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숨봇 매짧글 해시태그 01~07
21.08.02 게시글.
01. #그를_깨끗이_씻겼다
난 살아있을 자격이 없어. 그렇게 말하며 웅크려 앉은 모습은 발아를 기다리는 씨앗 같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 다정한 말을 기다리는 것일까. 동거하는 사이라면 이런 때에 그런 말 정도는 하는게 이치에 맞는걸까.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을 했다. 그를 깨끗이 씻겼다. 거품을 내고 얼룩을 빼고 따뜻한 물로 씻기고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한결 뽀송해진 그를 침대에 누이자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잘 자. 내일 또 만나자.
02. #멋진_이야기입니까
어느 쪽인가 하면, 내가 자아내는 이야기는 형편없는 쪽에 속한다. 세간에 존재하는 감동적인 이야기, 약간의 사이다 썰, 있을 법한 사고방식들을 조각보 엮듯이 엮어서 그럴 듯한 기승전결로 띄워놓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쓴 글에서 삶에 대한 희망이나 진정한 사랑이나 타인을 향한 마지막 믿음 같은 것이 있다며 멋지게 평가해준다. 그럼 나는 그 평가에 몸 둘 바도 모르고 쩔쩔매다가 사실은 그렇노라고 비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이제 또 새로운 질문이 들어온다. 멋진 이야기입니까. 나는 조금 생각하는 척 침묵하다가 입을 연다. 읽어서 확인해주세요.
03. #가진_것_하나_없는데
집이 침수됐다. 친구는 돈을 빌리고선 도망갔다. 연인은 이제 지긋지긋하다며 이별을 통보했다. 통장의 잔고는 눈 씻고 다시 봐도 다섯 자리를 넘지 못했다. 아르바이처의 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끼던 책들은 물에 불어 곤죽이 되어버렸다. 한달에 걸친 이 모든 일들은 마치 세상이 내게 건네는 블랙 조크 같았다. 안 그래도 가진 것 하나 없는데. 그래도 침수된 집에 있을 수는 없어 밖으로 나와 어둑한 공원에 멍하니 앉아있자니 저 멀리서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고양이는 날 보고 애웅, 울더니 발치에 몸을 말고 앉았다. 발목이 간지럽다. 나는 헤실헤실 웃었다.
04. #네가_사람을_죽이고_올지라도
네가 사람을 죽이고 올지라도 놀라지 않을거라고 했던 말 기억해? 그건 내 진심이었어. 네 가족은, 그러니까, 같은 호적에 올라가 있을 뿐인 그 인간들은 정말로 말종 쓰레기였으니까. 설령 네가 그들을 죽인데도 난 상관없었어. 아니, 오히려 같이 죽이자고 했으면 기꺼이 거들었을 거야…. 그런데도 넌 그러지 않았지. 그게 얼마나 강인한 마음이 필요한 일인지 난 알아. 그러니 분명히 말할게. 넌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어른이야.
05. #상상의_동물
어릴 때는 유니콘이나 페가수스를 실제로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좀 나이가 들고 나서야 그게 상상의 동물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어.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른 생각이 들어. 진짜 상상의 동물이란건 나를 늘 믿고 지지해주는 부모라던가,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을 들어주는 남편이라던가, 언제 어느 때고 미소를 잃지 않는 자식들 같은 거라는걸. 왜 그게 당연히 존재하리라 생각한걸까?
06. #파도만큼_넘실대는
파도만큼 넘실댄다는건 그게 실제로 파도는 아니라는 말이지. 나는 일부러 이성적인 말을 주워섬기며 생각을 흩트리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외면한 마음은 더 큰 파도를 일으키며 되돌아와 머리를 마비시켰다. 쏟아지는 목소리에 뇌가 정지한다. 이미 익숙해질 정도로 익숙해진 명제가 날카롭게 빛났다. 「대체 왜 아득바득 살아야 해」답은 찾을 수 없다. 찾을 수 없는 걸로 정해져있다. 나는 도망치기 위해서 핸드폰을 들었다.
07. #흠이_될지도_모르겠어요
"흠이 될 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왜 흠이 되는데요?" 마주앉은 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다. D는 그 표정을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가 당신같은 사람들 한 두명 만나는 줄 알아요? 그런 식으로 자기 행동을 감추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하지만 D는 숙련된 코디네이터였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고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뚜렷한 성과가 없으시잖아요. 성과가 없는 경과는 큰 인상을 주지 못해요. 마주앉은 이는 콧등을 찡그린다. D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희쪽 프로그램을 이수하시고 공모전에 지원하시고 좋은 결과를 얻으시면 이 경과도 경력으로 인정받으실 수 있을거에요. 어떠세요?" 상대방이 의중을 견주려는 듯 가만히 바라본다. D는 방긋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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