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body`s Got A Little) Dirt Road In `Em

2012년 4월 7일

Winterlog by 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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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몸 성히 살려면 관두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해.”

줄라이는 성급하게 맞장구를 치는 대신 소다 병을 쥐고 가끔 한 모금씩 홀짝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시선은 딴 곳을 보고 있었는데 로건은 그것이 딱히 부정적인 시그널은 아님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자신의 오랜 고민이 담긴 넋두리를 대충대충 그래그래, 하고 넘기는 것 같아 보였어도 화가 나거나 마음이 상하거나 서운해지거나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로건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너도 좀 자주 볼 거 아냐.”

그러자 줄라이의 광대가 쓱 솟으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자주 보고 싶어?” 줄라이가 물었고,

“응. 말이라고.”

로건은 짧으면서도 아주 부피감 있는, 너무 진짜여서 오히려 꾸며낸 것처럼도 보이는 대답을 건넸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테이블 위로 자신의 손을 스윽 내밀었다. 손이 잡고 싶으면 손 잡고 싶다고 이야기나 하면 될 것을 갖다가 로건은 이런 식으로 이상한 타이밍에 뜬금없는 행동을 해서 괜히 따라하고 싶게 만들어 놓고 줄라이가 얼결에 응? 하며 자신의 손도 내밀면 “아싸” 하며 그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곤 했다. 줄라이는 또 당했다, 하는 표정으로 로건의 두껍고 넓은 손등을 두어 번 때렸는데, 로건은 “이번엔 조금 더 오래 잡고 있을래” 하고선 가만히 있었다. 줄라이는 얘가 왜 이래, 하다가도 로건의 집중한 입매와 왠지 많은 게 고여서 말도 못 꺼내는 듯한 눈을 보고는 그 위로 자기의 남은 손을 포갰다.

*

줄라이가 로건을 데리고 온 곳은 스틸베리 시 외곽에 있는 ‘카운팅 켁스’라는 술집이었다. 주위에는 오래된 식료품점과 카센터가 있었고 도로 아스팔트는 군데군데 박살이 나 있는가 하면 어떤 다른 건물 한쪽 벽에는 재작년에 치러진 주지사 선거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붉은 스프레이로 쓰인 ‘릭 스나이더가 미시간을 박살낼 거야’라는 문장 위로 검고 커다란 가위표가 덧그려져 있었는데, 로건은 그것을 멀뚱히 보고 있다가 어쩐지 살벌한 느낌이 들어 줄라이의 양쪽 어깨 위로 손을 올리고 조용히 따라 걸었다.

내부는 제법 정돈되어 보이면서도 그 형형색색의 술병들 하며 오늘 낮에 한 야구 경기 서머리를 틀어 놓은 커다란 텔레비전 하며 한쪽에는 ‘미시간 팬들만 주차 가능’이라고 쓰인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판자와 루트 66 표지판 장식도 있는 한편 포켓볼 테이블이 구비되어 있었고 분노가 담긴 거친 필체로 ‘맛세이 절대 금지’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안내문도 있었다. 작은 보조 텔레비전 밑 그나마 널찍한 공간에는 조금 후져 보이기는 해도 밴드 라운지 비슷한 공간이 있었는데, 진짜 밴드가 와서 공연을 한다기보다는 그냥 와서 쳐 보고 싶은 사람 쳐 봐라, 와서 다른 손님들한테 즐길거리를 알아서 제공해라, 그런 느낌으로 좀 무책임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손님들 중 입구에 가까이 앉은 몇이 로건의 덩치를 신기해하면서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는가 하면 어, 그 대학 풋볼 선수다, 하는 사람도 있었다. 로건은 알아보는 사람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하는 한편, 사진을 찍어 주면서—사람들은 유명한지 아닌지와 상관 없이 좀 신기하기만 해도 사진을 찍고 싶어하곤 했으니까—한 손은 뒤로 숨겨 주먹을 쥐다 펴다 손가락끼리 비비다 말다 했다. 그러는 동안 줄라이는 한두 걸음 옆에서 로건의 안절부절못하는 손을 걱정스런 미소를 띤 채 지켜보았다.

“저기 기타 친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며 줄라이는 턱짓으로 드럼 옆에 놓인 작은 스툴에 앉은 남자를 가리켰는데, 정말 누가 기타를 치고 있었고 그 기타가 자기 것인지 가게 것인지는 몰랐지만 꽤 태가 났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에 묻혀서 그 연주의 음성이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수준급인지 아닌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 ‘기타남’은 찢청과 빨갛고 파란 체크 셔츠를 입었고, 무슨 그림인지 로고인지가 붙어 있는 트러커 모자 뒤로 적당한 길이로 길러진 곱슬머리가 구불거리며 튀어나와 있었다. 위에서 쏘는 조명을 받아 모자챙 밑으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실루엣만 봐도 딱 컨트리 가수 같은 모양새였다.

“멋있어?” 로건이 떠보듯 물었고,

“컨트리가 그렇게 내 취향은 아니어서…… 근데 우리랑 나이 엇비슷해 보이지 않아?”

줄라이가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파우치를 정리하며 말을 돌렸다. 그런가, 하며 로건은 어깨를 돌려 기타남을 다시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조금 전 로건과 줄라이를 안내한 점원이 그 기타남에게 다가가 몇 마디 하는가 싶더니, 기타남은 두 사람 쪽을 휙 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기타를 조심스럽게 내려 벽에 기대두었다. 그리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테이블을 향해 다가왔다. 엥, 그럼 손님이나 무슨 무명 가수가 아니라 점원이었어? 서버인데 뭐 호출이나 바쁜 일 없을 때는 저기 앉아서 기타 연습하고, 그런 거야? 그렇게 자유분방한 거야? 의외의 전개에 당황한 로건과 줄라이는 마주보고 웃었다. 기타남은 기둥 뒤에서 메뉴판 하나를 집어들고 와선 “헤이” 하며 반갑게 입꼬리를 올렸는데, 테이블을 한번 스윽 둘러보더니 눈썹을 한 번 추키곤 말을 이었다.

“뭐 재밌는 일 있으면 저도 같이 좀 웃죠.”

“기타 연습했던 거예요?” 줄라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아, 보셨구나. 네, 나중에 가수 하고 싶어서요.”

“멋있네요.”

고마워요, 하면서 기타남은 멋쩍은지 조그마한 웃음을 흘렸는데, 로건은 그래 다 좋아 기타 치는 것도 좋고 가수 되겠다고 하는 것도 응원하는데 아까 이쪽 보고 눈도 마주쳐 놓고 ‘아 보셨구나’ 하는 건 너무 좀, 작위적인 말 아닌가, 지금 뭐 누구한테 작업 거나, 그냥 얌전히 소개나 하고 주문이나 받고 팁이나 받아 가지 왜 사람을 견제하게 만드나 싶어 언짢아졌다. 로건은 부러 조금 티 나게 헛기침을 하고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대 앉았다. 그리고는 기타남의 용모를 평점이라도 매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몰래 흘겨보았다. 목선까지 내려오는 어두운 금발에, 순해 보이지만 묵직한 콧대를 필두로 제법 짙은 인상이 잡혀 있었고, 퍼런 동공에는 총기가 서려 있었으며, 턱수염은 덥수룩하지 않게 적당히 짧은 길이로 다듬어져 있었고, 콧수염도 멋지게 있었다. 젠장, 훤하게 잘생겼네. 키도 훤칠하고. 좆됐다. 아니? 좆되긴 뭐가? 난 줄라이 남자친구고 키도 얘보다 훨씬 크고 잘생긴 건 몰라도 사람 환한 걸로 따지면 뒤지지 않는데. 그러나 아무렴 이런 팽팽 돌아가는 머리는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법이었고 로건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중을 두어 번 문질렀다. 기타남이 등 뒤로 들고 있던 메뉴판을 슥 내려놓았다.

“저는 케이시고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편하게 부르세요.”

그때 로비 반대편에서 “케이시!” 하고 부르는 손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자신을 케이시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이제 더이상 둘의 머릿속에서도 그냥 기타남,이 아니게 된 케이시는 다시금 웃어보이며 “죄송합니다. 다른 손님이 부르셔서 잠시 다녀 올게요. 그 동안에 천천히 음료 살펴 보고 계세요” 한 뒤 밝은 잰걸음으로 멀어졌다. 줄라이는 재밌다는 듯이 목을 쭉 빼고 로건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왜?”

줄라이가 대뜸 물었다.

“아니야.”

일단 부정.

“내가 컨트리 취향 아니라고 해 놓고 저 남자한테 너무 막 관심 있는 것처럼 물어봐서 삐졌구나.”

줄라이가 예상했다는 듯 히죽 웃자, 로건은 자존심 상한 척 입술을 한 번 삐죽 내밀었다.

“아니야!”

“아니기는. 근데 진짜 잘생기기는 했다. 이 동네에서 잘생긴 애 찾기 힘든데. 내가 이 집 마지막으로 온 게 한 두 달인가 세 달 전인데 그때는 저 서버 없었거든. 파트타임 하는 것 같은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대. 난 진저에일 소다 먹어야지. 넌 마운틴듀?”

로건은 술은 나중에 시키지 뭐, 하는 마음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줄라이의 말을 괜히 또 곱씹어 보느라 마음이 바빠서 음료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줄라이의 말은 남자친구 유무와 관계 없이 그냥 사람 얼굴 보는 게 어떤 재미이고 콘텐츠이고 변화를 감지하는 수단인, 그런 평범한 말이어서 괜히 콕콕 찌르는 구석이 있었는데, 오히려 줄라이는 그것을, 그러니까 다른 남자의 잘생긴 얼굴 이야기를 남자친구인 로건 앞에서 대놓고 한다는 방식으로 묘한 안심을 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묘한 것이었다. 네가 내 남자친구라는 부동의—일단 지금으로서는—포지션이니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위기감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하는.

“근데 원래 여기 사람 아닌 것 같애. 그지?”

그러다 문득 줄라이는 그렇게 물어 왔는데, 로건은 어떤 점이,라고 되물으려다 어렵지 않게 여러 증거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조금 전 잠깐 짧은 이야기를 나눌 때 전해졌던 평평한 억양이나, 공부하고 기타만 쳤다기엔 좀 굳은살이나 잔흠집이 많아 억세 보이는 손, 그리고 전체적으로 봐도 왠지 풍기는 웨스턴의 아우라—고정관념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줄라이가 덧붙였다.

“너 처음 봤을 때 느낌이랑……”

“비슷해?”

“응, 약간 비슷했어.”

“그렇다고 막 그렇게 웃어 주고 그러면 내가 쪼그라들어 안 쪼그라들어.”

“넌 쪼그라들어도 7피트일 거잖아.”

로건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쪼그라든다는 게 진짜 물리적으로 쪼그라든다는 게 아니잖아, 하니까 줄라이는 그래그래, 내 남자친구 너인 거 내가 모르니, 가끔 보면 내 남동생보다 동생 같아서는 진짜, 하며 로건을 툭툭 달랬다.

케이시가 테이블로 돌아온 것은 그 직후였는데, 정하셨어요,라고 묻기가 무섭게 그의 등 뒤로 조금 전 응대했던 손님 두 명이 지나갔다. 스포티한 룩의 젊은 여자와 단정하고 정돈되어 보이는 남자 커플—부부일지도—이었는데, 그냥 서버인데도 그새 이름을 텄는지 케이시는 아주 친근하게 스펜서, 러스티, 하고 이름을 부르며 작별 인사를 했다. 로건은 그건 아무렴 상관이 없었고 이제 진짜 이 남자가 서부 출신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데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케이시가 쓰고 있던 노란 챙의 모자였다.

“카우보이즈 팬이에요?”

로건이 물었다. 짙은 갈색 크라운 한가운데 그려진 샛노란 카우보이 로고. 와이오밍 대학교의 풋볼 팀인 와이오밍 카우보이즈의 것이었다. 케이시는 모자 챙을 매만졌다.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이었다.

“아, 네. 제 홈 팀이어서요.”

홈 팀! 그러면 정말 와이오밍 출신이라는 뜻이구나. 세상에, 이런 데에서 와이오밍 출신이라는 사람을 다 보네. 진짜 사람이 살긴 사는구나. 그러면 완전 티 내면서 다니는 거였네, 원래 고향이 좀 먼 데 있거나 시골 출신인 사람들은 타지로 나와서 자기 홈타운에 대한 애정을 막 드러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나도 지금 당장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지 만약에 여기 살았으면 로키스 모자 쓰고 콜로라도 주기 그려져 있는 티셔츠 입고 우리 학교 재킷 입고 다닐 것 같기는 해—로건이 그런 식으로 할 말을 고르는 와중에 줄라이가 선수를 쳤다.

“제 남자친구도 대학 풋볼 선순데.”

그러자 케이시는 놀란 듯이 그제야 로건의 얼굴을 좀 주의 깊게 보았는데, 몇 초 지나지 않아 케이시는 오, 하고 테이블 옆에 거의 쭈그려앉다시피 했다. 그리고는 주변 테이블들을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는 것이었다.

“로건 스프링스틴! 콜로라도 버팔로스. 맞죠?”

로건은 그런 알아봄의 과정이 제법 조심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퍽 마음에 들어서, 조금 전의 견제나 경쟁심 같은 것은 애초에 없던 듯이 마주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케이시는 바로 근처에 있는 팀이니까 버팔로스 경기도 가끔 좀 본다고 자신이 알아본 까닭을 덧붙였다. 짧은 대화가 몇 마디 이어졌고 케이시는 음료와 음식 주문을 한 번에 받아 돌아갔다가 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자리가 무르익으면서 로건은 묵혀 둔 고민을 꺼내기 시작했고 중간에 줄라이는 맥주, 로건은 시나몬 위스키를 시키면서 이야기의 농도는 더 짙어졌다. 너 내일 세 시간 비행기 타고 돌아가야 되는데 괜찮냐,고 줄라이가 물었고 로건은 아무렴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가장 큰 토픽은 로건이 선수를 그만두면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솔직히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데 내가 그 필드에 있는 것 자체가 어느 순간부터 좀 불편하다, 경기는 여전히 재밌는데 주위에서 이런저런 안 좋은 소리 듣고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이 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운동선수니까 부상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는데 그게 순수하게 경기를 뛰거나 훈련을 하면서 발생했다기보다는 너무 좀, 그놈의 NFL이 뭐라고 나중에 대학 선수 졸업하면 바로 지명 받고 싶은 거 알겠는데 나 유리몸인 거 알고 자꾸 견제하려고 달려드니까 좀 그런 과정 때문에 운동에 흥미 잃는 게 싫다, 로건이 그런 식으로 주절거리며 하소연을 하니까 줄라이도 달리 위로 말고는 할 말이 없어져서 으응,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다치는 거야 뭐 이거 말고도 할 일 많으니까 오케이, 근데 운동 외적의 것 때문에 운동이 싫어지는 게 싫다고. 그런 게 지금 자기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그러니까 나는 계획이 잡혀 있지 않더라도 일단 벗어나야 한다고.

그러다 보니까 열한 시가 넘었고 아무리 내일이 일요일이라도 좀, 싶은 사람들이 자리를 뜨자 술집은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는 대신 술통 그 자체처럼 어떤 분위기의 무게를 더해 갔고 본연의 색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로건과 줄라이 말고도 그저 자신만의 템포로 술을 홀짝이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손님의 대부분이 되었고 어떻게 보면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었다고 해도 적당해 보였다. 사람들이 서버를 부르는 빈도가 잦아들자 주방에서도 주문들을 해치우느라 펼쳐 놓았던 것들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고 점원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도 공기에 끼어드는 한편 한참 멎어 있던 기타 소리도 다시 흘렀다.

케이시가 연주하는 노래들은 루크 브라이언이나 케니 체스니, 피어스 베넷, 토비 키스 같은 남자 컨트리 가수들의 히트곡들이었는데, 노래가 끝날 때마다 근처에 앉은 다른 점원이나 구석에 앉은 손님 몇몇이 넉살 좋게 박수를 쳤다. 로건은 되게 라운지 바 아니면 공연 온 것 같아,라며 의자에 조금 늘어졌다.

“여기서 갑자기 서버 불러 가지고 흐름 끊으면 개 웃기겠는데.” 줄라이가 히죽거렸고,

“아이, 하지 마 그런 거. 너 그냥 쟤 얼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로건이 딱 잘랐다. 그러자 줄라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는데, 늘어지고 흐느적거리는 몸짓에다 목소리도 아주 흐리멍텅한데 갑자기 얼굴만 팍 진지해져서는 안돼, 하는 것이 너무 웃겨서 그랬어, 하고 남은 맥주를 털어 마셨다.

*

기타남, 그러니까 케이시를 다시 만난 것은 새벽 한시 반쯤이었다. 로건과 줄라이는 술이 좀 들어 알딸딸하기도 했고 침대 위에서 서로의 어떤 크고 작은 차이들을 체감하며 붙어서 뒹굴고 시간을 죽일 기분까지는 왠지 나지 않아서, 줄라이의 아파트 방에서 간단하게 조금 더 마신 뒤 아파트 앞 놀이터에 나와서 밤바람이나 맞으며 앉아 있었다. 줄라이는 잠옷 위로 로건의 외투를 두른 채였다. 동네가 흉흉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아파트에서 멀리 벗어나서 산책을 한다든가, 그런 것은 감히 하지도 못할 일이었으니까 집에서 십 초 정도 거리에 앉아 그냥 숨이나 쉬고 가끔 손을 잡고 조금 더 가끔 입이나 맞춰 보고 그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그러다가 한 번은 순찰 중이던 경찰이 놀이터 앞 버스정류장에 차를 세우더니 두 명인가가 내려서 플래시를 들이밀고 한 번 신분증 검사를 하는 바람에 기분을 좀 잡쳤다. 집이 어디세요, 바로 여긴데요, 왜 안 들어가고 계세요, 제 맘이잖아요, 술을 조금 먹었는데 그냥 바람이나 좀 쐬면서 술 깨려고 나와 있었습니다, 왜 사람을, 그러면서 짧은 실랑이가 오갔고 결국 소지품 검사까지 얼추 하고 나서야 경찰은 두 사람을 놓아 주었다.

“니네 삼촌 여기 경찰이라지 않았어?”

줄라이가 신경이 좀 돋아 있는 투로 물었고, 로건은 왠지 떨떠름해져서 잠깐 뜸을 들였다.

“랜싱으로 옮겨 갔댔어, 작년 말인가에.”

우리가 무슨 마약 운반책이라도 되는 줄 알아, 시발새끼들 무죄 추정이고 뭐고 없어 하는 짓거리 보면, 우리가 좀 더 격하게 반항했으면 혐의고 뭐고 경찰 무시하냐 위협하냐 이러면서 수갑 채워서 데리고 갔을걸 저 개새끼들, 하는 줄라이의 양 어깨를 로건이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너무 그러지 마, 하는 뜻으로 어떤 진정의 의미를 담아 안는 것이었는데 로건이 그렇게 살짝만 안아도 보통 사람들은 정말 뭘 할 수 자체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진정보다는 진압에 가까운 것이 되기도 했다.

“헤이.”

그때 놀이터 모퉁이 뒤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의 긴장이 가시기도 전에 인기척이 나자 줄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든 것 같았다. 로건이 뭐지, 싶어서는 “내가 볼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세, 아!”

체크 셔츠와 찢청을 입고, 가죽 앵클 부츠를 신고, 등에 기타를 멨고 카우보이즈 모자를 손에 든 채 헐렁하게 걸어오며 손을 흔드는 남자는 누가 봐도 아까 봤던 그 서버—케이시였다. 로건은 반갑다기보다는 아니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그리고 그냥 지나가는 손님들 중 하나였는데 어떻게 알아봤지, 하며 약간 소름이 돋아서 왠지 미심쩍게 “케이시?” 하고 불렀다. 그러자 줄라이도 안심했는지 어깨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로건, 또 보네요. 아, 여자친구 분도.”

케이시는 로건의 이름을 부르면서는 왠지 좀 힘을 빼고 길게 늘였는데, 로건은 그것이 좀 기운이 없고 무방비한, 이 동네의 이 시간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지금 자신과는 너무 딴판인 것이어서 헛웃음을 흘리고는 “그러네요” 할 뿐이었다.

“어떻게 알아봤어요?” 로건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알아봐요?” 케이시는 그 자리에 멈추더니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가 기타만 치는 줄 알았나 본데 저 그쪽 테이블 서버였거든요. 계속 보고 있던 등인데 어떻게 몰라요.”

가로등 두 개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케이시는 로건 옆에 잠자코 있던 줄라이에게도 “헤이” 하고 좀 비실한 인사를 건넸다. 줄라이도 “줄라이예요” 하며 이름을 알려주었다.

“여기 살아요?” 로건이 물었는데, 묻자마자 로건은 왠지 케이시의 대답을 기다리기보다는 줄라이의 반응 같은 것들을 살피려 자꾸 아래쪽을 흘끔거렸다.

“여기는 여자친구 집이에요. 주말에 일하는 데가 여기여서 주말에만 들러요. 원래 사는 데는 하월이고요.”

아, 그러니까 여자친구도 있으시다, 오케이, 알겠어. 그렇게까지 대답을 듣고 나자 로건은 완전히 경계와 견제를 풀었다.

“얘기 중인 것 같은데 거기 껴도 돼요?”

케이시는 제법 쿨하게 물어 왔는데, 밤늦게 퇴근한 사람이 당연히 그렇듯 좀 흐늘해져 있는 모습이었어도 왠지 그 제안의 기저에 깔려 있을 반가움 같은 것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그건 구정물처럼 뒤집어 쓴 피로를 비집고 나오는 것이었다. 로건은 아니 여자친구 집이라면서 그냥 얌전히 들어가지 굳이 왜…… 싶었지만 줄라이가 먼저 “그래요” 하는 통에 아무 저항도 못한 채 엉겁결에 “에……”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줄라이가 로건의 옷자락을 한 번 잡아당기며 소곤거렸다.

“내가 오케이 하는 게 낫잖아.”

로건은 그게 무슨 뜻이지, 잠깐 생각하다가 금방 납득했다. 케이시는 기타를 한 번 고쳐 메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숙취해소 음료를 꺼내 쭉 들이키며 걸어왔다. 뭘까 저 인간은. 캐릭터가 좀 신기하네. 다시 자리에 앉은 로건이 어느새 벤치 옆에 선 케이시에게 물었다.

“여자친구 기다릴 텐데 안 들어가도 돼요?”

“걔 학교 도서관에 있대요. 공부한다고.”

“그쪽은요?”

신발코로 잔디를 가볍게 차던 케이시가 픽 웃었다.

“저도 대학생 같아 보여요?”

“어, 아니에요?”

“대학 안 갔어요. 이 얘기 하면 진짜 레드넥 같아 보일 텐데 목장 일 했어요, 대학 안 가고.”

“와, 아니 뭐 레드, 렏…… 뭐 시골 살고 목장 일 한다고 다 레드넥인가요.”

그러자 케이시는 그 대답이 맘에 든다고 와하- 웃었다. 케이시는 그쪽은 어디서 왔냐부터 시작해 로건의 비시즌기 선수 생활과 줄라이의 전공 이야기를 물었고 나이는 몇이냐, 키는 얼마냐, 취미는 있냐, 동물 좋아하냐, 뭐 하고 노냐, 와이오밍 와 본 적 있냐, 학교랑 운동 병행하려면 힘들겠다, 그런 것들을 느긋한 박자와 그 특유의 평평한 어조로 물어 왔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로건과 줄라이의 대답을 아주 부드럽게 흡수했다. 신문물 이야기나 전래동화를 듣는 것처럼 흥미로워했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담담했고 참을성 있게 자신이 말할 차례를 기다렸는데, 시골 사람이라고 도시 이야기를 신기해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다른 사람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줄라이가 그쪽 얘기도 좀 해 줘요,라고 마침내 청하자 케이시는 입맛을 다시며 “아…… 어디서부터 얘기할까요” 하고 운을 뗐다.

동네 이야기, 목장 이야기, 어릴 때부터 아버지 친구에게서 장제를 배웠다는 이야기, 로데오 대회에 나갔던 이야기 같은 것들을 노래하듯이 풀어 놓는 케이시의 얼굴에는 피곤함이나 졸음이 바삭하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동시에 어떤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열다섯 살 때 어떤 가수가 뮤직비디오를 찍으러 왔는데 얘기가 잘 되어서 거기 단역으로 출연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는 유튜브로 그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틀어 주었는데, 거기서도 케이시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키가 조금 더 작고 수염이 안 난 아역배우 같은—모습으로 방 한구석에서 기타를 치거나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때 출연료는 받았냐고 줄라이가 물었고 다 어머니 아버지가 먹었지 뭘 어째요, 하고 케이시가 너털웃음을 했다. 그리고 케이시는 대학 안 가다가 작년에 와이오밍 출신 컨트리 가수가 히트를 쳐서 거기에 자극을 받아서 자기도 그 가수네 회사 있는 이쪽으로 오기는 했다, 근데 아무 연고도 없는 데로 혼자 오니까 외롭긴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로건은 그제야 케이시가 고향이 근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살갑게 굴었던 것이 이해가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게 막 밖으로 좀 돌아다니고 사람 만나서 떠들어야 직성 풀리는 성격 같아 보이는데 친구 없는 곳 오면 진짜 외롭긴 하겠구나, 하고.

“여자친구라도 생겨서 다행이네요 그럼.”

줄라이가 위로인지 판단인지 모를 말을 건네자 케이시는 조그맣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하고.

이야기가 잦아들자 로건이 먼저 휴대폰을 조심스럽게 꺼내들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였다.

“아…… 제가 내일 덴버 가는 비행기 타야 돼가지고요. 이제 슬슬 들어가죠.” 로건이 괜히 조금 추운 척 양팔을 쓸었다.

“아, 그러면요.”

케이시가 말을 멈추고 다시 휴대폰을 꺼내더니, 다이얼 화면을 띄워 로건에게 건넸다.

“지금 이렇게 얘기 나누고 한 거 나중에 노래 소재로 쓸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 그러게 되면 연락 드릴 테니까 번호 찍어 주세요. 저도 바로 걸게요.”

“이걸 가사로 쓴다고요 그러니까?” 줄라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진심이냐고 묻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진짜로 가수가 될 거고, 노래를 써서 부를 거고, 그 노래들 중에 우리와 지금 십몇 분 이십몇 분 얘기 나눈 걸 소재로 삼은 노래가 나올 수도 있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건가, 하긴 그렇게 우여곡절 썰을 풀었는데 진짜가 아니면 뭐겠어.

“네, 컨트리잖아요. 혹시 모르죠.”

로건은 그 편안한 대답에 감화되었는지 냉큼 휴대폰을 받아들고 자기 번호를 찍어 돌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건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그쳤다. 다음은 줄라이였고, 줄라이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그쳤다.

“로건…… 스프링스틴…… 그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랑 같은 철자 맞죠?” 케이시가 묻자,

“네, 맞아요. 케이시…… 성이 뭐예요?” 로건이 되물었고,

“케이시 모건 번즈. B-U-R-N-S.” 케이시가 친절하게 일렀다.

“C-A-S-E-Y. 맞죠? K 아니죠?” 줄라이가 물었고,

“예압. C로 시작하는 케이시 맞아요. 줄라이는 그 6월 7월 8월 그 줄라이예요? 성도 알려주세요.”

“성은 ‘그린’이고요, 그 줄라이 맞아요. 친구 중에 여자 케이시가 있어서 물어봤어요. 혹시나 해서.”

“그럼 와, 줄라이 그린이네요? 이름 너무 예쁘다.” 케이시가 손뼉을 한 번 짝, 치며 감탄했다. 줄라이는 고마워요,라고 짧게 끄덕였다.

줄라이가 먼저 일어났고, 로건이 뒤따라 일어났다. 케이시는 두 사람과 두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주머니를 주섬거리다 기타를 한 번 고쳐 멨다. 케이시가 “술 다 깼죠?”라고 장난스레 물었고 로건이 “얼마 주고 취했던 건데 술값 물어낼 준비나 하세요”라며 응수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다가 얘기 즐거웠어요, 저도요, 들어가요, 잘 자요, 그런 인사들을 어지럽게 주고받으며 각자의 방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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