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글숨봇 매짧글 해시태그 08~14

21.08.05 게시글

01 #최고로_자랑거리야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나에게「넌 정말 최고로 자랑거리야」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 말을 들으면 응어리진 마음이 풀어지고 자신감이 샘솟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은 우리 집을 부러워했다. 어느 집도 우리 모녀처럼 서로를 굳게 믿고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나는 그걸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어머니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신 다음, 유품을 정리하다 책장 사이에서 나온 낡은 메뉴얼을 발견할 때 까지는.

「해당 모델에게는 구문암호를 설정가능합니다. 구문암호를 설정하면 모델은 자신의 자아, 의지와 상관없이 발화자의 동기를 수신하여 그에 알맞게 행동합니다. 암호는 한 문장 정도의 칭찬 표현을 권장합니다.」

그 아래에 붉은 펜으로 「넌 정말 최고로 자랑거리야.」라는 메모가 남아있다.

나는 무엇을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었다.

02 #굳이_둘로_구분하지_않았다 

심사위원들은 수아와 류아의 존재를 굳이 둘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두 존재가 하나로 합일하며 나타나는 아름다운 화학반응」,「인류의 기존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등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기존 예술계의 딱딱한 인식과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표식이기도 했다. 수아와 류아는 누구보다 환한 미소로 우승 트로피를 받아들었다. 식이 끝난 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수아가 고함을 지르며 어떻게 내 클론 따위가 나랑 똑같은 평가를 받느냐고 류아에게 손찌검을 한 사실은 기사화되지 않았다.

03 #여권을_만들었다 

여권을 만들었다. 노란 표지의 여권은 이 빌어먹을 나라를 떠나 신세계로 떠나게 해줄 한 쌍의 날개와도 같았다. 물론 나도 안다. 내가 신세계라 부른 그 나라에 가더라도 내 신세가 기적처럼 바뀌지는 않을 거란걸. 그렇지만 여자라고 해서 제대로 봐주지도 않고 평가절하하기에만 바쁜 이 따위 나라에서 계속 발붙이고 살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나는 내 권리를 최소한 생각해주는 척이라도 하는 나라로 가고싶다. 나는 항공권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04 #갈비뼈_안쪽을_가득_채운다 

심장과 폐, 근육을 배치하고 물렁물렁 무너지기 전에 재빨리 갈비뼈를 설치하면 붉은 덩어리들이 갈비뼈 안쪽을 가득 채운다. 이 장면은 정말이지 몇 번을 봐도 장관이었다. 시체소생술사이자 신체부분리재생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명서는 이마에 맺힌 땀을 조수 스켈레톤의 도움으로 닦아내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하체를 조립하고 재생시키는 과정이 성공한다면 명서는 학계 최초로 「살에 피가 도는」소생을 성공한 자가 된다. 그는 다시 한 번 양 손가락을 풀고는 조립을 시작했다.

05 #녹색_성 

 

네 성姓은 녹색이구나.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어서 나는 그 아이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참고로 내 성은 노랑이야.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황黃씨였으니까. 하지만 내 성은 녹색 상징이라곤 쥐털만큼도 없는 물결 란瀾이었다. 그걸 얘기해주자 상대가 웃었다. 네 물결은 깨끗한 에메랄드 그린인걸. 내 눈에는 보여. 맑은 파도소리까지도. 이상한 아이구나 싶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06 #반짝반짝_빛나는 

너희들의 모든 미래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과 같단다. 진로진학 프로그램 때문에 강당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은 키득거렸고 이따금은 소근거리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요지는 간단하고 명료해서 이해하는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역시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 강당 안에는 저를 왕따시키고 깔깔 웃었던 아이들도 있었거든요. 그런 아이들의 미래가 빛나면 안되는 거 아닌가요? 좀 더 응당한 댓가를, 이를 테면 진흙탕에 처박히는 정도의 댓가는 치뤄야 하지 않나요? 물론 저는 분별력이 있으므로 손을 들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생님은 제가 왕따당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선생님이었으니까요. 그게 제가 처음으로 겪은 사회의 기만이었습니다.

07 #유효기간은_끝났습니다 

이제 결혼 유효기간은 끝났습니다. 집을 찾아온 감사원은 아버지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원에게 시원한 음료 한 잔을 권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했지만, 이내 자세를 조금 편안하게 풀고 저희를 마주했습니다. 그동안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본부에서도 선생님들의 노력을 인정하여 소소한 보상을 해드릴 예정입니다. 어머니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몇 번이고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야 그렇죠. 우리는 이 결혼의 유효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는걸요. 고장나고 버그에 걸려 도저히 처치곤란이었던 그 미치광이 남자.

저희 회사엔 다른 상품들도 존재하니 천천히 둘러보세요. 감사원은 그렇게 말하곤 카탈로그를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그걸 면밀히 살펴보다가 가장 안락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고양이와 강아지」상품을 골랐습니다. 적어도 그 남자보다야 말은 잘 듣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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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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