에 맞추어 강의실로 들어가야 한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정류장에 서자마자 셔틀버스가 도착했고, 교수보다 먼저 강의실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자리에 앉아 교재를 꺼내자마자 교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니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태섭은 수업 준비를 하는 교사 몰래 핸드폰을 열었다. 대만이 사진과 함께 문자를 하나 보냈다. 멋들어진 데님 재킷을 입고 가방을 멘 사진이었다.

 

나 이제 출발~ 저녁에 보자

네, 조심히 다니세요. 문신 있는 녀석들은 웬만하면 조심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태섭은 재빠르게 답장을 보낸 다음 교수의 출석에 맞추어 고개를 들었다. 수업을 시작ㅎ나 교수님의 목소리 사이로 핸드폰 진동음이 다시 들렸다. 흘끔 고개를 내려 메시지를 확인했다가 태섭은 온몸이 빨갛게 익는 경험을 했다.

 

그럼 너도 조심해야 하나? 팔에 타투 했잖아

 

이 양반이 진짜 겁도 없이. 태섭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수업이 끝나도 할 일이 많았다. 태섭은 치즈 버거 두 개를 10분 만에 먹어치운 뒤 다시 제2학관으로 들어갔다. 열두 시 수업을 하나 더 들으면 오후 다섯 시까지 줄창 연습이 있었다. 여기는 유학생이고 고학년이고 봐주는 것이 없었다. 오로지 실력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었고, 감독의 성에 차지 않으면 주전을 꿰찰 수 없다. 더군다나 18개월 뒤에 돌아가야 하는(약 11개월이 지났으니, 이제 7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태섭에겐 기회가 더더욱 없었다. 지금까지는 주전과 벤치 멤버를 왔다갔다 했지만, 이제부터는 계속 주전 가드로 뛰면서 그럴 듯한 실적을 보여줘야 한다. 본토에서 농구를 배웠다는 것 자체가 국내 대학에겐 메리트가 되겠지만, 단순이 <갔다 왔다>만으로는 태섭 스스로가 성에 차지 않았다.

일주일 뒤엔 샌디에이고 쪽 대학 팀과 경기가 있다. 이번 경기에서 이기면 토너먼트 조 1위로 대학 리그에 진출할 수 있다. 지난 해에도 애리조나는 대학 리그에 진출했으나, 7위라는 미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태섭은 그 경기 중 절반을 벤치에서 보냈다. 그게 아쉬워서 성탄절에 잠깐 한국에 갔다 온 후부터는 더 근육을 키우고 스피드를 갈고 닦았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스스로에게 더 자랑스러워지고 싶었기에(그리고 대만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수석 코치에게 피드백을 받던 중 매니저가 태섭을 불렀다. 송, 누가 널 만나러 온 거 같은데. 태섭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곤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제이크와 휠이 지나가는 태섭을 흘긋 보고는 휘파람을 불면서 물었다.

「송, 여친?」

「없다니까.」

「헤이, 튕기지 말고. 얼마나 예쁜이길래 우리한테도 꽁꽁 숨기는 거야?」

음, 예쁘긴 예쁘지. 그런데 너희한테는 안 보여줄 거임. 태섭은 속으로 대꾸한 다음 매니저를 따라갔다. 체육관 밖은 여전히 밝았고, 애리조나의 푸른 하늘 아래에는 낮에 보낸 사진과 똑같은 차림을 한 대만이 태섭을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었다.

「형?」

「아어아야! 태섭아!」

대만은 뭔지 모를 감탄사를 뱉어내곤 태섭에게 달려갔다. 태섭은 대만을 가만히 안고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린 다음 물었다.

「여긴 웬일이래요.」

「웬일이긴. 너 연습하는 거 보려고 왔지.」

「기특하네, 정대만. 구경은 잘 했어요?」

「엉. 재밌었는데 너 없어서 심심했어.」

아마 정대만은 혼자서 잘 돌아다녔을 것이다. 남들이 가만히 못 두는 사람이라서 그렇지, 독립적인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자신이 없어 심심했다고 대답하는 대만이 새삼스럽게 사랑스러워 태섭은 있는 힘껏 대만을 끌어안았다.

「야 나 숨막혀.」

「미안해요. 저 오늘 여섯 시에 끝나거든요? 이따 같이 레스토랑이라도 갈까요?」

「좋아. 그런데 나 여기에 맛집 뭐 있는지 하나도 모르는데. 넌?」

「사실 몰라요. 들어가서 사무엘한테 물어봐야 해요.」

「나 비싼 거 아니면 안 넘어간다?」

「형이 좀 쏴라. 나 돈 없는데.」

태섭의 뻔뻔한 말에 대만은 터지듯이 웃었다. 그래, 여기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좀 더 호강시켜줘야지. 대만이 태섭의 볼에 제 뺨을 대고 부비며 물었다.

「내일 주말이니까 시간 내라. 같이 사막 보러 가자.」

「당연하죠, 형이 가자는데.」

짧은 대화를 마치고 태섭은 체육관으로 돌아갔다. 남은 30분 동안 지방을 태울 기세로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사무엘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송, 잠깐 보자.」

「네? 아, 맞아. 사무엘, 혹시 이 주변이나 다운타운에 괜찮은 레스토랑 알아요?」

이 녀석 진짜 애인이 있었군. 사무엘은 조용히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심각하게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사무엘은 못 알아본 척 대답했다.

「음, 78 스트리트 쪽에 괜찮은 이탈리안이 있지. 바질 페스토와 프로슈토를 추천한다. 술을 좋아하면 와인도 있고.」

「아, 고마워요. 마지 하겠습니다.」

「아니, 그냥 너는 지금 나가라. 주장 권한이다.」

사무엘이 선심 쓰듯이 말하자 태섭은 어쩔 줄 몰라했다. 태섭은 곧 쑥쓰러운 얼굴로 <감사합니다>하고는 바로 라커로 뛰어갔다. 제이크와 휠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진짜 사귀는 듯.」

「부러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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