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색 맞추기에 연연하는 모습

이주 10년차, 3월 14일

Winterlog by 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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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재미있다고 리멀이 굳이 청강까지 하는 것인지 후엘은 쉽사리 이해하지는 못했다. 리멀이 항법 때문에 접한 천문학을 어느 순간부터 꽤나 좋아하게 됐다고 했을 때 후엘은 그래, 그런 사람도 있지, 싶어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작년 십일월부터는 매달 나가던 그예네스 대학교 출강 일정에 거의 매번 리멀이 따라붙게 되고, 이젠 강의실 뒤쪽 한켠에 자리잡는 일까지 생기자 후엘은 의아했다. 이 정도라고? 그러나 의아함의 이면에는 후엘이 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던 어떤 감정이 있었다. 강의는 핑계고 그냥 나 보러 오는 거 아니겠냐는, 안정한 사랑이 주는 느슨한 오만.

후엘의 강의가 끝나자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은 참이었다. 제법 널따란 반원형 강당에서 진행하는 공개강의는 천문학 전공생과 교양 삼아 수강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외부 사람들도 원하면 들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강연 비슷한 것이었다. 덕분에 수강자의 신분은 대학생에 국한되지 않았고, 개중에는 학자들도 있었다. 학자들은 또 학계와 거리를 두고 변방에서 길드 마스터나 하고 있는 후엘을 ‘얼마나 하나 보자’ 하며 방만하게 관찰하는 부류와, 바쁜 와중에도 강의의 완성도를 유지하는 노하우를 배우려 존중의 눈으로 바라보는 부류로 나뉘었다. 어떻게 보면 강의실의 모습을 한 심판대에 가깝기도 한, 그런 곳에 달마다 제 발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음에도 후엘은 그냥 학교에 짱박혀 지내는 전임교수들처럼 편하게 굴었다. 어쩌면 브로델 출신의 학자가 끼어 있을지도 모르는 청중석을 향해 후엘이 휘두르는 날선 안일함은 일종의 과시였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내가 한 달에 한 번 오는 것이니 하고 싶은 말이나 전해주고 싶은 내용이 많아서 시간이 조금 지체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 전임교수님들처럼 과제를 내준다거나 하지는 않으니 자네들이 좀 너른 마음으로 양해는 좀 해 달라, 그런 식으로 강의를 마무리한 후엘은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강단 여기저기를 정리했다. 리멀은 학생들과 다른 학자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후엘 쪽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강의 자료가 쓰인 양피지 뭉치를 정리하던 후엘이 제 천가방에 눈을 둔 채 웃으며 물었다.

“강의 재밌니?”

“재미도 재미지만……”

리멀이 말끝을 흐리자 후엘은 리멀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왜 끝까지 얘기를 하지 않냐며 보채는 기색은 아니었고 단지 궁금해하는 눈짓이었는데, 리멀은 그런 후엘의 사소하고 나른한 반응들을 즐기듯이 검지로 몇 번 입술을 문지르다 말을 이었다.

“후엘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즐겁네요.”

“이런 모습…….”

후엘은 말없이 양피지 뭉치를 커다란 천가방 안에 넣었다. 왼쪽 어깨로 둘러메고 잠깐 창문 바깥쪽을 건너다 본 후엘이 대뜸 손을 뻗어 강단 아래에 있던 리멀의 앞머리를 약하게 헝클어뜨렸다.

“이런 모습이 아니라 원래 모습이라고 해 줄래?”

“앗…….”

 

 

*

 

 

저녁 때까지는 얼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삼월이지만 북국의, 그것도 윈터타이드가 아닌 곳의 공기는 사무치게 추웠다. 얇은 옷 여러 겹을 껴입은 후엘은 가장 겉에 왕립학회 동계 복장을 입었다. 십여 년 전에 내쫓기고 지금은 개인 연구자로서 독립연구자협회 부협회장까지 하고 있으면서 아직 왕립학회 옷을 버리지도 않고 입는 것이 미련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후엘은 자신의 복장 문제를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후엘을 맞이하는 다른 학자들도 굳이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그냥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길거리로 나선 후엘은 코 먹는 소리를 한 번 내었다가 뒤따라오는 리멀을 휙 돌아보았다.

“나는 저기…… 여기 지역구 길드 좀 들러서 얘기 좀 하고 올 거거든.”

“아, 네.”

리멀의 대답은 흔쾌했다. 그런 선선한 네,에는 아주 함축된 존중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닌가, 후엘은 생각했다. 그리고 믿음도.

“여섯…… 아니지, 뭐 그렇게 길게 얘기할 것도 아니니까 한 다섯 시 반……? 그때 저기 광장에 시계탑 있잖니, 거기서 볼까?”

“네, 좋아요.”

그러고 나서 리멀은 좀 희게 웃었는데, 후엘은 문득 자신이 그 웃음을 자연스럽게, 어떠한 의문도 없이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북방의 거대한 호수와 강 두 개를 낀 브로델과 달리 그예네스 주위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여러 개 이어지며 강 쪽으로 흘렀다. 도시는 그런 지점들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물은 곧 번영의 상징이었고, 세계를 뒤덮은 인공 한파의 위세가 지속되는 동안은 사치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잡은 분수는 그 정점이었다. 정상 작동하는 분수 앞에서 후엘은 잠깐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섰다. 지난달 강의하러 왔을 때만 해도 이거 작동 안 했는데, 후엘은 생각했다. 이상하네. 그렇게까지 도시 사정이 괜찮아졌나. 그러다 후엘은 문득 조금 전 리멀과 떨어졌던 쪽을 바라보았는데, 리멀은 이미 어디론가 가 있었다. 그러자 후엘은 기분이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쁠 건 또 뭐가 있었겠냐만은 버릇처럼 또 혼자 생각하다가 벌어진 것이었다. 쟤가 여기 뭐 다른 일이 있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나랑 같이 달마다 휴가 겸 데이트 겸 해서 오는 것인데 그럼에도 나는 온 시간을 쟤한테 쏟기엔 일도 있고 둘러볼 곳도 있고 그렇다고 리멀을 굳이 모든 자리에 대동해서 가기는 곤란하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혼자 떼어 놓고 움직이는 모양새가 되어 버리니까 그럼 내가 쟤한테 너무 소홀히 구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는데, 혼자 알아서 잘 다닌다면 이 상황에서는 나름 괜찮지 않은가.

중앙광장 한구석에는 그예네스 동부 모험가 길드가 있었다. 얼마 전 마스터가 바뀐 길드였다. 원래 있던 길드 마스터는 늑대 웨어 족의 늙은 남자였는데, 일 년쯤 전부터 후엘이 길드에 방문하면 적당한 후배 마스터를 찾아 물려주고 싶다는 말을 줄곧 해왔다. 이제 건강을 보전하고 여생을 한적하게 살고 싶다고. 그러면 후엘은 아직 정정하시고 저랑 덩치도 비슷하신데 조금만 더 하시죠, 하려다가도 왠지 그 의중을 알 것 같아서 만류를 꾹 삼켰고 대신 사모님은 잘 계시는가요, 같은 의례적인 안부를 묻곤 했다. 모집 공고와 더불어 시 의회와 수 차례에 걸친 협의 끝에 지난 1월 드디어 후배를 구했다는 소식을 듣자, 후엘은 축하와 함께 지금까지의 그 수고로움을 치사하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그 자리에는 리멀도 어색하게 껴 있었다. 마스터가 그대는 원래 직업이 뭐요,라고 묻자 리멀은 세무청 관리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답했고 이야— 하는 감탄이 짧게 나오더니 이번엔 후엘을 향해 어떻게 만났수 자네도 나이가 있는데, 묻고는 킬킬 웃었다. 아이 다 만나는 수가 있지요 선생님, 타지에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까 동문이더라고, 동문. 동향 사람하고는 또 다른 저거, 다른 정감이 있잖애,라고 넉살 좋게 술을 따르는 후엘을 보고 리멀은 자리가 파한 뒤에야 전 후엘 그런 모습도 애인 되고서는 처음 본 것 같아요,라며 재미있어했다.

길드에 들어선 후엘은 주인의 존재감 같은 것을 서서히 체감했다. 미묘하지만 두 달 전과 분위기는 달랐고 그것은 단순히 계절이 바뀌고 날이 풀리면서 발생하는 것보다 한 차원 내부의, 직접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올해 하반기부터는 길드 마스터 되려면 시험 봐야 된다면서요?” 신임 길드 마스터가 명랑하게 물었다.

모험가 관련 정책이나 체제는 돌처럼 멈춰 있는 것이 아니어서, 후엘이 길드 마스터가 되었을 때처럼 주인 없는 길드에 슥 들어가 자리를 꿰차는 극히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 길드의 주인이 되기 위한 요건은 갈수록 빡빡해졌다. 길드 마스터 시험은 그 일환이었다. 도시 주위의 생태와 마물 분포와 주요 위협 요소를 대강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실제 모험가들에게 맡길 수 있는 의뢰의 수준을 인식해야 하고, 제도상 불가하거나 과한 잠재 위험이 있는 의뢰를 사전에 걸러낼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 제도와 사회적 생활상 전반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후엘은 그 소식을 작년 하반기 독립연구자 학술회 뒤풀이에서 처음 들었다.

“그렇다더라.”

“선배님은 언제 길드 마스터 되셨다고 그랬죠?”

“나? 나 한 구…… 년, 구 년? 팔 년?”

“그러면 그때는 그거 생기기도 전이었겠네요, 예비 길드 마스터 교육 같은 거.”

“그랬지.”

새로 들어온 길드 마스터 아폰은 이백 살이 조금 안 된 엘프 족 여자였는데, 종족 간의 연령대 차이를 비례로 계산해서인지, 길드 마스터 연차로 따지면 선배라 그런 것인지 몰라도 후엘을 보면 싹싹하게 존대를 썼다. 아폰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쿠키라도 좀 드시겠냐며 접시를 들고 와 후엘 맞은편에 앉았다.

“괜찮아. 자네 먹어.”

“그럼 뭐 마실 거라도 드려요?”

“좀 이따 저녁 먹어야 돼서.”

그 뒤에 말 몇 마디가 이어졌는데, 후엘은 지난달에 잠깐 들렀을 때 인수인계다 짐 정리다 뭐다 하며 부산스럽던 길드 홀을 떠올렸다. 사람과 사람이 자리를 바꾸는 일은 항상 그렇게 번잡한 것임을 알고는 있음에도, 멀쩡히 있던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주인 없는 자리에 무혈입성하는 것이 더 익숙한 후엘에게는 그것이 왠지 생소했다.

분수의 재가동에 대한 이야기나 요즘은 주로 어떤 의뢰가 들어오는지 같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임무를 받거나 마치러 온 모험가들이 아폰을 찾았고, 아폰은 사람 맞이하는 게 일인 사람들이 짓는 고정된 미소를 지으며 데스크로 갔다. 그런 얼굴을 서너 번 보자 후엘은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혹시 막 예비 교육 때 뭐 표정 어떻게 해라, 그런 것도 정해져 있나?”

“아…… 그게 아주 막, 타이트하게 일러놓지는 않았는데요,” 아폰은 자리로 돌아오며 한쪽 턱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모험가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길드를 항상 ‘모험가들이 오고 싶어하는 곳’이나 ‘또다른 집’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일환으로 항상 따뜻한 미소로 맞이해라, 뭐 그런 지침 자체는 있다고 했고 후엘은 되게 원론적인 말을 적어 놨네, 하며 흐릿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웃고 있기만 할 거면 사람 세워 놓지 말고 어디 뭐 허수아비 갖다 놓지, 아니면 그놈의 잘난 마법 끌어다 써서 말하는 인형 같은 거 만들어 갖다 놓든가. ‘사람 짓’ 안 할 거야? 근데 그런 게 좀 중간에 만들어졌으면 기존부터 길드 마스터 하던 사람들한테도 재교육 같은 걸 좀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 진작에 듣고 좀 미리 비웃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얘네들이 나를 그, 뭐라 그러냐, 왕따 시키는 거 아니야? 그렇게까지 의구심이 들자 그것이 정말 좀 웃기다는 생각이 슉 떠올랐다.

“그러면 그거 뭐, 위반 여부 같은 거 감사는 어떻게 하나.”

후엘이 꼰 다리를 풀며 물었다. 아폰은 문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누가 오는가 살피려는 것 같았다.

“모르죠.”

“으응.”

후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쩝, 했다. 아폰이 말을 이었다.

“서부 길드 마스터님이랑도 얘기를 해봤었는데 무슨 언더커버 같은 거 하는 거 아니냐 그런 얘기도 있더라고요. 그냥 일반 모험가나 시민인 척하고 길드 들어와서,”

“막 이거저거 물어보고 시켜보고?”

“네, 아, 뭐, 그런 얘기도 있고요, 각 그 길드마다요,”

까지 말하고 아폰은 고개를 후엘 쪽에 가까이 댄 뒤 목소리를 확 죽였다.

“업무 도와주는 용도로 뭐 마법 수정구 같은 걸 배포를 해 주겠다, 그런 얘기도 있었는데 그 수정구가 업무 보조 역할이 아니라 사실 감청 역할이고 브로델이랑 그예네스에 길드 관리 뭐 중앙 통제탑? 그런 뭐가 있어서 거기서 다 감시한다 그런 얘기도 있었,”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는,

“는데 그건 무산된 것 같고요. 애초에 계획이 진짜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괴담 같기는 해요.”

“그럼?”

“뭐…… 관리 분들이 그렇게 한가하겠어요? 그냥 알아서 잘 해라, 그런 의미로 지침 내려둔 거겠죠.”

다른 게 있겠냐는 듯 여유로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여기저기로 쭉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후엘은 더 말을 얹지는 않았고 다만 좀, ‘잡지도 않을 거면 진짜 씰데없는 짓 해놨네’ 싶어 못마땅하게 팔짱을 꼈다.

젊은 모험가 몇 사람을 상대하고 돌아온 아폰이 무언가 물어볼 게 생각난 듯 후엘 앞에 다시 와 앉았다.

“근데 진짜 이 일 어떻게 익숙해지지 싶어요.”

“그건 또 무슨 얘기야.”

“아니 그러니까요, 뭐 식당이나 찻집 주인처럼 고정적인 그 메뉴가 있고 그걸 만들어 파는 그런 정확한 루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런 일은 사실 주고객층이라는 게 있잖아요, 근데 길드 마스터는 따지고 보면 모험가가 주고객층은 맞는데 모험가만 오는 것도 아니고, 일이 좀, 그래서 내가 지금 당장 뭘 해야 되지 싶을 때가 너무 많은 거예요. 사람 대하는 것도 너무 어렵고.”

“아니 그러니까,”

후엘은 잠깐 말을 멈추고 고민했다. 떠오르는 대답은 있는데 어떻게 말해야 조금 덜 꼰대 같아 보일까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네가 그 사람을 대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이 자네를 대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지. 그 지나가는 사람들보다 자네가 여기 더 오래 있을 거잖아. 뭐 말려들 필요도 없고, 뭐 안 익숙하다고 버벅거려도 죄송한 거 아니라고. 뭐 어쩔 건데. 그리고 막 안 익숙한 것도 있잖아.”

“네.”

“그냥 뭐 손님이 앞에 있든 없든 자네는 그 다음에 해야 할 거 떠오를 때까지 그냥 시간 써도 돼. 괜히 막 안 익숙해서 허둥지둥, 그거 본인한테도 엄청 독이잖아. 안 그래도 안 익숙한데 앞에 손님 있으니까 뭐 ‘죄송해요 제가 아직 안 익숙해서’ 이러면 그거 말할 생각 때문에 이 다음에 뭐 해야 되는지는 더 생각 안 나지, 그래서 차라리 그냥 아아아주 천천히 하잖아, 그러면 오히려 더 프로 같아 보인다?”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는 아폰의 얼굴에는 이렇게 쓰인 듯했다. 아, 정말 뜻깊고 도움 안 되는 팁이다……. 후엘은 그 이후로도 자신이 어떻게 길드 마스터 경력 초기의 그 미성숙한 기간을 버텨냈는지를 적극적이지만 너무 열성적이지는 않게, 두루뭉술하지만 참고할 만은 하게 설명했고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아폰의 얼굴은 다시 그 서비스맨의 미소로 변해 갔다. 머지않아 후엘은 아폰의 얼굴을 알아차렸고 곧이어 좀 미안해졌는데, “아이 그냥 뭐…… 하는 얘기야”라는 말로 머쓱하게 무마하려 하자 아폰은 아니라고, 자기 다 듣고 있었고 뭐, 말씀하시려는 바는 알겠다, 그래도 얘기해줘서 고맙다, 그런 말들로 후엘을 좀 달래 주었다. 그러다 아폰이 장난투로 “확실히 교수 맞네요”라고 히죽 웃자 후엘은 웃음이 터져서는 “지금 사람 멕이는 거야 뭐야” 했다.

“저녁 누구랑 드세요?” 아폰이 물었다. 그러자 후엘은 잠깐 좀 부산스러워졌고 지금 몇 시지, 아직 다섯시 반 아니지,를 확인하고서야 다시 평온해졌다.

“으응,” 후엘은 잠깐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남자친구랑.” 괜히 아무 특별한 것 아닌 듯 답했다.

“어오—” 아폰이 입을 모으고 놀란 소리를 아주 방금 녹인 치즈처럼 주우우욱 늘어뜨렸는데,

“왜?”

“아니에요, 아니에요,” 손사래를 치다가, 후엘의 귀 쪽에 가까이 고개를 대고서는 목소리를 죽이고,

“결혼 안 하신 줄은 몰랐거든요.” 했다.

“했어.” 후엘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고,

“아, 진짜요?” 아폰이 놀라서는 아주 미안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니, 아직. 농담이야.” 라고 후엘이 이죽거리자 아주 뿔이 나서는 후엘의 한쪽 팔을 주먹으로 푹 때렸다.

“결혼했으면 남편이라고 했겠지 남자친구라고 했겠어?”

후엘은 맞은 곳을 문지르며 선선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나가는 것이었지만 그 남편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입으로 직접 뱉은 게 좀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자 웃음이 배어나왔고 아폰은 “남자친구 보러 가시는 게 그렇게 막 웃음이 나요?”라고 물었다. 당연한 것도 당연한거니와 죄 지은 것도 아니니 후엘은 그냥 “그렇지”라고 짧게 쳐냈는데, 아폰이 접시에 남은 쿠키를 들고 데스크로 돌아가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럼 가다가 사탕 같은 거라도 좀 사 가세요. 날도 날인데.”

사탕! 아, 하긴. 그런 것쯤은 후엘도 모르지 않았다. 잠깐 까먹긴 했지만. 그런 거 다 상술이야,라며 무시하기에는 정말로 아무 것도 없이 돌아가기는 손이 허전하기도 했고, 기념일 같은 것 챙기는 건 다 구색 맞추기이지 않나 생각했던 옛날도 이제는 좀 무색하고, 그런 기념일의 의미는 당사자들이 그 날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달렸지—근데 다른 날은 안 챙겨주다가 기념일만 툭 좀 챙기는 거면 그런 것도 어떻게 보면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었으니까 후엘은 그럼 내가 평소에 다른 날들에는 잘 챙겨줬나 잠깐 뜬눈으로 반추를 해 보면서 스으으읍 하고 얕은 숨을 길게 들이쉬는 소리를 냈다. 와, 이거 죄 지은 기분인걸. 그럼 죗값을 치러야지.

“사 가야겠다, 그럼.”

경쾌한 목소리로 계획을 잡은 후엘은 강의자료가 든 짐가방을 들고 일어나 길드를 나섰다. 곧바로 분수대로 향하는 대신, 반대편에 있는 시장으로. 그런데 리멀이 정확히 무슨 맛을 좋아하더라.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늦기는 개뿔 세상에 화이트데이 로그를 10월 중순에 주는 미친 앤오가 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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