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숨봇 매짧글 해시태그 15~21
21.10.28 게시글.
15. #잠든_뒤에도_춤을_추겠어
최초의 발레리나 안드로이드 「페타」는 솔직히 뛰어난 발레 실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런데도「페타」의 이름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는 까닭은 이러하다. 어느 싸늘한 초겨울날, 무대에서 무대로 이송되던 도중 페타는 반 안드로이드 세력의 습격을 받았다. 습격 과정은 페타와 함께 동승하여 SNS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던 매니저의 휴대폰으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페타의 라이브 방송을 챙겨볼 정도로 그를 아끼고 사랑하던 이들은 무자비한 파괴음 사이로 페타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었다.
"난 멈추지 않아. 잠든 뒤에도 춤을 추겠어!"
혹자는 그것이 페타에게 자아와 영혼이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말했고, 혹자는 SNS 라이브 방송을 의식한 안드로이드의 철저한 계산이었다고 말했다. 어찌되었건 페타의 유언은 널리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발레를 생각하며 스러진 안드로이드를 추모했다. 그의 음성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변환한 상품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모든 존재를 향한 응원』이라는 슬로건 아래 팔려나갔다.
그야말로, 페타는 죽어서도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16. #말도_수저_모양도_다른_곳
아무튼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기반으로 상상할 수 밖에 없으니까 말야. 아무리 말이 다른 곳을 상상해도 결국 특정한 신체를 이용해 언어를 전달하는건 변하지 않았고, 수저 모양이 다른 곳을 떠올려도 손으로 잡고 움직이는 것만은 변하지 않았어. 변하지 않는다기 보다 그 이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는게 옳으려나. 그러니까 여기에 오고나서는 정말로 놀랐어. 내가 생각하는 언어의 정의와 도구의 용도가 완전히 다르니까 말야. 그치만 혐오스럽지는 않아. 응.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 나를 염려해서 이곳으로 데리고 와준 너를.
17. #재난문자도_오지_않는
재난 문자가 왔을 때 사람들을 그것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렸습니다. 근 일 년간 이어진 재난문자의 행렬에 신경이 무뎌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재난문자도 오지 않는 어느 화요일 오후에 너덜너덜한 컨테이너 박스에 숨어든 나는 차라리 재난 문자가 와주기를 바라며 조금 울었습니다. 깨지고 피가 스민 액정에 엉망진창인 내 얼굴이 비쳤습니다.
18. #어느_날_악마가_내게_키스했습니다
로맨틱한 상황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마음이 끌리지도 않는데도 억지로 누군가를 만나고 웃고 이야기해야하는 상황이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다른 사람이 연애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듣고, 들은 이야기를 적당히 편집해서 들려주고, 들려주던 것을 글자로 옮겨적다보니 작가가 되어버렸다. 데뷔작은 『어느 날 악마가 내게 키스했습니다』. 뻔하디 뻔한 이야기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클래식하게 받아들여 준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름의 유명세도 얻었다. 돈도 제법 벌었다. 그리고 나를 데뷔시켜준 웹소설 플랫폼과 인터뷰를 하던 날, 이런 질문을 들었다.
"데뷔작은 어떻게 구상하신 건가요?"
나는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실화 바탕이에요."
19. #여름이다_싶더니만
어쩐지 여름이다 싶더니만 베란다에 내놓은 화분에 나팔꽃이 주렁주렁 자라있었다. 요 며칠 일이 너무 바빠서 신경도 쓰지 못했는데 식물이란 정말 부지런하다. 간만에 맞이한 주말 오후, 서비스 하는 마음으로 나팔꽃 화분에 물을 붓자 물방울을 맞은 잎사귀와 꽃잎들이 흔들렸다. 많이 먹고 쭉쭉 자라서 세상 구경이나 하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난간 자리에 화분을 두었다. 아직은 그리 무덥지 않은 초여름이었다.
20. #비로소_사람이_되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익힌 골렘이 있었다. 그를 만든 연금술사는 고명하고 지혜로워 많은 이들이 제자로 삼아주기를 간청하는 자였다. 그런 연금술사가 자식처럼 여기는 골렘을 두고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을 했다. 어차피 흙덩어리. 어차피 인간의 피조물. 어차피 사람보다 못한 존재.
어느 날 골렘은 자신의 창조주에게 물었다.
"제가 사람이 될 방법은 없는 건가요?"
"너는 그 자체로 유일한 존재인데 아직도 부족하느냐?"
"사람들은 저를 빚어진 흙덩어리라고 조롱합니다."
연금술사는 조금 말이 없다가, 천천히 골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귀한 명예나 보물,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너 자신의 마음 가짐이란다."
그러자 골렘은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21. #나는_이를_우상으로_삼았다
우리 집 근처에는 공원이 있다. 내가 어릴 적 부터 있던 공원이다. 유치원 때도 초등학교 때에도 툭하면 그곳으로 소풍을 가서, 맨날 거기서만 도시락을 먹는다고 성질을 냈던 기억이 있다. 다만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아무래도 동네 공원으로 소풍을 가는 일은 없어졌고, 나도 그 공원에 딱히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딱히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수능시험에서 최악의 성적을 내고 공원으로 비척비척 찾아온 것은 어릴 적의 향수나 추억을 좇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머리를 텅 비우고 싶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도 그렇게 있었을 것 같은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너무 세차게 앉아버리는 바람에 엉덩이가 아팠지만 방금 본 내 예상등급을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 큰 감정을 맞이하면 제대로 반응 할 수 없다는데 지금 내 꼴이 딱 그 상태였다. 그대로 무릎에 팔꿈치를 얹은 채 멍하니 땅을 바라본다. 파릇한 잔디 사이로 클로버가 딱 둘 자라나 있었다.
하나는 세잎. 다른 하나는 네잎이다.
나는 멍하니 손을 뻗어 그 두 줄기를 뜯었다. 클로버 줄기는 얇고 연약해서 아주 약간의 힘으로도 쉽게 뜯어졌다. 행여 미쳐버린 머리가 환상을 보는건 아닌가 싶었는데 세잎은 여전히 세잎이었고 네잎은 여전히 네잎이었다. 나는 그 클로버들을 바라보다 가까스로 생각해냈다. 세잎 클로버의 뜻은 행복. 네잎 클로버의 뜻은 행운.
언제라도 인생에 필요한 것들이 역대 최하위 성적을 찍은 날 눈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우연같지 않았다. 지금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 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아무튼 클로버를 소중히 여겨서 손해볼 일은 없을 듯하여, 나는 이를 우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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