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망초의 기억
태섭대만
중태대 합작으로 참가했습니다
19살 대만이가 15살 시절로 회귀합니다
눈을 떴을 땐 내 방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방>은 아니었다.
당황스러움에 몸을 일으켰다. 시야 끄트머리에 걸린 내 발이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발을 한참 꼼지락거려 봤다. 확실히 훨 작았다. 이 정도면 적어도 중학교 1학년 아니면 2학년 때인데. 중학교 3학년 때부터 280 사이즈 신발을 신었으니 그건 확실하다. 이번에는 손을 보았다. 이것 역시 너무 작았다. 농구공을 쥔다면 공 표면의 3분의 1 정도는 남을 것이다. 자세히 보니 손바닥도 굳은살이 덜 박혀 말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침대도 좀, 아니 아주 많이 작다. 송태섭이 이 침대에 누우면 딱 맞을 것 같은데. 그 생각을 하니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나 역시 중학교 2학년 땐 168 센치미터였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금방 바닥이 발바닥에 닿았다. 설마, 진짜로 중 2학년 때로 돌아갔다고? 반신반의하며 방을 둘러본다. 익숙하지만 지금의 내 방과는 사뭇 다른 풍경. 문가에 걸린 거울은 기억과 똑같다. 천천히 걸어가 전신거울 앞에 서 보았다가, 나지막히 한숨을 흘렸다. 예상대로였다.
중학교 2학년 때로 돌아갔다. 몸이 아니라, 시간이.
물망초의 기억
타임워프.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는 현상. SF나 판타지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이다. 그러나 픽션 속 타임워프는 몸과 정신이 함께 과거로 쇽 이동하는 부류였지, 정신만 과거로 날아가 어린 몸에 깃드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심지어 나는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 그냥 평소대로 야간 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하루아침에 중학교 2학년 시절로 돌아와 있었다.
일단 과거로 왔다는 것은 확인했으니,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보통의 라임리프 장르의 경우, 과거에 큰 사건이 하나 있었고, 그것을 막거나 일어나도록 유도해야 원래 시간을 돌아갈 수 있다. 그 논리대로라면 나 역시 이 무렵 중요한 사건을 겪었다는 것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없다. 굳이 하나 꼽자면 여름 지역 예선이 끝나고 내가 주장이 되었다는 것 정도? 아니면 그때 헤어 스타일을 바꾼 것? 하지만 책상에 놓인 달력엔 7월 면이 펼쳐져 있었다. 주장이 된 건 8월 5일 이후이고 헤어 스타일에 변화를 준 것은 9월이므로, 시간이 맞지 않는다.
아니면 우리 학교를 인터미들 예선으로 보내야 돌아갈 수 있는 건가. 하지만 그 추리는 거실로 내려오자마자 깨졌다. 우리 집 거실 벽에는 날짜와 시간을 같이 표시해주는 디지털 시계가 걸려 있었다. 시계를 보니 ‘7월 31일 오전 8시 30분’이라는 글자가 반짝였다. 지역 예선은 진작에 끝나고, 인터미들 예선까지 하루 남은 날. 그러니 전국대회 진출도 조건이 될 수 없다. 멍하니 시계만 보고 있으니 아침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가 어머, 하고 중얼거리며 말했다.
「대만이, 잠 덜 깼니? 빨리 세수하고 앉아라. 점심에 주영이랑 같이 놀기로 했다며.」
그랬던가. 그런 약속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품과 함께 대꾸하며 일단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끼얹은 다음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 티에, 하얀 줄무늬가 들어간 검은 반바지. 고등학생과 비교해 하찮을 만큼 작은 옷을 보니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와, 중학생 때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작아 보이지. 일단 옷을 주워 입고 테이블에 앉자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계란프라이, 땅콩버터 잼과 우유 한 잔이 놓여졌다. 왜 딸기잼이 아니라 땅꽁버터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으니 문득 이 무렵 TV 프로그램에서 땅콩버터를 보고 환장해서 사 달라고 졸랐던 것이 기억났다. 막상 한 입 먹자 내 취향이 아니라서 조용히 냉장고 한 구석에 박아놓아 한 달 뒤 곰팡이가 잔뜩 핀 모습으로 발견된 것도.
조심스럽게 땅콩버터를 덜어 토스트에 펴 발랐다. 계란 노른자를 포크로 툭 건드려 보니 탱글한 것이 반숙인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완숙 계란을 더 어려워했다. 덕분에 반숙 계란을 먹는 것엔 도가 텄지만 그래도 내 취향은 이때나 지금이나 완숙이다. 물론 그걸로 투정부린 적은 없지만. 햄과 프라이를 차곡차곡 토스트 위에 쌓아 반으로 접어 입안에 넣는다. 역시 땅콩버터의 밋밋한 단맛은 입에 맞지 않았다. 미국 놈들은 이걸 대체 어떻게 맛있게 먹는 건지. 떨떠름한 얼굴로 토스트를 씹고 있으니 어머니가 물었다. 히사시, 입맛이 없어? 나는 바로 고개를 젓고 토스트 하나를 다 심켰다.
폭풍 같은 양치질을 끝내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저녁 먹기 저넹는 들어올게요, 불확실한 약속을 남기고 현관문을 열었다. 내가 중학생 때까지 살았던 집은 2층 양옥집이었다. 지어진 지 50년이 넘었다는 이 집은 할아버지가 물려준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오래 된 집이라 시설이 낡아 아버지께서 재건축을 고민하던 주택이었다. 결국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재건축에 들어갔고, 그 사이 우리는 신축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방에 앉아 있으면 도시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멋스러운 곳이었지만, 내 마음의 고향은 지금도 내가 나고 자란 이 2층 양옥집이었다.
주말이지만 도로변은 한산했다. 원래 이 주변은 볼 거리나 놀 거리가 없어 휴일이 되면 다들 시내로 나가 마을이 텅 비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걸었다. 점심 약속이었으니, 약속장소에 도착하더라도 15분은 남을 것이다. 3초 정도 고민 끝에 오른쪽 길로 꺾었다. 이 길로 쭉 가다보면 야외 농구 코트장이 하나 있다. 3대3을 하는 애들이 있을 수 있으니, 사람 모자르면 끼워달라고 해볼까. 어차피 이쪽으로도 약속 장소까지 갈 수 있으니까. 농구할 생각을 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참에 3점 연습 해봐야지. 어린 몸이 들떠 하는 말이 들렸다. 맞다, 이 때 즈음 본격적으로 코치님께 3점슛을 배웠지. 코치님께서 내 슛이 제일 정확하다고 칭찬했던 게 새록새록 기억난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빨리 애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덥지도 않은지 다들 아침부터 야외 코트장에 모여 농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다섯 명이서 한쪽 골대를 차지하고 3대3 경기를 하고 있었다. 숫자가 맞지 않는 탓에 인원이 적은 쪽이 계속 지고 있었다. 저기에 끼워달라고 할까, 철조망 너머로 코트를 보다가 반대쪽에서 홀로 드리블하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애들과 달리 몸집이 왜소하고 키도 작은 게 초등학교 5학년은 되었겠다 싶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그 애는 왼손에 찬 아대도 검정색이었다. 작은 손으로 공을 튕기는 폼이 예사가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눈대중으로 농구를 배운 아이가 아닌 건 틀림없었다. 저건 학교나 클럽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농구를 배운, 특히 드리블을 열심히 파고 들어간 미니바스 선수의 공놀림이었다. 저 정도 실력이라면 몸싸움에선 밀리더라도 돌파는 잘 하겠네. 몸이 잡으니 순간가속도 잘 내서 스피드도 훌륭할 테고. 송태섭이 초등학생일 때 저런 드리블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속으로 누구 씨를 떠올렸다. 아마 지금쯤 이놈의 선배는 연습 날 늦잠을 자냐고 씩씩대며 집으로 오고 있지 않을까. 일어나지 않는 날 보고 충격에 빠지면 안 될 텐데.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애한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 저기에선 저렇게 턴을 도느 것보다는 직접 치고 나가는 편이 나을 텐데. 몸집은 작지만 스피드랑 탄력성은 좋으니 시도해볼 법도 한데. 어느 새 3대3을 하던 아이들이 그 외톨이를 흘끗대고 있었다. 쟤한테 같이 하자고 할까? 말 걸기 무섭게 생겼는데. 그 말대로 그 애는 단단한 벽을 세우고 있었다. 아무도 다가오지 마. 요란하게 드리블을 하면서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독불장군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농구는 팀 스포츠라서 혼자 게임을 끌고 가는 데 한계가 있단 말이지. 홀린 것처럼 농구 코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타이밍 좋게 그 애가 공을 놓쳤다. 데굴 굴러온 공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허리를 바짝 숙여 공을 튕긴 다음 떠오른 공을 들었다. 그 애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진다. 한 번 해볼까? 자세를 잡고 허공에 몸을 띄웠다. 몸이 고점에 다다르고, 멀리 포물선을 그리듯 공을 밀어 림을 향해 쏜다. 예상만큼 뜨거나 힘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스핀은 잘 먹었다. 덕분에 공은 림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떨어졌다. 오, 의외로 간단하게 들어갔네? 결코 빗나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성공하면 신나고 즐거운 게 슛이다.
아래로 떨어진 공을 주워 다시 그 애한테 던져주었다. 소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을 받았다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손을 앞으로 쭉 뻗어 패스해달라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물어봤다.
「초등학생?」
아이는 입술만 비죽이더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패스해주었다. 오른쪽 발을 뒤로 빼 라인 밖으로 나가 다시 슛을 쏘아 올린다. 두 번, 세 번. 들어갈 때마다 그물만 스치며 떨어진다. 돌아보니 그애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거 기분 좋은 건가? 저거 보통 송태섭이 기분은 좋지만 인정하긴 싫을 때 짓는 표정인데. 좀 더 확실한 반응이 보고 싶어 다가가자 흠칫대면서 몸을 물린다. 농구공을 양손으로 꽉 잡고 있는 게 장난감을 뺏기고 싶지 않은 강아지 같기도 하다. 그럴수록 더 놀리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인데. 방심한 틈을 타 아래에서 위로 공을 쳐올렸다. 공이 붕 떠올랐으나 그애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잽싸게 낚아챘다. 대체 뭘 할 거냐고 묻듯 삐딱하게 쳐다본다. 농구하는 사람 둘이 있을 때 일어날 일이야 하나밖에 없지.
자세를 낮추어 디펜스하듯 손을 쭉 내민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기민하게 알아채고 드리블을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원온원이 시작됐다. 뚫으려는 사람과 막으려는 사람이 치열하게 발을 바꾸며 틈을 찾았다. 탱, 탱탱. 공이 튕기는 소리가 날카롭고 무겁다. 그 애는 몇 번이나 공을 옮기며 돌파하려고 하지만 내가 압박을 하면 맥없이 튕겨나갔다. 조금만 더 힘을 주어 날 밀어내면 못 이기는 척 비켜줄 생각이었는데. 내가 다 아쉬워서 한마디 했다.
「드리블만으로는 날 뚫을 수 없어! 압박을 해야지!」
갑자기 공이 그애 손을 벗어나 제멋대로 반대쪽으로 굴러갔다. 펜스 밑까지 공이 흘러갔으나 그애도, 나도 주워오지 않았다. 갑자기 태엽이 풀려버린 인형처럼 그애는 갑자기 멈추어버렸다. 정확히는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 발언이나 플레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들여다 보려 해도 앞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는다. 허리에 손을 짚고 그애한테 말했다.
「벌써 포기하는 거야? 혼자 하기엔 아까운 실력이잖아.」
「대만아~.」
자전거가 끽, 브레이크를 누르며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늘 만나기로 했던 주영이다. 뒤에는 성훈이가 탄 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맞다, 나 쟤네랑 만나서 놀기로 했었지. 빠르게 현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주영과 성훈이 말한다. 이제 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애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금 더 하고 싶었는데, 분위기를 보니 저애는 다시 하고 싶은 의욕이 아예jqtdj 보였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손을 흔들며 잘 있으란 말 대신 다른 인사를 건넨다.
「다음엔 날 이겨 봐!」
물론 날 이기기란 쉽지 않겠지만. 어깨를 으쓱이면서 코트장을 나선다. 시끄러워,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 것도 같았다.
「이봐요, 아저씨. 해가 중천이거든요?」
기분 나쁘게 볼을 쿡쿡 찌르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으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눈을 뜨자 송태섭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가까워서 되려 흐릿하게 보일 지경이다. 이 자식은 날 골로 보낼 생각인가, 놀라서 심장마비가 올 뻔했다. 잠시만, 얘가 왜 우리 집에 있지. 무슨 일 있었…, 맞다 연습!
급히 상체를 일으키자 송태섭이 잽싸게 몸을 뒤로 뺐다. 몇 시냐고 물어보니 말없이 협탁에 놓인 알람시게를 가리켰다. 오전 열 시 삼십 분. 약속 시간을 삼십 분이나 넘긴 시각이었다. 으아, 한탄 섞인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대신 점심 다 내가 살게.」
「됐거든요. 대체 밤에 뭘 했길래 열 시가 되도록 잤어요? 설마 아직도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건 아니죠?」
「아 걔네랑은 완전히 정리했다니까.」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방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가는 날 눈으로 좇으며 태섭이 물었다.
「아니면 뭐…. 나쁜 꿈이라도 꿨어요?」
「꿈?」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고개를 갸우뚱해 보지만, 기억나는 게 없었다. 뭔가, 꿈 비스무리한 걸 꾼 것 같긴 한데. 흐릿한 것을 보니 개꿈일 것이다. 고개를 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니. 안 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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